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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만찬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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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니겠지요?

행동이 있기 전에 생각이 먼저 있듯이 물리적인 실천이 있기 이전에 영적인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 눈 앞에 뚜렷이 존재하는 것처럼 영적인 것들 또한 분명한 현실입니다. 세상에 '균형'이 있다면 영혼에도 '균형'이 있고 오히려 세상보다 더 참된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세상에는 쓰레기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아무 짝에도 소용 없고 버려져야 하는 것들이지요. 그리고 그 쓰레기를 치우는 이가 존재합니다. 쓰레기는 가만히 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수고하여 치워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죄는 어둠이고 하느님의 빛을 가리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악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악은 다시 주변에 어둠을 흩뿌립니다. 마치 술이라는 악습에 가장이 무너지고 나면 그 가족들이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하나의 악은 주변에 크나큰 고통의 결과를 야기시킵니다. 누군가에 대해 무심코 한 험담이 파괴적인 결과를 일으키거나 별 뜻 없이 한 거짓말이 누군가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온전하던 유리컵을 바닥에 냅다 던지면 수많은 파편들로 나뉘어지고 그것을 치우느라 훨씬 더 많은 애가 쓰이는 것처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파괴적인 현실은 수많은 어둠과 실재적인 아픔을 양산해 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만들면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그 자유를 당신 뜻대로만 사용하지 않을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를 치우셔야 했습니다. 나아가 훗날에 당신이 완성할 세상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악이 더는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을 위해서는 그저 있는 악을 쓸어담는 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 일을 하는 데에는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은 악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의 악을 쓸어담는 진공 청소기 같은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하는 이

두 목숨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12,25) 우리가 영원을 살지 못하는 이상 영원한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도리는 없습니다. 영원히 살아야 그것이 증명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양자의 여정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남는 선택지는 현세의 삶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현세의 삶을 최대한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 충만의 뜻은 저마다 정하게 됩니다. 어차피 영원을 설정한 분이 없고 저마다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충만한 삶, 행복한 삶이 돈을 잔뜩 벌고 잔뜩 쓰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마다가 설정한 신념과 가치관 속에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 자체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들의 마지막 운명은 모두 '허무'로 돌아가게 됩니다. 반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분도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그분이 우리에게 길이라고 보여주시는 것을 믿고 따릅니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 개개인이 욕구하고 원하는 것과 상반될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우리에게 영원 속에서 갚아 주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생을 살아갑니다. 흔히 신앙을 가지면 마치 현세에서 도태되는 듯이 생각하지만 참된 신앙을 지닌 이는 거꾸로 가장 적극적으로 지상의 삶을 충실히 살아갑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생을 하찮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라 밀알 하나치의 생명력에 집중하지 말고 그보다 큰 뜻에 우리를 내어 맡기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실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봉헌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이치 속에서 우리의 헌신이 열매

고난을 통한 순종

많은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제 뜻대로 되는 세상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들의 기반에는 내가 욕구하는 것이 펼쳐지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들이 잔뜩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돈을 벌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기 위한 미래의 요소까지 고려해서 돈을 벌고자 합니다. 힘든 공부를 하는 것도 힘든 노동을 하는 것도 모두 나중에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이루기 위해서 현재를 투자하는 셈입니다. 특히나 현대의 한국은 개개인의 자아실현, 욕구실현이 이상이 된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 많은 것들이 개개인이 더 편하고 쉽게 느끼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 '종교'라는 것은 사실 그 근본 안에 전혀 다른 방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자'에 대한 순종이라는 가치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절대자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 너무나 싫게 됩니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가 더 늘어갈수록 힘든 가치가 됩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곧 우리의 뜻을 더욱 편하게 이루어주는 데에 도움이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에 일부러 타자의 뜻을 찾아서 고생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 가운데 우리 신앙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분은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세상을 제 뜻대로 휘두를 수 있었지만 '순종'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자진해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가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타인의 뜻에 나를 굽혀야 하는 것이 됩니다. 세상에 많은 힘든 일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힘든 일은 내가 욕구하는 것을 굽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순종이라는 가치는 고난을 통해서만 그 실제를 알아볼 수 있고 키워 나갈

가슴에 법을 새기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 31,33) 성경에서는 사람들을 칭하는 표현으로 군중과 제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군중은 그야말로 갈대와 같은 존재들이라서 바람 부는 대로 휘청거리는 존재입니다. 반면 제자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쓰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는 지금은 부족하지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여정을 따라서 걷고자 노력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신앙이 편안하다면 군중입니다. 군중은 편안함에 따라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더 쉽고 편하게 느끼는 것을 따라 살아가다보니 예수님이 치유를 할 때에는 좋다고 난리를 치다가 훗날 필요가 없어지게 되니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제 좋은 신앙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 신앙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되곤 합니다. 반면 제자는 불편함을 익숙하게 만드는 이들입니다. 학교에 처음 들어가면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 들고 다녀야 하는 책가방도 무겁고 정해진 시간을 지켜 수업을 듣는 것도 힘듭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훈련'이 되어서 나중에는 그런 힘든 일들을 익숙하게 처리합니다. 신앙은 외적인 요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규정들을 배우고 교리내용들을 익힙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국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의 질서를 새겨넣기 위한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주일에 성당에 가는 것이 싫지만 그것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하다보면 어느샌가 미사에 맛을 들이게 되고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러 가지 않으면 내 마음이 불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하느님의 법이 새겨지고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의 법이 새겨지게 되면 우리는 훌륭한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반면 겉으로는 아무리 규정을 따르고자 애쓰지만 결국 마음 속에 하느님의 법을 새기기를 실패하면 결국 우리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

눈을 멀게 하다

우리의 육체의 눈은 눈 앞에 무언가를 물리적으로 두면서 가로막히게 됩니다. 그것이 눈을 멀게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주변의 빛을 모두 꺼버려도 눈은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빛을 감각하는 기관이니 빛이 없으면 소용없는 기관이 됩니다. 영혼에도 눈이 있습니다. 영혼은 욕구를 뿜어내고 그것이 가 닿는 것을 감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선에 영향을 받을 때에는 선을 바라보게 되고 악에 영향을 받을 때에는 선에 눈이 멀어 버리게 됩니다. 순진한 아이는 엄마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엄마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엄마의 냄새와 엄마의 발자국 소리도 압니다. 하지만 아이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렇게나 좋아하던 엄마가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고 꺼려하게 됩니다. 가끔 아이들이 똥을 싸면 그 전까지 활발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무언가 얼어붙어 있는 모양새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죄를 저지른 영혼은 선에 대해서 눈멀게 되고 선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이 영혼의 눈을 막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성당을 나오지 않는다고 세속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의 귀한 시간을 미사를 나오지 않고 홀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테니 세속적으로는 더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영혼에서 발생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에서 멀어질 때에 영혼의 빛이 꺼져가게 되고 결국 어둠에 물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억지로 보는 고해 성사라도 성사 가까이 머물러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멀리할 때에 영혼은 점점 더 어둠에 물들어가게 되고 전에는 생각지 않았던 어둠의 행실들을 쉽게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영혼의 빛을 꺼뜨려서 영혼을 눈멀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재앙을 막다

 모세가 주 그의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탈출 32,11) 모세는 단순히 애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마음에 둔 것을 실행하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애원이 하느님의 재앙을 되돌리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해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의 합리적 사고로 전능함은 흔히 '완벽함' 또는 '빈틈없음'으로 이해되고 그러자면 그 어떤 흠결도 없어야 하고 복지부동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합리적 이성의 사고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비추어집니다. 그래서 흔히 무신론자들은 세상의 이런 여러가지 오류 때문에 하느님은 전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전능성과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합니다. '죽어있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더 완전한 법입니다. 그 생명력과 활기 속에서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또한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당신은 창조하는 하느님이시고 그 창조를 생생히 관장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이 완벽 그 자체이고 절대로 변함없음이라면 우리가 지금 존재해서 하느님을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 살아있음 속에서 당신의 완전을 실행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가시세계는 무에서 창조되었고 종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영원의 여정 속에서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세상에 '질서'를 세우셨고 '정의와 공정'에 따라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비'를 가지고 있고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여기서 여러가지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마치 젠가라는 놀이처럼 나무토막 몇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