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8월, 2012의 게시물 표시

영적인 눈을 뜨기

어제 저녁에 한 가족이 본당에 미사를 신청했다. 어느 망자의 9일째 되는 날, 집에서 하는 모임보다는 하느님의 제단 앞에 미사를 신청한 것이다.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왔다. 어제 복음은 "밭에 뭍힌 보물", 한 사람이 밭에 나갔다가 뭍혀있는 보물을 발견하고는 돌아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세상의 사물의 가치를 잘 압니다. 뭐가 더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구분해 냅니다. 하지만 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는 기도하기보다는 텔레비전 보기를 선호하지요. 왜냐면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져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 우리는 영적인 가치를 소홀히 합니다. 안타깝게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지지 못한 걸 내어줄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뭐든 손에 쥐고 있어야 그 쥔 걸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있지요. 예컨대 나를 꾸준히 괴롭히는 사랑을 하라는데, 그 사랑이 나에게 존재할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괴롭혀 그나마 존재하던 사랑도 고갈되어 가는데, 어찌 그 나쁜 사람을,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갈리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 사랑의 샘을 하느님에게서 찾고,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있다는 것,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걸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의 샘은 마르지 않으며, 결국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상대를 다시 사랑해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현세에 머무는 사람은 '거래'를 합니다. '네가 날 사랑하면 나도 널 사랑하마' '내가 널 사랑했으니 너도 그 사랑을 돌려줘야지.' '네가 행동을 바꾸면 그때서야 널 용서하겠다.' 이런 생각들은 현세적인 '거래'에서 비롯됩니다. 1000원을 주고 껌 한 통을 사는 것이지요.

지나친 적극성

"지나친 적극성" 지나친 적극성은 늘 경계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교회의 일 가운데 그렇게 적극적으로 열을 내어서 해야 할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우리의 희망은 '부활'에 있는 거니까. 사제로서 일을 하면서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찾아온다. 뭔가 굉장히 중요하고 급한듯이 상황을 조성해서 오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 방금도 한 부부가 찾아왔다. 어제 다른 신부님의 말로는 혼배를 하고 싶은데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거였다. 오늘 아침에 우루루 몰려와서는 '결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죠?'라고 묻는다. 그래서 상황이 어떤가를 물었다. 남자쪽이 견진도 첫영성체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분명 어제 말로는 세례도 받지 않았을텐데, 왜 그 말은 빼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세례는 받았느냐고 물으니 신부쪽은 받았는데 신랑쪽은 받지 않았다고 했다. 역시나 어제 왔다던 그 부부가 맞았다. '그럼 내년에 견진 교리 듣고나서 혼배하면 되겠군요...'라고 운을 띄우고는, 이런 성급한 혼배의 동기를 물었다. "왜 교회에서 혼인하려고 하세요? 세례도 받지 않았는데?" "외국에서 일해야 되어서 나가야 하는데, 교회혼 서류를 요구해서요." 그럴 줄 알았다. 조용히 이야기했다. "교회는 서류를 위해서 일하지 않아요. 교회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일하죠. 직장 문제로 서류가 필요하시면 행정적인 쪽으로 알아보세요. 이렇게 해서 혼배를 서둘러 거행한다고 여러분들에게 좋을 게 전혀 없어요." 그랬더니 조용히 돌아간다. 언젠가 조금이라도 영적인 것에 관심이 생길 때 돌아오리라 믿는다.

제2화 하느님을 만나려는 사람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마태오 23장 23-26절.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큰 줄기를 지닌 사람은 사소한 것에 매달리지 않는다. 마음 가득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은 그 사랑을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가슴 속에 큰 줄기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작은 것들에 이리저리 뒤흔들린다. 규칙과 법제를 들이대는 사람치고 마음 속에 큰 사랑을 품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종들이 주인의 규율을 겁내지, 친구는 다른 친구의 마음을 겁내지 않는다.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품은 사람은 '금육 규정이 어떠니', '가톨릭의 다른 규칙들이 어쩌니' 하는 등의 것들을 따지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따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느라 바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 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가? 메뉴얼 식으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여러분은 먼저 마음 속을 깨끗이 하라. (죄를 고백하여 양심을 깨끗이 하라.) 2) 악의가 자리잡지 않도록 늘 조심하라. (유혹을 피하고 어두운 일에서 멀어져라.) 3) 선의가 자리잡도록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에 신경을 쓰라. (기도, 단식, 자선 그 밖의 어떤 것이든 하느님의 마음에 들 일을 실천하라.) 4) 선의가 자리 잡았거든 하고 싶은 걸 하라. 하지만 이 메뉴얼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여러분 내면을 보고 밝은지 어두운지 분별하라. 빛이 있는 사람은 그 빛을 느끼게 되고, 그걸 드러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뭔가 꽁한 마음이 있다거나,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다거나, 복수를 하고 싶다거나, 분노, 걱정, 슬픔, 집착, 탐욕 등등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루빨리 그 어둠을 치워 버려야 한다. 어둠은 여러분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갈 것이다

약점

약점 축구든 뭐든 게임을 한다고 해보자. 여러분은 상대의 가장 허약한 약점을 찾을 것이다. 상대가 가장 자신있는 부분에 바보처럼 맞서야 할 이유는 없다. 그가 적당히 힘이 빠지길 기다렸다가 그가 가장 약해지는 때를 노려서 파고드는 게 방법이다. 이것이 악마들이 우리의 영혼을 유혹하는 방법이다. 악마들은 우리의 약점을 먼저 파악한다. 마치 낚시하는 것과 같이 떡밥을 여러개를 던지고 뭘 갖다 물어 삼키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돈일수도 있고, 이성에 대한 욕구일수도 있으며, 인기를 얻으려는 마음일수도 있고, 이런 저런 것들을 지배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고, 미모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추구일수도 있고,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관계의 집착일 수도 있고, 현명해 보이고 싶다는 마음일 수도, 또 심지어는 '거룩해지겠다'는 신자들의 마음을 이용할 수도 있다. 여러분이 가장 약한 부분, 그 부분을 건드렸을 때에 여러분이 다른 모든 것을 잊고, 거기에 매진하는 그런 부분에 악마는 늘 떡밥을 던진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이 정도는 어때?'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들이 당신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하느님에게 열심하려는 과한 욕망이 도리어 하느님에게 나를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 하루를 살면서 내가 '버럭!'하는 것에 주의하라. 그것은 악마가 나에게 던지는 떡밥에 내가 걸려든 신호이니까.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집중해서 거기에 힘을 길러라. 그게 아니다 싶으면 미리미리 가지를 쳐라.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맞설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교만'이야말로 하느님에게서 인간을 떼어놓은 최초의 죄악이니까.

자유

자유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를 얻어야 한다. 자유 속에서 사랑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로 덕들이 주어진다. 단식, 기도, 고행, 자발적 가난, 정결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는 '자유'다. 한쪽으로 밖에 갈 수 없는 길에서 그 길로 간다고 칭찬할 것이 무엇인가? 양갈래 길 중에, 하느님이 원하는 길을 선택해서 걸을 때 칭찬받을 수 있는 법이다. 사제들에게 할 일이 있다면, 신자들을 이 쇠사슬에서 풀어주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도 이 일을 먼저 했다. 그래서 회개의 세례를 사람들에게 선포한 것이다. 사람들은 새 시대가 시작 되었다며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는 어떤 것일까 궁금해하지만, 그들은 자기 처지도 모르는 채로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이다. 아직도 이 요한의 세례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분이 오실 길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 많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구속'을 강요해왔다. 사람들은 그게 '구속'인 줄도 모르고 스스로 거기에 길들여져왔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했지만, 그들을 광야로 데리고 나왔을 때에는 도리어 돌아가고 싶어했다. 자기가 무슨 성인이라도 되는 양 덕스러움을 정복하고 싶어하겠지만, 시궁창에 빠진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신자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물질적인 욕망에 스스로를 내어 맡기고 있으며 돈의 지배에 우리 스스로 몸을 맡기고 있는 형국이다. 나 자신을 묶고 있는 내가 만든 속박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라. 그 자리를 만들어 두면 성령께서는 절로 드나드실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는 자

예수님을 떠나는 자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면모를 잘 살펴보면, '(내 뜻을 이루어줄)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다. 말인즉슨, '(당신의 뜻을 이룰) 하느님을 내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주변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 뜬구름잡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다. 먼 훗날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왜냐면 결국 내가 찾았던 '하느님', '예수님'이란 존재는 내가 상정한 하찮은 종교의 부산물에 불과했을 뿐이고, 정작 나는 나의 하느님을 멀리 내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신다. 누군가가 '성령에 힘입어' 여러분들에게 말을 건낸다면 여러분은 그 대상이 아이든, 병자든, 거지든, 친구들 중에 제일 바보같은 놈이든,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어른이든, 늘 내가 투덜대기만 하던 부모님이든, 그 '성령에 힘입은 전언'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이 말을 전하기도 한다. 길가에서 손을 내밀고 당신의 작은 손길을 기다리는 거지는 당신 주머니의 신용카드를 내어 놓으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스타벅스 사 먹는 돈을 '희생'해 주기를 기다리는 거다. 당신 집의 보채는 아이들은 당신의 온 생애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당신의 지금의 1시간 정도의 놀이시간을 '희생'해 주기를 기다리는 거다. 예수님은 여러분 가까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버리고 싶은가?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먼저 사제들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사제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화(聖化)' 즉,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가까이로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악마들로서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사제들은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축복 받았다고 느끼게끔 한다. 축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제가 마음을 담아 전하는 강복의 위력은 한 사람의 하루를 밝힐 수 있다. 그 밖에도 사제가 거행하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사효성(일어나는 일 만으로 이루어지는 효력) 자체 만으로 위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배에 해당하는 악마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악마가 할 최선의 작업은, 그 사제직의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은 사람들이 그 사제의 인간됨을 보고 코웃음을 치게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결국 그의 모든 사제직의 직무수행마저도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게 주된 목적이다. 그래서 그가 가진 인간적 약점을 최우선의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욕구'가 될 수도 있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으며,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누구는 이성을 돌처럼 바라보고 돈을 하찮게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명예욕과 지배하려는 마음이 대단할 수 있으며, 누구는 돈이나 명예, 권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이성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누구는 '나은 생활', '윤택함'에 관심을 갖고 재물의 종이 되어간다. 사제직은 '나약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는 그 인간이 아니라 그가 지닌 사제직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악마의 목적은 그 '인간의 나약성'을 교묘하게 유혹해

암흑 속에서 주님을 찾기

암흑 속에서 주님을 찾기 하느님께서 신앙의 길을 나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내게 택하신 방법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그것은 전적인 '암흑'이었다. 사실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마주한 현실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더 이상 '표징'은 없다. 오직 "당신의 말씀과 그 말씀을 따르는 이들"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만 믿으려 한다. 그리고는 우리의 "감각" 앞에 놓인 것만 수용한다. 눈이 보는 것, 귀가 듣는 것, 냄새, 촉감, 맛... 그렇게 그저 우리의 오감을 채워주는 것들만을 확신하며 믿는다. 그들에게 감각의 저편에 있다고 전해지는 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지극히 단순한 논리인거다.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세상은 학교, 놀이터, 집에 한정된다. 그 밖의 공간은 생각을 펼쳐본 적도 없다. 처음 롤러 스케이트 장에 갔을 때의 그 생경한 느낌이란... 겪어 보기 전까지는 거기에 도착하는 동안 이야기를 전해주는 형의 말을 믿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믿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늘 여러가지 것들로 나를 속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신앙의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의심함과 동시에 그가 말하는 '신앙'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늘 처한 상황이다. 이 상황은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사람들은 "교회의 현실"이 미더워서 그 교회가 간직한 보물인 "신앙"을 저버렸다고들 한다. 교회의 결함이 싫어서 신앙에 다가서기 싫다니,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담근다는 속담과 다를 바 없다. 인간적인 불만을 해소하겠다고 신앙의 근본에서 멀어지는 꼴이라니, 벼룩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다. 신앙이 뭔지 맛도 보지 못한 이들이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를 어쩔 것인가? 교회의

생명의 빵

생명의 빵 Part II 세상의 빵에 관심 가진 이들에게 '생명의 빵'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물에다 기름을 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마디로 별 소용없는 짓이라는 이야기다. 실컷 설명을 하고는 돌아서면 어느새 분리가 되어 있는 물과 기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살펴보는 게 더 쉬울 듯 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상의 빵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세상의 빵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대중의 관심사를 말한다. 돈, 명예, 권력... 누구든 부자가 되려 하고, 누구든 잘 알려지려 하고, 누구든 힘있는 사람이 되고파 한다.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이런 원의들을 잘 감춘다고 해도, 결국엔 이 세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게 뭔가를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그 근본에 무엇을 원하는가? '내 뜻이여 온세상 끝까지 이루어지소서'라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모습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나는 도대체 뭘 원하는가? 진정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해 보았는가? 크게 어렵지 않게 '행복' =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도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버는 이유가 그렇게 번 돈으로 걱정거리를 양산하려고 버는 사람은 없다. 돈을 벌면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금 고민하는 일들이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들 노력하는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날 알아봐주면, 행복하니까 그걸 원하는 거다. 현상수배범이 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권력을 가져서 상대파 갱들로부터 총맞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안 죽으려고 기를 쓰면서 이러한 것들을 찾는다. '내가 원하는 것' = '행복' = '내 현세의 삶을 채우는 것들' 대충 이런 도식이 완성된다. 그래 이해한다. 우리 육체의 눈으로 볼수

믿음을 잃었다?

"세례를 통해서 은총과 신앙을 얻지 않습니까? 헌데 그 신앙을 잃을 수도 있습니까?"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한 아저씨가 성경강의 중에 한 질문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앙이라는 것이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얻었다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이런 표현들을 많이 쓰곤 한다. '믿음을 잃었다.' 과연 믿음은 가졌다가 잃을 수 있는 것인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보자.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져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믿음이란 건 대단한 모양이다. 믿음의 능력은 산을 옮길 수 있단다. 문제는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런 상상을 해보자. 한 아이가 산골에만 살아서 '인터넷'이라는 걸 배워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도심지에 나와서 인터넷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세상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과 눈 앞에 마주하듯이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아이는 이 체험을 꿈이고 환상이었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이 아이의 이 체험은 영원히 남아서 산골로 돌아가서 이러한 세계가 있다는 걸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분과 더불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며 자신이 믿는 바를 체험하는 것이다.' 일단 믿음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벗어날 수가 없다. 애써 피하고 도망다닐 수는 있지만, 제자리 걸음이다. 요나가 그러했고,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러했다. 심지어는 그 유명한 엘리야 예언자도 너무 힘든

마르코 복음 1장

마르코 1장 새로운 성경강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부터 마르코 복음을 파고들어간다. 마르코복음은 짧으니만큼 핵심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다. 1장을 아우르는 주된 내용은, "요이~ 땅!"이다. 본격적인 달리기를 위해서 준비하고 그 첫걸음을 걷는 과정이 잘 담겨져 있다. 먼저 요한이 나타나 예수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작업을 한다. 군대에서 '나라시'를 해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튀어나온 건 깎고, 부족한 건 채운다. 그것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방법이다. 죄와 교만의 모난 부분은 깎고, 잃었던 영적인 힘을 채워야 한다. 주님이 오시는데, 나의 어두움을 계속해서도 안되고, 너무 처져 있어도 안된다. 깎고 채워라.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신다.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간단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다는 걸 배우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제자들은 가지고 있던 걸 버려야 했다. 우리 역시 버려야 한다. 하지만 이 버림이 모든 걸 가차없이 내던지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도록 하자. 고기낚는 '어부'가 사람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들이 하는 일에는 바뀐 게 없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하는 일을 계속 하되 그 근본 방향을 바꾸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 응답을 해야 한다. 뭔가 다른 인격이 되라거나 다른 환경에 무턱대고 뛰어 들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특별한 부르심과 응답은 따로 주어진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상 안에서 부르신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시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이는 율법학자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율법학자들은 쉬운 걸 어렵게 만들고, 자신들은 행하지도 않는다. 오늘날도 많은 곳에서 이런 이들을 관찰할 수 있다. 말만 많고 행하지 않는 이들. 괜히 쉬운 걸

남녀의 관계

오늘 복음에는 남녀의 관계가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부부이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부부관계는, '한 몸'이라는 개념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부부는 두 개체가 아니라, 한 몸의 다른 두가지 드러남이다. 그래서 이런 식의 행동은 존재할 수 없다. "아, 나 오늘 회식 있으니까 저녁은 알아서 먼저 먹어."(통보) 대신에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오늘 회식 있는데, 가도 괜찮을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동의) 자기 몸 왼쪽이 어딜 나가지 않으려는데 오른쪽이 혼자 절름대며 나다닐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부관계는 닫혀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내 몸을 반을 갈라서 어디 내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닫힌 관계를 올바르게 완성할 때, 비로소 화알짝 열릴 수 있다. 내 안에 가진 게 없는 데 내어준다는 건 거짓말이다. 부부 사이가 틀어져 있는데 사회적으로 위신있는 척 해봐야 될리가 없다. 최선을 다해서 부부관계를 완수하라. 남편은 아내를 더할나위없이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지극히 존경하라. 그러면 저절로 그 열매가 익어 남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에 대한 후반부 이야기는 예수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마치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양 착각하기 쉽다. 지금 내가 하는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 번 시도해 보자면...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함께 지내는 것이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면서 하신 생각이다. 고자가 되는 건 '별다른' 케이스이다. 이 '별다른'이라는 말의 의미는 좋을 수도, 그냥 평이할 수도, 때로는 나쁠 수도 있다. 이 '별다

기쁘게 살기

인류 전체를 100%로 보았을 때, 현실적으로 몇 퍼센트가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의 길로 접어들까? 라는 얼토당토 않은 상상을 해 본다. 한국적인 현실로는 10%가 겨우 성당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진정 신앙에 눈을 뜬 사람은 또 어떻게 골라낼 것이며, 또 단순히 교회 밖에 머무른다고 그에게 구원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누가 확정지을 것인가? 결국 이런 생각의 흐름에 따라 내려지게 되는 결론은, '아둥바둥 수량을 늘리려고 애써본들 그닥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거다. 차라리 본인이 깨달은 만큼 머문 자리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될 터이다. 시제품을 제대로 된 걸 하나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써보고 좋으면 구입할 것이다. 광고도 중요하지만 광고만 실컷 해놓고 일시적으로 구입자들을 늘려 놓는들, 원 제품이 허술하면 결국엔 역효과이다. 신앙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떠들어본들, 그 말 듣고 찾아온 사람에게 신앙의 맛을 보여주지 못하는 짠 맛을 잃은 소금들이 난무하는 교회는, 결국 길거리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짖밟히게 된다. 짠 맛을 잘 간직하면 사람들이 수십리 길을 걸어서라도 소금을 구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기쁘게 살자. 내가 가진 신앙으로 인해 힘든 세상에 위안을 찾고, 실제적으로 기쁘게 살아가자. 이 신앙의 기쁨이 없이, 그저 대놓고 다 인내하라고만 하면서 인상을 오만상 쓰고 있으면, 나라도 안 다가설거다. 누구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은 있다.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든, 일에서 다가오는 스트레스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실망이든... 누구에게나 어두움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빛은 그 어두움들을 환하게 비추고도 남는다. 왜냐면 결국 우리는 부활할테니까. 우리의 삶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조금은 여유로와도 괜찮다. 조금은 느긋해도 괜찮다. 아둥바둥 살지 말자. 그 썩을 정치판이 어떻든, 런던 올림픽이 어떻

나의 현재

우리가 밤 하늘에 눈을 들어 바라보는 우주는 짧게는 수십광년 멀게는 수십억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은하나 별들로부터 관찰되는 우주이다. 이 말인즉슨, 우리는 철저히 과거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지금 실제로 그 우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령 좋은 우주선을 개발해서 거기까지 여행을 가서 그 우주의 현재를 보더라도, 그 신호를 지구로 쏘아 보내면, 우리는 수십억년이 지난 뒤에야 그 신호를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로서는 지금 관찰되는 별들이 바로 우리의 현재일 뿐이다. 우리가 사물들을 현재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자의식' 덕분이다. 생각을 바꾸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의식의 단편을 내어주지 않으면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긍정적인 경우와 부정적인 경우의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긍정적인 경우는, 내 주변의 어두운 일에 마음쓰지 않는 것이다. 이유도 없어 보이는 데 괜히 나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 다른 사람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뭐든 일을 크게 심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을 말 그대로 '쿨~'하게 무시하면 된다. (근데 쉽지는 않다. 계속 주변에서 시끄럽게 해 댈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경우는, 내 주변의 절실한 일, 내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일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다. 어느 사제가 부유한 신자들 하고만 어울리면서 수준에 맞지도 않는 취미생활을 즐기러 다니고, 떡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신자들의 영적인 생활을 소홀히 하거나, 어느 정치인이 지역 현안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신분상승과 권력의 확장에만 기를 쓰고 있는 경우이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무턱대고 다 받아들이는 일은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실제로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내가 소홀

교회 서류 개정 수속에 대한 산타크루즈 교구의 규정

개정 수속 * 세례자의 이름이나 포함된 이름들의 수정, 첨가 또는 삭제 세례자의 최신의 출생 증명서 원본(Certificado de Nacimiento original actualizado del bautizado) 또는, 요약본(extracto:colilla)을 주민등록 원본 페이지의 합법적인 복사복(fotocopia legalizada de su inscripción en la página del libro de Registro Civil)과 함께 제시하면서 주민 등록(Registro Civil)의 날짜가 세례 날짜보다 이전이거나 같다는 것이 확인될 시에 개정을 진행한다. * 부계(父系)의 성, 이름 그리고 부모의 성의 첨가. 세례자의 최신의 출생 증명서 원본과 식별 증명서 원본(Acta del Reconocimiento original) 또는 식별 증언서(Testimonio del Reconocimiento) 혹은 혼인 전에 태어난 아이들의 합법성을 보장하는 가족 사항 공증서(Libreta de Familia en la cual se evidencia la legitimación de los hijos nacidos antes del matrimonio)를 제시하면서 개정을 진행한다. 또한, 인습적인 성씨의 수속(trámite de apellido convencional)을 실행하는 때에는, 추정되는 성씨에 해당하는 해결안을 제시하는 세례자의 최신의 출생 증명서 원본과 주민등록 원본 페이지의 합법적인 복사본을 제시하면서 진행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증거로서 제시하는 서류들의 내용이 세례 증명서의 내용과 일치하는지 잘 확인하여야 한다. * 세례자의 부모들의 이름과 성들의 수정, 첨가 또는 삭제 원칙적으로 세례자의 부모들의 세례 증명서나 세례자의 최신의 출생 증명서 원본 또는 요약본(extracto:colilla)을 주민등록 원본 페이지의 합법적인 복사복과 함께 제시하면서 주민 등록(Registro Civil)의 날짜가 세례 날짜보다

개신교와 가톨릭

개신교와 가톨릭 - 같은 것에 주목하기 정말 어릴 때는 개신교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부모님을 따라가면 성당이었고, 거기에는 신부님이 있었고, 그래서 복사단이 되고 싶었고, 복사단이 되어 열심히 활동했다. 철이 좀 들면서, 다른 친구들이 '성당'이 아니라 '교회'를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같은 유일신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때 내 친한 친구는 자기 교회의 성탄 연극제에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 조금은 생경한 분위기를 호기심을 잔뜩 안고 지켜보았다. 젊은이들은 그 교회 안에서 생기발랄했고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때부터 주일학교 안에서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배웠고, 개신교회는 본 줄기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가르침, 그리고 개신교 사람들은 보통은 가톨릭, 천주교를 '성모님교'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과 큰 근거없이 '막연히' 가톨릭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쓰고, 우리는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괜히 영화 자막에서 '하나님'이 나오면 좀 꺼려지곤 했다. 막연한 거리낌의 시기였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배우면서 가톨릭의 당시의 부패와 오류를 듣게 되었고, 개신교 형제들이 당시로서는 하느님께 더 나아가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다 보니 두 교회가 갈라서야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군대에서 교회 행사를 한다고 해서 사병들을 대동한 적이 있어, 또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고, 이쁜 여대생들의 율동찬양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교회는 생동감이 있고 살아 있었다. 이네들의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그 아름다운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거룩한' 사제

어제 한국 사제들이 세르히오 부주교님을 만나서 사제들의 임기에 대해서 면담을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 중에 볼리비아 현지의 사목지와 사제들의 현황이 잠깐 나왔다. 한국은 본당이 사제들의 반에 못미치는 것이 현실이고, 볼리비아는 사제들이 본당의 반에 못미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사제들만 있어도, 이곳에서는 감지덕지인 셈이다. 하지만 젊은 사제들이 이 곳에 나오기에 선뜻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는 한다. 말과 문화가 너무나도 다른 이 곳에 나오려면 적잖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리라. 그러나 이는 근본 '마음'에 달린 문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그걸 찾아 나선다면, 그리고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가득해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데에 동의한다면, 이 먼 곳 볼리비아를 지원하는 일도 그리 요원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한국 교회에 늘 사제가 부족하다고 하는데, 정말 부족할까? 정말 그 많은 '부주임'들이란 직책과, 혈기 왕성한 신부들이 연차가 한참 지나도 '보좌'로 남아 있을만큼 절실할까? 아마도 한국 교회에 사제가 부족하다는 볼멘소리는, '거룩한' 사제가 부족하다는 게 아닐런지... 적어도 한국 교회에는 어느 신자가 적어도 매주 한 번이라도 미사를 드리고 싶으면 무슨 수라도 낼 수 있지 않은가? 성소를 양성하는 올바른 길은, 더 이상 '사탕'이 아닌 것 같다. 한국 교회는 부유해졌고, 더이상 '귤'이나 '김' 때문에 사제가 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직 이건 유효하긴 하다, 신학교의 복지후생은 그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정도니까. 지난 휴가때 가서 바뀐 신학교의 욕조만 없는 5성급 호텔 수준의 생활환경에 적잖이 감탄을 한 적이 있다.) 환경은 잘 갖추어 졌으니

하늘에서 내려온 빵

하늘에서 내려온 빵 참 미스테리하다.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걸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라는 걸로 풀이하고 계신데, 사람들이 알아 들을리가 만무하다. 시간상으로 봐도 2000년이 넘게 흘렀고, 사람이고, 남자라는 뚜렷한 성(性)도 지니고 계신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우리에게 익숙한 '밥'으로 비유한 것도 아니다. 당연히 이해가 안될 수 밖에. 하나하나마다 다 막힌다. "2000년 묵은 걸 이제와서 어쩌자고?" "그래봐야 사람이잖아?" "왜 하필 남잔데? 여자는 왜 아닌데?" "조선의 후예도 아닌 사람을 우리가 왜 섬겨?" "빵? 어쩌라고?" 예를 들면 이런거다. 당신이 엄청난 물리학자이고 원자의 구조를 설명해야 하는데,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들이 유치부 아이들이다. "여러분~ 공 알죠? 공?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잘 들여다보면 원자라고 부르는 공으로 되어 있어요." "공은 통통 튀는데 원자도 튀어요?" "아니,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고... 입자... 아니... 그게... 저..." "나는 빨간색 공이 좋은데... 원자는 무슨 색깔이예요?" "아니 원자는 무슨 색깔이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수영장 갈때 공 가지고 가요." "......" 당신은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가능할 것인가?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나중에야 그 물리학자가 말한 개념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미숙한 영에게 아무리 하늘나라의 가치들을 설명해봐야, 소 귀에 경읽기일 뿐이다. 그 영이 이리저리 부딪히고, 상처나고 치유되고, 힘이 붙으면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하

표징

표징 내가 알게 모르게 꾸준히 하느님께 청한 것이 있다면, 당신을 어떤 식으로든 '감각'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들 원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보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마음들이 조금은 놓이는 느낌이다. 만일 내가 봤다면,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 내가 본 걸 설명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설명해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나의 말들은 허공을 떠돌고, 결국 나는 반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것이다. 나는 보지 않고 믿음으로써, 오히려 나의 말은 사람들에게 더욱 쉽게 다가서고, 사람들의 의문을 나 역시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우리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보고 있으며 듣고 있다. 결국 우리 마음의 근본에 달린 문제다. 믿고 싶어 하는 자는 믿게 될 것이고, 믿고 싶지 않은 자는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예컨대 이런거다. 한 아이가 츄파춥스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자기 눈 앞에 놓인 건 손바닥에 놓인 그것 뿐인데, 지금 아빠가 가려는 회사에 따라가면 더 나은 게 있다고 해도 믿지를 못하는 거다. 그 회사는 다름아닌 츄파춥스 공장. 아무리 공장 사진을 보여주고, 공장의 모습과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설명해 봐야, 이 아이는 결국 아빠를 '믿지 못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믿음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이미 '들음'으로써 이루어졌다. 남은 건 믿는 것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 것'에 어찌나 그리 더딘지... 그보다, 우리가 이미 가진 것에 어찌나 애착을 가지는지... 솔직히, 믿을 거리가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믿기 싫은거다.

제1화 살아있는 것

미나의 비유(삶을 돌려드리기)

루가복음 19장 두번째 이야기 - 미나의 비유 복음서에는 돈으로 하는 비유들이 많이 나온다. 사람들의 초유의 관심사는 돈이기 때문이다. 돈이 아닌 다른 것들로 비유를 하면 추상적인 '시'가 되어 버리지만, 돈으로 비유를 하면 피부로 와 닿는 현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예수님 역시도 이런 비유를 많이 썼다. 하지만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알아들었을 뿐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과거의 화폐의 단위인 '미나'를 종들에게 맡기고 떠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과연 하느님은 무엇을 맡기셨을까? 하느님은 무엇을 거두려 하실까? 그건 성과는 드러내는 무엇일까? 그래서 교회는 세례자 수에 집착하고, 교회의 크기에 열중하는 것일까? 이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 난 과감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어떤 특별한 성과를 이루는 무언가가 아니라, '삶' 바로 그 자체이다. 그럼 이걸 어떻게 추수할 수 있을까? 어디다 투자를 해서 어떻게 거두어야 하느님께서 만족하실까? 삶을 투자하는 방법, 지금부터 잘 들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전에는 내 삶을 내가 100%썼다. 아침에 겨우겨우 일어나서는 씻고 깨작깨작 밥먹고 일하러 나가서는 돈을 벌어야 하니 상사 눈치 봐가며 적당히 일하고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다가 잤다. 여기에서 90%만 자기를 위해 쓰고 10%를 하느님에게 드리기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호를 긋고 나머지는 똑같이 지낸다. 나 80% 하느님 20% 성호를 긋고, 더 이상 대충 때우는 아침이 아니라 하루를 주님의 뜻대로 활달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다. 나머지는 내 방식대로. 나 50% 하느님 50% 성호, 충분한 영양섭취, 전에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던 직업이 이제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맡은 책임을 성실히 이루기 위해 다니게 된다. 나머지는 내 방식대로. 나10

자캐오 이야기

루가복음 19장 자캐오 이야기 자캐오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했지만,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앞서 달려가고', '나무에 오르는' 것으로 드러내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노력을 보아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에서 그를 '선택'했고, 그와 함께 '머물렀다'. 자캐오는 '서둘러 내려와'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남을 속였다면 4배로 갚아주기'를 약속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한다. 자캐오의 이야기는 소중한 '구원의 공식'을 담고있다. [구원 = 바라고 찾기(원의) + 예수님과 머물기(도움) + 마음의 바꿈(회개)] 하느님과 그분이 주시는 것을 찾고, 그분과 함께 머물며,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나가면, 우리는 이미 구원을 약속받게 된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세상의 쾌락에 환멸을 느낀 청년이 보다 참된 가치를 원하고 찾아 나서기 시작해서, 예수님이라는 분을 어떤 식으로든(전례, 기도, 성경, 선행, 사회활동, 친구와의 대화, 참된 우정, 진정한 사랑...) 만나서 머물고, 그분과 머물면서 이전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의 뜻대로 바꾸기 시작하면(욕설 안하기, 인내하기, 용서하기, 욕심내지 않기, 내어주기, 나누기 등등등...)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듣게 된다. 많은 이들이, 말뿐인 구원을 얻었다고 시끄럽게 떠든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한다고 구원이 오진 않는다. 구원이라는 것은 '나의 원의'와 '그분의 도움'과 '나의 회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하지도 않는 걸 선물이라고 주시지는 않으며, (늘 청해야 한다) 그분의 도움 없이 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연극: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연극 :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출연진 및 소도구 제자들>우리들 배>교회 물>우리를 위협하는 세상 베드로>신앙의 걸음을 내딛는 사람 예수님>예수님 뭍을 떠난 배 =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교회 풍랑의 위협 = 그런 교회를 위협하는 세상의 유혹들, 시련들, 고통들. 어느 순간 이상한 방법(물 위를 걸음)으로 나타나는 주님 =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계산하기, 복수하기, 돈, 권력, 명예에 집착하기)이 아니라, 엉뚱한 수단(손해보기, 내어주기, 용서하기, 원수를 사랑하기,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찾기)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주님. 놀라는 제자들 = 처음 접하는 그런 수단들에 가까이 다가서기 싫어하는 우리들. 베드로의 작은 용기와 간청 = 그런 이들 가운데 신앙의 길을 걸어보려는 참 신앙인들. 베드로의 작은 성공 = 열매를 거두는 참 신앙인들. 베드로의 실패 = 인간적인 약함으로 다시금 시련에 빠지는 신앙인들. 구원의 요청과 예수님의 손길 = 그때마다 드리는 기도와, 다가오는 예수님의 손길. 결국 배는 뭍에 가서 닿고 예수님의 일은 계속됨.

성전을 허물어라.

어제 한국 신자 모임에 가서 교리를 하고 미사를 드렸다. 볼리비아에서 한국인 신자 모임에 나오는 분들은 그래도 나름 자수성가한 분들이다. 그분들의 노력은 진정 높이 살 만 하다. 특히나 남미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그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셨겠는가. 하지만 그 역작용으로, 자신들이 쌓아온 기반을 굉장히 소중히 여길 수 밖에 없다. '돈과 권력'에 시달려 오신 분들이고, 그래서 지금 겨우겨우 쌓아놓은 스스로의 돈과 권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분들이다. 그래서 교리와 미사때 아무리 진솔하고 좋은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다. 언제나 제자리 걸음이다. 이야기만 꺼내면, 당신이 고생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분들의 재물에 대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신이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크고 좋은지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재물이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서, 저마다 한바탕 유세를 떠시는게 뻔히 보인다. 예수님은 욕먹기 딱 좋으셨다. 넘들이 열심히 열심히 쌓아 놓은 것을 필요없다 해버리시니... 38년을 쌓은 성전을 3일만에 짓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으니...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며 나머지 것들은 곁들여 받을 거라 하셨으니... 세상 안에서 아둥바둥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괘씸해 보였겠는가 말이다.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 곁에 있으시다면 과연 뭐라고 하실 것 같은가? 솔직히 모르겠다. 너무나 다양한 것들 속에서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려나?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수님은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찾고 그분의 뜻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들어서 안다. 그것은 '사랑'이다. 달리 표현하면 '용서'이다. 아, 하지만 우리는 이 말 한마디를 깨닫는 데 어찌 이리 느리단 말인가?

심판하지 마라 너희도 심판받게 될 것이다.

심판하지 마라 너희도 심판받게 될 것이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한 두 명씩은 꼭 있다. 기본 남의 말을 하면서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거의가 '전해들은' 호기심거리이고 주로 그를 폄하하는 말이다. 일단 상대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으니 말을 꺼내지만, 정작 자신이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은 0%에 가깝다. 말이라는 것이 웃긴 것이 하다보면 상대의 관심을 더 불러 일으키려고 '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창세기를 잘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뱀과 이브가 한 것이 바로 이 과장이다. 하느님은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했다. 뱀은 '하나도 먹지 말라며?'라며 과장을 했고, 이브는 '그건 아니고 다른 건 다 먹되 선악과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며 과장을 했다. 이런 과장된 말들이 돌고 돌다보면, 옷깃 한 번 스친 것이 임신을 시키게 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지만, 솔직히 걱정되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을 돌리고 돌리는 이들의 영혼이다. 자신 안에서 꺼낼것이 오죽 없으면 그런 과장된 호기심거리들로 타인의 관심을 끌기를 원하겠는가? 또 그말을 전하는 이들은 자신 안에 얼마나 자존감이 없으면 넘들이 이랬다 저랬다는 말들이나 전하고 다니겠는가? 믿음이 없는 부류다. (교회 안에 열심한다는 반장들이나 교사들이 이 짓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만의 하나 막상 이들에게 3자 대면을 시키면, 말문이 막히게 될 것이다. 성모님은 모든 걸 듣고 마음에 새기셨다. 그래서 당신이 꺼내는 말에는 예수님께서 구원자로서 청을 들어주신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어머니를 부르는 단어는, '여인아'이다. 예수님은 이 순간 어머니가 아니라 구원자로서 한 인간을 보신 것이다. 하지만 그 청을 들어

몰이해

연중 18주 주일 몰이해 오늘 예수님과 군중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아이에게 어른의 일을 이야기하면 알아듣질 못한다.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지 못한다. 지혜롭다, 똑똑하다는 것의 본의는 더 많이 안다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 속에 보물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신앙인이다. 이 보물을 가지면 눈이 떠진다. 이 눈을 열게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비로소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거다. 한 가족이 차를 몰고 여행을 가는 중에 아빠는 운전을 하고 엄마는 지도를 봐 주고 아이들을 뒷자리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아이들은 아빠가 도로 표지판을 어떻게 보는지 차는 어떻게 모는지 주유는 어떻게 하는지 엄마가 보는 지도는 뭔지, 어떻게 보는지 아무 관심이 없다. 그저 눈 앞에 놓인 장난감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걸 가지고 형제가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기만 한다. 생명의 빵을 아무리 설명해야 소용이 없다.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찾는 건, 먹는 빵과 이적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생명의 빵과 진정한 표징을 보았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궁금한 사람만 나중에 따로 찾아오면 내가 전해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좀 모셔 두었다.

방향전환

방향전환 전에는 마냥 순진하게만 세상을 바라보았다. '신부님'이라고 하면 다들 거룩하고 성경만 읽고 하느님하고 제일 가까운 줄 알았고, '교수님'이라고 하면 다 아는 줄 알았고, '어르신'이라고 하면 다 체험하시고 언제나 나를 지지하고 이해하는 넓은 포용력을 지니신 줄 알았다. 전혀 엉뚱한 길을 헤메는 신부도 있고, 자기 전문분야만 알고 지혜롭지 않은 교수도 있고, 어른도 결국 고만고만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건,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다. 결국 '참된 지혜'를 갖지 못하면 모두 길을 잃게 된다는 걸 알았다. 제 딴에는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겠지만, 진정 지혜롭고 겸손한 이들은 벌써 그네들 위에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한다. 우리는 충분히 갖췄다. 이제는 철이 좀 들어야 할 때인데, 아직도 어린 애들이 하는 놀이와 별반 다를 게 없이 살아가는 어른들이 많다. 땅따먹기, 구슬치기 하는 어린아이들 보았는가? 결국 내 땅도 제 땅도 아닌 땅을 두고 서로 더 갖겠다고 다투고, 선 조금 다르게 그었다고 화를 내고, 어른이 되어서는 언제 그러고 놀았는지도 모르는 구슬 하나 더 먹겠다고 온 힘을 다 쏟고, 그러다가 소위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진짜 '현실'은 이제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훗날 다가오게 될 이 진정한 현실에서는 우리가 열중하던 많은 것들을 다 내던져야 한다. 어린애가 계속 놀겠다고 우기면, 결국 어머니가 준비한 영양많고 맛있는 저녁밥을 못 먹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을 찾겠다고 우기면, 결국 하느님이 준비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마음을 조금 돌이키는 게 여러가지로 유익할 것이다. 이걸 두고 '회개'라고 한다.

성모님(한글 스페인어 버전)

성모님 La Virgen María. 볼리비아에는 어딜 가든지 성모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공원이건 시장이건 성모님상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성모님의 영성을 잘 이해하고 있을까요? 성모님은 도대체 뭘 하신 분일까요? En Bolivia, por cualquier lado podemos encontrar con la Virgen Maria. En la plaza o en el mercado no podemos encontrar donde no hay la Virgen. ¿Pero nosotros entendemos su espiritualidad en verdad? ¿Ella que hizo de verdad? 성모님은 '듣고 성찰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시고 성찰하셨습니다. 요즘엔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들으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정작 남의 말을 올바르게 듣거나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제 길이 옳고 자기 길을 따르라고 하는 중에 성모님은 들려오는 모든 것을 듣고 마음에 품으십니다. 성모님의 첫번째 가치는 '듣고 성찰하는 것'입니다. La Virgen Maria es "una que escucha y medita". Cuando Niño Jesús nació, ella aceptó y meditó todas cosas que ocurrieron alrededor. Hoy día todos gritan para que escuchen su voz. Pero no hay nadie que escucha a otro y piénselo bien. Mientras todos dicen que su camino es verdadero y que sigan su camino, La Virgen escucha y medita todo lo que dicen. Su primer valo

우정관계

우정관계 친구1: 너랑 나랑은 베프(베스트 프렌드)셈. 친구2: 알았삼. (2에게 어느날 다른 친구3이 생김. 1이 질투함.) 친구1: 너랑 나랑은 베프 아니삼. 친구2: 왜 그러삼? 친구1: 너는 친구3이랑 놀기 시작했음. 친구2: 그럼 안되는거삼? 친구1: 베프 끼리는 둘이만 놀아야 되는거삼. 친구2: 헐... 우리의 관계는 새롭게 정립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그 우정의 관계는, '집착'인 경우가 많다. 집착과 진실한 우정의 차이는, 상대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 나의 반응에 달려있다. 집착은 '소유'에 가까운 거라서, 그가 나의 뜻대로만 움직이기를 바라고, 진실한 우정은 예수님의 '참 사랑'에 가까운 거라서 그가 진정 행복해지길 바라는 거다. 그래서 모든 관계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피를 나눈 가족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가족이 더 중요한 법이다. 정말 친구라면, 그리고 나의 단점과 약점을 안다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그 친구가, 나보다 더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을 기꺼이 반기고, 그 더 좋은 친구의 장점을 통해서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하지만 집착하는 친구는 내가 집착하는 대상에 온전히 몰두해서 그를 '부자연스러움'으로 이끈다.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라. 나는 그를 자유롭게 날아가게 할 준비가 늘 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가? 어렵지 않게 구분이 갈 것이다. (단, 혼인관계는 예외다. 우정이라는 것과 혼인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다. 결혼은 두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한 몸의 관계이다. 아프다고 제 몸을 쉽사리 싹둑싹둑 잘라내는 사람은 없다. 최대한 보듬고 다듬어서 보완해 나간다.

결코 잃어버리지 말기

우리 삶에서 잃어버려서 정말 나에게 해가 될 게 뭐가 있을까? 아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가지고 있는 건 뭘까? 돈은 있다가도 없는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다. 명예라는 건 올라간 만큼 내려와야 하는 거고, 권력이라는 건 봉사하라고 주어진 거다. 이 세가지와 깊게 연관된 세상 안에서의 '성공'이라는 환상도 마찬가지다. '성공'한 삶? 남들이 보기에 그럴 뿐이지, 막상 성공했다는 사람의 삶 안을 들여다보면, 성공하지 못한듯 보이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보장을 얻을 수도 없다. 그저 가난한 사람이 길거리에서 울 때,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벤츠에서 우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ㅎㅎㅎ 건강은? 결국 생명과 연관되어서 더 오래 '현세의 삶', 즉 '생명'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열망인데, 물론 요즘은 개념이 조금 바뀌어서 마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왕성한 활동력을 유지 시키면서 오래 사는 걸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러든 저러든 죽는 건 똑같은 걸 뭐. 결국 생명도 '내 것'은 아니다. 누군가 나의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까지를 '대출'해 주신거다. '활력있는 삶'이라는 것도 역시 나를 위한 기준인거다. 나 완전 건강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계속 하고 싶어!!! 라는 부르짖음 이랄까? 근데 그런 사람들 자기가 '정말 뭘 하고 싶은지'나 알고는 있나? 그저 건강만 찾다가 어느날 뜬금없이 차사고로 훅 가버리면 얼마나 억울할런지. ㅎㅎㅎ 가족? 이 세상에 내려오면서 선물받은 '소중한 관계'이다, 오히려 역으로 작용하면 뗄레야 뗄 수 없는 '선행조건'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소중한 존재들이지만 우리의 전부를 걸 만한 대상은 되지 못한다. '내 가족'이라는 개념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라는 개념으로 점점 대치되어 가고 있는 중

단순함과 복잡함

단순함과 복잡함 인간은 단순한 걸 복잡하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배가 고프면 먹으면 되고, 놀고 싶으면 놀면 된다. 하지만 우리네 마음은 놀면서 일을 걱정하고, 일하면서는 놀 생각을 한다. 밥도 다시 못 먹을 걸 걱정해서 과하게 먹고, 소화가 안된다며 약을 사먹는다. 동물하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면서 말들은 고상하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동물보다 더 못한 삶의 수준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동물은 순간에 충실하기나 하지, 우리는 정작 우리 앞에 놓여있는 그 순간들을 흘려버린다. 동물이 되자는 건 아니다. 본능에만 충실하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동물보다 더 못한 인간들이 있어서,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면서 영적인 걸 깡그리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나아가 영적인 걸 어두움으로 가득 채우는 부류들이다. 싸우려고 안달이고, 제 것만 챙기려고 난리다. 이런 복잡한 인간들 때문에 비둘기처럼 순박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뱀과 같은 영리함'도 동시에 지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수적인 요소가 때로는 본질적인 자리를 꿰차고 들어서서는 사랑할 줄은 모르고 똑똑하기만 한 변질된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했다. 하늘나라가 좋을 이유는, 서로 의심없고 사심없이 마음에 든 걸 솔직하게 이야기나누고, 함께 일하면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도 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수많은 말씀들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는데, 듣질 않으니...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교회의 분별 기준

교구 사제 회의를 준비하는 질문지를 받았다. 사제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지, 본당 공동체는 조직화되어 있는지, 입문 성사 준비에 교구 지시를 따르고 있는지, 사제양성에 힘쓰고 있는지, 사목활동과 다른 교회 그룹들을 알고 올바르게 운영하고 있는지. 내 양심이 허락하는 한은 다 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실을 읽고, 분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은 신학교를 졸업할 정도의 학식이 있고,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고(사실 이 부분이 조금 의문스럽긴 하다 ㅎㅎㅎ) 말 그래도 내 양심이 허락하는 한은 다 하려고 한다. 사제는 슈퍼맨이 아니라는 건 따로 설명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모든 사항을 다 이룰 순 없다. 능력이 되지 않아서도 못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전력질주를 하는 것도 아니다. 조직화된 공동체는 자칫 '성과주의'에 빠지기 쉽다. 개인이 개인을 대할때는 '면담'이 가능하지만, 이게 우루루 모이면 일일이 면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규정을 대놓고 적용시키는 수 밖에 없다. 마치 신호등 앞에서 교통경찰이 일일이 차량들의 사정을 봐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아가 그 '성과'라는 것이 옆길로 새기도 쉽다. 하느님께서 바라 보시기에는 한 명의 제대로된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 것이 100명의 어중이 떠중이를 어정쩡하니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보다 나은 법이다. 하지만 교회의 장상들이 바라볼 수 있는 실상은 100이라는 숫자가 1보다는 더 땡기는 법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밖의 것들은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다 믿자니 엉망으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안 믿고 규율을 놓자니 잘 하는 사람들 목을 죄고... 교회도 나름 고민이 클 듯 싶다. 하지만 결론은 주로 두 번째 방법을 쓰게 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 보완책으로 장상이 직접 찾아가는 걸 해야 되는데... 이게 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