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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12의 게시물 표시

마귀들린 아이

마귀들린 아이 딩동~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 직전 대문 벨소리가 울렸다. 두 아줌마가 젖먹이 아이들을 하나씩 안고, 5살쯤 되어 보이는 한 아이를 데리고 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데리고 온 아이가 밤이 되면 포악하게 변하고, 목소리가 바뀌고, 어젯밤에는 진정을 시키려고 성경을 가슴팍에 놓았더니 눈을 희번덕 거리며 해꼬지를 하려고 들더라는 것이었다. 들어오라고 했다. 아이는 세례를 받지 않았고, 엄마도 세례를 받지 않았단다. 돈이 없어서(?) 미처 세례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한다. 성경과 축복 예식서를 가져오고 컵에 물 한 잔을 떠다가 가져왔다. 컴에 담긴 물을 축복해서 아이와 엄마들, 젖먹이들을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성경을 아이 앞에 들어 보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냥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영대를 걸치고 축복 예식서를 펴고 행여 이상한 짓을 할까 아이를 내 품에 꼭 안고는 세례받지 않은 아이의 축복 예절을 펴서 읽어 주었다. 예식내내 아이는 내 시계를 신기해하며 천진하게 놀고만 있었다. "당장 본당으로 가세요. 그리고 수녀님들에게 전화해 둘 테니까, 수녀님을 찾아서 본당신부 허락이라고 이야기하고 당장 다음달 세례에 등록하세요. 당신 두 아이랑 당신까지두요. 세례 받는데 돈이 무슨 상관이예요. 세례 등록할 돈(25Bs. 받음. 한화 4000원 상당)이 없으면 내가 줄께요. 가만 보니 집구석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완전 마귀들의 놀이터구만요. 지금부터 세례 준비하세요. 그리고 세례 받으세요. 지금 아이는 축복을 해 두었으니 조용하겠지만, 나간 마귀가 다른 곳을 찾다가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면 다시 아이에게 더 지독한 놈들을 데리고 들어오게 될 거예요. 아이가 다시 발작을 시작하면 언제라도 저에게 다시 데려오세요." 이 동네에서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신심"은 있는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어난다. 한국은 "

가족과 창조

가족과 창조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 하시면서 가장 바라셨던 것은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창조 가운데 '다양함'을 주셨고, 그 다양함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질서'를 주셨습니다. 나아가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시면서, 인간 사이에는 '관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관계'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것입니다. 창조의 근본인 다양함과 질서 속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었습니다. '다름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인간들은 이 '다름'을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역사 안에서 주로는 '남자들의 강함'이 '여자들의 나약함'을 지배해 왔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 중에는 '여자'들이 뒷배경에 숨어 있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하느님이 서로 도우라고 주신 소중한 특성들이 인간들의 탐욕으로 잘못 사용되어 양측이 모두 피폐하게 되는 결과를 낳아 버렸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의 유약함 동안 부모는 자녀를 돌보고,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그 천진함과 유약함에서 오는 기쁨을 만끽하도록 해 줍니다. 반대로 부모가 늙어 유약해지면 자녀들이 부모를 돌보고 또 어른들은 지혜로써 자녀들을 다스리도록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자연의 순리를 통해서 안배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런 관계들 또한 역이용해 버렸지요. 젊고 힘이 있다고 아이들을 다그치고, 늙고 병들었다고 웃어른을 깔보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잊고, 자신이 결국 이르게 될 미래를 무시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결과물들을 고스란히 되받고 있지요. 하느님께서 이루신 것들은 다 좋은 것들이었는데,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하느님을 뛰어 넘고자 하면서 우리가 가진 능력들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우리 주변에 놓인 세상은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인 세상'입니다. 성가책 한 권이 있을 때에 열심한 가톨릭 신자에게는 그것이 성가책이지만, 지금 추위로 얼어죽을 사람에게 그것은 불을 때워야 하는 땔감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계를 우리의 관점으로 꾸려 나갑니다. 사물에 대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는 많은 경우 외적인 것으로 타인을 '판단'해 버리고 맙니다. 실상 우리는 아무도 올바르고 합당하게 판단할 수 없음에도 매번 이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쫙 빼입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면 극진히 대접하고 후줄근한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은 천대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의 거지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성가신 존재'에 불과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리 구원의 전달자'입니다. 누군가 땅에 반쯤 묻힌 다이아몬드를 알아보면, 그 땅이 얼마나 더럽든지간에 그 흙을 손에 묻히면서 보물을 파내어 그것을 씻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죄인들, 나약한 이들, 어둠에 쌓여 있는 이들은 이러합니다. 이 가운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질문이 존재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요? 행여 예수님은 '감실 안에 머물러 계시는 분', '미사 때나 만나볼 수 있는 분'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지극히 가까이 머물러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던 이들이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리의 멸시를 받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 같은 존재로 치장하고 높이 띄우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예수님은 수난당하고 죽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정의

정의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꼬마1: (사탕 2개를 가지고 있음) 꼬마2: 사탕 좀 나눠먹자. 꼬마1: 안돼, 내가 다 먹을거야. 꼬마2: 어차피 다 못 먹잖아. 좀 나눠줘. 꼬마1: 안돼, 다 먹든 못 먹든 이건 내 거야. 여기까지의 꼬마2의 생각이 우리가 세상 안에서 생각하는 정의입니다. 원래 있던 것을 상하게 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권리를 지키는 것이지요. 자, 앞서의 상황에 어머니를 불러 볼까요? 어머니: 왜들 그러니? 꼬마2: 엄마 얘가 사탕을 두 개나 들고 있으면서 자기가 다 먹을려고 해요. 어머니: 사실이니? 꼬마1: 이건 내 거란 말이예요. 내가 힘들게 아버지 리모콘 드리고 받아온 거라구요! 어머니: 얘야, 리모콘을 가져다 드리는 건 네가 아들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아버지가 사탕을 주신 건 네가 이뻐서 그런거야. 그리고 네가 그 사탕을 나누어 먹으면 아버지가 얼마나 너를 더 이뻐해서 더 많은 사탕을 주시겠니? 생각해보렴. (꼬마1은 계속 고집을 피우고 어머니는 울고있는 꼬마2를 데리고 가서 껴안고 위로해 준다.) 어머니가 생각과 행동이 훨씬 하느님의 정의에 가깝습니다. 강요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길 바라고, 약한 자를 보듬어주는 그 사랑.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생각하는 '정의', 올바른 길입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정의'를 배워 알면서도 끝까지 우리의 정의를 고집하고,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했던 대로 우리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는 이상은 '죄인'의 상태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거부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죄인의 상태에 머무르는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인간적인 '정의'대로 죄인에게 합당한 대접을 받게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은총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준비물과 금지품목

복음을 전하는 자의 준비물과 금지품목 오늘 복음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준비물 -마귀를 쫓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하느님의 권능:기도) -하느님의 나라의 선포(복음화: 말씀) -병자의 치유(복지활동: 실천) 금지품목 -지팡이(육체적 약함, 즉 '건강'의 의지처) -여행 보따리(만일을 위해 뭔가를 저장해 두고픈 마음, 즉 '미래' 의지처) -빵(현세의 '생명'의 의지처) -돈(모든 것을 구할 수 있는 힘, 즉 '권력'의 의지처) -여벌 옷(외적인 깔끔함, 즉 '명예'의 의지처) 오늘날에 예수님의 명령이라면서 이 말씀을 곧이 곧대로 실천한다면 세상에서 '병신'소리를 듣기 딱 좋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나아가 일흔 두 제자)를 위한 하드 트레이닝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복음 이후에 예수님은 수난에 임하면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챙기라고 하십니다. (루카 22장 36절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하지만 예수님의 이 하드 트레이닝의 준비물과 금지항목에서 먼저 준비물의 항목을 모아보면, 기도, 말씀, 실천이라는 '하느님의 권능'들이 나옵니다. 금지품목의 항목을 모아보면, 건강, 미래, (현세의) 생명, 권력, 명예라는 '세상의 의지거리'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 두 줄기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의지거리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어디에 기대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두고 있을까요? 여전히 금지품목의 것들에 온갖 희망을 두면서 걱정에 사로잡혀 계신지요, 아니면 예수님의 준비물품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계신지요. 미

시간의 세로개념(채우는 시간)

시간의 세로개념(채우는 시간) 지금부터 두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 소년은 현대를 살아간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부모가 있고, 신앙심이 있다. 다만 이런 모종의 것들을 현대적인 배경에서 이루어간다. 즉, 아이폰과 컴퓨터, 텔레비전과 비행기가 날라다니는 현대적인 배경 속에서 이러한 삶을 이루어나가고 있다. 다른 한 소년은 200년 전의 과거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마찬가지이다. 친구들이 있고, 부모가 있고, 신앙심이 있다. 다만 200년 전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이루어간다. 즉, 차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아이폰이라는 건 상상도 못할 시기이다. 둘의 놀이문화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논다'는 것은 똑같다. 둘이서 학교에 가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배운다'는 건 똑같다. 이런 수평방향의 시간의 서로다른 두 파트(2012와 1812) 속에서 그 두 소년이 하루를 살아가면서 채워 나가야 하는 시간의 수직방향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현대의 소년도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을 더 사랑한다면, 그의 수직방향의 시간은 채워진 것이고, 과거의 소년도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을 더 사랑한다면, 그의 수직방향의 시간도 채워지는 것이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서 둘의 활동은 기상, 세면, 아침식사, 오전활동, 점심, 오후활동, 저녁, 친교시간, 수면. 이라는 일상의 활동에서 차이가 전혀 없다. 그럼 하루의 수직방향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혹은 매 순간의 수직 방향을 무엇을 기준으로 둘 것이며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답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을 추구하면 된다. 하느님은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신다. 아침에 일어나고, 세끼 잘 챙겨먹고, 일 열심히 하고, 적당히 쉬고 놀고, 그리고 수면을 취하기를 바라신다. 다만 그런 가운데 '

요한복음 3장

요한복음 3장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밤이라는 시간은 어둠의 시간이고 은밀한 시간, 비밀스런 시간이다. 니코데모가 이를 택한 이유는 드러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고 있긴 하지만 숨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단락의 마지막 말씀이 더욱 인상깊게 와 닿는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는 동문서답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말하고 니코데모는 인간적인 시선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멸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러 오신 분이시다. 오히려 심판하는 이들은 우리 자신들이다. 진리를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아 거짓이 되고, 빛을 받아들이지 않아 우리 스스로 어둠이 되어가는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서는 이런 비유를 들 수 있겠다. 사제 한 명이 상주하는 가톨릭 성당이 있는 작은 마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온다. 마을엔 일찍부터 모두들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저 관습적인 것으로만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악습에 젖어 있었는데 개신교 신자들이 와서는 열심히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술주정을 하던 이가 술을 끊고, 엇나가던 자녀들이 돌아오며, 두 마음을 품던 자들이 하느님에게로 온전히 자신을 봉헌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과연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저주해야 할 것인가? 각자 고민해 보시라. 다만 요한 세례자의 말을 들어보자.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

마르코 복음 12장

마르코 복음 12장 소작인의 비유는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비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그토록 아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또 반대로 그런 사랑에 말도 안되게 거부를 행사하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만 머릿속에 넣고 있어도, 실상 성경의 모든 내용의 핵심 줄기를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일상 안에서 평소 변변치 않게 생각했던 것을 말합니다. 기도, 그걸 도대체 해서 뭘 하는가? 미사는 주일만 가면 되지, 영적인 삶?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게 걱정인데 신앙이 밥먹여 주는가? 이런 말들을 달고 사는 사람이나 아니면 성당에는 오고 성당 활동은 하더라도 늘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 '하느님' 또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전혀 세상 살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주변적인 존재로만 인식되어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마치 보험에 들듯이 먼~ 훗날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안전장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마구 대하던 돌이 훗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부실하게 생각해 왔던가 하는 것이 들통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영원의 건축물을 짓기 시작하기 위해서 머릿돌을 쓰려고 찾아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에다 버렸는지 어떤 모양인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제에게 내는 세금"에 관한 일화에서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흔히들 착각하기 쉽습니다. 돈은 국가에게 신앙은 하느님에게라는 식의 이분법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가 가까이 하는 것

더러운 걸 자꾸 만지면 당연히 우리 몸도 더러워진다. 반면 깨끗한 걸로 그 부위를 닦으면 다시 깨끗해진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더러움을 자꾸 찾는 이들은 그 영이 안전할 수가 없다. 반면 영적인 거룩함을 찾으려는 이들은 그 영이 더욱더 맑아진다. 내내 돈생각만 하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레 그 돈과 연계된 온갖 감정들이 끼어든다. 탐욕, 시기, 방탕, 육욕 등등이다... 반면 하느님의 말씀을 늘 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레 그 말씀의 힘과 위로가 다가온다. 인내, 평화, 참 사랑 같은 것들이다.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술자리에도 함께 할 수 있고, 그들의 여흥에 끼어들 수 있지만, 그만큼 다른 거룩한 활동에 힘을 쏟지 않으면 이내 그런 흥미거리에만 마음이 쏠리게 마련이다. 우린 그렇게 나약한 존재들이다. 십자가를 붙들지 않으면 당연히 그 나무의 열매도 얻지 못하는 것이 수순이다.

진정한 '평화'를 찾으세요?

연중 25주 주일 강론 제1독서: 의인에 대한 악인의 생각(평화를 헤치는 악인들의 생각) 시편: 의인들의 진정한 안식처(진정한 평화의 근원) 제2독서: 평화에의 추구(평화에 대한 조언) 복음: 낮은 자 되고, 낮은 자를 받아들이기(평화를 이루는 근원적인 방법) 오늘 복음은 이 '평화'라는 한 주제로 묶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평화'를 사랑하십니다. 단순히 고요해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료한 상태가 아닌(지금 남북의 휴전관계처럼...) 하느님을 의지하는 이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평화'말입니다. 뭐든 신경에 거슬려하고 반대하려드는 족속들이 있습니다. 평화를 모르는 이들이고 평화로운 이들의 평화를 시기해서 시험하고 빼앗으려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지요. 그들의 평화를 혼탁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그 평화가 자신들에게 흘러들어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빈정대기'입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보고 그렇다고 자신의 영적인 안정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바라는 게 너무 많은데도 아닌척 하고 원치도 않으면서 필요한 척을 합니다. 마치 어린애가 친구가 배도 고프지 않으면서 친구가 먹는 걸 보고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듯이 이런 이들도 주변의 것들에 너무나 쉽게 좌우되고 정작 자신의 내면이 진정 갈구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이들의 문제는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노래가사로 대변됩니다. (신해철 노래이죠 ㅎㅎ) 평화를 구하는 이는,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에수님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어린아이'는 장난꾸러기입니다. 천진함으로 자꾸 사고를 치고 다니지요. 길가에 나가지 말래도 자꾸 나가고, 몸에 해로운 것을 먹지 말래도 자꾸 먹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지요. 평화를 구하는 이는, 주변에 이런 사랑을

마르코 복음 11장

마르코 복음 11장 (마찬가지로 복음서 펴 놓고 같이 보세요.) 이 장과 뒤이은 12장은 예수님의 여정 중에 '위선자들의 간계'가 가장 돋보이는 장이다. 예수님은 이때부터 보다 본격적으로 표징적인 사건들을 드러낸다.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성전 상인들을 보란듯이 쫓아내는 듯의 일련의 행위들로써 당신의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신다. 헌데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라는 말이 있다. 예수님의 대상 선택의 기준이다. 예수님은 튼튼하게 훈련된 외양이 멋진 종마가 아니라, 그저 아무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 볼품없지만 순수한 존재를 찾으신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재주가 너무나도 많고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순하고 때묻지 않은 사람이다. 영적으로 순수한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그토록 애를 쓰는 건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세상에 쓰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하느님에게는 과한 재주가 필요가 없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건, 아무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이다. 무화과 나무를 향한 저주에 관한 장은 의외로 좀 놀랍다. 하지만 친절하게도 뒤이은 구절에 그 해설이 나오긴 한다. 그럼에도 때가 이르지 않은 무화과 나무를 향해 저주를 내린다는 건 여전히 이해하기 힘이 든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도 닥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면 추수를 할 준비가 될까? 언제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셔도 된다고 우리 스스로 생각할까? 사실 그런 때는 없다. 우리의 추수 시기는 미래의 어느 한 점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예수님이 날 찾으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예수님

마태오 축일 강론(도구의 특징과 병자의 두 부류)

마태오 축일 강론 도구는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특질을 사용하게 됩니다. 칼은 의사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용도로 강도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용도로 쓰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본성상 지닌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급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누군가는 느긋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닙니다. 급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하느님의 손길에 있으면 당신의 일을 이루는 데에 주저함이 없게 되고, 그가 어둠의 손길에 있으면, 괴팍하게 다른 이들에게 성질을 내게 될 것입니다. 느긋한 성격을 지닌 이는, 하느님과 더불어 만사를 인내로이 참아 견디고, 어둠의 손길에 머무는 이는, 이웃의 아픔을 느긋하게 무시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오를 고르셨습니다. 마태오가 가진 온갖 장점을 살려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오는 그 직분을 훌륭히 수행해 내었고, 결국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됩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하느님 앞에 선 3 종류의 인간들입니다. 먼저는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성인'입니다. 분명 이 세상에서부터 존재하지만 0.0000000001%의 비율로 존재합니다. 그럼 나머지는 다 죄인들, 영적 병자들입니다. 헌데 이 죄인들이 두 부류로 나뉩니다. 자신의 미흡함을 알고 약을 찾는 병자들과 자신들이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는 채로 중한 병들을 무시하는 병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부류의 병자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병자들에게 최고의 병원이자 약국, 최고의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둘째 부류의 병자들은 다가오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무시하고 침을 뱉고 심지어는 살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신들의 병을 치유하러 온 의사를 죽여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은 이 두 부류의 병자들로 나뉘어집니다. 우리는 과연 어느쪽에 속할까요? 당신은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까? 기도하시나요? 영적인 조언을 구

그리스도인과 일

그리스도인과 일 일이 생기면 하면 되고 못할 상황이면 안하면 된다. 아니 못하는 거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면 노력하면 되고, 그래도 안되면 안되는거다. 세상 일이라는 건 이런거지, 걱정한다고 해서 일이 더 잘되거나 하진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나머지는 어쩌겠는가... 설령 일이 잘못되었다고 치자, 내가 잃을 것이 무엇인가? 내 위신, 직분, 명성... 이게 허황하다는 건 우리가 늘 가르치는 바가 아닌가? 밥줄? 생명? 나는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밥을 굶을 리가 없다는 걸 믿는 바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사실 죽는다는 건 아직 미지의 영역이라 닥치기 전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내게 닥쳐올 죽음의 고통이 두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있잖은가? 반면 우리가 헌신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구원이다. 사람은 중요도에 따라서 일을 하게 마련인데, 언제나 세상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들을 들이대며 아우성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숨겨져 있다.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나락에 떨어지는데 세상 일이나 걱정하며 있는 책임있는 자들이 있다. 우리가 나가서 한 마디 말을 해 주었더라면 적어도 한 번은 더 생각해 보았을텐데, 그 기회를 갖지 못하고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나는 영혼들이다. 먼저 나 자신의 내면을 추스리고 세상을 향해 나서야 한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될 것이다. "아직 못합니다."라는 말은 하지 말자. 다음의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예레미야 1장 7절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장터에 앉아 싸우는 아이들(짝수해 연중 24주 수요일)

장터에 앉아 싸우는 아이들 내가 이걸 하는데 너는 왜 저걸 하니! 내가 이쪽인데 너는 왜 저쪽이니! 나는 이 당인데 너는 왜 저 당이니!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저마다 자신들이 옳다고 나서니 누구 말을 믿어야 하고 어디로 가야할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걸까? 나는 오직 신앙인들에게만 권고한다. "하느님의 사랑 위에 서라." 그 밖의 것들은 원래가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는거다. 하느님 위에 선 사람, 그분의 사랑을 딛고 굳건히 선 사람은, 모든 것을 좋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미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행동했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보에 술꾼으로 보였다. 모든 사람이 숨을 쉬기에 살아가듯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만 쥐고 있다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갈 수 있다. 한창 정세가 어지러운데, 이당이니 저당이니 이 인물이니 저 인물이니 내세울 필요도 없고, 그저 내가 하느님 사랑 위에 서 있으면서 좋겠다 싶은 사람이면 그만이다. 두 친구가 곧잘 언쟁하는 것들은 사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 친구가 신앙을 잃어가는 것으로 힘들어한다면 결연한 어조로 신앙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신앙인의 하나 장점은, 벼랑 아래로 떨어져도 그 밑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는 거다. 그러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신앙인'들을 조심하라. 내가 여기에서 구분하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세례의 유무, 가톨릭 신앙의 유무로 따지지 말라. '사랑'을 추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신앙인'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신앙의 텃밭을 황폐하게 만들고 온갖 세상의 걱정거리들을 끌어다 와서는, 신앙의 소중한 밭을 시궁창

요한복음 2장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요한 복음의 2장에 이르러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접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이 기적이 아직 때가 이른 데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이셨습니다. 이 기적에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인아, 여자야'라고 낮춰 부릅니다. 이 말인즉슨 예수님은 지금 한 인간의 아들의 위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외아들로서의 자리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뜻합니다. (훗날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똑같은 명칭으로 어머니를 부르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잉태를 다루면서 성모님의 자리를 밝히 드러내지만, 요한 복음에서 우리는 어찌보면 더 실제적이고 필요한 성모님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청원자'로서의 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의 위치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람들의 필요를 전달하는 전달자이신 어머니, 그분은 여전히 교회의 어머니로서 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소중한 어머니를 내칠 수 없습니다. 개신교의 형제들이 제 아무리 '어머니'를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의식있게 복음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어머니의 소중한 모습을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내칠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이 성모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우리 가톨릭 교회 안에서 안타까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칫 아드님의 소리를 무시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결코 당신 자신을 들어높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늘 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드님을 따르고자 노력했습니다. 헌데 사람들이 성모님을 '상품화'하면서 성모님의 기적을 찾고 성모님의 중재의 자리에 자신들의 탐욕을 끼워넣어 성모님의 본뜻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성전 정화사

요한복음 1장

요한복음 1장 요한 복음의 1장은 창세기의 시작 부분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지요. '말씀'이 계셨다고 전합니다. 이어 이 말씀은 '하느님'이었고 나아가 이 말씀은 '빛'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요한 복음의 이 첫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곧이 곧대로 분석하려 드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서술하는 대상 자체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그것을 '비유'로 서술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 비유를 따라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 우리가 말을 하는 데에는 어떤 과정이 수반될까요? 내가 '지금부터 이 글을 쓰겠습니다'라고 입밖으로 내뱉을 때에는 그 이전에 먼저 '생각'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더불어 나의 '의지'가 존재하지요. 결국 말씀은 나의 생각과 의지의 산물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을 담은 우리들 역시 하느님의 생각과 하느님의 의지를 닮을 수 있습니다. 다만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지요. 우리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니 우리가 말씀을 담고자 노력한다면 어느 날엔가는 우리 역시도 하느님의 생각과 의지를 아무 거리낌 없이 담아내게 될 것입니다. '빛' 빛은 다른 대상을 비춥니다. 사물들을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투명함이 있는 곳이면 이 빛이 스며듭니다. 가리워진 곳에는 빛이 들어가지 않지요. 빛은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빛을 가로막을 순 있어도 그 빛에 밝음을 더할 순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빛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맑은 마음

요한복음 도입

요한복음 도입 요한 복음은 관상가들의 복음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하느님과 완전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복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한 소개나 받고(마르코) 간간이 만남을 시작하고(마태오) 그 사람의 외적인 모습을 분석하기 시작했다면(루카) 이 복음은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평이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떠올려보십시오. 둘이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키득대고, 서로 더 가까이 다가서서 뽀뽀도 하고, 안고도 싶고 아주 난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주변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좀 어처구니가 없지요. 요한 복음을 처음 접하는 신앙인들도 그런 '의아한' 느낌과 마주하게 됩니다. 도무지 이 복음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쉬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상대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을 배우고 싶다면,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이제부터 그 '사랑'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연중24주주일)

십자가 한 사람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에 그의 신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세상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유없어 보이는 고통을 자진해서 지고 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고통'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고통'이란 우리의 구세주께서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기꺼이 감내하신 것이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마땅히 지고가야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하느님 앞에 죄인들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주시는 그 어떤 것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정한 '죄'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짐'인데,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하느님을 '고정된 어떤 것'으로 착각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법률 규정'을 두고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고 그분의 뜻이 담겨 있노라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건 인간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막기 위한 마지막 울타리일 뿐이고 우리들의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인식이 불명확해서, 그분을 거스르는 죄가 존재할 수 없고, 그들은 이 세상을 제 딴에는 '정의롭게' 꾸려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에게서 더욱 멀어지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식이 없기에,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고통'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 다니는 A씨는 주일 미사에 꼬박꼬박 참

관점의 전환(마르코 9장, 10장)

마르코 복음 9장 10장 "관점의 전환" 마르코 복음 9장과 10장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가파른 상승의 단계로서 통칭해서 "관점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두 장을 걸쳐서 드러나는 삶을 통해 제자들의 사고를 바꾸고자 노력하신다. 그 첫 시작점은 거룩한 변모로 유명한 장면. 높은 산에 올라가 일단 한 번 제대로 보여주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본격적인 가르침을 시작하기에 앞서 실제로 보여주신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할 뿐,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진정한 영광을 보이는 모습으로 목격하였지만, 목격한다고 해서 그것이 마음으로, 삶으로 내려온다고 한다면 큰 착각이다. 엘리야는 이미 다시금 왔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도무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엘리야는 이 시대에도 온다. 예언자는 온다.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늘 우리 주변에 있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싶은 대로 그들을 다루어 왔다. 예수님의 변모, 엘리야의 다가옴은 추상적인 어떤 사건, 과거의 어떤 사건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어 예수님은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면서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을 깨우쳐준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다. 믿는 사람은 기도하게 된다. 이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외쳐봐야 소용없고, 믿지 않으면서 기도하려 애써봐야 헛물 켜는 거다.(그 기도는 곧 그치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랑한다면서 그와 절대 연락은 안하려는 것과 같다. 그와 어쩔 수 없이 연락은 하면서 내면으로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사랑하면 만나고 싶어지게 되고, 자꾸 만나면 더욱

뭔가에 사로잡혀 있다!!!

뭔가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자유로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때에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다. 뭔가에 사로잡히면 그 생각에 얽매이게 된다. 귤과 사과가 양쪽에 있고 우리의 생각이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때에 둘 중에 지금 내가 먹고 싶은 걸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행여 '사과는 죄스런 과일'이라는 사고를 지닌 사람은 자신 앞에 놓인 두 과일을 합당하게 선택할 수가 없고, 당연히 사과를 거부하고 남은 귤을 집게 된다. 적지 않은 세상사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예컨대 두 문화를 놓고 보았을 때에 막연히 가지게 된 한 문화에 대한 우월주의는 다른 문화를 무턱대고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 문화는 수천년의 역사 속에 삶의 지혜와 아름다운 전통 속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서양 문화의 유입 이후, 만일에 지금 한복(개량된 생활한복이 아니라 오리지널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길에서 만난다면 우리는 이상한 마음부터 들게 된다.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는 막연한 서방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흰 피부, 유럽식, 서구식, 꼬부랑 언어... 이런 것들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그 근원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에 상대적인 것들을 막연히 무시해 버리고 만다. 그 밖에도 적지 않은 영역에서 이런 고착된 사고를 접하게 된다. 무언가를 합당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하느님이 만든 최초의 인간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하느님과 자연 사물 사이에 관계를 잘 깨닫고 있었다. 하느님은 그야말로 천지의 창조주이시자 진정한 아버지였고, 만물은 우리가 잘 다스려야 할 대상이었다. 제대로 균형잡힌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마음에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런 시도를 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가졌던 태고의 은총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지금 우리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기적

기적 어제 병자 봉성체를 다니면서 목에 암이 걸린 한 아주머니에게 성체를 모셔다 드리러 갔다가 병자성사를 드리고 왔다. 아주머니는 힘겨워하고 계셨다. 간간이 팔을 들어올리긴 하는데 의식은 없어 보였다. 나는 죽음에 임박한 이들에게 주는 사죄경을 고함치다시피 해 드렸다. "난 교황님의 권한으로 당신의 모든 죄를 사합니다. 아주머니 들려요? 이제 죄 다 용서 받았으니까 걱정마세요!!!!!!" 그리고 오후에 운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글을 적는 동안 마석진 신부가 가서 장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기적'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은 설령 기적을 실제로 목격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찾는 건 기적이 아니라 어린 시절 설인, 네스호의 괴물, UFO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호기심의 충족일 뿐이다. 이상한 현상이 닥치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것과 맞닥뜨린다 하더라도 '아 참으로 희한하다'라는 반응 외에는 별다른 건수를 찾지 못할 것이다. 기적은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자연현상을 넘어서서 일어날 수도 있고, 자연현상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모든 것들 중에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바로 '기적'인 것이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까지 자신의 생명과 싸우다가 결국 사죄경을 듣고 세상을 떠난 이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접하지 못한다면 '기적'을 읽어내지 못하고 '그건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그에게 그건 그저 우연일 뿐인거다. 그에게는 우리의 탄생도 우연이고, 죽음도 우연이며 곳곳에서 때가 되면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사건들도 모두 우연에 불과하다. 결국 이 세상은 거대한 톱니바퀴에 불과하며 사람들은 짜여진 시나리오대로 살아가다가 죽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에겐 &#

진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주라.

진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주라. 너무 어렵다. 말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육화의 신비', '신앙', '그리스도론', '케리그마' 도무지 뭔 소린지 알 수가 없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해서 사람들에게서 더 거리를 떼어놓고 있다. 진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주라. 물을 따라 마시라고 준 잔에 더 이상 금칠을 하지 말라. 행여 도금이 벗겨질까 겁이 나서 늘상 닦고만 앉았는데, 그 가운데 목마른 군중은 갈증에 허덕이고 있다. 더군다나 잘 모셔 두었다고 생각한 그 잔은 녹이 슬기 시작해서, 물 조차도 마시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있다. 신앙은 삶으로 녹아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거다. 짠 맛을 잃어도 큰일이지만, 녹지 않아도 큰일인거다. 진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주라. 현학적인 말로 진리를 감추지 말고 빛을 등경 위에 올려두어 사람들이 보게 하라. 그러자니 가진 게 너무 많구나. 지켜야 할 게 너무 많구나. 이 역설을 어찌한단 말이오. 상아탑을 쌓아놓고 식견이 있는자는 배우라며 팔짱만 끼고 있어서는 안될 시기가 되었다.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메고 있고, 진리를 찾다가 어설픈 것들을 만나 속아 넘어가고 있다. 진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주라. 오늘의 사제들의 사명이 될 터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교회를 살리는 길이 될 터이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우리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가늠하고자 애를 쓴다. 그리고 생각을 이리저리 해보다가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하느님은 말도 안되는 걸 요구하신다고 하면서 지레 포기해버리고 만다. 예를 들면 참 좋은 사람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고생만 죽어라 하다가 죽음도 비참하게 끝나버렸다. 우리의 두뇌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야 여기에는 답이 나오질 않는다. 의로움을 위해서 기를 쓰고 일을 했는데 얻는 건 도무지 비난과 조롱과 반대 뿐이었다. 왜 그런 거냐고 아무리 계산을 때려봐야 답은 없다. 문제는 그 범위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고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반드시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충분히 하느님의 생각을 짚어볼 여유가 된다고 착각한다. 복잡한 시계 안의 한 톱니바퀴가 그 시계를 만든 장인의 생각을 짚어 보려는 노력이랄까? 피조물에게 당신의 계획을 읽히면 이미 창조주가 아니다. 그건 우리가 만든 또다른 피조물에 불과하다. 사실 그런 하느님을 믿는 많은 엇나간 신앙인들이 있다. '하느님은 이러하시다'고 당신의 계획에도 없는 정의를 내리며 하느님의 마음은 넘겨짚으려 하며 사람들을 미혹한다. 예수님 역시도 당신이 이 땅에 인간으로 사명을 수행하고 계실 때에 도무지 계산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잠시나마 하느님에게 당신의 계산 결과를 아뢴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치워 달라고" 말이다. 그럼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에 가장 좋은 처신은 무엇일까? 이 역시 예수님이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니, 그 이전에 성모님이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니다, 아주 오래 전에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리고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보여주셨다. 그것은 바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이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하기까지 이르게 된 신앙인은 그나마 다행이다. 왜냐면 평소에는 하느님의 뜻이고 뭐고

영적 뒤틀림 찾기(영적 지도자들을 위한 조언)

영적 뒤틀림 찾기(영적 지도자들을 위한 조언) 세상의 많은 것들은 인과관계로 서로 얽혀 있다. 잘 만들어진 조각상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데 부서지거나 긁힐 이유는 없다. 기껏해야 먼지나 좀 앉을 뿐이다. 사람에게서 이상 현상이 나타날 때에는 필히 그 이유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을 찾음에 있어서 우리는 겉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물리적, 심리적) 외에는 그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이유"들, 즉 영적인 이유도 분명히 존재하게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근본에는 두 가지 큰 방향이 존재한다. '하느님께 다가서려는 방향'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려는 방향'이 그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선의'와 '악의'로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하느님에게 다가서려는 이, 그분의 뜻을 찾으려는 이는 세상의 모든 사물 안에서 그분의 감춰진 뜻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세상의 어두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기어이 발견해낸다. 이런 훈련이 된 사람은 언제 어느때나 하느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평화' 속에 머문다. 반대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려는 이는, 세상을 계산해 내기에 바쁘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만큼 '자신의 뜻'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에 뜻에 반대하는 세상에 맞서기 위해 24시간 긴장해 있어야 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서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늘 극도의 긴장감 속에 살아간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 사람의 이상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병이 될 수도, 성격적인 결함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집안이 부유하고, 어릴 때부터 원하는 걸 다 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바로 '영적인 뒤틀림'이 있는 사람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이 '틈'을 잘 발견해서 조언해 주어야 한다. 그저 거룩한 말마디나 몇마디

세상의 바보

연중 23주 화요일 강론 세상의 바보 오늘 복음의 제1독서에 나오는 말이다.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주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지지 않으려' 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쓰러져도 쓰러지지 않으며 죽어도 죽지 않는다. 헌데 상대가 밟으려는데 왜 기어코 받아치려 하는 것인가? 우리가 낮은자 되면 낮은 자 될수록 용수철이 눌리면 눌릴수록 더 높이 튀어오른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걸까? '지는 걸 두려워하는 마음'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나 역시도 만만찮게 두려워했고,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은 존재한다. 하지만 더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의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면, 마땅히 더 소중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 순간에 덜 소중한 것을 쥐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덜 소중하다고 말만 하고 실제로는 더 소중히 여기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 중요하고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 주머니의 돈이 중요하고, 현세적인 가치들을 하느님에 앞세운다. 바나나를 까서 껍질을 먹고 알맹이를 버리면 '바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이를 당시의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꾼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도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놀랍기만 하도다. 그저 주일미사나 나가는 것으로 저절로 우리의 구원의 열매가 덜렁덜렁 익으리라고 착각하지는 말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십시오.'라고 한 사도의 말을 귀담아 듣도록 하자. 구원은 믿음으로 얻어지지만, 그 믿음은 일순간의 마음의 전향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런 마음의 전향이 아무런 준비없이도 누구에게나 선물로 주어진다고 착각하진 말자. 하느님을 향해 돌아설 순 있지만,

고통(우리 몸의 부르짖음)

고통(우리 몸의 부르짖음) 어제 하루종일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고만 위가 탈이 났다. 오늘은 좀 굶어봐야겠다. 위가 알싸리~ 한 것이 나에게 반항하고 있다. "그러게 내가 작작 집어넣으랬잖아."라고 나에게 투덜대는 모양이다. 통증이라는 것은 우리의 몸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수단이다. 통증, 고통은 우리 몸의 솔직한 고해성사이며, 따라서 우리는 통증이 오는 부위에 가장 먼저 관심이 가게 되어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한 우리의 교회도 하나의 몸이라고 생각해 보았을 때에, 마찬가지의 방법이 적용된다. 교회가 한 마음으로 가장 기도를 많이 하는 부분이 바로 아픈 부분이다. 실제로 그 기도는 가장 가난한 이들의 억압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다. 헌데 사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영악한지, 신경계를 교란시키는 중이다. 실제로는 교회 내의 억압받고 소외받은 이들, 고아와 과부들과 죄인들이 아파하고 그들의 통증이 교회의 머리로 전달되는 것이 맞건만, 사탄은 우리가 엉뚱한 기도를 하게 만든다. 억압받고 굶주리는 이들을 위해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하고 움직여야 할, 이 시급한 상황에, 자기 아들내미 대학 붙게 해 달라고 자기 직장 좋은 데 구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앉았다. 당신의 몸에서 발이 썩어나가서 조금만 있으면 걷지도 못하게 생겼는데, 손톱에 메니큐어가 마음에 안든다고 거기에만 온통 신경을 쏟고 있는 판이다. 무엇을 위해서 아파하는가?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가? 진정 가난한 이들이 아픈가? 아니면 교회에 황금 성작과 성합이 없어서 아픈가? 오늘은 내 위를 좀 보살펴야겠다.

하느님이 주시려는 것

하느님이 주시려는 것 우리는 그분의 선물을 짐작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매번 깨닫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늘상 뛰어 넘는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예전엔 이런 저런 바램들이 많았다. 좀 더 좋은 환경에 좀 더 좋은 물건들로 내 삶을 도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만족은 존재하지 않았고,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감만 더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반대로 때가 되면 필요한 것들이 늘 존재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얼마까지를 '필요'로 느끼는가 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하루를 빵 하나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의 모든 진미를 먹고도 여전히 다른 음식을 생각하며 불만족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세상의 사물들, 세상의 것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한계는, 우리의 '필요'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며, 길 가다가 마주치는 걸인에게 하는 적선은 언제나 권유할 만 하다. 물질적인 건 그렇다 치고, 하느님의 진정한 관심사는 '영적인 차원'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입양'하려고 준비 중이시다. 피조물의 수준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을 준비중에 있다. 이 말인즉슨, 입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 입양의 수단은 무엇인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고 교적에 등재되어 있으면 '입양'이 종료되는가? 오호호... 천만에. 하느님은 돌들에게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 하늘 나라의 백성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돕는 사람이다. 헌데 그분의 뜻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느님의

간극

간극 우연한 기회에 내 과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참 집요하게도 '내가 원하는 것'에 집착하곤 했었다. 물론 지금이라고 아니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 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나 '쓸데없이' 원하던 게 많았던가 싶다. 전자기기에 꽂히기도 했고, 무슨 재주 좀 키워보겠다고 난리도 쳤다. 참 철없는 나였고, 지금도 철 없기는 매한가지다. 사실 조금은 알고 있다. 내가 주변에 대충 어떻게 비춰지는가 하는 것 정도는. ㅎㅎㅎ 하지만 지금은 때로는 조금 일부러 그런다. 그마저도 없으면 너무 냉철해 보일테니까. 사람 사이에는 '공간'이 필요한 법이다. 상대가 나에게 들어올 수 있는 '공간' 내가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 이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서로 다치기 쉽다. 내가 무심코 내민 무언가가 상대에게 흉기가 되어 꽂히기 쉬울테니까. 모르긴 해도, 예수님도 때로는 제자들 앞에서 '싱거우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왜 먹을 것이 좀 없느냐며 제자들에게 부탁했다고 생각하는가? 왜 부활하신 그분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지 않고 부활한 티만 팍팍 내었다면 늘 오로라를 풍기면서 천상의 사정만 이야기하고 다녔다면, 두려운 마음에 아무도 다가서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좀 부실해야 상대가 나를 도와주러 올 수 있다. 때로는 좀 울기도 하고, 때로는 칭얼대기도 하고, 때로는 어리광도 좀 피우고, 때로는 짜증내는 모습도 좀 보이자. 괜찮다 그정도는 ㅋ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우리 동생들에게 좀 징징대야겠다. ㅋㅋㅋ

에파타(연중 23주 주일)

귀머거리 벙어리 이야기(주일 복음 강론) 먼저는 사람들이 데려왔다는 것에 조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나 당사자인 그가 다가온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람들이 호기심에 데려왔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다음의 예수님의 행동이 눈에 띈다.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예수님은 군중의 어리석은 눈길을 피하고 싶었다. 예수님이 하는 모든 기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펼쳐 보이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저 자기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예수님은 이를 피하신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나 스스로도 잘 살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에 하나되려고 살아가는 삶인지, 나의 인간적인 부분을 채우려고 하는 삶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늘 평화를 추구하고, 인간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안에 숨겨진 탐욕과 이기심에 이런 저런 충돌을 경험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행동이다. 예수님은 말씀 하나로 치유하실수 있는 분, 한 마디 말로 회당장의 딸과 나자로를 살리신 분이시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법이 많이, 아주 많~이 다르다. 귀에 손가락을 넣고 혀에 침을 바르신다. 그야말로, "대상자 맞춤 학습법"이다. 귀머거리 벙어리가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에게 치유를 선물하셨다. 우리가 남을 돕겠다고 나설 때, 과연 우리는 그의 방법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해치워버리고 마는지를 고민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많은 이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남에게 잘 해줬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잘 해주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무시한다며 도리어 화를 낸다. 내가 지켜볼 수 있는 선에서 그가 바라는 걸 보고 그것을 이루어 주어야 한다. 라면 박스 쌓아놓고 사진 찍는 건 돕는 게 아니다. 그건 다른 종류의 폭력이다. 선교지에 여러 원조는 필요하지만, 도대체 어디에 필요한지는 좀 물어봤으면 좋

너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너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우리에게는 누구를 나쁘게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다만 더 사랑하고 축복해줄 권한 뿐입니다. 그 외에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못되게 말하고 싶다면, 그건 필시 악마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악마에게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어두운 마음이 들 때에는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일은 '기도'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간질병자'나 '정신병자'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이들을 종종 접합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이런 병세로 드러나기 보다는, '분노하는 사람', '시비거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분노는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워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정신병자) 사람을 그 분노에 집중해서 다른 일들을 못하게 막아 섭니다.(간질병자) 하느님의 사람은 싸우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유일한 대상은, '죄악'입니다. 우리가 죄악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또다른 죄악이 아니라, 오직 '기도'와 '사랑' 뿐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가장 나약함 속에서 드러납니다. 누군가 당신을 공격할 때에 그 앞에서 더 낮은자 되어 버리십시오. 시로페니키아 이방 여인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세례 강론

공소 미사 갔다왔다. 진이 쏙 빠지는 느낌이다. 세례도 같이 있었는데, 8명의 아이가 세례를 받았다. "만원짜리를 1살짜리 아이에게 쥐어주면 값도 모르고 가지고 놀다가 크레용으로 그림 그리고 찢어 버리고 맙니다. 영적인 것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아무에게나 줬다가는 그 가치도 모르고 어딘가 내던지고 말겁니다. 세례를 받겠다면 적어도 세례의 가치는 알고 계셔야지요. 일단 쉬운 비유 하나부터 들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물로 뭘 하지요? 네, 세수합니다. '씻어내지요'. 그 다음에 식당에 밥 먹으러 가서는 물을 가지고 뭘 할까요? 네, 마십니다. '생명을 얻지요'. 강에서 수영하다가 힘 빠지면 어떻게 되지요? 네, 빠져 죽습니다. '죽음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물은 '죽음', '정화', '생명'의 세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통해 얻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세례로 헌 인간을 죽이고, 정화된 다음, 영원한 생명을 얻지요. 이 정도만 알아 두셔도 충분합니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무죄하니, 책임은 여러분, 부모님들과 대부모님들의 것입니다. 아이들의 신앙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신앙은 말로 잘 전해지는 게 아니라, 삶으로 더 극명하게 전해집니다. 술 마시고 아내를 패는 아빠에게서 자란 아이는, 자기도 자라서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사시고 그 신앙을 전해 주십시오."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간만에 세례 때문에 공소에 사람이 많이 왔길래, 온 힘을 다해서 가르쳤더니 진이 빠져 버렸다. 하지만 육체적 피로야 회복하면 되는거고, 영혼이 안타깝다. 성경의 표현대로 '목자 잃은 양들'같은 모습이 가슴이 아프다. 예수님은 현세적인 것들로 걱정하지 말라 했는데, 하늘의 새들과 꽃들을 보살피고 입히시는 분이 당연히 우리도 보살피신다고 하였는데, 이노무 인간들은

다툼

다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가 멀다하고 다툼이 일어난다. 일단은 '달라서' 그렇다. 나와 상대가 '완전히' 똑같다면 과연 다툴 일이 있을까? 내가 이 컵이 이쁘다고 생각하고 상대도 이 컵이 이쁘다고 생각하면, 서로 컵에 대한 다른 이미지를 상정하면서 다툴 일은 없을 것이다.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도, 내가 이 일을 마땅히 해야 하고 저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상대 역시도 똑같은 생각이라면 다퉈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다툰다는 것은,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하느님이 선물하신 하나의 축복인 '다양성'이다. 이 경우 다툼은 필연적인 과정이며, 우리는 그 다툼이 윤리적으로 파괴되지 않도록 '대화'를 통해서 서로 조정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다툼은 서로가 같은 걸 원하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는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밥은 두 그릇이 있는데, 두 사람이 다가와서 한 그릇만 먹으면 될 것을, 둘 다 두 그릇을 먹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경우 다툼은 '탐욕' 때문에 발생한다.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다툼은 최악이다. 이는 '대화'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이성'을 벗어난 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한 사람의 '희생' 뿐이다. 인류 역사 안에서 '다툼'이 될 법하지도 않은 다툼이 하나 일어났다. 인간이 자신의 '탐욕'으로 신의 자리를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거창해 보이는데,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하자면, '내가 원하는 것'을 신격화 시켜 놓아 버렸다. 하느님의 자리에 '돈, 이념, 자기자신, 명예, 권력' 따위를 놓아두는, '진정한 우상화'를 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데 하느님의 문

마르코 7장 8장

마르코 복음 7장, 8장 사실 복음의 다른 두 장을 하나의 주제로 통일해 본다는 것은 좀 쉽잖은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활동의 시작과 끝으로 감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진행을 살펴볼 수는 있다. 7장과 8장은 이제 아이가 걸음마를 배워서 길을 걷고 이제 산등성이를 조금 오르기 시작하는 모습과 같다. 가르침은 계속되어 이제는 보다 현실적인 주제를 다룬다. 율법과 그 근본정신이다. 이교 여인의 치유 이야기는 살짝 끼어든 양념과도 같고, 기적으로는 귀머거리 벙어리의 치유 이야기, 빵의 두 번째 기적, 베싸이다의 장님이 나온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과 더불어 그를 향한 꾸짖음, 이어 예수님의 본격적인 십자가의 가르침이 나온다. 제자들이 잘 따라와야 할텐데...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간 중간 나오는 한탄으로 봐서 좀 답답하시긴 하셨나 보다. 제자들은, 우리들은 아직도 '빵'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7장과 8장을 잘 따라온 이들은, 예수님의 사탕에서 벗어나서 보다 본격적인 가르침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따라오지 못한 이들은 이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물론 우리들이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겠지만, 실상 이거야말로 가장 위험한 상태이다. 7장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껍데기의 허상"에 대해서 가르친다. 이는 벌써 앞서 다뤄온 주제로, 무엇이 더 본질적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인데, 앞서는 약하게 드러났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가르침 안에서 이를 고발하기 시작한다. '율법주의'는 껍데기이다. '법 규정 말마디 하나하나를 잘 지키자!'는 분명한 껍데기이다. 예수님은 당시에 실제로 일어나던 일들을 분명하게 꼬집으며 말씀을 건네신다. 규정을 지킨다며 본질을 왜곡하는 이들에 대한 고발이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지위에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성당 스타일에 대한 소고

성당 스타일에 대한 소고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한 젊은 사제가 최신 유행하는 음악을 개사해서 재미난 뮤직 비디오를 하나 만들었네요. 그래서 어떤 의견들이 오가고 있죠? -의견이 분분합니다. 청년들의 흥미를 끌어서 천주교에 대한 간접적인 홍보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 또 반대로 성교회의 거룩한 분이 그런 천박한 뮤직 비디오를 만들 수 있느냐는 의견...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각자 나름의 기준으로 받아들일테지만, 저는 판단하는 건 보류하고 싶습니다. 오직 하느님이 온전히 판단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사실 '강남스타일'의 패러디야 세계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지요. 그 가운데 하나의 비디오가 '성당스타일'이란 이름을 달고, 성당의 사람들과 성당을 배경으로 해서 등장했습니다. 패러디나 개사는 사실 이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청년들이 흔히 부르는 '주님의 기도' 노래도 사실 원곡은 eres tu 라는 대중가요에서 나와서, 이를 두고도 말이 많았죠. 하지만 비단 이런 전례에 쓰이는 노래만이 아니라 그 밖에도 대중가요에서 보다 의미를 전하는 가사로 바꾸어 부르는 노래들이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런 것들이 크게 비판을 받지 않은 이유는 그저 조용히 자기들끼리 부르면서 즐기고 있고, 그닥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당 스타일'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의견이 많은 것은 일단은 그 비디오에 흥미를 느낀 성당 사람들이 이리저리 전파하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느 꼬맹이가 자기 공책에 낙서한다고 누가 뭐라겠습니까? 하지만 그 공책의 낙서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파장이 커진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요. 일단 인기를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젊은 신부님의 조금은 파격적인 사고가 크게 작용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그런 흥겨운 생각에는 박수를 쳐 주

규율과 근본정신

규율과 근본정신 어딜가나 정해진 규율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그 공동체 안에서 질서있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예컨대 우리 집에 들어올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하지만 이 동네 볼리비아 사람들에게 이는 이상한 관습에 불과해서 무심코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고, 침착하게 이런 저런 사정들을 말해가며 가르쳐야 한다. 반면 때로는 우리 자신들도 이를 어길 때도 있다. 미사를 준비하러 급하게 나가다가 뭔가를 잊어버리고 나왔다. 그럴 때는 그걸 빨리 가져가기 위해서 신발을 신고 그냥 내 방에 들어오기도 한다. 미사 시간을 어기지 않는 것이 집안에서 신발을 신지 않는 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더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덜 소중한 것은 변화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이들이 보다 더 중요한 걸 잊고, 덜 중요한 것에 매달리는 것 같다. 하느님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핑계로,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먹고 사는 문제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걸 먹고 사는데에 끌어와 같이 걱정을 한다. 먹고 산다는 건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진 걸로 감사히 먹고 살아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실상은 자신의 '더 갖고 싶은' 마음을 바탕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는 모양새이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본질적으로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현세의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희망으로 두고 살아가는 '현세의 생명'이다. 즉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최고로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부활(루카복음 24장)

부활 루카 복음의 마지막 강의이다. '부활' 이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 부활을 객관적으로 조명해 보자. ================================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들 한다. 객관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목격자들의 증언' 뿐이다. 그저 빈 무덤이라느니, 시신이 사라졌다니, 하지만 누가 옮겨갔을 수도 있고, 또 그 목격자들의 증언 역시도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세상 사람들로서는 이 모든 게 어리석은 짓에 불과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 이런 의문투성이의 사건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니, 우리의 믿음의 근본은 어긋난 것인가? 이 부활의 신앙에서 핵심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오로지 말로서만 전해지고 있는 이 사건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사물을 식별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초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감각들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맡고... 우리는 이 육체적인 감각으로 우리 주변의 세상을 우리 나름대로 구성해 나간다. 장님에게 이 세상은 시각이 있는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며, 귀머거리에게 느껴지는 세상은 청각이 있는 우리가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감각'하나가 등장한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영적 시각'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제6의 감각"이 있기에, 모든 것을 전혀 색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한 꼬마에게는 자기 앞에 놓인 200원이 전부이다. 그래서 그가 살 수 있는 건, 자기가 원하는 것들 가운데 200원이 허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부족하고 불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다른 꼬마에게는 자기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아버지가 가진 엄청난 돈이 있다.

사탄(어둠의 영)

사탄 어둠의 영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해볼까 한다. 그 기원이나 종류 같은 건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건 거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것들일 뿐이다. 정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는, 과연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것들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맛있는 음식 냄새는 우리의 코로 들어와 냄새를 담당하는 신경세포를 건드려서 우리가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걸 인지하게 한다. 다른 시각도 마찬가지이고 청각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영'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양상으로 다가온다. 영적인 것들은 우리에게 영적인 차원에서의 작용을 야기시킨다. 그래서 일반 사람 중에 '사탄'의 형태(감각할 수 있는 외적인 형태)를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때로 그들을 시각적으로 보는 사람이 존재하긴 한다. 그들은 자기 수양을 지극히 쌓아, 영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의 차이가 거의 없어진 사람이거나, 현세적인 감각이 지극히 나약해진 약자들이다.) 사탄은 '유혹자'로서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유혹'이라는 것은 올바르게 걸어가고 있는 한 사람을 '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 대상을 '타락'시키기 위함이다. 창세기에서 그를 만나볼 수 있고, 예수님의 유혹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그는 두 부분에서 '똑같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엇나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결정은 우리 스스로 내리는 것이다. 욕구가 있다고 우리가 다 수용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욕구에 저항할 수 있다. 미사 중에 배가 고프다고 밥을 먹어대지는 않는다. 소변이 조금 마렵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 중에는 좀 참아낼 수 있다.

해외 선교의 필요성

신부님이 볼리비아 현지에서 느끼는 해외선교의 필요성에 대해서 한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너희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두 성경구절로 '필요성'은 충분하리라고 생각하는데요. ㅎㅎㅎ 원론적인 말이 아니냐고 해 버리기 쉽지만,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살아가지 않는다는 데에 있죠. 해외 선교의 필요성은 사제들의 복음의 순수성을 찾아나가기 위해서 절실하다고 봐요.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사제로서의 가장 보람된 일을 하는 기회가 되는 거죠. 하지만 단순히 사제들의 그런 필요로만 해외선교를 '이용'해 먹기만 해서도 안되죠. 대구교구가 해외선교를 오랜 시간 많이 보내온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 해외선교를 올바로 바라보고 있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 나가고 있느냐는 데에 대해서는 잘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어느 분의 해외선교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 드린 나의 답변. 사실 비단 "해외"가 붙은 선교만이 아니라, "선교"자체가 절실한 것이다. 대구교구에서 하도 "가두선교"를 해 놔서, 선교라고 하면 바로 가두선교를 떠올리게 되기 쉽상인데, 진정한 선교는 길 가는 사람 붙들고 마음 쓰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정, 내 직장, 내 학교, 내가 머무는 모든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끔 도와주는 것]이 선교가 될 것이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교회 이름으로 해외에 나왔다고 다 선교는 아니다. 길거리에서 사람 붙들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한다고 다 선교는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qu

문제에 대처하는 그리스도인의 방법

문제에 대처하는 그리스도인의 방법 인간의 문제해결 시스템을 나름대로 도식화 해 보았다. 해결 가능 과제 1) 과제 - 시도 - 해결 - 행복 2) 과제 - 시도 - 미해결 - 재시도 - 해결 - 행복 3) 과제 - 시도 - 미해결 - 재시도 - 미해결 - 재시도(*N) - 해결 - 행복 4) 과제 - 시도 - 미해결 - 포기 - 불행 해결 불가능 과제(그리스도인만 해당됨) 1) 과제 - 시도 - 해결 - 행복*무한대 2) 과제 - 시도 - 미해결 - 수용 - 0 문제는, 먼저 과제의 종류가 각자 다 다르고, 특히 중요한 건 해결 가능 과제의 3)번에서 세상 사람들은 어느 정도 선에서 끝이 있는데, (아무리 참을 성이 많아도 끝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끝이 안보인다는 거다. 언제까지 시도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해결될 때까지." 죽을 때까지 해결이 안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그럼 그러다 죽으삼." 이러신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삶은 현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신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환장하겠네 젠장. 더 환장하겠는 건... 해결 불가능 과제를 시도해야 할 때이다. 세상 사람들은 해결 불가능 한걸 일찌감치 포기하고 마는데... 아니, 그건 저런 도식에 넣지도 않을건데, 가끔 주님은 그걸 해결해 보라고 당신 사람을 그 자리에 보내신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환장하겠네 젠장. 다 사랑하라신다. 이거 해결 가능한 거 맞어? 해결 불가능하더라도 하라시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환장하겠네 젠장.

인간의 나약성과 죄

인간의 나약성과 죄 인간이 약하다고 그것이 죄는 아니다. 나약함은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보듬어주어야 하는 부분이다. 반대로 죄는 보다 의도적인 것이다.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있으면서도 그 방향을 꾸준히 의도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의 자유의지로 한시바삐 끊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모욕했을 때에, 내 안의 생각으로 "왜 저 따위로 말을 하는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살짝 고개를 내미는 분노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죄는 아니다. 인간의 죄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 생각을 의도적으로 꾸준히 유지시켜 나가거나, 그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서 누군가를 상처주거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꺼내서 누군가에게 복수할 때 일어난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이 무작위로 떠오르는 생각들로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건 죄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떠오른 생각을 여러분들의 신앙으로 보듬어 나간다면, 그건 오히려 덕(德)이 된다. 수많은 성인들도 제멋대로 떠오르는 생각들로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다음 단계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성인이 된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우리의 생각들을 끊어낼 힘이 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대전에서 아무런 변명거리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죄가 있다면, 하느님 앞에 뉘우쳐라. 그리고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너희들이 마지막 한 닢까지 되갚기 전에는 절대로 풀려나오지 못할 것이다." 에이... 나중에... 라고 하다가는 어느새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간음과 불륜

간음과 불륜 성경에서 '간음'과 '불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性)'적인 현실을 떠올리기 쉽상이다. 아내를 둔 한 남편이 다른 여자와 맺는 '성관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간음과 불륜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에,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핵심은, '불충실'이다. 이미 한 곳에 온전히 헌신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이가, 다른 이에 눈을 돌리기 시작할 때에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근본의 가르침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성관계'의 사고에만 집착을 해서, 간음과 불륜을 오직 '부부 관계'에만 국한시키려 한다. 천만의 말씀... 가장 큰 '간음과 불륜'을 알려주겠다. 그것은 하느님께 헌신하기로 되어있는 우리 교회의 백성이, 다른 데에 눈을 팔기 시작할 때에 일어난다. 신자들을 영적으로 먹여 살리지 않는 영적인 아버지인 '사제' 봉헌 생활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는 '수도자' 하느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진 모든 믿는다는 이들인 '신자'들이 바로 이 '간음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인 것이다. 세상의 간음과 불륜은 법적으로 조정해 나갈 수 있지만, 이 하느님 앞에서의 간음과 불륜은 커다란 진노를 예비한다. 하느님을 등지고는 '희망'이 없다. 사제들이여,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영적 양식'을 마련하라. 시덥잖은 농담이나 정치 이야기로 거룩한 미사 중의 강론을 채우지 말고, 보다 영양많고 맛깔진 영적 음식을 준비하라. 수도자들이여,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여러분들의 삶 그 자체로 천상의 삶을 미리 드러내어라, 제발 부탁이거니와 신자들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봉사하는 자가 되도록 하라. 신자들이여, 하느님을 잊지 말라. 여러분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경

성경 셩경은 '고리타분'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사실 고리타분해 보인다. 검은 양장에, 글자들은 또 얼마나 작은지, 그리고 페이지수는 왜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무슨 숫자들이 문장마다 끼어서는 헷갈리게 하는지, 언제나 창세기부터 시작하면, 과학을 배운 우리들로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만 주절대는 느낌이 들 뿐이라서, 머지않아 식상해지고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다. '통독'을 하지도 않거니와, 그 시도도 하지 않고, 그나마 주일미사때 들려오는 성경도 그냥 귓등으로 흘려 듣는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는바가 전무하다.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하지만 우리는 '궁금증'이 많다. 늘상 성당을 다니면서 하느님께 묻는다. '도대체 원하시는 게 뭐냐고?' 그러고는 하느님은 대답을 않는다며 정말 무심하고 제멋대로인 하느님이라고 내 마음대로 마음 속으로 생각해 버리고 만다.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지금 당장 요한 복음 17장을 읽어보라.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충분히 설명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들을 마음이 없다." 성경은 하느님의 마음이 담긴 책이다. 그걸로 우리가 지구과학을 공부할 것도 아니요, 수학을 배울 것도 아니다. 성경에는 삶의 방향과 진리가 들어있다. 집어라, 읽어라. 다만 제발 부탁이거니와 '창세기'부터 시작하지좀 말아라. 오히려 사도들의 서간이나, 마르코 복음부터 시작하시라.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리고 구약을 파고 들어라. 안그럼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왜 우리가 함부로 피를 먹느냐고 하기 쉽상이다. 예수님의 절절한 사랑을 신약

영적인 준비

저녁식사 시간에 마을에 잠깐 정전이 되었다. 한 청년이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온 세상이 컴컴해서 새벽녘인줄 알고, 팬티 바람으로 냉장고 앞으로 왔는데, 일순간 불이 들어와서 주변이 환해지면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가족들과 마주치게 된다. 훗날 우리가 마주하게 될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이런 것이 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며, 영적인 불이 꺼져 있다고 생각하고 언제나 그것들을 뒤로 미뤄두고 살아왔다. 정전이 끝나고 불이 들어온다는 건, 우리가 육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나라로 온전히 속하게 됨을 의미한다. 헌데 우리는 그 나라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팬티 한장 걸치지 않은 채로 있는지도 모른다. 헌데 그 나라에 속하는 민족들은 일찍부터 옷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왔다. 그들의 옷은 '기도, 단식, 자선'이었다. 특히나 미사에 합당하고 거룩하게 참여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선사하신 새하얀 백의를 선물받아 입고는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 화려한 잔치 속에 알몸으로 들어서버린 것이다. 나이트클럽에 왠 청년이 슬리퍼에 반바지 입고 들어가다가 쫓겨나는 것처럼(청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ㅎㅎ) 우리 역시도 그렇게 준비하지 않고 있으면,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문 밖에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복음선포의 긴박함

성무일도 초대송을 하면 늘 이 구절이 나온다. "사십년 동안 그 세대에 싫증이 나버려. 나는 말하였었노라. 마음이 헷갈린 백성이로다. 내 도를 깨치지 못하였도다." 아직 나는 사십이 되지 않아 희망이 있다고 본다. 하느님의 도를 깨치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다. 뭐 이건 농담이고... 좁은 방 안에서 술래가 눈 가리고 사람 잡는 게임을 해 본 적 있는가? 보면서 우스워 죽는다. 5센티미터만 더 가면 잡을 수 있는데 그 앞에서 방향을 바꾸어 버린다. 보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사람 앞에 서면 이런 감정을 느낀다. 헌데, 이건 '웃긴' 게 아니라 상당히 '심각한' 거다. 이건 단순히 술래가 다른 이를 못 잡는 게 아니라, 어린애가 기름을 온 몸에 끼얹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거다. 그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복음선포의 긴급함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놔 두면 죽으러 가겠다는 사람인데 우리가 귀찮아서 그걸 뜯어말리지 않겠다는 거다. 같은 시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이에 분이 치밀어 맹세코 말하였노라. 이들은 내 안식에 들지 못하리라." 이 마지막 경고는 단순히 마음이 엇갈린 백성들만을 향한 게 아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뻔히 알면서도 당신의 일에 동참하지 않는 많은 예언자들을 두고도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람

사제나 수도자라고 다 하느님 생각만 한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우리 역시도 미천한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며, 또한 내 주변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신앙을 무엇으로 분별해 낼 수 있겠는가? 그가 내뱉는 말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마귀도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마르꼬 복음 5장을 펴서 귀신들린 이가 예수님을 앞에 두고 뭐라고 부르짖는지 들어보라. 꾸며진 말, 우리의 지성에서 나오는 말은 우리의 신앙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의 옷, 수단이나 수도복이 그의 신분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사람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럼 '하느님의 일'이 뭐냐고 물을거다. ㅎㅎㅎ 뭐가 하느님의 일일까? 성당 안에서 하는 건 다 하느님의 일일까? 그럼 예수님이 상인들을 쫓아내진 않았을테지... 제대 가까이 일하면 하느님의 일인가?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회당에서 왜 그리도 예수님을 미워했던지.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는 일을 말한다. '하느님의 마음'은 뭘까? 그건 명백하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신다.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헌데 웃기는 게, '하느님이 안보인다'는 거... 그 사랑이라는 걸 현세적인 재물로 좀 주시면 당장 알아 듣겠는데,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질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미천한 사랑이 아니라 더욱 위대한 사랑을 선물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당신 사랑의 극치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었다. 이 즈음에서 따라읽던 사람들은 조금 '뻥~'쪄야 한다. 사랑이라면서 왜 죽인데? 그게 무슨 사랑이야? 사랑하면 잘 해줘야지. 잘 보듬고 잘 보살펴야지. 왜 죽이고 난리야? 왜 자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