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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12의 게시물 표시

성장

성장 아이가 자란다는 건, 그저 몸이 거대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성장'은 오히려 다른 데에 있다. 쵸컬릿을 좋아하는 아이가 커서 돈을 좋아하고, 누가 쵸컬릿을 빼앗아가서 우는 모습이 장성해서는 누가 금전적 손해를 끼쳤다고 괴로워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면, 이제 비로소 '성장'의 발판은 마련되는 것이다. 정말 크려면 마음이 커야한다. 마음의 너비가 넓어지는 게 진정 크는거다. '내 것'만 알던 아이가, '남'의 존재를 인지하고, 나아가 그도 나와 똑같은 약함과 감정과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 그리고 그 아는 것을 바탕으로 그를 '사랑'하려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성장'한 사람이다. 이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마음 속에 품다가 보면, 어느새 나의 영역이 그들의 영역으로 확장되게 되고, 그 수많은 영혼들이 나의 영혼에 혼연일체가 되면서 비로소 내가 진정으로 크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니 어렵다. 보다 실천적으로 설명하자면, 남들 절대로 미워하지 말고, 그의 자리에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결국 그 어떤 사람이든지 나의 마음에 그를 위한 사랑의 자리를 마련하면 나 자신이 부쩍 크게 된다. 똑같은 주제로 말을 하면서 남을 바로 세우고 자신의 사랑도 키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무가내로 누군가를 저주하고 그의 멸망을 바래서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둘의 의도는 분명 다른 것이고, 각자는 자신이 의도한 것을 받게 마련이다. 이 숨겨진 이면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광인'의 그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미치지 않았다.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고, 그리고 우리의 의도가 때로는 악하기 때문일 뿐이다. 예수님은 가장 큰 분이셨고, 오직 그분의 이름에 희망을 두고 그분을 따라

감옥

감옥 감옥에 갇힌 이가 있다. 감옥의 삶이라는 것이 그저 삼시 세끼 식사나 제공받고, 용변을 처리하고, 때가 되면 자는 것이 전부이다. 세상 밖의 아름다운 것들, 풀과 나무, 진정한 삶들은 모두 요원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자유'를 구속당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 뿐이다. 다른 그 어떤 것도 그의 마음을 채워줄 수가 없다. 그는 그저 창으로 세상 밖을 바라다보며 언젠가는 약속된 그 희망을 바라다보며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전하려고 한다. 언젠가 우리가 해방될 날이 올 것이니, 그날을 위해서 온전한 희망을 간직하고 서로 훗날에 이루어질 '자유인'으로서 필요한 것을 위해 서로 노력하자고 다른 죄수들을 다독이고 추스려 나간다. 옆방 죄수는 좀 다르다. 그는 이 감옥 생활이 몸에 익었다. 감옥 안에서 어떻게든 구해본 치졸한 것들로 또다른 죄수와 거래를 하고, 감옥 안에서의 인맥을 구축해 나가며 어떻게든 '감옥 안에서' 나름 세력을 잡았다. 가끔씩 인맥을 쌓은 동료가 조금 더 퍼다주는 식사에 기뻐하고 간수가 운동 시간을 조금 더 늘려주는 걸로 자기가 이렇게 특권을 받는 사람이라고 으시대고 다른 사람을 깔보고 무시한다. 특히나 자기가 지배한다고 믿는 감옥의 룰을 우습게 여기는 '자유'를 기다리는 그 죄수를 가장 무시한다. 그리고 밤에는 다시 자기 초라한 침대에 돌아와서 자기는 이 감방 안에서 1인자라는 착각 속에 빠져서는 자신의 본연의 처지는 진지하게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채로 잠이 든다. 어느 날 첫번째 죄수가 석방이 되었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 열심히 일을 해서 전에 있던 감옥의 대표 책임자가 되어 버렸다. 그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옆방 죄수에게는 고통일지어다.

장례

"신부님 장례 하기 전에 하나 알려 드릴께요." 아까 낮에 장례를 갔는데 넉살 좋은 반장 아줌마가 날 불러 앉힌다. "이 집이 이 동네 토박이거든요. 한참 전부터 여기 살았었어요. 근데 오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부인이 한참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때만 해도 여기는 시골이었고 지금 있는 본당도 없었어요. 그때 이 집 아들내미가 온 시내 본당을 돌아다니면서 사제를 찾은 거예요. 하지만 아무도 와 주려 하지 않았죠. 그래서 그때부터 섭섭해서는 성당에 인연을 끊기로 해서 절대로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자리도 제가 일부러 신부님을 부른 거예요." 그러냐고, 알았다며 장례에 들어갔다. 차라리 몰랐으면 순진하게 모르는 채로 그저 죽음을 잘 준비하라고 하고 올 것을 알고 나니 괜스레 신경이 더 쓰였다. 이럴 땐 솔직하게 느끼는 걸 이야기하는 게 최고다. "사실, 많은 장례를 다니지만, 여전히 죽음이라는 건 아직 저에겐 미스터리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디에선가 와서는 어디론가 가지요. 자기가 원해서 온 사람도 없고 자기가 원해서 가는 사람도 없어요. 물론 자살하는 사람은 있지만 자기 삶을 단 하루라도 일분이라도 늘릴 수 있는 사람은 없지요. 때가 되면 다들 가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어찌할 수 없다면, 생명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소리인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부르지요. 그럼 한 사람에게 죽음은 마지막 말인가요?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나요? 지금 우리 앞에 시신이 놓여 있어서 알 수 있듯이 몸은 이 땅에 그대로 남지만 우리 영혼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 모인 거잖아요. 그 영혼을 위해서 말예요. 그럼 그분이 원하시는 게 있을 텐데 그건 다름아닌 '사랑'이예요. 하지만 우린 그걸 모른채로 세상 일들에 한참 마음을 쓰면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용서하지 않고 그러다가 세상을 떠나 버리지요. 가장 위험한 일이 뭔지 아세요? 그건 준비없는

자기 자리

자기 자리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올라서 있다고 생각했던 모래 언덕이 바람에 훌훌 날리고 나면 정작 자신은 헛됨 위에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사람이 있다. 반면 자신은 처절한 구렁텅이 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이야말로 자신이 모든 걸 새롭게 새울 굳건한 기반이라는 걸 뒤는게 아는 사람도 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 자리가 거기라고 생각하고 안하무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훗날 고스란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후회하게 될 사람들이다. 반대로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나 걸을 기력도 회복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을 도와주어 의연히 어두움을 떨쳐내고 영혼의 길을 걸어가게 도와 주어야 한다. 사람은 결국 다 같은 위치에서 시작하게 된다. 헌데 시간상으로 능력상으로 앞섰다고 어리석게 자부하는 인간들이 많다. 나이가 많다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지위가 높다고, 학식이 많다고... 그럼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부모는 영양 실조로 죽어버리고, 평생을 노동자로 살면서 알파벳 하나 깨우치지 못한 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가?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이다. 영적 사정 안에서 모든 인간의 출발점은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이다.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향해서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은 진보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면 후퇴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로 주셨고, 우리는 그 시간이라 불리는 '기회' 속에서 많이 사랑해야 한다. 글쎄... 기우인지는 몰라도, 이런 영적 사정을 하는 중에 투덜대는 사람들이 있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지금 세상이 어느 땐데... 그럼 다들 수도원 들어가란 말인가? 신부로

정반합

정반합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그런 것과 아닌 것들로 둘러싸여져 있으면서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랑해야 하는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정) 다만 현실 안에서 사랑하지 않는 이들과 마주하면서까지 그 사랑을 유지하는게 어려울 뿐이다.(반) 하지만 그런 이들과 만나서 그들의 어둠마저도 감싸 안으면서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갔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완성되는 것이다.(합) 이 과정들을 많이 거쳐 성숙한 이들이 비로소 다른 이들을 이끌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서 알고 있는 모든 아름다운 말마디들을 실제로 체험하고 내 안에서 끌어내야 할 시험의 자리가 다가올 것이다. 그때에 좌절하지 않게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준비하느냐고? 걸음마 배우는 아기 본 적 있으신지... 엄마랑 걸으면 된다.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고, 귀찮아도 좀 참고, 그렇게 걷다보면 일어나는 법이다. 영적인 경우에는, 하느님이 하자는 대로 하면 된다. 성경 말씀들과 하느님이 세운 교회의 영적 전통들을 믿고 그들이 가르치는 바 대로 하면 된다. 자기 혼자 일어서 보겠다고 아둥바둥대다가 침대에서 떨어지는 아기들이 많다. 엄마 아닌 다른 사람 손 잡았다가 흑산도에 새우 잡으러 가는 아이들도 많다. 영적인 수준에서 아기라는 걸 인정하고 이끄심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한다 하는 사람들과 안다는 사람들에겐 그게 너무 힘든거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랬지, "안다는 사람들에겐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다"고... 그래서 배웠다는 사람들 중에 지혜로는 더 멍청한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신앙의 난해함

신앙의 난해함 신앙에 관한 건 왜 이리도 힘들게만 느껴질까? 수학처럼 1+1=2라고 추상적인 관념 안에서 명확하게 설명해낼 순 없는걸까? 아니면 자연과학처럼 뭔가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결론을 얻을 순 없는걸까? 한편으론 그렇다고 할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론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는 면에서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고 그분이 세우신 영적 차원의 질서가 변함이 없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다는 면에서는 각 인간마다 삶 안에서 직접 마주하는 상황이 무척 다르고, 하느님의 영역 가운데 우리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무한하고 신비적인 영역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는 법칙은 절대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선을 행하는 것'인지는 각 개인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예컨대, 여기 성전 건축을 위해 봉헌하는 여러 상황들이 있다. 1) 그야 말로 본당의 성전을 위해 적은 돈이지만 능력껏 봉헌하려고 하는 사람. 2) 이 봉헌을 통해 주임 신부님의 맘에 들어서 다른 뭔가를 이루려는 사람. 3) 다른 현세적 축복을 얻으려고 빚을 내어가며 봉헌하는 사람. 4) 하느님의 진정한 축복과 현세적인 보상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봉헌하는 사람. 5) '가진 걸 다 바쳐라'는 부르심을 듣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해버리는 사람. 모르긴 해도, 사람별로 모두 제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각자의 상황에서 저마다의 '사랑'과 '선'은 다른 양상을 띄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누구에게는 '선'이 되고, 누구에게는 '악'이 되며, 또 다른 이에게는 '갈등의 상황'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는 '신적인 영역'에 동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적어놓고도 참 정신이 없다. 그런 고로 우리가 걸어가는 

성사

성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 이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이다. 물론 이에 따라서 서론부터 시작해서 각 성사별로 역사와 그 내용을 설명하는 두꺼운 강의록과 책들을 읽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성사의 근원은 '예수님'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드러냄. 근데 어떻게 드러내신걸까? 만일 예수님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그것도 일종의 성사였던걸까?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드러내고자 했던 가장 최상은 '수난, 죽음, 부활'로 드러난다. 우리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다. 우리를 '수난'에로 이끌로, '죽음'을 겪게 해서, '부활'을 선물하려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이다. 예수님이 취미생활을 뭘 하셨고, 말투는 어땠으며, 옷차림은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이 예수님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의 제자단인 '교회'이다. 모든 신자들은 이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그분의 삶을 따르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 남겨주신 '교계제도' 역시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것이 존재한다. 언제나 가장 핵심을,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을 잘 쥐고 있어야 한다. 신부님이 어느 날 너무 피곤해서 신자에게 짜증을 낸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핵심 줄기를 상하게 할 순 없다. 오히려 '이유없는 수난'으로 치자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수녀님이 인간적으로 부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원 줄기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본질'이 상했다고 생각하면서 '교회'를 저버리기 시작한다. 교회의 부족함은 분명 안타까

영성지도

영성지도 초등학교에 이제 겨우 들어갈 나이의 아이가 알아서 공부를 어찌어찌해서 나중에는 수학의 방정식들을 계산해 낼리가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전혀 배우는 데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는 읽을 줄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에게는 그때 그때에 적합한 교육자,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분간도 못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확 바뀌어 성인이 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가능케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빌어 그렇게 선택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가능성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될 대로 되라면서 사는 건 '무책임함'일 뿐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가장 첫 단계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주어지든 간에, 사람이라면 분명 보다 고차원적인 무언가의 고갈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제 아무리 부유하고 날마다 오락거리가 있는 사람도 그렇고, 늘 시련에 사로잡힌 사람도 그렇고, 아무리 거룩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 단계 더 뛰어 올라야 한다는 내 영의 필요성을 어느 순간에는 느끼게 됩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이 '영적지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순간에 가장 적합한 영적 지도자를 보내 주십니다. 그것은 어느 미사의 강론일 수도 있고, 신심활동일 수도 있고, 실제의 어느 영적지도자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안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될 가장 훌륭한 영적 지도자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앞서 말한 그 모든 것 안에서 움직이는 '성령'의 활동이 존재하고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을 훗날 돌아볼 적에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했던 도움을 가장 필요한 순간에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단축시킬 수 있는, 보다 나은 방법은, 실제의 '영적 지도자'를 찾는 방법입니다. '영적'으로 상대의 상황을 분별해주고, 다음의 단계를 적절

신을 상실한 시대

신을 상실한 시대 곤충 하나를 가져다놓고, 그 부위별로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한다. 더듬이, 머리, 몸통, 다리를 모조리 일일이 떼어낸 뒤에 면밀하게 면밀하게 조사에 조사를 거듭한 다음에 다시 원래의 위치대로 접합하기 시작한다.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모조리 원래 상태로 돌려 놓았다. 우리는 곤충의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다고 자신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 곤충이 원래 지니고 있던 '생명'이다. 과학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이들이 '과학'을 신봉한다. 사물들을 직접 만지고 연구하면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면밀히 면밀히 조사하여 거의 모든 걸 다 알게 된 듯 싶다.(물론, 식견있는 과학자들은 오히려 더 모르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잃어버린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생명인 창조주 '하느님'이다. 그분이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동력인데도 사람들은 부분 부분을 뜯어발겨서 자세히 알아본 뒤에 '하느님은 없다'고 한다. 우주를 살펴봐도, 원소 안을 뒤져봐도 '하느님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앙인들을 어리석은 이들로 내몰기 시작한다. 기계의 수명이 80년 정도에 불과하니 그 안에서 할 만한 것들은 다 하고 누릴 만한 것들은 다 누려야 하는데, 신앙인들은 그게 아니고 창조주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하고 서로 더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눌 줄 알아야 된다 하니, 그래, 적잖이 거슬린다. 때로는 심지어 '신학' 안에서조차 이런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하느님의 부분 부분을 면밀히 조사해서 나아가는 통에 정작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라지고 알아듣기 힘든 '이론'들만이 잔뜩 쌓이게 되었다. 신학대학 도서관에 '하느님'에 관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진짜 신앙은 '책' 속에 머물지 않는다. 특정한 활동에 종

억울함

억울함 인간사의 적지 않은 문제가 바로 이 단어에서 도출된다고 본다. '억울함', '억하심정'...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나쁜 결과를 그러했다고 호도당하는 상태, 내가 하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갚아야 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억울함이다. 구체적인 예로, 학교에서 선생님이 지나가는 아이에게 옆에 있는 쓰레기를 주우라고 한다. 이 아이는 당장 억울해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 선생님의 권위에 억울함을 표현하지는 못하고 묵묵히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억울함'을 해소하는 류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부류들인데, 이 종족들은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억울함을 선호한다. 길가다 발견한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 것은 기본이고, 생전 만난 적도 없는 거지에게 돈을 건네기도 하며, 자기 나라를 등지고 말도 모르는 나라에 가서 사람들을 보다 참된 길로 이끌어 보겠다고도 하고, 그러다가 죽게 되면 달가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족속들의 힘은 자기들의 스승, 자기들이 구원자라고 믿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왜냐면 그분이야말로 세상 더할나위 없이 '억울한' 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가르치다가 어찌어찌 군중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 지도계층의 질투를 사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한다. 억울하다, 이건 억울해도 너~~~~~~~무 억울하다(잠시 개그 코드를 좀...).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인' 족속 자체에게서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전혀 억울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듣자하니 자신들의 그 스승이라는 작자가 소위 '부활'을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가로막힌다. 어처구니가 없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그럼 다시 죽겠지 뭐...' 일반적인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성령

성령 '거룩한 영', '하느님의 영'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하느님과 같은 분이신 그분은 예수님 부활 이후 사도들에게 불혀의 모양으로, 또 그 이전에 예수님의 세례 때에 비둘기의 모양으로 내려오시면서 당신을 형상화하셨다. 헌데 요즘 이 '성령'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걸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의 역동성을 '왁자지껄함과 소란스러움'으로, 성령의 은사를, 전통 무속의 신내림에 견줄 정도의 '기이한 현상들과 방언'으로 뒤바꾸어 버리려는 시도들이다. 진정한 역동성은 단순히 춤을 추고, 율동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인 기쁨의 표현방식에 불과할 뿐 진정한 역동성이란 이런 것이다. 즉 말씀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때가 찼을 때에' 언제라도 실행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병사가 늘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단련시켜 놓았다가 상황이 닥치면 맡은 책무를 주저없이 바로 해내는 모습과도 같다. 이것이 진정한 '역동성'의 의미이다. 성령을 늘 흐르게 하여 두어 언제라도 내가 성령에 힘입어 나서야 할 때에 나설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역동성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많은 청년들이 '성령'이라는 미명 하에 그저 밴드 반주나 찾고 뭔가 소란스러이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자리만 찾는 모습을 가끔씩 볼 때면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는 주로 입을 요상하게 움직여 이상한 소리(랄랄랄랄랄랄랄...)를 내는 '방언'과 '안수를 하면 넘어짐'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진정한 은사는 그런 게 아니다. 서간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신령한 언어'라는 것은 그 소리가 퍼져 우리 귀에 듣기에 이상한 언어가 아니라 전혀 듣지 못한 새로운 언어, 즉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세상 사람들이 익히 아는 언어는 '누

눈 뜬 장님

눈 뜬 장님 연중30주주일강론 많은 이들이 눈을 감은 채로 뜨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부터 문제는 시작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눈 뜬 장님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며 실제로는 마음 깊은 곳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갈망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명확하게 알아채지 못하는 우리들은 영적인 장님들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이 자신의 눈멀음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 진 다음에야 비로소 도움의 손길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음식을 찾는 이는 없습니다. 배가 고파와야 비로소 음식 냄새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먼저 우리 안에 이 '원의'가 있어야 합니다. 눈이 멀었다는 걸 깨달았다면 그 다음에는 '눈 뜨기'를 바래야 합니다. 영적인 사물을 분간하고 영적인 빛, 즉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지나가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치유받고자 하는 바램을 예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바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사람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는 이런 나를 두고 나무랍니다. 아니면 내가 믿고 갈구하는 바를 가로막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쨌건 내가 가진 이 믿음은 '시련'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보다 더 순수한 신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복음에서의 소경은 이 시련을 통과하고는 더욱 크게 부르짖습니다. 자신이 진정 간절히 원하는 바를 더욱 극대화해서 밝히 드러냅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적인 세상 안에서는 '시련'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기 일쑤이고, 원래의 삶, 그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영적인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들을 애써 무시하던 과거의 삶에로 돌아가 버립니다.

일치

일치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인 끼아라 루빅의 '부르짖음'을 읽었다. 자신의 영성과 간략한 사업회의 진행과정을 담은 창시자의 저서였다. 십자가의 버림받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바탕으로 '일치'를 향한 간절한 열망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수많은 카리스마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갈수록 성소의 고갈을 겪으면서 어떻게든 인원을 충당해보려는 안쓰러운 모습들이 적지않다. 그러면서 정작 '본질'적인 것은 점점 잃어가고 자신들이 이루어놓은 공동체의 생존이 더욱 중요시되는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서서 때로는 가증스러울 때도 있다. 창설자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없고, 자신들의 생활의 편의와 복지를 충당할 거리를 찾는 모습이랄까. 이런 모습은 비단 수도회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교회이지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모두 내팽개치자는 것도 아니지만, 적당한 때가 이르러 과연 우리가 지향했던 길을 올바르게 걷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가장 기본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이외에 저마다의 책무로 생겨난 공동체들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확충, 보완, 변경, 축소될 여지를 충분히 두어야 하고 각 공동체의 장상들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굳건히 하면서 다가오는 도전들에 핵심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요청에 귀를 잘 기울이고 고리타분해져서 원 기력을 상실한 가지를 단장할 줄도 알아야 한다.(이게 말이 쉬운거다. 때가 되어 결정의 시기가 오면 생각지도 못했던 반대에 부딪히게 되리라.) 하지만 그러기엔 덩치가 너무 커져 버린 듯한 느낌이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혼란 스러운 것이 그 사상의 근본을 교회 권위로 부터 인정받은 후, 모여든 사람들이 엇나가기 시작하는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사상의 근본이 그릇된 것임을 확증했으나 어떻게든 모여든 사람들이 그 열정으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기

연중29주금요일 10개의 사탕을 들고 있는 아이에게는 그 10개의 사탕이 자신이 가진 전부이기에 어떻게든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 와서 1개의 사탕이라도 훔쳐가려고 하면 자연스레 난리가 나게 됩니다. 그것은 '부당'하고 '불의'한 행동이며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 영역이 됩니다. 하지만 10개의 사탕과 더불어 '착한 아버지'를 지닌 아이에게는 상황이 다릅니다. 아이는 '착한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고, 만일 내가 가진 걸 다른 아이들과 나누면 그 착한 아버지가 나에게 더 많은 선물을 줄거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기꺼이 가진 사탕을 나눌 수 있습니다. 달라는 아이에게도 주고,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큰 만큼 내어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당신의 모든 것, 인성의 모든 영역을 내어 주셨습니다. 모욕과 박해, 수난과 죽음을 달게 받으셔서 아버지가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굉장히 영리하고 많은 것들을 헤아려내고야 맙니다. 어느 기업의 상태가 이러면 앞으로 어느 제품의 생산이 줄어들테니 자연 그쪽과 관련된 중소기업들이 타격을 받게 될거고 따라서...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잘도 읽어냅니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인지의 영역이 그저 우리가 사는 세상 뿐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그 인지의 영역에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나간다고 해서 모두가 '신앙'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관습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다른 목적들(인간관계 등)을 마음 속에 숨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 중심으로 재배치

교회의 자선활동

교회의 자선활동 '자선'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어렴풋이 알아듣는 것은 우리가 가진 뭘로 남을 구제하는 일이다. 이는 돈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노력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자선'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시내에 손을 벌리고 있는 거지들이고 그들에게 몇 푼이라도 쥐어주는 것을 생각하며, 언젠가는 자신이 성공할 때에 더 큰 규모의 자선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조금 점검받을 필요가 있다. 진정한 자선, 진정한 구제사업이라는 것은 정말 그 사람이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수억의 돈을 그 손에 쥐어준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을 망칠 수 있다. 진정한 자선은 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모범을 살펴보자. 베짜타 못의 그 수많은 병자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셨다. 왜 그 모두를 구제하지 않으시고 오직 한 명만 고르셨으며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그가 가장 오래 고통받고 있어서? 그것이 하나의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거기에만 집착한다면 더 큰 틀을 망각하는 셈이 된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극명히 드러내고 완성시키기 위함이었지, 그 병자 자신의 고통과 치유에 집중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모든 이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결국에는 생명을 잃은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그 소녀도, 과부의 아들도, 나자로도 모두 다시 죽음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자선행위는 결국 그 순간 하느님의 뜻을 최대한으로 이루어내기 위함인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 자신의 수난을 준비하기 위해서 한 소경을 치유한 적도 있다. 자신에게 예비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태생소경을 치유한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늘 교회의 도움을 받던 가족이 있는데 이제 생활이 어느정도 나아졌고, 다시 일할 기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도움을 끊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자선'의 시작이

영적인 부모

영적인 부모 세상에는 두 종류의 부모가 있다. 육을 선물하는 부모와 영을 선물하는 부모이다. 육을 선물하는 부모는 익히 아는 우리의 생물학적 부모들이고, 영을 선물하는 부모는 가톨릭 전통 안에서는 '대부, 대모'들이지만, 실제 한국 교회에서 이걸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대부, 대모들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사실 나부터도 내 대부 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형국이고, 또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견진대부를 선 고준근 수사가 그저 잘 살아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주 어릴 때 어느 꼬맹이 세례 대부를 선 기억이 나긴 하는데, 사진 한 장만 덜렁 있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는 모른다. ㅎㅎㅎ 하지만 비단 '대부 대모'가 아니라 내가 영적으로 이끌어 하느님 안에서 눈을 뜬 이들은 다름아닌 나의 영적 자녀가 된다. 그리고 이 영적 자녀들이야말로 훗날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 줄 이들이 될 것이다. 헌데 육적인 관계를 영적으로 발전 시킨다면야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영적인 이끔'은 단순히 교회 안으로 발을 붙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영적인 이끔은 본인의 삶과 신앙으로 자연스럽게 무엇이 더 참된 것인지를 찾게 하는 것을 말한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그저 습관으로 주일마다 아이들을 때려 성당에 가게 한다고 해서 그 아버지가 영적인 이끔을 이루어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성당에 억지로 간 아이들은 오히려 성당에 반감을 가지기가 더 쉬울 것이다. 반면 같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동료의 신앙적 모범에 감화를 받아 성당에 발길을 옮기기 시작하고 기도생활과 사랑의 실천을 이루어내는 힘을 얻는다면 이 직장동료야말로 진정한 영적인 이끔을 이루어내는 사람이 된다. 사실 우리가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흐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가 날 이끌어주기'를 기다리기만 할 뿐, 자기 스스로 힘을 내어 '누군가를 이끌'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은

신심운동

신심운동 많은 '신심운동'들이 존재한다. 레지오, 성령기도회, 젠, 다락방, 파스카 청년 성서모임 등등... 일상 안에서 신심을 도모하기 위해서 각자의 카리스마대로 다양하게 나온 것들이다. 이 신심운동들은 무엇보다도 "일상 안에서의 신앙의 생활화"가 그 궁극 목적이다. 그저 내공만 잔뜩 쌓아서 저 혼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쌓은 내공으로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과 맞닥뜨리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런 신심운동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이들은 굳이 따로 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삶으로 잘 녹여내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신심운동'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자기들끼리의 반상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자기들만 아는 어떤 것들을 비밀스레 공유하는 특권계층의 자부심이랄까? 자기들만이 아는 코드로 다른 이들을 오히려 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어떤 그룹이든지 덩치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 '그룹의 생존'에 대한 욕구이다. 사실 '신심(믿는 마음)'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것은 우리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내세울 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그분 안에서 우리들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인 교회 말고는 그 어떤 특별 계층의 그룹도 '따로' 만드신 적이 없다. 모든 그룹들은 네트워크처럼 상호간의 발전을 위해서 연결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작업을 할 때에 필요한 도구를 필요한 만큼 쓰고는 다른 도구가 필요할 때에는 기존에 쓰던 것을 손에서 놓는 것이 정상이다. 조각상을 만드는데 사포로 갈아야 할 때가 왔는데 아직도 망치를 들고 다듬으려고 든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연중29주 목요일)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에 달콤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늘상 술을 진탕 마셔대어 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는 '술은 적당히 마시면 좋다'는 말은 귀에 쏙쏙 들어오게 마련입니다. 한창 엇나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젊은 시절의 호기는 누구나 겪는 거다'라는 어느 유명한 사상가의 말은 특히나 귀에 잘 들어옵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진리를 품은 사람,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분명히 불의 속에서 의로움을 전파해야하고 그릇됨 속에서 올바름을 알려야 합니다. 각 사람들의 영적인 어려움을 잘 살피고 그때 가장 적합한 충고를 해 주어야 합니다. 어둠에 빠져 있는 이에게 때로는 그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도록 엄중한 경고도 필요한 법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빠져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왠지 꺼려지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노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어 주님의 예언자가 되십시오. 어둠에 미적지근함만 드러내다가는 오히려 유혹에 빠져 있는 이에게 그럴싸한 구실만 마련해주기 마련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진심이 가득한 말로 충고하되 늘 사랑의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에 불을 지르십시오. 아멘.

십일조의 본 의미

십일조 - 사제와 이방인 고아와 과부를 대상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실천 십일조는 그 말의 의미 그대로는 소득의 10분의 1을 봉헌한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수확물을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만 기대야 했던 농부들이나 목자들은 하늘의 도우심이 없이는 충분한 수확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해 소출이 나오면 감사의 의미로 기꺼이 수확의 10분의 일을 바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 수확물이 '화폐'로 바뀌고 있고, 노동의 환경도 마치 하느님의 손길에서 멀어지는 것 같이 되어버려 그 누구도 쉽사리 자신이 벌게 된 것을 하느님의 도움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다들 봉헌을 아까워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런 분위기입니다. "내가 뼈빠지게 직장생활해서 번 돈인데 하느님이 도대체 한 게 뭐가 있다고?"라는 식이랄까요? 그러면 십일조의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요? 성경안에서는 3부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레위인'들과 '이방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레위인'들은 하느님에게 제사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수입활동이 없는 이들, 즉 오늘날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일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수도자들은 각 수도회별로 나름 수입이 있는 회도 있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소외된 이들을 말합니다. 자기가 사는 땅을 떠나 다른 나라로 오게 된 이들, 자기 땅에서 충분히 누릴 수 있었던 기본 권리들, '언어, 문화, 그 밖의 제반조건'들을 상실한 이들을 말합니다. '고아와 과부들'은 기댈 곳이 없는 이들, 부모와 남편이라는 존재를 잃고 기반을 잃은 이들을 말합니다. 결국 십일조는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에 '감사'드리고 그 사랑에 동참하여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한국 가톨릭 교회는 십일조를

고통

고통은 어디에서 나올까? 1) 육체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은 욕구에 대한 나의 부주의나 소홀함에서 나온다. 밥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픈 것도 고통이고, 제때에 소변을 보지 않아 방광이 저린 것도 여기에 해당하는 고통이다. 제때 제때 해소하면 될 것을, 부주의하거나 소홀해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담배를 많이 피면 필시 폐나 기타 장기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고, 술을 지나치게 즐겨도 마찬가지이다. 단걸 많이 먹거나, 기름기 있는 음식도 그렇다. 칼에 손을 베거나, 길을 걸어가다가 부주의하여 넘어지거나, 운전을 소홀히 하다가 부주의해도 그렇다. 이렇게 뭔가를 소홀히 챙기거나 부주의한 경우에 육체적 고통이 뒤따른다. 그게 아니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장기의 설명할 수 없는 손상들은, 주로 정신적인 고통의 부산물들이다. 우리의 호르몬 시스템이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해당하는 그릇된 물질들(당장은 스트레스에서 몸을 보호하려는 것이지만 이것이 장기화되면서 몸 속에 축적되어 그릇된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욕구를 채우거나, 치료를 하거나, 나을 때까지 참아내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죽을 때까지... 2) 정신적인 고통 내가 신경을 쓰는 것에서 나온다. 누군가 옆에서 꾸준히 욕을 한다고 하자. 이는 필시 육체적인 고통, 즉 나의 뉴런을 통해 신경들을 거쳐 뇌로 바로 도달하는 고통은 아니다. 좋은 해결책은 '신경을 끄는 것'이다. 아니면 자꾸 연마를 해서 거기에 대해서 무신경하게 되는 것이다. 욕쟁이 할매 가게에 가면 처음엔 기분이 나쁘지만, 어느새 무뎌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싫은 게 있으면 자꾸 들으면 된다. 예를 들어 난 군대에서 싫은 선임병이 좋아서 자꾸 트는 음악을, 나 스스로도 더 들어서는 그냥 내가 좋아하게 만들어 버렸다.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그렇고, 과거의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그렇다. 아예 신경을 끄던지, 직접 부딪혀서 무디게 만들면 된다. 무엇보다도 내면의 기

거룩함의 맛

우리가 어리숙할 적에는 어리숙함에 걸맞는 것들을 지니고 살아왔다. 어릴 적의 놀이기구들과 친구들과의 놀이는 그 시절에 걸맞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 안에서 나름의 '질서'를 터득해왔다. 이제 정신이 크고 자라면서 어릴 적의 기쁨과 즐거움을 내려놓고 자라난 이에게 합당한 그런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거룩한 즐거움이요,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성숙한 정신과 영으로도 아이적의 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흥미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참된 것들에로 점점 더 나아가기를 원하게 된다. 보다 참된 즐거움이 깃든 놀이는 과연 무엇일까? '거룩함'이 깃든 것들에게로 다가가는 이만이 알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정신은 아직 약해서, 많은 위안과 단 것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 거룩함을 추구한다면 어느 순간엔가 그것을 즐기게 되고, 그 안에 늘 몸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여전히 육 안에 살기에 육의 요구를 챙기기는 하지만 다른 시간들에는 그 영의 거룩함에 늘 몸담고 있게 된다. 마치 어린 시절 차 맛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차의 진정한 맛과 향을 배우고 알게 되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차를 끓이고 또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과 같다. 영적인 거룩함의 맛... 그 맛에 굶주린 자 되어야 한다.

무한과 유한

무한하신 분, 한계가 없으신 분이 유한, 즉 한계 있는 이 세상,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이 세상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그 무한 가운데 당신의 유한을 불어 넣으셨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하지만 이 인간들이 당신의 무한을 저버리고 유한에만 사로잡히기 시작했으니, 이를 일컬어 '죄'라고 부른다. 이 유한한 존재들이 자신들 내면의 무한의 깊이를 느끼고 그 무한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니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무한한 당신 자신이 당신의 의지를 곧이 곧대로 유한에 쏟아 넣으셨으니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무한을 숨기고 있지만 유한하고 곧잘 유한에만 사로잡히는 우리 인간 존재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삶을 본받으며 살아간다면 필히 무한으로 기꺼이 나아갈 수 있는 지라, 그런 깨달음을 전하고자 하는 유한한 인간들의 단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의 인간들의 유한만을 바라보며 그 속됨을 비난하느라 정작 교회가 지닌 무한의 방향성과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으니, 교회 내의 유한을 드러내는 인간들도 불쌍하고, 그런 인간들의 유한만을 쳐다보는 인간들도 불쌍할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 '무한'에 더욱 신경을 쓰는 인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니, 이를 대대로 '예언자'라 불러왔다. 이들이 '유한'에 사로잡힌 교회를 다시 '무한'의 바다로 이끌어 들이리니 엇나갔던 이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리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세세 대대에 길이 영예와 영광 받으시게 되리라. 귀 있는 자는 알아 들으라.

성장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 사람이 자란다는 것은, 사람이 커나간다는 것은, 어느 한 부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미숙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사람의 성장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겪는 '육적 성장'과 더불어 '정신적 성장', 그리고 '영적 성장'을 전제로 한다. '육적 성장'이야 먹기만 잘 먹으면 별 탈 없이 크는 거니까 제쳐두도록 하고, '정신적 성장'라는 것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여러 지식과 상식을 습득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많은 부모들이 여기까지만 보살핀다. 어쩌면 여기까지밖에 보살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도 마지막 성장단계인 '영적 성장'에는 이르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은 사실 우리들 끼리 이루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물질이 물질 세계의 소스를 받아서 커나가고, 정신은 정신적인 소스를 통해서 커나가듯이, 영혼은 영적인 소스가 필요한데 정작 우리 자신들에게서는 이를 분별할 능력조차 없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말이다. 결국 이 '영적인 영역'은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부모는 이를 위해 적합한 환경(교리교육, 미사참례 등등)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이 영역은 전적으로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의 하느님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분이시라, 이 교육을 언제나 제공하신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문제'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이 그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를 그저 '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이리 저리 도망다니는 통에, 그들은 영적으로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 고통에 정면승부를 던지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이다. 내 앞에 다가온 시련은 분명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이다. 내가 꺼

균형감각

균형감각 1) 나 오늘 어머니에게 갈거야. 2) 저는 오늘 중으로 저의 어머니를 방문할 약속을 잡았습니다. 3) 본인은 금일에 모친을 방문할 예정에 있다는 걸을 고합니다. 이 세 문장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화자는 오늘 어머니를 방문할 예정이다. 하지만 세가지의 표현 방법이 모두 다르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대해야 하는 방법이다. 성경을 통해서는 그 원의를 깨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원의를 확고하게 이해한 다음에는 이든 저든 그 원의를 더욱 다지는 데 도움을 주겠지만, 그 원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하는 말마디 연구는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다. 적지않은 신학자들이 빠져있는 오류가 이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학적 지식은 많지만, 실제 삶에서 자신들이 대하고 있는 텍스트의 저자인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경의 구절구절은 빠삭하게 외우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의 언어를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은 '탐구'에 대한 욕구를 좀 덜어내고 사람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누구든 이성으로는 천사들 근처에서 놀 수 있지만, 실제적인 삶은 '이성' 안에서의 놀이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반면 이런 학적인 것에 반감을 가지고, 생활로만 다가서겠노라고 하는 이들도 있으니 이들 또한 길을 잘 잡아야 한다. 무조건 사람 만나고 어울리는 것이 좋은 것이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리어 피폐해져 가는 경우도 있다. 마치 보좌 신부가 청년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놀이문화를 배워야 한다며 늘상 술자리에만 돌아 다니다가 결국엔 거기에 흠뻑 빠져 본래의 취지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이들은 조용한 방에 자리잡고 앉아 성경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균형감각'이라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하느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바

설교자의 직분

설교자의 직분 사람들 앞에 나서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해야만 하는 직분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설교자들이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죄악에 있던 아니던 그것 역시도 중요치 않다. 일단 설교의 자리에 올라야 하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쳐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늘 옳은 말만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말 자체의 사용이 틀릴 수도 있고, 때로는 그릇된 지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좋지 않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든 저러든 어떻게든 아예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하는 것이다(정말 정신이 나가서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줄구장창 이야기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설교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필시 사전에 연락을 듣고 무슨 조치가 취해져도 취해지게 될 것이다.) 설교자의 맞은 편에는 '듣는 사람', 즉 청중이 있다. 청중들 역시 제각각이라 누구는 그른 것도 바로 해석해 내고, 누구는 바른 것도 그릇되이 해석해 낸다. 제 각각의 자리에서 자신의 지식 수준에 따라 설교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린이 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또 각자의 직업과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같은 과목의 교수라도 누구는 설교자의 말을 겸손되이 받아들이고 누구는 설교자의 말투와 지식의 수준을 한탄하며 그 안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환경적인 걸 떠나서 청중의 내면에 어느 부분이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을 나름 잘 '걸러내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설교자와 청중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은 단순히 설교자의 능력에만 기대지 아니하고 다른 한 편으로 청중의 능력에만 달린 것도 아닌 둘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 안에 가장 무엇보다도 '영의 연결'이 전제되는 것이다. 청중은 그 어떤 형태의 설교이든지 그 안의 설교자의 영을 식별하고 그 영적 양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연중29주주일)

연중 29주 주일 (한국은 전교주일이라서 복음이 다릅니다.) 마르코 10, 35-45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 우리의 일상 활동 중에는 굳이 '남 위에 올라서야'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저 내 자리에서 묵묵히 나의 일을 하면 되는 것들입니다. 변을 누가 더 잘 보는가로 다투는 사람도 없고, 세수를 누가 더 잘 하는가로 다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인 평화로운 마음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하는 활동 가운데에 어지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철직은 이것입니다. "커지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누군가 나를 밟고 올라서려고 하면 그 자리를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저 단순히 그 자리를 내어주라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그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부부 사이에서 남편은 남편들끼리, 아내는 아내들끼리 모여서 하는 소리가, '절대로 상대에게 약점이나 빈틈을 보이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를 제압할 무언가를 드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의 근본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원칙은 '선 긋기'를 확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건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서 그를 공략하는 것입니다. 즉, 부부가 아니라 '적대자'를 위한 전술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대신 이런 말을 들으십시오. '상대를 믿고 모든 걸 드러내 보이세요. 심지어는 뒷통수를 치더라도 상대를 믿고 기다리고 껴안아 주세요. 설령 배우자가 끝까지 배신을 할지라도 당신은 하느님 앞에서 들어높여지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부부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영적 초심자를 위한 가이드

영적 초심자를 위한 가이드 세속 생활에 찌들어 살아가다가 어쩌다 영성의 향기를 맡고는 영적인 여정을 걸어가고파 하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헌데 문제는 이런 '초심자'들을 위한 올바른 가이드라인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대체로 이런 누를 범합니다. 일단은 막연히 '성경'이 좋다는 건 알았으니 읽어보자고 마음 먹고는 '창세기'부터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곧 실망, 혹은 포기를 하지요. 초심자에게 성경의 창세기만큼 난해한 서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택하셨다면, 다음의 길을 따라가시길 권해 드립니다. 먼저는 사도들의 서간입니다.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예시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묵시록'은 절대로 손대지 마십시오. 묵시록에서 사용되는 상징과 기호들은 신학을 수십년 공부한 학자들에게도 어려운 대상입니다. 서간들을 읽기를 마쳤으면 복음서를 펴십시오. 그리고 마르코, 마태오, 루카, 사도행전 순으로 읽으십시오. 이걸 마치고 나면 '요한'에 손을 대십시오. 이렇게 신약을 한바퀴 훑으셨다면, 비로소 구약의 말씀들을 손 댈 기초적인 바탕을 갖추시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구약은 가급적 좋은 안내서와 함께 읽어나가시기 바라겠습니다. 다음은 '기도'입니다. 초심자들은 하느님께로 다가가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무턱대고 소위 '좋다는 기도'들을 시작합니다. 간혹 성공하는 케이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쌓이기도 전에 무리하게 '기도'를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초심자에게 하루의 기도는 아침에 일어나서 바치는 성호경과 자기전에 바치는 성호경으로 충분합니다. 이게 익숙해지면, 기도의 양을 늘리십시오.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처음에는 무리가 가지 않게 몸을 뒤집는 것부터 시작하는 겁

예수님을 안다?

연중 28주 토요일 강론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신학을 30년 공부한 정도의 사람이면 예수님을 알까? 가톨릭 교회에 50년을 몸담아온 사람이면 예수님을 알까? 성직자 수도자 부모, 아니 주교님 부모면 예수님을 알까? 어디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들어보자.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해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라.' 우리는 이 말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또 '실천'하고 있는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지식이나, 그와 보낸 시간이나, 세상 안에서의 그와의 친분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고, 그의 뜻을 얼마나 이해하는 가에 달린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인거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알았으면 좋겠다. 더 많은 이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했으면 좋겠다.

이단의 오류

다른 사람의 오류를 밝혀 낸다고 내가 의로워지는 건 아니다. 헌데 니가 틀렸으니까 내가 무조건 맞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오류가 바로 이런거다. "기성 교회의 오류들을 봐라, 얼마나 엉망진창이더냐. 목자들이란 것들은 거룩함을 잃어가고 신자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간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알고 그분의 뜻을 준행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것들이 다 맞다." 이런 식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더 큰 오류들에 빠져들어감에도 헤어나올 생각을 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켜 나간다. 닫혀진 귀와 가리워진 눈이 진리를 듣고 보는 걸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는 없다. 인간 자체가 오류 투성이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어디로 길을 잡아야 하는가? 나는 믿는다. 사람이 맑고 올바른 양심으로 사물들을 직시하면 반드시 길이 보인다고.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가톨릭'이다. 가톨릭이 오류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니라, 내가 태어나면서 몸담아왔고, 지금까지 생활해 오면서 이런 저런 사람 사이의 오류들은 많았지만, 그 가르침의 근본이 틀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가르침을 준행하는 이들이 약하였고, 때로 오류를 범했을 뿐이다. 보다 더 소중한 이유를 들자면, 무엇보다도 '성체성사'라는 걸 쉬이 내던질 수 없어서이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보물,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하신 이 보물은 우리에게 진정 풍요로운 영적 양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식탁과 성체의 식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조화로운 영적 양분은 지금까지의 나를 성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사랑하고, 능력이 닿는 한 이유없이 이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려는 이들의 근거없는 모함에서 내 사랑하는 어머니 교회를 지켜낼 것이다. 사실

부활(마르코 복음 16장)

부활 (마르코 복음 16장) 부활, 다시 살아남.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땅의 말마디로 풀어내려고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거다. 하지만 누군가가 풀이해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알 것이며(이해) 어떻게 그 사건을 믿을 것인가?(신앙)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부활신앙'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다. 신앙은 결코 말마디'만'으로 전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은 언제나 '삶'이 수반되어야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지금 나는 이 부활신앙을 말로써 어떻게든 풀이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여러분들이 진실로 이 말을 이해하게 되는 때는 결국 내가 지금 살고있는 부활신앙을 여러분들이 보고 또 여러분들이 직접 체험하게 되는 때이다. 영원을 위해 순간을 포기하고, 이를 통해 결국 순간을 완성하는 행위. 조금은 난해하지만 그것이 '부활신앙'이라는 것의 말풀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예수님이 돌아가신 건 모든 사람에 의해서 목격되었다. 그리고 성경은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천사가 알려준 소식을 전하고,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을 간단하게 전하면서 예수님의 마지막 사명을 알리는 것으로 그친다. 그게 전부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마르코 복음의 부활 묘사는 의외로 너무나 단촐해서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장은 이 성경의 마지막 부분으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의 장은 교회의 20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증거되고 있으며, 결국 지금의 우리 각자의 생활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새로운 성경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그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히 신자와 비신자로 가르려는 그런 단순

주님의 수난과 죽음(마르코 15장)

마르코 복음 15장 주님의 수난과 죽음 마지막 장이다. 8주(중간에 2주를 공소 축제 9일기도 때문에 가지 못해서 실제로는 10주)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예수님은 이제 빌라도 앞에 서시고 모함이 가득한 재판을 받으시고 조롱과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다. 이 장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그 분위기를 느껴야 하는 것은, 만연해오는 어둠의 세력이다. 어둠의 세력은 크고 거대하고 강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빈약하고 허술하다. 그들은 진리와 선에 기반하지 않아서 그렇다. 온갖 거짓과 술수로 예수님을 몰아대지만, 예수님은 그 어둠 속을 '진실과 침묵'으로 일관하셨고, 그 정황을 판단하려고 애를 쓰는 빌라도는 '무엇을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한국 성경에서는 '이상하게 여겼다'로 나온다.) 우리는 상대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때로 무작정 자신의 신조를 들이대면서 논리성을 파괴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진실'한 증언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 자리에서는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다. 앞에 사과를 두고 이 사과의 품종을 논하려는 자리에 '오렌지가 맛있다'고 우겨대는 사람과는 할 말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때로는 진실을 밝혀야 할 자리에서 침묵하는 이들도 있다. 이 경우의 침묵은 '거짓증언'과 맞먹는다. 분명 진실한 증언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자기에게 다가올 비난이 두려워서 '침묵'으로 일관해서는 안된다. 이런 두 가지 침묵의 자리를 잘 구분하고 침묵해야 할 때에 침묵하고, 말 해야 할 때에 말해야 할 것이다. 병사들은 예수를 데리고 거짓 경배를 한다. 나름 차릴 건 다 차려준다. 관도 씌우고 왕홀(지팡이)도 들리고 자주색 옷(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색)도 입힌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전례를 아무

방향

오늘 새벽미사,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로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라파스를 가고 싶습니다. 어떻게 갈까 생각을 하다가, 결국 차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시동을 걸고, 백미러를 보고, 기어를 조작하고, 페달을 밟으면서 이리 저리 신경을 쓰고 운전을 하는데, 아뿔싸... 차가 라파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베니 쪽으로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잘한 것들에 신경을 쓰느라고 정작 방향을 신경쓰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애시당초 정해두었던 방향과는 전혀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뭔가 이러저러한 것들을 열심히 지키기는 하나 가장 근본 방향이 틀려버렸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를 향해서 가는 것일까요? 주일 미사를 지켜야 하고, 판공성사를 지켜야 하고, 금육, 단식, 공복재를 지키는 건 좋지만, 그 근본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 걸까요? 외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는 두 사람이지만 내면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 사람은 하느님께 새로운 하루를 주신 데에 감사를 드리고, 다른 한 사람은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과 오늘 하루 겪을 일들, 그리고 다가올 일들에 잔뜩 마음을 졸이며 불평을 가득 해대면서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다면, 똑같은 '기상'이라는 활동을 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 머물게 됩니다. 법률을 잘 지키는 것이 '구원'으로 이끄는 게 아닙니다. 법률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잘 지킵니다. 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반장'이 사실은 하느님의 일은 아무런 관심이 없고 실은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명예'를 바라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성당에서 보내는 '교리교사'가 사실은 아이들을 복음화 시키는 것보다는 주일마다 벌어지는 술자리판에 끼고 싶은 마음 교사들 놀이에나 따라다니는 것에 마음이 더 가 있

위선, 누룩(연중 28주 금요일)

위선, 누룩 아닌 것을 그런 체 함. 바리사이들이 짐짓 그런 체 했던 가장 큰 위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의롭지 않음'에도 가장 의로운 체 했던 그것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행하는 것은 그저 법규를 조목조목 알고 지키는 것일 뿐, 그것은 실제 하느님이 바라는 '의로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하느님이 생각하는 의로움은 '틀을 벗어나지 않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향해있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진정한 의로움이 나오기 때문이다. 도로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의로움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 도로가 어디를 향해 나 있는가가 중요하고, 내가 어느 도로를 향해 나아가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빵을 사먹는 데에는, 동네가게에서 살 수도 있고, 슈퍼마켓에서 살 수도 있고, 인터넷으로 주문을 할 수도 있고, 누구에게 사다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반드시 빵은 빵집에서만 사야 한다는 법은 없는 거다. 헌데 빵집에서 빵을 살 줄 안다고 해서, 그것만이 정답일 순 없다. 더군다나 그렇게 사 온 빵이 썩었을 때에는 이 사람은 헛수고를 한 셈이다. 당신이 사려는 빵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함'과 관련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의로움'을 추구한다면서 누군가를 지독히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가? 실제로는 자기 내면에 악의가 가득차서 모든 것이 못마땅한 것 뿐인데도, 세상이 잘못 되었노라고,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어긋나서 그런 것이라고 투덜대고만 있지는 않은가? 내가 똑바로 서 있으면 내 주변의 그릇된 것도 바로세울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엇나가 있으면 내 주변의 똑바른 것도 그릇되이 보이는 법이다. 이런 위선스런 바리사이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진정 하느님의 뜻, 그분의 '사랑'을 찾는 이들이 있으니, 하느님의 백

어둠의 영의 생존법

어둠의 영들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가 없다. 악은 '선의 부족'인지라 있는 것을 바탕으로만 설 수 있다. 예를 들어 찢어진 종이가 악이라면 그 악은 '종이'라는 선을 바탕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먹고 산다. 사람들이 어둠의 영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그들의 수명은 늘어나고 세력은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나 사람들을 끌어 들이려 한다. 어둠의 생각을 확장하고 조장해서 사람들이 서로 분열되고 다투고 싸우게 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계획에 우리는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그저 자기 일상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같지만, 그 한꺼풀을 들춰내면 그 안에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 들어있는 경우도 많다. 신앙적인 이야기라는 껍데기 속에 무언가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는 사람, 일상적인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진실한 사랑, 하느님의 손길, 용서와 일치를 담아내는 사람도 있다. 분별력을 기르도록 하자. 좋은 책과 나쁜 책과 마찬가지로,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많은 인터넷 활동들도 우리 스스로 분별해내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물들어버리게 될 것이다. 짐짓 옳은 체 하는 사람들, 갈라 놓으려고 드는 사람들, 은근히 사람의 성질을 돋구려 하는 사람들, 보다 참된 가치를 두고 허황한 가치를 추켜 세우는 사람들, 찬찬히 바라보고 분별하시기를...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알아서 분별하실 바이다.

정글의 법칙

정글의 법칙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 중에, "힘을 더 큰 힘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 있다. 이는 물리적인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과연 그러해 보인다. 수많은 영화 속에서 '악인'의 역할을 맡은 이들이 한결같이 나타나는 바이다. 어느 무기에 더 큰 무기를 만들어 이겨버린다는 설정... 정글을 보라, 먹이사슬이 뚜렸하다. 풀은 토끼가 먹고, 토기는 하이에나가 먹고, 하이에나는 사자가 먹는다. 이렇게 우리는 피라미드 형태로 그려볼 수도 있다. 하지만 피라미드의 최상은 결국 가장 바닥으로 돌아온다. 결국 밀림의 왕 사자도 죽어 썩어서 세균들에게 뜯어먹히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결국 악인들도 선인들의 지혜에 무너진다. 다이하드만 봐도 존 맥클레인이 홀몸 혈혈 단신으로 사람들을 지켜내겠다는 사명감과 이런 저런 지혜로운 방법으로 그 수많은 악인들을 이겨내지 않는가? 뭐 비유가 좀 틀릴 수도 있겠다. 이러든 저러든 맥클레인이 마구마구 죽여대긴 하니까 ㅎㅎㅎㅎㅎ 세상에 넘쳐나는 어둠의 세력은 결코 더 큰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건 내리누르는 게 아니라 '속에서 녹여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아직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똑똑한 놈 위에 늘 더 똑똑한 놈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힘있는 놈 위에 늘 더 힘있는 놈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똑똑하던 놈들도 언젠가 지식이 다하여지고, 힘있던 놈들도 언젠가 힘이 빠지게 마련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가슴 깊이 간직하신 율법주의자분들이 많으셔서 가슴 아프다... 도대체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느낄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예수님의 희망찬 말씀이 다름아닌 '십자가'를 통

분별해서 읽기

글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마치 그릇에 담은 과자 같아서, 맛있는 과자와 맛없는 과자,(내용) 예쁜 그릇과 못난 그릇이 있습니다.(기술) 즉, 총 4가지 내용도 없고 기술도 없는 글, 내용은 없고 기술만 있는 글, 내용은 있는데 기술이 없는 글, 내용도 있고 기술도 있는 글.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후자의 두 가지 입니다. 좋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 그것이 좀 거친 그릇에 담겨 있다고 해도 결국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물론 좋은 내용을 좋은 그릇에 담으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쓰레기같은 책들이 많습니다. 내용이 없이 그저 화려한 글로만 포장된 책들이지요. 유려한 말마디들로 읽을 적에는 좋지만, 읽고나서는 뭔가 입맛이 텁텁한 글들입니다. 심지어는 말도 안되는 내용을 그럴듯하게 꾸며 포장해 놓은 것들도 많습니다. 적지않은 인생 지침서들이 때로는 그릇된 내용을 담아내곤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인생 지침. 교만한 자가 되라. 자신의 모습을 꾸밀줄 알고 그것을 유용하게 이용할 줄 알아, 다른 이가 나를 깔보지 못하도록 만반의 긴장을 늦추지 말아라.' 뭐 방금 만들어낸 말이지만 분명 이런 내용들, 즉 거짓된 내용들이 담긴 책들이 많이들 나와서 많은 그리스도인들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귀에 달콤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보다 큰 어두움으로 인도해버리고 맙니다.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인쇄된 책이라고 무작정 읽고 받아들이지 말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분별력이 없는 어린아이가 인터넷으로 온갖 거짓 정보를 다 받아들이고 고스란히 믿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무엇이 더 옳은지를 찾아보려는 노력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내용'들은 결국 우리의 어두움 부분을 더욱 강화시켜서 훗날 진리와 사랑에로 나아가려고 할 때에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진솔한 내용이 담긴 글을 찾아 읽으십시오.

위에서, 아래에서(요한 8,9장)

요한 복음 8장, 9장 위에서, 아래에서 위에서 온 이와 아래에서 온 이의 한 판 토론이 벌어집니다. 위에서 온 이는 마치 복잡한 미로를 위에서 관망하듯이 모든 걸 꿰뚫고 있고, 아래에서 온 이는 도무지 위에서 온 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하느님에게서, 진리에서, 사랑에서 오신 분이고, 저들은 아래에서, 물질세계에서, 거짓에서, 증오에서 온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알고 깨닫고 있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저들은 그분의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다툼이 언제나 끝날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래에서 온 이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돌을 들어 예수님에게 던지려 하고, 예수님은 황급히 몸을 피해 달아나십니다. 위에서 온 이라고 피할 수도 있는데 무턱대고 날라오는 돌을 맞으란 법은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감이 오십니까? 저로서는 하루하루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 안에는 새 버전의 바리사이인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뭔가 '확실하게 규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확실한 것 가운데 보다 확실히 전해지고 있는 하느님의 규범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더러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안의 어느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고 가장 적합한 자리를 주시겠지요. 그건 제가 걱정할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더 큰 사랑을 위해서 허락되는 바, 보다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곳이 눈에 보이면 그 자리를 잃지 않고 기꺼이 찾아가도록 해야겠지요. 여전히 저는 오류가 많고 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늘 하느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 머무르실 것을 압니다. 이제는 그런 단계의 의심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성경강

악이 시작되는 곳

악이 시작되는 곳 하느님의 자녀가 세상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것, 거기에서 악이 시작된다. 세상의 자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살아가게 마련이다. 더 많은 능력을 지니면 그걸 주어진 환경에 맞춰 개발해 나가 세상의 것을 마련한다. 반대로 능력이 없고 가진게 없는 이는 그저 자기 자리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위로부터 난 이들이라 세상의 것과는 영 딴판으로 생활해 나간다. 그는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살 수 있고, 사실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 얼마만한 사랑을 돌려드리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헌데, 이 작업에 힘을 쏟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가 세상의 자녀들이 가진 것들에 마음을 쏟기 시작하는 데에서 바로 '악'이 시작하는 것이다. 영이 탐욕에 물들어갈때,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오르고자 힘을 써서 그런 자리를 탐할 때에, 결국 훨훨 날아다니는 하느님의 자녀가 세상을 기어다니는 걸 즐겨 할 적에 바로 '악'이 시작된다. 과감하게 악을 끊어버려야 한다. 이 말의 본의를 각자 다르게 받아 들이리라. 악을 끊어버리라는 말을 듣고, "그런 세상 재물을 다 버리란 말인가?"라고 분석하려 든다면 그 자체로 그는 여전히 천상의 깨달음에 근처도 가지 못했다는 걸 스스로 입증하게 된다. 모든 찬미와 감사와 영광은 하느님에게 돌려 드려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천상의 자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겸손과 선

선은 물이 흘러내리듯 아래로 향하는 특성이 있어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 저절로 흘러들어가게 되어있다. 교만으로 가득차 자신을 높이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간직하려고 기를 쓰던 선마저 흘러나오게 마련이다. 이것이 '겸손'과 '선'의 상관관계요 그 비밀이다. 주변에서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콧대를 높이고 뻣뻣하게 서 있는 사람에게는 그나마 가졌던 동정마저도 거두게 되고, 겸손되이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에게는 내가 밥을 덜 먹더라도 집 안에 있는 쌀이라도 퍼 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이걸 몰라서 참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더 많이 알려고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올라서려고 한다. 그것도 필요 이상으로 말이다. 그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들이라는 걸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그들의 눈은 가리워져 있어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내가 바라는 것

어제 저녁미사를 시작하면서 신자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원하는 걸 찾게끔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얼 원하세요?" 내가 말하고자 했던 건 우리는 뭔가를 얻어만나기 위해서 그걸 적어도 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돈을 구하려는 사람은 어떻게든 돈을 찾을 것이고, 하느님을 얻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헌데 오늘 이 시간에 문득 나를 되돌아보면서 "과연 난 무얼 원하는가?"를 곱씹어보고 있는 중이다. 과연 난 뭘 원하고 있을까? 딱히 바라는 게 없는 느낌이다. 세상 적으로야 몇 가지 내가 '갖고' 싶은 게 있지만 그건 내 호기심과 욕심과 필요에 의해서 그런 것이고 정작 내 가슴 깊이 내가 바라고 있는 게 뭔지를 생각하는 중이다. 도대체 그건 뭘까? 최근들어 농담처럼 '내가 바라는 건 우리 사제단의 성화와 본당 가족들의 성화 나아가 신자들의 성화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돌아다닌다. 그래, 그걸 원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보다 깊은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다. 그건 바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면 하느님께서 이 자리를 떠서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최상의 목표는 앞서 말한 내 주변 모든 이들의 성화이겠지만, 행여 더 많은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가야 한다면 필요한 능력을 쌓는 것이 나의 새로운 목표가 될 것이요, 청소년들 사이에 던져진다면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내 새로운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런 목표들 보다 더 근본에 결국 내가 바라는 건, 하느님께서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그게 뭐든 나를 통해서 이루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한 발짝을 달리 나갈 수 있는 무언가를 청할 수 없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거기 다 들어있다

성가신 사람들

성가신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기본 외모로 다들 다르지만 그 가운데 부류들을 묶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흑인, 백인, 황인, 또는 유럽인, 북미인, 남미인 등등으로 나누는 것이 바로 그러한 외적인 분류이다. 하지만 내적으로도 분명한 부류들이 존재한다. 각자가 지닌 성질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성미가 급한 사람, 여유로운 사람, 집중력이 있는 사람, 산만한 사람 등등이다. 이 역시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게 되는 특성들이다. 하지만 이 다음 단계로 니뉘는 특성들은 모두 각자에게 책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선의의 사람'과 '악의의 사람'이다. 이 부류부터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 수반된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가 가진 외적이고 내적인 성질들을 가지고 선인이 될 수도, 악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똑같은 사과를 하나씩 받고도 누구는 감사드리기 시작하고 또다른 누구는 왜 하나밖에 주지 않느냐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우리 주변에서 마주하는 모든 상황들 안에서 우리는 선한 의지와 악한 의지를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꾸준히 선한 의지로 모든 걸 다스리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선인들이고 훗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자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악한 의지로 모든 상황 안에서 또 모든 것들 안에서 어두움을 흩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 훗날 큰 고난을 당할 사람들이다. 하느님은 악인들의 멸망을 원치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돌아와 다시 하느님 당신의 대전 앞에 거닐기를 바라신다. 악인들을 심판하는 것은 다름아닌 자신들의 '악한 의도'이다. 이리 저리 흩뿌려놓은 어둠을 언젠가는 스스로 덮어쓰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 인생의 수레바퀴이다. 가능하면 축복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라. 하느님의 백성이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들 뿐이다. 저주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갈라놓으려는 마음은 뿌리부터 뽑아내어야 한다.

연중 28주 주일강론

연중 28주 주일 '~까지'와 '~부터' 우리가 곧잘 하느님에게 드리려고 하는 것은 "~까지"인 경우가 많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해진 규율이 있고, 거기까지를 채우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드리기 싫은 걸 억지로 드리려는 셈이다. 본디는 나의 것인데 마지못해 하느님에게 드리는 꼴이 된다. 이것이 "~까지"가 상징하는 바이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부터"이다. 우리가 마땅히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하느님께서는 무언가 바라신다. 이미 규정되어 있고 이미 이루어야 하는 것은 마땅히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마땅히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거기서부터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주님 뿌리지도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심지도 않은 데에서 수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부자청년은 "~까지"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부터"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느님이 가진 영원한 생명이 탐나기는 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느님의 영생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싶은데, 다른 건 다 지키고 가꿀 수 있어도 영생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밀을 깨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잡기 위해서는 손에 있는 것을 놓아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다름아닌 '자신의 의지'와 '하느님 의지'의 충돌이었다. 지금까지 어렵게 설명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랑의 규율에 얽매이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 사랑은 법을 행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데에서 나온다. 교회의 10계명을 나날이 새기면서 어기지 않도록 조바심을 내는 것보다는 눈 앞의 내 형제에게 웃는 얼굴로 미소 한 번을 던지는

이면(영적인 차원)

이면(영적인 차원) 우리가 사는 삶에는 '이면'이 존재한다. 여러가지 이면이 있지만 이 글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이면은 '영적인 차원'이다. 한 범인이 술집에 가서 술을 한 잔 마셨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이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한 것 뿐이다. 한 신자가 술집에 가서 술을 한 잔 마셨다. 여기서부터는 영적인 면을 살펴볼 가치가 있다. 술을 잘 절제해서 마셨는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마셨는지, 자신의 시름을 극복하기보다는 술로 잊어보고자 마신 건 아닌지, 몸에 해로울 정도로 마셔대진 않았는지, 사제가 술을 마시면 문제는 또 달라진다. 여기에는 '표양'의 문제가 더욱 극심해진다. 기본 신자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모범까지 작용을 한다. 때로는 술을 마시는 것 자체로 타인의 핀잔을 들을 때와 장소도 존재하기도 한다. 또 '술'이야기가 나올까 걱정이 된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술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이면에 숨겨진 영적인 영역이다. 이 영역을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이 영역을 느끼는 감각을 섬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깨어있다'는 말의 본 의미이다. 뒤집어 이야기해서, 이런 '영적인 영역'에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들은 좀 편안하게 두라. 예컨대 자녀가 자기 능력에 따라 좋은 성적을 들고 올 수도 또 아닐수도 있다.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자녀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신앙인의 어머니가 자식의 점수가 욕심이 나서 자녀를 닥달하는 그 '탐욕'과 '집착'이라는 영적인 차원을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면 과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마르코 13장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언급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득 담긴 장이다. 당시의 정황과 세상의 최종적인 종말의 모습이 섞여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주제는 명확하다. 그건 바로 "깨어 있어라"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이다.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선교하라"고 하신것 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예수님의 "깨어 있으라"는 이 명령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큰 주제들을 짚어주면 다음과 같다. 무서운 일들의 닥침(문제) 그리스도인들의 시련(시련) 두려워하지 말기(두려움의 극복) 끝까지 인내하기(인내)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참 그리스도의 다가옴 그 날은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심. => 결론: 세상 종말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언제? 어디? 어떻게?) 말고 늘 깨어 있으라. 1. 무서운 일들의 닥침(문제) 사실 문제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 상존한다. 그것이 세계적인 대재앙이든 우리 가정 안의 사소한 문제이든, 언제나 문제, 무서운 일들, 즉 우리의 '두려움'을 자아내는 일들이 존재한다. 이 일이 일어나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일은 모든 세대에 늘 존재해왔다. 2. 그리스도인들의 시련(시련)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시련과 더불어 살아간다. 시련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 시련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시련인지, 아니면 자신의 변덕으로 생겨나는 시련인지는 잘 구분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데에서 일어나고 자신의 변덕으로 생기는 시련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다가 일어난다. 많은 이들이 지 하고 싶은대로 하다가 생겨나는 시련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정신나간 족속들이 많다. 3. 두려워하지 말기(두려움의 극복) 두려움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극복 가

신앙의 해

신앙의 해 사실 [신앙의 해]가 아닌 적은 없었다. 이런 해가 반포된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덜 써 왔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왜 그랬을까? 우리의 신앙은 어디 가버린걸까? 우리의 신앙에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그러자면 먼저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소위 '믿는자들'이기에 신앙을 잘 이해한다면서 그 단어를 쓰지만 실상 신앙이 뭔지도 모르는 경우가 적지않다. 신앙한다는 것, 믿는다는 것, 신뢰를 두는 것, 그건 뭔가? 내가 돈 천원을 들고 있는데 아빠가 집에 가서 만원 줄 테니까 그 돈 길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주란다. 아빠를 믿으면 줄거고 아니면 안줄거다. 이게 신앙이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리 대신에 '돈(재물)'을 신앙한다. 돈은 우리의 생활수준을 보장하고, 의료혜택을 보장하고, 현세 생명을 보장한다. 그게 돈이다. 그래서 그토록 벌려고 하고 은행에 쌓아두고 보험과 적금을 들려고 한다. 이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신자들이 '영생'을 잃어간다고 봐도 된다. 영원한 것, 영원한 가치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가면서 현세라도 건지려고 그토록 난리인 것이다. 현세를 걱정하는 사람은 '섣부른' 시도를 하지 못한다. 이런 저런 겁이 많다. 이런 일을 하다가 내치이면 어떡하나, 저런 말을 하다가 가지고 있는 걸 잃으면 어떡하나,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 근본 바탕에는 '죽음'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서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우리가 가진 신앙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안전'하고 싶은데 우리는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의 이름을 선포해야 한다. 그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신앙의

뿌리 깊은 나무

뿌리 깊은 나무 뿌리가 깊이 박혀있는 나무를 만났다. 하지만 이 나무는 이 정원에 심어져 있어서는 안될 것으로 뽑아내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아름다운 꽃들에 그늘을 드리우고 꽃들이 가져가야 할 햇빛과 물을 모두 빨아들여 결국에는 정원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뽑아낼 것인가? 줄기가 너무 굵고 뿌리는 너무 깊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나의 의지'이다. 아무리 좋은 톱을 들고 있어도 나에게 자를 의지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자, 일을 시작하자. 크게는 두 방법이 있다. 정말 좋은 공구를 들고와서 단박에 자르는 거다. 하지만 공구가 정말 좋아야 한다. 그리고 기술도 좋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일반적으로 이런 좋은 공구와 기술이 없다. 우리가 선택하게 될 방법은 이런 거다. 매일 매일 나가서 조금씩 조금씩 정리를 해 나가는거다. 땅을 조금씩 파내서 뿌리를 드러내게 하고, 가지도 내가 끊을 수 있는 선에서 조금씩 끊어 나가는 거다. 커다란 집이 흰개미들에게 쏠려 넘어가듯, 조금씩 조금씩 나무에게서 양분의 공급을 줄여나가면 결국 그 큰 나무가 고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원을 되찾게 될 것이고, 꽃들은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용기를 잃지 말자.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다.

베드로의 잘못

베드로의 잘못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리시는 가르침을 겸손되이 받아 섬깁니다. 한 가지 예로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곧 다가오는 '신앙의 해'를 우리 모든 가톨릭 신자는 겸손과 사랑으로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교황직의 첫번째 수행자였던 베드로의 인간적인 오류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과 식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유다인들이 다가오자 그만 인간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다른 유다인들도 그의 그릇된 모범에 그만 그를 따라하게 되고, 심지어는 바오로가 총애하던 바르나바마저도 그 흐름에 동참해 버리고 맙니다. 이 제1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중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인간적 오류에 사로잡힐 수 있고, 그렇게 오류에 빠졌을 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교리 안에서 교황의 무류성과 교회의 무류성에 대해서 배웁니다. 이 말이 교황과 교회가 절대로 오류가 없다는 뜻이 아님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당신 교회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의 결정에서 오류가 없기를 바라셨던 이 무류성은 교회가 거룩하게 보전하고 충실히 설명하여야 할 하느님 계시의 위탁이 펼쳐지는 그만큼 펼쳐진다.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은 참으로 신앙 안에서 자기 형제들의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이므로(루카 22,32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 에, 교황은 자기 임무에 따라 그 무류성을 지닌다."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 3장 25절) 즉, "교황의 무류성"이란 이렇게 엄격한 상황 이외에, 교황님이 커피를 한 잔 하신다던지, 가까운 친구들과 건전한 농담을 주고 받을 때마저도 오류가 없다는 뜻은 아니라

하나됨

하나됨 (연중 27주 주일) 제1독서인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하나의 몸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갈빗대'라는 상징을 써서 표현한다. 시편은 하느님으로 온전히 하나된 가족이 받는 복을 노래한다. 제2독서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통해 하나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하나로 맺은 것을 갈라놓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그 온전한 하나됨을 위해 요구되는 '아이같음'을 뒤이어 서술한다. 이처럼 오늘의 주제는 '하나됨'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하나될 것이며 나아가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될 것인가를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꾸준히 서술하고 있다. 먼저는 원래 모두가 '하나였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원래 한 몸이었음을, 나아가 모든 인류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한 형제임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 과제이다.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에 집중하는 순간부터 서로 다름이 부각되게 된다. 다르기에 갈라서야 하고,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너는 나를 이해 못한다 하고,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짓는다. 그렇지 않다. 우리의 근본은 같기에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존재는 없다. 그저 우리가 그렇게 분리시켜 놓을 뿐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근원이 같다고 둘이서 철썩 붙는 것도 아니다. 그럼 두 존재를 새로이 하나로 접합시키는 데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아이같음'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아이의 특성은 2가지이다. 하나는 '더 상위의 존재에 대한 의탁'이고, 다른 하나는 '순진무구함'이다. '상위의 존재에 대한 의탁' 아이들을 살펴보자. 아이들은 혼자서는 못산다. 부모가 필요하다. 부모의 말을 따를 때에 많은 것들을 올바로 배울 수 있다. 자기 혼자 커 나가면서 스스로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있을 테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는 건, 인간 수준의 지식 습득에

신앙(La Fe) 한국어 스페인어 버전.

신앙 La Fe. 믿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살아오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고 만질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최고의 가치는 '재화'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요. "El creer", es el abrir los ojos ante el otro mundo que es diferente que el mundo donde vivimos ahora. Nosotros vivimos en el mundo que podemos ver y tocar. En este mundo el mayor valor es "riqueza". Por eso toda gente corre por máximo fuerza para ganar dinero. 하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보고 만질 수 있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오히려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희망' 같은 것이지요. 그 세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Pero en ese otro mundo, algo que puede ver y tocar no es importante. Sino allá importan las cosas que no podemos ver. Esos son como "amor" y "esperanza". El poder que podemos entrar en este otro mundo se llama "La Fe". 어쩌다 나무위로 올라간 아이가 내려오지를 못해 울고 있는데 밑에서 아버지가 팔을 펼치면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 뛰어내릴 것이요, 아버지를 도저히 믿지 못하면 그 가지를 붙들고 있을 것입

원하는 것만 원하기

원하는 것만 원하기 우리는 많은 경우에 속고 있습니다. 벌써 수많은 예언자들과 현자들이 경고한 바대로입니다만 우리가 바탕하는 세상은 지극히 약한 논리 위에 서 있습니다. 어떤 논리일까요? 지금 당신에게는 평화가 있습니까? 있다면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하지만 그 평화가 없다면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수많은 일을 열심히 해 내고는 있지만 여러분은 평화롭지 못하다는 걸, 도리어 일을 거듭하면 할수록 평화는 더욱더 멀어져만 가는 느낌이라는 걸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우리가 단지 '열심히' 일을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우리는 왜 '열심히' 일하려고 할까요? 무언가를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원하고 있는 건 합당한 것일까요? 우리의 평화는 '원의' 즉 '욕구'가 잦아들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욕구들 가운데 길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사실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인데 옆에서 넌 그걸 원해야만 마땅하다고 자꾸 주장해서 그것을 원하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새로나온 휴대폰을 예로 들어 봅시다. 과연 그 새로운 기능들 중에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들 중에 수많은 이들은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고, 사진을 찍고, 이 페이스북을 하는 정도면 만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이 나올 때마다 '저게 필요해'라고 생각하게 하는 건 여러분 스스로인가요 아니면 대중매체인가요? 대중매체의 수많은 광고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걸 우리가 원하는 걸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하루 한 끼의 감사 드리면서 먹을 수 있는 식사, 편안한 잠자리, 품위를 잃지 않을 정도의 단정한 옷,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제사가 아니라 자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의 과거를 쉽게 잊는다. 우리가 어둠에 싸여 있을 때에는 지극히 작은 자비의 빛이라도 오기를 바라던 우리들은 어느새 용서를 체험하고는 자신이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로 이미 우리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 스스로의 심판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안의 양 떼들은 안전하다. 우리가 더욱 신경을 써야하는 것은 착한 목자의 모범이다. 착한목자는 우리 안에 머물러서 잃은 양을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착한목자는 우리 밖으로 나가 양을 찾았다. 이 '우리'는 뭐고 '우리 밖'으로 나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많은 목자들이 양 우리 안에 앉아 양들의 젖을 짜 먹고 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면서 우리 밖으로 나간 양들을 비난하고만 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배 안에 앉아, 그저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두려움에 떨며 돛대만 꼭 붙들고 있다. 착한목자처럼 걸어나가야 한다. 베드로처럼 걸어나가야 한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을 따름에 포기해야 할 것들

주님을 따름에 포기해야 할 것들 연중 26주 수요일 오늘 복음은 나 스스로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라 더 의미가 깊다.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더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할 때, 하지만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일 때, 그것을 극복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이런 상황에서 살짝 혼란스러움이 온다. 사실 그동안 불필요한 것들(따지고 보면 다 필요한 것들이지만 아예 따지기를 포기했다.)을 하나씩 하나씩 버리는 작업을 했다. 그러니 사실 몇개 남지 않았다. 하느님과 나, 그리고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할 일들... 그 밖의 내 취미라던지, 기호, 막연한 강박관념같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배 바깥으로 내어던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더 명확해 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오늘 복음의 말씀들이다. "머리 둘 곳" "아버지의 장사" "가족들과의 작별인사"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알 것 같은가? 머리 둘 곳은 최소한의 안식처를 말한다. 이는 육체적인 안식처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든 감정적이든 어느 곳이든 어떠한 피난처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것들에 기대지 말라고 하신다. 이제는 누워 옹알거릴때가 아니란 이야기다. 나서서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이는 '안락'(세상의 행복)에 대한 우리의 미련을 끊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장사는 인간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는 일, 특히나 그것이 아버지라는 존재라면, 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동감하는 일이고 동조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어디까지나 '죽은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 신경쓰는 최고로 존중해야 할 일이다. 세상의 논리 안에서 가장 존중되어야 할 일이지만, 하늘나라의 일꾼들에게는 어디까지나 죽은 이들의 일에 불과하다. (이 말인 즉슨

복음화 메뉴얼(요한복음 4장)

복음화 메뉴얼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완전 마음이 없는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사실 굉장히 부담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이럴 때 '메뉴얼' 같은 게 있었으면 하는 생각들을 한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헌데 그 메뉴얼이 사실 복음 속에 있었으니 다름아닌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1) 나약함 속의 다가섬(강압적 태도의 포기) 가장 먼저는 예수님의 다가섬이지요. 예수님은 나약한 자, 무언가 필요한 자로 다가섭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청하십니다. 이는 복음을 선포하는 자의 첫번째 자세입니다. 뭔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밀어넣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뭔가를 청하는 사람으로 다가서야 하는 것이지요. 현대적인 상황을 적용 시키면, 너는 하느님을 모르는 죄인이니 성당에 가야 네가 낫는다는 식이 아니라, 네가 성당에 가주면 내 영혼이 편안할텐데라는 식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미천한 요구에 물을 줄 생각을 않고 심드렁하니 대응합니다. "당신은 유다인인데 왜 나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느냐?"라고 합니다. 당시에 갈라져 있던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것이지요. 이는 복음을 전하는 이가 늘상 마주하게 되는 냉대입니다. 그 사람이 가족이든지 친척이든지 친구이든지, 영원한 것에 마음이 없는 이에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괜히 한 번 괴롭혀보고 싶은' 존재인 것이지요. "니가 그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믿는다니 어지간히 잘났구나."라는 식입니다. 실제적인 일상 안에서는 "너는 지금 이 바쁜 와중에 뭔 성당을 다니니(기도를 하니)?"라는 식으로 들리게 됩니다. 2) 영적인 차원에로의 인도(그가 관심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이끌기) 바로 이러한 대응에 예수님은 오히려 본

교회 비판

사제들은 여러분 옆에 서 있는 사람이다. 때로는 여러분이 모르는 것만큼 모르고 여러분이 혼란스러운만큼 혼란스럽기도 하다. 다만, 직분이 직분인지라 성심 성의껏 대답하는 것이다. 하나 다행인 것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 분은 절대로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 측에서 계약을 깨뜨릴 일은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늘 사제 본인에게서 일어난다. 주된 문제는 '약함'이다. 모든 인간들이 지닌 나약성을 한 사제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서품을 받는다고 무슨 오로라가 감싸서 그를 보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보호가 있다면, '교회'가 증여하는 보호이다. 사제들을 일반적인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에 헌신하게끔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이 보호해준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입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제들을 위한 <기도>가 늘 요구된다. 이는 결국 사제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목자의 인도를 받게 될 양떼 자신들, 본인 스스로를 위한 기도가 되는 셈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곧잘 비판하는 시대가 되었다. 정당한 비판은 언제나 수용되어야 마땅하지만, '사랑'이 결여된 비판은 다른 의미의 폭력일 뿐이다. 공공연히 하는 교회를 위한 비판은, 때로는 우리 스스로를 비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어두운 모습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다가가서 조심히 충고해 주시라. 그러지 않고 그 충고를 제3자나 무작위 대중에게 "흉보기"라는 형태로 마치 자기가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혼자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한다면, 훗날 하느님 대전 앞에서 그 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너와 나

내가 느낄 수 있는 대상이나 상대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무의미하다. 어느날 일어났는데 내가 무중력 상태에가 온통 암흑 천지에 던져진다고 생각해보라. 심지어는 별도 없는 그 곳에서 내 신경은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그런 자리에서 홀로 나만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나'란 존재가 무슨 가치를 지닐 것인가? 주변에서 내가 마주하는 사물들과 사람들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나'가 되는 것이다. 주변에 사물만 존재하면 나는 그 사물을 조종하는 조종자가 될 뿐이다. 나와 상응하는 그가 있을 때에 나 역시도 그만한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가 그를 사물로 대할 때 그는 나에게 '이용가치'에 따라 판단되고 그런 나 역시도 '이용가치'에 따라 분별될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사랑으로 대할 때에 나는 그를 사랑의 위치로 올릴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사랑의 위치로 격상시킨다. 짧은 말마디지만 느낌이 왔으면 좋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을 '효용가치'로 판단한다.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일 뿐이고, 우리가 그에게 쏟는 그 사랑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도 드높이는 셈이다. 우리가 사지가 마비된 환자를 그 효용가치로만 판단해서 이 사람은 현세에서 무용하다고 판단하면, 나 역시도 그 판단으로 심판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사람도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이고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은, 그를 진정한 하나의 '상대자'로 대할 줄 알게 되고, 나의 존재 가치 역시도 마찬가지의 관점, 즉 그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있음으로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의 생각으로 예수의 효용가치를 따져서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할 때에 따로 데리고 가서는 야단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는

그리스도인 삶의 모델

뭘 하나 던져줘서 넙죽 받아먹는 건 쉬운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배가 고플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국 '생선보다 낚시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뭔가 상황을 주고 '이렇게 하세요.'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보다 중요한 건, 그 가정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다가오지 않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나은 것인가를 본인 스스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강의를 하면서 이 구절은 이렇고 저 구절은 저렇다는 건 지식의 욕구를 채워주는 좋은 내용이다. 하지만 그걸 구체적인 삶 안에서 실천시키는 것이야말로 성경강의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너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돈이 점령한 이 세상에서 너의 구원은 무엇이고 넌 그걸 어떻게 추구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메아리치게끔 하여야 한다. 사실, 이런 질문들에 사람들은 제각기 답변을 이미 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삶으로 대답해오고 있다. 굳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시키지 않아도, 돈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하고, 미워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이 용서하라 했기에 용서하는 사람도 있다. 저마다 이미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모델은 늘 있으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이다. 왕(삶) 이 삶을 자신이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 모범을 통해 자신의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 모범의 권위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예언자(가르침) 약한 이의 힘을 북돋아 주고, 엇나간 이에게 경고를 주는 사람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사람들의 감긴 눈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사제(신비) 예식들로 이러한 것들을 신비로이 드러내는 사람이다. 일상 안에서의 기도

삶으로 드러나는 솔직함

삶으로 드러나는 솔직함 A: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B: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렴. A: 하느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B: 기본적으로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알 수 있을테지. 그것들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렴. A: 그게 힘들 때는요? B: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힘든지 말해보거라.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A가 갑자기 건너뛴 부분을 식별할 수 있겠는가? A는 마음 속에 무언가를 상정하고는 그것을 숨긴 채로 '추상화'하려고 시도했다. 자기 안에 분명 무언가가 있음에도 그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이성만 가지고 대화할 때에는 '천사'도 어렵지 않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사고'가 아니라 '삶'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면서 기도회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는 사람이, 자기 가족 안의 힘들어하는 형제에게 도움의 손길을 거절한다면, 이는 분명한 '위선'이다. 돈보다 하느님이 더 소중한 가치라고 하면서 누군가에게 빌려준 돈이 아까워서 이를 갈고 있다면 이 또한 '위선'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숨김'이나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언제나 맑은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서야 한다. 때로 우리 안에 준비되지 않은 '나약함'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나약함'과 '악의'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하느님은 나약함은 보듬으시지만, 악의는 쳐버리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