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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12의 게시물 표시

외적인 분별

세상 일은 절대로 보이는 그 모습이 아닌거다. 행여 내가 큰 병을 얻어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고 치자. 사람들은 한 편으로, "아이구, 저 거룩한 신부님이 저런 병을 얻었을꼬? 분명 주님의 고통을 나누어 받는 것이겠지." 또 다른 한 편으로, "뭔 죄를 그래 마이 지었겠노? 소문이 흉흉하던데... 하는 거 보이 그렇더마는." 이라고 저마다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어떻게 분별해 낼 것인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참으로 변덕스럽고 외적인 것에 치중하기 쉽상이다. 겉으로 선해 보이는 일도 사실 속으로는 시궁창보다 더 지저분한 마음일 수 있고, 겉으로 심해 보이는 일도 내면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보화가 되는 것일수도 있다. 그런 고로 사람들의 분별은 중요치 않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한때 유행이었지만, 그릇된 칭찬은 엇나간 길을 가고 있는 이에게 오히려 교만을 강화시키고 만다. 그렇다고 비난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대해 좋게 말해주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수양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엇나가는 형제에게 충고해 주는 것도 내가 그저 싫어서가 아니라 그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내가 하느님 앞에 바로서기 위해서 이어야 한다. 또 타인이 나를 칭찬할 때에 감사히 받아들이되 절대로 자신의 위치를 높일 필요도 없고 타인의 비난을 받더라도 그 말이 정당하면 받아들여 나를 고치고 그렇지 않고 막연한 비난이면 하느님 앞에 곧게 서 있으면 된다. 사람들은 변덕스럽다.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어 버리기도 하고 내일의 적을 오늘의 친구로 만들수도 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싶으면, 하느님 앞에 고요히 서 있는 스스로를 살피면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로소 당신은 '겸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부르심

한국 매일미사 연중 34주 금요일 복음을 읽고 미사에 들어갔다가 오늘이 안드레아 축일이라 복음이 달라져 있는 걸 미사 직전까지 몰랐다. 살짝 당황했음. ㅎㅎㅎ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을 담은 복음인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게 있을 때에는 그 기회를 잡습니다. 늘 좋은 음식을 찾는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다가 좋은 음식을 파는 곳을 알게 되면 거기에 가려고 기를 쓰죠. 좋은 향수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내의 모든 향수가게를 뒤져 자신이 찾던 향수가 있으면 기어코 사고 말지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일상적인 생활을 늘 유지하고 있었지만 늘 마음 속에 뭔가가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배도, 그물도,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족도 있는데 말이죠. 그러다가 예수님을 얻어만나 그분의 부르심을 듣는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세상과 하느님 사이의 선택에서 주어집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아주 엉망인 남편과 사는 아내가 있습니다. 늘 술에 취하고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세상의 논리 대로라면 당장 헤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아내의 마음 속에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품고 이 남편을 인내하고 살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 아내는 남편으로 인해 자신의 성화의 길을 걷는 셈입니다. 굳이 이런 심한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안에서 아주 자잘한 것부터 세상과 하느님 사이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어느 택시 운전수는 손님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해 오다가 이제는 손님들을 '예수님 모시듯이' 합니다. 이전까지는 옷차림이 남루하고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무시하고 지나쳤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손님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

남미 교회의 현주소

주임 신부로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갖은 경우의 사람들이 다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영신사정을 구하려고 찾아오는 이는 거의 0%에 가깝습니다. 거의는 교회와 연관된 행정적인 문제로 찾아옵니다. 심지어는 세례를 원해도 이상한 케이스들만 들고 찾아오기 일쑤입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전반적으로 일해왔다는 걸 반증하는 것 뿐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그들의 사정을 돕되 그들의 양심에 엇나지 않게 하도록 하는 것 뿐입니다. 이들에게 세례가 갖는 의미는 주민등록에 크게 엇나가지 않습니다. 혼배에도 온갖 미신적 요소가 결합되어 날짜를 정해야 하고 적어도 홀수해는 피하고자 합니다. 이런 저런 껍데기 신앙들 속에서 진정한 빛을 찾는 이가 아쉽습니다,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느 우물가에서 이방 여인에게 '목이 마르다'고 하신 모양입니다. 이들의 관심을 하느님께로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미 교회는 언제까지 이런 행정적인 문제로 적지않은 시간을 신자들과 씨름해야 하는걸까요? 한편의 교회 자체의 각성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 걸까요?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교계제도는 그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자성 속에서 사제로서의 제 역할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교회에서 거룩함을 찾고,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먹여 주어야지요. 즉, 거룩함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사제들은 하느님과의 만남에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합니다. 즉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스스로를 살펴 신자들이 바라보기에 거룩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나도 사람인데'라는 말로 자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신자분들도 이런 움직임에 발맞추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제를 이상한 취미생활의 동료로

달란트

달란트 오늘 내 영적 자녀 하나가, 달란트에 대해서 물어왔다. 기왕 답변을 한 김에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보다 정확한 역사적 지식은 없지만 달란트는 고대의 화폐 단위였다. 성경 안에서는 어느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달란트는 오늘날 영어의 탤런트에 해당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재주' 정도랄까? 남들이 갖지 못한 나의 고유한 재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거고,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서도 많이 쓰인다. 누군가가 '야, 넌 달란트가 대단하네'라고 했을 적에, 이 의미는 가진 재주가 많네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이런 피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다시 복음의 달란트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5개의 달란트를 받은 종, 2개를 받은 종, 1개를 받은 종. 헌데 많이 받은 종들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배를 불려 놓았다. 하지만 하나만 받은 종은 그걸 고스란히 숨겨두었다가 주인 앞에 내어놓았다. 주인의 말에 주목하자.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과연 이 달란트가 무엇일진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늘려야 한다는 것인가? 달란트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적인 삶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 속에 내재된 '기회'를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어둠에 물들이지 않고 보존하려고 애를 쓴다. (10계명을 어기지 않으려는 노력,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 큰 죄를 짓지 않는 노력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내가 받은 영혼의 생명이 100%이라면, 나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그 100%을 크게 해치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하는 노력, 즉 악하고 게으른 종의 노력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는 이 생명을 늘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연중34주 목요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대한 경고를 하시면서 그 날이 다가와서 온갖 징조가 보이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이 말인즉슨, 평소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이라는 말입니다. 이 낮아짐의 신비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마다 높아지려 하다보니 서로들을 미워합니다. 그만 내가 낮아지면 세상이 조용할텐데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바둥대다보니까 평소부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머리를 쳐들어 키재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안다." "내가 너보다 더 많이 가졌다." "내가 너보다 신분이 높다." "내가 너보다 더 거룩하다." 이런 비교들은 결국 "내가 너보다", 즉 나와 네가 다르다는 걸 전제합니다. 서로 달라지려는 공동체가 하나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나머지 우리 모두는 형제들이고 서로 도우라고 이 땅에 모여 살아갑니다. 오로지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 겸손되이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이 다가왔을 때에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십시오." 아멘.

미움이 좋아서 미워함

미움이 좋아서 미워함 자기가 싫은 걸 계속하는 사람은 없다. 바늘로 자기 허벅지를 찌르는 게 너무너무 싫은데 자기 손으로 자기 허벅지를 찌르고 있다면 당장 그 일을 그만둘 수 있고 그만두게 될 것이다. '미움'이라는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저 사람은 내가 미워할 수 밖에 없어.'라고 한다면, 그는 사실 '미워하고 싶어서 미워하는 것'일 뿐이다. 미움이 정말 싫다면 그치고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싫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마음 속으로 일어나는 증오를 한껏 발휘하면서 본인 스스로는 나름대로 그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을 뿐, 마음 속으로는 가장 근사한 복수 방법을 찾고 있는 셈이다. 그가 던져오는 호의를 과감하게 무시한다던가, 인사를 하지 않는다던가, 주변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험담을 하면서 분명 자신의 증오를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드러내면서도 자기 딴에는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한 일은 없다면서 스스로를 '인내심 많은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위선자다. 미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미움'이 좋은거다. 그게 싫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라. 나는 사랑이 좋아서, 다시 사랑할 방법을 찾으련다.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할 것이다.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하는 이들이 되십시오. 하찮은 나의 성취욕 때문에 미움을 당하지는 마십시오. 세상 것들로 인해서 미움을 당하면 우리가 받을 상급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당하십시오. 누군가 다른 이를 '미워할' 때에는 공격받았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타인에게 '공격'이 될 때에는 그들이 '어둠'을 지니고 있을 때 뿐입니다. 그 이외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이름은 축복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진리'이고 '사랑'입니다. 서로를 갈라놓는 이들, 남을 험담하는 이들앞에 놓인 예수님의 이름은 그들에게 '쌍날칼'이 됩니다. 타인을 비난하는 이들, 하느님 앞에 자신의 허무를 모르고 교만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은 그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게 됩니다. 늘 마음 속에 예수님을 간직하고 정직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오직 이웃의 어둠만이 우리를 증오하게 하고 그 밖의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아멘.

참된 권위

참된 권위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 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요한 복음 18장의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권위'라는 것에 정면승부를 던집니다. 진정한 권위는 '진리'에 바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느님의 진정한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위는 이 바탕 위에 서 있어야 하고 여기에서 벗어난 권위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날 때마다 늘 뜻있는 자들의 '저항'이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이 '저항' 역시도 '진리'에 바탕해야 합니다. 그저 자리바꿈에 그칠 뿐인 저항은 진정한 의미의 저항이 아닙니다. "대사제께 그 따위로 대답하느냐?" 특히나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참으로 많이 들을 소리일 수 있습니다. "어디 어르신 앞에..." "어디 선생님 앞에..." "어디 XX도지사님 앞에..." "어디 신부님 앞에..." 대단한 위계로 나뉘어져 그의 행실에 상관없이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섬겨야 하는 사회. 유교정신과 군대문화가 합쳐져서 어딜 가든지 '조직'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사회. 한국 사람의 마음에 은연중에 '문화'로 깃들어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교회는 가장 큰 가르침으로 '부활신앙'을 꼽는다. 전례력에서 '부활절'이 차지하는 자리를 되새겨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야말로 세상 어느 누구나 찾아 헤매고 다닐 법한 최고의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교는 이 부활사건으로 인해서 마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듯이 세계 방방 곡곡으로 퍼져나간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바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 신앙'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존재할 수 없음에도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십자가가 없다는 듯, 아니, 십자가를 애써 뇌리에서 지워 버리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요즈음이다. '십자가'는 뭘까? 젊은이들의 장신구에서 쉽게 발견하는 십자가, 성당 벽에, 신자 가정에 늘 걸려있는 그 십자가, 과연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내가 나름대로 가장 단순하게 이해한 십자가는, '죽음'이다. 내가 말을 하고도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다. "아니 신부님, 누가 그거 몰라요?"라고 다들 비웃을 법 하다. 그렇다. 나를 향한 그 비웃음도 나의 '죽음'이 될 것이기에 받아들이련다. 십자가를 제대로 받아들이려는 이는 이러든 저러든 세상 안에서 '죽어야 한다'. 그 죽음은 가장 기초적인 것에서 세상 기호에 대한 죽음이다. 전에 내가 좋아했던 것들, 가장 기초적으로 '재화'와 관련된 것들에 죽어야 한다. '재화'를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밖에는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 단계들이 있을 것이다. 보다 고차원적인 것들로서 '명예나 권력'에 관계되는 것들, 내가 가진 '지식들', 그리고 그렇

책임 전가

책임 전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떳떳하게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심지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조차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다. 일단 자신이 굳건히 서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함부로 자신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옆에서 쓰러져가는 다른 이마저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철저히 책임 여부를 가리는 사람이 있다. 내가 한 일과 남이 한 일을 따지고 끝까지 그 책임 여부를 가려내어서 자기가 한 최소한의 일, 더이상 피할 수 없는 그 책임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쉽사리 다음 단계인, '책임 전가'의 사람으로 바뀌기도 쉽다. 사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낳지만 않았어도 지금 일어날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핑계를 찾으려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발견하고 그 핑계거리의 주체가 되는 사람을 공격한다. 이들이 하려는 말은 결국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거다. "나는 잘못이 없다. 쟤가 잘못했다."는 초등학교 1학년들의 수준의 책임전가에 머무른다. 책임을 지기 싫기에 당연히 수동적으로 맡겨지게 되는 최소한의 일만을 하고자 한다. 반면 책임을 지려는 이는 무엇이 진정 필요한 일인가를 찾아내고 그것을 행한다. 실로 이 둘의 차이는 엄청나다. 주변에서 '쟤는 저래서 안돼'라는 이야기를 곧잘 꺼내는 사람, 나와 너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 툭하면 뒷담화를 하고 남을 비난할 준비가 갖춰진 사람들이 그런 부류다. 혹시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능력껏 그 사람이 지금 하고자 하는 바(책임전가)의 본질을 드러내어 주되, 최대한의 겸손과 친절로 하고, 나의 능력 밖이라는 걸 절감하면 멀찍이 떨어지는 것이 좋다. 가족이라면? 저런... 그 사람이 당신의 배우자가 아니길... 교회 안에서 배우자는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행여 다른 가족이라면 그나마 위안삼을 말이 있으니,

요한 복음 18장

요한 복음  18장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고 있다. 최근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복음이 등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군중들은 증오에 가득 차 있어서 '진리'고 나발이고가 없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증오의 대상을 제거하는 것 뿐이다. 세상 안에서도 이런 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증오에 가득차서 다른 이들을 심판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진리'란 이미 물건너간지 오래다. 지금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또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선 무엇을 바라는지는 전혀 알 바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처에 둘러싸여 있고 그 상처를 일으킨 원인과 더불어 그 사람을 증오할 뿐이다. 한 영혼은 악할 수도 선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미흡하고 나약한 동안에 우리는 많은 잘못과 오류를 범하게 되고, 훗날 시야가 넓어지고 하느님의 빛의 조명을 받으면서 이런 것들을 뉘우치게 마련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거쳐야 하는 과정일 뿐, 어느 누가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피고발자와 심판자가 나뉘어지니, 피고발자는 자신의 과오를 가득 담고 있는 사람이고 심판자는 자신이 짐짓 죄가 없는 듯이 타인을 심판하는 이들이다. 요한 복음 18장이 상황이 그러하나, 이 순간이 더 최악인 것은 예수님은 심지어 털끝만치도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순간 만큼은 모든 심판의 자리에 놓여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죄에 죄를 더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문제해결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참 어리석고도 어처구니 없는 방법, 즉 모든 걸 감싸 안고는 자신이 죽어버리는 방법이다. 소위 의식이 있다는 그리스도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이다. 자신이 열심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받은대로 갚음'에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않다. 예수님의 이 방식을 현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남의 잘못을 마치 자신이 저지른 듯 감싸안고 자신이 그 벌을 받는 방식은 지금의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방식이다.

욕망과 희망

욕망과 희망 욕망과 희망을 구분하자. 무턱대고 '바란다'는 말로 섞어쓰면서 우리는 이 두 불협화음을 쉽사리 무시해 온 느낌이다. 욕망, 또는 욕구는 '육의 요구'이다. 가장 기본으로는 '생존의 욕구'가 있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욕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근본은 똑같으니, '다 살자고' 하는 것들이다. 욕구의 근본에는 현세의 생에 대한 강한 바램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욕망들 욕구들은 잘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생이 동물 수준에서 끝나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영의 요구'이다. 이 희망은 육의 요구와는 전혀 딴판으로 움직이는 무엇이다. 심지어는 육의 요구를 거스르기도 한다. 영원을 향한 희망에 일상의 욕구들을 희생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명을 받들려는 마음에 심지어는 내가 먹지 않고도 남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기도 한다. 영원에 대한 희망으로 현세의 식욕을 거르스는 경우이다. 당신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욕망이 있는가? 희망이 있는가? 사실 사람 안에는 이 두가지가 상존하고 있으니, 이 두 가지가 서로의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짤막한 말 한마디에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희망'을 위해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래야지,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누리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은 오직 하느님께서 그걸 원하실 때 뿐이다. 참 어려운 말이다. 지금의 나에게도 참 어려운 말이다.

3단계 자가 분별법

3단계 자가 분별법 1단계 - 세상사람(속인) 하느님에 대한 마음이 없는 사람.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인지력이 거의 0%에 가깝고 따라서 영적인 여정에 대해서 굉장히 무지한 사람. 반면 세상 것들에 대한 인식률은 거의 100%에 가까워서 무엇이든 세상적으로 득이 되는 것을 구하고 세상적으로 손해가 가는 일이면 치를 떨며 괴로워함. 주변에서 곧잘 만나볼 수 있으며 지나친 탐욕, 뒷담화, 부정직(거짓), 집착, 불안, 이간질 등의 증세를 보임.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도 이런 류의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으며 그들이 하는 신앙행위라는 것들은 거의 모두 '관습'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함. 이들은 기도를 해도 세상 안에서 남에게 자랑하고 내세우기 위해서 함. 2단계 - 두려움의 신자 지옥을 두려워하는 이들. 혹은 세상 안의 어떤 시선이나 불이익이 두려운 이들. 하늘나라에 들어아고 싶기는 하지만 자신은 없고 온 몸이 세상 안에 휘둘려 돌아가는 가운데 유일하게 한 가지 '희망'을 쥐고 살아가는 유형. 이들은 턱걸이 신자들에도 비길 수 있지만 이 턱걸이가 언제까지 지속될는지는 아무도 모름. 자신의 영혼의 영원한 파멸을 두려워하여 피치 못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부류들. 주일미사를 나오는 이유는 10계명을 어겨 성사를 보는 게 귀찮아서임. 레지오 신심활동도 하지만 그 그룹의 장들의 눈치를 보거나 수도자, 사제의 눈치가 보여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임. 지체 가운데 '뇌'만 천당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연옥에서 한참을 정련받아야 할 부류들. 3단계 - 사랑의 신자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모습'을 찾는 이들. 그가 사제이면 미사와 성사들을 충실히 집전하고, 그 밖에 교회 생활에서 신자들에게 영적으로 유익한 것을 찾고, 수도자이면 '기도' 안에서 하느님 가까이 머물려고 노력함. 일반 신자라면 자신의 직장이나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모범을 '의식

마지막의 시간

마지막의 시간 연중34주 화요일 처음 디카가 나왔을 때에는 640X480 픽셀이었지만, 그저 필름으로 현상할 필요없이 사진이 찍히는 게 신기하고 또 신기해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성능이 개선된 디카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 그 예전의 똑딱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훗날 DSLR을 사고부터는 세상의 모든 똑딱이들이 얼마나 하찮게 보이던지요. 이런 식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게 되면 예전 것들이 하찮고 우습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인간도 업그레이드를 합니다. 어릴 때의 장난과 놀이에서 벗어나 청소년기의 호기심거리와 놀이에 빠져들고 나아가 어른이 되면서 술자리라는 것도 알게 되고 그렇게 상승기류를 타다가 나이가 들어지면 하강기류를 타겠지요. 사실 벌써부터 그런 기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술도 20대처럼 마시지는 못하겠고, 노래방에 가도 아는 노래가 없습니다. 음식도 과식을 하면 곧잘 체하곤 하고 아름다운 이성을 보아도 10대의 감성처럼 마음이 두근거리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야말로 진정한 '업그레이드'의 시기입니다. 이제는 현세의 상승이 아니라 '영원'의 상승을 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현세의 것들을 '포기'할 줄을 알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처세술책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라고 가르치지만, 저는 반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젠 세상 것들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천상의 가치들을 배워 나가야지요. 한편으로는 포기처럼 보이고 무능해 보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보다 참된 것을 손에 쥐는 시기입니다. 처음에는 젊은 날의 기호들이 포기되고, 다음으로는 소위 '야망'이 포기되고, 그 밖에도 명예나 권력따위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반면 '지혜'가 늘어나겠지요. 이러지 못한 추한 어른들이 있으니,

마음의 크기

마음의 크기 외적인 구분을 쉽게 하는 우리들입니다. 부와 가난, 높음과 낮음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람의 차이는 내면에 달려 있고, 하느님은 그 내면을 주시하십니다. 단순히 100만원과 1000원의 차이가 아니라, 가진 것, 아니 남아도는 것의 일부와, 그날 하루의 모든 것의 차이는 그야말로 내적으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의 모습도 그래야 합니다. 오늘 나의 하루를 모두 드려야 하는데, 오늘도 저는 아침에 하느님과 기도 시간 하나로 실갱이를 했습니다. (하긴 순전히 나의 변덕일 뿐이지요... 하느님은 째째한 분이 아니니까요.) 그리고는 결국 기도시간을 취침과 딴짓거리로 바꾸었습니다. 저는 아직 멀었나봅니다. ㅎㅎㅎ

다가올 왕국

다가올 왕국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정권이 바뀌면 내치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전 정권에 알랑방귀를 뀌던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아직도 지금의 이 '세상'이라는 정권에 알랑방귀를 뀌고 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요한복음 16장을 보시라.) 더 이상 해 먹을 게 없는 세상인데 사람들은 한 푼 더 쥐어 보겠다고 난리를 친다. 몰라서 그런다. 무엇이 다가오는지 몰라서 그런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신다. 그분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고 그분의 통치 원리는 '진리'와 '사랑'이다. 이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 그 통치는 지금부터 이루어지고 있지만, 눈이 가리워진 사람들은 그걸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 보다는 거짓에 몸을 담고, 사랑보다는 세상의 재화와 권력과 명예에 목을 맨다. 지금의 세상이라는 정권에 더이상 빌붙어 살지 않도록 주의하자. 세상과 더불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것의 실체를 알게 된 이들은 다른 이들을 구하라. 사라져버릴 그들의 운명을 구해 영원의 길로 이끌어라.

의분(義忿)

저녁 6시 혼배미사를 마치고 재정 위원회 모임을 하던 중이었다. 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는 빨리 좀 와달라고 난리가 났다. 그래서 갔더니, 혼배를 거행한 친척들이 사무실에 쳐들어와서는 돈을 돌려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참고로 우리 본당은 정시에 시작한다는 조건으로 200볼리비아노(한화 4만원 가량)를 보증금으로 받고 정시에 도착하면 돌려주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받은 보증금은 '사회복지회'기금으로 본당을 찾아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고 있다. 이 부부는 아니나 다를까 신부쪽이 10분 정도 늦게 도착을 해서 결국 15분에야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 중의 한 아주머니는 자기가 학교 선생인데 10분은 보통이라며 어딜 가나 10분은 다들 봐준다고 하며 이건 도둑질이나 다름 없노라고, 당장 돈을 내어놓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서 우리 본당에서 규정한 내용을 잘 설명해 주며 여러분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생긴 이 돈은 우리가 한 푼도 쓰지 않고 정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쓴다고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 돈을 손에 쥘때까지는 나가지 않을 작정으로 보였다. 나 역시도 괜한 오기가 생겼다. 200볼리비아노 따위, 나에게는 우스운 돈이었지만 이따위 인간들에게 내가 그 돈을 돌려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신랑신부를 불렀다. 그리고 내가 설명한 것을 다시 설명하면서 내가 한 말이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하라고 했다. 신랑이 '맞다'고 하면서 그래도 자신들이 가난하니 100씩 반띵을 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이네들은 혼배를 마치고 축하연을 벌일 작정이었고,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술과 음악 장비에 탕진된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가난하니 돈을 돌려달라며 옆에서는 더욱 가관인 것이 '이제 이 성당 못나오겠다'고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경

신앙 행위의 자발성

신앙 행위의 자발성 신앙 안에서의 활동은 '스스로' 이루어져야 한다. 남이 시켜서 한다거나, 남의 시선이 두려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익숙해질 때 까지이고, 진정 그 행위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단 한 번의 기도를 하더라도, 나의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하고 단 한 번의 자선을 하더라도 피치 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신학교 안에서 7년을 단련받고도 매 방학때면 신학생의 본질이 나온다. 그걸 보면 성무일도는 '하기 싫은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 '하기 싫은 행위'를 자발적으로 할 때에야 비로소 그는 그 행위가 지향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 왜냐면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내가 싫은 것을 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악덕에 해당하는 일에 가담할 수는 없다. 친구를 사랑하기 위해서 술자리에 머물 수는 있지만, 그 술자리의 분위기가 덕스러움이 사라져버린다면, 소위 세상 안에서의 2차, 3차를 자꾸자꾸 지향한다면, 몇 번이고 충고를 해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기만 한다면, 그건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서 그 친구를 끊어야 할 일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은 감정적인 고난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에 불과하다. 진정 사랑하는 친구는 영적 충고를 아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친구가 나를 두려워해서 무언가를 하지 않도록 언제나 조심해야 할 것이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용기를 필요한 조언을 해 주도록 하되, 그럼에도 그 친구가 나를 사랑할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울테지만, 몇 번 하다보면... 감이 오겠지 뭐. ㅋ

죽음 이후...

죽음 이후... 죽음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 영원한 숙제입니다. 일단 어떻게든 산다면, 이 목숨을 부지한다면 세상 안에서 문제를 해소하던지 회피하던지 할 터인데, 어느 날인가 인간은 마치 이 세상에서 추구해오던 모든 것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가꾸어오던 몸도 생명이 끊어지고나면 썩기 시작하고, 은행에 가득가득 채워두었던 돈도 세상 사람들이 나눠 먹고, 자아 완성을 한답시고 애쓰던 직장도 의미를 상실하고,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 나를 위해 어찌 손을 써 줄 수는 없습니다. 이 극도의 허무와 상실... 이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죽게 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허무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하고, 오히려 시작이라 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죽음 이후에 본격적인 삶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인간의 근본 질문에 봉착한 사람은 '선택'이라는 걸 해야 합니다. 시쳇말로 한 번 속아 보던가, 아니면 그 근처도 다가가지 않고 내 마지막 남은 육신의 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찌질하게도 양다리를 걸친 사람들인데... 여전히 이 생을 누리기를 원하면서도 한쪽 다리를 영원에 걸치려는 이들입니다. 또 전혀 딴판으로 영원을 '이용해 먹는 이들'이 있으니 성경에서 "하늘 나라는 힘을 쓰는 자들에 의해 수탈당한다"고 표현되는 대목입니다. 하늘나라를 팔아서 한 몫 단단히 보려는 이들, 하늘나라로 현세의 생을 유지해 보려는 이들입니다. 이든 저든 한 사람은 떠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이미 영으로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말이죠. 육의 쾌락은 한순간이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행복'이지

마르코 복음과 함께 걸어가는 '가정' [1]

마르코 복음과 함께 걸어가는 '가정' 가정 위원회에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점점 헤이해져가는 가정 위원회의 구성원들의 마음을 새로이 다잡기 위해서 계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주 금요일마다 양성과정을 마련해 보자고 하였고, 차일 피일 미루던 중에 오늘 아침에 문득 연락이 와서는 당장 오늘 저녁부터 하겠다고 합니다. 조금은 갑작스런 실행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이 역시 하느님께서 마련하긴 기회라고 생각하고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복음 말씀 외에는 달리 아는 것이 없기에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은 마르코 복음으로 가정 위원회의 양성과정을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1장 길 다듬기(첫 시작점) 어느 길이든지 첫 시작이 있게 마련이고, 그 시작에 앞서 준비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마찬가지의 준비과정이 필요했고, 가정에 대해서 배워 나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가장 첫 시작점에 우리는 '길을 고르게 하기'라는 작업을 만나게 됩니다. 길을 고르게 하는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깊이 파인 곳을 메꾸고, 다른 하나는 우뚝 솟아있는 부분을 깎아 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오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안의 이 두 가지 부분, 낮춰진 부분을 들어높이고, 높아진 부분을 깎아내리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낮추인 마음과 높아진 마음 우리는 '약점'이 있고 '죄'를 짓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묵직한 마음이 바로 낮춰진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좋은 수단으로는 '고해성사'가 있습니다. 반대로 마치 우리가 죄가 없다는 듯이 생각하는 마음,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능력이 대단한 무엇인가

그리스도왕 대축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그 즉시 빌라도는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가 뭘까요? 하하하하.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진리를 분별해야 할 세상의 심판관이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리일까요? 진실과 진리는 유사한 말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진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 사건, 현상을 말하고, 진리는 올바른 이치를 말합니다. 이 묘한 차이를 이해할 때에 보다 예수님께 가까이 접근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진실'의 예> 친구가 와서 내 사탕 하나를 빼앗아 먹었습니다. 나는 선생님께 이 일어난 일을 '진실'되이 알리고, 다시 친구가 가지고 있던 사탕 하나를 되받았습니다. '진리'의 예> 친구가 와서 내 사탕 하나를 빼앗아 먹었습니다. 나는 지금 우는 이들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이 가르친 진리를 믿습니다.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라는 예수님의 진리도 믿기에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합니다. 여전히 나는 사탕을 빼앗긴 그대로의 상태이지만 나는 내가 예수님의 진리 안에 머물고 있음을 압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진리' 속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고, 여전히 '진리' 속에서 왕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자신의 왕을 지니고 있고,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실'인가 아닌가만 분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왕이 진리이고, 있는 놈은 위로 올라선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왕은 더할 나위 없이 낮은 자리에 계시고, 여전히 미사 가운데 '빵'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받아먹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성경과의 만남

인간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비유가 적절히 담긴 글이나 책을 만나는 건 설레는 일이다. 세상엔 그저 흘긋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벼움이 느껴지는 수많은 것들이 많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몇 번만 사귀어도 그 존재의 가벼움이 참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진솔한' 사람을 찾게되고 글과 책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시절에 읽던 책을 세월이 흘러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 전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진중함을 이 책이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때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전에는 그저 한 권 떼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허겁지겁 글자들을 눈으로 쫓아다니기에 바빴다면, 이 두 번째의 기회에서는 그 글자들 안에 함축된 작가의 사상에 좀 더 다가설 수 있게 되고, 그 작가와의 은밀한 만남을 가지게 된다. 아직 손을 제대로 대지 못한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성경'이다. 이 책은 손에 들때마다 경이로움이 가득하다. 그 책을 쓴 이들을 넘어서서 느껴지는 '영원'의 빛 때문이다. 미사 강론 때문에라도, 성경 강의 때문에라도 신약은 어떻게든 펼쳐보고는 있지만 구약은 그 방대함도 방대함이고 내가 어떤 준비를 갖춰야 할는지 몰라서 섣불리 다가서기가 힘이 든다. 소위 성서학이라는 걸 공부하신 분들은 각 권의 역사적 배경 및 각 단어의 원래의 의미와 그 문화권 안에서의 해석 등을 찾겠지만, 성경은 그 말마디 하나하나를 다 해체해서 뜯어발겨보았다고 해서 읽었다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안에 숨어 계시는 성령과 만남을 이루어야 한다. 행여 성경을 읽지 않고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사랑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오늘날의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 그분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이다. 이웃을 향한 조건없는 사랑 안에서 이들은 소위 성경을 공부했다는 이들보다도 더 훌륭하게 성경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기도의 집, 강도의 소굴

기도의 집, 강도의 소굴 (연중 33주 금요일) 기도의 집은 기도의 장소이고, 우리들이 머무는 가정입니다. 강도의 소굴은 약탈하는 곳이고, 두목과 졸개들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기도의 집이지 강도의 소굴이 아닙니다. 헌데 오늘 예수님은 그 안의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상냥한 모습, 죄인들을 감싸는 모습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평소의 말씀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 해석에 관한 우리의 모든 작업은 예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에서 시작이 됩니다. '분명 예수님은 이유가 있으셨을거야'라는 생각과 그것을 찾고자 하는 마음에서 성경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성경 안에서 모순된 구절을 찾기 시작하면 하나에서 열까지 모순과 비논리성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반겼을까? 아닙니다. 예수님도 분명한 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너져 있는 이들을 한없는 애정으로 바라보셨지만,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남을 심판하는 이에게는 매정함을 보이셨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돼지떼가 죽는 걸 묵인하신 걸로 봐도, '동물사랑협회'에서도 그리 반갑게 맞이할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의 오늘의 일화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기도하는 집에서 '장사하려는 이들'을 얼마나 질색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외적인 죄인들(창녀, 세리, 병자, 나환자들)은 사정없이 반기셨지만, 겉은 번지르르한 채로 내적으로 썩어 들어간 죄인들에겐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오도록 합시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강도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 안에서 눈에 드러나는 '성전'도 중요합니다. 성전은 교회 공동체가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전에서 장사하려는 생각을 잔뜩 지닌 이들이 머물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사제는 사람들

기도

기도 교리서에 나오는 '기도'의 종류와 정의 따위를 떠나서 조금 편안하게 생각을 해 보았으면 좋겠다. '기도'는 도대체 뭐하자는 건가? 한 꼬마아이를 생각해보자. 이 아이가 처음에 할 수 있는 건 '떼를 쓰는 것' 밖에 없다. 우유를 달라고, 똥오줌을 처리해 달라고, 이런 저런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자 떼를 쓴다. 아이가 좀 자라면 말을 배우고 부모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부모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조금씩 실천하지만 여전히 떼를 쓰기도 한다. 아이가 청년이 되고 결혼을 하면 이제는 자신이 꾸려야 할 식솔들이 생긴다. 이제는 자신이 예전의 부모 역할을 하기 시작하고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는 늙어 노년이 되면, 하루하루 살아있는 게 기적일 뿐이라는 걸 체험하고 모든 것에 감사드리게 된다. 기도의 정의는 끝났다. ㅎㅎㅎ 하지만 설명이 필요할테지... 처음엔 누구나 청한다. (청원기도) 그 다음엔 대화를 나눈다. (묵상기도) 그리고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다. (관상기도)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감사 뿐이다. 청원이고 묵상이고 관상이고... 감사 드리는 사람이 장땡이다. 이든 저든 뭐든 감사하라. 시련이든 고통이든,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든, 직장이 파탄이 나든(좀 심했나? ㅋ)... 감사하라. 사지가 떨어져 나가도 감사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감사하라. 감사가 장땡이다. 그게 기도의 최종단계이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는데... 나는 아직도 멀었다. 겨우 묵상이나 가끔씩 하는 정도다. 평소엔 거의 청원이다. 아직도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뚜렷한가보다. 언젠가 내 주변의 서로다른 '나'가 더 뚜렷해질 때에 비로소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면서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모든 것에 감사할 날이 오겠지. 그냥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고 하루하루 살고 있다. 그러니 당신도 그렇게 하면 된다.

하느님의 도구

하느님의 도구 최고의 권능을 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에, 그 화가의 진정한 실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값비싼 화판에, 온갖 양질의 유화 물감과, 최고급 붓과 파레트들로 그리는 것일까? 아니면 종이 한 장에, 그저 연필이나 볼펜으로 후려 갈기는 방식일까? 하느님이 선택하는 건 후자의 방식이다. 그렇게 그려서도 더 나은 그림이 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화가의 실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정말 말도 안되는 도구들을 고르시는 이유이다. 사제들이 재주가 뛰어나서 사제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때로는 정말 말도 안되는 사람들이 사제가 되곤 하고,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놀라운 일을 해내게 된다. 그렇다 치더라도 도구의 선정 기준이 없는 건 아니다. 하느님은 '맑은 마음'을 지닌 세상의 약자들을 고르신다. 아무리 화가가 재주가 뛰어나도 젓가락으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릴 순 없는 노릇이다. 맑고 투명한 마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 된다. 이는 세상 안에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온갖 화려함으로 겉을 치장하고는 정작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붓이 있다면, 하느님은 당장에 그 붓을 던져 버리고 말 것이다. 맑고 투명한 마음, 하느님의 '선하심'을 담아낼 수 있는 그 마음을 갖추도록 노력하자. 정직함과 겸손함으로 보이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가꾸도록 하자. 그 때에 하느님이 당신이 원하실 때에 그 사람을 쓰실 것이다. 요즘 들어 많은 사제들이, 이런 저런 '자격'을 갖추려고 많이들 노력을 한다. 신자들이 전문화 되어가니 사제들도 '전문화' 되어야 한다고 한다. 좋은 취지이다. 도구가 개선될수록 더 화려한 그림이 나올테니까. 하지만 '짠 맛'을 잃은 소금은 결국 사람들에게 짖밟히게 된다. 사제들에게 있어서 짠 맛은 하느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술은 새 부대에...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저 예수님의 형식을 받아들인다는 게 아니다. 남들이 다니지 않는 종교활동을 주일마다 하고, 세례나 견진과 같은 종교적 외적인 틀을 받아들인다고 예수님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알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과도 같은 일로써 때로는 전에 지니던 가치관을 부숴뜨리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이라는 건 그런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둘 사이의 이끌림과 같은 것으로 '널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대상의 어떤 '사랑스러움'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고 귀여운 아기의 사랑스러움을 거부할 자가 누가 있으며, 좋은 음악을 듣고싶어하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사랑'이라는 건,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무언가를, 심지어는 이전에 완강히 거부하던 무언가를 스스로의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 가장 대표주자로는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서 좀 더 구체화 시켜보자. 사탕을 2개 가진 철수가 있고, 옆에 사탕이 없는 영희가 있다. 2개의 사탕은 마땅히 철수의 것이기에 혼자 다 먹어도 뭐랄 수 없다. 그래서 철수가 가지고 있던 2개의 사탕을 다 먹으면 그것으로 상황 종료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어떤 '사랑'의 행위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선생님1이 다가와서, 자신이 가진 선생님의 권위로 철수에게 명령을 한다. '2개를 가지고 있으니 나눠 먹어야 해! 안그럼 혼난다!' 철수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1개를 영희에게 나눠주었다. 결국 여기에도 '사랑'이라고 할 건 없다. 처음의 상황보다 조금 나아 보이지만, 실제로 나아질 것도 없는 것이, 영희는 그저 선생님의 명에 따라 하나를 더 받았을 뿐

회개

회개 점심때 '회' 한 사라 하고, 저녁에 '개'고기 먹으면 '회개'한다는 농담이 있다. '회개'란 뭘까? 막연히 떠오르는 이미지는 '미션'에 나오는 로버트 드니로의 회개 장면이다. 지난날의 자신의 과오를 상징하는 갑옷을 짊어지고는 이과수 폭포를 기어오르는 장면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동안 박해하고 잡아 노예로 팔아온 원주민들이 그 갑옷이 묶인 끈을 끊을 때, 이 사람은 진정한 '해방'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이 회개라면... 과연 세상에 몇 명이나 '회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막연한 상상에서 벗어나서 본래의 주제로 돌아오자. 회개라는 것은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방향전환'이다. 세상 것들을 향한 나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회개'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 일회적이고 행사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성인이 세례를 받으면 그걸로 회개했으니 되었다고 생각해 버리고, 판공이 다가와서 '고해성사' 받고 나면 되었다고 안심한다. 회개라는 방향전환의 진지함은 그런 외적인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한 세례나 고해성사에서 드러나는 회개는 지난 날의 과오를 끊어 버리는 기초작업에 불과하다. 진정한 회개는 일상 안에서 삶으로 표현된다. 저녁이면 가족들이 모여 텔레비전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 시간을 바쳐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안다. 당신은 어쩔 것인가? 우리의 '회개'는 단순한 말이나 의식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 삶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 회개는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말로는 천상교회의 신자가 될 수 있지만, 일상의 즐거움과 기도의 즐거움 사이의 양자 선택이나, 내가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사는 데 투자하는 것과 가난한 이를 위해 자선을 베푸는 품의

하느님 도와주세요!!!!

하느님 도와주세요!!!! 맘에 안드는 성격이 모난 사람을 만났다. 내가 화를 내었다. 뉘우치고는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렸다, 도와 달라고. 과연 하느님은 어떤 도움을 주실까요? 1) 그 사람을 지상에서 사라지게 함. 2) 그 사람의 모난 성격을 뒤바꿔 놓음. 3) 그 사람을 만나지 않게 하는 상황을 만드심. 4) 그 사람을 견뎌낼 '인내'를 나에게 선물하심. 사실 하느님께서는 1) 2) 3) 4)를 다 이루실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4)를 가장 선호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열매를 기다리십니다. 그저 그런 상황을 회피한다고 해서 사랑이 커지지 않고, 그 대상이 제거된다고 해서 사랑이 커지지도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할 때에 성장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인내'하기를 바라시고, 우리가 '정직'하기를 바라시고, 우리가 '친절'하고 '상냥'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원하는 걸 청하십시오. 그분은 필요한 도움을 미루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의 신비

사랑의 신비 한 아이를 하루 온종일 패고 다음날 또 때려가며 '넌 앞으로 날 사랑한다고 말해!!!!'라고 윽박질러서 그 아이에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그 말마디가 나에게 기쁨을 줄 것인가? 진짜 사랑은 상대자의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붓고 아이가 첫마디를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어느날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와서는 '사랑해요 아빠'라고 속삭일 때, 어버이 날이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용돈을 모아서 나의 선물을 마련할 때, 그때에 진정한 사랑을 느껴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이다. 하느님의 전능한 권능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건드리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 충만하고 자유로운 자녀의 상태에서 두려움에 휩싸인 종의 상태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시는 이유이다. 하느님이 능력이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은 이미 드러난 수많은 설명할 수 없는 치유들로 알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기적이 그 당사자의 자유의지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더 완성시킨다는 것을 아시면 거침없이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 섭리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단순히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제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고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발 아래 굴종시키려고 한다. 더 많이 앎으로써, 더 많이 가짐으로써,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유명세를 타면서 말이다. 하느님의 숨겨져 있는 모습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분의 한없이 크신 사랑에 잠겨드는 느낌이다. 그리되면 우리가 '소유'하려 했던 것들의 본질이 보이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들 외에는 마음이 점점 멀어지게 마련이다. 전에는 그 사물의 가치 그 자체에 집착을 했다면, 이제는 그 사물을 둘

요한 복음서 16장 (죄, 의로움, 심판)

요한 복음서 16장 죄, 의로움, 심판 죄 = 예수님을 믿지 않음 의로움 =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함 심판 =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음 우리가 통상적으로 하는 '죄'에 대한 생각은 계명의 어김입니다. 정해진 규칙이 있고 그걸 어기면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고? 그럼 우리 선조들은 다 죄인인가? 실제로 이런 생각을 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특정 종교의 지도자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초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과 행적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과 행적을 곡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은 사실 '껍데기'를 숭배하고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사랑.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는 이라면 설령 그리스도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교회에 몸담고 교회의 모든 규정을 다 지킨다 하더라도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면, 이 사람은 '죄'를 짓고 있는 셈입니다. 죄는 규율의 준수가 아니라, 예수님이 보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로움'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의로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고 우리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의

사제의 기적

사제의 기적 사제가 이룰 수 있는 최대의 기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변화'이다. 빵과 피를 축성해서 우리 구원자 예수님의 몸과 피로 만드는 기적. 그것은 모든 천상 존재들이 부러워하는 기적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일들 가운데에 단연코 '최고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능력을 소홀히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제가 헌신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을 이 기적에로 초대하고, 이 기적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이거늘 자신이 가진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심지어는 의심하거나 아예 찌든 일상의 지리멸렬한 과업으로 생각하려는 사제들이 적지 않다. 나아가서는 다른 기적을 찾고 기다린다. 충분히 이해는 한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내 눈에서 벌어지는 기적을 믿지 못하는데 다른 곳에서 성모상이 피를 흘린들, 척수가 뿜어져 나오는 들 무슨 상관인가? 기적은 눈으로 체험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체험하는 것인데 말이다.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런 눈에 솔깃한 '이적'을 찾아 다니는 신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으로 '믿는다'고 하는 건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지... 그들이 일상 안에서 체험하는 '지루함'을 견뎌내면서 마음을 하느님께 돌이키는 걸 이해하는 것인지, 나를 성가시게 하는 이웃의 오류와 부덕함을 딛고서도 그들을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는 '참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눈과 귀를 솔깃하게 해 주는 것들을 보고 들음으로써 그저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는... 진정한 신앙인들은 안다. 우리가 미사때 받아모신 예수님의 가치를. 그래서 그들은 이리 저리 찾아다니지 않는다. 그저 미사때 모셔온 예수님과 함께 오늘 하루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겐 '향기'가 나게 마련이다. 사제

전대사, 부분대사(한대사)

전대사, 부분대사(한대사) 찬미예수님,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네에~ 안녕하세요~ 왁자지껄~) 자자, 우리 친구들 조용히 해야 신부님 말씀 잘 들을 수 있겠죠? 다들 쉬하고 왔나요? 네, 좋아요. 오늘은 신부님이 조금 어려운 걸 가르쳐 줄거예요. 그러니까 잘 귀 기울여 들어야 해요 아셨죠? (네에~ 까르르르르르) 오늘 신부님이 가르쳐 줄 건, '전대사'라는 건데요. 혹시 들어본 친구 있어요? '대사관은 들어봤어요!' 아니아니 아니죠~ 그런 대사가 아니예요. 지금부터 신부님이 하는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누군가 쉽게 설명해달라고 해서 어린이 강론 형식을 빌었는데... 뭔가 이상하네요. 본론 들어갑니다.) 우리 친구 중에 누가 유리컵을 깨었어요. 그럼 우리 친구들이 놀라겠죠? 그리고 엄마에게 혼날 게 걱정이 되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엄마는 달려와서는 우리 친구들 보다도 더 놀래시면서 깨진 컵보다는 우리 친구들을 걱정해주시죠? 이게 하느님 마음이예요. 하느님은 우리 친구들이 잘못했을 때에 우리 친구들의 마음을 더 걱정해주시는 분이세요. 우리 친구들은 그래서 하느님에게 '잘못했습니다'하고 용서를 청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하느님은 우리 친구들을 용서해 주세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청하면 그 죄는 기꺼이 용서를 받게 되요. 하지만 죄는 용서 받아도 아직 깨진 유리조각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어요. 이처럼 그 행위의 결과, 죄의 결과가 주변에 남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메꾸어야 해요. 그것을 보속(補贖)행위라고 하지요.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 스스로 그것을 온전히 메꿀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무심코 퍼뜨린 헛소문이나 남을 험담하는 말들처럼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를 일들이 너무나 많거든요. 그렇게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죄의 결과들을 모조리 메꾸기 위해서 교회가 허락하는 특권이 바로 '전대

모든 건 네 마음에 달려 있어.

모든 건 네 마음에 달려 있어. 누군가에게 이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겁이 났고 두려웠다. 난 장님이었고, 볼 줄을 몰랐다. 변함 없는 분은 변함이 없거늘, 나는 늘상 변화하는 내 마음에 따라 변덕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걸 해야 마음에 들까? 저걸 해야 마음에 들까? 실상 있는 나 그 자체로 사랑하는 분이었는데, 매 순간마다 나는 이런 저런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어가며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조정하려고 하고 있었다. 참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다. 이제 이 말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든 건 내 마음에 달려 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의 마음을, 의지를 선물하면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쉬면 된다. 우리의 마음이 '육의 요구'에 민감해져서 겁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행여 굶주릴까봐, 행여 더울까봐, 행여 추울까봐, 행여 불편할까봐... 이 육을 길들이고 어떤 것이든지 달게 받겠다는 마음으로 실천하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육의 요구'에서 들어높일 수 있다.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니, 우리는 진정한 기쁨이 아니라, 감정적 쾌락에 길들여져 있는 상황이다. 슬픔의 감정은 무턱대고 피하려고만 들고 기쁨의 감정만 추구하다보니 이런 저런 '오락거리'들에 서서히 중독되어가는 중이다. 때로는 고독과 정면대결 하기도 해야 하고, 우울함이나 슬픔의 근원을 파고들어 보기도 해야 하는 법이다. 모든 건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는 그 누군가의 충고는 아주 조금씩 그 이해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자연재해 앞에서나 가능한 말이고, 사실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바는, 영적인 사정들을 다루어보는 것이다. 이제사 겨우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기에 이를 다룬다는

성당에 왜 나가야 하냐구요?

성당에 왜 나가야 하냐구요? "가면 재미없어요. 신부님은 맨날 지루한 이야기만 하구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좌 신부님들이 교리교사 선생님들이 기를 쓰고 '재미거리'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에는 역부족입니다. 성당 안에서 '무한도전'에 버금가는 뭔가를 만들기에는 역량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 노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사탕을 먹이는 이유는, 아이들 입맛에 맞기 때문이지, 몸에 좋아서가 아닙니다. 입에는 달지만 몸에는 쓴 것, 치아를 썩게 만들고 몸을 비대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탕은 곧 치워야 합니다. 성당은 왜 가야 하는 걸까요? 그냥 집에서 적당히 좋은 글 잃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되는 걸까요?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고 모든 곳에 다 있다는데, 왜 굳이 성당을 가야 하는 걸까요? 첫 번째 이유는 '미사' 즉 '성찬례'와 각종 성사들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목이 말라 물을 찾습니다.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던지, 물기가 있는 풀들을 끌어모아 즙을 짜내 마시던지, 동물을 잡아 그 피를 마시던지... 하지만 여러분들 근처에 정수된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는데 여러분들이 그 수도꼭지에 다가서지 않고 다른 데에서 물을 찾겠노라고 나선다면, 그 광경만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은총'의 샘, 우리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빵과 포도주로 변한 우리 구원자의 살과 피는 우리의 영혼을 살찌웁니다. 사제가 어떤 강론을 하고 사제의 성격이 어떻고, 성당 사람들이 어떻고는 모두 부차적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서 성당을 가야 합니다. 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러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수도꼭지가 녹슬었다느니, 모양새가 맘에

사주, 별자리, 점의 위험성

사주, 별자리, 점의 위험성 '재미로 보면 괜찮다'는 말이 가장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미'로 보지요. 하지만 그 '재미'가 마음에 남아 찝질해진다거나, 그 '재미'에 삶의 어느 일부분의 자리를 얽매이기 시작한다면, 그 '재미'는 더이상 재미가 아니라 심각한 영의 질병이자 어둠의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볼까요? 재미로 사주를 봅니다. 얼씨구 '동쪽'을 조심하라고 하네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서남북을 다 다닐 수 있는 사람인데, 괜시리 동쪽이 껄끄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막말로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근본도 모를 그 어떤 '세력'에 내어주고는 자기 스스로 힘들어하는 꼴이라니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 사랑하라고 내어주신 '자유의지'를 왜 그딴 데에다 낭비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놓고서는 '재미'라구요?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공기 놀이를 한 판 재미나게 하고는 그 놀이를 24시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성들 중에 당구를 좋아해서 그 당구만 24시간 생각하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우린 그런 상태를 '중독'이라고 부르지요. 사실 '사주, 별자리, 점'은 어둠의 세력에게 나의 자유의지를 봉헌하는 행위입니다. 그 심각성이 얼마나 짙은지 모르기 때문에 사탄은 사람들에게 '재미'라는 좋은 변명거리를 주었습니다. '재미'라구요? 솔직히 화가 나려고 합니다. 그런 행위들의 심각성이 얼마나 짙은지 올바로 안다면, 여러분은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입니다. 똥이 더러운 줄은 알고 피하면서, 그리스도 신자에게 똥과 다름없는 그런 행위들에 왜 다가서려 하는지요?

개신교와 가톨릭

개신교와 가톨릭 많은 분들이 도대체 둘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곤 합니다. 개신교 분들로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마리아 숭배'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그릇된 모습부터 시작해서, '고해성사'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한 마디로 어떻게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가?) 그리고 '결혼하지 않는 사제'에 대한 나름 심도있는 성찰까지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것들이고 본 줄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개신교'라는 말의 근본으로 돌아가면 한편으로는 '복음주의자'라는 말과 다른 한 편으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항의하는'이라는 말인데 일리있는 말입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지요. 당시 가톨릭 교회 내의 부패상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패상이 싫다고, 가톨릭은 이미 옆길로 새어나가 버려서 긿을 완전히 잃었다고, 자신들이 보다 신앙적인 본 흐름,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보다 근원적인 줄기에 편승한다고 하면서 (가톨릭에서는 개신교가 떨어져 나갔다고 표현을 하지요. 저마다 자신의 교회의 입장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가톨릭과는 다른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하면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주님만 영광 받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측에서 강조하는 이 교리들은 한편으로는 같은 내용을 다른 면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각각의 종파마다 그 강조점을 달리하고 그 의미를 달리해서 사실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저의 개인적인 소견을 잠시 들어보자면,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데, 그만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바이러스가 머리부

무미건조함

무미건조함 이제 갓 영적인 걸음마를 떼려는데,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참 견디기가 쉽지 않다. 그 동안의 많은 일들을 '은총의 결과물'로 해석해 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의 하느님의 침묵은 영적인 여정의 내 앞에 새로이 드러나는 도전인 것이다. 세상 어느 성인이라고 매일같이 하느님을 향해 변함없는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이러한 무미건조함과 어두움이 더 짙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내가 가진 '신앙'이라는 것이 더 빛을 발하겠지. 우리의 감각을 자극시키는 현세 사물에 빠져들기는 참으로 쉽다. 우리의 육신은 바로바로 그 자극을 '영혼'에 전달해주고, 그것들이 실제한다고 외쳐대면서 나의 영혼이 그 사물들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 길가다 만나는 아름다운 여성에 시선을 빼앗기기는 쉽지만, 사람의 맑은 영을 분별해내고 그 영과 만남을 갖기는 어려운 이유이다. 인터넷을 열기만 하면 온갖 사진과 동영상들이 저마다 나를 보아 달라고 유혹을 하고 텔레비전은 즉각적인 웃음 소리와 자막까지 동원해서 우리의 정신을 쏙 빼 놓는다. 하지만 보다 참된 가치들이 숨어있는, 그래서 노력해서 우리가 다가가 열어야 하는 성경이나 영적 서적들을 읽기가 힘든 이유이다. 그것이 젊은이들이 '무한도전'에 빠져드는 이유이고, '성경'이란 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이다. 다시금 나를 추스려야겠다. 새로운 회개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새로이 굳히고, 오늘의 걸음마를 걸어 나가야지. 사실 내가 느끼고 진보하는 것보다, 반대로만 자꾸 나아가려는 나를 추스리는 작업이 일상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페이스북에 글 잠깐 올리려다가도 달려있는 댓글들에 시선이 가고, 남들이 올린 흥미로운 기사 거리에 눈길이 간다. 그런 저런 글들을 읽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써 제끼는 글만 읽고 이 신부가 뭔가

일상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

일상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 멋들어진 피정을 하고는 '아, 참 좋은 시간이었어'라고 하면서 일상 안으로 돌아와서는 힘겨운 일이 닥칠 때마다 투덜대며 그 추억의 피정 시간들만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이들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언뜻 하느님의 현존을 찾아 헤매는 좋은 신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이들의 태도가 드러내는 것은 '일상의 하느님 현존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특정하게 준비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찾는 이들의 모습은 더 나은 환경과 시간을 찾아 헤매이게 되고, 결국 일상 안에서 늘 마주하게 되는 하느님의 현존과는 더욱 더 멀어지게 된다. 이들의 특징은 '수도생활을 꿈꾸기'이다. 지금의 자신의 힘든 상황을 늘 투덜대기 일쑤이고, 그러면서 자기가 지금 걷지 않고 있는 길, 즉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삶을 늘상 부러워한다. 그리고 소위 현세와 더욱 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연스레 더욱 거룩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에 젖어 산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이 특별한 시간들 '피정과 기도의 시간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가 결국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늘 지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없고, 온갖 좋은 프로그램들로 가득찬 '특별한' 시간 안에서만 하느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런 시간들을 통해서 눈을 뜨고는 돌아와서 나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수면 중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나에게 맡겨진 일상의 과업을 수행한다고 하느님의 현존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그 과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더욱 성실히 수행할 때에 나는 하느님의 품에 잠기게 된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은 오히려 나에

세상 안에서의 지옥

세상 안에서의 지옥 그동안 여러분에게 거룩함으로 다가서는 길에 대해서 서술한 반면, 오늘은 조금 반대 방향을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지극히 기초적일지언정 다들 지니고 있는 것이 일반입니다. 하다못해 입술로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삶 안에서 드러내는 모습은, 하느님의 나라는 커녕 지상의 '나의 왕국'을 건설하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반대의 모습을 서술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런 반대의 모습을 접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이 글을 읽게 되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균형감각'이라는 것이 필요하며, 좋은 쪽이 좋다고만 해서는 그저 막연하게 자신이 그 쪽에 향해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기에 이번에는 정 반대의 방향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고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둠의 나라', 제가 붙인 제목처럼 '세상 안에서의 지옥'역시도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실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옥'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구닥다리 같다는 느낌입니다. 수세기 전에나 통할 법한 교리지식 찌꺼기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 저 역시도 이런 느낌을 20대의 시기 동안 많이 가져 왔습니다. 일단 우리가 이성적인 사고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는 그러합니다. 지옥은 어디 도시가스 폭발 현장 같이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왜냐하니 죽고 나서는 '장소'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 많은 영적체험을 한 이들이 '지옥'을 어떤 장소로 묘사하는 이유는 이 땅의 사람들, 여전히 공간이라는 개념에

죄와 회개, 보속과 희생의 메커니즘

죄와 회개, 보속과 희생의 메커니즘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배열해 보도록 하고자 한다. 먼저 한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가장 쉽게 드러나는 유형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지만 보다 근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핵심이다. 모든 죄는 빛에서 멀어지는 것,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죄를 지으면 마치 멀쩡하던 신문지 한 장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과 같다. '회개'라는 것은 굉장히 찰나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방향전환'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구멍을 뚫던 이가 더 이상 뚫는 걸 멈추고, 이제는 구멍을 메꾸고자 노력하는 그 순간을 말한다. 그래서 회개는 언제 어느 순간에도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그 바뀌어진 방향을 유지하는 것이다. 왜냐면 끊임없는 유혹이 우리를 다시금 옛 인간의 상태로 돌려 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회개'의 정점으로 드러나는 것이 '고해성사'이다. 하지만 고해성사는 회개의 표지를 사제의 사죄경을 통해서 받는 것이고, 이 '회개'는 그 이전에 우리의 내면에서 '성찰, 통회, 결심'을 통해서 이미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이 구멍을 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보속'이라는 개념이다. 헌데 이 구멍은 단순히 나의 영혼에만 뚫려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로 인해 내 주변 사람들의 영혼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구멍을 뚫어놓는다. 나는 나의 보속도 행해야 하지만 나로 인해 영향을 입은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보속을 해야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보속의 방법으로는 '기도, 단식, 자선'이 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보속의 근본 방향은 죄의 반대방향 즉 하느님에게로 나아감이다. '하느님에게로 나아감' 이 근본의 '사랑'이라는 방향성을 잃은 '보속'의 행위는 그 의미

고행

고행 고통에 대해서는 얼마간 배웠습니다. 헌데 '고행'은 무엇일까요? 고행은 자신의 죄의 보속이나 또는 거룩한 목적으로 고통을 참아받는 행위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아직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부분이라 아마 제가 하는 말들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오늘날 육을 섬기는 이 시대의 풍조 안에서 고행은 때로는 어리석게 비춰지는 심지어는 '광신'으로 비춰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학사조 안에서는 얀세니즘으로 분류되며 막연히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신학교 안에서 배운 것이 저의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사실 어쩌면 저를 가르친 분들 가운데에는 아예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신앙 사조는 영과 육의 고른 성장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영의 성장을 제대로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온갖 좋은 것들로 육을 꾸미고 가꿀줄은 알지만 영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영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연스럽게 점점 더 열리게 되는 시야는 '육을 다스림'이라는 영역입니다. 우리의 육은 마치 갓난아기와 같아서 끊임없이 영에게 보살핌을 요구합니다. 관심을 좀 가져 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이와도 같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의 요구를 곧이 곧대로 들어주다가는 결국 영의 본래의 목적인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는 전혀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육을 다스려야 합니다. 물론 그 구체적인 방법은 뭐라 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는 육의 욕구를 제어할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고행은 타인의 눈에는 전혀 띄지 않아야 하고 오로지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어야 합니다. 타인의 눈에 고행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받을 상을 다 받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

고통 고통이 사랑스럽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고통을 사랑스러워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 그 자체가 사랑스럽다면 이미 고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여 어느 성인이 고통을 사랑했다고 한다면, 그 고통을 인내로이 견딤으로써 얻어질 결과물들을 사랑했을 따름입니다. 우리 삶에서 고통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무엇입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사람의 삶에는 고통이 늘 따라 붙습니다. 이 고통을 잠시 '망각'하거나 '회피'할 순 있어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일차적으로는 육의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이 시작되기에 첫 울음을 터뜨립니다. 어머니의 뱃 속의 아이는 울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또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마도 그 생소한 감각들에 깜짝 놀라게 되고, 인간의 육의 고통은 시작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고통이지만, 무언가를 새로이 배워 나갈 때에도 그런 고통들이 필요하고, 그런 고통을 감내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육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갖추는 것입니다. 나아가 육은 늙고 병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역시 피치못할 우리 삶의 한 부분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육의 고통에서부터 막혀 머물러 있습니다. 어떻게든 육의 고통을 줄이고자 좋은 것을 먹고, 늙어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소위 '좋은 직장'을 구해서 몸을 덜 쓰고 봉급을 많이 받고자 합니다. 다음으로 마주하게 될 것은 '정신적 고통'입니다. 육의 고통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이 고통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거나 어떤 일처리를 위해 고심하면서 뒤따르는 고통입니다. 이 역시 우리가 그 고통을 미리 맞닥뜨릴수록 사라지게 됩니다. 이 정신도 육과 마찬가지로 약해지기도 하고 병증을 지니기도 합니다. 육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이 고통에 얽매여 머물러 있는 이들도

시체가 있는 곳에 모여드는 독수리

시체가 있는 곳에 모여드는 독수리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표현되는 그 날, 이 땅의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다가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궁금하고 또 이런 저런 상상들을 하면서 두려움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 동안 나온 수많은 재난 영화들을 떠올려보면 세상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화산 폭발, 지진, 쓰나미, 태풍, 핵전쟁, 다시 찾아오는 빙하기 등등... 사람들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재난들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떱니다. 그리고 신앙을 가지면 요행히 그런 재난들에서 벗어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과연 재난의 '외적 모습'을 설명하고 계시던 것일까요? 그 재난은 노아의 홍수나 룻 시대의 유황불이라는 외적인 형태로 다가올까요?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이런 외적인 화려한 두려움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신앙인도 '육체적으로 죽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았고 이 땅에서 그 영원한 생명을 살아나간 이들은 비록 육신이 죽어도 죽지 않게 됩니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서 같이 임종을 맞이해도 한 영혼은 하느님께서 '데려 가십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다가 지진이 일어나 둘 다 죽더라도 한 영혼은 하느님께서 '데려 가십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칠 뿐입니다. 하지만 진정 죽은 이들이 있으니, 이미 이 땅에서 세상 것들에 혼이 팔린 이들입니다. 그 시체들에게는 진정한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야말로 시체들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 독수리들은 산 자들의 신선한 피와 고기를 간절히 먹고 싶겠지만, 영혼이 살아있는 우리들은 그 독수

예수님의 다시옴(연중32주)

예수님의 다시옴 예수님께서 다시 오는 그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지만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실 유한한 생을 지닌 우리들에게 '그 날과 그 시간'을 알려는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을 단 한 시간도 늘릴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이 이렇게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조작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마치 '생명'도 우리의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다루려고 합니다. 죽음의 현실 앞에 스스로 겸손해지기는 커녕 더욱더 콧대를 세우는 중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연장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말이 곧 우리 개개인의 수명을 자동으로 연장시켜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만 많고 기술만 발달하면'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듯이 환상에 젖어 살아갑니다. 얼른 이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우리의 본 모습을 바라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리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삶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영원'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우리의 각고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우리를 맞추어 갈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에게 맡긴다.' 언뜻 굉장히 수동적이고 게을러보이는 이 말은 '구원'에 대해서 진리를 품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내 일상과 관련된 모든 일을 다 하라고 떠맡기고 우리는 자빠져 잠이나 자자는 것이 아닙니다. 비행기는 다른 데에서 날아오지만 비행장이 없으면 아예 내리지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보다 더한 열심으로 주님이 오실 길을 닦고 일상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탐욕의 메커니즘

탐욕의 메커니즘 나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면, 뭔가 사고 싶은 게 많았다. 만화책, MP3, 노트북, 전자키보드, 카메라 등등등... 그리고 그럴 때면 돈이 필요했다. 문제는 사고 싶은 게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가 지나가고 나면 또 하나가 다가왔기에 돈도 '늘' 필요했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에 그것을 가진 돈으로 구입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다. 하지만 가장 우선에는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이 왜 필요한가를 살펴보니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거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걸 해내기도 했다. 만화도 그렸고, 피아노도 쳤고, 길에 다니면서 음악도 들었고, 사진도 곧잘 찍었다... 그나마 난 내가 구입한 걸 쓴다는 걸 위안 삼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계에 봉착했다. 한 인간이 도저히 그 많은 것들을 다 똑같이 해 낼 순 없다는 걸, 최근에야 비로소 제대로 깨달은 거다. 그때부터 내가 나의 시간을 무엇에 투자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난 사제였고, '거룩함'에 시간을 투자해야 했고, 사람들을 그 '거룩함'으로 이끄는 데에 노력해야 했다. 그 결론이 다다르자, 쓸데없는 활동들에서 조금씩 마음을 떼어내기 시작했고 실제로 가지고 있던 것들도 여럿 처분을 했다. 카메라는 이미 강도를 당했고, 그나마 아이폰이 사진기가 좋아져 그걸로 만족하는 형편이다. 피아노도 본당에 기증하고, 늘 구석탱이에 처박아두던 바이올린도 처분을 했다. 볼리비아에 오면서 한국에 남겨뒀던 만화책들은 최근에 친척 아이들에게 준다길래 그러라 했다. 이렇게 저렇게 가지고 있던 걸 처분했는데도 사실 아직도 미련이 많은 것 같다. 날이 갈수록 뭔가 잡다한 걸 하고 싶은 마음이 덜해지고, 그 자리에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더욱 더 채워 넣을 때에, 비로소 나란 사람이 제대로 완성될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도 별 거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얻는 법

하느님의 나라를 얻는 법 1) 무언가를 얻으려면 먼저 그것을 원해야 합니다. 2)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3) 그리고 그것을 얻어 보관할 자리에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 있다면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 그럼 우리가 원하는 '하느님 나라'를 생각해 봅시다. 1) 여러분들은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수많은 이들이 그것을 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원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기실 내가 입술로만 원하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이 아니라 '내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정도만 알아 두어도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원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잊지 말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나라를 찾기 시작했으면 합니다. 2) 그 나라를 얻기 위해서 무슨 방법을 씁니까? 물고기를 잡겠다면서 산 속에 뛰어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대로 원숭이를 잡아 보겠다고 물 속으로 잠수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느님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헌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 걸까요? 예수님이 이에 대해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는 찾을 수 없는 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찾기 위

기적

기적 기적, 이적, 치유, 신기한 일은 신앙생활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 쯤은 찾아다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옆길로 새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기적을 행하셨는지 그 이유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적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곳은 기적이 행해지는 곳입니다. 그럼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 곳은 어디일까요? 사실 창조물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길을 가다가 만나는 작은 풀꽃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섬세한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지만 단 하나 하느님의 사랑이 올바로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하느님의 창조물에만 집착하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이 만들어내신 창조물인 이 물질세계에 집착하면서 서서히 하느님을 잊고 그분께 찬양을 되돌려 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공허가 생기고 그 빈 공간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은 바로 이 마음의 공간을 다시금 하느님의 능력으로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10명의 나병환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인 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돌아온 이는 오직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나병에서 치유 받아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의 2가지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세상 안에서 생각하는 구원입니다. 육의 해방입니다. 이는 병에 걸려 있던지, 자유를 구속 당했던지 하는 외적인 구속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첫번째 해방은 필요한 것이지만 사실 절대적인 것은 아

기도의 훼방

기도의 훼방 원수는 언제나 우리의 선의에 훼방을 놓는다. 기도를 하려는 우리를 예를 들어보자. 먼저는 그 '첫 마음먹기'에서부터 훼방이 들어온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일상의 일은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이 하는 우리들이건만 기도는 그 시작부터 훼방이 들어온다. 머리로는 영으로는 '좋다'는 걸 알지만, 육이 거부하는 것이다. 어찌어찌 원수의 방어선을 뚫고 그 첫 마음을 먹고 기도에 들어간다고 치자. 늘 기도에 양다리를 걸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즉, 기도를 한다면서 휴대폰을 끄지 않는다던지, 늘 찾아오는 사람을 마주하지 않은 방비책을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채로 기도에 들어가겠다는 건 기도하지 않겠다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누군가가 원수의 이 두 번째 장벽도 넘어섰다. 기도하기 최적의 시간을 선택한다던지(새벽, 혹은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 적어도 기도 중에는 그 어떤 것들도 방해하지 않도록 환경을 마련해 두었다. (휴대폰을 끈다던지, 홀로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던지) 하지만 이번엔 내면에서 적들이 공격해온다. 바로 '분심'이다. 우리의 기억창고는 뭐 그리도 잡다한 것들이 많은지, 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온다. 이 '분심'에 대해서는 아주 좋은 비유가 있으니 들어보자. 한 사람이 밥을 먹는데 파리가 다가오면 어떻게 밥을 먹어야 할 것인가? 그저 손으로 휘휘 젖어서 파리가 입 속에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쫓으면 그만이다. 그 파리를 기어코 잡겠노라고 파리채를 들고 쫓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밥은 다 식어 버리고, 배고픈 생각도 사라져버리고 만다. 파리는 파리처럼 쫓아내고 먹어라. 하나에서 열까지 다 없애려 들지는 말아라. 이것이 분심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에게 분심이 일어나면, '아 내가 다른 생각에 빠져 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다시 기도로 돌아오면 된다. 그러

영혼은 안다

영혼은 안다 semitoon작 영혼은 안다. 육의 바램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열과 성을 다해 그 욕구를 탐하다가도 그 욕구가 채워지면 밀려오는 허무를 영혼은 안다. 영혼은 안다. 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썩어 없어져 버릴 세상이 아니라 저 높은 곳으로 마음을 들어올려야 한다는 것을 영혼은 안다. 영혼은 안다. 어느 길을 택해야 할 것인지, 세상을 향한 방향과 하느님을 향한 방향 중에서 세상을 등지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영혼은 안다. 영혼은 안다. 하느님을 향한 길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때로는 육의 고난이, 때로는 정신과 영의 고난이 준비되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걸어가야 함을 영혼은 안다. 그러나 당신... 왜 영혼을 잠재우는가? 왜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당신의 하찮은 육의 목소리에는 그토록 민감한 것인가? 영혼은 안다. 영혼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지금 당신이 걸어가는 길의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지금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에'라는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혼은 안다.

하느님 앞의 진정한 겸손(연중 32주 월요일)

하느님 앞의 진정한 겸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우리는 하느님의 위치를 잘 모릅니다. 게다가 우리 자신의 위치마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을 우리 아래에다 놓고는 부리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에이, 신부님 저희가 언제 그랬습니까?'하시겠지만, 예를 들어보면 조금 더 명확해집니다. 한 사람이 성당에 와서 하느님 앞에 서약을 합니다. 지금부터 한 달 간 기도를 올리겠으니 제가 원하는 걸 들어달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한 달이 지나고 결국 현실적으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니, 그토록 기도를 드렸는데 하다못해 내가 청한 것의 100분의 1이라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 생각을 하고는 하느님 앞에서 '토라져서' 이제는 신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나서든지, 아니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은 믿을 게 못되는구나'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우리보다 우리 자신들을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가 가득하신 분이시라, 우리가 진실한 믿음으로 청하는 그 순간부터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약속드린 그 기간보다 훨씬 더 빨리 그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보려는 것만 보려 하고,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결과'만 기다립니다. 돈을 청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분별은 돈보다 인내를 먼저 주고 계시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돈을 받지 못해서 하느님에게 맞서기 시작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내 종으로 부린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인

하느님의 기준(연중32주)

하느님의 기준 세상 사람들은 더 높은 곳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다들 기를 쓰고 높은 자리로 오르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다들 기를 쓰고 더 많이 벌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인기있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다들 이름을 남기려고, 명패를 남기려고 애를 씁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보여지는 것으로 판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 높은 자리, 더 호화로운 것, 더 명예로운 것을 구하고 찾습니다. 권력과 재물과 명예가 단단하게 하나로 엮어져 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 이면의 숨겨진 것을 더 선호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들이 '많은 돈'을 넣었지만,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데에서는 '가진데서 일부' 넣은 것에 불과합니다. 반면 가난한 과부는 '적은 돈'을 넣었지만,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데에서는 '모든 것'을 넣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잘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돈'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쓸데없이 긴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주제의 핵심은 '그러니까 너희들이 가진 거 다 봉헌해라'가 아니라, 과연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에 '어떤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타인은 속이기가 쉽습니다. 겉꾸민체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4시간을 함께 보내는 가족보다는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기가 더 쉽습니다. 24시간을 살다보면 본모습이 나오는 반면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속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내면을 잘 가꾸셔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있을 때 화목한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재정립할 수 있는 법입니다. 가장 기본에 충실하고, 묵묵히 바닥부터

책 고르기(사람 고르기)

책 고르기(사람 고르기) 관점의 차이일 순 있지만 글을 읽다보면 당장 꺼려지는 글이 있다. 주로는 "인생 지침서"들이 그러한데,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돈 버는 방법, 성공하는 방법들을 다룬 책들은 이미 그 방향성 자체에서 거리감이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아무리 화려한 글과 디자인으로 책을 꾸며놓은들 이미 방향성을 잃은 그 책은 결국 길 잃은 결과물을 내어놓는다.(그 근본 방향성의 상실을 두고 나는 그런 책들을 개인적으로 '쓰레기'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다.) 나의 마음이 보다 영원한 것을 향할수록 그런 글들을 분별해 내는 시야는 더 냉철해지는 것 같다. 다음의 부류로 들 수 있는 책들은 '에세이' 서적들, 즉 자기 사는 방식을 낭만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풀어놓은 책인데 이는 유의해서 읽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애매한 경우가 가끔씩 있다. 하지만 이 안에서도 그저 감성을 조장하는 듯한 글을 써서 그 본질을 감추는 글들이 있으니 결국은 많이 벌고 잘 먹는 현세적인 삶을 찬양하는 핵심 줄기를 화려한 글들 뒤에 감춰놓은 경우가 종종 있다. 소설에 관해서는 사정이 이러하다. 고전명작이라는 딱지를 붙여 뒷켠에 미뤄놓는 책들이 있고 투철한 상업 정신에 따라 시류를 따르며 출판사들이 전면에 내어놓는 책들이 있다. 최근에 나온 것이 새 것이라는 인간의 허영심을 이용한 상술로 독자들을 속이는 형편이다. 결국 우리는 무슨 책을 고르고 읽어야 하는걸까? 사실 명작으로 분류된 책들을 고르는 것이 '안전'하긴 하겠지만 때로는 수준에 맞지 않기에 무척이나 지루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새로나온 신간이라고 해서 쓰레기같은 책을 사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사실 이렇다 할 정답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연한 기회에 손에 잡히게 되는 책을 읽으면 그만이다. 좋은 책은 여러분에게 삶의 지혜를 주게 되고, 나쁜 책은 나쁜 책대로 여러분에게 말을 건낼 것이다

은총

은총 인간 사회에서는 '노력'이 무척 중요시됩니다.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건 없다는 말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모래 언덕을 하나 쌓더라도 아이들의 작은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하지만 노력이 '모두'는 아닙니다. 특히나 영적인 성장 과정에서 '노력'은 최소한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물론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일상 기도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거나, 말을 삼가고 신중한 태도를 연습하는 것, 성경을 필사하는 식의 활동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해 내는 이들을 두고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들로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오를 수 있는 영역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영적인 여정에는 반드시 '은총'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손길,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 영역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은총으로 선택받는 자들이 있고, 은총에 힘입어 어둠을 떨치는 이들, 은총으로 진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노력'으로 무장된 세상에서는 이 '은총'이라는 말은 마치 누군가가 낙하산 인사를 단행하듯이 정당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은총'에 뭔가를 맡긴다는 걸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구명정 하나 들고 크루즈선을 버리고 망망대해에 뛰어드는 느낌이니까요. 그래서 '은총'을 입은 이들을 심지어는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하려 들지 않고 천시합니다. 참 어리석은 자들이지요. 인간은 '은총'을 입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하느님의 용서는 그 자체로 '은총'입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젊은 시절 저질렀던 죄악을 하느님이 고스란히 되갚으려 드신다면, 우리는 육신 생명이 한 8-9개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은총을

욕구

욕구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가도 밥을 먹으면 잠잠해진다. 거기에 필요 이상으로 먹으면 도리어 거북해지고, 심지어는 통증이 밀려오기까지 한다. 욕구라는 것과 그것을 채워서 밀려오는 쾌감이라는 것의 메커니즘이다. 우리가 찾는 것은 사실 '행복'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행복의 자리에 욕구를 모셔다두고 자기 배가 자기 상전인 줄 알고 산다. 그래서 밥은 먹어도 진리와 사랑을 위해 하려는 활동은 전무한 편이다. 좋은 음식점이 어디 있는지는 아는데, 좋은 영적 지도자가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른다. 가까운 신자에게 물어보라. 하느님을 알고 그분에게 다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성서 읽어라, 기도해라'라는 대답이 대부분일 것이요, 그 사람의 사정을 들어도 어떠한 상황인지 분별해낼 수 있는 능력은 갖추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성서를 읽어야 할 사람에게 성서를 권해야 하고, 기도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기도를, 실천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실천을 줄 줄 알아야,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지금 주님의 신비로운 영역에 대한 의문이 해소가 되지 않아서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에게 대놓고 성경만 읽으라고 해댄다거나 초월적인 영역에만 사로잡혀서 길잡이가 필요한 사람에게 무턱대고 기도나 하라고 하는 사람을 가끔 보는데, 그야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다. 욕구를 분별하고, 주님의 뜻에 맞게 채워라. 그리고 그 밖의 시간과 노력을 '영적인 여정'에 헌신하라. 진정한 '행복'을 찾을지니...

지도

지도 여러분이 전혀 모르던 곳에 왔다. 하지만 다행이다, 손에 지도가 있다. 헌데 마냥 안심할 순 없는것이, 여러분이 지도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조금 더 높은 곳을 찾는 것이다. 급한 대로 가로수 위로 올라가 보던지, 어느 빌딩 옥상에 올라가 보던지, 아니면 근처 언덕 위로 올라가본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주변이 더 넓게 보이고, 지도의 어느 곳에 있는지를 파악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이 최종 목표지로 표시된 지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나침반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 나침반은 눈 앞의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진 않는다. 우리는 선택을 하고, 다시 나침반을 보고, 지도의 방향에 맞추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때로는 담의 좌우로 갈라질 필요 없이, 담 자체를 넘기도 하고, 다리에 힘이 붙어서 가로수나 빌딩 혹은 언덕 위에 올라가 보기도 한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본 사람은 저 아래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지도와 나침반만 들고서 그들에게 백번을 조언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지금 눈 앞을 가로막은 벽이 문제이지 방향을 생각할 기력조차 없는 형편이다. 이정도 비유를 들었으면 알 법도 하지만, 길을 알려주는 사람은, 먼저 사람들과 걸어봐야 한다. 그런 다음에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들에게 길을 알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예언자는 '진정한 죄인'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풀뿌리의 마음을 안다. 그들이 일상 안에서 마주하는 이들에게 가지는 증오와 시기심, 그리고 유혹에 빠지기 쉬운 마음과 심지어는 악을 저지를 수도 있을 그 마음들을 함

가족

가족 가족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자면 다들 가족인걸까? 여기에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걸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볼 필요를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먼저는 혼인이라는 거룩한 계약과 피를 나눈 기초 공동체라는 것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가족마저도 파괴되어 문제긴 하지만 이 측면의 가족은 천애고아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좀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측면의 가족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고 기대하는 형태로의 가족. 그것은 서로를 보듬고 받아들여주고 우리가 쉴 수 있는 터전이다. 이 두 번째 의미의 가족을 형성하는 데에 사람들은 많은 곤란을 겪는다. 서툴기도하고 방향을 잡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저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가족의 틀을 가지고 마치 결혼만 하고 애만 낳으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지내오기에 실제 가족이 형성되었을 때에 당황스러워하는 이들이 많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무심해지고 아내는 성가셔지고 자녀들은 문제를 일삼는다. 결국 쉬고 싶었던 자리, 마음을 안식하고 싶었던 자리가 그 자체로 전쟁터로 변해 버리고 서로 가족을 떠나고 싶어하게 된다. 먼저 '방향설정'을 해 보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내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가족에 대한 예수님의 이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족은 단순히 외적, 혈육이나 계약으로 결합된 무언가가 아니라, 내적으로 진정 결합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신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변되는 진리와 선과 사랑의 결합이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은 한 인간이 인격적으로 성숙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긴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꾸려 나간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꾸려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나 자신 안에서 수시 때때

자유

자유 "넌 자유로와" 난 누군가에게 이 말을 몇 변이고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이 말을 해 준 이유는 1) 실제로 내가 자유롭기 때문이었고, 2) 나 스스로 이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방종과는 다른 이 '자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의 범위는 사실 각자가 다르다. 각자에 따라서 달라지고, 각 영역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두 눈이 온전한 이에게는 숲 속을 질주하는 것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장님이 숲 속을 질주하겠다는 건 '방종'이다. 외과의는 칼을 들어야 하고, 강도는 칼을 버려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 사랑의 범위에 따라 많은 걸 허락하신다. 사랑이 커지는 만큼 이런 저런 일들을 다루는 범위도 당연히 커질 수 밖에 없다. 제 사탕봉지만 아는 아이에게 나눠주라고 사탕 한 박스를 주면 그 친구는 제 입 속에 집어 넣는다고 다 가져가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가득한 친구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올바로 쓸 것을 알고 있다. 돈을 주든, 명예를 주든, 권력을 주든...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랑이 풍족한 이들은 안타깝게도 있던 것마저 내려놓으려는 것이 일반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 돈과 명예와 권력은 그 자격도 없는 이들이 많이들 가지게 된다. 그들은 탐욕스럽게 자기가 지녀선 안 될 것들을 지니고는 늘 침을 질질 흘리면서 '더, 더' 요구한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자유롭지 않으며, 그런 탐욕스런 행위들로 타인의 합당한 자유마저도 빼앗아 버리고 만다. 세상은 눈에 당장 드러나는 강도, 범죄자들을 많이들 비난하는데, 사실 보다 큰 규모의 진정한 범죄자들은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2차 바티칸 공의회

2차 바티칸 공의회 "2차 바티칸 공의회 아는사람 손?" 모르긴 해도 들어본 사람은 많은데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다들 잘 모를 것이다. 헌데 여기 저기서 난리다. 공의회 정신을 살려야 한다며 이런 저런 일들을 하는데, 연구, 학술회, 심포지엄... 어이쿠... 말씀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 듣겠는가? 솔직히 이제 그만 좀 하고 지금 이미 알고 있는 거나 열심히 살았으면 싶다. 신자들은 벌써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교회는 20세기에 머물러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잘 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정도 생각했으면 되었다. 공의회 정신이 깃들지 않은 건 평신도들이 아니다. 평신도들의 텃밭은 이미 준비가 되었다. 지금의 젊은이들 중에 누가 과거처럼 교회의 권위를 그토록 겁을 내어 존경을 하며, 자신의 마음이, 양심이 이건 아니다라고 하는 걸 따르겠는가? 내가 보기에 '공의회 정신을 살리자'고 주창하면서 도리어 이전의 모습을 더 그리워하고 있는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온갖 현학적인 말로 도리어 공의회 정신을 숨긴 건 바로 그들 자신들인지도... 공의회라는 게 대단한 것 같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런거다. '지금 하는 모습 살펴보고 엇나간 길 바로잡고 원래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을 제대로 이행해보자'라는 것이다. 초등학교도 학급회의 하면 이 정도는 한다. 오히려 '공의회'라는 형식 자체가 그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공의회 정신대로 사는거다. 공의회 정신을 가리는 건 어느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다. 공의회 정신을 가리는 건 바로 말씀을 살지 않는 우리 자신들이다. 행여 철없는 이들이 오해를 할까봐 덧붙이면, 내가 혹시나 이 글로 교회를 깔려고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틀 우리가 가진 '틀'이라는 것은 한 번 형성되고 나면 굉장히 깨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이미 형성시킨 틀을 바탕으로 분별하고 수용하기 때문에, 어느 틀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 기본적인 틀을 바탕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틀 가운데에 몇 가지 종류들이 있다. '행복관념의 틀' '인간관계의 틀' '종교의 틀' '가족의 틀' . . . 이런 수도 없는 틀들 하나 하나마다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틀'을 수정할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익숙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가면서 우물 밖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우물과 똑같이 생긴 다만 깊이가 다른 우물도 있고, 아예 우물이 아닌 곳도 있고, 심지어는 숲과 늪도 있는 것이 세상이다. 우리가 우물에서 나와볼 생각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틀에 갇혀서 쉽사리 남들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아침에 계란을 2개를 먹는 게 맞는지 하나만 먹어야 하는지에 관한 지극히 단순한 틀부터 시작을 해서, 주일미사를 지킨다는 것의 의미처럼 종교적인 규율의 본질에 대한 틀, 나아가서는 '사랑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서로 가지고 있는 틀, 이 모든 것에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고, 타인도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게 된다.

기도의 이유

기도의 이유 아쉬움, 바램, 욕구가 없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던지,(식욕) 음식이 귀하고 비싸 보여서 배는 안 고파도 먹던지,(탐욕) 배도 안 고프고 음식의 종류도 상관이 없는데 어머니가 옆에서 계속 잔소리를 해대서 억지로 한 술 뜨던지,(안락욕) 그 어떤 것이든 사람이 움직이는 데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도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뵙고픈 사람이 기도를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제대로 된 기도가 된다. 사실 배가 고파야 밥을 먹는 것이 가장 기본이듯, 우리의 기도 역시 하느님을 만나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때로는 그렇지 않은 기도도 있다.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기도 좀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바치는 기도, 신학교나 수도원 안에서 때가 되어서 바치지 않으면 눈치가 보여서 바치는 기도, 이런 류의 기도는 자신을 훈련하는 데에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결국 기도의 본 목적에서는 멀리 있는 기도이다. (그리고 때로는 교만을 강화하기도 한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게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당신은 왜 기도하는가? 아니... 기도하긴 하는가??

십자가(죽음으로 얻는 부활)

십자가(죽음으로 얻는 부활) 버리려면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충만하게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비겁하게 자신의 삶을 두고 한탄만 한다면 마땅히 주어도 준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자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장 우선적으로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가진다는 것의 의미도 알고 가져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누릴 줄 알고 기꺼이 받아들일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이 진정 소중한 줄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다음 단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버리는 것', '소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조금씩 내어 놓아야 합니다. 내가 가졌던 물건들부터 시작을 해서, 나의 명예와 나의 권력을 차츰 차츰 내어 놓아야 합니다. 가져 보았기 때문에 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집착'하진 않았기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심하게 '집착'하였더라도 내어주면서 자연스럽게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내어주다가 보면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으나 철저히 우리의 것이 되어 버린 우리의 마지막 발판. 내 존재의 근거지이자 더 이상의 무엇이 없을 것 같은 가장 밑바닥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손에 쥔 이 '생명'을 우리의 자의로, 우리의 사랑으로 양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상적인 시선으로 따지면 굉장히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줄 때는 언제고 조금씩 빼앗아가더니 결국에는 몽땅 다 다시 내어 놓으라니 놀부 심보도 이런 놀부 심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선 조금 다른 점, 아니 많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놀부는 그렇게 홀라당 빼앗고도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신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시고, 사랑이 가득하신 그분께서는... '영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