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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12의 게시물 표시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

기원에 따라서 여러가지 것들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빛에서 나온 것은 어둠의 특성을 지닐 수 없고, 물질에서 기인한 것이 참 빛의 특성을 지닐 수도 없다.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은 하느님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닌다. 그것은 모든 이에게 깃들 수 있다는 것이고, 평화롭고 사랑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다. 반면 세상에서 기인한 사람들의 특성은 극명하다. 그것은 '객체화' 되어 있어서, 너와 나의 사이에 분명한 갈라섬이 있다. 한 마디로 니 껀 니 꺼고 내 껀 내 꺼다. 내 껄 너에게 줄 수는 있지만, 이유없이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떻게든 네 껀 내 께 되어야 하기도 한다. 왜냐면 '나'라는 분은 커지셔야 하고, '너'라는 분은 작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쯤 하면 다들 자신이 평소에 하는 행동의 습성의 기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영과 육을 반으로 뚝 가를 수 없듯이, 그분 역시도 하느님에게서 나심과 동시에 하느님과 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영을 받아 그 생명에 동참하고 있다. 다음의 말을 이해해보자.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세상에게 있어서 그분의 빛은 어둠과 같았고, 그분의 참된 빛은 하느님에게서 온 이들에게만 비춰지고 있다. 세상은 우리의 육체의 눈을 밝히는 빛만을 빛으로 생각하고 좀 더 나가 보았댔자, 우리의 지성을 밝히는 지식을 빛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영원을 사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빛이야말로 참 빛

가르멜의 산길(서평)

좋은 책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넌지시 알려줍니다. 하지만 이 책은 대놓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줍니다. 저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체험과 성령의 이끄심을 바탕으로 영성인들이 가야 할 바를 명확하게 짚어내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 길은 너무나 앞서나간 것이라 아예 첫 걸음부터 발목을 잡힐 수 있지만, 그 길을 이성으로나마 훑어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 '자기비움'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구성 요소 단계별로 무엇을 비워내야 하고 어떻게 비워내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이상 인지할 수 없는 분인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우리는 감각, 영성, 영의 세 단계를 거쳐 끊임없는 자기 비움으로 하느님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저자는 서술합니다. 결론은 모두 다 비워내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가진 한계와 약점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어서 중간 중간 저자의 섬세한 돌봄의 메세지들도 접할 수 있게 됩니다. 백문은 불여일견인지라 한번씩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역전

역전 가난은 나쁜 것이었다. 냄새나는 건 더러운 것이고 낮은 곳에 머문다는 건 피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보다 더 나쁘고 더럽고 피해야 할 것들이 뭔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눌 줄 모르는 부유함이고, 가식적인 세상의 향기이며 교만 가득한 높은 자리라는 것을... 보다 더 지독한 것들 가운데에서 전에 생각하던 것들은 오히려 더 지독한 것들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 비밀을 알지 못한 채로 세상 안의 부와 향기와 높은 지위를 탐한다. 아닌 척, 고상한 척, 마치 자신들은 선한 사람인 양 착각하며 살아간다. 진짜 죄는 계명의 어김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 있는 것임을, 서로 갈라서려는 마음 속에 있는 것임을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로 오늘도 '너와 나'를 구분짓는다.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달아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하느님의 뜻이다. 우리는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가족 - 하느님이 선사한 최고의 인간관계

(성가정 축일 강론) 육적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수많은 관계 가운데에서 단연 으뜸은 '가족관계'입니다.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지역에 아무리 산다고 해도, 피로 맺어진 끈끈한 관계는 탄생 순간 이미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혈연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때로 예수님은 이러한 성모님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을 몇 가지 남기곤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하룻밤을 꼬박 아들을 찾아 헤멘 성모님에게 예수님께서 무심코 던지는 말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성경의 표현 되로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이런 표현을 앞에 두고 당장에라도 엉덩이를 세차게 때려 주어야 직성이 풀릴 판이겠지만, 믿음의 어머니인 성모님은 그저 이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한 가지 특징인 '알 수 없음'을 만나게 되고, 그에 대한 성모님의 모범적인 신앙의 모습인 '마음 속에 간직함'을 배웁니다.) 결국 이 일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 진가가 밝혀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고, 예수님이 당시에 하신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어렴풋이나마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고,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에 그 아들 역시 마땅히 머물러야 하였지만, 하느님은 단순히 건물로서의 장소가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머무르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이 당신이 마련한 가족의 품에서 30여년간을 순종하며 지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잘 드러납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DESPEDIDA P. JOSEPH AMIGONIANAS

올 해를 끝으로 지금 일하는 이 본당을 떠나게 되었다. 물론 볼리비아를 떠나는 건 아니다. 차로 45분 걸리는 다른 본당으로 옮길 뿐이다. 주일 아침미사 후에 본당에서 환송식을 하는데 본당 근처 구역 반장들이 나와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우리로 치면, '옹헤야' 같은 느낌인데, 물론 멜로디는 완전히 다르다. 다만 한 구절 읊고 같은 노래를 반복하는 형식을 띄고 있다. 사실 들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가사가 적힌 종이를 한장 달라고 했다. 오늘 보니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ㅋ DESPEDIDA P. JOSEPH AMIGONIANAS(AMIGO;"친구" ANCIANA;"늙은 여자들"을 합쳐서 만든 말인 듯, 사전에 없음) 할매친구들의 요셉 신부 작별인사. 1. 마음을 다해 말하고 싶어요, 요셉 신부님이 가려고 고집하니까요. 2. 이 본당에 당신 삶을 두셨으니 올 때를 대비해서 대문을 잊지 마세요. 3. 성경강의 절대 잊지 않을께요, 우리에게 가정을 위한 많은 본보기를 주셨죠. (2012년 한 해 동안 성경강의 마르코, 마태오, 루까, 요한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쳤음.) 4. 악마가 가까이에 있노라고 늘 우리에게 경고하셨어요, 선택을 잘 해야 하고 문을 잘 닫으라구요. (늘 하던 강론 내용 중의 하나. 악마가 실존하며 늘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배회한다고 이야기함. 물론 그 반대편에 하느님과 그의 천상 군대도 우리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쳤음.) 5. 천상을 찾는다면, 욕심부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부님, 멋진 차가 있으면 말예요. (이 역시 나의 단골 메뉴. 툭하면 자동차 이야기를 하면서 구입한 그날만 기쁘지 다음 날이면 기스 생기고 도리어 기분이 나빠지기만 한다고 곧잘 농담을 했음.) 6. 짐에 좋은 옷 잘 챙겨가시구요, 개도 데려가세요. 수녀님을 문 그 개요. (우리집 캔이 꼰수엘로 수녀님을 물었다고 함. 사실무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복음 1장) (좀 많이 깁니다. ㅎㅎㅎ 끈기 있는 분들이시길 바랍니다. ㅋ) 5절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13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6-18절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의 서두로서 어디 하나 소중하지 않은 구절이 없다. 먼저 빛에 대해서이다. 자고로 빛이라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둠의 존재는 빛을 두려워하지 빛을 받지 못한다. 빛을 받으면 사라진다. 예컨대 그림자라는 것은 빛이 사물에 쪼여지면서 그 빛의 반대편에 생겨나게 된다. 빛으로 인해 생겨나는 그림자이지만, 다른 쪽으로 거울을 들이대서 빛을 쪼여주면 사라진다. 이 세상의 그림자스런 모든 존재들은 빛으로 생겨났지만, 빛을 쪼이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욕, 돈에 대한 탐욕은 참되고 선한 것을 찾는 우리의 마음이 삐뚤어져서 생겨난 욕망이기에 참되고 선한 것이 우리를 찾아오면 사라지게 될 것이다. 헌데 우리가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탐욕에 여전히 빠져 있으면 빛이 오게 될 때에 그 탐욕의 운명과 함께하게 된다. 돈을 좋아하는 이들은 빛이 오면 사라지게 된다. 자신의 위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내 자존심을

임마누엘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먼저 하느님과 함께 살지 않는 이들부터 살펴봅시다. 하느님을 상실한 이들, 하느님이 없는 이들은 다른 걸 중심에 둘 수 없어 자기 스스로를 중심으로 내세웁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나의 느낌과 나의 존재가 가장 중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분별해야 하고, 오직 나의 이성의 거름망으로 걸러지는 것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나보다 낫다는 무엇, 내가 상상할 수 없다는 무엇은 나에게는 어둠일 뿐, 세상의 중심은 바로 나입니다. 이들이 하는 선행은 계산적입니다. 그들이 한다는 선행은 결국 자기 스스로를 위한 행위입니다. 남들의 평판을 기다리던지, 아니면 선행을 입은 사람이 결국 나중에 자주성가해서 되돌려주기를 기다립니다. 적어도 그런 은근한 기대 가운데에서 선행을 합니다. 결국 손해보는 것은 없습니다. 이들에게 '손해'라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이기에 세상의 중심으로 우뚝 서 있는 자신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래서 늘 '죽음'의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병이 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극도로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면서 어떻게든 주변의 상황을 조정해서 그 불안을 없애려고 노력하지만, 불안은 점점 쌓여만 갑니다. 오... 가련한 유한의 존재여. 하느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지금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분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는 저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느님의 모습을 작고 여린 아기인형의 모습으로 꾸며다가는 '아주 잘 차려놓은' 구유에다 안치하고 모두 가서 경배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그 성탄의 화려함과 기쁨과는 아주 동떨어진 오히려 정반대의 장소와 상황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현실

새벽에 모기가 날라들어 참다 참다가 일어나 불을 켰고 모기를 찾았다. 결국 발견하지 못해서 손이 닿는 곳에 살충제를 두고는 불을 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형광등의 빛이 느껴졌다. 이 빛은 오히려 나를 성가시고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빛 때문에 우리는 '시각'을 이용하게 되고, 또 바로 그 시각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유혹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빛은 세상에서 사용되는 빛이다. 불을 켜기 전만해도 나는 '하느님의 빛'에 감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빛은 세상에는 어둠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어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신비 속에 가려진 채로 우리는 눈과 다른 감각 기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현실'이라고 인지한다. 그렇지 않다. 진정한 현실은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 존재한다. 진정한 현실은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 우리의 이성과 감정을 넘어서 보다 심층적인 곳에 있으며 우리는 그 현실을 향해 나아가기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여전히 우리의 감각의 차원에 매달려 있다시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죽기라도 하는 듯... 물론 죽는다. 육이 죽게 된다. 하지만 그때에 비로소 영이 살기 시작한다. 수많은 성인들이 '절제'라는 것을 실천한 이유이다. 육이 전부인 세속인들에게 이는 미치광이짓으로 보였고, 곧잘 그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마땅히 할 것도 줄이면 어쩌느냐고, 접시물에 코 박고 죽으라는거냐며 매섭게 그들을 질타했다. 하지만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그들의 그런 질타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여 자신의 '자존감'을 봉헌하는 데에 썼다. 나 역시 이 길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일상 안에서의 작은 트러블에도 곧잘 감정이 크게 동요되는 걸 보면, 그리고 여전히 맛있는 음식이 그리운 걸 보면, 나 역시도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우리는 두 종류의 하느님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원하는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은 언젠가 내 안에 간직한 바램을 이루어주실 분으로 우리가 간절히 간절히 기다리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을 어둠에서 구원해주실 분' 그리고 예수님의 첫모습, 치유하시는 모습,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에서 제자들은 그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열렬히 환호하고 따라갔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실패 그 자체였습니다. 스승은 최악의 사형도구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버렸고, 실망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길을 가고 맙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다면 언젠가는 실망해 버리고 제 갈길을 가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하느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분이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가오십니다. 이 분은 우리의 하찮은 바램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들어높여, 우리의 바램의 수준을 당신에게로 격상시키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이 주시려는 것, 선물하시려는 것은 우리가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이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느 부분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알아뵙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무시해 왔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성탄의 예수님을 기다리고 미사 중에 맞이하듯이 사람들 가운데서 주목받고 들어높여져 다가오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서 신음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변장에도 엄청 능하셔서 우리가 절대로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어느 순간 당신을 드러 내시곤 하십니다.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원수들 안에서, 길가다 무시해버린 거지들 안에서, 우리 가족 가운데에서 가장 내가 무시하고 천시한 사람 안에서, 당신은 꽁꽁 숨어 계시곤 하십니다. 결국 우리

하느님과 나

하느님과 나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사랑하라' 하지만 우리는 변명한다. '하느님 저 사람은 이렇고 저렇고...'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용서하라' 하지만 우리는 변명한다. '하느님 저 사람은 이렇고 저렇고...' 우리가 내놓는 변명, 우리가 생각하는 그 타당한 이유들을 하느님이 모르시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사랑하고 그럼에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뜻을 포기 못한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함의 자리에다가 우리 자신의 뜻이라는 우상을 세워 놓은 셈이다. 하느님의 뜻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은, '왜 하느님은 내가 원하는 걸 똑똑하게 당신 목소리로 들려 주시지 않지?'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당신 뜻을 외아들을 통해서 온전하게 계시하셨다. 계시는 '완성'되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다. 이웃을 위해서 제 목숨을 버리는 사람,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 아니면 이해하기 싫은 듯, 늘 다른 이야기를 해 댄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고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그만큼 우리는 더욱 미천한 사람이 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픈가? 그럼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당신이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의 논리에 따라서 판단하고 살려고 하면 당신은 '세상의 자녀'이다. 그리고 세상의 왕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싶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거들랑,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게 그리스도인이다. 주일 미사 안 빠진다고 그리스도인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에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특기?

예수님을 무슨 스페셜리스트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의 인간관계, 예수의 경제, 예수의 정치... 제발 그런 헛짓거리들은 그만 그쳤으면 좋겠다. 신성모독이란 건 다른 게 아니라 그런 게 바로 신성모독이다. 신적인 위치에 놓인 것을 인간의 자리로 끌어다 내리는 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다. 신부님하고 술 한 잔 하다가 어깨 툭 쳤다고 '독성죄' 아니냐고 고민하는 그런 게 신성모독이 아니란 말이다.(실제로 그런 사람 있음.) 예수님의 마음은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뜻 뿐이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이 복음 안에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펼쳐질 뿐이다. 예수님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셨고, 또 반대로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완성'하셨다. 예를 들어보자. 아버지는 형제들이 오손도손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가 장난감의 소유권을 두고 싸우기 시작한다. 그래서 첫째가 와서 아버지에게 이런 저런 불만을 토로하면 아버지는 첫째의 등을 두드려주시며 미소 지어 주신다. 그리고 둘째가 또 찾아와서 같은 일을 하면 아버지는 또 둘째의 등을 두드려주시며 미소 지어 주신다. 사실 아버지는 그 장난감이 누구에게 가든 상관이 없는 것이고, 다만 이 철없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즉, 그들의 관심사가 한 단계 격상되기를 바라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것에만 시선이 매여있는 이 두 아들들은 이런 아버지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고, 서로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도리어 아버지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진도를 조금 더 심하게 나가보면, 이 아버지는 그 형제간의 다툼에 당신이 죽어서라도 해소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형제의 핍박을 받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장례식에서 잠깐 슬퍼한 이 형제들은 시간이 흘러 여전히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 일이 '믿음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

믿음의 여정

믿음의 여정 세상에서 마음을 떼는 것(신앙)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희망) 그 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사랑) 이 작업은 매일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 가운데 누군가 벌써 이 어느 단계에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단단히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번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입니다. 그 가던 길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에 시선을 향하고, 어느샌가 세상 것들을 즐기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택하는 그 어느 것도 정해지거나 완성될 수는 없습니다. 곧잘 기도가 '만성화'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틀에 갇혀 죽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이 끊임없는 쇄신으로 우리를 돌이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은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고, 우리가 현재에 머무는 수단 가운데에 가장 확실한 것은 '고통'입니다. 그 고통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고통 중에 머무는 사람은 철저히 현재에 머무는 사람이고, 그 고통 중에 하느님을 향해 발걸음을 뗄 수 있다면 우리는 깨어 있고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고통'을 두둔하는 게 아닙니다. 고통은 마땅히 꺼려지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피할 수 있으면 좋지만, 우리에게 유익한 고통들, 우리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고통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권고입니다. 이 고통의 신비, 이 '십자가'의 신비를 누구라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일상 안에서 늘 자신의 무력감을 발견하는 우리들입니다. 어느 날에는 세상을 구할 듯 싶다가도, 또 다른 어느 날에는 방구석에서 멍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모든 건 우리의 마음 먹기에 달린 셈입니다. 멍때리는 시간을 '기도'로 변화 시키느냐 아니냐, 열심히 일하는 시간이 도리어 내가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어둠의 시간이 되느냐 마느냐는 모두 나의 마음에 달린

신앙

대림3주 수요일 천사의 방문을 받은 두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즈카르야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동정 성모님이십니다. 천사의 방문을 받고, 두 사람 다 깜짝 놀라고 맙니다. 그리고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인사를 합니다. 본격적인 아기의 잉태와 삶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전달되고, 두 사람 모두 질문을 합니다.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헌데 천사는 이 양자의 '유사한' 반응에 정 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즈카르야에게는 그의 '의심'을 질책하며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를 만들어 버리고 성모님에게는 다시금 친절히 그 일의 진행 과정을 설명해 주십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거의 유사한 두 일 속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의 이 질문에 더 이상 다른 무언가를 드러내어주진 않습니다. 다만 작은 힌트 하나가 즈카르야를 질책하는 천사의 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숨겨진 오직 한 가지의 차이는 바로 '신앙', '믿음'이었습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신앙은 절대 외적인 무언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말인즉슨, 우리의 세례, 견진 등등의 외적인 표지를 지닌 행위를 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미 가진 신앙을 그런 행위들로 확인하고 도움을 받을 지언정 그러한 행위가 우리의 신앙을 이루어주진 않는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점심을 먹는 두 사람에게 있어(외적 행위의 유사성) 그 내면에 한 사람은 하느님께 이 모든 음식에 감사를 드리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고 투덜거린다면 두 사람의 내면은

의로움

대림3주수요일 요셉은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고, 하느님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하느님스런 '의로움'을 잘 드러내어 줍니다. 먼저 인간사의 의로움을 간단히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악행 - 심판 - 무혐의 또는 처벌 / 선행 - 포상 한 마디로 구약의 율법 그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방식입니다. 10개의 빵을 가진 사람에게서 1개를 훔쳤으면 법에 규정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거나 끼친 피해를 고스란히 되갚아야 합니다. 이 시각 세상의 법정 안에서 쉴새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의롭다'고 하고 이런 일을 명확하게 잘 구별해 낼 수록 '의로움'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복음의 요셉의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최대한 완곡하게 묘사를 해서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고 표현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곧 약혼할 애인이 사생아를 밴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그 누구라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사실관계를 밝히고 당시의 풍습대로였다면 심하면 마리아를 돌로 쳐서 죽여 마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의 의로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말인즉슨 그는 여전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천사가 꿈에 나타나 알려 주기 전에 이미 마리아를 '용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남모르게' 파혼을 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닮은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요셉은 '심판'이

예수님의 족보

대림3주월요일 복음들 가운데 참으로 당황스런 복음입니다. 온통 사람들 이름만 주욱 나열해 놓은 다음에 끝나 버리니 처음 이 복음을 접하고 강론을 준비해야 했을 때에 얼마나 당황스러웠을는지는 지금도 충분히 상상이 됩니다. 첫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요셉이라는 인물과 예수님이라는 인물은 우리가 아는 바 혈통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혈통이 아니라 성령으로 동정잉태하여 성모님의 피를 이어 받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 '족보'라는 것이 우리의 구세주의 탄생에 하등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구세주의 탄생과 이 족보 안으로 '영입'됨으로 인해서 오히려 이 혈통이 거슬러 올라 축복을 받게 되는 형상입니다. 결국 인간적인 것의 하찮음을 이 족보의 마지막 부분으로 인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족보가 단순한 가계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족보의 핵심 인물들을 살펴보면 모두 '신앙의 선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다윗, 요셉에까지 이르는 굵직 굵직한 신앙의 가계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일찍부터 이루고 계시고 그 기나긴 인간사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족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짧은 시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 완성을 넌지시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마련하신 거대한 줄기에 우리를 담그자'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언제라도 원하는 때에 다른 나무가지를 접붙일 수 있습니다. 나무 종자가 아무리 좋아도 포도원지기의 손길이 없이는 죽어버릴 뿐이고, 아무리 하찮은 나무라도 포도원지기가 손을 쓰면 훌륭한 포도나무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 광대한 계획 속에서 우리의 의지와 사랑은 지극히 하찮을 뿐이지만, 일단 그 하느님의 의지와 사랑에 우리를 봉

세례자 요한

대림 3주 주일 복음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향한 그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굉장히 구체적이고 조목조목 알려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도 가서 물어보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는 옛 가죽부대의 마지막 인물로서 우리는 여전히 옛 포도주를, 옛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옛 것의 특징은 낡아 있다는 것, 정지해 있다는 것,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딱딱 정해진 것을 좋아합니다. 뭔가 틀이 있고, 그 틀만 벗어나지 않은 채로 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 내면에 숨겨진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을 보장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틀 안의 것을 보장된 나의 것으로 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것'을 챙기려 들고,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그 틀을 더욱 더욱 좁혀 버립니다. 부자청년을 기억하시는지요? 10계명을 다 지켰지만 결국 예수님의 마지막 명에 슬퍼하며 돌아갑니다. 반면 예수님은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일이라고는 그때 그때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일을 실천하신 것 뿐입니다. 이 예수님의 자유는 '나의 것'을 가진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아, 이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하면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울타리 안의 양들을 상상해 봅시다. 밖으로 둘러쳐진 울타리가 있고, 그 밖에는 늑대들과 독풀들 및 여러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은 외견상으로는 다들 똑같은 양들이지만, 어느 양들은 울타리 밖을 체험하고 싶어하고, 어떤 양들은 울타리 한 가운데에 있는 목자에게 집중해 있습니다. 목자는 울타리 밖의 위험을 잘 알아서 양들에게 나가지 말라고 사랑으로 주의를 주지만, 호기심에 가득 차서 마음이 밖을 향해 있는 양들은 곧잘 뛰어나가기 일쑤입니다. 그럴 때마다 목자는 당신 스스로 울타리 밖을 나가 늑대의 위협을 무릎쓰고 그 나간 양을 되찾아 돌아옵니다. 반면 목자의 뜻에 힘을 쏟는 양들은 이미 울타

폭행

폭행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폭행을 당한다" 두드려 맞는다, 얻어 맞는다는 이야기이다. 왜냐면 하늘 나라는 대항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사람들에게 가만가만 조용히 다가가서 그 열매를 쥐어준다. 하늘나라는 심겨진 씨앗이 싹이 트듯이 어느새 자라나는 것이고, 밀가루 반죽에 섞여 들어간 누룩이 부풀듯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하늘나라가 힘을 쓰는 자들, 폭력을 쓰는 자들에 의해서 폭행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설명으로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이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힘'에 대해서 알아보았으면 한다. '힘'이라는 것은 더 센 것이 덜 센 것을 지배할 수 있다. '힘'이 통용되는 곳에서는 '더 많이' 가지면 우세하고 '더 높은' 지위에 있으면 우세하다. '힘'이라는 것은 '재물'과도 크게 연관된 것으로서 심지어는 사고 팔 수도 있다.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한다는 의미는 바로 하늘나라가 이런 이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오르려 하는 이들에 의해 수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설명이 모자란다. 다른 편으로 이해를 하기 위해서, 우리의 '천국관', '하늘나라에 대한 관념'을 살펴보자. 천국은 어떻게 해야 들어가는가? 10계명을 잘 지키고, 주일미사 빠지지 않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모든 성사활동을 충실히 채우고... 이런 요구조건들이 주욱 나열된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신자들은 '두려움'의 신앙생활을 한다. 뭔가를 채우지 못한 건 아닌지, 뭔가를 어기는 건 아닌지, 무슨 조건을 더 채워야 하는지... 이리 저리 살피느라 정작 중심을 잃는다. 하지만 하늘나라는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늘나라는 자신

십자가 Q&A

십자가 Q. 십자가의 의미가 뭘까요? 어떤 신부님은 자기로 인해서 혹은 타인으로 인해서 생긴 불행은 십자가가 아니라고 하시던데... 예를 들면 만약 제가 가진 재산이 없는 남자와 결혼을해서 일생을~ 경제적으로 힘들게 산다.. 이런건 십자가가 아니라고. 또 음.. 결혼을해서 비정상적인 애를 낳아서 일생~ 맘고생을 한다... 이런것이 십자가라고 하시던데... 보통 사람들은 자신으로 인해서 혹은 남때문에 너무 힘든 생활을해도 '그건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지...' 이렇게들 흔히 말하잖아요. 근데 이런건 십자가라고 표현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요. 제가 그 신부님 말씀을 제대로 몬 알아묵은겐쥐~ 물론 신부님마다, 이것뿐만 아니라 견해가 틀리시니... 십자가의 의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까요? A. 십자가, 참으로 주변에서 많이 접하는 성물이고 교회 안에서 많이 듣는 단어이지만, 실제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래의 십자가의 의미부터 간단히 짚어보면 '가장 고통스러운 형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고통의 최상급의 표현이자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 의미부터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하겠지요. 우리는 십자가를 그 원의 그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지금은 너무나 많이 꾸며지고 순화되어서 마치 십자가가 참으로 아름다운 형상인 양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는 '고통'이자 '죽음'입니다. 먼저 이 이해를 잘 굳히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다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고통'입니다. 과연 고통은 무엇일까요? 고통에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자연적인 본성 안에서 빚어지는 고통, 2) 죄의 결과물인 고통, 그리고 3) 타인을 위한 희생의 차원의 고통. 1) 예컨대 우리의 '늙고 병듦'은 자연적인 본성 안에서 비롯되는 고통입니다. '배고픔

교회의 계산법

교회의 계산법 (대림2주 화요일) 1+1=2입니다. 이건 세상의 배웠다는 어느 누구나 다 아는 겁니다. 1+1=무한대 도대체 이건 뭘까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합쳐져서 온 세상을 구원할 은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성에 하느님의 신성이 합쳐지면 같은 결과가 도출되기도 한다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2-1=1입니다. 이것도 세상 어느 누구나 배운 사람은 다 아는 겁니다. 2-1=허무 도대체 이건 뭘까요? 하나되어 있던 두 사람에게서 한 사람이 갈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 뿐이라는 겁니다. 사람 사이를 가르는 자는 단순히 두 사람을 떼어놓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을 통해서 완성되어 있던 '사랑'이 허무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논리는 간답합니다. 100-1=99이니 남은 99를 잘 보살펴 나가자는 게 세상의 논리이고, 하느님의 논리는 100-1=불완전한 영원이니 어떻게든 그 -1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잃은 양 하나를 찾아 나서신 분이시고, 병자들을 위해 오신 의사이고, 죄인들을 위해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한 사람을 살리게 되면 우리는 또다른 '영원'을 얻는 셈이고 한 사람을 잃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세상의 논리는 굉장히 차갑고 계산적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유용성으로 분별하고 세상의 가치로 판단해서 그 존재를 파악하는 한편, 하느님은 우리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당신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단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아멘.

일상 안의 '성소'

일상 안의 '성소' 보호된 환경 안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일은 온갖 더러움이 판을 치는 환경 속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의 일상은 이런 위험 가운데 놓여져 있다. 일상 안에 찌들어 있는 더러움의 기회가 너무 많아서, 그저 작은 소홀함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특수한 환경, 어느 수도원에서 마련한 피정 프로그램에 넣어 놓으면 자연스런 '순화'를 겪게 된다. 늘 보아오던 텔레비전이 없으니 자연스레 시각을 순화하게 되고,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없으니 자연스레 청각을 순화하게 된다. 인스턴트 음식 대신에 수도원의 정갈한 음식을 먹을테니 미각도 순화가 되고 자연의 향내를 맡으며 후각도 순화가 된다. 굳이 예를 들면 촉각도 순화가 될 것이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자. 다음으로 밀려오는 것은 정신적인 영역이다. 평소에는 하루하루 당면한 일들로 생각도 안하던 것들이 이런 날에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기억과 감정의 복잡 다단한 산만함 속에서, 보통은 그 '피정'은 마감되어 버리게 되고, 우리는 다시 일상의 찌듬 속으로 복귀한다. 일상 안에서는 과연 이러한 '순화'를 겪을 수 없을 것인가? 가능하다. 일단은 '자리를 피하기'를 실천할 수 있다. 하루를 살면서 조용히 머물 수 있는 5분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대부분 스스로 소란거리를 만들고 찾으며 지낸다. 대중음악으로 귀를 소란케 하고 이런 저런 기사들을 보면서 눈과 정신을 혼란케 한다. 특히나 '광고'는 우리의 현세적 욕구를 끌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텔레비전은 보지 않는 게 낫다. 물론 목적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텔레비전을 보는게 너무 싫어졌지만 가족과의 사랑으로 그 시간을 함께 할 수는 있다. 과감한 결단으로 일상 안에 '

성모님

성모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Yo soy la servidora del Señor, hágase en mi tal como has dicho." 가톨릭적인 문화권 안에서는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그분이지만, 사실 성모님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서 우리는 참으로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단순히 세상 안에서 성모님의 이름을 빌어 일어나는 일만을 바라보며 막연하게 거리낌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 성모님의 가치에 대해서 잘 알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은 하느님에게 선택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담아낼 그릇이었습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손님이 오셔서 대접을 해야 하는데 내 놓을 음식 중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과연 어떤 그릇에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집에 가지고 있는 아무 그릇에나 내어놓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아마 최고의 그릇을 골라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에 행여 작은 티라도 있으면 다시금 물로 말끔히 씻어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담을 어떤 그릇을 고르셨을까요? 그리고 그 그릇을 어떻게 준비하셨을까요? 아마도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준비를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대의 은총을 내려주셔서 사람들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을 얻도록 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은총은 오직 성모님의 자유로운 동의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기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성모님은 앞도 뒤도 재어보지 않고 커다란 믿음 안에서 그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이 '신앙'의 동의를 통해서 성모님은 빛이신 예수님을 투과해내는 가장 맑은 유리창이 되시기로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저 한

신앙의 해의 우선과제

교황님이 '신앙의 해'에 관해서 설명해 놓은 작은 책자를 읽는 중이다. 솔직히... 좀 난해하다. 신자들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더 큰 문제는, 뭘 하자는 것인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 신앙을 쇄신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쇄신을 해 볼까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고,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미사 많이 참여하세요. 삶으로도 사시구요." 이런 말을 초반에 앞세우고는 신앙에 대해서 성경의 인물들의 예시를 드는데... 아무래도 교황님께서 지나치게 공적인 위치에 있는 분인지라 성경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따오기는 하지만 삶의 풍파를 다 겪고는 허무함마저 겪는 노년들, 지금 아이들 키운다고 정신없는 아주머니들이나, 직장 생활에 하루하루 고달픈 중년들, 이상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두려움에 휩싸인 청년들, 답답한 학교 생활이 미칠 것 같은 청소년들이나, 어린 시절부터 '생활의 두려움'에 닥달을 당하는 우리의 아이들이 이 신앙의 해라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엔 부족한 느낌이다. (내 생각에는 이 책자를 과연 몇 명이나 읽겠나 싶기도 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개콘'을 볼 걸? ㅎㅎㅎ) 왜 그런걸까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서 그런 것 같다. 좀 더 구체화 시켜서 어느 하나에 집중했으면 좋으련만, 결국 교황님은 이것 저것 다 놓칠 수가 없으신 모양이다. 신자들은 '신앙', '믿는다'는 것조차 제대로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데, 그걸 그냥 '믿음'이라는 단어에 묶어서는 '기정사실화'해서 말을 진행시키니 시작부터 엇나간 단추를 잠그는 셈이다. 사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좀 방대하긴 하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다시 찬찬히 시작해 보아야겠다. 아직 많은 이들은 신앙의 길을 시작하기 이전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많은

대림2주일

대림2주일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골짜기(영적 진보의 1단계: 죄의 사슬에서의 해방) 낮춰진 이들입니다. 자신의 죄책에 눌려 신음하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진정 따스한 목자로 다가와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우시고, 묻은 흙을 털어 주십니다. 그리고 괜찮다 하시며 다시 가자 하십니다. 때로는 다리에 힘이 풀린 어린 양을 당신이 몸소 가슴팍에 안고 가시기도 하십니다. 세상사의 무게에 짖눌린 이들, 자신의 과오와 결함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은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짐을 대신 져 주십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이 지우시는 멍에를 메고 가십시오. 산과 언덕(영적 진보의 2단계: 헛된 거룩함에서 벗어남) 교만한 자들입니다. 적지않은 신앙인들이 속해 있는 그룹입니다. 스스로 교회 규정을 지키면서 구원에서 멀지 않다고 착각하는 이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입술로만 모든 신앙생활을 하고 실제 삶 안에서는 '자신의 뜻'이 최우선인 이들. 미운 이들을 계속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들을 여전히 증오하며 자신에게는 모든 이유가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 사랑스러운 존재만 사랑하며 진정 사랑이 필요한 이웃에게는 사랑을 내어주기를 거부하는 이들. 신앙은 일종의 보험일 뿐이고, 실제로는 '돈'의 신, '물질'의 신을 더 섬기는 이들. 자기네들이 사고 싶은 건 다 사면서 길가다 만나는 거지에게 동전 하나를 주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는 위선자들. 이들은 사정없이 깍여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굽은 데(영적 진보의 3단계: 욕의 다스림) 우리의 바램은 많이 휘어져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향해야 하는 우리의 바램은 세상으로 인해, 물질들로 인해 많이 휘어진 상태입니다. 어떻게 점검하느냐구요? 텔레비전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

성모 신심 미사 강론

오늘 공소에 성모 신심 미사를 갔는데 안 보이던 한 무리의 청년들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껄렁해 보이는 녀석들이 어슬렁대고 있길래 수녀님이 어여 오라고 미사 드리는 가정집으로 초대를 했다. 그리고는 다른 마을 사람들도 옹기종기 모여와서 미사를 시작했다. 솔직히 '성모 무염시태 축일'을 맞이해서 성모님을 좀 알려주려고 하다가 방향을 바꾸었다. 청년들을 보니 '성모님' 어쩌고 하다가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람은 원의가 있을 때 움직여요. 배가 불러서 토할 지경인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줘 봐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죠. 배가 고프면 저절로 음식을 찾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죠? 하루하루 행복하고 싶어서 살아가는 거잖아요. 헌데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랑 '쾌락'을 착각해요. 참된 행복을 찾아 다니기보다는 자신의 '쾌락'을 찾아다니는 데 여념이 없죠. 쾌락이라는 건 이런 거예요. 맥주를 엄청 마시고 나면 잠시 흥건히 기분이 좋지만, 다음날에는 토하고 난리가 나죠. 게다가 정신 없는 상태에서 마누라도 귀찮게 하고 아이들도 때리고 나면 다들 날 미워해요. 마약도 마찬가지죠. 그 순간 순간을 즐기다가 중독이 되고 나면, 마약을 사려고 안하던 짓도 하게 되고 범죄도 저지르는 거죠. 성적인 쾌락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순간적인 걸 즐기다가 책임지지 못할 임신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해요? 직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청소년이 아이가 들어서면 참으로 곤란하게 되죠. 진짜 행복은 어디 있을까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청년들의 반응을 잠깐 살폈다. 아직 많이 어려 보이는 한 녀석만 실실 쪼개고 있었고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몇몇은 이미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표정들이 심각해 보였다.) 잠깐 화제를 바꿔볼까요? 오늘 성모님 축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성모님

외국인 친구

외국인 친구 적당히 이쁘장하고 외국말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우리의 '주의'를 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호기심'으로 다른 한 편으로는 '호의'로 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와 '우정'을 맺어 보겠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 우정은 다른 우정과는 좀 다르다. 우리는 아마 같은 수준의 한국 친구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을 우정을 그에게는 특별히 보인다. 왜냐하면 그와 맺는 우정은 나의 가치를 살짝 들어높여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외국 친구가 있어'라는 자랑을 다른 이들에게 하면서 나의 존재를 높이려 한다. 그렇게 맺은 친구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특히나 우리 한국 사람들의 '초대'관습에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많은 것을 베푼다. 음식을 사고, 커피를 사고, 선물을 사다준다. 그가 나와의 우정을 깨지 않도록 조심을 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좋은 메이커의 카메라를 사서 그에 따른 렌즈와 악세사리를 구입해 가면서 그 카메라를 관리하듯이, 우리는 그 '외국인 친구'를 관리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지만, 이 우정은 진정으로 지속되지 못하는 한 때의 유행 같은 것이다. 그런 공허한 관계 이후 그 '외국인 친구'가 진정 어떤 마음을 지니게 될지는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베푸는 '물질적' 호의 속에서 그 친구의 마음에 '물질적 욕구'를 점점 키워 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균형 잡히지 않은 호의로 먼 나라에 보다 큰 목적을 지니고 온 이들을 쉽게 허물어뜨리고 만다. 모쪼록 이 글을 읽는 이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친구가 되고 싶다면, 내면의 '호기심'과 동냥에 가까운 '호의'를 버리고 사람대 사람으로 다가서서 그의 영혼을 돌보라. 이건 외국인이건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대림1주 금요일) "형, 내일 형이 무슨 강론 할 지 다 알겠다. 장님이 눈을 열게 해 달라는 내용이니까 분명히 마음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하는 내용이겠지?" 같이 생활하는 마석진 신부가 어제 저녁에 나에게 한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ㅎㅎㅎ 결국 마음의 눈을 떠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오늘 새벽미사에 가서 강론을 시작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감각으로 받아들입니다. 특히나 '본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손에 매일미사책을 들고 있는 거 보이시죠? 이걸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그냥 여러분의 눈으로 제 손에 들린 책을 확인하면 되지요. 하지만 지금 제 주머니 속에 '휴대폰'이 있다고 내가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번에는 여러분이 저마다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단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늘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신뢰는 더 가겠지만 그래도 의심할 수 있고, 제가 행여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 왔다면 의심은 더욱 커지겠지요. 바로 여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환상이 아닙니다. 허황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지, '재물의 하느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재물의 하느님'에게 더 마음을 모으죠. -하느님, 이번 시험 붙게 도와주세요. -하느님, 돈 많이 벌게 도와주세요. -하느님, 복권 당첨 되게 도와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는 이들은 '재물의 하느님' 즉 '환상의 하느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관한 것이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대림 2주 목요일) 커다란 진흙덩이를 구해 왔습니다. 틀에다가 돌리고 돌려 형태를 잡고 더 공을 들여 아주 섬세하게 모양을 세웠습니다. 거의 완벽한 꽃병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색을 칠하고 유약을 발랐습니다. 하지만 도가니가 준비되지 않아 구울 수가 없었습니다. 구워지지 않은 도자기는 공방 한쪽 구석에 놓여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다 부스러지고 말아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실천이 없는 신앙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공상으로만 끝나는 신앙의 운명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바가 있고 성찰한 바가 있다면 그것을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상황을 잘 아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에게 그 기회를 주십니다. 내가 '인내'에 대해서 듣고 배울 기회가 있었다면 머지 않아서 그것을 실행할 기회를, 인내를 실천할 기회를 주십니다. 내가 '용서'에 대해서 듣고 배울 기회가 있었다면 머지 않아서 그것을 실행할 기회를, 용서를 실천할 기회를 주십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이고,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듣고 배우는 게 수업료가 없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실제 삶 안에서 대단히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의 수업은 말짱 꽝입니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매를 덜 맞을 수업을 한 셈입니다. 최근들어 저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페이스북에 좋은 글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각오를 단단히 다져야 합니다. 우리가 툭툭 던져놓은 이것들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상의 기회 속에서 실천 되어져야 할 날들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매를 맞는다면 저야말로 가장 매를 많이 맞아야 할 사람이 되겠지요. 제가 한 말들을 제가 어기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느님 앞에 가장 못난 모습일 테니까요. 우리의 집은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반석은 '들은 것

감사의 기도

감사의 기도 감사는 언제 드리는 걸까요? 감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새로이 받을 때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본 전제로는 받게 될 그것이 나에게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에게 뻔히 있고 이미 내가 쓰고 있는 무언가를 하나 더 받는다고 내가 감사할 이유는 크게 없을 것입니다. 감사의 전제조건은 '나의 가난함'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갖고 있을까요?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우리의 것이라 생각해왔고, 우리가 이미 누리던 것들은 이미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색다르게 새로이 받지 않고서는 감사할 일이 없었지요. 오히려 정반대로 화낼 일만 잔뜩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가면서 새로운 걸 더 얻기보다는 '빼앗기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물건들 부터 시작해서, 형제들 중에 누가 내 새 옷을 입고 외출해 버린다던가, 내가 '가진'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던가, 나의 '시간'을 헛되게 소비해 버리는 것까지 해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우리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감사'는 커녕,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히기 일쑤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자발적인 가난'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 만물,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나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고, 심지어 나의 존재 조차도, 나의 생명 조차도 하느님께서 내어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된 '감사'를 하느님 앞에 드리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평화와 기쁨으로 차게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손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잠시 맡겨 두셨던 것을 그

병자 미사 후기

낮에 병자들을 모아서 미사를 드렸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부탁을 드렸다. 우리들이 믿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라고 그분은 모든 걸 하실 수 있으니 당신이 원하면 무엇이든 일어날 거라고. 다만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께 맞추라고, 전능하신 분께서 원하시는 일은 일어나지만 우리가 원하는 일이라도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그분의 뜻에 우리의 뜻을 봉헌해 드리자고 청했다. 그리곤 미사를 시작했고, 준비된 강론을 해 드렸다. 미사를 마치고 신자석으로 내려가 한분 한분 정성스럽게 안수를 해 드리는데 한 분이 울음보를 터뜨리셨다. 나는 그 분이 왜 우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분은 자신의 어두움을 용서받았고, 그로 인해 기쁨과 평화를 되챶게 될 것이다. 미사가 끝나고 간단한 다과를 나누고 잠시 눈이 먼 한 할머니가 차에 올라타시기까지 부축해 드릴 기회가 있었다. "할머니 오늘 미사 좋았어요?" "응 좋았어. 작년에도 했는데 좋았고 또 했으면 좋겠어." (아마 올해 초에 한 일을 작년으로 기억하고 계신 듯 했다.) "네, 앞으로 또 하게 될 거예요." 두 보좌 신부님들이 모두 차를 몰고 나서서 도와 주셔서 그렇게 한분 한분 차로 실어다 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미사를 마무리하면서 한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여러분은 하느님 가장 가까이, 십자가의 예수님 가장 가까이 머물러 있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축복을 받고 있지요.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몸들이니 여러분들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향해서 여러분들의 고통을 봉헌하십시오." 고통은 그저 고통스러이 겪기만 하면 괴로움일 뿐이지만, 자발적으로 봉헌하면 세상의 악을 치유하는 약이 된다. 혹, 여러분들도 이런 저런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면, 하느님에게 봉헌하려는 마음을 지녀보시라.

가난

우리는 진정한 가난을 모른다. 우리는 필요한 것이 없어 본 적이 없다. 많은 부분 아쉬운 적은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나의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지 나에게 정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비와 바람을 피하면서 몸을 누일 집, 따뜻한 옷, 크게 굶주리지 않을 정도의 음식. 우리는 이 충족에서 단 한 번도 제외되어 본 적이 없다. 잠시 어느 계기로 인내로이 참아 볼 수는 있었지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시 회복한다는 기본 속에서 살아왔다. 오직 이 진정한 가난 속에서만 우리가 가진 사물들의 본래 위치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못가져서 투정을 부려 왔었다. 더 나은 무언가를 가지지 못해서 투덜거려 온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가진 것에는 '절대로' 감사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 주변을 돌아보며 나는 정말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고, 앞으로는 이 사물들을 깊은 감사로 받아들이기로 조심스레 마음먹어 본다. 그리고 언제라도 나눌 준비를 해야지. 나의 보물은 이 세상에 있지 않으니까...

거룩함과 겸손

거룩한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가 거룩해지지는 않는다. 거룩한 말을 많이 하는 입이라고 그가 거룩해지지는 않는다. 결국 '거룩함'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천상의 사정을 헤아리다가도 실제 자신 앞에서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이웃을 만나면 스리슬쩍 화가 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걸 알면 겸손해야 한다. 거룩함에 다가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순전히 자기 착각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기도시간을 많이 투자한다고 거룩함에 다가서지 못한다, 모든 극기를 다 이행한다고 거룩함에 다가서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오직 하느님만이 이끌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하지못하는 모종의 신앙활동을 한다면서 남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자기가 남들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착각도 엄청난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영적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고개를 숙인다. 이 '고개숙임'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져도 안되는 것이다. '내가 한 번 낮춰준다'라는 생각 따위나 하고 있으면 이 사람은 오히려 진짜 교만한 사람이다. 영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의 처절한 상태를 너무나도 잘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사실 내가 무슨 글들을 적었는지 다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저 그때그때 떠오르는 걸 적을 뿐, 그게 내 삶은 아니다. 나라는 사람은 내가 적은 글 저 아래에서 허덕이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사람이다. 하지만 또 힘내서 살아가야지. 이딴 우중충한 자아비판적 생각에 잡혀 살아가기엔 나의 작은 노력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을테니... ㅎㅎㅎ

병자 미사

병자 미사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에는 부모에게 모든 걸 의지하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 모든 걸 꾸려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섞여들어 살아가면서 우리는 동시에 다른 것에서도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바로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키우면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의존'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나잇살이나 먹어서 여전히 엄마 아빠 밑에서 옹알대며 지내는 것만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근본바탕'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의존'하는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근본바탕'이 되는 분입니다. 부모에서 벗어나면 '자립심'을 얻지만,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면 모든 걸 잃는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찾으려는 것이 '재화와 건강'입니다. 이 둘은 하느님 없이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하느님을 잃는다는 것은 곧 '영원한 생명'을 상실한다는 것이고, 영생이 없는 이에게 남는 것은 현세의 생명이기 때문에 이 현세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재화와 건강'이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보물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재화' 그리고 '건강'을 위해 기를 쓰고 살아갑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해지고, 건강해진다는 건 뭐든지 시도해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강'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내가 늘 지니고 있었던 건강이 사라질 줄이야.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가진 걸

나 자신을 바라보기

나 자신을 바라보기 어제 미사를 드리는데 스위스에서 왔다는 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와서는 내가 미사 드리는 모습을 찍어 가져갔다. 그리고는 돌아가서 그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말할테지, '봐봐, 내가 여기 있었다구, 볼리비아 말야. 이 성당 모습을 봐. 독특하지? 여기는 사제가 선교사인데 여기는 동양에서 온 신부가 있더라구. 사람들이 다 가난하고 없어 보였어. 참 불쌍하지 그치?' 그러면 사람들은 맞장구를 칠 거고, 볼리비아에 대한 막연한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과 그 사진을 찍은 이가 하는 설명으로 볼리비아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게 되었노라고 생각하며 기회가 있어서 '볼리비아'를 이야기 할 수 있을 때면 자기가 듣고 본 그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나누는 '이미지'들이다. 실제는 아주아주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단면을 슬쩍 엿보고는 그 실체를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다. 우리 주변의 감각 기관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들에 혼이 팔려 정작 바라 보아야 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고 있다. 여러분이 정말 원하는 것이 지금 여러분이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해 보았는가? 여러분에게 최신형 휴대폰이 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진실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 오던 바가 산산조각나고 말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탓일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의 공허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나는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가득 채워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허구라고 밝혀지게 되면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여러분이 얻으려는 그 수많은 물건들과 이루려는 대상들은 많은 경우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행복'

자기 옷

자기 옷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참으로 어색하고, 때로는 아예 입지 못하거나 옷이 찢어지든지 너무 작은 옷에 숨이 막히든지 하게 될 것이다. 사제의 옷이 있고, 수도자의 옷이 있고, 평신도의 옷이 있다. 누구나 제 몸에 제 옷이 딱 맞는 법이다. 하지만 특별한 복장도 존재를 하니, 파티를 위해 만든 옷이라던가 수영장에 갈때 입는 옷과 같은 것들이다. 사제가 때로는 평신도의 옷을 입기도 한다. (내가 말하는 옷이 문자적으로 옷이 아니라는 건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계속하겠다.) 사제가 신자들과 어울려 술을 한 잔 걸칠 수도 있고, 그들의 시름에 동참할 수 있다. 때로는 그들의 놀이에도 참여할 수 있고, 어울려 즐거움을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행사가 끝나면 돌아와서 얼른 다시 사제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일주일의 7일 내내 평신도의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면, 그래서 정작 본연의 옷을 내팽개쳐두고 있다면, 이 사람은 언젠가 그 옷이 찢어지던지 자기 스스로 숨이 막히던지 할 것이다. 수도자도 마찬가지이니, 수도자는 청빈, 정결, 순명의 옷을 늘 갖춰입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때로 사제의 옷을 대신 입고 신자들에게 다가서야 할 때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힘들어하는 신자를 위해 신자의 옷을 살짝 입어볼 때도 있다. 헌데 그런 옷들을 원래의 옷보다 즐겨 입는다면 그것도 큰일이다. 평신도도 마찬가지이니, 피정과 같은 옷은 특별한 경우에 입고, 평소에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직장 생활과 삶의 고난과 더불어 드러내야 함에도, 늘상 그런 특별한 옷들을 찾아 입기만 하려고 기를 쓴다면, 이 또한 실패이다. '거룩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으니, 무조건 성당에서 한다는 모든 것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평일미사에 사람 수가 적은 건 당연한 일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피곤한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추스릴 때 찾기 위한 것이지, 무슨 주일미사 나

영성 생활의 영역

영성생활의 영역 언뜻 이 말마디만 들으면 뭔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촛불 하나를 켜 놓고 앉아 가부좌를 틀고는 명상에 잠겨 기도를 바치는 한 수도자를 떠올리게 된다. 과연 영성생활이란 뭘까? 영성생활이란 그야말로 순전히 영적인 생활에 불과한 것일까? 영성생활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먼저 우리의 영성을 바로세우는 것을 말한다. 어질러져 있는 마음을 추스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1) 끊기. 쓸데없는 것들에게 먼저 마음을 잘 떼어내야 한다. 입에 초컬릿을 물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고 하는 멍청이는 없다. 방에다가 시궁창 물을 줄줄 흘리면서 방을 꾸미고 있는 중이라는 사람도 없다. 영성생활을 시작하려면 먼저 이 '끊기'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아예 이것조차 시작하지 않은 채로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나아갑니까?'라고 묻는다.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끊어라. 2) 진보. 이 진보는 더디다. 그리고 영성생활에서 진보라는 것은 나 자신의 측면에서는 거의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아무 도움 없이 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던가, 번지 점프를 하던가 해야 한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날 그 시간을 위해서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 즉 비행기 표를 사고, 번지점프대까지 올라가는 일을 해야 한다. 영성생활의 경우는, 기도, 단식, 자선이다. 3) ??? 모른다. 자신을 끊고 하느님께 나를 맡기는 것 외에 무엇이 더 있는지. 하느님과 결합을 하는건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영성생활의 영역'이다. 영성생활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지극히 종교적인 상징들로 가득찬 행위가 아니다. 영성생활은 일상생활에 깊이 연관되게 된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대림1주(3가지 조심할 것들)

대림1주 3가지 조심할 것들. 방탕(exceso): 우리나라 말로 '방탕'으로 표현된 이 말은 '무절제, 과잉, 과도, 과분함'에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솔직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금 막연히 소유하려는 그 많은 것들은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솔직하게만 바라볼 수 있다면 많은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루를 꾸려 나가기 위해서 그토록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적지 않은 것들은 세상이 우리에게 주입시킨 필요들일 뿐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싶은 거지 어떤 특정한 성분이 첨가되어 있고, 어떤 특정한 향이 가미된 커피를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 향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광고판에 적힌 묘한 카피문구를 보고는 그걸 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과도한 무언가를 조심해야 한다. 만취(embriaguez): 술이 취하면 어떻게 되는가? 기분이 흥겨워지고 다른 사소한 것들을 잊을 수가 있게 된다. 이런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 취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정으로 신경쓰고 돌보아야 할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잊고, 세상의 사물들에 흥건히 취해 있는 이들이다. 결국 앞서의 방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진정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로 세상이 내어주는 맛깔스러움들에 취해 이것을 맛보고 저것을 맛보고 하면서 점점 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는 형국이다. 취한 사람은 자기 집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도 둔감해진다. 세상에 취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을 증오하고, 자신이 도달해야 할 영원한 생명을 잊어버린 채로 살아간다. 우리는 취해 있는 상태로 살아가서는 안된다. 근심(preocupación): 근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를 지금 끌여들어와서 '지금'이라는 시간을 채우

하느님을 두려워함(경외)

하느님을 두려워함(경외) 이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이지요. 공포와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포는 미지의 것을 겁내는 마음입니다. 마치 칠흙같은 밤길을 가다가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근처에서 들리는데 실체는 보이지 않아서 공포에 질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 보았을 때에 그 소리의 출처는 작은 강아지와 같은 것이지요. 공포는 다만 우리의 마음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만들어내는 감정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공포에 차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요. '걱정'이라고 표현되는 건 거의 이 '공포'에 속합니다. 걱정을 공포로 바꾸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돈 걱정(공포)', '생활 걱정(공포)' 지금 먹을 밥이 있고, 나에게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우리는 더 가지지 못해 '걱정'을 하고 결국 스스로 '공포'에 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즉 경외는... 미지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분의 그 사랑이 너무나도 광대하심, 너무나 크심을 앞에 두고 우리가 겪게 되는 마음입니다. 이에 대해 감히 빗댈 비유가 없습니다. 누구는 거대한 폭포의 장엄함 앞에 선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그건 자연의 경이이지 그 앞에서 그 폭포의 마음을 느낄 순 없으니까요. 굳이 비유를 찾자면 이는 마치, 나를 너무나 사랑해주신 어머니, 당신의 모든 것을 오직 나를 위한 사랑으로 희생하시는데도 나는 그 마음을 모르고 갈수록 엇나가기만 하고 온갖 도피생활과 감옥생활을 다 하는데도 끊임없이 나를 지지해주시고 옥바라지를 해 주시다가 결국 내가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웠는데 어머니가 한 날 찾아오셔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걸 매정하게 '꺼지라'고 물리쳤다가 어느날 문득 큰 수술을 받고 낫고 오랜 기간을 회복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왔는데, 알고보니 어머니가 자신의 신장을 나에게 내어주시고 어머니는

기능과 본질

형과 아이패드의 기능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사실 아이패드의 그 수많은 기능들을 다 쓰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기껏해야 웹페이지 검색, 페이스북, 그 밖의 몇 가지 프로그램이면 충분한데 애플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식으로 한껏 부풀려서 광고를 한다. 사람들은 쓰지도 않을 기능에 마음이 끌려 구입을 하게 되고, 결국 자기가 쓸 기능만 쓰다가 결국 때가 되면 갈아치우게 된다. 문득 우리 교회 생각이 났다. 성교회도 이렇게 저렇게 하는 일은 많다. 병원 사업이니 미디어 사목이니 등등...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서 교회를 만나 가까이 다가서게 될 뿐, 그 뒤에는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지런히 신경쓰는 모든 일에 이 핵심을 잘 간직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이미 경고하신 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성당 안의 모든 제활동이 그러하다. 각 제단체 활동들, 주일학교, 기타 행사들의 근본에는 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굳건히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이런 저런 활동들이 필요없다는 게 아니라, 그 중심을 잘 세우고 일을 하자는 말이다. 교회는 세상이 하는 일을 '답습'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하는 일을 '성화' 시켜야 한다.

대림시기

대림시기 "엄마! 오늘 선생님 가정방문 오신데!" 이 말에 엄마는 대뜸 짜증부터 내기 일쑤입니다. "아니, 왜 그걸 이제 이야기한데?" 교회의 한 해가 다 지나가고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이 됩니다. 아직 세상의 새로운 해는 멀었지만, 교회는 벌써 이 주를 마지막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지요. 그래서인지 부쩍 '종말'에 대한 모습이 요즘 복음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해는 마냥 시작되는 게 아니라, '뜸 들이기' 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작고 귀여운 아가의 모습으로 오시기에 앞서 영적 대청소 기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림'(오심을 기다림 待臨) 시기 입니다. 친구가 집에 오는 것, 애인이 집에 오는 것, 사돈이 집에 오는 것, 사장이 집에 오는 것, 사제가 집에 오는 것, 우리는 이 각각의 부분에서 분명히 준비가 다를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것은 똑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청소'입니다. 일단은 더러운 건 비워내고 볼 일입니다. 그러지 않고 집구석이 쓰레기통인지 방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면 이 무슨 실례겠습니까... 가장 우선에는 집청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림 시기 동안에 우리는 영혼의 정화를 위해서 고해성사로 영혼을 깨끗이하는 준비를 합니다. 일단 고해성사로 큰 쓰레기를 들어내고 나면, 다시 더러워지는 걸 막기 위해서 일상의 청소를 꾸준히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 단식, 자선'입니다. 다음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친구는 게임기가 필요할 것이고, 애인은 사랑을 담뿍 담은 장식을, 사돈에게는 며느리를 향한 애정을 드러낼 수 있는 선물을, 사장님에게는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홍삼 엑기스를, 사제에게는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 아기 예수님은 무엇을 기다릴까요?

당신은 어디에? (영적 실존의 모형)

당신은 어디에?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으면 한다. 저 위에 찬란한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의 후광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다. 그 남자는 팔을 벌리고서 우리 모두를 자기에게로 초대해 불러올리는 동작을 취한다. 그리고 그 한참 아래에 땅이 있고 땅 위에 오밀조밀 사람들이 몰려있다. 누구는 땅에 가만히 서 있으면서 땅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누구는 눈을 올려뜨고 태양을 바라보지만 눈이 부시어 손으로 빛을 가리고 있다. 누구는 남자를 바라보고 힘껏 껑충껑충 뛰어보지만 역부족이다. 누구는 흙을 긁어모아 남들보다 솟아나 있지만 역시 그 남자에게 닿기에는 한참 멀었다. 그 가운데 떠오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는 떠오르는데 뭔가 성이 가득 난 시꺼먼 사람에게 발목을 잡고 있는 듯한 형상이고, 누구는 한껏 높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누군가는 비로소 그 남자의 발치에 가 닿는다. 그 뒤로는 빛이 너무나 찬란하여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땅 속이다. 빛이 없다. 누구는 발목까지 땅에 잠겨 있는 상태이고, 누구는 그런 잠겨있는 부분을 누가 다가와서 파내고 있다. 누구는 팔 하나만 밖으로 걸쳐져 있는 상태로 온 몸이 들어가 있고, 누구는 아예 땅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또 다른 누구는 앞서 나온 성이 가득 난 시꺼먼 사람에게 붙들려 내려간다. 그리고 저 아래에는 빛이 없어서 역시 보이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할까? 태양은 하느님이고 그 남자는 예수님이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시꺼먼 사람은 악마를 뜻한다. 땅이라는 것은 우리 의지가 작용하는 부분으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향해 뛸 수도, 덕이라는 흙바닥을 쌓아 남들보다 높이 올라갈 수도 있다. 반면 우리의 의지로 땅을 파고 몸을 담글 수도 있다. 땅을 유심히 관찰하는 사람은 세상 것에 호기심이 대단한 이들을 말한다. 땅을 파고들어가 몸을 잠근 이들은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한 이들을 말한다. 발목 정도는 금방 나올 수 있는 소죄이고,

본당신부 사목서한(신앙과 실천) 한글 Español

12월 본당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신앙과 실천 지난 1년 동안을 '기도하는 가정'이라는 주제로 '주님의 기도'를 그 실천 사항으로 제시했습니다. 이제는 점검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과연 몇 가정이나 제가 알려드린 그 길을 따라오고 있을까요? 만일 아직 잊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복 받은 가정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하셨으나 여러분의 '끈기'는 받을 상급이 큽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벌써 한참 전에 그 지침을 잊어버리고 산 지가 오래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으로는 누구나 높은 산도 올라가고 성인도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삶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의 무엇이 바뀌지 않는다고 한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우선에 바뀌어야 할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환경 이야기를 합니다. 주변이 더럽다고 투덜대지요. 그렇다면 본인부터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낙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아이를 살해할 수 있느냐고 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은 성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깡패들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그런 그룹에 어울려서 다니느냐고 투덜대지만 정작 본인의 자녀들의 관심사는 잘 살피고 있는지요? 저는 투덜거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여러분은 바뀌지 않더라고 투덜거리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느님 가까이로 이끌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앞으로 가는 곳 어디든지 그러할 것입니다. 분명 미미하지만 제가 머무는 곳은 조금씩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누구 탓을 할 때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바라볼 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간절히 추구하는 것에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