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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13의 게시물 표시

부활의 숨은 비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거룩한 성인 하나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나도 빠짐없이 초대하고 싶으신 거다. 그리고 그 기쁨을 나누고자 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잃어버린 이들에게 더욱 집중되어 있으며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계신다. 우리가 성인이라 부르는 이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들어높여진 이들인 셈이다. 그들의 원래 자리는 우리와 똑같은 자리이다. 그들은 그 들어높여짐으로 인해서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냥 평범한 종이는 이런 저런 용도로 쓰이다가 수명을 다하면 그만이지만 포스터로 선별되는 종이는 더 오랜 시간 햇볕에 노출되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나 자신의 특별한 사명을 다 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영성생활 중에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이런 거룩함에로의 추구를 한답시고 자신의 달콤한 경험을 찾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과는 영 딴판이다. 우리가 진정 거룩함으로 다가가려면 거룩하지 않은 이들에게 다가가 거룩함을 나누어야 한다. 거룩한 이들 끼리의 고상한 말잔치는 다른 무언가를 양산하지 않는다. 정말 거룩해지고자 하는 이는, 가난한 이들 소외받은 이들 외로운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가톨릭의 신앙은 '파견'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미사를 마치고 나면 그 충만한 힘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가 가진 신앙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부활의 진정한 기쁨은 죽은 이가 살았을 때에 누리는 기쁨이다. 이미 살아있는 이가 다시 산다는 것은 말도 안될 뿐더러 그런 기쁨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수많은 신자들이 부활 가운데 공허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부활을 죽음 가운데에서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부활 밤에 모여 밤새도록 떠들며 기쁨을 나누어 보았자 이튿날이면 다시 공허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진정 부활을 만끽하고 싶으면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로 돌아가야

나를 팔아 넘길 자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맡고 있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아 넘겨 버립니다. 세상의 재화와 지식이 한 사람의 구원과는 정 반대로 작용할 수 있음을 똑똑히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은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총아가 있어서 원하는 정보는 뭐든 거기서 캐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키지는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알면 나아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가질수록 마음의 평화가 오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돈을 벌어서 외국 여행을 가서 최고급 호텔에 숙박한다고 한들 마음이 평화롭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물질적인 세상과는 전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오직 유일하게 진리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객관적인 정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참된 가치를 말합니다. 최고의 진리는 다름아닌 최고의 사랑입니다. 한 영혼은 오직 진정 사랑할 때에 안식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맛있는 음식을 먹든 맛없는 음식을 먹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람과 있는 그 자체가 좋은 것이지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사랑 가운데에서 오직 최고의 사랑에 다가설 때에 진정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엄마고 아빠고 형제일지라도 유한하고 부족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쉴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 안에서 전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더 높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면서 언제나 마음이 불안합니다. 아무리 가져도

하지 않기

지금까지 잘못 생각해 온 것이 있었다. 하느님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꾸준히 질문해 왔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나의 엄청난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한 첫 걸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같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뭔가 해야 한다'고 집중적으로 교육받아 온 나의 과거의 찌꺼기 때문이리라. 무언가 하겠다는 의도 안에서 우리는 좋은 것들을 찾아 나서긴 하지만 장인은 도구를 연마하지 않고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처럼 먼저는 우리 내면의 흐름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 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셈이다. 어제 페이스북을 놓았다. 사람들을 가르치겠다는 신념 속에서 알게 모르게 내어 바치고 있었던 나의 시간과, 명예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은 셈이다. 나아가서 형제들과의 삶 속에서 나는 또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작정이다. 악마는 우리 안에 미묘한 목소리를 집어넣어서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미명 하에 자꾸 불화를 일으키고 마음을 어지럽힌다.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놓을 것인가 하는 것은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우리 공동체의 삶 속에서도 나는 내려 놓아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중에 결국 내려놓게 되는 것은 '나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를 해 보려던 그 의지를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는 셈이다. 그리고 그 비워진 공간 속에 무엇이 채워질 것인지는 분명하다. 공허로 남아있을 순 없기 때문이다. 내 의지의 내려놓음. 이는 상당한 시련이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초컬릿을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쓴 약을 먹이려는 엄마와 같은 심정이다. 나의 의지는 여전히 육에 물들어 있고 편안함과 쉬운 것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라나야 할 때이고 십자가를 져야 할

사제와 이성

사제로서 얼굴이 예쁘장한 아가씨를 만날 때에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심정적으로 먼저 동화된 것을 바탕으로 이성이 그 이유를 찾기 때문이다. 이성은 일단 먼저 기분이 좋아진 걸 바탕으로 그 기분이 좋아진 이유를 찾고 그 반대로 기분이 나빠진 걸 바탕으로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찾기에 주력한다. 이쁘장한 사람의 경우 우리 사제들은 기본 심정적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녀가 보통 사람처럼 드러내는 신심은 몇 배나 확대되고 그 반대로 그녀가 가진 결점은 축소되게 된다. 그렇게 그 사람을 자꾸 마주하고 싶어지게 되고 자기 딴에는 그녀를 영성적으로 도와주는 좋은 일을 한다고 착각하면서 실제로는 그녀의 미모를 즐기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녀 당사자에게도 좋을 수가 없는 것이 자신이 지닌 결점을 분별하고 찾아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이미 심정적으로 기울어진 사제들은 그녀의 결함을 축소하고 장점만 부각시켜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제라는 직분 때문에 피치 못하게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만나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 인물이 좋은 사람을 만날 때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심성을 잘 살피고 조금이라도 흐트러짐이 느껴질 때에는 그런 여성들은 주변에 알고 있는 신심 있는 나이 지긋한 경건한 수녀님에게 맡기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더 나은 방법이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쁜 여성을 한 번 만날 때에는 그렇지 않은 여성 10번을 만날 각오를 하고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내 마음은 그리로 기울어진 상태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 사제만이 아니라 모든 남성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반 남성들은 한 이성만 책임지면 되기에 파급 효과가 없지만, 사제는 수많은 영혼들을 돌보아야 하기에 그 책임이 적지 않은 셈이다. 행여 그렇게 마음이 완전히 넘어가 버리고 나면 나중에 아무리 핑계를 대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러니 신부님들은 지금의 마음을 잘 살

중간점검

좋은 걸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사람이 할 것도 아니고, 나쁜 걸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만둘 리가 없다. 결국은 다 때가 있는 법이고 그 사람 스스로 그걸 깨달아야 하는 법이다. 똥을 먹으려고 드는 사람은 없고, 아름다움 무언가를 내던지려는 사람도 없다. 문제는 무엇이 똥이고 무엇이 아름다움인가 하는 우리 내면의 작업인 셈이다. 하고 싶다고 하는 건 하게 둬야 한다. 뜯어 말리면 그 내면에 반발심만 더하게 마련이다. 나 역시도 많이 가지는 게 좋은 줄만 알던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많이 가져보았더니 이게 감당이 되지 않는 시간이 온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필요한 만큼만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줄여도 줄여도 여전히 많은 느낌이 드는 건 내 기호가 점점 바뀌고 있다는 말인 셈이다. 반대로 참되고 진솔한 가치들에 대한 탐구는 어렸을 때에는 그저 지루하고 막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다가 이것이 다가서도 다가설수록 그 갈증이 더해진다는 걸 알게 되고 내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는 느낌을 갈수록 더해주고 있다. 이 역시 내 기호가 바뀌어감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전히 한 편으로는 맛있는 음식이 좋고 재미난 영화에 호기심이 가고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싶은 걸 보면 아직 덜 데인 셈이고, 여전히 기도가 지루하게 느껴지고 그보다는 좀 더 즉각적이고 오감적인 무언가를 찾는 걸 보면 영원에로 다가서려는 내 마음이 멀어도 한참 먼 셈이다. 하지만 내 삶에서나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방향에서나 영 엉뚱한 방향을 걷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인걸까?

물과 물그릇

"자 물 마셔." 라고 하면서 물을 직접 던져주는 사람은 없다. 뭐든 그릇에 담아주게 마련이다.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이 모양도 되고 저 모양도 된다. 물을 마시기에 편한 그릇도 있고 불편하지만 어떻게든 물은 담기는 그릇도 있다. 가톨릭은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생수를 담는 훌륭한 그릇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만이 그 물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건 우리가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절대자 앞에서 올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들은 제 나름의 그릇에 물을 담고 살아가는 셈이다. 나는 왜 가톨릭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자라온 토양이기 때문이고 나에게 그 물을 수월하게 전해준 그릇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 그릇으로 물을 마시라고 권한다. 내가 직접 마셔 보았는데 마시기에도 편하고 좋더라고. 하지만 강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자기 그릇이 더 아름답고 이쁘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니까. 보다 중요한 건 '물을 마시는 것'이지 그 물을 어떤 그릇에 담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인 셈이다. 그릇만 이쁘게 꾸미고 물이 메말라 있는 상태... 매너리즘에 빠진 종교인의 모습이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그릇이 아무리 이쁜 들 소용이 없는거다. 가톨릭의 보화와 같은 성체성사와 그 밖의 성사들, 전례, 여러 제도들은 그 안에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 찬란한 빛을 발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돌들에게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 성지주일 복음처럼 사람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외칠 수 있는 셈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교만의 원리로 작용한다면... 그건 오히려 사랑에 반대되는 길을 걷는 셈이다. 사랑하자... 그리고 그 같은 사랑을 먹고 모두가 하나 되었으면 좋겠다.

길을 찾는 이들

"길을 찾는거지 뭐..." 그가 시무룩하니 대답했다. "정해져 있는 건 없어. 찾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 같아. 정말 찾는다면 얻어 만나게 되어 있거든."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이었다. "이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달려가면 이게 아니고 저거라고 생각하고 달려가면 저게 아닌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내가 점점 더 풍성해지고 커지는 것 같아. 이 생의 죽음이라는 종착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셈이지." 내 의문은 더욱 증폭되기만 한다. 그럼 뭘 해야 하는거지? 정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걸까? "포기하지 말아. 그거면 충분해." 그는 마치 내 속을 읽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그 역시 나처럼 길을 찾던 사람일 뿐이고 다만 나보다 한 발짝 앞에서 먼저 간 길을 소개하는 것 뿐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 길에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아가. 그들은 아예 길을 찾지도 않거나 조금 찾다가 제 풀에 포기해버리고 마는 이들이지. 그리고는 세상에서 안주할 거리들을 찾는거야. 주로는 세상이 주는 위락이지. 그런 데에다가 정신을 내어 맡기면 잠시나마 잊을 수 있거든. 다음 주에 시험이 있는데 방금 컴퓨터 게임을 시작한 아이를 잘 살펴보렴. 그 아이는 컴퓨터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시험이고 뭐고가 중요하지 않아, 컴퓨터 게임 속의 주인공이 죽느냐 사느냐에 온갖 신경을 집중하지. 그러다가 게임이 끝나고 나면 현실이 시작되는거야. 하지만 그렇게 정신없이 날려버린 시간은 그 누구도 되찾아 줄 수 없지." 그렇구나... 그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저요, 포기하지 않을께요." 그가 웃었다. 간만에 보는 그의 환한 얼굴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성인>

성지주일 강론

성지주일 아침이다. 딱히 강론을 준비하지 않았다. 다만 행렬 때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군중의 기쁨을 함께 나눌 생각이고, 행렬을 마치고 들어가서는 수난 복음을 읽은 후에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외친 그 군중들이 바로  행렬 때의 기쁨을 나눈 똑같은 이들이라는 걸 이야기할 생각이다. 결국 그놈이 그놈인거다. 세상 안에는 지나치게 기뻐할 일도 반대로 지나치게 화내거나 슬퍼할 일도 없다. 또 내 주변의 인간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더라도 결국 하느님 한 분 안에서 쉬는 게 낫다. 그들은 제가 좋을 때는 좋다고 환호했다가 제가 싫을 때는 싫다고 침을 뱉고 머리를 때리고 할 것이다. 이 말을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 있으니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다. 헐리우드 영화를 볼때마다 조금 재미있다 싶은 게, 그들이 영화 상으로 '신앙'을 드러내기는 힘드니까 차선책으로 거의 가족 간의 사랑을 마지막 해결책인 듯이 제시한다. 주인공이 엄청 싸우다가도 결국엔 가족을 구출하고 엄청난 갈등 상황이 있다가도 결국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등등이다... 가족유대를 최우선시하는 이들도 언젠가는 실망을 예비한 셈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생각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 계시니 바로 우리 주님이다. 인간들이 하느님을 이렇게 상상하고 저렇게 상상해서 벌도 주셨다가 질투도 하셨다가 화도 내시고 또 엄청 자비롭기도 하시는 변덕스러운 하느님을 만들어 내어 버렸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에 변함이 있는 분이 아니시다. 당신의 사랑은 항구하고 영원하다. 그 사랑 안에 쉬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세상 유혹에 자꾸 시선이 돌아가서 우리 스스로 불안을 자아내는 셈이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쉬어야 하고, 그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지닌 사람

답답한 아이 길들이기

부모가 보기에 답답한 아이가 있다. 부모로서는 정말 그 방향이 아닌데 그 방향을 고집하는 아이. 그 아이를 돌이키고 싶은데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까? 1) 설득한다. 그 아이가 진정 깨달을 수 있도록 다가가 설득한다. 하지만 이 설득이 강압이 되어서는 안되고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이가 깨달아야 실현 가능성이 있다. 2) 놓아둔다. 그 아이는 그 방향으로 가고 결국 그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닫는다. 사람은 한 번 체감한 것은 좀처럼 쉽게 잊지 못한다. 손가락을 불에 데어 본 아이는 절대로 다시 불에 손가락을 집어넣지 않게 마련이다. 1번에서 우리가 실패하는 건 주로 사랑 없는 밀어붙임과 강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고, 2번에서 우리가 실패하는 건 우리의 편협한 시각(내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는 착각)과 조급증(지금 아니면 안된다는 착각) 때문이다. 한 인간 존재는 자신에게 스스로 져야 할 책임이 있다. 그 영역은 그 어떤 친한 친구나 형제나 부모도 손쓸 수 없는 그와 절대자와의 고유한 공간이다. 그 영역에 다가서려면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품고 다가서던지, 아니면 하느님에게 맡기는 수 밖에 없다. 사랑이 아니면 움직이지 말아라. 하지만 어쩌리요 우리 부족한 인간들은 어떻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강요하게 마련인것을... 늘 보면 그래서들 싸운다. ㅎㅎㅎ 이는 비단 부모 자식간의 문제가 아니라 주임 사제와 신자들에게도 적용되고 그 밖의 모든 상황에서도 후견인과 피후견인 사이에서 적용이 되는 문제인 셈이다. 사랑하라... 당신의 사랑이 부족한가? 하느님에게 맡기고 내버려두라. 참고로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비슷한 교육방법을 쓰시는 것 같다.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사랑을 절감하던가... 우리가 원하는 길로 내달려서 크게 한 번 데어 보던가. ㅎㅎ

사제는 자선가가 아니다.

사제는 자선가가 아니다. 내 돈이 아닌 돈을 움켜쥐고는 마치 주인인 양 행세하며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사제는 영혼의 목자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영혼들의 유익을 생각하며 해야 한다. 돈을 나눠 줄 때도 그래야 하고, 미사와 성사를 거행할 때도 그래야 한다. 영혼에 유익하다면 최악의 일도 해야 하고, 영혼에 유익하지 않다면 가장 성스러워 보이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사제의 직분에 관리자의 직분이 있는 것도 그것이 영혼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지 그저 그 자체의 직분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중소기업 사장이나 하는 게 낫다.(보통은 그럴 능력도 되지 않는다.) 양들을 먹일 영적 양식이 없는 상황에 본당 재정이 늘고 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일 것인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부족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자. 사제는 영혼의 추수꾼이다. 신자들과 어울려 한 잔 하는 것이 영혼에 유익하다면 그리 하라.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여 자신의 영혼을 망쳐 결국 주변의 양들의 영혼도 망치게 된다면 이제는 그만둬야 하는 것이다. 기도를 하는 것은 무조건 좋아 보이지만 기도만 하고 다른 활동을 무시한다면 그것 역시도 그만둬야 한다.

어느 아줌마의 욕심

새 본당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느 아줌마가 찾아왔다. 화장을 한 걸로 봐서는 마냥 가난한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런 내용이었다. "신부님, 얼마 전에 딸이 사고를 당해서 다른 신부님(전임 주임 신부님)이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제가 미혼모라서 딱히 돈이 나올 구석이 없어요. 근데 의사가 그러는데 아이가 회복할때까지 장시간을 누워 있으려면 물침대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어떻게 좀 도와주실 수 없는지요?" "흠... 도와 드리도록 하지요. 하지만 물침대를 사 드리진 않겠습니다. 저희가 구입한 뒤에 무상으로 대여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물침대 가격만 좀 알아봐 주세요." 그렇게 돌아간 아줌마, 오후에 다시 찾아왔다. "아, 신부님 물침대는 친척 중에 누가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걸 빌리면 될 것 같구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아이가 일어나서 걷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보조 보행기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걸 좀 사다 주실 수는 없으세요?" 느낌이 이상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말을 바꾸고 찾아오는 것에 뭔가 꺼림칙한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직접 집을 가 보기로 했다. 사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들어서는데 철제 대문이 있었고 집 안도 나름 깔끔했다. 커다란 오븐도 있고 안에는 아이가 타고다닐 휠체어도 있고 텔레비전이며 필요한 집기들이 다 있었다. '이 아줌마 돈 욕심이 난 거구나...' 싶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나름 갖추고 사시네요." "이 집은 동거하는 남자(전에 남자가 있었고 이번이 두 번째 남자임)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저 아이에 대해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나요?" "네 그사람 무책임해요. 그리고 우리더러 나가라고 해요." "그럼 그 사람 집에 오거든 저에게 알려주세요. 제가 이야기를 해 볼께요." "신부님 도와 주

어느 과부 할머니

"신부님요, 제가 혼자 사는 과분데요. 집터가 있고 집이 있기는 한데... 화장실이 없거든요. 우째 좀 도와주실 수 없을랑교?" 어제 찾아온 한 할머니의 부탁이었다. 그 길로 그 할머니를 모시고 가정 방문을 갔다. 할머니가 가르치는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아니나다를까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외곽지의 길도 포장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집에 도착했다. Cuatro de Abril(4월 4일)이라는 지역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개가 으르렁댄다. '우쭈쭈...'하면서 내 나름의 평화의 메세지를 보내고 안으로 들어서니 집 모양새가 나온다. 벽돌로 된 단칸방 하나에 나머지는 나무로 지은 집들이다. 그리고 안쪽 구석에 검은 비닐로 둘러놓은 재래식 화장실이 눈에 들어온다. "화장실 짓는데 얼마 한다 카니껴?" "500 Bs.(한화로 8만원 정도) 든답니더. 땅에 구멍 파는 값은 따로라 카데예."(편의상 대구 사투리를... ㅎ) "400Bs. 드릴 테니까 바로 시작하시이소. 그리고 여기 반장 없지예? 사람들 모아가 반모임 만드시소. 이래 따로 맨날 다들 찾아와가꼬는 내가 일을 모하지예. 앞으로는 반장 통해가꼬 일을 할랑께 그래 아시이소."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겠단다. 집을 나서는데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나중에 찾아가보고 일 시작했나 확인해야지. 그냥 생활하고 밥 사먹는데 써버렸으면... 뭐 그래도 어쩔 수는 없다.

소비

과도한 소비를 지향하는 이 사회는 짐짓 그렇지 않은 듯 소비자들을 속이면서 팔아 제끼기에 여념이 없다. 그 총화는 바로 '광고'이다. 광고는 소비사회의 중재자인 셈이다. 필요에 의해서라면 절대로 사지 않을 상품에 엄청난 가치를 부과해서 최고의 가격으로 팔게 한다. 그래서 광고는 재미있고, 탐욕스럽다. 광고 속의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늘 웃고 있다. 소비를 '행복'에 연결시켜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자연스레 '소비'가 '행복' 그 자체인 줄로 안다. 우리 스스로의 욕구를 솔직하게 느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탐욕스럽지 않으며 그저 하루에 필요한 것들이라고는 약간의 음식과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이 전부이다. 그래서 올바로 깨달은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도외시되고 도태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나아가 이 사회는 그런 이들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소비문화에 응축된 '악의 기운'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세상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눠보라. 그리고 여러분이 지닌 영성적 흐름을 친구들에게 조금만 언급해보라. 그러면 그들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새 소식과 새 상품에 목을 맨 이들 가운데에서 그것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 흐름에서 벗어난 이들은 시간이 남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되고 그러한 것들에 더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 정 할일이 없으면 고요함 가운데에 머물 수도 있다.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창조주와 소통하는 시간인 셈이다. 소비사회는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어 휴식을 전혀 휴식같지 않은 것들로 채워 버렸다. 우리는 어딘가 가지 않거나, 뭔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영화를 보면서 소음과 영상들로 귀와 눈을 가득 채워야 그 불안이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이다. 그런 위락의 행위들로 우리는 진정한 불안, 영원에 대한 불안을 저 깊이 숨겨 버리는 꼴이 된다. 하지만 자

시적 아름다움에 대한 단상

시적(詩的) 아름다움. 시적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같이 기하학적 아름다움 또는 의학적 아름다움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하학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증명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의학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치료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목적으로 삼은 즐거움이 무엇으로 성립되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모방해야 할 그 자연스러운 모형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모르기에 사람들은 기묘한 표현들을 지어내다. <황금 세기, 현대의 경이, 숙명적인> 등등. 그리고 이 특유한 말들을 시적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그러나 하찮은 것들을 거창한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성립된 이 모형에 따라 한 여인이 치장한 것을 상상하는 사람은 거울과 구슬로 온통 몸을 휘감은 한 아름다운 여인을 볼 것이며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시의 즐거움보다 한 여인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치장한 여인도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을 여왕으로 착각하는 마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 모형에 따라 지어진 시를 <마을의 여왕>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파스칼, 팡세, 이환역, 민음사(2003), p.506-507. 과거 신학교에서 1학년 후반기 때에 '말'이라는 문학 동호회에 들어간 적이 있다. 한창 팔공산 중턱의 한티의 맑고 순수한 자연 안에서 생활하면서 감수성을 최고조로 발달시켜 짧은 글이나 시를 적곤 했었기에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이 동호회에 들어갔다. 헌데 내 시를 내어놓는 순간 사정없는 칼춤이 벌어졌다. 서두부터 시작해서 말미까지 선배들의 사정없는 냉철한 비판의 말에 내가 본래 의도했던 뜻은 공중분해 되어 버리고 결국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괴물같은 결과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길로 그 동호회를 나와 버렸고 더 이상 시에

완성하는 사랑

아름다움을 싫어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던지  아니면 내면에 뭔가 정상적인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쁜 사람, 잘 생긴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을 비난할 순 없다. 하지만 본인이 지금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본질을 숙고할 필요는 있다. 사라져버릴 아름다움을 사랑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사랑에 빠졌다가 그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에 환멸을 느끼는 사랑은 지극히 피상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특히나 배우자를 찾는 젊은 사람들은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쉽사리 혼동한다. 상대의 외모, 상대의 재력, 상대의 기질과 성격은 절대로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따라서 보다 깊이 숨어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인 '선한의도'와 '진솔한 마음'을 찾아야 하는데 많은 경우 이는 가려져 있다. 하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건 아니라서 그 사람과 잠시만 일상을 나누어보면 금세 드러나게 마련이다. 얼굴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늘 자기의 외모를 중시하고 그 반대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 툭하면 누군가를 비난하는 사람, 모든 일에 투덜대고 부정적인 사람… 그 사람과의 하루의 데이트 중에 미묘하게 드러나는 부분들이다. 극장에 가서 표를 살 때, 음식을 주문할 때, 길을 걸을 때, 이야기를 나눌 때 반드시 드러난다. 내면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과 (감정적인)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젊은 시절의 불과 같은 사랑은 그 모든 걸 무색하게 하고 마법처럼 그 사람을 완벽한 나의 이상형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사랑에 빠졌다면, 이미 지닌 사랑을 '완성'시키려고 본인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부족함을 메꾸고 치유한다. 정말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모자람을 치유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정상적

영원의 빛

사람의 한 생은 다 거기서 거기다. 모두들 탄생에서 죽음에까지 이르는 길을 걸을 뿐이다. 중간 중간 누리고 체험하는 건 모두 다르지만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 삶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취해 멀리 나갔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나가지 못한 사람도 있고 지독한 환경 속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고 느껴지지만 어느새 훌쩍 나아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스스로 영원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영원이신 분에게 자신의 의지를 허락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모두 똑같은 자리에서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셈이다. 후고 챠베스도 갔고, 어제 우리 동네 아저씨 하나도 갔다. 두 사람은 이제 같은 위치에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지녀오던 것들을 모두, 심지어는 자기 몸뚱아리도 내어놓고 말이다. 그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사제를 부르지만 사제도 그걸 알아서 뭔가를 하는 게 아니다.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사제는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내면에 강인함을 가져다준다. 영원한 분에 대한 믿음,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 그것이 우리 신앙이 지닌 강점이다. 믿음으로 영원에 닿아있는 사람은 위의 깨달음을 모두 지니고 있기에 가난하든 부유하든 상관이 없다. 세상이 주는 것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유일한 관심사는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신을 찾고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자 한다. 때로는 엄청난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다가도 때로는 그 모든 걸 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는 곳으로도 가고 또 때로는 모든 사람에게 잊혀지기를 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투쟁이 안쓰러워질때는 영원의 빛을 들고 돌아온다. 하루 벌이에 고민하는 족쇄를 찬 이들에게 영원한 해방을 안겨주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이미 그 찾는 행위 자체로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없는 인간 존재라는 것은 전적인 암흑이기에 그 암흑이 스스로 빛을 찾을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기에 끊임없이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성인들도 이 생애 동안 기나긴 어두운 밤을 거친 후에야 죽음을 통해서 영원에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하여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명백히 보였다면 더이상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찾을 수가 없음에도 찾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를 '희망'하고 믿음 안에서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간절히 찾고 바라는 것은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두들 그 '예복'을 잘 준비하십시오. 찾지도 않다가 만나게 되어 기쁨이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이 되지 않도록 지금부터 갈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선

자선이 위선일 때 그 자선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자선이 의무일 때 그 자선은 자신에게 저항하도록 도와준다. 자선이 삶일 때 비로소 그 자선은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위선인 자선이라면 개나 줘버려라. 차라리 혀깨물고 죽는 게 낫겠다 싶지만, 가난한 이들을 대면하고 있는 나로서 과거의 나의 위선에 대한 반성과, 현재의 나 자신의 겸손에 대한 훈련과, 향후 내가 만날 이들의 필요 때문에 두 손을 벌려 그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자선을 펼치려는 여러분들께 청하노니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시라.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역겨울 때가 있다. 자선은 삶이어야 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오른손이 아픈데 왼손이 일하기 싫다고 반창고를 붙이지 않겠다면 여러분의 몸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지체인 셈이다. 자선은 보란듯이 할 것도 아니고,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것도 아니다. 자선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것이다. 

비정상 상태

우리가 매일 양식을 가져다 바치는 우리의 몸은 언젠가 파멸할 존재입니다. 아끼고 가꾸고 근육을 만들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이 땅의 육체라는 것에 마련하신 섭리입니다. 그렇다면 밥을 먹이지 말아야 할까요? 어차피 죽을 거면 쓸데없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건 여러분들도 이미 아는 사실입니다. 어떻게든 살아있는 동안은 살려야 합니다. 그것 또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당하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을 두고 마음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때가 되면 시기를 거르지 않고 먹일 것을 먹이면 됩니다. 그러면 육은 잠잠해지고 우리는 그렇게 활기를 회복한 육과 더불어 천상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죄책'은 이 사라지게 될 '육'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특히나 '성(性)'은 더욱 민감한 문제로 우리는 지나치게 거기에 집중해서 그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저 이 단어가 나오기만 해도 경계를 하게 되는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온 셈입니다. 언젠가는 파멸할 것에 매달려 있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먹는 걸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조금 과식을 해서 몸에 무리가 갈 정도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고서는 먹는 걸로 죄책을 느끼진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의지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여러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배경들 속에서 훈련 받습니다.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법'을 어겼다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법'을 배워 알기에 그에 상응하는 힘든 마음도 생겨나는 셈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기

사순5주 목요일 정말 많은 경우에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합니다. 무언가를 아는 것이 마치 나의 주머니를 불리기라도 하는 양 이런 저런 정보를 지니려고 하고 그것을 아는 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 속상해하고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곧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떠받친다고 생각하는 그 근본 바탕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누구보다도 확실히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드러난 것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증오와 박해였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는 교회 생활, 신앙 생활에 대해서 안다고 확신하며 그걸 바탕으로 누군가를 증오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내가 몇 년을 일해왔는데, 니가 하는 건 다 꽝이야. 해 봐도 안돼." "내가 이 본당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 아세요?" 과거의 경험과 자신의 직분… 교회 안에서 쌓여진 이런 것들은 하나의 도구이고 껍데기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을 두고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더 근접해 있다고 착각하고 타인들을 단죄하는 수많은 이들이 여전히 교회 안에 그득합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분이 얼마나 낮은 이들을 초대하고 싶어하고 그들과 가까이 살고 싶어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 누군가 진정한 '사랑'으로 일을 시작하려 할 때에 그들은 몰려들어 자신들이 쌓아놓은 상아탑이 무너질까 걱정을 하며 그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박해를 가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그 분을 알고 있고 오직 그 분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그 첫 시작점입니다. 왜냐하면

대화

만남을 통해서 관계는 시작이 되지만, 어떤 형태로든 '대화'가 없다면 그 관계는 와해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스치며 살아간다. 그저 버스에만 앉아 있어도 창밖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나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과 그저 스칠 수 있는 것은 '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사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정보의 주고받음은 대화라고 보기 힘들다. 인터넷 기사들을 보라, 우리는 그 기사와 대화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거기 기사를 남긴다고 해서 대중들과 대화하는 것도 아니다. 대화는 두 사람이 마주하고, 진솔한 것을 나누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아무리 가까이 산다고 해서 그 거리가 하등의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가까이 살면서 오히려 남처럼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 사람과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마음에 참여하는 셈이고, 당신의 영혼을 확장시키는 셈이다. 관계가 집착으로 바뀌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관계'마저도 소유하려고 들어서 한 사람의 마음이 나에게로 집중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그 사람을 온전하게 소유하려면 그 사람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 나에게 종속되는 순간 그의 특색은 사라져버리는 셈이다. '아 저 신부님은 나만 바라봐 주었으면…' '아 저 친구는 나만 생각해 주었으면…' 이런 바램은 인간적인 욕구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만 이런 바램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두라. 그럴 때에 당신은 그의 향을 즐길 수 있다. 그 꽃을 그 자리에 두라. 꺾는 순간 꽃은 시들기 시작한다. 진솔한 대화가 그리울때면 나는 '기도'를 권한다. 주절주절 정해진 양식을 외우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에게 나를 열어보이는 초자연적인 대

이메일

+ 찬미 예수성심 사랑하옵는 신부님!! 영명 축일을 축하합니다. 자~알 지내고 계시지요. 저도 자~알 있습니다. 아직 벗꽃이 터지지는 않았어요. 아마도 부활성야에 펑펑 팝콘처럼 .. 동막골의 옥수수처럼 터질것 같아요. 정이 많은 그곳의 사람들과 속정많은 우리 신부님. 북쪽에서는 더 인정넘치게 계실것 같아서 그리는 마음이 풍요롭습니다. 저는 머리허연 애기수녀라 부활바구니 꾸밀재료준비하고, 구상하면서 제 나이 연륜이라는 옷에 예쁜 핀을 꽃는듯한 삶을 살고있으니 어째 이런 축복이 내게 주어졌나 싶습니다. 그져 감사할 뿐입니다. 신부님. 그곳에선 내일이 축일이지만 오늘부터 축복속에 감사롭고, 기쁘고, 행복하시길 기도 합니다. 신부님. 축하합니다. 샬롬! 수녀님 감사합니다. ^^ 저는 새로운 본당에서 새로운 주임 신부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새로워서 천천히 조금씩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너무 무리하지 않으려구요. 무엇보다도 사제단 공동체의 일치와 성화 그리고 신자 공동체의 성화를 위해서 일할 생각입니다. 그러고보니 한국은 어느새 봄이네요. 여기에는 겨울이 다가오려고해서 그런지 선득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가을인 셈이지요. 남쪽 공동체는 마석진 신부의 주임 사제 취임식 말고는 가본 적이 없어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물론 가끔씩 소식을 주고받긴 하지만 지금 있는 본당 돌보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네요. 사람들은 여전히 길을 잃어 헤메고 있고 선과 악의 전쟁 사이에 놓인 줄도 모르는 채로 하루하루 '현실'에 목메어 살아가는 모습에 때로 미사때 드는 선교적인 사명감이 저를 불사르곤 한답니다. 결국 필요로 하는 건 '사랑'인데 제가 바라보는 교회는 그 큰 흐름을 모아서 이 하나의 움직임에 동화시키기보다는 여전히 많은 부분에 소진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더욱 힘을 모아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야겠지요. 결국에는 한 생을 살다가 갈 사람들인데 적어도 제 곁에 있는 동안에는 '사

온전함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온전함을 지니고 있었다 . 이든 저든 치우침이 없었다 . 설령 치우침이 있다 해도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었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었다 . 하느님은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 하지만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신 사람들이 이상한 흐름을 만들어 내었다 . 세상 조물들의 조화로움에서 벗어나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방향을 만들어 낸 것이다 .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조화되어 있던 모습을 인간들은 조금씩 파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 그들은 모으고 쌓으면서도 만족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엇나감을 채울 방책을 마련하셨다 . 그리고 그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흐름들 , 자신에게로 향하는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흐름들을 치유하도록 하셨다 . 그것은 바로 ' 사랑 ' 이었다 .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맡겨 죄인들을 용서하는 사랑 . 참으로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었다 . 이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인간들의 그릇된 흐름에 반하여 세상을 치유해나가기 시작했다 . 그런 기괴한 방향에 놀란 옛사람들 , 여전히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그들은 그런 이들을 모아들여 ' 성인 ' 이라 이름 붙이고 일상에서 동떨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 그들은 기괴한 마법같은 기적을 쓰게 되었고 군중들은 그런 기이한 일들에 환호했으며 실제 그들이 지녔던 사랑은 점점 잊혀져가게 되었다 . 진정한 거룩함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갓난쟁이를 등에 업고 양 손에 짐을 지고 가는 엄마의 사랑의 거룩함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가기

인간은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캄캄한 암흑 속을 거닐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하느님 탓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에게로 다가서는 건 전적으로 한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니까. 인간은 빛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거부감을 지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GOD, DIOS, DEUS, 하나님, 여호와, 야훼... 뭐든 표현하고 싶은대로 해도 좋다만 인간의 언어의 변덕에 그분이 따라 움직이시는 건 아니다. 인간은 그분의 빛을 찾아,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인간의 존재는 전적으로 암흑에 머물게 되고 길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다. 인간은 빛을 반사하고 투과시킬 순 있어도 스스로 빛이 되거나 참된 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주교나 특정 종교가 싫다는 사람을 이해하고 감싸 안을 순 있어도 절대자의 존재와 자신의 삶의 행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미망의 상태, 깨어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에 머무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저 가능한 곁에서 조용히 빛을 비추는 수 밖에... 그건 가족이건 절친이건 아무 상관이 없다. 한 사람이 깨어나는 건 인간의 피의 맺음이나 우정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전적으로 자신의 개인의 선택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도와줄 순 있어도 결코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제 팔은 제가 흔들어야 한다.

의로움과 믿음

성요셉 대축일 강론 옛날 의로움은 의로움이고 믿음은 한낱 믿음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을 그닥 신경쓰지 않았고 의로움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한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라 날카로운 칼날일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로움은 오직 하느님만이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칼날로 서로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의로움의 그 날카로운 칼날로 서로의 가슴을 사정없이 도려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 중의 하나였고, 부하의 여인을 탐한 다윗의 계략도 마찬가지였으며, 빌라도의 재판도 그랬고, 복음서 내내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기본 노선이기도 했습니다. 의로움, 진정한 의로움은 오직 하느님만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내세운 의로움은 사실 전혀 의로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지혜가 자신들이 찾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찾아둔 정밀함일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로움은 하느님의 더할나위없는 지혜와 사랑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믿음이 힘을 발휘할 시기가 되어 사람들은 의로움을 추구하기보다 믿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진정한 의로움을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 의로움을 배워 알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날카로움을 마리아에게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의 진정한 의로움으로 그녀를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믿음 안에서 마리아를 아내로 맏아들인 그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드높이 들어올려진 아내와 신의 외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게 됩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자신의 의로움'이 최고라고 착각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으니 이들은 여전히 타인에게 사정없이 칼날을 휘두릅니다. 믿음의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그 하찮은 칼날을 내려두고 하느님의 참된 의로움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할 시기가 되었습

마음의 컵

사람마다 손에 컵을 하나씩 들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앞에는 그 컵에 음료를 따라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누구는 컵만한 병을 들고 있고, 누구는 조금 더 큰 주전자를, 또 다른 누구는 음료 공장에서 최종 생산물이 나오는 호스를 들고 있다. 사람들이 지닌 컵이 작을 때에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모두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사람이 지닌 컵이 점점 더 커질수록 결과는 영 딴판이 된다. 컵이 양동이만해졌을 때에는 이미 작음 음료수병을 들고 있는 사람의 음료수가 끝나 버리고 만다. 컵이 큰 대야만해지면 주전자를 들고 있던 사람의 음료도 바닥이 나 버린다. 하지만 컵이 수영장 크기가 되었을 때에는 오직 호스를 들고 있는 사람의 음료만이 그 수영장을 채우고도 넘치게 될 뿐이다. 영적인 삶을 시작하는 초심자들에게 모든 사람의 조언은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영적인 품이 넓어지면서부터는 심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미 손에 든 컵이 커져버려서 이런 저런 소소한 것들로는 목마름을 채울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결국 우리가 다가서야 할 분은 '하느님' 뿐이게 된다. 그 전까지 우리가 의지해 오던 많은 것들을 때가 되면 과감히 버릴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상태란 어떤 것일까? 더 이상 '컵'을 들고 있지 않는 상태가 우리의 최종적인 상태일 것이다. 뭔가를 더 이상 받는 상태가 아닌, 호스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리는 상태. 당신께서 원하실 때면 언제나 당신의 은총이 나를 통해 흘러내리게 두는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렇게 되겠다고 작정해서는 안된다. 아직은 우리가 가진 컵에 음료를 받을 시기이고, 그 컵을 늘릴 시기이다. 우리가 호스가 되는가 마는가는 사실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땅에 숨을 쉬고 살아가는 동안 호스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영광

사순4주 목요일 우리는 내심 누군가의 지지와 응원을 기다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의 사랑을 늘 기다려왔습니다. 부모가 이런 걸 잘 한다고 하면 그걸 더 잘 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저런 걸 싫다고 하면 그걸 하지 않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나아가서는 친구들이 이런 걸 잘 한다고 추켜 세우면 그걸 더 잘 하려고 했고 저런 건 왜 하느냐고 하면 그런 걸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사회에 들어가서는 직장 동료들과 상사들의 의견이 중요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람들의 의견에 맡겨 왔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우리 내면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잃어갔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을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그 끝은 도저히 보이지를 않고 언제나 우리는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남는 기분입니다. 꽤나 열심히 달린 것 같은데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정해놓은 것'은 진정 우리가 되어야 할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약삭빠르게 제 몫을 챙기는 사람을 현명하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은 1등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남들을 짓밟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합니다. 세상은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구입해야 하며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사실 '환상'입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정 나의 내면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정해놓으신 길은 세상이 가리키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 되면 됩니다. 우리는 '슈퍼맨'이 될 필요가 없고, '빌 게이츠'

스스로를 단죄할 용기

사순5주 주일 타인을 심판하려는 자는  그 심판의 척도를 내면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척도로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 예컨대 자신의 자녀가 거짓말을 한다며 그 자녀를 때리는 부모는 '거짓말엔 폭력을 겸한 징벌'이라는 구도가 내면에 있는 셈이고 늘 그 기준에 스스로를 비춰 보아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더욱 엄한 규정을 들이댈수록 우리 스스로의 내면에도 더욱 엄한 규정을 쌓아놓는 셈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명백히' 죄를 지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여인을 자신들의 법에 따라 처벌하기를 원합니다.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그 법이 틀어박혀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작업은, 그 내면에 틀어박힌 법에 각자 자신을 비춰보게 한 것 뿐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단죄할 용기를 지닌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갔고, 오직 유일하게 죄 없으시고 따라서 죄를 심판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이길래 내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누구이길래 지금 그를 미워합니까? 대단한 용기입니다. 당신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저지를 불법을 참아 견딜 수 없다면, 지금 당신이 미움으로 저지르는 불법 역시도 본인 스스로 심판하는 꼴입니다.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그럴 용기가 없어서 차마 누군가를 단죄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느님에게 맡기고 당장은 그를 용서해야 하겠습니다. 아, 표현을 잘못했군요. 그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입니다. 가장 무거운 망치를 들고 내 손등을 내리찍을 무모함은 저에게는 없습니다. 망치를 솜방망이로 바꾸던지, 아니면 아예 칠 생각을

마음의 이끌림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해 있어.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 마음의 방향대로 말하고 실천하게 마련이야. 세상적인 무언가에 끌린 사람은 제 아무리 착한 척을 하려고 해도 언젠가는 그 끌리는 마음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지. 반대로 하느님에게 끌린 사람은 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엔 돌아오게 되어 있어. 이 근본의 이끌림을 돌이켜 살피고 엇나간 방향을 수정하는 것이 묵상이야. 잘 나아가 있는 방향 그 자체를 즐기는 건 관상이라 할 수 있겠지. 이 방향을 굳히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들이 염경기도와 교회 안의 여러 예식들인 셈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근본 방향이 어긋나 있는데도 교회 안의 것들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근본 방향이 어긋나 있는데 관상을 한다는 건 얼토당토 않은 말이구 말야. 묵상을 한답시고 엇나간 방향을 더 굳히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니까. 넌 무엇을 바라니? 정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거니? 아니면 네 뜻이 하느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거니? 네가 미워하는 그 일과 사람이 정말 네 뜻대로 사라지기를 바라는거야? 아니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네가 그 일과 사람을 껴안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거니? 문제는 사라지지 않아, 절대로. 그리고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구 말이지. 네 마음의 근본에 집중해. 그리고 그 방향을 저 높은 곳으로, 하느님께로 들어높이길 바래. 결국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이끌리는 곳으로 매일매일 나아가는 셈이니까. 방향만 잘 잡아 놓으면 세상 안에서 실패한다 해도 괜찮아. 그 실패는 오히려 내가 정해 놓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추진제가 될테니 말야. 사랑하도록 해. 네 주변의 모든 것들을 껴안으려고 노력해봐. 인생이 몇 배는 더 아름다울거다 아마.  <디지털 시대의 성인>

무엇이 병인가?

사순4주 화요일 무엇이 병인가? 몸이 죽도록 아픈 건 분명한 병의 표지이고 거기에는 이변의 여지가 없다. 아픈 이는 방문하고 보살펴주면 된다. 문명화라는 움직임은 '효율성'과 그 뒤에 감춰진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이 병자들을 모조리 병원이라는 시설에 수용했다. 그 덕에 우리 주위의 집에서 아픈 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병이 사라진 건 아니다. 현대인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마비에 시달리고 있고 오직 "물이 출렁이는" 것과 같은 얼마 되지 않는 신비한 일로서만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착각하고 일생을 불행 속에서 엮어간다. 이는 안락과 성공이라는 신화이다. 언젠가 성공을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이 마음의 공허함과 어두움이 사라질거라는 착각 속에서 마음이 마비된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마음은 갈수록 더 원래 궤도에서 멀어져만 가는 느낌인 것을... 그래서 예수님이 다가오신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웃기는 질문 "건강해지고 싶으냐?" 참 당황스럽다. 치유가 당연한 것 같은데 당연하지 않은 이 상황. 예수님은 우리에게 치유의 원의를 갖고 있는지 물으신다. 왜냐면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입으로 예수님을 찾지만 실제로 그분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심지어는 만나기를 싫어한다. 고집 피우는 아이를 보았는가? 자기가 하려는 게 나쁜 것인지를 알면서도 하려는 아이. 어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자신을 좀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워하는 어른. 탐욕의 결과는 파멸 뿐이거늘 늘 필요 이상을 원하는 이들... 예수님은 물으신다. 건강해지고 싶으냐고... 그리고 그 응답을 들으시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환자가 있었다. 육의 병을 지닌 환자와 마음이 마비된 바리사이들. 하지만 기적을 통해서도 마음이 마비된 이들은 나을 수가 없었다. 현대의 마음병 환자들이여, 당신들은 진정 건강해지고 싶은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

성경을 읽는다는 의미

사순4주 목요일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친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의심해본 적이 없고 그분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친교를 나누셨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배반'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분주히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하느님과 여전히 친한 이들이 하느님과의 친교와 그분에 대한 배반의 역사, 그리고 나아가 그분의 구원 계획을 책으로 엮어 내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이 책은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이 '성경'의 근본 목적은 사람들이 다시 하느님과의 친교에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웃기는 건 이렇게 한 번 책으로 엮어진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는 다시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 읽혀지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작업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는 절대로 손도 대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일부 사람들은 그 책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낱말 하나하나에서 그 모든 뜻을 풀어내어 연구한 뒤에는 '논문'을 제출하고는 뿌듯해 하였습니다. 닫혀 있는 깡통을 따라고 깡통따개를 사다 줬더니 '깡통따개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논문을 쓰고 여전히 깡통을 열지 못하고 있는 헛똑똑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진짜 삶을 잃어버린 채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제라든지, 신학자라든지, 수도자나 평신도와 같은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는 허상일 따름입니다. 각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필요한 노력을 해 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연구한답시고 그분을 더 멀리 떨어뜨려놓는 것만 같습니다. "자기들끼리 영광

진짜 삶의 자리

사순4주 주일 둘째아들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처음에 유산을 받아 나간 그 삶은 헛된 망상을 쫓는 길이었지만 덕분에 뉘우침을 얻었고 오히려 삶의 본질에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앞으로는 얻은 삶을 기쁘게 살아갈 것이다. 첫째아들은 타인의 삶을 살아왔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늘 아버지의 처신을 보고 살아온 셈이다. 그는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나아가 진짜 삶을 얻은 동생을 질투어린 시선, 증오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산들 바람이 불어와 코를 간지를 때에 기분이 좋아질 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타인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고 환호해 줘야 비로소 기분이 좋아지는 이들 그들은 '타인의 인정'이라는 약물에 쩔어있는 사람들이다. 왜 그들의 시선에 당신의 삶을 맡기는가? 당신의 삶의 본질로 돌아오라. 아침에 침상에서 깨어나 당연히 좋을 기분을 왜 걱정과 근심으로 망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참으로 슬픈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죽음 앞에서 필요한 것

또 한 번의 장례를 다녀오면서 사람들에게 '지금 서로 사랑하라'고 '지금 서로 용서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죽은 이를 눈 앞에 두면 누구나 한 번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토록 애쓰던 일이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인가? 돈, 명예, 지위... 이 모든 것은 내가 지닌 몸뚱아리가 사라지듯 나에게서 치워지게 되고 나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영혼' 하나만 쥐고 하느님 앞에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소중한지는 분명한거다. 그건 사랑이다. 나는 얼마나 사랑했던가... 나는 얼마나 용서했던가... 이 두 가지 말고는 별다른 게 생각나지 않는다. 타국에 나가 사는 게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현란한 말을 잘 못하게 되어서 그 반대로 생각이 참으로 단순해진다는 거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결국엔 이 두 가지만 강조하게 된다. 서로 사랑하라고, 그리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라고.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고 용서에 관해서 한 번 더 강조하셨겠는가 말이다. 용서가 참으로 시급하다.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생각

창 밖으로 차가 지나간다. 그 소리가 괜히 신경이 거슬린다. 하지만 상상해보자. 내가 평소에 아끼던 교리교사 하나가 있는데, 큰길 건너편에서 사고를 당했다. 이런 저런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는데 별로 일면식도 없던 한 친척이 지나가는 길에 그 아이를 보고 병원까지 태워주게 되었다. 당신이 듣고있는 차소리가 바로 그 차가 지나가는 소리라면? 결국은 생각에 달린 문제이다. 그리고 생각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내가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도,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상대를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가가 손을 맞잡는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캄캄한 밤에 퍼지는 발자국 소리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연인을 상상하고 누군가는 강도를 상상한다면 발소리는 바뀌지 않지만 그 두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정반대가 되어 버린다. 결국은 생각에 달린 문제인 셈이다. 일이 엉망으로 되어간다 싶을 때에 오히려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일에서 도리어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생각에 달린 문제다. 그리고 그 생각의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다. 

부족하게 채워지는 욕구

인간이 움직이는 이유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욕구는 단 한번도 '충만히' 채워져본 적이 없다. 언제나 뭔가 모자란 느낌이다. 사탄은 이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유혹해왔다. 처음에는 책상 하나를 가지기를 원했는데, 책상이 들어서고 나니 책상 위의 램프가 부족한 느낌이다. 램프를 사면 연필꽂이가 갖고 싶고, 그 다음엔 이쁜 연필들이 갖고 싶은 식이다. 우리가 이런 일련의 욕구들의 행진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사물들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져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입으로는 실제의 밥을 집어넣고 있으면서 마음은 더 새로운 맛과 향을 상상하며 지금의 밥에 실망하는 식이다. 하느님은 실제를 만드셨고, 실제를 살아가게 하신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 만이 있을 뿐이고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해질 것이다. 우리에게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바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현대의 세상에서는 '비워냄'으로 더 잘 이루어진다. 우리는 지나치게 욕구가 많다. 세상의 식량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에는 충분하지만 탐욕스런 이의 욕구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따름이다. 나아가서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욕구를 지녀야 한다. 거룩함에로의 욕구, 보다 참된 삶에로의 욕구, 우리가 익히 아는 교리적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부활에로의 욕구이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이런 류의 욕구에 새로이 눈 뜬 사람으로서 때로는 현세에서 정당하게 욕구할 만한 것조차도 양보하는 이들이다. 내가 마땅히 누릴 나의 노력의 결과물을 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양보하는 사람들, 내가 마땅히 누릴 정서적 안정감을 더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 이런 이들이 죄인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욕구하는가? 그 욕구

그들과 나, 그리고 하느님

사람들이 다가온다. 그들은 원하는 게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나에게 있다면 주면 된다. 참으로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슨 일을 하고자 여기 있는가? 나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걸 건네주기 위해서 여기 있는가?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나는 사제다. 그들에게 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어 주어야 하고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하느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것을 취한 다음에는 다시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것을 취하기까지의 원의가 살아있는 동안 그들의 그 원의로 그들을 하느님 앞에 초대해야 한다. 그래 그것이 나의 할 일이다. 하느님은 그들의 영혼을 원하신다. 그들이 당신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하기를 바라신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이야기 따위는 들을 생각조차 않으니 그들의 다른 원의가 살아있는 동안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내가 그들에게 다가서야 한다. 그들은 원래부터 관심이 없으니 내가 그들에게 다가서서 그들이 원하는 걸 내어 주어야 한다. 아니지, 그들은 자신들이 뭘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그것부터 가르쳐야겠지. 지금 원하는 것이 실은 원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것이고 오히려 진정 원해야 할 것은 이미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과연 나부터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고, 그리고 그들도 이 삶에로 초대하여야 한다. 결국 우리가 잃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영원 안에 우리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위로부터 난 이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흙에서 온 이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뿐이다. 

시험

사순3주 목요일 한 사람이 진실된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분별해 내고자 애를 씁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한다 싶기는 한데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살펴보고 싶습니다. 이들이 택한 방법은 '표징'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입을 다물지 못할 어떤 신기한 일을 해내어 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으니 이런 따위의 일로는 한 사람의 진정성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진실됨은 이상한 이적 따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마술사들도 이상한 쇼를 하지만 그들이 우리가 아무리 알아내려고 해도 알지 못할 이상한 쇼를 보여준다고 한들 우리가 그 마술사를 삶의 본보기로 믿고 따르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분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한 사람의 진정성을 무엇을 믿고 분별해 내어야 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이를 분별할 능력을 우리 안에 주셨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 안에 숨어있는 양심과 나아가 우리가 지닌 성령입니다. 한 사람이 가르치는 바가 먼저 양심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절대로 따라서는 안됩니다. 누군가가 잘못하면 때려야 한다든지 마약을 조금 실험해 보는 것이 좋다든지 하는 것들은 우리가 충분히 '맑은' 양심으로 분별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입니다. 왜냐면 누군가는 말로서 다른 이들을 충분히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삶을 통해서는 누군가를 속일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를 속이고자 작정한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그의 본색이 삶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가 따라야 할 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두고 다른 모델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위대한 유적지를 눈 앞에 두고 그것을 본뜬 미니어쳐에 정신이 팔려 있는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기

"신부님, 내 걸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줘야해요?" 지난 주일 저녁, 한 달에 한 번 있는 한국 신자 모임에서 교리를 마치면서 한 청년이 나에게 물은 질문이다. "음…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수님은 그러셨지.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마라.'라고." "그 친구가 나보다 더 잘 사는데도요?" "음, 한 번 생각을 해 보자꾸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때에는 상황을 잘 분별해야 해. 먼저 나 자신에 관한 건데, 내가 주지 않으려는 이유가 그 물건이 아까운 마음에 그런 거라면 차라리 줘 버리는 게 나아. 하지만 다른 경우에 나는 이미 내가 가진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고, 더군다나 그 친구가 자꾸만 달라고 하는 것이 진짜 필요로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그 사실을 알고 그것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에서 주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낫지." "네…" "하지만 우리는 완성되지 않은 존재라는 걸 잊지 말거라. 이든 저든 너는 하나의 결정을 하게 될 거고, 그리고 그 결정을 실행하게 될거야. 그리고 나서는 마음을 잘 살펴봐. 네 마음이 즉 네 양심이 네가 행한 것의 반대의 일을 했어야 했다고 계속 내면에서 소리치면서 아픔이 느껴지면 다음 번에는 그 반대의 일을 하면 돼. 하지만 그렇지 않고 평안하다면 네가 한 일을 받아들이고 살아가. 우리는 이렇게 많은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거니까. 때로는 쓰러져도 괜찮아." 이 말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주임 사제로서 순간순간 다가오는 모든 경우에 나는 '완벽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실수하고 넘어지면서 하나씩 하나씩 보완해 나가는 셈이다. 물론 때로 내가 하는 그 실수가 그 일을 당면한 당사자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하겠지만 한 사제가 그나마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려고 노력하

어둠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학창 시절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부모님은 우리에게 나름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세상 그 어느 부모도 자기 자녀가 얻어 터지는데 분통이 터지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느님이란 부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철 없는 존재로 살아가며 우리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당했듯이 이런 저런 곤란한 일들에 시달립니다. 헌데 우리의 부모님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어릴 적 배웠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어둠에 또 다른 어둠으로 맞서지 말고 그 어두움을 더 큰 사랑으로 감싸안으라는 색다른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님의 뜻을 가장 잘 아신 외아들이셨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은 곧 부모님의 뜻을 고스란히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분이 죄인들의 모함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십니다. 다른 방법이 왜 없었을까요? 그분은 수천명의 천사를 불러 반항하는 인간들의 목을 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셨고,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동네 아이가 내 오른뺨을 치는데 그걸 참아받고 나아가서 그 아이를 사랑하라는 이상한 가르침… 죄를 짓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구해 주시려는 예수님,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수십년간 병을 앓아온 이를 돌보시는 예수님, 자신을 은전 20냥에 팔아 넘기려는 유다의 계획을 알고도 그가 그 일을 하도록 두시는 예수님, 우리는 아직도 그분의 참된 사랑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있지 못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려면 서로의 모난 부분을 상대측에서 감수해야 합니다. 이 일치의 신비를 모르는 이들은 그저 모난 부분을 잘라내려고만 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진정 잘라내어야 할 죄와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정의 어김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돌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