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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14의 게시물 표시

식별

식별을 왜 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성을 찾아 나아가면서 식별에 대한 지식에 눈을 뜨고는 그 ‘지식’만을 훔쳐다가 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지혜로운 이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원칙을 망각한 채로 영적 지식만을 끌어당기려 하니 결과는 오히려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식별은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별의 지식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고 이런 저런 판단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식별을 통해서 우리가 내어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도움을 제공하고, 그리고 공연한 노력을 허비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이가 필요한 도움을 얻게 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식별은 자신의 능력치를 높여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스스로 겸손한 자리에 서게 도와줍니다. 하느님 앞의 위치를 올바로 깨닫고 모든 이에게는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애덕의 행위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별을 통해서 마치 거지에게 적선하듯이 지혜가 없는 사람을 다루자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받아들이는 이들의 자유가 배제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식별의 능력을 타인을 재단하고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쓰려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식별을 할 자격 자체를 잃는 셈이고, 그에게는 진정한 지혜가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식별은 참된 사랑의 도구입니다. 식별은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세 종류의 사람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얽혀 사는 사람. 생의 마지막까지의 미래만 생각하는 사람. 영원을 오늘 살아가는 사람. 과거에 얽혀 사는 사람은 더이상은 바뀌지 않을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그 음악이 최악의 음악일 때에는 그는 모든 생을 최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셈이지요. 생의 마지막까지의 미래만 생각하는 사람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따스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손에 쥐어진 것만을 들여다보며 죽음 직전까지의 미래만을 계획하는 사람이니 그 마음에 여유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영원을 오늘 살아가는 사람은 하루하루를 영원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오늘을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현재 안에는 영원이 이미 깃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이들

자신 안에 행복이 없는 사람들은 타인들의 행복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마치 큰 돌을 들어올리면 그 안에 숨어있던 벌레들이 다시 햇빛을 피하고 어둠을 찾아 들어가는 것과 같이 스스로 불행을 조장하는 자들은 행복이 다가와도 피해 버리고 마는 셈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행복한 이들을 보면 조롱하고 싶어하고 그의 행복을 파괴하고 싶어합니다. 해결책이라고 한다면 스스로의 행복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타인의 행복을 파괴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저들이 더욱 불행하니 나의 불행은 그나마 행복이라고 자위하는 것이지요. 참으로 어리석은 행복의 법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꼬투리잡기입니다. 말 하나, 행동 하나에 모두 꼬투리를 잡고 늘어집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그들 앞에서 말과 행동을 삼가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의와 진실마저도 그들 앞에서는 비난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않는 법이지요. 타인이 행복할 때에 그 행복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행동 자체로 우리는 그와 일치해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자들의 또다른 특징은 시기입니다. 이들은 다른 이들의 좋은 것들을 시샘하느라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 안에 그런 역량을 개발할 여유를 갖지는 못한 채로 타인의 장점을 파괴하려고 드는 이들이지요. 뭔가 좋은 글이나 그림을 보고도 99%의 아름다움 구석에 있는 1%의 흠을 찾아내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마음은 이미 짐작할 만 하지요. 그래서 이들을 대할 때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여러가지 것들을 둘러서 말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깨달을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에 깨달아서 빛을 향해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진작에 저버린 이들입니다.

구속된 지혜

- 일에 있어서 시간이 부족해 허덕인다. -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라. 시간의 우위를 정하고 관리하라. 과연 이 도식은 맞는 걸까요? 아니면 보다 깊은 차원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 하는 걸까요? 혹시 우리는 부족하지 않은 시간을 부족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도 안되는 현실을 내어주실리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충분하고 넉넉하게 주셨고 우리가 알아서 쓰도록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모든 삶의 단편들은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쓰여지고 있는 걸까요? 시간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은 하루의 노동과 휴식과 그 밖의 활동에 적합한 시간으로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시간의 효율적 배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일하는 데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좀 더 시간을 ‘일에 투자할 수 있도록’ 종용합니다. 세상의 처세술 가운데에는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셈이지요. 하느님은 분명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탐욕에 물든 지혜는 더이상 지혜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참된 지혜는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때에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지혜를 쥐어짜보아야 노예의 속성에서 나오는 지혜밖에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자녀가 지니는 자유의 특성 안에서 참된 지혜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지요.

보다 심각한 이들

어른들 미사에서 주보와 깨끗한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자, 이 주보에 점을 찍으면 찾기 힘들 거예요. 이런 저런 글자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이 하얀 종이에는 점을 찍으면 찾기가 쉽겠지요? 이처럼 우리의 마음도 비슷해요. 차라리 뚜렷하게 드러나는 게 있으면 찾기 쉽지만 이것저것 희미하게 섞여 있으면 찾기가 힘들어지지요. 그래서 어찌보면 공공연한 죄인들보다 더 위험한 상태에 있는 건 바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인지도 몰라요. 적지 않은 이들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흐릿해진 양심으로 무엇이 죄인지 별로 의식도 않고 살아가요. 그저 주일미사 나오고 판공 보고 해야 할 기본적인 걸 하고 있으니 별다른 죄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면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분노, 불의, 악의, 시기, 탐욕과 같은 것은 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고 살아가지요. 복음에는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늘 나라에 간다고 해요. 왜냐면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뚜렷이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실제적으로 더 위험한 이들은 바로 우리 메마른 가톨릭 신자들이예요.”

어제 혼배 미사를 마치고 밖에 나와서 신혼부부에게 인사를 하면서 이따가 집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농담으로 ‘맥주 한잔 해야지요?’ 라고 하니 옆에 있던 꼬마가 이렇게 제 말에 대꾸를 합니다. - 신부님, 술 마시지 말라고 가르쳤잖아요. - 내가? 아니야 얘야. 신부님은 술을 과하게 먹지 말라고 가르쳤어. 오늘 미사때에 이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이 ‘와~!’ 하고 웃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좋게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은 제 자리가 있지요. 저도 사제관에서 술을 마십니다. 저도 파세냐(볼리비아 맥주 이름) 한 박스 집에 가지고 있으면서 쉬고 싶을 때에 한 캔씩, 두 캔씩 마시곤 합니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 술을 마실 때 일어납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언뜻 모든 것을 잊고 문제가 사라지는 기분이지만 실제로는 문제를 더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지요. 건강도 문제입니다. 간기능에는 한계가 있는데 알콜을 쏟아 부으면 그게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지요. 결국에는 그 해독되지 않은 것들이 몸 안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키는 겁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제 목적에 맞게 좋게 만드셨습니다. 섹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부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요. 하지만 가정을 내버려두고 다른 관계를 찾아 나설 때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축구는 스포츠이지요. 그 자체로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장이 가정의 정당한 요구를 내팽개치고 죽자고 축구만 하러 다니면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좋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을 망치는 것은 우리들이지요.”

연륜

나이라는 것은 참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 때에는 20대 중반이던 선생님들이 그렇게나 커 보였는데 이제 40대가 가까워지니 20대 청년들은 솜털이 보숭보숭한 사람으로 느껴지니 말이지요. 아마도 많은 어르신들이 연륜을 더해가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의견을 지니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이라는 것이 단순히 살아온 년도수의 합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지혜보다는 오히려 더욱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더욱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노년의 모습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연륜’이라는 것이 단순히 살아온 햇수의 합이 아니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매년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실은 돌고 돌면서 점점 더 깊이 박히는 나사못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삶을 살아가다보면 결국 전혀 연륜이 없는 애어른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오직 하느님께로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연륜을 쌓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매 순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그분의 뜻을 찾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연륜’을 쌓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저 나이만 먹어가는 이들, 그래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젊음의 화려함도 잃어가게 되면서 성질이 더욱 괴팍해지는 이들이 되지 않도록 미리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메니큐어를 바르던 그 이쁜 손은 주름지고 관절이 튀어나오게 되고, 온갖 분을 바르던 그 얼굴도 쭈글쭈글해지며, 건장하던 근육들도 늘어 처지는 것이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가끔 70이 되어서도 근육을 유지하겠다며 헬스를 하는 할아버지는 뉴스 특종의 기사에서나 만날 수 있을 뿐이고 호기심의 대상이지 그들의 건장한 몸을 보면서 20대 처자가 사랑에 빠질리는 만무합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노력일 뿐이지요. 연륜을 쌓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규정

지난 번 반미사를 드릴 때였습니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참석자들을 둘러보고 ‘오늘 미사는 모두가 함께 조용히 앉아서 드릴 거예요.’ 라고 하고는 앉아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미사가 끝나자 본당의 열심한 청년이 다가와서 묻습니다. - 신부님, 앉아서 미사를 드려도 되나요? - 왜? 서지 않으면 죄라도 짓는 건가? - 음, 서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 아닌가요? - 하하하, 사랑으로 하는 일에는 자유로움이 있는 법이야. 만일 내가 ‘거짓말을 합시다.’라고 한다면 자네는 다가와서 나에게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나를 고쳐 주어야 할 의무가 있어. 하지만 양심에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는 일이라면 그건 상황에 따라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일이지. 많은 이들은 법과 질서를 따집니다. 하지만 그것을 따져서 더욱 하느님의 뜻에 다가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세운 규정에 종속되어 살아가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심하게는 상대의 흠을 잡아내기 위해서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고, 이삭을 뜯어먹고,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어울려 지낸 것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셨기에 오히려 법의 근본을 완성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난의 근거가 되는 셈이었지요. ‘금육에 고기를 먹어도 되나요?’ 라는 질문을 자주 듣게 됩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입에 고기가 들어가나 안들어가나를 지켜보고 계실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십시오. 아마도 하느님은 고기 대신에 더욱 비싼 회를 먹으면서 금육의 본질적인 의미를 망쳐버리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들어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 21,31-32) 날이 흐릿할 때에 벽에 마주서서 손바닥을 올려보면 그림자고 빛이고의 경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빛이 강렬할 때에 손바닥을 올리면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뚜렷해집니다. 흐릿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내면에 그닥 드러나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가슴을 찌르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면 자신의 어두운 삶에 아픔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반면,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스스로 별달리 잘못한게 없다고 굳게 믿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어두움을 더욱 굳혀가는 셈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나 의롭고 떳떳할까요? 주일미사를 나오고 때맞춰 판공을 본다는 것이 그렇게나 하느님 앞에 떳떳한 일일까요? 혹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지은 것만 생각하고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죄는 아예 고려의 대상에도 넣지 않는 건 아닐런지요?

단식

- 신부님, 단식을 하려고 하는데 얼마나 해야 하나요? - 네? 얼마나 하느냐니요? - 아니, 정해진 법이 있을 거 아니예요. 얼마를 하라던지 며칠을 하라던지. - 하하하, 원하시는 만큼 하세요. - 네? 그럼 정해진 게 없다는 말인가요? - 뭐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 뭐예요 신부님. 무성의하게. - 그게 아니예요. 무성의한 건 오히려 당신이지요. 왜냐면 당신은 하느님 앞에 내어 드리려는 희생을 양으로 재어 드리려고 하니까요. - ??? - 날마다 5끼를 먹어야 하는 사람이 2끼를 먹는 것과 1끼만 먹어도 배가 부른 사람이 2끼를 먹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만일 단식 규정에 2끼만 먹으라고 한다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희생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식은 죽 먹기인 셈이지요. 하느님은 내면을 바라보시는 분이시랍니다. 그러니 원하시는 만큼 하세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에게 바치고 싶은 만큼 하시라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식은 우리의 보다 가난한 이웃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잊지 마세요. 단순히 다이어트하겠노라는 속내를 숨기고 마치 의로운 행위인양 단식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세요. 정 단식이 힘들면 차라리 이웃에게 선을 베풀기만 해도 충분한 사랑의 행위가 되는 셈이예요. 아시겠어요? - 아…

위를 향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를 향한 만남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한 무리의 군중이 수도원을 방문을 갑니다. 그러면 그 수도원의 영성이 그들에게 전해질까요? 조용히 기도하는 수녀님들을 보면 ‘분위기’를 느낄 순 있지만 우리가 딱히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저 눈구경을 하러 가는 셈이지요. 많은 이들이 평면적 접근을 하면서 뭔가 들어높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지요. 아주 한적한 곳에 가서 좋은 말을 듣고 오면 뭔가 달라진다고 믿지만 이내 예전의 삶이 다시 반복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를 향해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루살렘을 찾아가고 순교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면과 삶이 일치되는 지점을 찾아서 나아가야 합니다. 순교자의 유해를 몸에 아무리 지니고 있어도 우리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명칭을 얻는다 하더라도 내 이웃 하나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제가 언급하는 모습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화려함과 거룩함을 찾아서 전 세계를 순방하지만 실상 위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나의 미천한 영성을 더욱 아래로 굳힐 뿐입니다. 화가 날 상황에서 인내를 발휘하는 것이 수도원을 1000번 방문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남는 것을 가난한 이를 위해서 내어주는 것이 순교자의 후손의 이름을 얻는 것보다 더 순교적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는 걸까요?

시간 의식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코헬렛 3,11) 성경 저자는 이미 깨닫고 있었습니다. 시간의 비밀을 말이지요.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강물이 흘러 지나가듯이 지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이라는 것은 ‘현재’ 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의아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실제로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서 형성된 의식일 뿐입니다. 모든 시간은 현재입니다. 그럼 ‘과거를 다시 꺼내올 수 있느냐?’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불러올 수 있느냐?’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 자체가 시간에 종속된 우리들의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실제 과거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미래도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는 고정된 기억의 형태로 존재하고, 미래는 지금의 씨앗의 형태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때가 되면 씨앗은 부화하고 그리고는 과거의 기억으로 넘어갈 뿐이지요. 사실 미사라는 것은 현재화 되고 있는 과거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의 미사 때마다 과거를 ‘되살리는’ 행위를 하는 것이지요. 바로 예수님의 수난의 시간을 되살려 다시 마음을 다잡고 그분의 수난에 동참할 결심을 하며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심어진 의식일 뿐입니다. 모든 시간은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가 됩니다. 바로 현재에 우리가 지닌 의지야말로 모든 시간을 쥐고 흔드는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의지라는 것은 사실 보잘것 없는 것입니다. 아주 미흡한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의지가 위대한 분의 의지를 담아낼 때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 이끌어가게 되지요. 우리는 하느님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하찮은 능력으로 그분의 위대함을 가

끌어들이기

낚시를 할 때에는 늘 떡밥을 뿌려두어 배고픈 물고기를 끌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드러내는 특성을 통해서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 모읍니다. 돈이 많고 잘 나누어준다는 특성을 드러내는 사람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을 끌어들입니다. 반면 고민 상담을 잘 한다는 특성을 지닌 사람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 들입니다. 뭐든지 받아주는 사람은 뭐든 쏟아내는 이들을 끌어들이지요. 그리고 호기심으로 다가왔다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어주지 않으면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우리가 지닌 것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누군가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모이는가가 중요하니까요. 인기 가수 주변에 모여드는 아이들은 그 가수의 명성과 외모가 스러지는 날이면 어느샌가 그 가수에게서 멀어지고 다른 가수를 향해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주변에 모여드는 이들은 그 본질부터 다릅니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고, 우리 스스로는 누구를 끌어들이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르치고 싶어서

설교가들 중에는 가르쳐야 해서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일을 하는 월급쟁이일 뿐이고, 후자는 일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월급쟁이는 일을 즐기는 사람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물론 세상 안에서는 대기업 월급쟁이가 중소기업 사장을 이기기도 합니다마는 내적인 면으로 언제나 승리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설교가는 눈에 드러나는 결과물이 좀처럼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이 뿌린 씨앗에서 싹이 트는가 아닌가 하는 결과를 훗날 모아볼 수 있다면 정말 가르치고 싶어한 것을 가르친 사람이 뿌린 씨앗에서 더 많은 싹이 터져 나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르치고 싶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생들 앞에 가서 신학 강좌를 여는 설교가는 멍청한 사람입니다. 사실 신학 강좌는 신학자들도 크게 즐기지 않습니다. 누구나 술자리, 편안한 자리, 진실한 대화가 있는 자리를 즐기지 학술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신학 강좌를 시간을 내어서 즐겨 들으려는 사람은 정말 공부에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없는 셈이지요. 설교가는 가르치고 싶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에게 가르침을 적용시켜야 하지요. 내가 재미가 없는 걸 다른 이에게 재미있게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나를 알고, 타인을 알고, 또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뜻 요구조건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이 세 가지는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주제입니다. 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이웃과 하느님을 알게 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나 자신의 상태와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알게 되며, 하느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결국 나와 이웃을 배우게 되지요.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설교가,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해야 해서 하는 일은 사실 열매가 없는 나무를 심는 행위입니다.

쓴 약

어린 아이는 사탕을 좋아하지 쓴 약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쓴 약을 먹이려면 사탕으로 유혹해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쓴 약의 의미를 찾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사탕으로라도 쓴 약을 조금씩 맛보고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면 결국에는 스스로 쓴 약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신앙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다. 저마다 다른 목적, 즉 사탕이 있게 마련이지요. 헌데 다른 여러 목적이라는 사탕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조금씩이라도 실천하는 이들은 결국 신앙의 본질로 다가서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쓰디쓴 십자가이지요. 사실 아무도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저 고통으로만 비춰질 뿐이지요. 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힘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십자가를 집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주변에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려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만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누구를 먹일 것인가?

원치 않는 아이에게 억지로 먹이려는 것보다 배고픈 아이에게 주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는 영적인 상황에서도 고스란히 적용이 됩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닙니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자신의 교만의 탑에 갇혀서 방어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받아들이려는 사람만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 것일까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사실 이런 고민은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가지지도 못했고, 가져도 내어줄 생각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 즉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신앙’이라는 보물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자면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신앙’을 내면에 간직한 이들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과연 모든 신앙인들이 ‘신앙’ 때문에 신앙인이 되는 걸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신앙생활’에 참여하는 것일 뿐일까요? 이는 각자가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장사를 위한 인맥을 얻기 위해서, 대학생으로서 딱히 다른 친교활동이 없어서, 청년이 결혼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서… 정말 수도없이 많은 이유들, 즉 핵심에 신앙이 아닌 다른 이유들이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합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에 동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보물을 맛보지 못한 신앙인들이 많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맛보기 싫어하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그들의 눈에는 고통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생활은 ‘최소’를 찾아 나섭니다. 즉 최소한의 것만을 이루는 신앙생활을 하지요. 주일미사를 나오는 것이 법이라 하니, ‘최소한’ 그것은 지키고, 재의 수요일에 단식을 하라고 하니 ‘최소한’ 그것은 지킵니다. 다행히 가톨릭 교회에는 십일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하니 ‘최소한’의 교무금으로 의무를 다하려

스펙 쌓으려는 신부?

사제직은 양들의 목자의 직분입니다. 그리고 사제 또한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구유의 어린 아기로 오셔서 사람들 안에 살아가셨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왕이시며, 결국 가장 미천한 죄인들이 매달리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신 분이십니다. 즉,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스펙을 쌓는다, 즉 경력을 쌓는다는 말은 어딘가에 전문화 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데 과연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보다 양들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스펙인지 아니면 높아지는 위치를 통해서 자신의 안위를 구하는 스펙인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기타를 열심히 연습하는 신부가 있다면 그것은 양들을 돌보는 데에 한 몫을 하기 위해서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만일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연습에 열중하는 사제가 있다면 이는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오르려는 탑은 자신의 본질적인 사제직분과는 전혀 상관없는 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높아지려면 가장 낮은 곳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낮아지는 것이 가장 높아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전문화된 세상에 발맞추어 전문화된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언뜻 맞는 말인 듯도 싶지만, 실제로 내면으로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무엇을 위한 스펙이고 무엇을 위한 전문화인지 성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스펙과 전문화가 교만의 탑에 스스로를 가두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목자에게는 양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이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카 9,9)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바램을 이루고야 맙니다. 예수님의 수난 동안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조롱하고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내고 말지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본모습을 알아서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의 평을 듣고 호기심에 만나고 싶어할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분을 조롱하고 떠나 보내고 말 것입니다. 좋은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면 눈 앞에 아무리 좋은 보물을 가져다 두어도 돌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진실을 알아보는 지혜가 없으면 눈 앞에 진리이신 분이 와 있어도 우리는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을 도대체 어떤 가치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는 걸까요? 이쁜 사람은 이쁜 것이 사실이지만, 과연 그 외적인 외모를 넘어서서 그 내면을 살필 지혜가 우리에게는 존재할까요? 과연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의 외적 화려함을 넘어서 그 안에 들어선 영적 공허를 읽어낼 수 있을까요? 아마 수많은 이들은 단순히 외적인 선에서 서로를 살피는 것으로 끝나 버리고 말거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내면으로 들어갈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더라도 그 외적인 의미만을 찾고는 실제의 예수님, 가난하고 낮은 곳에 머무는 예수님은 떠나 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눈 앞에 실존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을까요?

시련

모든 시련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시련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의 기쁨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리어 시련이 될 수도 있지요. 찬 물로 샤워를 하는 것에 길들고 나면 더운 물로 샤워하는 것이 도리어 곤욕이 될 수 있습니다. 은근한 녹차의 맛에 길들고 나면 강렬한 맛을 내는 탄산음료가 도리어 괴로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다가오는 시련들은 누군가에게는 도리어 기쁨이 될 수도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련 그 자체의 성격이 변하거나 달라지지는 않는 셈이지요. 이는 마치 중학생 수준의 영어 단어 쪽지 시험을 치는 것이 중학생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영문과 대학생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어 단어 시험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 단계 안에서 진보한 이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가 힘들다고 투덜대는 일의 성격 자체가 우리의 단계를 반증하는 셈입니다. 정말 별것 아닌 일인데도 투덜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고된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반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의 품이 달라져버린 셈이지요. 당장 필요한 무언가가 없어서 투덜대는 사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서 힘들고 괴로워 하는 사람… 그 모든 시련과 고통은 실제로는 나에게 다가오는 각각의 의미가 있는 것들입니다. 지혜로이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낮추기

많은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곤 합니다. 그래서 ‘겸손’의 가치를 얻지 못합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래서 보는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곤 합니다. 음속으로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면 음속을 감지할 수 있는 감각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면 그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분별력이 있을리가 없고 따라서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적어도 겸손을 가지고 있다면 한가지 장점은 그런 능력을 지닌 이들을 통해서 조금씩 배워나갈 수 있는 희망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능력도 없는데다가 겸손하지조차 못해서 능력 있는 이들이 가르쳐 주려는 것을 코웃음을 치며 넘기려다가는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이가 되고 맙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은 언제라도 잃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헌데 가끔씩 만나게 되는 교만한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선의를 짓밟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현명함으로 내세우는 이들입니다.

노년의 지혜

- 신부님, 노년층을 위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좋을까요? 한 나이든 자매가(사실은 할머니) 저에게 묻습니다. 노인들을 위한 강좌를 담당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도움을 요청해 왔지요. -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유소년기 동안 생존에 대한 법칙을 배우고, 청장년기 동안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하지요. 그리고 노년에 이르면 ‘지혜’를 구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를 현명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욱 탐욕스럽게 변해버리고 마는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제 자신의 삶의 지혜를 바탕으로 젊은이들을 이끌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인데 젊은이보다도 더 추하게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결국 스스로 얻어야 할 존경을 스스로 물리치는 꼴이 됩니다.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늙음’이라는 것을 주셨을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 누리던 것들을 차츰 잃어가면서 내면으로 성숙해지라고 주신 시기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노년에 이르면 ‘지혜’를 갈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면, 잠언과 지혜서에서 ‘지혜’에 관해서 설명하는 말을 다 찾아서 유심히 읽어보세요. 그러면 깨닫게 될 겁니다.

가족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 가족이라는 관계는 참으로 끈끈한 관계입니다.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머니라는 존재의 모태 속에서 길러져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지요. 그리고 그 순간에 첫 가족들을 만나게 되는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어머니이지요. 물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출생도 전에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거나, 출생하고 나서 아버지와 어머니 양자에게서 버림을 받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면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이도 저도 만나지 못하면 죽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실제로도 일어나는 일이지요. 그래서 단순히 피로 맺어진 관계가 가족의 모든 의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가족은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관계를 의미하지요. 적어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고, 함께 한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가족도 전부는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의미의 가족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가족’입니다. 이 가족은 서로의 내밀한 영혼을 공유하는 가족이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가족의 단계에 따라서 모든 가정은 진보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가족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마지막 단계의 가정을 이루지 못해서 서로 마음이 갈라져 있는 가정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엄청난 가족을 얻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가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진보

처음 그림이라는 것을 그릴 적에 저는 연필과 종이, 색연필과 크레용 정도 밖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여러가지 재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면서 도구의 필요성도 덩달아 늘어가게 된 것이지요. 연필의 종류가 그 강도에 따라서 서로 다르고 그 쓰여지는 감촉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만화를 그리는 데에는 여러가지 부수적인 재료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펜촉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비단 기성품으로 나온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쓸 수도 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림에 대한 관심이 그 세부적인 면에 대한 지식을 더욱 늘려가게 만든 셈이지요. 영성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좋고 나쁜 것’만을 구분할 줄 알 뿐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좋은 것은 왜 좋고, 나쁜 것은 왜 나쁜지를 더욱 세밀하게 구분하게 되지요.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왜 그렇게 형성되어 있는지도 조금씩 이해해가게 됩니다. 사람은 왜 분노하고, 슬퍼하며, 참된 기쁨이라는 것이 왜 육체의 쾌감과는 다른 성질의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분류를 인식하고 그것을 체험하기 시작하게 되면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시작되고, 나아가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전에는 그저 껍데기로만 세상을 인식하다가 점차 그 내면에 숨겨진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세상을 순진 무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 본질을 꿰뚫어보게 되고, 이전에 가치를 두던 것에서 마음을 멀리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얼마 간은 이상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지요. 이러저러한 일에 기뻐하고 슬퍼해야 하는데 이 사람은 크게 반응이 없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보는 일들에 더욱 비중을 두고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세상 사람들 사이에

우리는 말이 많은 이들을 쉽게 믿습니다. 반면 신중한 사람을 의심하곤 하지요. 바로 옆에서 줄기차게 같은 거짓말을 100번을 반복하면 없던 사실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진실한 사람은 함부로 말하는 것을 삼가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무시하고 쉽게 속아 넘어가곤 합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으면서도 자신이 처한 본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속는 줄 알고 속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매스 미디어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인 정보를 굳게 믿어 버리고 말지요. 우리는 말하는 이의 근본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는가에 대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행동하지요. 그래서 진리의 말은 너무나 쉽고 단순하고 명백하지만, 너무나 수식어가 없어서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는 이 간단한 말 한마디를 믿지 못해서 세상에다가 우리의 사랑을 내어맡기고 맙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행복에 겨워 하다가 결국 그 쓰디쓴 맛을 보고 나서야 현실을 직시하게 되지요. 하지만 때로는 너무 늦게 깨닫고 맙니다. 하루하루 묵묵히 자신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이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우리 주변에 뿌려진 하느님의 보석 같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말 많은 사람들을 경계하십시오.

자유로운 선택

선택이라는 것은 자유로움을 전제로 합니다.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선택은 사실 선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상태가 되도록 해야 하고, 그 안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을 가로막는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핵심은 우리의 어두움입니다. 이를 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두워진 상태로 선택하기에 많은 선택을 그릇되이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빛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가장 근본에는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방향을 잡아 나가지요. 그리고 그 방향에 따라서 우리의 전체적인 움직임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온갖 역경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한 아이는 빛을 향해서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가지 방해를 겪겠지만 이 아이의 근본 선택은 변함이 없을 것이고 결국은 원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역경 속에서 내면의 근본 선택을 포기해 버리는 아이(포기를 선택하는 아이)는 결국 그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더욱 깊은 늪에 빠져 버리게 되지요. 우리 주변에 다가오는 시련과 역경이라는 것들은 결국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의 선택을 강화하는 도구이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가장 근본을 모두 똑같이 존엄하게 만드셨고 그 누구도 다른 이의 핑계를 댈 수는 없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필요한 선택의 길이 활짝 열려있게 마련이지요. 기름 한 방울을 물 속에 넣고 아무리 뒤흔들어도 결국 그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기름통에 물을 한 방울 넣으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지요. 우리가 처음부터 기름과 물로 선택되어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름이 되거나 물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근본의 흐름은 우리의 고유한 ‘자유’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전문가

교회 안에는 교회 행사 전문가가 있습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듯이 교회 생활을 장시간 하면 당연히 교회 내의 활동에 익숙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름 물놀이 전문가, 소풍 전문가, 주일학교 활동 전문가, 구역 모임 전문가, 야유회 준비 전문가, 식사 차리기 전문가… 이렇게 전문가들이 늘어가는 가운데 아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 전문가’입니다. 아무리 교회 안에서 행사 전문가가 되어도 ‘예수님 전문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행사 전문가가 되어가면서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수많은 교리교사들, 구역장들이 정말 극을 달리면서 봉사하다가 어느 순간 주일미사도 나오지 않는 신앙인으로 변해 버리는 데에는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 전문가들도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반면, 예수님 전문가는 낮은 자리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활동에 전문가가 되어가면서 더욱 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주임 신부님의 사랑을 얻는 것이 보통인지라 그 마음 안에 겸손이 들어설 자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전문가는 구유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를 찾아나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교회 행사 전문가들은 이미 높아진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셈입니다. 결국 그들은 가장 높은 자리에 머무르다가 치고 올라오는 다른 ‘전문가’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말고, 그 결과 실망한 그들은 교회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핑계는 다양하지요. 교회 전문가였던 만큼 교회 안의 온갖 부정적인 모습을 들먹이면서 마치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정당한 것인 양 선전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근처에도 가지 않은 사람들인 셈이지요. ‘예수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겸손과 사랑과 십자가를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전문가가 된 사람은 언제나 기쁨을 잃지 않으며 모든 이들과 조화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유감

얼굴이 예쁘장한 데다가 맛있는 음식, 이벤트, 화장품, 여행지를 좋아하면서 누군가와 연애 중인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든다. 이들은 ‘흥분’의 벽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더 강한 자극을 가져다주는 것을 찾으며 제주도를 갔으면 유럽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에 일상의 소중한 가치를 망각했으며, 하루하루가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이벤트를 준비해야 하고,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나은 것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피곤하다. 왜냐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장미꽃 한 송이에 담긴 마음의 가치를 모르고 장미꽃다발의 크기로 사랑을 가늠하려 하는 가증스런 족속일 뿐이다. 그들의 외적 화려함은 공허한 속내를 가리는 가면일 뿐이다. 훗날 이들은 ‘우울증’에 시달릴 것이다. 그 무엇도 그들을 더는 자극할 수 없기 때문에 찬란한 하늘의 모습은 그들에게 잿빛으로 변할 뿐이고 어머니가 해 주신 따스한 김이 오르는 밥은 돌을 씹는 기분일 뿐이다. 이들의 우울은 그 크기를 갈수록 더해가다가 결국 엉뚱한 선택을 하고 말게 된다. 조심하라. 화려한 외모 속에 엄청난 어둠을 숨긴 이들을 조심하라.

속지 마세요

속지 마세요.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신이 필요한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입니다. 속지 마세요. 그는 당신을 필요로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신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고백하지만 참된 사랑은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이미 그의 삶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참 사랑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전혀 불안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는 영원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원을 잃지 않는다면 그는 나를 영원히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속지 마세요. 어쩌면 문제는 그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중심

뚜렷한 두 노선이 존재합니다. 나 중심 / 하느님 중심 사실 세상의 거의 모든 이는 ‘나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위한 젖을 찾지 다른 아이가 먼저 먹을 때까지 양보하고나서 그 다음에 나를 위한 젖을 달라고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빽빽거리면서 울어서 젖을 얻었고, 변을 보고 뒤가 찝질해도 울고, 아프다고 울고, 심심하다고 울고 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얻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셈이지요. 이렇게 ‘나’라는 존재가 가장 중심에 머물러 있는 우주관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내 안의 양심과 타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혀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시작하셨지요. 얼마든지 내 멋대로 해도 될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하면 가슴이 아픈 이유는 양심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아이가 아무리 두드려 맞아도 내가 아픈 건 아닌데 내가 상대의 아픔을 짐작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관계’ 안에서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우주에서 벗어나 범위를 넓히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여러가지 작용들 속에서 여전히 ‘나의 우주’만을 넓히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지독히 ‘이기적’인 사고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사람은 사물을 소유하고 관계를 소유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지요. 이들에게는 진정한 친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관계’라는 것은 ‘계약’에 불과합니다. 즉 내가 필요할 때에는 좋아하다가 언제라도 그 필요가 상실되면 내버리는 것이 이들의 관계일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들은 더욱더 자신 안으로 모여드는 응집력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만의 세계 안에 갇혀 버리고 결국 그 세계가 ‘지옥’으로 변하는 체험을 하게 되지요. 반대로 하느님에게로 영역을 넓히는 이들은 자신 안으로 모아들이는 힘을 조금씩 상실해 갑니다. 이들은 ‘나의 것’이라는

하느님 앞에서의 수동성

내가 하느님을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움직이셔야 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움직이려 합니다. 내가 이런 행위를 하면 하느님이 좋아 하시겠거니 생각을 합니다. 또 반대로 내가 저런 행위를 하면 하느님이 슬퍼하시겠거니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봉헌해서 당신의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미사를 한 대 정성스레 바치면 하느님이 좋아하고, 내가 잘못에 쓰러지면 하느님이 나를 미워하는 구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를 아끼시고 보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나가 떨어지는 이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렇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죄인에게도 햇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수동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긍정적인 수동’입니다. 우리가 어느 사물에 마음을 사로잡히거나 어느 악습에 마음을 사로잡혀 있다면 이는 부정적인 수동성에 불과하지만 하느님에게는 얼마든지 사로잡혀도 좋습니다. 왜냐면 그분은 우리를 이끌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어찌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어찌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전적인 의지의 능동적인 봉헌,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동성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욕망의 길

욕망은 인간을 한없는 오르막길로 이끌어 갑니다. 사람은 이것 저것 크게 재보지 않은 채로 욕망이 이끄는 오르막을 따라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길은 넓고 평평합니다. 왜냐면 수많은 이들이 그 길을 따라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봐봐,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걷고 있어’라는 것이 그 길을 걷는 이들의 변명입니다. 벌써 다들 걸었으니 나라고 안될 것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의 끝에는 아득한 벼랑이 있습니다. 모두들 떨어져서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 벼랑이 있지요. 올라간 만큼 떨어지는 벼랑입니다. 이는 마치 계단 하나를 오르고 나면 아무런 위험 없이 다시 내려올 수 있지만 10층 높이의 계단을 오르고 나면 나중에 떨어질 때에는 엄청난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걷습니다. 누군가는 이미 걸은 것을 아까워서 못 버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다는 것입니다. 욕망의 길은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길은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 길을 걸은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었지요. 저마다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근본 방향은 같습니다. 한없이 오를 것인가 아니면 내려서서 가장 바닥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그들에게 산들바람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목소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그 길을 걷던 이들에게 사명을 주어 그 길을 되돌아 내려오게 하십니다. 그들은 ‘예언자’라고 불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더욱 비참한 지경에 있었던 적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 하느님은 예언자들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욕망의 길을 거슬러 내려오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반대 방향으로 걷

출발지, 이동수단, 목적지

우리는 마음 속에 목적지를 품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이상, 미래의 꿈 등등으로 표현을 하지요. 누구든지 동경하는 사람이 있고, 원하는 삶의 모습이 있게 마련입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게 ‘이것이다!’라고 표현할 순 없더라도 누구든지 마음 속에 하나씩 지니고 있는 지향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라는 지점입니다. 우리의 현재를 충만히 채우고 있는 지점, 때로는 냉혹하기도 한 우리의 현실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목적지에 이를 수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수단도 수단일 뿐입니다. 이 목적지에 이르는 수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도착 하려는 의지와 실천입니다. 의지도 있어야 하고 그 의지를 뒤따르는 실천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늘 불만에 차 있는 이유는 ‘목적지’만을 끊임없이 상기하기 때문입니다. 목적지를 잃어서는 안되지만 목적지만 떠올려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출발지를 보아야 하고, 이동 수단을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비록 가진 두 다리 밖에 없어서 한 걸음을 걸을 뿐이라 하더라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만족감이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바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목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만 완성되지 않았을 뿐, 우리는 이미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에야 우리의 삶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만족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생의 거의 대부분을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걸음 걸음 하나하나를 즐길 수 있다면 우리는 기쁨과 환희에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의 목적지는 목적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걸음 걷기를 목적으로 삼으면 금새 목적을 채우고 난 뒤에 목적을 잃은

의미부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맛있는 음식, 좋은 집, 아름다운 경관, 즐거운 시간… 참으로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그것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입니다. 어제 배고플 때 먹은 라면은 오늘 갈비를 먹고 다시 쳐다보면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맛있게 먹는 라면은 내가 맛있는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정말 엉뚱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뒤돌아보면 내가 부여했던 그 의미들이 전혀 정반대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는 크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정말 재미있었던 놀이였지만 그건 내가 그 놀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을 뿐, 실제 그 놀이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활동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이를 분별해 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우리의 삶의 순간들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하느님과 신앙이라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걸까요? 하느님을 알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자격이 있고, 우리가 시간을 헌신할수록 본래의 가치를 드러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느님보다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물론 세상도 하느님이 부여한 저마다의 가치가 있지만 그 모든 가치를 내어주신 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세상에만 탐닉하는 것은 의미없는 활동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위의 본질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지요. 좋은 집이 좋은 이유는 그 안의 식구들이 오손도손 살기 때문이지 방이 넓어서 좋은 게 아닙니다. 좋은 집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음식이라는 것은 먹는 이가 굶주려 있고 함께 먹는 이와 사랑을 나누기 때문이지 음식의 값이

인생의 나이테

나무의 나이테는 계절의 변화 때문에 생겨납니다. 아마 여름만 있다면 나무는 더욱 물러질테고 겨울만 있다면 지나치게 단단해 지고 말겠지요. 나무는 그 나이테의 결로 더욱 멋드러진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기쁨도 슬픔도 저마다의 역할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 고루 섞여야 하는 법이지요. 그래야 우리 삶이 더욱 멋드러진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슬픔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을 적용시킬 순 없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기쁨은 기쁨대로 받아들이되 지나치게 거기에 취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받아들이되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사탕도 주시고 때로는 힘든 일도 맡기십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녀의 성장을 위한 것이지요.  사탕에 빠져 끊임없이 먹고 싶어하는 아이는 결국 비만으로 둔해진 몸을 지니게 됩니다. 힘든 일에 좌절해 버리고 마는 아이는 늘 우울함으로 시달리게 되겠지요. 마음을 열고 삶을 바라보면 실상 우리 앞에는 고만고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범위’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요. 그리고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은 내버려두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의 일들을 끌어안기보다는 자꾸만 피하려 하고 결국 곪은 상처를 방치해서 죽음을 위협하는 병으로 만드는 셈입니다. 인생의 나이테를 잘 가꾸어 가십시오. 나무는 이래도 성장하고 저래도 성장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목수가 와서 잘라가 그 용도 대로 쓰게 마련이지요. 주님 손의 훌륭한 목재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적

예상치 못한 일을 우리는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표현하지요. 그리고 그 밖의 일들은 ‘기현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성상이 눈물을 흘리면 기적이 되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오면 기현상이 되는 식입니다. 하지만 설령 이상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감각 기관에 감지되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그것을 분간할 재주가 없게 마련입니다. 북한에서 아무리 엉뚱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알 도리가 없으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은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문제는 실제 기적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정말 성상들이 눈물을 흘리기를 바라실까요? 만일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러한 일들은 당연히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러한 가시적인 현상을 바라는 근본 목적은 우리의 내면이 변하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바라는 진정한 기적이라는 것은 한 인간이 외적인 감화를 받아서 내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위해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내적인 변화가 없는 단순한 외적 현상은 ‘기현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근본 목적이 이러하다면 진정한 기적은 도리어 우리 주변에서 더욱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모범으로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인은 여느 기적보다 더욱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게 마련이지요.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삶으로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의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단순히 외적으로 눈에 드러나는 것을 쫓아 다니다가 길을 어긋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언뜻 스스로를 정말 열심한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내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피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얕은 신앙인에 불과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더 좋은 사제, 더 좋은 본당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오히려 겸손과 인내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것이라도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일 것입

어린아이의 창조성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것들은 외부 자극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내부에서 형성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내면을 통해서 재생산해 냅니다. 실례로 같은 한정식인데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은 그 밥과, 또 반대로 내가 정말 싫어하는 직장 상사와 먹는 밥의 맛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것들을 내면에서 조작해서 느끼고 있는 셈이지요. 우리가 기쁘고, 슬프고, 싫증나고, 화를 내는 거의 수많은 이유들이 실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냐 하는 그 결정에 따라서 많은 것들의 의미가 정해지는 법이지요. 하느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내면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창조자’였습니다. 작은 막대 하나로 얼마든지 놀이를 창조해 내고는 하였지요. 그리고 열심히 그 놀이에 치중하고 끝나고 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따로 현실이랄 것이 없었지요. 거의 모든 활동이 놀이였습니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의미로 살펴보면 단순히 나이를 먹고 몸이 커가는 것이 아니라 이 창조성을 잃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아이와 같은 마음’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요소들에 신비로움을 체험하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의 내면의 활동을 ‘어린아이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는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는 없지만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새로이 해석하는 천진한 창조성을 잃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새로움으로 하루하루를 꾸며 나갑니다. 그들은 절대로 늙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느님을 닮은 작은 창조자들입니다. 그들 곁에 있는 이들은 심심할 새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

만일 독수리의 새끼가 어린 시절부터 강아지들과 함께 길러져 왔다면 자신의 날개를 앞발처럼 쓰면서 바닥을 기어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장애가 있는 개’라고 생각하겠지요.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의 목적 하에 창조되었으며 자신만의 고유한 특수능력이 있습니다. 헌데 모든 것이 평준화 되는 세상에 살아가면 그것은 ‘장애’로 취급되어지고 맙니다. 잔디밭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난초가 나도 잡초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올바르게 인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시선이 아니라 첫 창조의 시선으로 우리의 특수성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한 공장의 동일한 생산 라인에서 나온 제품이고 그 회사의 기준에 어긋나면 모두 불량품으로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엉뚱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한 인간 존재 하나하나를 빚어 만드셨고 그 모두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찾아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직 찾지 못해서 슬픈 게 아니라 세상의 목소리에 너무 귀를 기울여서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그걸 찾는 작업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셈입니다. 일단 찾기 시작하면 보입니다. 하지만 찾지 않는다면야 어쩔 도리가 없지요. 하느님이 부여하신 의미를 찾으려면 하느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헌데 우리는 자꾸만 세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고 세상은 앞서 설명한 동일한 생산라인의 기준만을 들이댑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대부분 쓸모없는 존재로만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불운한 자의식은 다른 이의 행복도 짖밟아버리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면 다른 이를 소중히 여기지도 못합니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이가 다른 이를 존중할 리가 만무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하루속히 세상의 의견에 목매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하느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늘나라 녹차

처음 녹차를 마실 때에 그 맛은 정말 이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달든지 짜든지 해야 하는데 녹차라는 것은 그저 밍밍한 맛으로 느껴질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마시느니 차라리 콜라를 마시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녹차의 효능에 대해서 알게 되고, 나아가 녹차를 즐기는 여러가지 방법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스스로 녹차를 찾게 되고 배우게 되었으며 나아가 배울수록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말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세상’이라는 눈 앞에 생생하게 드러나는 현실에 익숙해져 왔을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오감의 작용에 굉장히 민감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오감을 작용하는 것에 무엇보다도 먼저 반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내면의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단순히 우리 오감의 작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지요. 즉, 친구들 사이의 우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강아지를 잃었을 때에 느끼는 슬픔이라는 것도 체험하게 되면서 우리 내면 안에 단순히 육신만이 아닌 무언가가 생생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깨달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만든 장난감의 의미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만들지 않은 것의 의미를 우리가 스스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 사람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가 배우기 쉽도록 많은 방법들을 마련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길이 되어 주시는 것이지요.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누구이시며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선물하신 영의 의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하는지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면 그분에게 다가가서 생명의 물을 받아마실

하느님의 시선

가난해도 존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해도 미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해도 존엄한 사람은 내면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부유해도 미천한 사람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면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비록 노가다로 일하더라도 늘 성실하고 책임을 다하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하면서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거짓과 기만과 허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신의 본모습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 없기 때문이지요. 스스로 자신을 아무리 바라보아야 필터에 걸러진 모습들 뿐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잘나 보여도 스스로 못나게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이상하고 엉뚱한데도 스스로는 잘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기도 하지요. 우리가 우리를 비춰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시선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그 시선으로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면 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외적으로 가진 것, 우리가 소유한 것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우리 내면의 빛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빛이 밝은 사람은 그 밝은 빛으로 다른 것들을 비춥니다. 반대로 그 빛이 어두운 사람은 그 어두운 빛으로 다른 것들을 비춥니다. 밝은 빛은 더욱 밝은 빛을 찾아 끌어들이고, 반대로 어두운 빛은 어두움으로 내리달려갑니다. 배워야 할 사람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고, 정작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훗날 우리가 영원으로 건너갔을 때에 참으로 재미난 사실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높였던 이들이 수렁에 빠져 있고, 반대로 우리가 천대했던 이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날,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떨런지요?

사제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고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전해야 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신앙을 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상의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뿌듯해 하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결과가 즉시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 마음 속 깊이 감추어져 있다가 때가 되면 싹이 튼다. 하지만 애시당초 씨를 심지 않으면 싹틀 여지도 없다. 우리가 심는 씨를 우리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일을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씨를 심는 셈이다. 건물을 짓는 것은 건축가가 더 잘하고 임원을 관리하는 것은 대기업 경영진이 더 잘한다. 사회 복지사들은 가난한 이에게 먹을 것을 준다. 우리 사제들이 이런 일을 하는 근본 이유는 그 일을 통해 신앙을 전하려는 것이 근본이거늘 이런 일만 하면 저절로 신앙이 전해진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의 생명의 씨앗은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전할 수 없고 세상의 온갖 멋드러진 일을 한다고 해서 저절로 생겨나지도 않는다. 세상의 성공이 신앙의 성공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스스로 고민하지 않으면 생각없이 살게 된다. 그리고 생각 없는 사제의 삶은 참으로 비참하다.

세상의 구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사람들이 하느님을 오해하는 것은 하느님을 ‘심판자’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접근법이 틀려 먹었습니다. ‘심판자’로 이해되는 하느님은 ‘죄지은 우리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해소하려고도 않고 나아가 하느님은 ‘심판자’시라 두렵게 느끼기만 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지요.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으로 가득한 인자하신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서 엇나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몰이해 속에서 하느님의 엄격한 이미지는 더욱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에로 다가서지 못하니 적어도 죄를 피하게 하려고 엄하고 무서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버린 셈이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죄를 피하려고는 하지만 한계가 있어 결국 죄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위의 성경구절을 다시 바라봅시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외아들마저도 제물로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길을 찾도록 도와주신 것이지요. 그 길은 규정과 율법과 속박의 길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길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이해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닫혀 버린 셈입니다. 우리의 어두움이 너무나 극심해서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퇴화되어 버린 셈이지요.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빛을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당신이 다가서면 그나마 있던 빛마저 사라져 버리고 어두움으로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지요. 마치 희미한 빛이 있으면 빛도 어두움도 희미하게 느껴지지만 밝고 강렬한 빛이 있으면 빛과 그림자가 뚜렷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강렬한 빛과 사람들의

어리석은 지혜

정말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을 수 있을까요? 과연 똑똑하다는 기준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 두뇌가 명철한 사람을 두고 우리는 똑똑하다고 하지요. 이런 저런 계산이 빠르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재빨리 깨닫고 활동하는 사람들을 두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명철함은 하느님의 지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똑똑한 이들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지혜는 도리어 ‘어리석음’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누군가 금전적인 손해를 당하고 나면 똑똑한 이들은 그것을 회복할 최고의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가 빠져나가지 못할 상황을 만들고 결국 그가 돈을 돌려주게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지혜를 사는 이들은 전혀 엉뚱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 돈이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아니면 잊고 용서하라고 하지요. 그러니 똑똑한 이들에게 이건 ‘어리석음’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참으로 ‘똑똑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해득실을 잘 따져서 신앙생활을 꾸려 나가지요. 그래서 실상 이들은 ‘신앙’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신앙은 세상적인 분별로는 분명히 ‘손해보는 장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처세술은 ‘무엇 잘하는 방법, 무엇 준비하는 방법’ 등등을 제시하면서 심지어는 세상 안에서 잠시 손해를 보더라도 결국 세상 안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는 마치 세상을 포기하고 죽어 묻히라고 가르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세상의 지혜 안에는 ‘영원’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모든 보이는 사물과 사건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원하심과 전능하심,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신앙을 기반으

양의 냄새

목자는 양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헌데 이 양의 냄새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양들이 먹는 풀을 양껏 먹으면 양의 냄새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양의 냄새가 나는 걸까요? 이는 양을 한편으로만 이해한 처사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사는 방식을 고스란히 따라 사는 이가 아니라 양들을 이해하고 양들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목자에게서 양들의 냄새가 난다는 의미는 양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목자는 사목하는 곳의 신자들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하지만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주변에 모여든 신자들의 냄새만 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한국처럼 주변에 모여든 부유한 신자들의 냄새만을 풍기면 소외된 양들이 다가오기가 더욱 힘들어지니까요. 사목자는 모든 양들이 다가올 수 있는 냄새가 나야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들과 음식을 나누고, 그들의 삶의 환경에 처하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류 사회의 부자들에게 다가서기 힘든 이유는 그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부유하고 화려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이라면 우리는 스스럼없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아이들은 스스럼 없이 다가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늘 그들에게 미소를 선물하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부유한 이들과도 어울리셨고 가난한 이들과도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막힘이 존재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런 예수님에게도 다가서기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음이 어두운 이들이었지요. 이들은 대체로 부유하고 고위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을 ‘편애’한 듯이 말을 하지만 실제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가리지 않았고 다만 자기 스스로 다가서기를 꺼려한 이들이 예수님을 증오했을 뿐입니다. 양의 냄새가 난다는 것,

드러나는 속내

외적인 면에 영향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천사같은 외면을 보면 천사려니 생각하고 악마같은 외면을 보면 악마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지요. 그것이 ‘첫인상’으로 자리잡습니다. 그래서 첫인상이라는 것은 언뜻 중요한 듯 싶지만 실제적으로 크게 믿을 것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절대로 외면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내면으로 더 중요한 가치들이 오고 가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속을 알 수 없으니 문제입니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껍데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전혀 알 수 없지요. 그래서 오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이들을 악한 자로 판단하고 악한 이들을 선한 이들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드러나지 않을까요? 속이 썩은 사과는 언젠가 그 썩은 내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껍질의 색깔이 서서히 변하거나 냄새가 심하게 나거나 하곤 하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언제까지나 내면을 숨기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썩은 모습들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사람들의 행동에는 정상적인 범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서 과한 행동이 드러나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분별력이 떨어지는 이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경계하기는 커녕 도리어 좋아하고 맙니다. 자신의 허영심이 채워지기 때문이지요. 외모에 과하게 치중하는 사람 안에는 반드시 허영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대화마다 ‘돈’ 이야기가 나오는 사람은 탐욕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지요. 반대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지내는 사람, 매사에 신중한 사람은 내면에 지혜가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가벼운 사람들은 조금만 섭섭한 일을 당해도 금세 광고를 하고 다니지요. 우리 안에 무엇을 간직할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단순히 외적인 치장을 아무리 한다고 해서 우리의 어두운

영성(espiritualidad)

영성에 관해서 오늘 저녁에 공소 축제 9일 기도에 가서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과연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대충 흐름을 잡아볼까 합니다. 영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동물들이 살 듯이 살지 못합니다.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서 충실히 생활합니다. 먹고 자고 하지요. 기분이 좋을 땐 좋고 나쁘면 나쁘고 그렇게 보다 단순한 삶의 패턴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미묘한 존재입니다. 마치 내면에 엄청난 공간이 있어서 모든 기억이 저장되고 우리가 원할 때면 그 기억을 고스란히 되꺼내어 재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분 좋은 시기라도 내면의 공간에서 과거의 어두움을 꺼내면 고스란히 그 어두움에 사로잡히고, 반대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과거의 행복함을 되새기면 거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 영역(실제로는 ‘내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내면을 아무리 해부해보아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내적 차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듯 싶습니다.)이 바로 우리 영이 지니는 일부의 기능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은 단순히 이 기능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방대하고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바로 이 내면의 영역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는 이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가능성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다 온전히 열려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 영역을 감추고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활짝 열고 살 수도 있습니다. 영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 영의 막대한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한 하나의 활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성들이 존재합니다. 여러가지 차원에서 인간을 조명하는 것이지요. 뭐든 이름만 붙이면 다 영성이 되는 셈입니다. 생태계 영성, 진리의 영성, 몸의 영성… 심지

마음 부자

저로서는 가난한 이들과 산다는 것은 하나의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유함에 둘러싸여 살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이들은 부유한 이들이 하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즉, 커피를 마시느냐 마느냐가 문제지 스타XX를 마시느냐 엔젤리XX를 마시느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어떤 브랜드의 커피를 가져다 주어도 그들은 행복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부유한 이들에게 이는 하나의 ‘옵션’으로 적용이 되고 자신이 선호하는 무언가를 얻지 못하면 스스로 불행해 합니다. 즉 늘 자신이 먹던 커피에 휘핑 크림을 얹고 카페인은 제거해야지 비로소 만족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들은 단순히 ‘커피가 존재한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부유한 이들, 즉 삶의 조건을 부유함 속에서 꾸려가는 이들은 스스로의 문제거리를 스스로 조장하는 꼴이 됩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의 가난을 보면서 거부감을 느끼지만 실제로 자기 스스로의 삶의 모습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지요. 가난한 이들이 더러운 그릇에 파리가 둥둥 떠다니는 음식을 가져다 주어도 가난한 이들 끼리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하는 음식에도 그런 결과물이 나올 걸 알고 있고 그래서 이웃이 내어주는 그 음식에 담긴 사랑에 감사할 줄 알지요. 하지만 만일 부유한 이가 여기 와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면 그들은 감사는 커녕 도리어 짜증을 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부유해진다는 것, 마음으로 여러가지 부유함의 조건들을 갖추어 나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지름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가난한 이, 즉 마음이 가난한 이로 남을 것입니다. 저는 부자 동네에 가서도 기쁘게 생활할 수 있고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서도 그들의 마음을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부자가 되기로 했으니까요.

이미 일어나고 있다

돈을 훔치는 행위는 결과일 뿐입니다. 돈을 훔치는 행위는 이미 필요 이상의 돈을 갖고싶다고 마음 먹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준비되어가는 결과물일 뿐입니다. 수도 꼭지에서 물방울이 새는 건 수도 꼭지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물이 공급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이 끊긴다면 수도 꼭지가 고장이 나든 말든 물이 샐 이유는 없겠지요. 모든 것은 그 시작점을 파악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는 셈입니다. 누군가에게 선의가 있는지 악의가 있는지를 분별하고 나면 그 사람의 최후도 미리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안에 ‘선의’를 심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당장 사람에게 빵을 주고 먹을 걸 입에 넣어주는 것보다 더욱 시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당장 빵과 재물을 마련하는 것을 더욱 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빵과 재물이 부족해지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의 근본에는 인간의 ‘악의’가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악의’ 즉  ‘이기심’이지요. 이 이기심이 살아있는 한 인간 사회에서 어둠의 행실은 끊임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물의 원류가 살아있기에 온갖 구석에서 물이 터지는 것과 같지요. 물이 터질 때마다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물줄기를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악한 의도를 상쇄시키고 선의를 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선교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영성체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단순히 입으로 밀떡을 집어넣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체를 모신다는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거룩한 제사 안에서 그분의 삶을 뒤따르기로 의지적인 결심을 하면서 그분의 거룩한 몸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영성체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며 성당에 매주 나와서 떳떳하게 앞으로 나아가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늘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며(실제로 성사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체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진정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은 후자의 사람입니다. 볼리비아에는 수많은 이들이 ‘혼인장애’의 상태로 살아갑니다. 즉, 신자이면서도 교회혼을 하지 않고 시민혼만을 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이유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는 ‘남편의 고집’ 때문입니다. 즉 아내는 간절히 신앙에로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남편들이 강하게 거부하는 케이스들이지요. 남편들이 강하게 거부하는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개인들의 어두움이 극심해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가 두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즉 이리 저리 바람피고 다니기도 하고, 아직도 바람을 피고 싶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지요. 모두 하느님의 손길이 필요한 셈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그렇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즉 그나마 신앙생활을 유지하려는 아낙네들을 위로해야 하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미사를 참례하는 것은 단순히 외적 행위로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사생활을 다 채우고 매주 꼬박꼬박 미사에 나오더라도 내면은 완전히 썩어있고 탐욕에 가득 차 있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저런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잊지 않고 그분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보다 진실한 신앙인들입니다. 영성체는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결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전기에 감전된 아저씨

오전 근무 중에 한 젊은 엄마가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페인트를 칠하다가 전기에 감전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좀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묻길래 당장 일어나 나섰습니다. 먼저는 그 집에 가서 남편 상태를 보았습니다. 실제로 온 몸에 화상을 입었더군요. 그래서 당장 그 애엄마를 데리고 약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약품들과 항생제를 구입했지요. 그리고 시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되면 당연 돈벌이가 없으니 먹고 살 일이 큰일일테지요. 그래서 이런 저런 먹거리들을 사다 주었습니다. 식용유, 소금, 설탕, 쌀, 밀가루, 국수(이동네 파스타) 등등을 샀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우유도 좀 사고, 집에 냉장고가 없는 걸 봐서 가루우유도 좀 샀습니다. 끝으로 오늘 당장 먹으라고 제가 즐기는 돼지고기 가슴살국도 두 봉지 사다 주었습니다. 그제서야 제 마음이 좀 놓이더군요.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물건들을 놓아주고는 딱 하나 부탁했습니다. “나중에 다 나으면 성당에 나와서 하느님에게 감사 드리세요. 그것 말고는 저는 바라는 거 없습니다. 그리고 의약품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게든 앞으로도 도와 드릴테니 걱정마세요.”

본질적인 일

한 시간 안에 벽돌을 나르는 작업을 하는데 옆에 와서 잡초를 뽑는 일을 한시간을 하고는 자기도 일을 했다고 돈을 받아가려 한다면 안될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들을 하느님 앞에 데려가는 일인데 오히려 정반대의 일을 하고도 스스로 훌륭한 교회의 일원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교회 안에서, 아니 교회의 일원으로서 세상 안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걸까요?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세상 안의 소금과 빛이 되어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과연 각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할 일, 때로는 더욱 잘 할 일을 교회에서도 하고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세상 일을 흉내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려 하지는 않나요? 우리는 머릿수로 영업이득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와 세상 기업이 다를 게 무엇인가요? 과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겁니까? 이 질문에 각자 스스로 올바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효율성’을 강조하며 살아왔고 교회 안에서도 효율성을 따지고 뭐든 눈에 드러나는 현상으로 결과물을 측정하며 좋고 나쁨을 결정하기가 일쑤였지요.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그러나 이 자비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과연 무엇이 자비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희생 제사는 무엇인가? 이러한 다양한 질문들이 거듭 이어질 수 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요약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일입니다. 우리는 보다 내밀한 사정들을 살피고 바라볼 줄 알면서 외적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상적인 기준으로 효율성이

어리석은 심판자

사랑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하지만 그 죄의 책임은 오직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 만이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는 왜 날 사랑하지 않니?’라고 내 앞의 상대에게 물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똑같이 상대도 나에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을 받았지 ‘너만 사랑 받아라.’라고 하는 명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하느님 손에 맡기는 것이지요. 사람은 곧잘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모든 것이 부당해 보이고 불의해 보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적혀 있듯이 자기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지요. 그래서 곧잘 눈에 들보를 끼운 채로 상대의 눈에 티를 빼겠다고 나서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겸손’이라는 덕목이 필요합니다. 이 겸손이 없이는 우리는 곧잘 심판자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남을 심판하는 그대여, 그대는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세상 안에서의 오름

올라가면 내려와야 합니다. 어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삼스레 깨닫게 된 내용이었습니다. 영업직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원리원칙을 고수하며 살다보니 실적이 없다가 뒤늦게 깨닫고는 온 힘을 동원해 전국에서 손꼽히는 실적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유명세는 얼마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모든 순간을 소비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결국 올라간 자리는 다른 누군가의 몫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내려와야 하는 거지요. 스스로 내려올 수 있으면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끌려 내려오거나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오른 자리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세상 안에서 으뜸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의 끝은 비참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찍부터 이를 깨달으면 올라갈 노력을 하지 않게 됩니다. 전혀 다른 방향의 내적 상승을 찾게 되는 거지요. 올라갈 노력을 하지 않다보니 천천히 절로 올라가게 되어 있고 결국 튼튼한 바탕 위에 올라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내면은 더욱 준비가 되어 튼튼해지는 셈이지요. 손을 놓으면 도리어 자유로워지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이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푸근하게 살기

오고 싶으면 오는 거고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그걸 애써 끌어 들이고 못가게 잡아 무엇해? 내 안에 자리 넉넉하면 여럿 들어오는 거고 내 안에 자리 부족하면 하나만 들어오는 거고 넉넉하지 자리 많다고 다 차야 행복해지나? 부족한 자리에 애써 끼워 넣는다고 행복해지나? 주시는 대로 받아 사는거고 능력 되는대로 사는거지 받지도 않은 걸 있는 체하고 능력도 안되면서 그런 체하다가는 고꾸라지기 십상이라네.

반미사 강론

어제는 반미사가 있었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하는 성경 강의에서 참석자들에게 일단 여러분들이 모임을 주선하면 제가 가서 미사를 드리겠다고 했더니 용기있는 신앙인들이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전등 불빛은 희미하고 먼지 바람이 풀풀 날려서 성작 위의 성체포가 두번이나 날려 흙바닥에 떨어지고 개들은 제대로 마련해 놓은 책상 주변에 서성이고 엄마들은 아이들 젖 먹이고, 애는 껌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미사에 참석한답시고 나와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에겐 오늘이 하느님의 메세지를 들을 수 있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기회니까요. 그래서 힘을 내어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많은 돈을 벌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존엄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엄성이 사라지는걸까요? 사람의 존엄성은 우리가 외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머릿 속에 가득 든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존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는 같은 목적지가 있지요. 그것은 바로 이 생이 다하고 나면 영원한 생명으로, 즉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세상 안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좋은 직장을 구해도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존엄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존엄성 때문에 의미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요? 사실 하느님은 이미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컨대 물에 빠져들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도와주려고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물에 빠지는 사람이 살아날

사람들의 인기

사람들은 속에 든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겉에 드러나는 것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속에 다른 것을 감추고 겉으로는 정반대의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사실 이런 이들이 있으니 ‘사람들의 인기’를 찾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실제로는 속으로 전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드러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하기 싫은 일인데도 사람들의 인기를 위해서 하고, 반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가르쳐야 하는 일인데도 사람들이 싫어할까봐 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바로 ‘거짓 예언자들’인 셈이지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반대로 하느님의 사람은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는 해야 할 말을 합니다. 어느 신부님이 자기 본당 신자들이 그릇된 모습에 빠져들어가는데도 신자들이 자기에 대해서 좋게 말하게 하려고 그런 그릇된 모습을 애써 모른 척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해야 할 것,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적’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2-23)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을 인식하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인기는 거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불의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 (1코린 6,7-8) 불의 앞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를 감싸안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먼저는 올바른 정의를 실천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불의 앞에서 올바른 시선을 지닌 이에게 문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분별하여 알려주는 대로 ‘순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위에 적힌 성경 구절대로 오히려 그냥 불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알면서 속아 주는 것이지요. 이들은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사랑은 참으로 큰 것이지요. 마치 어린 자녀들이 떼를 쓰는 것을 넓은 품으로 받아들여 잠잠하게 만들듯이 세상의 불의를 감싸 안아 진정시키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의 크기는 짐작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두 태도는 커녕 서로를 고자질하고, 서로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스스로를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억울하다고 세상 법정에 송사를 걸어서 상대를 씹어 삼키려 하고, 가능하다면 속여서라도 상대를 무너뜨리려고 하면서 스스로는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은 그 행실로 판단하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하는 행동이 우리 스스로를 심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지요.

벼랑 안쪽 사람들

벼랑 끝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하셨다면 이제는 벼랑 안쪽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벼랑 안쪽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위험에서 멀리 떨어지고 영적 ‘안전’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벼랑 안쪽으로 들어서는 지름길입니다. 예를 통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절제 없이 술을 즐기는 사람은 벼랑 가로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그 술로 인해서 언젠가는 그 술로 인해서 사정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와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상황은 다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사랑하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장에게는 ‘술’에 다가서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가장은 어떻게 하면 내 가족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비단 술만이 아니라 이 ‘사랑’을 진정으로 고민하는 가장은 그 밖의 문제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가정의 일치와 사랑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벼랑 안쪽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벼랑의 가장 안쪽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규율과 규정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완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벼랑끝 사람들

벼랑에서 노는 것보다는 안쪽에서 노는 것이 안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벼랑끝에 다가가서 노는 걸 좋아합니다. 최대한 벼랑 끝으로 다가서지만 떨어지고 싶지는 않은 마음으로 노는 것이지요. 술을 절제할 줄 안다면, 즉 술이라는 벼랑의 안쪽에서 논다면 문제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술을 즐기면서도 알콜 중독이나 다른 가정 문제를 겪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벼랑 끝으로 가서 놀면서 떨어지지는 않으려는 이들입니다. 탐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부귀를 다 누리려고 하면서도 돈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고 그 어떤 경제적 어려움도 겪지 않겠다는 건 억지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들은 탐욕이라는 벼랑 끝에서 놀다가 결국 발을 헛디디고 말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놀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부주의로 발을 헛디디게 됩니다. 벼랑 안쪽으로 들어서야 합니다. 법 안에서 우리에게 허용된 선에서 놀려고만 하면서 정작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실천하지 않으려는 이들… 이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이들입니다.

가솔린

한 아이가 가솔린 통을 들고 활활 타오르는 불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 다른 도시에서 CCTV로 바라보면서 걱정스러워하던 이가 그 아이에게 전화를 겁니다. 헌데 아이는 벨소리를 듣지만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은 가중되기만 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영적이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의 가솔린을 들고 타오르는 유혹이라는 불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조언을 해 주려고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그 조언을 들으면서도 무시합니다. 결국 일어날 일은 뻔한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서 가로 막아야 하는 걸까요? 쫓아가서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돌아가라고 엄포를 놓으면 되는 걸까요? 그 순간은 됩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끝나고 나면 더 무서운 속도로 달려갈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남자 친구를 만나고 싶어하는 여자아이가 엄마가 무서워서 못나가고 있다가 엄마가 외출하는 순간을 노려서 얼른 쫓아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스로 깨닫지 않으려는 자는 답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누구도 강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구속과 억압은 할 수 있어도 내적인 면을 구속할 수 있는 수단은 없습니다. 인간은 최후의 순간에도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들입니다. 스스로를 현명하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교만은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결국 자신이 준비한 결과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세운 벽을 낮추고 목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위선

- 위선자는 어떤 사람이예요? - 위선자란 자신이 실제로 의도하는 것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다른 사람이지. 즉 실제로는 남을 공격하고 해치려 하면서 겉으로는 선한 척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거야. 교리교사를 예로 들어보자. 한 교사가 학생들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교재를 준비하고 간식을 준비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 하지만 그런 일들을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면 그건 위선이야. 왜냐면 그는 교리교사이고 학생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그 위선적인 교사가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을 모을 순 있어. 하지만 그 교사는 결국 자신에게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지. 다름아닌 ‘신앙’을 줄 수는 없는거야. 그럼 결과가 어떻게 될까? 결국 그 교사가 훗날 제가 원하는 본래의 길, 즉 이기적인 길을 가기 시작할 때 그 교사에게 마음을 주었던 학생들은 모두 무너지고 마는거지. 간단히 말해서 그 교사가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냉담이라도 시작한다면 그 교사를 보고있던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엄청난 영향력으로 다가가는 셈이야. 반대로, 위선적이지 않은 교사는 어떤 사람일까? 이 교사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사람이야. 설령 많은 학식이나 방법론은 없을지언정 자신이 가진 것을 솔직하고 진실되고 성실하게 전하는 사람이지. 즉 학생들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앙’을 전하는 사람이야. 그러면 이 교사부터도 더욱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할거고 그 교사를 통해서 배우는 학생들도 모두 그 교사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 노력할거야. 위선적이지 않다는 말, 진실하다는 말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을 말해.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그 모습 그대로 하느님에게 나아가려는 삶을 말하지. 나를 외적으로 꾸며서 마치 내가 흠이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한다는 듯이 거짓스럽게 살아가지 않는 것이야. 나의 부족함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그나마 내가 가진 좋은 것을 내어주려는 삶인거지. 마치

광신도

- 주변에서 날더러 광신도라고 해요. 오늘 저녁 식사 전에 교사들과 모여 있는 중에 나온 질문입니다. - 잘 들어봐. 사람은 저마다의 고유한 직분이 있어. 사제는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제단의 봉사자이어야 해. 그리고 수도자는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그리고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야. 그래서 저마다의 직분에 맡게 헌신하는 영역이 달라. 사제가 지나치게 세상 일에 신경 써도 이상한거고, 수도자가 지나치게 사목에 치중하는 것도 이상한거고, 평신도가 교회에만 매달려 있는 것도 이상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평신도에게 교회의 영역이 없는 것도 아니야.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것은 해야 하는 법이야. 즉 주일 미사를 성실히 나오고 신앙생활을 꾸려 나가야 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지. 누군가 자기가 가톨릭 신자라고 하면서 실제로 신자로서 그 어떤 책무도 떠맡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 분명 엇나간 모습이야. 균형 감각을 회복하는 것 그게 참 중요해. 자, 그럼 이제 살펴보자. 평신도로서 균형 감각은 뭘 의미할까? 어디 딱 고정된 활동의 범위가 있는걸까? 그건 아니야. 우리는 각자의 수준에 맞게 활동할 수 있게 마련이야. 집에서 학교나 직장에서 충분히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는 성당에 와서도 열심히 일할 수 있어. 하지만 집과 사회에서 제 역할을 못하면서 성당을 도피처로 찾는 것은 균형감각을 상실한 셈이 되는거지. 그래서는 안되는거야. 그리고 우선권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한 엄마가 집이 잘 돌아가서 성당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 순간에 자기는 성당에 헌신하는 사람이기에 그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있을까? 아니야, 그 순간에 엄마는 자녀들을 돌봐야 하는 거야. 그래서 성당에 양해를 구하고 성당 일을 잠시 포기하고서라도 먼저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거지. 균형감각이 존재하는 사람은 주변의 의견에 흔들릴 필요가 없어. 균형잡힌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데도 성당에서 하는 활동을 두고 ‘광

사랑과 악의 상관관계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10) 아주 지극히 단순하고도 명료한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악을 저지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악을 저지르지 않고자 노력하지만 그에 반해 사랑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채우려 하지 않기에 결국 악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벼랑 끝에 서서 걸어가면서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벼랑에서 멀어져 안으로 들어오면 아예 벼랑을 신경쓸 일도 없을 것인데 우리는 벼랑 끝으로 다가가려고는 하면서 떨어지지는 않으려고 하니 스스로의 오류에 빠져드는 것이지요. 사랑을 하지는 않으려 하고 나아가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고 하니 우리는 죄악의 구렁텅이 옆의 욕망의 벼랑에서 노는 셈입니다. 물론 우리의 욕구는 정당하지만 어둠의 세력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언제나 벼랑 끝자락에 서도록 종용하지요. 괜찮다고,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우리는 이미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떨어져보면 떨어진 줄을 압니다. 하지만 떨어지기 직전의 위험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떨어지면 아플 걸 예상하지만 그걸 경고해주는 사람의 말은 무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이 깊어서 빠져 죽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판을 보고서도 그걸 과감히 무시하고 물에 들어가는 철없는 청년들의 모습인 셈이지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욕구의 경계에서 놀면 안됩니다. 사랑에 헌신해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정당한 욕구를 희생해서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입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 자신(욕구 덩어리)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사랑의 십자가)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그분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할 때 우리의 안전은 이미 보장받은 셈이나 다름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죄를 지을 줄 모릅니다.

책임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에제 33,8-9) 에제키엘 예언서에는 예언직을 수행해야 하는 이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위의 구절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사제직과 왕직, 그리고 예언직을 세례때부터 지니고 있습니다. 세례 중에 크리스마 성유를 도유하면서 늘 그 직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를 바치게 되지요. 우리의 예언직을 소홀히 할 때에 일어나는 결과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릴 수 있었던 영혼들’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가능한 방법을 찾아서 경고하고 권고하고 도와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렇게 질문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리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 다 해야 하느냐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다음과 같이 연상해 보면 됩니다. 시장에 다녀오면서 어린 아이에게 과자가 담긴 작은 비닐봉지를 들게 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 자기 덩치만한 야채 바구니를 들게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하지도 못할 것을 들쳐업고 돌아다녀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는 사명은 생각만큼 무거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곳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미 아는 바’를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는 이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 다가가서 내미는 손길로도 얼마든지 하느님 앞에 돌아올 수 있었던 이들을 우리는 우

[행복초대석] - 만화 그리는 신부님! ‘마진우’신부님과 함께

[행복초대석] - 만화 그리는 신부님! ‘마진우’신부님과 함께- ㅁ 내 용 국내 최초, 만화가 신부님이 탄생했다!! 그 주인공은 성직자(seminarian)와 만화(cartoon)의 합성어로 신학생의 생활을 그린 만화 ‘세미툰’의 저자 마진우 신부. 만화 ‘세미툰’은 사제직분을 가지고 있는 신학생들도 이성과 전자기기 그리고 옷차림에도 신경을 쓰는 일반인들과 같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재미있는 신학생의 일생생활을 만화 속에 담았다고 하는데... 마진우 신부의 재미있는 만화 이야기. 행복 초대석에서 들어본다. 작가: 신지영/ 출연: 마진우(고산성당 신부)

자극과 반응

- 어머~ 너 옷이 그게 뭐니? 핏이 안 살잖아? 적지 않은 이들은 주변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정말 자신의 옷이 그런가 생각하게 되고 돌아보게 되지요. 그런 말을 꺼내는 사람에게도 문제는 있지만 그런 말에 반응하는 사람에게도 문제는 존재하는 셈입니다. 자극과 반응에 있어서 ‘자극’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우리의 수용체, 감각기관을 자극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감을 지닌 이유는 자극을 수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밀실에 갇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 형상도 바라보지 못하고, 냄새도 맛도, 또 아무것도 피부로 느낄 수 없게 되지 않는 이상 우리 주변에서는 온갖 자극이 밀려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결국 문제는 그걸 수용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현명하게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들어오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남들이 내 욕을 한다고 그대로 그걸 욕으로 받아들이고 남들이 내 칭찬을 한다고 헤벌쭉 기분좋아질 필요도 없습니다. 들어높여진 건 반드시 떨어져 깨어지게 마련이니까요. 내가 나임을 인식하는 것, 나 자신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어느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나에게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것이 예쁘고 아름다워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것입니다. 눈이 더 예뻐질 수는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눈의 본래적 기능을 너무나 ‘당연시’ 여기고 더 예쁜 눈을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행여 수술이라도 하던 중에 자칫 눈이라도 다치고 나면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던 것인지 알게 되는 것이지요. 잘 생김과 못 생김이라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물론 얼굴 형태가 뒤틀려진 사람이 있어서 그런 이들을 위해서 ‘성형수술’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심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코린 4,5) 한 아이가 학교에 오다가 다른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집에 준비물품을 살 돈을 요구하다가 호되게 욕을 먹고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동정심을 느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준비물품을 건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집에 요청하면 언제라도 다시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준비물품을 꺼내라고 했습니다. 저마다 준비물을 꺼내는데 자신의 물품을 나눈 아이는 당연히 준비물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아이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통상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보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그 이면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오로지 우리가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전능하신 하느님, 심판 때에 참된 심판을 하실 그분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두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즉, 한 어린 아이가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하는데도 ‘심판은 내 일이 아니라’면서 그걸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눈으로 드러나는 악습은 충고해 주어야 하고 고쳐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밖의 것을 억측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없는 죄를 만들어내는데 선수들입니다. 온갖 상황을 유추해서 미리 다 심판해 버리곤 합니다.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바라볼 수 있어도 드러나지 않은 것을 알 도리는 없는 법입니다. 심판은 하느님에게 맡기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뜻입니다.

새 부대

포도주가 새 것 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도대체 뭘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을 담아낼 새 부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간단하게 옛 부대를 살펴보면 됩니다. 구약의 규율과 틀이 바로 옛 부대이지요. 사람들이 도덕적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율법 규정을 준수하고 예식을 격식에 맞추어 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헌데 그 부대는 옛 부대입니다. 낡은 부대이지요. 그래서 오래된 포도주는 담을 수 있어도 새 포도주를 담기에는 부적합한 부대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 바로 안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한다는 그 가르침을 담기 위해서는 ‘새 부대’가 필요한 법입니다. 하지만 이 새 부대라는 것은 옛 부대, 즉 율법 준수와 예식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새 부대는 바로 우리들의 내면, 우리의 영혼의 자리입니다. 진정한 제사가 이루어지고 진정한 규정이 준수되는 자리이지요. 간단하게 설명하면 과거에는 이든 저든 ‘미사만’ 오면 다 되는 것이었습니다. 금육을 잘 지켜서 회를 먹어도 상관없는 것이었지요. 교회에 십일조만 잘 내면 길가다 만나는 거지에게는 찌푸린 인상으로 주머니의 동전을 움켜쥐어도 상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 포도주는 담겨질 새 부대를 요구합니다. 바로 새 마음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이 새 마음은 진정한 제사를 드리는 마음입니다. 미사를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사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미사가 끝나고 나서 도 미사의 효력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단순한 규정의 준수가 아니라 진실한 내면의 규정을 준수하는 삶인 것입니다.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낡은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다가 찢겨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포도주도 부대도 못 쓰는 법입니다.

먹고 마시기만 하는 제자들

만일 2시간짜리 어느 영화에서 단 한 장면만 뽑아내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얼마나 그 영화의 진정한 성격을 알아맞힐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코메디 멜로물에서 잠깐 나오는 주인공의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만을 뽑아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혹은 액션 영화에서 잠깐 나오는 두 남녀의 열애 장면을 뽑아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이 영화의 성격을 논하라고 한다면 분명 사람들은 엉뚱한 소리를 마구 해 댈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셨습니다. 왜냐면 먹고 마시는 축제의 시기였기 때문이지요. 이 땅은 기다리던 구세주를 드디어 만났고 사람들은 기뻐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뻐했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스승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난 당하고 죽었습니다. 인생의 한 단편만을 살펴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인생은 마지막에 가서야 그 진실한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셈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이 됩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우울하시다구요? 하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지금의 어두운 시기는 보다 밝은 시기를 위한 도움닫기인 셈이지요. 하느님은 그 어느 누구도 소홀히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이에게는 저마다의 시기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런 여러가지 시기들을 체험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꽃이 만발하는 봄만 있다면 세상은 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열기 이면의 시원한 물놀이를 상실하게 되고, 가을의 풍성한 추수도 없을 것이며, 겨울의 따스한 커피 한 잔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낚을 것인가?

베드로에게 가서 그물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안될 걸 알면서 갑니다. 그리고는 엄청난 결과를 얻지요. 우리는 이 복음의 사화를 접하면서 수많은 시기동안 현실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작은 투자로 많은 결과물을 양산하는 꿈을 꾸곤 하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좁고 세상에 물든 마음은 물질을 되새기면서 이런 일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지요. 그저 복음 한 귀퉁이에 나오는 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무엇을 낚을 것입니까?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낚고 싶은 것입니까? 솔직하니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실제로 많은 마음들을 낚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는 마음들을 낚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들도 낚인 셈입니다. 저는 제가 가진 모든 재주를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느님을 전하고 그분의 좋으심을 전하고 우리가 지닌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중이지요. 제 낚시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맡길 뿐입니다. 저는 그저 쓸모없는 종이니까요. 지금의 세상을 보면 뭐가 되겠나 싶습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것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왕따 당할 것만 같습니다.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 친구들은 여러분들이 예상하는 대로 왕따를 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실패자가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박해를 받는 자는 행복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의 마음이 멀어져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듣고 나누고픈 마음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의 마음이 너무 세상에 길들여져 있고 어두움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일개 노가다꾼이 사장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작업 반장

배고픔과 욕구

밥을 먹는 최적의 시기는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아닌 ‘배가 고플 때’입니다. 하지만 배가 고픈 것과 단순히 먹고 싶은 욕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먹고 싶은 욕구를 한껏 끌어올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은데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풍조를 조성해 놓았습니다.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양분이 부족한 몸의 정당한 반응이고 먹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은 배고픔과는 별개로 그것의 맛과 향을 즐기려는 욕구를 지닌 것입니다. 그래서 배고픔은 언제나 정당하지만 욕구는 곧잘 ‘탐욕’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시간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되어서 먹어야 한다는 말은 배가 고파져서 먹어야 한다는 말이지 시간을 재어서 딱 떨어지는 시간에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욕구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됩니다. 그럼 욕구를 채우는 것은 늘 나쁜 것인가요? 아닙니다. 허락되는 선에서는 욕구를 채워도 됩니다. 아이가 초컬릿을 한 조각 먹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초컬릿을 계속 원한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초컬릿을 먹고 싶다고 다른 친구가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을 빼앗아 먹어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원하는 물건을 구입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당하게 번 돈으로 필요한 것, 그리고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는 것은 하등의 하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에 중독되어 간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다른 악덕을 행해야 한다면 그것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올바르게 잘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그 어떤 찌꺼기도 남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어둠의 영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당한 욕구’를 들고와서 우리를 곧잘 유혹해 냅니다. 그러니 조금은 배가 고픈 것이 낫습니다. 조금은 절제를 하는 것이 낫습니다. 모든 것을 풍요롭게 누리다보면 반드시 길

분노

- 신부님 분노가 뭔가요? 성경 강의를 끝내고 나서 성경 강의의 유일한 남성 참석자 두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 좋은 분노가 있고 나쁜 분노가 있나요? - 음… 분노라는 것은 하나의 감정이지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따귀를 맞았을 때에 순간 끓어오르는 감정도 분노이지요. 이런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본능적인 것이랍니다. 하지만 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분노의 윤리성이 나뉘어지는 셈이지요. 그 분노를 바탕으로 선을 할 수도, 반대로 악을 저지를 수도 있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끓어오르는 감정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이지요. - 예수님도 성전에서 상인들에게 화내셨지요? 의로운 분노도 있는 건가요? - 네, 때로는 예수님도 분노에 사로잡히시곤 했지요. 그리고 성전에서는 사람들을 쫓아낸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분은 도무지 죄라는 것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당신은 끓어오르는 마음을 바탕으로 그 다음 할 일을 하신 것 뿐이지요. 성전에서 보인 행동은 사실 계산된 것이었어요.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그저 제 할 일을 하도록 구실을 준 것이었지요. 물론 그 순간의 성전 정화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집에 대한 가치를 가르쳐 주려고도 한 것이구요. 하지만 예수님이 성전에 간 것은 그때 한 번 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이 요구하는 대로 또 기회가 닿는 대로 성전에 가셨을테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상인들을 쫓아내지는 않으셨어요. 예수님의 그 행동은 예수님의 수난이 다가옴에 따라서 당신의 수난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행위였어요. 분노가 일어나고 나면 우리는 그 뒤에 할 일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 분노를 그대로 쏟아내서 그 분노를 일으킨 이에게 돌려주느냐 아니면 그 분노를 넘어서서 그를 용서하고 나아가 그를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격한 감정은 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행동이 보다 중요한 것이랍니다. 화가 난다고 그걸 고스란히 돌려주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해요. 우리의 분

우리는 종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와도 종의 계약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악의 종입니다. 우리의 더럽혀진 욕구와 죄악은 우리를 외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이 듭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 쇠사슬을 끊고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자유. 하지만 죄인들에게 이 자유는 도리어 구속으로 느껴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속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진정한 자유의 가치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더욱더 구속 시키기만 합니다. 우리가 찾는 보물은 우리의 내면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사과를 좋아하는 아이와 귤을 좋아하는 아이가 시장에 가서 제가 좋아하는 과일을 바라보듯이 우리의 마음도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좋아하는 이가 그에 반대되는 것을 찾을리가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보다도 세상과 물질을 더욱 사랑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표현을 하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또한 나에게 나름의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상태입니다. 그냥 그런 줄 알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갈수록 더욱 죄와 욕구의 종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마치 담배를 처음 피운 아이에게 담배를 멀리하게 설득하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벌써 십수년간 담배에 길들여져 온 이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욕구에 너무나도 길들여져 온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그분은 원하시는 걸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우리의 구속을 끊어내시고 우리를 구출해 내실 것입니다. 마치 모이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내셨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의 선택은 유효합니다. 구원을 위해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르는

선교 7년차

선교를 한 지 햇수로만 7년차가 되었습니다. 아직 많이 모자란 느낌이 들지만 한국에서 파견된 여느 선교사에게 좀처럼 뒤지지는 않는 경력인 셈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느끼는 것은 선교는 연차로 따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선교는 ‘헌신’으로 따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에 헌신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수많은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어느 공동체에 건물을 짓고 그룹을 형성하고, 언뜻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 수많은 결과물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내세우고 선교를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강한 유혹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선교의 나날들이 부정되는 느낌이 드니까요. 헌신이라는 의미의 이 선교는 바로 ‘하느님의 뜻’을 향한 헌신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곳에 가고 하느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 선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선교지의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는 일은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부자 나라에 가서 불쌍한 표정을 좀 짓고, 불쌍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얻어온 기금으로 사람들을 동원해서 눈에 드러나는 건물을 짓고 입에 먹거리를 넣어주면 사람들을 모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이들은 그렇게 사라져 갑니다. 우리 나라의 전쟁 후에 밀려든 신앙인들을 두고 하는 말인 ‘밀가루 신자’라는 말 속에는 그나마 저의 막연한 환상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체험에 비추어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헌신이 없이는 밀가루 신자가 보통 신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선교사의 차원에서도 그리고 받아들이는 신앙인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돈이나 다른 목적으로 모인 이들은 그 목적이 사라지고 나면 그들의 마음도 멀어져 갑니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는 목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이용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본질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사람들이 모이

욕구와 건강

사람의 몸은 하나의 정밀한 기계와도 같습니다. 모든 것이 균형을 갖추게 되어 있고 잘 짜여 있지요. 음식물을 분해하고 소화하고 그것을 처리하여 영양분을 뽑아 쓰고 남은 것을 배출하는 시스템, 공기를 들이마셔 산소를 추출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시스템, 각 관절의 구동과 내분비계의 각종 호르몬들의 조화는 우리의 몸이 생명을 지탱하게 하는데 최적화하여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틀어지면 우리의 생명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문제는 이 완벽한 기계가 왜 고장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고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딘가 심하게 부딪히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사고가 생길 수 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몸은 보호 기능을 작동시키고 자가 치유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 수술이나 외부의 약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지요. 헌데 우리의 몸을 우리가 스스로 망가뜨리는 건 정말 답이 없는 셈입니다. 집어 넣어서는 안될 독극물을 주입하거나 과한 영양분을 섭취하거나 필요한 작동을 시키지 않고 방치하거나 하는 식의 우리 스스로의 오작동이 결국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오작동의 원인은 우리의 ‘탐욕’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밤에 무심코 냉장고를 열어보는 체험을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배고픔에 따라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먹는 것’을 원하고 그것에 버릇이 들어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과하게 먹고는 또 무리하게 살을 빼려고 합니다. 그러니 조화 속에 움직여야 할 몸이 과한 영양분과 무리한 운동으로 조금씩 망가져가는 셈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우리 몸의 필요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치 않은 것을 집어넣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몸이 필요한 만큼 적당히 움직여 주면 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럴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짧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신경써야 할 일

우리는 굉장히 수동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속담처럼 감나무 밑에 앉아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수 있지요. 하지만 감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우리는 더욱더 배가 고프게 됩니다. 그리고 설령 떨어지더라도 우리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떨어져 그만 으깨어져 버리기도 하지요. 우리는 원하는 걸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뭘 원하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요. 밥벌이는 누구나 합니다. 배가 고프면 정신이 들기 때문이지요. 제가 말하는 건 누구나 하는 밥벌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다 심층적인 차원의 이야기이지요. 사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아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신자들은 ‘수동적’입니다. 뭔가 일어나기를 바라지요. 하지만 아무리 앉아서 기다려봐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기는 커녕 도로 나쁜 일만 자꾸 생기지요. 문제의 근원은 우리가 일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것, 바른 것, 좋은 것을 찾아 나서지 않고 그저 나쁜 일이나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의 욕구대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려다보니 우리의 욕구는 늘 엇나가게 마련이고 결국 나쁜 일만 생기는 셈이지요. 사람을 살리려는 사람은 제 목숨에 대해서 덜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살려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점점 죽어가는 셈이지요. 차라리 살리다 죽는 길을 택하는 것이 낫습니다.

-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물었다. 이제 막 기적의 빵을 먹고는 찾아온 사람 몇명이서 뭔가 청할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름 군중들의 우두머리인 듯 보였다. 행색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은 달랐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을 온유한 모습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물으셨다. -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 주님, 주님께서 저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웃음 다른 한편으로 늘 지니시던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셨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늘 느끼시는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이었다. - 저희는 주님께서 왕이 되시길 바랍니다. - 여러분들은 이해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다시 제자들을 모으셨다. 근처에서 자신들이 받은 몫의 빵과 물고기를 먹던 제자들이 주섬주섬 모여 들기 시작했다. - 이 빵은 입으로 들어가서 뒷간으로 다시 나오게 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얻은 빵이지만 결과는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이 빵은 여러분들에게 전하려는 가르침의 도구일 뿐입니다. 제자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이런 저런 의견이 오갔다. 요한 사도가 다른 제자들을 조용히 시키면서 예수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께로 시선을 모았다. - 제가 전하려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권능, 그리고 부족하지 않은 당신의 은총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 네네, 이해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 왕이라구요? 왕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물론 저는 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저는 들어올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그만 돌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달라는 청을 드리러 온 이들이 물러갔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셨다. - 잘 들으십시오. 저는 수난 당하고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

한때 이성으로 나를 이끄는 이들에게 환호를 했습니다. 그들의 설명은 아구가 딱딱 맞아들어갔고 정확했습니다. A와 B와 C로 이루어진 방정식과도 같은 그들의 말은 나의 이성을 강하게 자극해서 사실들을 명확하게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의 환호는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관념과 이성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나는 부조화와 불합리성 투성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대로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고 그에 따라 제멋대로 반응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셈이었지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흘러 전혀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비적인 영역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내 눈앞에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체험이었지요. 즉, 이성과 감성으로도 감지되지 않는 제3의 영역이 존재한 셈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영역이었고, 그 신앙의 영역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실존하는 영역이었지요. 지금의 저 자신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신앙에 점점 눈을 떠 가는 중입니다. 즉 이 말 자체로 아직도 나 자신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완전하시고 그분만이 모든 권한을 지니고 계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서로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고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해야 할 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해 만으로도, 느끼는 것 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바를 살아갑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게 되면 그 세상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인정하게 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도, 사랑도, 정의도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을 믿고 받아들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진리와 사랑과

하늘 아빠

우리 아빠는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언제나 저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려고 하시죠. 하지만 그때는 모르다가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보다는 투정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제가 넘어져도 화내지 않습니다. 도로 일으켜 세우고 먼지를 털어주시지요. 가끔은 제가 화를 내도 금새 돌아서서 잘못했다고 빌면 언제라도 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빠는 저를 위해서 나중에 최고의 것을 준비해 두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빠만 믿고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게 뭔지는 알지 못하지만 저는 아빠를 믿기에 그 약속도 믿습니다. 오늘도 아빠는 저를 지켜보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걸어갑니다. 우리 하늘 아빠를 믿으니까요.

음식으로 배우는 우리 욕구의 의미

음식 가운데에는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은 여러가지 구미에 맞게 조리된 음식이고 맛없는 음식은 별다른 것 없이 그냥 먹을수 있게만 준비된 음식입니다. 또 음식 가운데에는 몸에 좋은 건강하고 좋은 음식이 있고, 반대로 몸을 해치는 건강하지 못하고 나쁜 음식이 있습니다. 만일 내 안에 면역체계가 잘 작동하고 있고 나쁜 음식을 먹더라도 충분히 스스로를 보호할 정도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나의 보호체계를 넘어설 정도로 나쁜 것을 집어 넣는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음식의 맛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음식인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음식이라면 언제고 먹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음식은 가급적 쳐다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 더 구미에 당기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 음식을 더 먹고 싶어하지요. 반대로 건강한 음식들은 보통은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싶은 욕구가 들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건강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그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지요. 이 글을 유심히 잘 읽어서 이해한 사람이면 이 글의 음식 대신에 우리가 지닐 수 있는 그 어떤 ‘욕구’든지 끼워 넣어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자네 이것 좀 해보지 않겠나?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첫 제안에서 드러나는 그 형태와 색깔, 혹은 맛만을 보고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좋아 보이면 덥석 물어 버리지요. 그리고는 나중에 가서야 속은 것을 알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사탄이 낚시하는 방법입니다. 아주 지독한 것을 포장을 잘 해서는 내미는 것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입니다. 그 제안을 얼른 좋다고 수용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탄에게 공짜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어준 만큼 갚을 요구하게 마련이지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제안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좋은 것을 내미시지만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시험해 보십니다. 그래서 그 제안의 외면에는 통상적으로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분별력이 없는 이들은 이를 거절하고 맙니다. 정말 귀한 보석의 원석인데 가공되지 않아서 못나 보이는 걸 알지 못하고 그냥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리고 말지요. 그리고나서는 나중에 가서 후회를 합니다. 그때 그걸 잘 받아서 간직했더라면 정말 지금의 내 모습이 다를텐데 하고 생각을 하지요. 하지만 거절한 건 바로 자기자신인 셈입니다. 우리 앞에 놓이는 제안 중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공허의 이유

사람이 공허함 또는 허무함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요?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채워져야 할 것을 채우지 않고 전혀 엉뚱한 것을 채우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목이 마른데 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밥이 맛있다면 잠시 목마름을 잊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목이 마른 건 목이 마른 것이지요. 밥을 먹는 동안에는 잊을 수 있어도 결국 목을 축이지 않으면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허를 느끼는 것은 육적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영적 공허는 세상적 기쁨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헌데 우리는 공허를 느끼기 시작하면 세상 안에서 그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여러가지 욕구들을 채우면서 그 공허를 메꾸려 하지요. 하지만 그 공허는 메꾸어지지 않고 도리어 갈증을 더하는 셈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영적 공허를 채울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신앙의 선배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하느님도 보이지 않고 그분의 뜻은 더더욱이 그런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이런 사람들 앞에서 두 가지만 청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아주 단순하고도 가장 중요한 원리이지요. 첫째는 ‘온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것만 잊지 않으면 크게 엇나가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질문을 받으면 또 자기들 상황을 해석해 달라고 징징댈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런데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느냐? 내가 아는 사람이 이런 억울한 일을 했는데 그를 어찌 사랑하느냐? 라고 따지고 묻지요. 즉 사람들은 ‘메뉴얼’을 찾습니다. 모든 순간과 상황이 적힌 메뉴얼을 찾는 거지요. 마치 전자제품 사용 설명서처럼 A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을, B의 경우에는 저런 방법을 찾습니다. 그런 게 있을리가 없지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우리의 삶은 유기체입니다. 역동적이고 변화하지요. 우리는 근본 질문을 스스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