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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14의 게시물 표시

산을 움직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지니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산을 옮긴 이가 있으니 자신의 아내가 산으로 가로막혀 지척에 있는 병원에 가지 못해서 둘러 가다가 죽어버린 후에 22년 동안 맨손으로 산 하나를 옮긴 사람이 있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진정한 ‘산’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다름 아닌 우리 내면에 쌓인 ‘산’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무더기, 세상을 향한 강렬한 의지는 이미 우리 내면에 ‘산’이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거기에서 조금씩 덜어 낸다면 22년, 혹은 그 이상이 넘게도 걸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일을 일순간에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곧 기적의 근본이 되는 힘이지요. 하느님의 절대성에 대해서 우리가 진실로 믿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 내면의 산도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산을 움직이는 믿음, 과연 무엇이 진정한 산인가에 대한 고민은 스스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로서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일 뿐이니까요.

변하지 않는 그들

우리 동네에는 술에 쩔어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이 성당에 오면 늘 뒷자리에 앉아서는 미사 구경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는 늘 어두운 구석이 있지요. 관심있게 보다 보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럼 그들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그런 어두움의 삶의 결과에 대해서 알려주지요. 그럼, 그런 말들을 들은 그들이 자신의 삶을 바꿀까요? 대다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하게 되지요. 설령 잠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한들 궁극적으로 변화되지는 않는 셈입니다. 그들은 이날 어쩔 수 없이 어떤 이유로 미사에 왔지만 결국 집에 돌아가는 순간부터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럼 저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일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영혼들 중에 하나라도 진리를 깨달아 변화하게 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공로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가르침은 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런 척 해 보아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실제 일어나는 삶에서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응답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선한 일을 그쳐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럴 수록 더 힘을 내어 나아가야 합니다. 어둠의 세력이 강할수록 빛은 더욱 밝게 빛나게 마련이니까요. 우리의 모든 일들은 제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 가치를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분명 힘들고 지치는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들은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셈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예비된 수난을 몇 번이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이런 수난이 있는 것이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 되지요.

전체와 개인

우리 몸의 지체는 ‘나 중심’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몸의 지체는 여지없이 몸 전체를 위해서 봉사합니다. 오른손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고, 왼발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통’이 유발될 때에는 온 몸이 그 지체를 향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좋은 탈렌트를 보게 되면, 우리는 그 즉시 ‘나를 위한 유용성’을 떠올립니다. 그 좋은 탈렌트가 나를 위해서 어떻게 쓰여질 수 있을까를 가늠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그 탈렌트의 좋고 나쁨을 결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것이 나를 위해서 쓰일 때에는 아무리 하찮은 탈렌트라도 좋은 것이고, 반대로 그것이 나를 위해서 쓰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쓸데없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에 불과합니다. 모든 탈렌트는 그 쓰임새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쓰임새는 전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발이 튼튼한 이유는 잘 걷고 달리기 위함이고, 손가락이 유연한 관절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사물들을 잘 다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지체는 전체의 몸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손이 발톱의 페디큐어를 위해서만 봉사할리가 없고, 내 귀가 왼손의 쓰임새를 위해서만 봉사하지도 않습니다. 몸 전체의 유용성, 우리는 거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류 공동체 전체의 유용성, 그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류 공동체라는 몸이 걸어나가는 데에 곤란을 겪는 아픔에 하느님은 집중하십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데에 너무나 익숙합니다. 나를 위해서 어떻게 쓰일지를 열심히 고민하고 그것에만 집중합니다. 내 돈, 내 가족, 내 직장… 그리고 거기에 도움되는 여러 것들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결국 나 자신의 쓰임새도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교회의 몸을 위해서 그 적합한 쓰임새가 있음에도 모든 것을 ‘나’ 위주로 해석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부족한 실천

어느 정도 이해를 다졌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죽은 배움이 되고 맙니다. 의자 만드는 법을 배웠으면 실제로 의자를 만들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의자를 만들면서 손가락에 힘도 늘어가고 실제적인 지식들도 더욱 늘어가는 것이지요. 스마트폰의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이 여러가지 실질적인 지식에 접근하는 수단이 굉장히 쉬워졌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저 성당에 나와서 신부님이 하는 강론, 때로는 지루한 강론을 들으면서도 소박한 신심과 인내를 다해서 앉아 머무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내면에 영적인 힘이 도리어 더욱 길러졌지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어졌습니다. 뭔가 조금만 자기 기준과 맞지 않아도 ‘저 신부는 쓸모없다’라고 주교님이 하셔야 할 일을 대신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사제를 찾아 영적 단물을 빨아 먹습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장하느냐?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사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지식을 많이 갖춘다고 사람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인내와 고난 안에서 자신이 아는 바를 실천할 때에 사람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배경 지식을 단단하게 꾸미지만 실제로는 전혀 의롭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약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전 세대보다 오히려 더 참을성이 없고,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말 많은 친구와 머물러서 진득하게 들을 줄도 알아야 하고, 설령 그가 엉뚱한 소리를 해도 인내심을 갖고 경청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악습이 있는 가족이 있다면 그 악습을 두고 비난하고 힐책하기 전에 먼저 다가가 따스하게 안아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전공서적의 글씨를 읽을 줄 안다고 그 지식을 습득한 게 아닙니다. 그 지식을 실제적인 영역에서 쓸 줄 알아야 비로소 그 지식을 진정으로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악마의 의로움?

악마는 XX적으로 의롭습니다. 네? 이게 무슨 말이랍니까? 악마가 의롭다니요? 네 그렇습니다. 악마는 의롭습니다. 악마는 ‘율법적으로’ 의롭습니다. 악마는 율법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모두 지킵니다. 악마는 절대로 허락되지 않은 선에서 노는 법이 없습니다. 악마는 모든 일들을 인간의 자유의지의 동의 하에 수행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악마들은 모두 예의를 갖추고 심지어는 신앙고백도 합니다. 악마들은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앞에서 상응하는 행위를 모두 합니다. 그래서 악마는 율법적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악마는 하느님 앞에서 의롭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증오하고 기피합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예를 갖추지만 결국은 물어뜯고 해치려고 합니다. 그것이 악마의 위선이고 기만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악한 존재들 앞에서 혼란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다 맞는 말이지만 악한 존재들 앞에서 인간은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친구가 나에게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럼 그 손해를 끼친 것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스스로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보상 받고 싶어하는 은밀한 마음도 생겨나게 되고, 설령 그 친구가 손해를 끼친 것을 돌려준다고 하더라도 ‘앙심’이 남게 됩니다. 물론 손해를 끼친것을 돌려주지 않을 때에는 더욱 극심한 내면의 혼란스러움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그 친구를 용서하고, 그 친구가 끼친 손해를 나 스스로 기워갚는다는 것은 ‘미친 생각’일 뿐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지극히 ‘의로운’ 사람들이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지극히 ‘율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 친구는 손해를 끼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나는 손해를 보상받아야 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내면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증오’는 여기에서 전혀 고려

무모함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해 무모한 상상을 하곤 합니다. 성인전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상상을 하곤 하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곤 합니다. 아버지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은 프란치스코 성인을 상상하면서 나도 그런 일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실제로 나는 아주 사소한 모욕적인 행동이나 언사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의 실제는 생각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훈련을 예비하고 있지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멀고도 먼 셈입니다. 하지만 무모한 상상은 금물입니다. 다만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도전거리들부터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넷에 신상 가방이 올라오면 당장에 눈길이 가면서 벌써부터 온전한 가난을 꿈꾸지 마십시오. 권력있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어하면서 권력에 압제 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항변하겠다는 건 아이러니일 뿐입니다. 내 가족 중의 한 구성원도 견뎌내지 못하면서 병자를 돌보겠다는 꿈을 꾸는 것도 웃기는 일입니다. 병자를 돌보는 일은 어느 로맨스 영화에서 창백한 얼굴로 새근대며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지그시 바라보는 게 아닙니다. 병자를 돌보는 일은 현실입니다. 무모함은 교만과도 큰 관계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무모함을 향해 나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무모함은 교만에서 비롯합니다. 작은일에서부터 힘을 키워야 훗날 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대뜸 큰일부터 맡는 상상을 하다보면 작은일도 소홀하게 마련이구요.

감사

하느님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감사는 커녕 모독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인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감사 이전에 하느님과 셈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버리고 언제나 뭔가를 요구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미사에서는 전혀 ‘감사’와 ‘찬양’의 향기가 솟아오르지 않는 무미건조하고 고리타분한 반복되는 예식의 냄새만 나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받은 이들, 아무 이유없이 무상으로 수여받은 이들이 드릴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은 이 세상을 조성해 두셨고, 우리의 생명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있기까지 필요한 것들을 조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두움’, ‘흠’에만 집착합니다. 내 인생의 모든 찬란한 긍정성 가운데에서 내가 겪은 삶의 비극에만 집중 조명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나마도 때로는 나 자신의 어두움에서 비롯한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괜히 욕심 내었다가 그리 된 셈이지요. 헌데 그런 흠을 두고 우리는 하느님을 비난하려고 합니다. 왜 나에게 이딴 삶을 주셨느냐고 하느님에게 항의를 합니다. 배은 망덕도 이정도면 수준급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받은 것을 곰곰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진중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너무나 많은 헛된 것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말 하루에 단 5분도 묵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마치 어느 소설에나 나올법한 극도로 빈곤하고 극도로 삶에 쫓기는 생활을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걸까요?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주어진 것들, 실제로는 우리가 일궈내지 못할 수많은 선물들에 감사할 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된 기적의 의미

생선 가게 앞에 생선 토막이 하나 떨어져 있고, 저 귀퉁이 모서리에서 비쩍 마른 길고양이가 나타나 생선 가게 앞을 지나갈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우리는 일어날 일을 짐작하는 셈입니다. 사람들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고 일어날 법한 일들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느정도는 예측이 가능한 셈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예비된 것이고,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유혹에 걸려 넘어질 기회가 더 많은 셈이지요.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살필 줄 아는 시선이 늘어가면서 한 인간의 방향성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피눈물을 흘리는 성모님’을 보았다고 합시다. 과연 그는 그 성모님을 보고 내면의 방향을 바꾸게 될까요? 아니면 자신의 돈을 벌려는 마음을 이 성모님을 통해서 이루려고 할까요? 이 질문을 잘 고찰해 본다면 과연 진정한 기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에게 표징을 요구했을 때에 예수님이 요나의 기적 말고는 보여줄 게 없다고 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셈이지요. 사람은 내면의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겉으로 아무리 신기한 현상을 보여주어도 소용없는 셈입니다. 하늘의 십자가는 무신론자를 신앙인으로 갑작스레 뒤바꾸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런 저런 의심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지요. 참된 기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웃을 향해서 진실한 신앙의 모습을 보일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런 우리의 신앙의 빛을 바라보고 자신들도 빛을 향해서 나아오고 싶어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진정한 기적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나의 신앙기

제가 가장 먼저 기억하는 저의 신앙은 다름 아닌 부모님의 신앙이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가득했고 집안에 있는 성물들에 무척 관심이 많았습니다. 로사리오 묵주에 있는 십자고상의 그 정밀함을 유심히 관찰하는 정도의 관심이었지요. 정작 거기에 매달려 있는 분에 대해서는 크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이라는 곳에서는 뭔가 엄숙한 느낌을 받았지요. 아마 인지력이 갓 생겨난 아이에게 다가온 첫 거룩함의 체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던 시기에 삼위일체를 비유를 들어가며 열심히 가르치던 교리교사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당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걸 그래도 어떻게든 알려 주려고 노력하셨던 모습이 기억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체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직접 제병을 들고 와서는 제병을 낼름낼름 집어먹던 신부님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우리로서는 그거 하나 먹으려고 난리였는데 신부님은 마치 과자 먹듯이 제병을 먹으니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복사단을 열심히 하면서 규율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형과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새벽미사에 복사 서러 나가던 기억이 납니다. 추운 날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맡은 책임을 다하려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이후로 성당은 나의 놀이공간이었습니다. 물론 학교에도 친구가 있었지만 성당에도 친구가 있었지요. 구미에 살다가 대구로 이사를 와서는 더욱 성당에 마음을 두게 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당의 미사는 똑같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저런 친구들을 만났고 그러면서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어서 성당을 딱 한번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부모님에게 엄청 혼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로는 성당을 중심으로 모든 교우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학교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매주 주일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던 중에 성소모임을

악(惡)

악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악하다고 부를까요? 악한 것은 왜 악한 것일까요? 일단은 ‘선’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선은 ‘하느님’과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악은 그 반대일 것입니다. 결국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모든 것. 여기에서 조금은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고착화 시키고 화석처럼 만들고는 그 하느님을 따라가는 것이 선이라고 착각하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는 선한 척을 하면서 실제로는 악한 자들이지요. 법을 잘 지키면 선할 것 같습니다. 교회의 모든 규정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하면 선할 것 같지요. 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하면서 도리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의를 요하는 부분입니다. 이제 악의 문제로 다시 돌아옵시다. 그렇다면 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모든 것은 어디에서 조성되는 것일까요? 사실 모든 결함은 악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보다 실질적인 악은 오직 단 하나의 근원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부분이지요. 자유가 없다면 선도 악도 없는 셈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에게 모든 것은 ‘필연’일 뿐이고 계획되고 프로그램된 것일 뿐이지요. 악은 오직 ‘자유의지’에서만 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지닌 모든 존재라면 ‘악’을 자행할 수 있다는 말이 되고 악을 자행하는 순간 악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과 영적 존재들이 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고 악한 영들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창조 당시에는 선한 존재였고 하느님은 악을 만드신 게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선물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당신의 위대한 섭리 안에서 악의 탄생을 짐작하고 계셨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누가 그 악한 존

죽음

위령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미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날입니다. 마치 우리의 명절날처럼 사람들은 이 날이 되면 반드시 성당에 와서 죽은 이들의 이름을 지향에 올립니다. 일년 내내 성당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던 사람들이 이 날은 성당에 나오지요. 참으로 좋은 복음 선포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가 '죽음'이라는 아주 훌륭한 주제를 강론대에 올릴 수 있지요. 인간은 태어나고 죽습니다. 하지만 탄생이 참으로 아름답게 꾸며지고 축복으로 가득하고 늘 기억하려고 애쓰는 반면, 죽음은 음침하고 어둡고 가리워지고 애써 잊으려고 듭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치 죽음이 없는 듯이 살아가고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발악을 합니다. 온갖 건강식품은 현세적 영생을 광고하고 모든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그것을 실제로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지요.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마치 탄생이 우리 주변에서 늘 존재하고, 매년 우리가 생일을 기억하는 것처럼 죽음도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엄연한 생의 현실인 죽음은 원래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잊으려는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입니다. 기피하고 싶고 싫고 꺼려지는 대상이지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현세에서 즐길 것들이 많은 이들이기도 합니다. 아직 ‘생’의 미련이 대단한 이들이지요. 이들은 살아 있어야지 이러한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에 더욱 ‘집착’합니다. 삶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삶에 집착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반면 죽음을 껴안는 사람은 죽음과 친숙하게 되고 결국 죽음의 실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한 단계이지요. 그리고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껴안고 죽음과 친숙해지고 나면 이들은 생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들은 순간을 즐길 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제라도 찾아올 죽음을 향해서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살아있지만 죽은 이들과,

고통을 지고 가는 이들

우리는 어린 시절 넘어져서 까진 무릎의 상처로 엄마에게 와서 안겨 칭얼대곤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어떤 아픔을 지니고 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요. 그저 내 아픔에 집중해서 온 세상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했고, 엄마는 그런 우리들을 보살핀 것입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어 엄마, 우리의 어머니가 과거 겪어야 했던 아픔들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철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렇게라도 철들지 않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고작 무릎의 상처를 들고 칭얼대면서도 관심과 사랑을 받았는데 그보다 더한 아픔을 지니고도 꿋꿋하게 서 있어야 했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보살펴야 했던 이들의 현실을 뒤늦게서야 깨닫는 셈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고통을 지닌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안고 가는 고통의 크기는 우리가 사업을 실패해서, 혹은 사랑에 실패해서, 또는 인생의 한 고비를 만나서 칭얼대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살아가지요. 예수님에게 아이들이 다가와서 안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언제나 온화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건네는 미소는 잊는 법이 없으셨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와서 예수님에게 안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도처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도 그들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 안에서 수난 당하게 마련입니다.

악의 존재

오늘 여든 아홉살 되시는 수녀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왜 하느님은 악을 단번에 처치하지 않으시고 놓아 두시는가 하는 거예요.” 제 나이 두배도 넘으시는 수녀님께서 해 오시는 질문의 무게가 얼마나 클 것인지는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제가 아는 선에서 대답해 드렸습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존재하는 거예요. 만일 악이 없다면 우리가 굳이 사랑할 일도 없게 되지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간다면 굳이 우리가 나서서 남을 돕고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세상에는 여전히 악이 존재하지만 그 악으로 우리는 더 큰 사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간단한 말로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머리로만 이해하기에는 세상에는 너무나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는 하느님의 손길을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틀어진 정신을 뛰어넘어 훨씬 위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계시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 지상에서만 살아가기에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은 셈입니다. 누군가는 마치 모든 일은 이 지상에서 답이 나와야 하는 것처럼 우겨대지만 저는 우리가 이 땅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반드시 주어진다고 믿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것들은 더욱 온전히 이해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악의 문제는 꾸준히 인류를 괴롭혀 온 문제입니다. 오죽했으면 근 한 세기를 몽땅 살아오신 수녀님에게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을까요. 하지만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니 우리는 하느님에게 기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시선

누구든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와 냉대를 겪은 이들은 그러한 관점으로 다른 이들도 바라보게 되지요. 반대로 사랑을 담뿍 받으며 자란 이들은 자기들 나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말은 그러한 배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단순히 사물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눈을 통해서 비춰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하게 비추는 것들은 선하게 받아들여지고, 실제로는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우리가 악한 빛을 비추면 악하게 비추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만물을 바라보셨고 모든 것을 가장 완전하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었지요. 우리가 아무리 멋들어지게 바라보는 대상도 그분 앞에서는 발가벗겨지게 마련이었고, 반대로 우리에게 아무리 추하게 보이는 대상이라도 그분에게는 그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 셈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의 숨은 마음을 바라보셨고, 또한 순박한 민중들의 고통받는 마음을 바라보셨지요.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에 시선을 빼앗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가 덮씌워진 채로 바라보게 되지요. 아무래도 수억짜리 값비싼 차가 한 필의 말보다는 더 나아 보이는 셈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주님의 빛으로 환히 밝아져 사물들의 진정한 가치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적대감

우리는 미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나 요즘은 공공의 적이 많아져서 아주 공공연히 증오심을 드러내어도 별다른 제제를 받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일련의 사건으로 그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온갖 부정과 비리 앞에서 우리는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을 증오해야 우리편’이라는 도식은 서로에게 적용되어 골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우리 편이 골을 넣어도 기뻐하지만, 상대편이 쓰러져 뼈가 부러지면 더 기뻐하는 식이지요. 적대감은 정말 무서운 것인데도 우리는 아주 공공연하게 그것을 드러냅니다. 남을 심판하는 데에서 적대감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우리의 증오에 합당한 자들이라고 이미 우리 내면에 정해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우리의 모욕과 적의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모든 이들 앞에서 정당화되기를 바라지요. 심지어는 하느님 앞에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의 의견까지 끌어당겨 제멋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 정도면 하느님도 그를 미워하시지 않겠어?’라고 말이지요. 오… 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죄인을 용서하러 오신 분 앞에서 남을 심판하는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의 인정을 바라니 말입니다. 옳은 일을 옳다고 하고, 그른 일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른 일을 했으니 죽어 마땅하고 그의 존재는 땅 위에서 지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적대감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심판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심판은 오직 모든 것을 온전하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몫이지요. 적대감을 조심하십시오. 어느 일만 생각해도 괜히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 그것을 섣불리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심각한 수준인 셈입니다. 분별과 증오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지식과 이해로 풍부해진 사랑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필리 1,9-10)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옳은 줄 알고 그렇게 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진탕 취하는 이들은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그렇게 합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니 그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담배가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합니다. 적어도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생각하지요.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눈을 뜨게 되었고, 자신이 저지른 짓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나서는 하느님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지요. 술을 절제하기 시작하는 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술의 본래의 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술이 사람을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서서히 그를 망가뜨리는지 알게 되지요. 담배를 끊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담배의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며 자신의 몸에 해악을 미치고 있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언뜻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사랑은 수많은 오류와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에게 멋들어진 장난감을 주면서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자녀들의 마음에 ‘탐욕’을 심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우리는 많이들 쓰러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람은 아파 봐야지 성장하게 마련이니까요. 우리의 엉뚱한 사랑의 장막을 다 벗겨내고 나면 결국 하느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크기와 지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감탄 뿐이지요. 하느님은 정말 너무나도 크신 분이십니다.

종과 자유인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에페 6,8)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모든 신분제를 철폐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만들고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 헌신하셨다고 막연히 믿고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존재하는 제도를 전복하려고 노력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한 것은 불의가 사라지는 것이었지 모든 제도와 법을 깡그리 부수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종과 자유인은 당시에 존재했고, 사실 지금도 형태를 바꾸었을 뿐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지금은 ‘자본주의’라는 가면을 덮어쓰고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열려 있다고 광고하면서 안심 시키려 할 뿐이지요. 하지만 ‘신데렐라’가 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부유한 이들의 수발을 드는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면 저마다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속된 이들은 그 위치에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보다 자유로운 이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자유 안에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땅의 것들을 내려놓고 영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지금 우리가 속박되어 있는 수많은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무언가에 구속되어 있는 종과 자유로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우리가 이룰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분이 가르치던 길거리에 함께 머물렀지만 주님은 그들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보좌 신부를 할 적에 수많은 분들의 식사초대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없었고 모두 주임 신부님의 식사 초대 자리에 꿔다 놓은 봇짐처럼 끼어서 만나게 된 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식사 자리는 불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정치 이야기에 경제 이야기 같은 제 일상적인 영역 밖의 주제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제와의 만남의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 주제가 그러한 이들이 어디 다른 데에 나가서 하느님의 이야기를 할 리가 만무합니다. 아니, 어쩌면 사제 앞이라서 그나마 ‘겸손한 척’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 겸손하지도 못했습니다. 자신이 사는 음식점이 얼마나 비싼 곳이며, 지금 앞에 나와 있는 음식이 얼마나 한정판인지 드러내기에 바빴으니까요. 한번은 멋모르고 초대받아간 횟집에서 무심코 집어먹은 별 맛대가리도 없는 회가 실은 한 접시에 십수만원씩 하는 엄청나게 비싼 참복회라는 걸 뒤늦게 알고는 문화적인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의 소박한 초대를 받고 그들이 먹는 엠빠나다(튀김만두)를 나눠 먹으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들의 체험을 듣곤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십수만원짜리 회접시는 없지만 사랑이 있으니까요. 훗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실 것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얼마나 높은 자리를 차지했었는지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지금 머무는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실천했는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마음을 열어 보여드리게 되겠지요.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판도라의 상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성지(聖地)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거룩한 땅입니다. 그분의 발길이 닿고 그분이 업적이 이루어지며 결국 그분이 돌아가신 곳이지요. 그분의 땀이 땅에 떨어졌고, 그분의 피가 땅을 적신 거룩한 곳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 땅은 예수님을 거부한 땅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죽인 역설적인 땅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루카 13,35) 여전히 성지를 향한 순례객들의 수는 엄청납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맛보려는 이들, 하다못해 예수님이 들이마셨던 공기라도 마셔 보려는 노력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걸 말이지요. 성지는 단순히 예수님이 머무셨던 물리적인 공간이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성지는 예수님을 받아들인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진정한 땅은 우리 영혼의 텃밭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성지 그 자체가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성지순례의 비결일 것입니다.

마술

오늘 성경강의를 마치고 구역미사를 드리러 가는데 한 자매가 최근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 동네 아이들에게 요즘 들어 '위하(La Ouija)'라는 게임이 유행인데 여러명이 모여서 한국처럼 분신사바를 좀 큰 단위로 하는 모양입니다. 헌데 문제는 최근에 스물 몇 명이 숲 속에 모여 그런 게임을 하고 난 뒤에 여러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이고 쓰러졌으며 나아가 그들 중 한 명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고 이슈가 되었다고 하네요. 인간의 내면에는 '영'이 존재하고 이 영을 어디에 열어두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영을 세상적인 가치들에 열어 놓으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물들고, 반대로 거룩한 것에 열어 놓으면 당연히 거기에 물들어가지요. 그래서 세상에 물든 사람은 거룩한 미사를 지겨워하고, 반대로 거룩한 것에 물든 이들은 세상 것들에 흥미를 잃어가게 됩니다. 헌데 전혀 엉뚱하게도 '악한 영'에게 마음을 여는 철없는 친구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지요. 제 스스로 소중하고 거룩한 것들 돼지들에게 던지겠다는데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돼지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와서 짓밟던지 망쳐 버리겠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다해 다가서도 유혹이 존재하는데 스스로 어둠을 향해 마음을 열다니요. 안타깝게도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고 그 결과는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신자들 중에서도 정말 '멍청한' 신자들이 있으니 바로 '점'과 '사주'를 보러 다니거나 '타로카드'를 보러 다니는 청년들입니다. 이미 누차 예전에도 가르쳤지만, 이러한 종류의 행위는 스스로의 자유를 스스로 구속하는 행위들입니다. 스스로 감옥에 갇히고자 작정하는 행위이지요. 그리고 그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치뤄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마다 심심풀이이고 장난이었다고 하겠지만 실제적인 결과가 다가

반복

때로는 하도 많은 말을 해서 그 어떤 말도 먹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첫 수업에 들어온 신입생들이나 선생님의 말을 겁을 내지 그 뒤로부터는 벌칙을 받거나 매를 맞지 않고서는 그 어떤 말도 적용되지 않게 마련입니다. 같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가르치는 바를 식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배우는 사람이 의지가 없다는 것도 반증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을 꾸짖고 다시 가르치는 시간에 정신을 차려서 진도를 나갔더라면 수업을 끝내고 그들은 진정한 평화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말 안 듣는 학생인 우리들은 거부하고 거부하고 또 거부하면서 공연히 시간만 낭비한 셈입니다. 진도를 나가야 하는데 복습만 수도없이 하면서 시간을 내버린 셈이지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저마다의 가치가 존재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수다를 떠는 것을 같은 수준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진탕 수다를 떨고 괜시리 한마디 들은 것 때문에 화가 나거나 괜히 내뱉은 말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것보다는 들을 귀가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한 시간인 셈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전혀 의미없는 것들에 비중을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훗날 다 밝혀지게 되겠지요.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셈입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매를 덜 맞겠지만 스스로 안다고 자신하니 큰일입니다.

신자들의 목마름

때로 신자들을 만나면 그들의 목마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름 성당은 많고 사제도 많지만 문제는 제대로 먹이는 사제가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신자들이 먹고 싶어하는 것은 사제의 성사를 집행하는 권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면으로 더욱 굶주려 있는 것은 영적 양식입니다. 우리가 한 본당의 사제로서 사제직분을 이행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미사를 드리는 제관으로서만이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교회의 구조를 관리하는 데에 봉사하는 일과 더불어 신자들의 여러 필요를 보살피는 목자이기도 하며, 나아가 시대의 흐름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내어주는 예언자이기도 한 것입니다.(순서대로 사제직, 왕직, 예언직) 사실 사제직이 한 직분에 고착화되어가는 현상은 비단 오늘날의 일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를 두고 우왕좌왕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따끔한 충고를 주기도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진정 양들의 목마름을 걱정하고 그것을 충족시켜주기를 고민하기보다는 서로의 자리의 높낮이와 명성에 목매다는 이들이 있으니 걱정입니다. 정말 신자들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절로 주어질 것인데 말이지요. 교회가 그 세상 안의 구조에서 해방되기 전까지는 이런 유혹과 실제적인 오류들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구조를 깨부수겠다고 나서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그런 흠이 있는 교회를 통해서도 성령께서는 꾸준히 활동하고 계시니까요. 따라서 무언가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것이어야 하고, 교회를 치유하는 것이어야 하지 체제 전복을 부르짖는 어리석음이어서는 안됩니다. 신자들은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이 생활하는 곳의 사제가 보여주는 소박한 예수

장난감

장난감을 하나 삽니다. 가지고 놀면서 잠시 눈이 즐겁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행동에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세상의 그 어떤 장난감이든 비슷비슷합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영원하리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영원에 합당한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영원하지요. 우리가 누군가에게서 받는 사랑은 영원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다가가서 필요한 도움을 주었을 때에 그들은 그 따스함을 기억합니다. 행복은 그렇게 만들어가야 하는 법입니다. 이미 배가 부른 아이의 흥미를 더 끌어내기 위해서 더 좋은 선물을 마구 마구 주다 보면 아이가 감사하기는 커녕 도리어 나중에는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도움이라는 것은 가장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아갈 때에 비로소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내 장난감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평범한 아이

문득 고등학교때가 생각이 났다. 난 늘 반에서 앞에서 두번째 줄 정도에 앉아서 수업 열심히 듣기 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시내 나가는 것조차 서툴러하던 정도였으니 대충은 알만하리라 생각한다. 특별히 문제를 만들지도 않고, 문제에 가담하지도 않던 정말 조용한 아이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한 친구가 나를 초대했다. 사실 그렇게 친한 부류는 아니었는데 어느 날인가 같이 옷을 사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친구와 만나서 시내에 나가 옷을 샀다. 어떤 보세(당시 가짜 메이커 옷을 파는 가게의 통칭이었다.) 옷가게였는데 정말 엉뚱한 옷들을 샀다. 당시 유행하던 통이 넓은 힙합 바지 같은 것이었다. 다리도 짧은데 그 옷들이 날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만들었을지는 지금 돌이켜보면 충분히 상상할만 하다. 그리고 친구는 나를 어느 주점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 유행하던 레몬소주집. 거기에서 나는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레몬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친구는 주변의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머리가 길었던 아이들이 모두 고등학생들이라고 말이다. 나로서는 전혀 체험해 볼 수 없었던 그런 새로운 문화권 안에서 나는 정말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 뒤로 나는 다시 그런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산 옷도 몇 번 입다가 말았다. 나에게는 그저 그런 청바지나 면바지가 더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라도 그 때 그런 세계에 혹해서 넘어갔더라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돌이켜 보건데 별 친분 관계가 없던 그 친구가 그 당시 나에게 다가왔던 것도 나름의 목적이 있었으리라고 충분히 상상이 된다. 하다못해 그 옷가게 사장과 커미션을 주고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당시에는 그런 나 자신, 다른 멋들어진 아이들처럼 놀아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고 너무나 평범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하느님에게 감사드린다. 하느님께서

사물들의 진가

빨강이 빨강인 이유는 우리가 빨갛다고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색맹인 사람에게는 빨강이나 짙은 초록이나 별 차이가 없지요. (실제로 그런 친구가 있어서 때수건 붉은 것과 초록색 두 장을 두고 실험해 보았던 적도 있습니다.) 개에게는 사물이 흑백으로 보인다고 하기도 합니다. 개에게 화려한 옷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그렇게 익숙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는 세상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인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화려함에 길들여지지 않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게 되지요. 얼굴에 온갖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 여인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 여인의 의중을 분별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머지 않아서 순수한 아이들의 미소를 더 반기게 될 것입니다. 부유한 동네의 화려한 네온사인에 시선을 빼앗길 수 있겠지만 그 밤문화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거짓된 삶의 모습들을 식벽해 낸다면, 오히려 남미의 가난한 동네의 시장통이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것이지요. 삶이 없는 화려함과 진솔함이 있는 소박함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이 더 진가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넘쳐나는 뱃살을 부여잡고 미식을 즐기기 위해서 가는 최고급 레스토랑의 요리보다 배고픈 시절 가난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끓여주는 라면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행복해 질 준비가 된 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더욱 자신들의 마음을 끄는 것을 향해 달음질쳐갈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고, 놓치고 발작적으로 웃었다가 미친듯이 슬퍼하기를 반복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삶은 흘러가고 어느덧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겠지요. 심지어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도 금세 시간이 지나서 인터넷 쇼핑몰에서 최고급 가방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연옥

연옥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의 거룩한 전승과 성경에 관한 기본이해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유구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전승과 저서들 가운데에서 ‘핵심적 내용’을 추려낸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의 핵심구도는 온전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그 책이 모든 세세한 세부적인 내용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전(거룩한 전승)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성경이 교과서라고 한다면 성전은 그 교과서의 내용을 설명하는 다양한 참고서인 셈이지요. ‘연옥’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이유입니다. 연옥이라는 것은 거룩한 전승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옥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옥은 종종 어떤 장소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 다시 말해 하느님이나 주위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는 먼저 정화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연옥입니다.”(YOUCAT 159항) 수많은 성인들은 ‘연옥’의 존재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옥 영혼들과 만날 수 있었고 기도의 도움을 청하는 그들을 만나 실제로도 도왔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라고 묻는다면 저로서도 할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도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제 이해력의 한계를 월등히 뛰어넘는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이지요. 교회가 연옥에 대해서 가르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정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영혼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서 지상의 교회인 우리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한마디로 더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인 셈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 연옥을 ‘공간개념’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엉뚱한 오해들을 만들어 내기 십상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죽고 나면 다른 어느 세상에 옮겨져서 거기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는 식의 우리 수준

긴박감

만일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자유’라는 것은 소중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가 가솔린 통을 들고 불로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그에게 느긋하게 다가가서 아이에게 ‘이 행동을 할 것이니?’라고 묻지는 않습니다. ‘예방 접종은 맞고 싶니?’라고 묻지도 않지요. 그 순간 아이의 의사는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아이가 죽고 나면 아무 소용 없는 것들이니까요. 과연 우리는 ‘구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입장일까요?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걸 다루는 걸까요? 아니면 일단은 받아들이고 난 뒤에 그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요? 일단 아이가 죽을 위험이 없고 나면 운동을 더 해서 건강해지던지 말던지 하는 것은 본인의 추가적인 선택에 맡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사라지고 나면 그 자유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셈이지요.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방향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양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양보가 아니라 무책임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소위 똑똑하다는 이들부터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일을 스스로의 선택에 맡기겠다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선교의 의무를 소홀히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믿는 신앙이 실제로는 ‘공허한 신앙’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스스로부터 영원에 기틀을 세우지 않고 공허한 모래밭에 나무 조각을 하나 얹어 놓은 셈이지요. 그러니 그걸 남에게 전하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과연 우리 신앙의 긴박감의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요? 과연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이 세대’에 대한 한탄은 오늘날 누그러졌을까요? 아니면 도리어 더 긴박해졌을까요?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 자체가 없을수록 실제적인 긴박감은 더 가중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눈이 흐려져 버린 이들이 사물을 더 명확하게 보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헛된 희망인지도 모릅니다.

리마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리마는 바다를 가지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리마의 예술은 샘솟아 흐르고 먼지 쌓인 거리 거리마다 삶의 열정은 존재한다. 회색빛 바다, 시큰둥한 펠리칸, 핏기 없는 페루 소년의 볼 안에는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다. 로사 성녀의 뜨거운 열정 앞에 리마의 삭막함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고 빗자루 수사의 가난한 열정은 리마의 메마름이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진에도 살아남은 기적의 주님은 여전히 리마를 돌보고 계신다. 리마에는 비가 오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 내리고 있다.

침묵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연계 안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의 기적은 하느님 당신이 마련한 자연 질서에 당신의 권능으로 개입하여 드러내는 그분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헌데, 여러분들이 기적을 보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예전에는 엄청난 질환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순간에 씻은 듯이 나았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럼 그 사실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주변에다 소리지를 생각이십니까? 아마도 당신더러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겠다고 여러가지 실제적인 자료들을 준비하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은 그 자료들을 조작해서 들고 온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행여 당신의 말을 마지못해 수긍한다고 합시다. 그 사실이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요?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바뀐다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삶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호기심만 지닐 뿐 자신들의 삶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받게 되는 개인적인 체험들에 대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침묵’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체험하는 그 개인적 현상들 앞에서 특별한 경우 세상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알리라는 메세지가 따로 없는 이상,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체험 앞에서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 일반이고 실제로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런 사랑을 체험하고 침묵 가운데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위의 글을 읽고도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왜 그런 일들을 겪고서 외치지 않는거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보면 하느님을 믿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체험해 보지 않은 데에서 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특은을 입은 수많은 성인들은 감출 수 없는 그런 표지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 영광을 얻기보다 더많은 고난을 겪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제는 뒤집어서 생각해 봅시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되었노라고 고함을 지르는 이들은 십중 팔구 거짓 예언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기현상은 악마도 일으킬

행복에 대한 자기결정권

사람을 행복에 젖게 만드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진지한 고민이 없으면 사람은 행복하다고 억지로 우겨대는 것들에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들 찾는 것이 돈과 권력과 명예 같은 것들이지요. 예를 들어서 외모를 정성스레 꾸미는 한 사람을 떠올려봅시다. 그가 원하는 걸 뭘까요? 그는 누군가가 보아 주기를 바랍니다. 타인의 주목과 시선에서 행복을 느끼려는 것이지요. 바로 인기를 추구하는 명예심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결국 미모를 잃을 때에 불행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최신 유행을 따라 잡으려고 노력할 것이며 얼굴에 잡티가 늘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불행해 하겠지요. 한가지 예를 든 것에 불과하지만 아마 이 글을 보면 한창 자신을 꾸미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몇 차례 그런 경험이 있구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외모를 단정하게 꾸미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많이 치장하고 거기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가 본질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스스로의 행복을 스스로 고민해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왕 찾는 거 아주 제대로 된 행복을 찾으라는 거지요. 남들이 ‘이게 행복이다’라고 우겨서 떠넘겨 받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개나리 꽃을 봐야만 행복하다는 사람은 봄에만 행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숨쉬는 게 행복하다는 사람은 평생을 행복하겠지요. 과연 무엇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으면 전혀 엉뚱한 것만을 뒤쫓다가 뒤늦게야 이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시간은 이미 흘러 버리고 난 뒤이지요. 정말 필요를 넘어선 부유함이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고, 타인들을 수하에 두고 부려 먹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남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우리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

몸의 교회

우리들은 머리를 그리스도로 두고 심장을 성령으로 둔 한 아버지 하느님의 유일한 자녀인 교회 공동체입니다. 몸은 하나의 목적으로 모든 부위를 움직입니다. 손은 성공을 원하고 발은 명예스러워지고, 눈은 미모를 추구하는 식으로 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일 어느 장소에 가기를 원한다면 모든 몸을 움직여 그 일을 하게 되고, 특정한 사명을 수행할 때에도 역시 모든 몸에 그 사명에 합당하게 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나의 목적에 온전히 일치되어 있지요. 눈에 보이는 기관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 기관까지 몸은 늘 성실하게 움직이고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과격한 일을 하고 난 뒤에는 휴식도 필요하지요. 사람은 잠을 자게 마련이고 과하게 일한 부위는 통증을 호소하며 전체 몸에게 휴식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질병도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몸의 정상 작동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존재하지요. 특히나 암세포는 온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자기 혼자 독식하고 자기 혼자 성장하면서 결국 온 몸을 위험에 빠뜨리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몸을 본받아 하나의 목적으로 일치되어 일을 하고,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며, 필요할 때에 휴식하는 것도 잊지 않고, 질병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병에 걸렸을 때에는 정성을 다해 스스로를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에페 4,15-16)

생의 경고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루카 13,8) 이 시대를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그냥 두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둘레도 파고 거름도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한 해를 정성을 다해서 가꾸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뒤는 아버지의 ‘이미 내려진 결정’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긴박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랑의 생활이니까요. 하지만 그 신앙에서 멀어진 이들은 ‘긴박감’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왜냐면 하느님이 지금 우리랑 장난하자는 건 아니니까요. 하느님이 마치 동전 하나 주고 우리를 오락실에 보낸 것 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일생 일대의 기회를 잡은 셈이지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이루어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중독’ 상태에 살아가기 때문에 하느님의 존재부터 의심하게 되고,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는 때는 경고를 받을 때입니다. 수도세를 낸 지가 참으로 오래 되었음에도 깜빡 잊고는 바쁘게 살아가다가 나중에 고지서가 날라와서 연체된 것을 보고 며칠 뒤에 끊긴다고 하면 부랴부랴 내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문제는, 과연 하느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지 않으셨던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통지를 받았단 말입니까?’라고 말이지요.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4-5) 사건과 사고들은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지요. ‘이 생이 모든 것을 말하진 않는단다. 그러니 영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거라.’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어코 이 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

영화평 - Act of killing (다큐멘터리 2012년작)

인도네시아에서 1965년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산당원을 대상으로 자행되었던 대규모 학살에 대한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미 공소시효가 한참 지난 당시의 학살 주동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시 자기들끼리 영화로 재구성해보는 일련의 과정을 담은 영화 메이킹 필름인 셈이지요. 다큐멘터리이기에 영화적인 화려함 같은 것은 없지만, 보는 내내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존재하는 영화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학살을 저질렀음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고,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기는 커녕 여전히 사회의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두 손으로 사람을 죽인 이들의 어지럽고 어두운 내면이 장면 장면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승복의 입을 찢어버리는 공산당을 보여주는 영상물을 초등학교 시절 바라보면서 공산당을 증오하도록 교육을 받아온 저로서는 이 영화 안에 담겨 있는 인도네시아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둠의 세력의 지원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치인들, 언론인들, 그리고 그 안에서 칼춤을 추는 갱단들… 그들은 온갖 화려함을 지니고 있고 수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공허한 소유, 그 공허한 삶을 결코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서라도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거듭 말하지만 영화적 화려함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떤 스릴러 영화보다도 더욱 긴장감을 느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계명의 우선순위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마태 22,37-38) ‘사랑’이라는 통칭으로 표현하지만 분명히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째는 하느님을 향한 전인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어야 합니다. 이 근본적인 순서는 뒤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둘째로 따라오는 것이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드문 일이긴 하지만, 하느님 없는 이웃사랑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에게서 피를 뽑아먹고 사는 악덕 사장들(좋은 분들 말고 악덕 사장들 말입니다.)은 자기 가족을 사랑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핑계가 자신의 가족을 향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스마트폰을 사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직공의 월급을 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요. 물론 극단적인 비유이지만 악인들도 사람을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자신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지요.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인본주의를 표방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인간적인 행동으로 뒤바꿔 버리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때로는 엄청난 활동가로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의 본질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드높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 집단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집단을 극도로 미뭐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들의 사랑은 불완전한 것이지요. 물론 정반대의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인간 사랑을 ‘거부’하고 심하게는 인간을 증오하는 경우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역사 안에서도 우리는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이것도 만만치 않은 엇나간 모습입니다. 거룩한 전쟁이라면서 십자군 전쟁을 하고, 거룩한 재판이라면서 마녀

편안한 신앙생활

고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급적이면 편하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가지를 발명해 내었습니다. 고생스러움을 줄이기 위해서 말이지요. 참 좋은 일이지요. 인간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것 말입니다. 아무래도 손가락으로 뜨거운 국물을 떠먹는 것보다는 국자가 있는 게 나을 수 밖에요. 하지만 이런 편안함의 추구가 마땅히 견뎌야 할 것마저 침투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됩니다. 아이들은 직접 걷고 뛰고 놀고 체험해야 하는데 그런 아이들에게 편하라고 모든 시중을 다 들어주다 보면 결국 인성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한 신앙생활’은 성경에서도 권하는 것입니다. 박해가 일어나면 가서 당하라고 하지 않고 도망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져야만 하는 십자가 마저도 내던지려고 하면 그건 도리어 역효과를 내는 것이지요. 마냥 편안한 신앙생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숨만 쉬고 사는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소변이라도 보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한다면 최소한의 예복은 입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일치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에페 4,1-3) 쌍둥이가 있습니다. 같은 집에 살고 한솥밥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게임기를 누가 하느냐는 문제로 서로 싸웠습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나라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신앙과 같은 마음으로 같은 일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일치는 어느 쪽입니까? 이렇게 극명한 예로 설명을 하면 우리는 참으로 잘 선택합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 안에서 사람들은 어설픈 일치를 해 놓고서는 그게 진정한 일치라고 합니다.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같은 친구 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이유로, 같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일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늘 붙어다니던 친구들이 학교를 마치고 저마다의 삶의 구역에서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부르짖던 일치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그건 거짓 일치였던 것입니다. 바오로사도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권고합니다. 우리가 같은 성령을 받으면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일치할 수 있습니다. 저는 볼리비아에 있지만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선교 사제 신부님의 고충과 사람들을 복음화하려는 열망을 이해할 수 있고, 페루의 동료 사제가 겪는 힘겨운 일에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진정한 복음화의 열정으로 일하는 사제들과 깊은 일치를 나눌 수 있지요. 단순히 외적으로 공유하는 일치는 우리를 진정으로 묶어주지 못합니다.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으로 우리는 궁극적인 참된 내적 일치, 성령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증오의 감옥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59) 루카 복음의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저는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 화해하기 싫은데.” 그렇습니다. 우리는 화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미워하는 이들을 계속 미워하고 싶어하지요. 우리는 당한 손해를 잊을 수 없고, 억울한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당한 만큼 돌려주고 상대도 내가 받은 억울함과 절망과 슬픔과 아픔을 겪고 나서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화해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감옥에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잘못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실제의 감옥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감옥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증오의 감옥’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증오의 순환고리에 말려들고 나면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증오하기 시작하면 그 상대도 나를 증오하게 되고, 결국 서로 증오에 증오를 더해가면서 양자를 모두 영원의 감옥으로 이끌고 가게 됩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모르고 툭 치면, 그 맞은 아이는 억울해 하면서 자신이 당한 아픔을 당해야 한다며 다시 그 아이를 때립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자신이 툭 친것보다 더 세게 때렸다고 또 때리고, 그리고 또 같은 일이 일어나면서 결국 둘이서 투닥거리면서 싸우게 됩니다. 나라 사이의 전쟁이라는 것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의 시대에 서로 사랑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라도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다른 나라를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굳이 무기가 아니라도 경제적으로 얼마든지 짓밟고 있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이 감옥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를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화려한 과거

예전 본당에서 자신이 옛날 대구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음을 은근 자랑하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열심히 신앙생활에 헌신하고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XX극장의 기도(교회의 기도가 아니라 표 받고 질서 잡는 사람)를 했다면서 자랑을 하곤 했지요. 그리고 그때의 깡패들의 무술 실력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발차기가 얼마나 빠른가 하마 사람을 딱 세워놓고 발로 귀때기를 타다닥 때리는데 발이 너무 빨라서 안보이는 거라요.” 참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세상사를 엿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할아버지는 그 깡패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왜 정상적인 직업을 갖고 성실하게 살아가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런 화려한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외적인 화려함 때문에 사람들은 깡패마저도 찬양하곤 합니다. 하지만 훗날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로 감옥에 들어가거나 불행한 일을 당하고 모두가 더럽다는 듯이 멀찍이 떨어지지요. 하지만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화려했던 그가 결국 그 불행을 당하는 그로 바뀌는 것이지요. 멕시코와 남미의 화려한 갱단들이 황금 권총을 지니고 있고 대저택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혹하는 것은 세상 것들을 여전히 너무나도 사랑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꿈꾸지만 그 결과는 받아들이기 싫어합니다. 참으로 이중적인 모습이지요. 하지만 그런 외적 화려함의 추구와 내적 공허는 떨어져 있는 두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할까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왕년에…’라고 뭔가를 내세우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지요. 왕녀의 내가 지닐 수 있었던 것을 지금 지닐 수 없다면 그것은 헛된 것들일 뿐입니다. 왕년에 아무리 예쁘고, 왕년에 아무리 권력을 거느리고, 왕년에 아무리 유명해도 지금은 쭈글쭈글한 노땅인

시대의 풀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루카12,56)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옵니다. 비가 오고 나면 추워질 것이고, 여름에 공기가 습해지면 장마가 오는 것이겠지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하고, 지금 이런 상품이 개발 되었으니 그쪽의 주가가 뛰어 오를 것이라는 예상도 합니다. 그리고 똑똑한 사람들은 그런 흐름을 잘도 알아 맞춥니다. 왜 우리는 시선을 조금 더 넓힐 수 없는 걸까요? 왜 우리는 영원에 시선을 놓을 수는 없는 걸까요? 조금만 더 읽으면, 조금만 더 풀이해 내면 영원 안에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터인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생을 마감합니다. 왜 이 엄연한 현실을 읽지 못하고 영원히 살 현재를 만들고자 하는 걸까요? 왜 우리의 현세의 삶이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현세라는 모래 위에다가 자신의 도성을 쌓으려는 걸까요? 우리들은 위선자들입니다. 똑똑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지독하게도 어리석은 위선자들이지요. 우리는 하나도 똑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지금의 시대를 읽을 줄 안다면 아마 동의할 것인데 실제로 사람들은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지금의 시대야말로 온갖 기술문명이 꽃을 피우는 찬란한 시대라고 착각을 하지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신 손과 두뇌의 능력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경솔하게 반박하는 질문을 하지요. 도대체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자신들이 싸질러놓은 똥을 하느님은 왜 치우지 않느냐고 불만입니다. 하느님은 입히시고 먹이시고 돌보시는데 왜 내 발을 씻고 몸을 닦아주지 않느냐고 투덜대지요. 정작 자신은 하느님 생각은 죽어도 하지 않고 그분이 뭘 원하시는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이 시대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이 시대에서 스스로를 영원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 시대

어둠과 빛, 그리고 혼란 - 언더 더 스킨(Under the Skin) 영화평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SF 스릴러물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의 전라 연기로 더욱 화제가 된 영화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영화 안에서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았습니다.(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십시오.) 어둠 극중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하는 일은 남자들을 유혹해서 집으로 데려가 그들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헌데 그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가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하는 것은, 어둠의 유혹과 거기에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스칼렛 요한슨은 아무나 유혹하지 않습니다. 유혹될 만한 대상을 선정하고 그에게 몇가지 유혹 거리들을 던지면서 그 과정을 심화시켜 나갑니다. 그리고 결국 최종적으로 걸려든 이들을 잡아들이지요. 하지만 때로는 유혹될 마음이 없는 이들(바닷가에서 수영하던 남을 돕는 선한 남자)도 우연한 기회에 잡아들이고, 얼굴은 엉망이지만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이들도 억지로 끌어 들입니다. 어둠이 하는 일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지요. 빛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하는 일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소중한 것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는 결국 자신이 늘 하던 루트에서 벗어나서 빛을 향해 나아가지요. 그 얼굴이 엉망이던 남자를 놓아주고는 자신은 같은 일을 하던 동료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복장도 바뀝니다. 늘 우중충하던 갈색 모피를 벗어던지고 그 안에 입고 있던 분홍빛 스웨터를 입고 방황하지요. 이번에는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호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지요.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도우려고 다가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그의 따스한 마음을 만끽합니다. 이때부터 음악 소리도 바뀝니다. 이전까지는 늘 우중충하던 소리에서 선율이 들리기 시작하지요. 혼란 하지만 여기에서 또 한 단계가 더 나옵니다. 빛을 찾아 나선 그녀에게 여러가지 혼란이 다가오지요.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소중한 것이 없었던 그녀는 그로인해 남자와의

지혜

이유없이 대뜸 욕을 먹으면 화가 납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하지만 잠시라도 생각할 시간을 갖고 내가 욕을 먹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면 불필요한 분노를 억제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 이유없이 욕을 해대는 그를 불쌍히 여길 수도 있게 됩니다. 욕을 해 대는 그의 입을 막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야 마는 사람이니까요.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상황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말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고, 우리의 반응을 정돈할 수 있지요. 지혜라는 것은 하느님 안에 모든 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혜를 지닌 사람은 심지어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악마저도 그 본질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눈물을 닦여질 것이고 모든 선한 행동을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혜를 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내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주님께 구원을 받았으니 이는 영원한 구원이어라. 영원무궁토록 너희는 부끄러움도 수치도 당하지 않으리라.(이사 45,17)

컨트롤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강제적으로 속박해서 끌고 가는 수도 있고, 장시간의 세뇌를 시켜서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요. 하지만 최고의 고단수는 하게 하고자 하는 것을 그 사람이 좋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속성은 ‘선’을 사랑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하지만 아주 교묘한 속임수로 선을 가장한 악을 하게 할 수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은 악을 선인 줄 알고 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을 컨트롤하는 방법인 셈이지요. 그리고 악마가 우리에게 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화나는 일을 만들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선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극도로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사회 현상 속에는 이러한 모습이 많습니다. 스스로 선을 행한다면서 악을 행하는 이들이 많지요. 진정한 컨트롤은 컨트롤 당하는지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일단 한 번 사로잡히고 나면 거침이 없습니다.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그를 원하는 대로 써먹을 수 있게 되지요. 과연 우리가 행하는 것들은 진정한 선을 향한 것일까요? 아니면 선을 가장한 악이 그 안에 숨어있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는 악마의 컨트롤에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비난하고 헐뜯는 것을 그냥 하면 나쁜 짓이 되지만, 죄인에게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요즈음입니다. 이미 ‘용서’라는 개념은 물 건너간지 오래이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용서를 했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그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면서 죄에 죄를 더해갑니다. 악은 저지르기 쉽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내와 인내하면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술을 진탕 먹는 게 더 쉬운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잘 쉬운 길, 하지만 어둠으로 이끄는 길을 택하고 말지요. 우리의 핸들을 함부로 어둠의 영에게 넘기지 마십시오. 차라리 하느님에게 맡기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에게 핸들을 맡길 때에 도리어 하느님

찬양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시편 33,1) 바리사이도 예수님을 찬양한 적이 있습니다. - 어이쿠, 당신은 언제나 올바름을 가르치시는 스승이시지요~ 어둠의 영도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 당신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요오~!!!! 하지만 어울리지 않지요. 그들은 올곧은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은 올곧은 이들이 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찬양이지요. 엇나간 이들은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가식적이고 엇나간 이들이 하는 찬사를 좋다고 받아들이다가는 그들이 지닌 엇나간 마음에 걸려 넘어지고야 맙니다. 무조건 좋은 이야기를 해 준다고 받아들이다가는 얼결에 그 안에 든 썩은 벌레까지 삼키고 말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을 바로 세우고 하느님의 위대함을 찬양하십시오. 너무나 아름다운 기도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시편33,4-5)

음식 먹기

입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가 음식이 되는 건 아닙니다. 먹을 수 있는 걸 넣어야 하고, 요리를 해서 집어 넣어야 하고, 또 받아 삼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지 못할 걸 밀어 넣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먹여야 하는 건 결국 사랑이지 율법책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요리를 해야 합니다. 사랑을 전해주는 사람은 그가 받아들일 수 있게 준비를 해서 주어야 합니다. 이제 겨우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에게 반장 직책을 떠맡기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할 만한 일부터 하게 도와 주어야 합니다. 성경도 잘 풀이해서 줄 필요가 있습니다. 받아들일 사람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가 시리면 찬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아픈 부분은 고치고, 이도 잘 정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설령 단단한 음식이 들어와도 충분히 씹어 삼킬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교회가 전하는 모습들은 너무나도 냉혹하고 강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라도 강한 이, 즉 강한 내면을 지닌 사람은 충분히 그것을 씹어 삼킬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이 약한 이들이 되어주라고 바오로 사도는 권고한 적이 있습니다.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교리교사를 하면 좋은 것들

연말이 되면 보좌 신부님들은 고민입니다. 누군가는 힘들다 하고 누군가는 나간다 하면서 교사들이 신부님에게 고민 거리를 던져주기 시작하지요. 그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남는 사람은 고작 한두 명 뿐이게 되고 그럼 주일학교가 무너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어떻게든 체제를 유지시켜 보겠노라고 열심히 힘들다는 교사들과 술을 퍼곤 하지요.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기 싫다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만큼 힘든 게 없습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 걸까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 보고자 교리교사를 하면 좋은 것들에 대해서 적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을 끄는 방법 가운데에서 최고의 방법은 제 스스로 좋은 걸 알아서 찾아오게 만드는 게 최고니까요. 교리교사를 하면 얻게 되는 세상적으로 좋은 여러가지 것들, 잦은 피정과 연수의 기회, 잦은 술자리, 보좌 신부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 등등은 일단 제외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보다 본질적인 부분으로 바로 파고들지요. 1) 직분의 중요성 신앙을 전해주는 직분은 예수님에게 참으로 사랑받는 직분입니다. 예수님부터도 고을과 고을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지요. 그러니 ‘교리교사’라는 직분은 세상적인 명예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명예로운 직분인 셈입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값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것이지요. 2) 신앙 공동체의 참여 신앙 생활은 혼자 하지 못합니다.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홀로 하늘나라에 가는 일은 없습니다. 교리교사는 사제를 목자로 두고 교사들이 서로 모이는 교사 공동체, 그리고 나아가 교사 스스로 목자가 되어 아이들을 추스리는 각 교리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양측의 입장 한가운데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특성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게 되지요. 리더가 된다는 것, 그리고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양측으로 잘 이해하는 셈입니다. 보좌 신부에게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달라고 떼를 쓰면서 정작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에페3,18)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표현은 우리로서는 ‘공간’을 표현하는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간 안에서 숨쉬고 살아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물리학을 설명하고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의 이 표현은 사도 바오로가 원하는 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뒤의 문장에서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표현대로 마음 깊이 느끼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다시 돌아와보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상응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속좁은 사람’은 그야말로 이 내면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너무나 작아서 다른 것을 품어안을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주 사소한 몇 푼 차이로 신경을 쓰고, 소소한 일까지 경계를 하면서 타인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을 두고 속좁은 사람이라고 말하지요. 이런 사람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그를 무난하게 넘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에 시비를 걸고 모든 것에 역정을 내곤 하지요. 속깊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넓은 아량을 지닌 사람을 나타냅니다. 이런 이들은 사소한 문제에 반응하지 않고 늘 큰 뜻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묵묵하게 그쪽 방향으로 걸어가지요. 마음의 품이 넓으면 넓을수록 품어 안을 수 있는 일의 크기가 커집니다. 이들은 왠만한 것들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커다란 느티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내면, 즉 영혼 안에는 마찬가지로 공간, 물리적 공간이 아닌 영적 공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많은 것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지상에 살아가신 분들 중에 가장 큰 공간을 품은 분은 우리의 성모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이스크림 사먹기

아이스크림을 사온다는 가정을 해 봅시다. 먼저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고, 이어서 아이스크림에 대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오기 위한 준비(동전, 외출할 준비)를 갖추게 되지요. 그리고 일어나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최종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사게 되지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간주하였을 때에, 우리는 먼저 그 첫 아이스크림에 대한 인식처럼 하나의 공통된 인식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지요. 그리고 이어서 그분에 대한 욕구, 필요를 느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그분께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인식이 없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준비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셈입니다. 1) 인식 우리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을까요? 물론 하찮은 피조물이 하느님을 온전히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을 낱낱이 다 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의 한계성은 무한하신 분을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작은 컵에다가 바닷물을 담겠다는 어리석음에 비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릇된 오해들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예 인식하지 않으려는 태도 또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은 어렵다 그러니 아예 시작을 말자는 건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많이 일어나는 일이지요. 하느님에 대해서 신경을 쓰느니 차라리 돈이라도 좀 더 벌겠다는 것이 현대인들의 통상적인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얕은 지식과 흥미 수준에서 머물고 말 뿐이지요. 2) 필요 하느님을 어느정도 인식한다고는 하지만 그분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육체적 쾌락 가운데에서 길을 잃는 것이지요. 배부른 사람은 빵을 더는 찾지 않게 마련입니다. 오직 육적인 쾌락과 그것을 채우는 데에 급급한 이들은 영적인 필요

부족한 실천

오늘날 사람들은 유행처럼 가난을 말하고 교회가 가난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가난’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니, 달리 표현하면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하지요.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던 것들은 유지하면서 가난한 자를 돌보려니 결국 쉬운 방법은 자신보다 더 부유한 자들을 비난하는 방법 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위선적 이론가’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가난을 말로만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이지요. 가난해보지 않고 부족해 보지 않은 그들은 화려함에 둘러싸여 살면서 가난을 강조하고 극심한 부유함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이들입니다. 저는 남미의 가난한 나라인 볼리비아에서도 시내를 벗어난 변두리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적인 가난 안에서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저는 두 눈으로 똑똑히 그들의 가난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칩니다. 어느 가난한 할머니는 나에게 오늘 낳은 달걀을 들고 오고, 얼마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어느 가난한 할아버지는 성당에 나와서 내 강론을 듣고 미사를 마치면 내 손을 꼭 부여잡고 등을 두드려 줍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말할 수 있고, 반대로 가난에 대해서 강조하며 도리어 가난을 이용하는 이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가난을 강조하는 그들의 시선에서 정말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모습보다는 ‘모든 권위의 파괴’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지금 교회의 제도화되고 권력을 갖추고 부유한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남미 교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한국 교회의 중산층화를 넘어선 부유층화는 사실 누가 보더라도 눈에 드러나게 보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가난을 두려워하면서 유행에 편승하게 될는지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더러운 그릇에 파리가 날라 다니는 곳에서 가난한 이들과 식사를 하는 걸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가난한 이들의 권리 옹호에 대

더 많이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 하느님이 영혼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이미 어디에 어떤 영혼을 보낼지 알고 계십니다. 그 영혼의 특성에 따라 보낼 곳에 상황에 가장 적합한 영혼을 보내는 것이지요. 이미 부모가 이러저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고, 거기에 합당한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다들 그렇게 태어난 셈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이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가 빌게이츠가 되기를 바라셨다면 그건 말도 안되는 것이고 무리한 요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법적으로 모든 것이 보장되고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과, 반대로 아프리카 오지에서 초막 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분명 출발부터 불리한 게임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셨다면 그건 상황에 달린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은 모든 상황에서 기쁨을 만들어 냅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놀이를 만들어 내고 주어진 상황에서 숨바꼭질, 고무줄, 비석맞추기, 땅따먹기 등등 온갖 것들을 개발해 내서는 실컷 놉니다. (물론 이는 오늘날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더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참된 행복을 만들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태어난 셈입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빈부 격차라던가 소위 문명화의 정도와는 별 관련성이 없는 공평한 가능성이 주어지는 셈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간으로서 얼마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한가를 두고 공평한 경쟁을 시작하는 셈이지요. 하지만 분명 더 많이 받는 이들은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 사도를 더욱 당신 품 가까이 두신 것처럼, 우리 가운데에는 아주 특별한 달란트를 지니고 시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평한 것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

아주 간단한 논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복음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지식만을 전하면 지식만을 지니고 있는 셈이 되지요. 지식만을 지닌 이가 복음을 전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필요한 은총을 감지했습니다. 자신의 복음 선포 활동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지요. 하느님의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 거냐고 사람들을 묻습니다. 단식이나 기도나 자선도 좋지만, 축복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때에 이미 당신은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 3,7)

은총의 선물

아주 간단한 논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복음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지식만을 전하면 지식만을 지니고 있는 셈이 되지요. 지식만을 지닌 이가 복음을 전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필요한 은총을 감지했습니다. 자신의 복음 선포 활동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지요. 하느님의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 거냐고 사람들을 묻습니다. 단식이나 기도나 자선도 좋지만, 축복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때에 이미 당신은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 3,7)

일치의 올바른 이해

바오로 사도가 가르치는 공동체의 개념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진정한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치라는 개념에 대한 엉뚱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짜장면과 짬뽕을 먹을 때에 우리는 일치를 이야기합니다. ‘통일’이라고 표현되는 한 메뉴로의 일치는 어찌보면 진정한 일치가 아니지요. 짜장면으로 통일을 해 버렸을 때에 짬뽕을 먹고 싶었던 사람에게 그 일치는 폭력일 뿐입니다. 진정한 일치는 근본방향의 일치를 말합니다. 짜장면이나 짬뽕이냐가 아니라, 우리 모두 서로를 존중하고 음식을 즐길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핵심이지요. 만일 이 근본적인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짜장을 먹든 짬뽕을 먹든, 심지어는 볶음밥을 먹든 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 모인 모든 이들은 주어지는 것을 감사히 먹으며 서로의 기쁨을 만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일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회의를 열고 찬반 토론을 하고 어느 음식이 더 나은가 우열을 가린 뒤에 하나의 음식으로 통일을 해서 정돈을 하는 것이지요. 필요하다면 폭력도 불사하는 셈입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다음의 바오로 사도의 구절을 잘 읽어보면 조금은 이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에페2,14-16)

희망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에페2,12)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으면 다시 원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럼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요? 그 하나를 지니고 있던 잠시의 순간, 찰나라도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요? 만일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게 사실입니다. 하다못해 그 하나라도 제대로 가져보고 내버리는 수 밖에요. 그것이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 생에 뭐라도 하나 건져보자.’라는 것이 그들을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라져버릴 헛된 희망이지요. 그들이 사라지고나면 정말 그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 셈입니다. ‘아니다! 우리는 왕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럼 왕이 되셔야지요. 그나마 이름이라도 남기려면 왕이라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왕이 되어 버린다면 그 또한 의미가 없는 셈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책장을 빼곡이 채울 만큼 수많은 왕들이 전세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왕이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이 생에서는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해도 미국 대통령이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것은 조금만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헛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희망’이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 앞에서 무너져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 빛을 발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희망, ‘영원’의 희망을 안고 살아가며 하루하루를 영원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때문이지요. 우리 신앙인들의 하루는 다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 일상 안에 사랑의 씨앗을 심지요. 마치 나사를 한 바퀴 돌리면 더 깊이 파고드는 것처럼 우리는 일상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더욱 깊이 조이는 것입니다. 이 영원의 희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분이 약속하신 것이니까요. 이런 우리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비웃을 것입니다. 그저 가진

연차와 열정

선교의 연차는 중요합니다. 선교지에 금방 오자마자, 아니면 오기도 전에 책으로 선교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선교에 대한 내용을 읽어도 막상 직접 체험해 보면 개개인마다 전혀 다른 책이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교의 열정도 중요합니다. 선교의 연차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열정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려는 열정이 없다면 그저 공연한 시간만 보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물은 확연히 다릅니다.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선교사와 짧지만 굵게 살아가는 선교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시간이 많이 지날수록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동화되지 않으면 도리어 어두움만 늘어가기도 하지요. 선교지의 사람들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면서 미개인 취급하고 여전히 자신의 본국의 화려함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는 10년을 선교하든, 20년을 선교하든 전혀 바뀌는 게 없는 셈입니다. 반대로 열과 성을 다해서 살아가는 선교사는 물론 절대적인 기본 적응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그 이후의 진보의 과정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때로 남미에 살았다고 남미를 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교만한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들은 편안한 곳에서 지내면서 이런 저런 ‘데이터’로 남미를 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는 경력만 느껴질 뿐, 향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비판할 때에는,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이 없는 비판은 ‘칼’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저도 사람입니다.’라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언가에 대해서 잘 안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정말 ‘잘 아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통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게 마련입니다. 과학자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지혜로운 이들은 이제 겨우 세

정당한 비판

때로 사람들은 교회에 화가 난 모습을 보입니다. 그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의 부유함, 성직자의 외통수, 굳건한 제도… 아주 단골로 까이는 것들이지요. 교회의 부유함(물질만능주의) 사실 교회는 가난할 수도 부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핵심이 아니지요. 바오로 사도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살 수 있었던 분입니다. 지금의 교회도 마찬가지이지요. 미국에도 성당은 있고 아프리카에도 성당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자신의 본질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정도로 재산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면 이는 필히 잘못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교회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외적으로 화려하다고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그 화려함이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화려함입니다. 성시간을 하는데 좀 더 아름답게 꾸며서 아직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외적인 화려함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필요한 일이지요. 사람들이 모두 신심이 늘어나고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린다면 교회는 가난할래야 가난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핵심을 잃어버린 화려함, 즉 물질만이 우선시되는 가운데에 외적 부유함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외통수(성령이 없는 독선과 교만) 교회는 분명히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독재체제도 아니지요. 교회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을 받은 이들이 이끌어가는 공동체, 즉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 중에 있는 지상의 공동체입니다. 성직자가 정말 하느님의 영에 감싸져 있더라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난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느님의 영을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영을 잃은 채로 홀로 교만과 아집에 싸여가는 사제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주인을 기다리는 종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6) 하느님은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니, 실은 늘 계시지만 우리가 그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훗날 당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숨쉬기에 감지하지 못합니다. 만일 입과 코를 틀어 막는다면 1분, 아니 30초만 지나도 공기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내가 숨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느님을 잃고서야 하느님의 존재를 체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악은 우리에게서 하느님이라는 공기를 틀어막는 행위입니다. 단순히 계명을 어기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죄인일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셨으니 죄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를 이렇게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최우선이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은 아주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이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면 우리의 이런 모습에 감격해 하실 것입니다. 아니 그분은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시니, 우리가 하느님을 기다릴 마음 채비를 하는 순간부터 이미 감격하고 계실 것입니다. 기다리는 이들은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이 직접 서빙하실 것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젓가락 묵상

젓가락은 쌍으로 움직입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의 젓가락으로도 음식을 찍어 들기는 하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젓가락은 쌍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사람도 짝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를 의지하도록 만들어져 있지요. 하나의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둘이서 서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젓가락은 손이 놀리는 것입니다. 젓가락만으로 스스로 음식을 집어드는 것이 아니라 두 젓가락이 손에 몸을 맡길 때에 온전히 한 몸이 되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람도 하느님의 손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손이 없는 젓가락은 장식용은 될 수 있어도 본래의 목적에는 합당하지 못한 셈이지요. 손을 제외한 젓가락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닌 셈입니다. 또한 젓가락은 적당히 길어야 합니다. 손가락보다 짧은 몽당 젓가락은 없습니다. 그럼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지요. 너무 길어도 이상합니다. 우리 몸길이보다 긴 젓가락은 있을 수 없지요. 또 굵기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소세지만한 젓가락을 쓰지 않습니다. 젓가락은 손가락보다 얇은 것이 보통이지요. 그리고 가볍기도 해야 합니다. 이처럼 각 사람은 다양하지만 저마다의 쓰임새가 있게 마련이고, 지나치게 과하게 자신의 재주에만 집착하다보면 원래의 쓰임새에서 벗어나게 마련인 셈입니다. 즉, 하느님은 그런 젓가락을 쓰시기 곤란해 하실 것입니다. 끝으로 젓가락은 사물을 집어드는 데에 씁니다. 우리 인간도 고유의 목적이 있으니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 들어 높이고, 나아가 우리 주변의 영혼들도 초대해야 합니다. 젓가락을 문고리 고정하는 데에 쓸 수도 있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하느님을 통해서 한 몸이 되어서 각자의 재주로 서로의 구원을 위해서 봉사하는 젓가락인 셈이지요.

기도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어느 분이 하신 부탁입니다. 기도,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요. 왜냐하면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물고기에게 공기로 숨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기도라는 것은 하느님을 향해서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고, 그리고 하느님은 대답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를 답답하게 생각하던 우리의 선조들은 ‘기도하는 법’을 다양하게 개발했습니다. 염경기도, 관상기도, 묵상기도, 예수기도, 묵주기도, 9일기도, 성무일도… 뭐 종류별로 다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골라잡으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지요. 도대체 ‘기도’란 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향해서 뭔가 주절대는 것 같긴 한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하는 걸까요? 인간이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다면 아마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충만히 누릴 줄 알았더라면 기도 따위는 존재의 이유가 없을 테지요. 하지만 인간은 늘 ‘부족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뭔가 아쉽고 부족하고, 그래서 영원의 갈망을 느끼는 존재이지요. 기도의 출발점은 여기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 완벽한 인간이었지만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에게 뭔가를 말하지 않고서는 혼자서만은 완전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감이 조금은 오시는지요? 이것이 기도입니다. 영원에 맞닿으려는 인간의 갈구라고 할까요? 기도는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방법적인 면에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기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물론 기도의 다양한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래야 원하는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사과가 맛있고, 누군가에게는 오렌지가 맛있듯이 기도도 자신에게 적합한 기도가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묵주기도가 자신을 지탱하는 좋은 수단인가 하면, 다른

숟가락 묵상

관찰력이 조금만 뛰어나다면 숟가락 하나로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숟가락은 뭔가를 퍼는 곳이 있고, 손잡이가 있습니다. 포크로는 국물을 떠먹을 수 없지요. 뭔가를 퍼기 위해서는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부분이 필요한 셈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지요. 영적인 보화를 길어내려면 영적인 보화를 퍼내는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심으로 영적인 보화를 퍼내려고 한다면 포크로 국물을 떠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지식을 모아서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처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지요. 숟가락에는 손잡이가 있습니다. 숟가락은 손잡이가 없으면 이상한 모양새가 됩니다. 물론 밥그릇으로도 국물을 펄 수는 있지만 그건 제 역할이 아닌 셈이지요. 밥그릇을 숟가락처럼 써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손잡이, 숟가락을 쓰임새 있게 하기 위한 손잡이는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바로 이 부분으로 하느님은 우리를 쓰시지요.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숨겨진 보화들을 퍼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손잡이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행여 하느님 아닌 존재에게 우리를 내어 주었다가는 우리는 국물을 떠먹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전혀 엉뚱한 것을 퍼내는 데에 쓰일수도 있습니다. 숟가락의 크기는 제각각입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지요. 큰 걸로 작은 걸 펄 순 있어도 작은 티스푼을 국자처럼 쓸 수는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대부분 티스푼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우리가 처음부터 큰 숟가락이 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은 아주 작은 티스푼에서 시작해서 마음의 크기, 숟가락의 크기를 넓혀 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작은 스푼이 절대 나쁘지 않은 이유는 뭔가를 퍼내는 역할에 있어서는 미흡할 수 있지만 작은 스푼은 조금만 노력해도 쉽게 가득찰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 안의 원의가 채워지는 것이기에 그릇이 작을수록 더 쉽고 빨리 채워집니다. 공연히 그릇 크기만 키워 놓았다가 올바로 채우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차라리 작은 그릇

커피 한 잔

커피 한 잔이 당신에게 기쁨을 준다면 즐기십시오.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고급 커피숍의 커피를 즐길만한 여유가 되지 않는다면 보통 커피숍의 커피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즐기려는 것이 고급 커피라면 돈이 모일 때까지 절제하고 참고 기다릴 줄도 아십시오. 그런 뒤에 더 큰 기쁨으로 그 고급 커피를 즐기십시오. 기다림은 당신의 내면의 가치를 키우고 당신을 더욱 지혜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고독을 즐긴다면 혼자 마셔도 좋고, 어울림을 즐긴다면 함께 마셔도 좋습니다. 억지로 함께 즐기려고 애를 쓰지도, 일부러 고독을 찾지도 마십시오. 하지만 때로는 다른 성향을 체험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어색함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기도 하고, 고독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설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니 스스로의 취향대로 즐기십시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이유는 없습니다. 여유가 되고 좋아한다면 크림도 넣으십시오. 하지만 커피는 원래부터 크림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커피가 싫다면 코코아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물 한 잔을 마시면서도 그것을 즐길 줄 압니다. 물은 정말 목이 마를 때에는 황금보다 더 소중한 것이니까요. 커피 한 잔에서 우리의 삶을 즐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무심코 지나치는지 모릅니다. 많은 이들이 성공의 기회를 노린다지만 실제로는 기회가 다가오지 않는 게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기회들이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다가오는 기회들은 영원의 기회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더욱 눈치채기가 힘이 듭니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회도 그 실제가 가리워져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데 영원의 기회는 그 가리워짐이 더합니다. 그저 내 곁에 지나치는 사람이 나에게 진정한 영원의 기회인 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저 나에게 한마디 건넨 누군가의 제안이 나에게 영원의 기쁨을 선사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런 제안들을 거부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회를 놓쳐 버린지도 모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너무나도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하느님을 찾기가 일쑤입니다. 하느님을 높은 왕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제멋대로 간주한 뒤에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요. 성사도 꼬박꼬박 보고, 평일미사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고, 이런 저런 온갖 거룩하다는 일을 하면서도 전혀 기쁨이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겠다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진정 하느님이 어디에 계신지는 살펴보지 않은 셈입니다. 정말 사소한 것들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의 친구이고, 당신 집의 거동이 불편한 어른이며, 아주 작은 관심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러분의 이웃일 수 있습니다. 교회 건축 기금을 엄청나게 내면서 정작 자신의 어린 아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지도 모르는 길을 잃은 신앙인이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가지 권고들

미사를 마치면서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신앙이 의무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서 해야 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강아지가 주인과 타인을 두고 주인을 선택할 때에는 그것은 강아지가 현명하게 선택한 것이고 이쁨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소세지를 들고 있고 강도는 칼로 위협을 해서 주인에게 간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입니다. 여러분에게서 사랑이 비롯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인 거지요. 신앙을 사랑으로 이루어 가십시오. 여러분의 의무가 여러분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 마십시오. 이번 주는 선교 주일입니다.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머리더러 일을 다 도맡아서 하라고 우기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서 손으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몸 전체를 옮기는 것도 머리가 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는 웃기는 모양새가 되는 것입니다. 선교를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필요합니다. 벌써 우리 동네에 이상한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이 난입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가톨릭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여러분들 자녀들이라도 교육하십시오. 어머니는 자녀들을 데리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아버지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 다행입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이니 여러분들이 솔선수범 한다면 모든 구성원들이 따를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행복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더는 자기 자신이 저지르는 오류로 고민하지 않지요. 고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부 타인들이 가져오는 고민거리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적어도 밤에는 편하게 잘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물론 일어나서는 주변에서 가져오는 온갖 걱정 거리들을 함께 고민하지만 잠은 잘 자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예수님은 함정에 자주 놓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지혜로 이겨내셨지요. 물론 때로는 막무가내인 이들 앞에서 몸을 피하시기도 하셔야 했습니다. 모두 현명한 지혜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이날도 예수님은 로마에 화가 잔뜩 나 있는 군중과, 반대로 로마의 권력과 재물을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서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나서서 아주 교묘한 함정을 놓았지요. 로마에 세금을 내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말입니다. 영리하면서 어두운 마음이 향하는 방향은 일정합니다. 그는 문제를 개선시키려는 게 아니라 상황을 이용하고 법을 이용해서 상대를 옭아매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비슷한 상황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성난 두 그룹 사이에서 행여 발언을 잘못 했다가는 둘 다에게 뭇매를 맞을 수 있는 셈이지요. 예컨대 지금의 정치 대립 구도 안에서 정부의 편을 들어도, 그 반대의 편을 들어도 다른 한 쪽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히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실제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극히 단순한 방법으로 상황을 정돈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정확한 관찰’입니다. 예수님은 동전에 새겨진 그림과 글을 바탕으로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두 가지 면에서 할 말을 잊은 셈입니다. 각각의 물건은 원래의 주인에게 속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너무나 소홀하고 있다는 것이 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 시절, 즉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신앙감이 있던 시절에나 가능한 모습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느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콧방귀를 뀌는 시절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무신론적이 되더라도 예수님의 이 표현은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고스란히 적용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럼 이제 묻겠습니다. 당신이 지녔다고

감사

오늘 미사를 간 공소는 한 자매의 봉헌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 자매는 ‘기적의 주님’(señor de milagro)에게 남편의 불치병을 내어 맡기고는 치유를 받아 그 뒤로 이 공소를 짓고 미사를 드리는 자매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감사의 눈물이지요. 감사는 받은 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 자매는 분명히 받은 것을 느꼈고 그 감사를 잊지 않는 것이지요. 감사 드리는 동안 자매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봉헌하고 헌신하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이지요. 반면, 뒤집어 생각해보면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받은 게 없다는 걸 반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미사는 감사의 기념제이거늘 우리는 받은 게 없으니 감사할 이유도 별로 없고, 미사는 그저 따분한 ‘전례’, ‘예식’으로 남아 버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같은 마음은 아닙니다. 저마다의 마음의 품의 크기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태도도 서로 다릅니다. 물론 혹자는 비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매는 이미 큰 상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애시당초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상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정말로 우리 모두를 섬세하게 돌보는데도 우리는 그러한 것을 ‘기본’으로 간주해 버리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생의 끝날까지 감사는 커녕 불만에 가득 사로잡혀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아니, 도리어 하느님에게 대들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대해서 말이지요. 하느님은 선하시다는데 도대체 뭘 하고 계시냐고 따질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을 만드셨습니다. 그 사태를 알아챈 당신이 뭔가를 하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배은망덕한 이들입니다. 시작부터 생명을 받고, 건강한 신체와 여러가지 능력을 받았음에도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써 오다가 결국 그 중에 하나라도 잃기

일꾼이 필요합니다.

오늘 공소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자매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 신부님, 저 교회에 불만 있어요. - 네? -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건 다 맞는데요. 일년에 한 번 이렇게 해가지고서는 달라지지 않아요. 더 자주 와서 가르쳐야 해요. - 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원인으로 인한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성소가 부족하고 그 성소의 부족을 부추기는 요인들이 있지요. 텔레비전만 틀면 미인 선발대회를 하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어찌 그 혈기에 유혹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는 비단 한 가지의 문제만이 아닌 거지요. - 하지만 교회는 더 많이 가르쳐야 해요. 더 자주 나와서 가르쳐야 한다구요. 그 자매는 표독스럽게 자기 할 말만 그렇게 던지고는 가버렸습니다. 미처 저에게 대답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더군요. 만일 저에게 차분하게 대화를 요청해 왔더라면 아마도 저는 그 자매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할 말만 실컷 내던져 놓고 제 말은 듣지도 않고 뒤돌아 가는 자매에게 뭐라 달리 해 줄 말은 없었습니다. 교회에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불만을 가진 당신이 교회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모 대통령이 본인 스스로 나라 꼴이 이게 뭐냐고 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것과 비슷한 셈이지요. 나라꼴이 이상한 건 맞는데 그럼 뭔가를 해야지요. 우리가 가톨릭 신자로서 흔히 저지르는 오류 중의 한 가지는, 교회를 비판하기는 하는데,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은 전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가 어둡다면 빛을 밝혀야지요. 그나마 가진 빛으로 열심히 밝히고 있는 사람에게 와서 실컷 따져봐야 소용 없는 셈입니다. 때로는 어디 한탄할 데가 없어서 제 홈페이지에 와서 한탄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한탄의 내용의 비난의 화살은 본인 스스로를 향해서 있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 사제가 바뀌어야 하고, 교회가 바뀌어야

한계를 지닌 우리들

한 사람이 접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지요. 기계가 아무리 진보해서 우리에게 멀티미디어 환경을 제공한다고 해도 인간이 멀티미디어가 아닌 이상은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모니터를 10개를 띄워 놓을 수는 있지만 매 순간 한 모니터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지요. 이런 한계적인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광고라는 것이 탄생한 이유는 사람들이 원래는 관심이 없는 것에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우유를 사먹든 저 우유를 사먹든 실은 전혀 상관 없는데 광고를 멋들어지게 해서 괜시리 광고에 나오는 우유를 더 사 먹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은 이런 저런 ‘날 보러 와요’라고 외쳐대는 것들로 그득합니다. 여러분들이 필요로 하면 보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필요 없는 것까지 보다가 시간이 다 지나 버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은 한계가 있는데 쓸데 없는 것들에 잔뜩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작 해야 할 것들에는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요? 여기서도 분별이 필요합니다. 가치마저도 속이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문제가 드러나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들고 일어서서 그것을 위해 집중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신경써야 하는 일이지요. 하지만 과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 걸까요? 누가 때리면 맞은 데가 아픕니다. 그렇다면 조치를 취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맞은 곳도 치료하고, 그가 나를 다시 때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지요. 하지만 그런 조치를 취한다고 밥을 먹지 않으면 안됩니다. 밥은 밥대로 먹고, 똥도 싸고 할 일은 해 가면서 그런 조치를 취해야 하지요. 여기에 신앙인이라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영원을 향한 선택입니다. 세상 안에서 더 나은 삶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고군 분투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의 영원을

복음적 가난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는 단순히 돈을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재물을 통해서 자신의 존엄을 찾고자 하는 이들', 즉 내면에 탐욕이 가득한 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가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의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훗날 부자가 될 때에는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안에서 이미 많이 배워 왔습니다. 가난한 이를 대표하던 자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부자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변하는 모습을 보아 왔지요. 개혁과 혁명을 부르짖지만 내면이 바뀌지 않은 그들에게서 기대할 것은 없습니다. 진정한 가난은 외적 형태 이전에 내면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이들, 하느님 안에서 주어지는 것을 모두 수 용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입니다.

복음과 삶의 연계

어제는 교사들과 ‘하느님의 아들’(Son of God)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너무 길어서(러닝 타임 3시간) 반만 보고 나머지 반은 다음에 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을 통해서, 영화를 통해서, 각종 매체를 통해서 너무나 자주 접하는 반면, 또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일어난 일을 조명할 뿐, 그것이 우리의 실제 삶에 어떤 연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몫일 뿐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그 연결점을 찾는 것을 도와주더라도 엄청난 영적 보화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어제는 한 아저씨가 유다의 배반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 유다가 어떻게 배신을 할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대답해 주었습니다. - 사실 유다의 배신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충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더 나은 안락을 위해서 진실함과 정의를 거부하기 시작할 때에 이미 우리는 유다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것이지요. 한 지역 반장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하는데 부자인 사람은 사정을 잘 보아주고, 가난한 사람은 찬밥 신세로 다룬다면 그는 이미 유다가 한 일을 하는 셈입니다. 즉 부자를 잘 보아 주면서 나중에 그에게서 좋은 것이라도 얻을 생각을 하고, 반대로 가난한 이는 철저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자 다른 아저씨가 질문을 합니다. - 회사에서 사장 눈치를 보면서 주일까지 일을 하면 그건 잘못된 것인가요? -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만일 그 사장이 나쁜 사장이라서 주일날에도 일을 하지 않으면 해고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생존권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하고, 그로 인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문제는 그 사장의 몫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사장에게 주일에는 쉴 필요도 있고 가족들과 함께 주일 미사도 나가야 한다고 건의를 하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상황인데도, 단지 사장의 이쁨을 받고 싶고, 주일에 나오는 수당을 놓치기 싫다

수치

수치라는 것은 나의 위신을 떨어뜨릴만한 일을 감추어 두었는데 그것이 발각될 때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몰래 코딱지를 파다가 들켜도 수치스럽고, 시험 성적이 잘못 나온 걸 숨겨 두었다가 들켜도 수치스럽지요. 하지만 진정한 수치는 전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수치스러움은 원래의 내 모습이 드러난다고 우리가 느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원래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코가 막혀 답답하면 코딱지를 팔 수도 있고, 시험 성적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 나오지 못한다면야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수치는, 먼 훗날 내 안에 감춰둔 어두움들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모든 걸 지켜봐 온 분 앞에서 우리가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드러날 때이지요. 속으로 아무리 이웃을 흉을 보아도 나 밖에는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은 이미 처음부터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괴로운 것은 모든 순간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종의 경고를 해 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나쁜 마음’을 가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하느님은 우리에게 꾸준히 경고를 해 주신 셈이지요. 그래서 우리 스스로 돌아오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집스럽게 우리의 죄악을 고수한 셈이지요. 알몸이 드러난다고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수치라는 것은 ‘감추고 싶었던 것이 드러날 때에’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목욕탕에서는 아무도 서로의 알몸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수치스러움은 옷을 입고 있는 대중 앞에서 알몸이 드러날 때에 느끼는 것이지요. 훗날 영광의 옷을 입고 있는 수많은 이들 앞에서 우리의 죄상이 드러날 때에, 그때야말로 가장 수치스러운 때가 될 것입니다.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로마 10,11)

선교 메뉴얼

보좌 신부 시절, 아직 본당에 발령받기 전에 우리 사제들은 ‘가두선교’라는 것을 나가야 했습니다. 몇 시간의 교육을 받고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선교 책자를 주고 인적사항을 받아오는 것이었지요. 솔직히 어색하고 싫었습니다. 하지만 ‘선교’라고 하고 우리 신앙인의 본질적인 사명이라고 하니 울며 겨자먹기로 한 셈이지요. 지금은 진짜배기 선교를 나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건 선교가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외적 형태의 선교를 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제는 말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선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지요.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요. 가두 선교도 좋은 복음 선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치 그것을 선교의 핵심인양 간주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후속 작업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적지 않은 본당들이 ‘선교’를 한다면서 ‘행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한 때의 유행처럼 훅 사람을 끌어모은 뒤에는 장기적으로 사람들이 떠나가게 되지요. 그리고서는 몇 명 남은 사람을 두고 그래도 몇 명 건졌다고 안심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선교라는 것은 정말 다양할 수 있습니다. 친구와 술을 한 잔 하면서도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말 선교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참된 선교가 아니라면 전국 단위의 선교 운동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행사’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선교의 본질은 ‘닮아가기’라고 하는 게 적당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닮아가고 그들은 우리를 닮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좋은 것이라고 갖다 쑤셔넣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들을 닮아가야 합니다. 반대로 그들도 우리를 닮아가야 합니다. 무조건 그들에게 속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도 우리가 가진 핵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 다가와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 두 작업은 굉장히 미묘하고 섬세한 작업입니다. 지나치게 그들에게 동

선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어린 시절 저는 큰외삼촌의 장난감을 기억합니다. 제 외갓집은 초등학교 앞의 문방구였습니다. 저는 구미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인가 외삼촌이 집에 방문을 하면서 선물을 가져 오셨습니다. 당시 프라모델이 한참 성행했는데 외삼촌이 저에게 프라모델 로봇 장난감을 사들고 오신 겁니다. 그때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나이 서른 중반에 아직도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외삼촌이 가져온 것은 프라모델이었지만, 실제로는 저에게 ‘기쁨’을 선물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기쁨은 아주 작은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었지요. 사실 어른들에게 프라모델 장난감은 얼마 하지 않는 것이지만 외삼촌은 집을 방문하면서 조카인 저를 기억했고 장난감을 사들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기쁨을 선물하셨지요. 우리가 이웃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것이 가장 겉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이미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뭔가 큼지막한 선물을 받으면 받았다고 느끼고 그게 아니면 별달리 받은 게 없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웃들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최고의 것은 단연코 ‘신앙’입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가 쓰면 사라지는 것들이지만, 신앙은 우리 안에서 기쁨의 샘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전해 듣는 소식은 그래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신앙이 제도화되고 삶의 옵션처럼 치부되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선교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선교를 하는 것이 커피 한 잔을 권하는 식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좋아하면 마시지만 싫어하면 억지로 권해서는 안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본인 자신에게도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신앙’이 커피 한 잔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언제라도 세상의 가치를 위해서 내던질 수 있는 세상의 수많

부모를 섬기기

오늘 오후에는 한 자매가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늘 평일미사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젊은 엄마입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늘 서려 있는 어두움을 숨길 수는 없었지요. 그러더니 어제 목요일 저녁미사 이후에 저를 보고는 저와 시간날 때 이야기를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오늘 오후로 약속을 잡았지요. 오늘 작은 여자아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 왔습니다. - 어서오세요.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 신부님, 제가 7년째 엄마를 안보고 살고 있어요. - 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 엄마가 늘 입버릇처럼 딸이 싫다고 말했어요. 딸은 키워봐야 두통거리밖에 안된다고 하곤 했지요. 그래서 7년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찾아가고 있어요. - 그렇군요. 혹시 어머니가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여쭤 보셨나요? - 아니요. 근데 제 친구가 과거는 잊고 앞을 바라보래요. 다른 한 신부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구요. 헌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사제로서 양심껏 조언해 드릴테니까 잘 들으세요. 먼저 뚜렷한 현실은 자매님이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있지만 실제 문제에서는 전혀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거예요. 왜냐면 그 문제가 계속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아프니까 이렇게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맞지요? - 네. - 이 문제는 회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예요. 치유해야 하는 거지요. 헌데 자매님은 어머니와 진중하게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어요.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말을 할 줄 알고 서로의 속내를 알 수 있기 때문인데 자매님은 단지 어머니가 하는 말이 마음 아프다는 이유로 단순히 피하고 있는 거예요. - … -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상처를 치유해야지요. 자매님의 어머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예요. 세상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지요. 오늘 마침 아기를 데려 오셨네요. 잘 보세요. 이 아기와 자매님의 관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지금 이 아기는 약하고 도

이론의 벽

처음부터 ‘이론’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는 엄연한 현실이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의 생활을 꾸려 나갔지요.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이론’들이 남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열매는 먹어도 되고, 이런 열매는 먹으면 안된다는 것을 배워 나가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필요에 의해서 그러한 ‘지식’들을 남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그릇된 지식도 있었지요. 그래서 그런 지식들은 ‘수정’을 필요로 했고 조금씩 수정되어 나갔습니다. 교회 안에는 ‘신학 이론들’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론들, 그분께 나아가는 방법들과 같은 온갖 것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현실’이 존재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사람들은 그 사랑을 돌려 드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했지요. 그리고 현실이 원래대로 존재할 때에는 이론이 따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론들’이 현실을 가로막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뭔가를 좀 할려고 하면 그게 이미 세워 둔 이론에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고 드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누군가가 배가 고파서 빵을 좀 달라는데 과연 그것이 합당한가 아닌가를 따지고 들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배고픈 사람은 기력조차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현실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이론은 의미없는 것들입니다. 이론을 위해서 현실이 속박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하늘나라의 열쇠를 쥔 채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가로막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지요. 이론은 실제 생활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실제 생활을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끼리 살지 않는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현실을 잊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끼리 살아가는 세상이니 우리끼리 이론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우리끼리의 현실이 중요하니 우리끼리의 현실만 고려하자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극단적인 수용

- 주님,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 너는 왼쪽으로 가거라. - 네 왼쪽으로 말이지요? 다들 들었지? 모두 왼쪽으로 가도록 해. 저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잖아. 안그래? 왼쪽으로 가자. 모두 왼쪽으로 가는거야!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나 말을 한다. - 저기… 저는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이 오른쪽인데요? - 아니, 뭔 소리를 하는거야? ‘왼쪽’이라고 구체적으로 방향을 제시해 주셨는데 왜 오른쪽으로 가겠다는 거야? 모두가 왼쪽이야 알겠어? - 하지만 당신은 앞을 향해 있고, 나는 뒤를 향해 있잖소. 그러니 저에게는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은 오른쪽이지요. - 이런 이단같으니라구! 왼쪽으로 가라고 했으면 왼쪽으로 갈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무엇이든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만을 주장하면서 다양성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예수님부터도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던 분이, 정작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밀밭 사이를 거닐다가 이삭을 뜯어 먹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방향을 아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때로 지시 받은 방향을 고수하다가 서로 싸우곤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겠노라고 나서셨습니다. 지금까지의 교회는 너무나 부유하게 자신을 가꾸어 왔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가난이 대수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뭐든 가난하고 궁색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말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양심껏 일하고 있는 이들마저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교회는 가진 성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모조리 주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이들이지요. 그들의 극단적 사고는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모두 부자가 된다고 하늘나라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 이 땅에서 어느 수준까지 오르자

베로니까 수녀의 한탄

베로니까 수녀는 얼마 전부터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 자기보다 7년이나 늦게 종신을 한 안젤라 수녀에게서 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별다른 말도 못하고 지나쳤는데 이제 곱씹어 생각해보니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하는 셈이다. - 나보다 7년이나 후배이면서 그런 말을 나에게 할 수 있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함이 사라지질 않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앙심은 속에서 더욱 더 솟아올랐다. 책상에 앉아 뭔가를 집어 들고 읽으려 해도, 소일거리로 좀 잊어 보려고 해도 눈 앞에 그 날의 일이 떠올랐다. ☩ ☩ ☩ - 베로니까 수녀님, 저 좀… - 응? 왜? 무슨 일 있어? - 전부터 말씀을 드릴까 한참을 고민했는데요. 수녀님이 담당하고 있는 청원자 그룹에서 자꾸 수녀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와서요. 베로니까 수녀는 가슴이 뜨끔했다. - 왜? 뭐라고들 하는데? - 수녀님이 한 수녀를 편애하신다고… 사실이었다. 청원자 그룹 가운데 특별히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 듣는 이가 있어 마음에 두고 아끼던 차였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었나보다. - 그래? 베로니까 수녀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는 듯이 대답했다. - 네, 그러니 앞으로는 조금은 신경을 쓰시는 게 좋을 듯 해요. ☩ ☩ ☩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일을 어떻게 후배 수녀가 나에게 말을 할 수 있나 싶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7년이나 선배인데 말이다. 자꾸만 달아오르는 가슴을 어쩔 수가 없어 경당으로 갔다. 자리에 앉아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지기 시작한다. - 예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어떻게 그 수녀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냐구요? 예수님은 아무 말이 없다. 베로니까 수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계속 푸념을 늘어 놓았다. - 아니, 안젤라 수녀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뭐 열심히 하는 건 맞지만 안젤라 수녀도 가끔 잊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거

하느님과 인간의 자유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종으로 삼고 싶으셨다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러지 않으시고 우리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감추어 두셨고 우리에게서 사랑을 이끌어 내고자 하신 것이지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늘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을 뿐입니다. 각자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영원을 선물받게 될 테니까요. 지금의 자유를 제멋대로 쓴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영원을 선물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참 복된 말이고, 또 반대로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행복과 불행

사람이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느끼는 건 거의 찰나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생각의 변화’이지요. 아무리 행복에 겨운 사람도 한 순간의 생각의 변화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불행에 젖어 있던 사람도 순간 행복을 찾기도 합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은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없고 가난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거기에서도 행복을 찾으라 하는 것은 좀 엉뚱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은 회복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최저의 선을 넘어서고 나면 그 뒤부터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좌우됩니다. 군대에서 밤근무를 서고 들어와 먹는 라면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가 하면 정말 부유한 사람이 매일같이 스테이크를 썰고, 최고의 한정식을 먹는 데에 길들여져 있는데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서 거기서 라면을 먹으라 하면 라면 그릇을 집어 던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불행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의 모든 순간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후자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군더더기를 걷어낼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사회는 우리가 그런 작업을 시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니까요. 적어도 스X벅스 커피는 마셔줘야 하고, 물건을 살 때에는 X대 백화점은 가 줘야 하고, 영화도 3D 안경은 끼고 봐 줘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셈이지요.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사람이 된 셈입니다. 즉, 세상적인 삶의 기준이 너무나 높아져서 이제 사소한 것에는 기쁨들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아직 우리가 탐구해야 할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내면이지요. 그리고 실제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면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은 촉매일 뿐이고 그것을 통해서 내면이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강아지 앞에 소세지가 놓여 있고, 훈련을 받지 않은 강아지가 그걸 먹어 치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아무 것도 달리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강아지를 가둬 두던가, 소세지를 놓지 말던가, 강아지를 훈련을 시키던가, 하다못해 강아지 입에 재갈이라도 물려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인기에 편승해 사람들을 속여 당선이 되고난 뒤에 사람들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당선을 시키지 말던가, 정치인의 마음을 바꾸던가, 사람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나된 마음을 보여 준비를 갖추던가 해야 하지요. 하지만 이도 저도 하지 않고 당한 일을 또 당한다면 그것은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 있어났을 뿐입니다. 참새는 방앗간을 지나치지 않고, 고양이 앞에는 생선을 놓지 않는 법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적지 않은 일들은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럼 우린 뭘 해야 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상황이 싫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할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방법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면 제 개인으로는 내면의 변화야말로 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가장 안정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영원을 찾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에서 예고되어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사전에 예방될 수 있습니다. 무책임하게 남자를 만나서 관계를 가지게 될 여자는 관계를 가지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무책임한 관계의 특성과 그 해악을 올바르게 배우게 되면 스스로 삼가하게 되겠지요. 제2의 세월호는 이미 여러곳에서 준비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뭘 해야 할까요? 배를 없애고, 해경을 없앨까요? 그럼 세월호 빌딩이 등장할 겁니다. 세월호 성당도 가능하고, 세월호 비행기도 가능하지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일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가진 재주로 말이지요.

복음 선포

가만히 따지고 보면 예수님 이후 20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간들은 결국 일년, 또 일년이 흐르고 흘러 지나간 시간입니다. 그때의 사람들도 지금의 편의 시설과 문명적 조건이 없을 뿐,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기쁨과 슬픔, 걱정과 희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꾸려나간 셈이지요. 결국 다시 말하면 초대 교회 사람들이나 우리나 조건이 180도 뒤바뀐 건 없는 셈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오히려 더 나은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지금은 우리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길에서 외쳐도 지나가면서 빈정거릴 뿐 감옥에 집어 넣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길에서 외치진 마십시오. 하하.) 그럼 문제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라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주어졌는데 사람들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몇 가지로 추려볼 수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에 대한 불인식,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한 교만, 선포하는 자의 부족… 등등의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는 단순히 세례를 받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례를 받아도 하느님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문화적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취미생활의 하나로 신앙을 지닐 뿐 정말 하느님을 인지해서 신앙을 시작하는 게 아닌 셈이지요. 다른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지만 자신이 이미 지닌 것들을 포기하지 못해서 다가서지 못합니다. 자신이 지닌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맛에 빠져들어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는, 어찌보면 도전을 이겨내지를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주저하고 있는 셈이지요. 마지막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될 수 있는 것은, 선포하는 자의 부족입니다. 듣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어느 하나 누구가 가르쳐주지 않는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드문 케이스이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런 케이스는 실제로

조심하십시오.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그대도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2티모4,14-15)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선한 일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괴롭히고 이용해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뒤틀려진 마음, 선을 거부하고 악을 자행하는 마음은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조건 모두를 분별없이 다 받아들인다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저 성격이 유순하고 거절을 못해서 모든 이를 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에 가깝지 선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참으로 선한 사람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해내고 진리를 환영하고 거짓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영혼은 양쪽으로 다 기울어질 성향이 있기 때문에 ‘판단’은 언제나 하느님의 몫이지요. 하지만 그가 뻔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은 나의 무책임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나쁜 이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선한 이들로 뒤바꾸어야 하는 걸까요?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가 거짓말을 살살 해대면서 물질적인 탐욕에 사로잡혀 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부모된 책임으로서 여러분들이 훈육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친구 가운데에도 누군가가 최근 들어서 마음이 변해서 점점 악을 향해 나아간다면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선을 비추어주고 그가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십시오. 하지만 스스로 자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전능’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한계가 있는 사람이고, 약점이 가득한 인간입니다. 도와 주려다가 둘 다 무너질까 걱정입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의 경고를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

영성의 포장지

저 역시도 영적인 글을 갈구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많이 읽었지만 늘 하나 의문인 것이 있었습니다. '왜 늘 외국의 것을 들여와야 하는가?’하는 것이었지요. 인간의 본질이 똑같은 것이고,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언제나 외국 문물에 부속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제 의문이었습니다. 교회 서점을 가서 어느 서적을 들춰보아도 ‘영성’에 관한 것은 거의 대부분이 서방 세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서방 영성이 우리 동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내용을 설명함에 있어서 미묘한 문화적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지요. 내가 아는 걸 적어보자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또 새롭게 알 수 있는 것이, 각 개인의 차이 역시도 무시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 사도가 성격이 급하고 요한 사도는 사랑이 가득했던 것처럼 저도 제 나름의 성향이 있고(사고 중심적) 다른 분들은 이런 저의 성향에 익숙치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한국적 영성의 텃밭을 가꾸려고 하지만 결국 영성이라는 것은 문화에 따라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포장과 껍데기가 우리로서는 좀 더 받아먹기 쉬울 뿐이지요. 아무래도 어려운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해 놓은 것보다는 그냥 바로 한국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걸 한국어로 적어놓는 것이 한국 사람으로서는 좀 더 먹기 편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 글은 맞춤법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 오류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오직 예수님만이 완벽하십니다. 하지만 제 의도는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제가 꾸준히 글을 올리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 도움이 될까 싶을 뿐입니다.

물질 선교

어제 성경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나이 많은 자매님을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옆에 큰 건물 하나가 보이자 그 자매님이 말했습니다. - 저거 개신교 교회 건물이예요. - 그렇군요. 많이 들어오나봐요. - 네, 사람들이 얼마나 모이는지 몰라요. 저기서 컴퓨터도 주고 돈도 주고 하거든요. - 저런… 안타깝네요. 돈으로 모인 마음은 결국 돈 때문에 빠져나가게 되는데요. 그걸 알지 못하는 거겠죠. 예수님을 가르치고 사람들이 사랑하도록 가르친다면 누가 뭐라 하겠어요.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돈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면 그 마음 안에 탐욕을 심는 법이예요. 일찍부터 저희 동네에서 개신교가 어떤 식으로 확장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눈에 드러나고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과연 정말 선교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일부이겠지요. 그리고 우리 가톨릭 교회도 같은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건물을 지어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물질로 유혹하려는 시도는 굉장히 강한 유혹이지요. 왜냐하면 즉각적인 결과를 불러 일으키니까요. 하지만 진정한 선교는 ‘하느님’을 가르치고 사람들이 스스로 참된 길을 찾아 걷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지요. 그래서 이 어려운 방법이 싫은 이들은 단시간에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행사를 계획하고 물건들을 나누어주는 후자의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언뜻 사람들이 모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받은 것으로 물들어 있는 마음이지요. 거기에서 탐욕을 빼내고 다시 신앙을 집어넣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초창기에 의욕적으로 물질 선교를 하다가 나중에 이게 아니라는 걸 깨닫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버린 것이지요.

뿌리

어린 싹은 다루기 쉽습니다. 퍼다 옮기기도 쉽고 올라오는 모양새를 따라서 가지를 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뿌리가 깊이 박혀버린 나무는 옮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설령 옮긴다 해도 죽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뿌리를 내리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시간을 통해서 투자하는 것에 싹이 트고 뿌리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영원에 바탕을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물질적인 것에 바탕을 두는 사람도 있지요. 우리가 마련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 내면에 뿌리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게 어느 정도이지, 한계를 넘어서면 이미 한 사람을 영원의 기틀에 다시 심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됩니다. 벌써 자신의 사고 과정 자체가 세상적으로 고착이 되어서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말을 들어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나면 생명의 말씀도 무색해지고 맙니다. 물론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하느님은 인간이 원치 않는 것을 당신이 억지로 하시지는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옥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지옥을 좋아서 가는 건 아니지만 천국에 있기 싫어서 가는 곳이 지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이 천국에서는 너무나 크나큰 고통으로 변하기 때문이지요. 뿌리가 깊이 내리기 전에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의 신앙교육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심어주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행여 이미 세상의 뿌리가 깊이 박혀 버리고 나면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 (에페소 1,12)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교만의 뿌리는 어찌나 깊은지 하느님을 향한 이런 표현을 들으면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느님이 그렇게 찬양 받으셔야 할 분인가? 그럼 우린 그분의 로봇일 뿐인가?’라는 식의 생각을 하지요. 이는 우리가 지닌 본성적 한계에서 비롯됩니다. 한계가 있는 존재가 영원한 분을 떠올리면서 마치 전제 군주를 떠올리듯이 생각하기 때문에 드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느님의 전능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우리가 함부로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분은 마땅히 찬양받으셔야 하고 모든 권세와 권능과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지요. 다만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에는 너무나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대하셔서 우리를 어둠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만 믿고 따라갈 뿐이지요.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나누어 받게 될 영광을 성령을 통해 보증해 주신 것이지요. 누군가는 묻습니다. ‘그럼 성령은 어디 있는데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참으로 쉽지 않은 질문임에 틀림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것을 찾는 이들에게 드러내 주어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마치 소리를 그림으로 묘사하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령은 오직 활동하실 때에만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휴대폰을 쓰면서 전기의 흐름을 인식하고 쓰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충전이 빵빵할 때에는 별 생각없이 쓰다가 밧데리가 얼마 남지 않게 되면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때는 다시 충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위의 복잡다단한 설명을 모두 치우고 간단하게,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성령을 느낄 수 있고 그 안에서 약속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을 느끼려면 성령의 일을 하면

영원의 희망

영원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 그게 신앙인이 할 일이다. 즉,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영원의 실체를 실제 생활로 보여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이웃의 구체적 삶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언제 그들이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인가? 우리가 지닌 화려함으로 그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가톨릭의 외적 양상, 진중한 모습, 거대한 성전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세상 사람들도 얼마든지 흉내낼 수 있는 것들이다. 큰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나 거대한 궁에 들어가는 것이나 사실 별 차이는 없는 셈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의 방법에서 벗어난 일을 할 때이다. 미친 사람이 되자는 건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짝 미쳐 보이는 게 그리스도인이다. 즉, 세상이 열심히 돈을 벌자고 할 때에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하고 실제로 그것을 추구하는 모습과 같은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다. 미치지 않고서는 말이다. 머리에 꽃을 달고 머리카락을 배배꼬지 않고서는 세상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모습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때로 과감하게 실천하는 그 모습에서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유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의 이유는 그들의 이유를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이해할 만한 선에서 일하려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초월성을 가리게 되고, 결국 그들에게 우리를 만만하게 보이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영원의 희망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숨겨진 것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루카 12,2) 만일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들이 겉으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어두운 생각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생각을 하는 즉시 그게 겉으로 드러나 수치를 느낄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자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착해지는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강요된 착함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위 엎드려 절받기인 셈이지요. 만일 황금이 온 동네에 너저분하게 있다면 우리가 황금을 황금으로 여길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힘들게 캐내야 그것이 진정한 보물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인정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한계는 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의 생명’이었습니다. 그 한계마저 없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이기적이 되고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노력해오고 있지만 과연 인간이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훗날 우리가 감추어둔 것들이 모조리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숨겨둔 어두운 것이 많은 사람이면 더욱 많은 것들이 뛰쳐나올 것입니다. 아마 스스로도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자신 안에 그러한 추한 것들이 그렇게나 가득 들어 있을줄은 스스로도 깨닫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선한 의도, 선한 의지 역시도 좀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꽁꽁 숨겨져 있는 것들이 많지요.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의 이면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판단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