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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15의 게시물 표시

걱정

오늘 축구 결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줄도 몰랐습니다. 몰랐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결승전을 보면서 손에 땀을 쥐는 긴장의 순간을 즐길 수는 없었지만, 반면에 그 경기를 보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아도 되었고 그 시간을 가족과 함께 평온하고 화목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걱정은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욕구가 없으면 걱정거리가 줍니다. 그건 분명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 걱정을 시작하는 것은 나중에 늙어서 고생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고생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는 그래도 많은 것을 즐기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되지요. 뭔가 많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원하는 쾌락을 다 누리고 싶은데 그러자니 뱃살이 늘고 간도 무너지고 훗날 건강이 슬슬 걱정되는 것입니다. 사소한 욕구에서 모든 걱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욕구의 범위를 줄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걱정’에 휘말려 현재를 소모하게 됩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삶을 소비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밥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는 일을 생각하고, 일을 하면서는 놀러갈 궁리를 하니 우리의 정신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혼미해지는 것입니다. 정말 해야 할 걱정, 일용할 걱정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마다 자신의 걱정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더러 그토록 걱정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걱정 없이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죽을 운명의 예언자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신명 18,20)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서로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바로 속에 들어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울고 뒤가 마려우면 울고, 또 기분이 좋으면 웃고 했지요. 그래서 ‘맑은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맑은 영혼을 지녔고 그것을 맑게 표현할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장하면서 우리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내면이 갈라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기분이 나빠도 웃어야 할 때가 있고, 나는 기분이 좋은데 분위기상 슬픈 척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기분이 나쁘다고 결혼식에서 울상을 짓고 있을 수 없고, 내가 기분이 너무 좋다고 장례식장에서 쾌활하게 웃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지닌 생각은 보다 깊은 근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근본 의도’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 영역은 ‘선의와 악의’의 두가지로 나뉩니다. 인간은 근본적인 선의와 악의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구축하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외적인 모습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근본 의도는 ‘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힌다는 식의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내면의 성령에 따라서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표현을 하며, 반대로 내면의 악한 영에 따라서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가장 최종적인 외면의 모습은 얼마든지 숨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의 가장 깊은 곳부터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 앞에서 속일 것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우리는 하느님 앞에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의 ‘의도’를 파악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처음의 성경 구절에 대해서 설명

믿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히브 11,1) 신앙생활을 꽤나 오래 했으면서도 여전히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거의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뭔지 모르는 상황. 문제는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고 또 알려주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있는 자리에 안주하려 한 데에 탓이 있고, 가르치는 권위(교도권)의 입장에서는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알려주려 해도 알지 못하면 알려줄 수 없고, 또 알고 있어도 다른 욕구들이 앞을 가로막아 알려주지 못하기도 하니까요. 사실 이 부분은 굉장히 복잡한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단순화시켜 생각하도록 합시다. 신자들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는 신앙생활에서 ‘공복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그들의 노력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적절한 도움을 주십니다. 교회는 가르쳐야 합니다. 본질적인 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올바로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주석하는 ‘학문’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신앙인들이 올바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들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럼 ‘믿음’은 무엇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이미 잘 설명했지만 좀 더 알아듣기 쉽게 풀이해 보도록 합시다. 사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믿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가게에 가서 점원에게 물건을 살 수 있는 이유는 그 가게의 점원이 별다른 항의 없이 물건을 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어느 특정 가게의 점원과 오랜 기간을 사귀다가 냉정하게 차 버린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어느날 무심코 다시 그 가게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몇 개 집어들었는데 옛날 자신이 그 점원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겁을 내는 것과 신경을 쓰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겁은 겁을 내는 대상이 겁을 내는 주체를 조종하다시피 합니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게 만들지요. 신경을 쓰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지요. 엄마는 얼마든지 칼을 쓸 수 있지만 아이가 배울까봐 아이가 보는 앞에서 칼을 쓰지 않을 뿐입니다. 사람이 든든하게 의지할 것이 있으면 겁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겁이 많은 만큼 두려워할 대상이 많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겁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겁’의 가장 근본에는 ‘죽음의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서 따지고 들어가보면 결국 거기에 가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죽을까봐 겁이 나는 것이지요. 참된 신앙을 지닌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1코린 15,54-56) 신앙인이 된다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는 ‘부활신앙’을 지닌다는 것이고 한마디로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신앙인들은 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겁이 많습니다. 직장 걱정, 집 걱정, 돈 걱정, 가족 걱정… 그 수많은 걱정들은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지요.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은 영원히 갇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열쇠는 자기 자신이 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지요.

따스한 마음을 찾아서

진정으로 따스한 마음을 찾는 이들과 그것을 소유한 자들은 서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대상부터 세상의 자녀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자녀들은 자신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만납니다. 언뜻 상대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지요. 다만 자신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상대를 찾아다닐 뿐입니다. 그들은 서로 칭찬하고 추켜 세우지만 실제로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속으로는 상대를 비난하고 깔보는 경우가 더 많지요. 참된 사랑을 찾는 이, 그 여정을 시작하는 이는 시선을 돌립니다. 한 방향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지요. 그것은 세상의 자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역입니다. 값비싼 상품의 원래의 가치는 그 제품의 원가가 아니라 그 제품의 필요성입니다. 물론 허영심이 많은 이들은 그 모든 것이 제 값을 한다고 하고 필요하다고 하겠지요. 그러니 그들은 장님의 상태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앞의 기본적인 겸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지요. 부자가 가난한 이들과 ‘우정’을 맺을 리가 없습니다. 부자는 오직 부자들의 부류와 섞일 뿐이지요.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과 어울리고 싶어하겠지만 부자들의 요구조건에 미달되기에 그럴 수 없습니다. 때로 ‘사회적인 프로그램’이 그 둘을 조우하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느님의 자녀들은 서로를 찾습니다. 그들은 별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봅니다. 아니, 사실 말이라는 것은 본질을 왜곡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자화자찬하는 사람치고 실속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허황되고 과장된 말잔치일 뿐이지요. 실제의 그는 외롭고 고독하며 공허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내면의 어두움을 없애고자 외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속여도 속일 수 없는 현실입니다. 충실한 자의 내면은 충실한 대로, 공허한 자의 내면은 공허한 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

씨 뿌리는 사람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마르 4,26-27) 어찌되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씨를 뿌려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씨가 뿌려지지 않는데 뭔가가 자라는 일은 없습니다. 자란다고 해 봤자 ‘원수가 뿌린 것들’이 자라겠지요. 씨를 뿌려놓고 그걸 키우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게 아니니까요. “신부님,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렇게 묻는 이의 마음 속에는 ‘내가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뭔가 하셔야 하지요. ‘씨를 뿌리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씨를 뿌려 성장시키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다가 할 수 있는 것조차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그게 뭐냐구요? 그건 여러분이 알지요. 저는 제게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사제면 사제의 일을, 수도자면 수도자의 일을, 평신도면 평신도의 일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일을 하면 됩니다. 그래도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십자가 앞에 꿇어 앉기부터 하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엄마 되기

“밤에 정말 피곤해서 잠을 자고 싶은데도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엄마는 일어나야 해요. 왜냐하면 저 생명은 나에게 달린 거니까요. 그 마음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거죠.” 예전 청년이었다가 지금은 주부가 된 이들을 만나면서 엄마가 된 소감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들은 말입니다. 그렇지요, 누군가의 생을 책임진다는 것이 ‘엄마’의 사명인 것입니다. 엄마는 단순히 생명을 싸지르고 마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감’을 수반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모성애’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천부적인 능력이지요. 볼리비아에서 수많은 ‘엄마’들을 만납니다. 공통점은 아이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이지요. 선교 사제로서 장례를 많이 치르지만 ‘엄마’의 장례식은 분명히 다릅니다. 여느 남성들의 장례식과는 달리 ‘엄마’의 장례식은 자녀들의 감사와 애정이 늘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실제 그 역할에 있어서는 ‘엄마’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엄마의 마음으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돌보십니다. 하느님 당신이 없으면 죽어 버릴 우리들이기에 당신은 꾸준히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우리가 엄마에 대한 감사를 자라면서 잊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에 대해서도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 깨달음이 살아 생전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리석은 우리는 때로 너무나 늦게 그것을 깨닫고 맙니다. 육의 자녀를 키우는 것이 그토록 사명감이 필요하고 힘든 일이라면 ‘영의 자녀’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리들은 너무나 장님들입니다. 아이에게 ‘알파벳’이 가득한 장난감을 사줄 줄은 알면서 ‘영원하신 분’에 대한 가르침을 지나치게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미 말했지만 단순히 싸지른다고 엄마는 아닌 것입니다. 엄마들의 막중한 사명감을 이해하지만 육신 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영혼이 중요하다는 것도 잊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제

사제라는 직분을 지니고 있지만 선교사도 되었다가 옛 친구도 되었다가 주임 신부도 되었다가 직장 동료도 되었다가 아들도 되었다가 동생도 되었다가 은근 슬쩍 연인도 되었다가 합니다. 나라는 사람은 변하는 게 별로 없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필요로 나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쉬움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제’이기 때문이지요. 사제는 사제일 때 제 역할을 하는 법입니다. 칼은 물건을 자를 때에 쓰는 것인데 그 칼을 액자에 넣고 벽에다 걸어놓으면 그것은 사실 더는 ‘칼’이 아니라 ‘장식품’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상 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저마다의 직분으로 대합니다. 커피숍 카운터 직원에게 인생상담을 하는 사람은 없고, 은행 경비원에게 돈을 빌리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역할 속에서 그를 만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유독 ‘사제’는 사제 본연의 역할 안에서 만나는 경우가 참으로 드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어쩌면 사제는 그 모든 것을 품어 안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사제의 역할’이라는 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 만인의 동반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이유는 모든 이를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함이라는 것에 바탕을 둡니다. 사제도 그를 자신의 필요대로 만나는 신자도 이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이 부분이 자주 망각됩니다. 사제를 만나고 나면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년 가운데 몇 번 되지 않는 동안 사제를 만나서는 온 마음으로 그 사제에게서 하느님의 도움을 갈구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당기기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르 4,25) 자석은 쇠를 끌어당깁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쇳가루를 모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자석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자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쇳가루가 모일 것입니다.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진 자’라는 것의 의미를 물질적인 차원으로 전락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가진 자는 ‘하느님’을 가진 자입니다. 하지만 영적 거지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뭔가 손에 잡긴 잡았는데 전혀 엉뚱한 것이 들려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토끼를 잡는다고 덫을 놓아 줄을 잡아 당겼는데 토끼는 어느새 빠져나가고 없고 줄만 당기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토끼를 잡으려면 토끼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 주로 머무르고 어떤 길로 다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끼의 마음이 되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하는 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쇠를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하느님을 나에게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토끼를 연구하듯이 하느님의 선호를 연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마치 교회가 모두 연구해서 결론을 지어버린 것 같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토끼가 덫을 빠져 나갔듯이 교회가 붙들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하느님은 이미 그곳을 빠져나가 계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영세자의 숫자를 바라보시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성전의 크기와 수를 헤아리시는 게 아니라 얼마만한 열정으로 당신을 사랑하는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전례의 ‘정확도’를 따지시는 분이 아니라 감사하는 이들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진실함이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자석의 힘입니다. 겸손이 그분의 사랑을 이끌어애는 가장 훌륭한 길입

남보다 나은 존재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자체로 실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유한 영역을 지니고 있고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적지 않은 오해가 섞여 있는 부분입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엄마와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다보니 엄마가 아이가 학교에서 금방 배워온 사실 하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 순간 자기가 엄마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정보’ 하나를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아이가 엄마보다 급상승하는 게 아닙니다. 엄마는 지식적으로 부족할 수는 있겠지만 실천적인 체험이 더 많지요.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 우월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일을 분별할 수 있고 옳고 그름을 알고는 있지만 상대를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심판하는 분은 오직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사실 남보다 나은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통상적인 분별로는 그런 이들을 알아차리기 힘들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이 뛰어난 이들, 하느님을 닮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넓은 품은 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듯이 그들의 사랑은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인지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더욱 소홀히 하지요. 아니, 심한 경우에는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해 버립니다.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항의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월등히 뛰어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이 낮은 것을 선호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남보다 낫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낫다고 착각하는 그만큼 오히려 남보다 더 미천한 존재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지요.

바라보는 기술

진정으로 보는 사람은 본다는 것을 알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려 보아야 보지 못하는 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는 사람은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이해할 만한 것을 전해 줍니다. 어설프게 보는 사람은 자신이 본다는 격정에 사로잡혀 상대를 설득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를 위한 도움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일일 뿐이지요. 그러다보니 상대가 이해하지도 못할 말을 하게 되고 오해를 사기 쉽상입니다. 보는 것도 영적 기술입니다. ‘인내’가 함께하지 않으면 보는 것이 도리어 문제를 야기시키게 되지요. 보아도 보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보이신다면 좋은 일이지만, 보지 않는 것처럼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을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다만 그 때를 기다려 준비하고 있으면 됩니다. 이 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수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일종의 기술이랄까요? ㅎㅎㅎ

없는 걱정 만들기

사람은 아쉬움이 없으면 ‘추구’하는 것이 줄어들게 됩니다. 모든 것이 가득차 있으면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는 이미 들어차 있는 것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미 먹을 것이 즐비한 상황에서 사람은 ‘긴장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굶지 않을까를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때부터는 별다른 걱정이 없어지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이윤추구단체’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채워져 있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쾌락을 이끌어낼 것을 고민합니다. 결국 만들어야 하는 것이 ‘새로운 걱정’입니다. 사람들이 걱정이 없어지고나면 긴장감이 없고 아쉬운 것이 없어지니 ‘걱정’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키모인에게 냉장고를 파는 것이 가능한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아마 냉장고를 집안의 장식품으로라도 사게 만들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그런 필요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라면 아마 사막에 온열기를 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이들이 늘어갑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평화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이미 가득 차 있고 남은 것은 정말 신경써야 할 일에 내어 놓아야 하는데 새로운 걱정이 생겨나고 그것을 위해서 안달복달하기 시작합니다. 나눌 여력따위는 없습니다. 자기 핸드백을 신종 상품으로 새로 사야 하기 때문에 나눠줄 여유가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나눈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누는 것도 뭔가 이득이 있을 때에 ‘투자’하는 개념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정말 상대를 위한 필요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주고 나면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하느님에게라도 따질 기세로 나눕니다. 그러니 ‘받을 상은 이미 받은 셈’입니다. 실컷 오른손으로 자선을 하고 그것을 왼손 만이 아니라 가능하면 온 세상이 다 알게 만드는 이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너끈히 명예를 얻었으니 다른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과욕일 뿐입니다.

우리가 내어주는 것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마르 4,24)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우리는 뭔가를 주고 받는다고 하면 무턱대고 ‘돈’이나 ‘재화’를 떠올립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을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축소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인간이 무언가를 내어줄 때는 사실 그 ‘물건’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어줄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어주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내가 아무리 집에 돈이 많아도 미운 놈에게는 돌멩이 하나 내어주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하고 마음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줄 수 있는가? 받은 만큼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역시 내어줄 마음도 없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나의 것’이고 ‘내가 생산해 낸 것’이라면 아까워서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기본 환경을 사실은 모두 ‘선물 받았다’는 것을 올바로 깨닫는 사람은 비로소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이들을 찾아보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무엇을 받았는가? 여기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길이 갈립니다. 제 아무리 성당을 나가고 미사를 참례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는 하느님 앞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미사를 나와주니 하느님 당신은 나에게 축복을 내어 주어야 하오.’라는 식의 사고는 곤란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서 성당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니 마치 자신은 축복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받는 축복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모든 것의 시작도 하느님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과 거래를 하려고 드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내어

사서 고생

제가 참으로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사람은 ‘쉬운 일을 하라’고 할 때에는 그것을 무시하다가 나중에는 ‘엄청 어려운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미리미리 하느님을 알고 기도하면 차분한 생활을 할 수 있을 터인데, 하느님에게서 심하게 어긋난 뒤에야 하느님을 회복하기 위해서 온갖 고된 일을 떠맡아 하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하구요. 미리미리 식단을 조절하고 적당히 먹고 운동하면 될 것을, 꼭 건강을 잃을 위험에 처해서야 모든 좋다는 것을 다 하려고 드니 그것도 참 이상합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서로 보듬고 챙기고 인내하면 부드러워졌을 것을, 그만 소홀히 하다가 나중에 관계가 파괴될 지경에 이르면 뒤늦게 그것을 회복하려 하지요.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면 될 것을…

두려움의 실체

어느 캄캄한 밤, 한 남자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왼쪽에서 부시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괴한 동물의 소리가 나기에 이 남자는 최대한 길 오른쪽으로 붙어서 걸어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헌데 그 순간 번개가 번쩍 비추면서 주변 사물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뿔싸 왼쪽에서 나던 소리는 아주 작은 다람쥐가 움직이는 소리였고, 길 오른쪽 그의 바로 곁에는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그를 노리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걱정하고 겁을 냅니다. 주로는 세상 걱정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겁을 내어야 하는 존재는 따로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고 우리는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건 바로 영적으로 다가오는 위험들입니다. 벼룩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집어 삼키는 모양새입니다. 우리는 조금의 물질적 재산을 더 얻고자 쉽사리 영적 재산을 내던지는 꼴입니다. 돈 때문에 이웃과 싸우고, 현세적 바람 때문에 영혼 보살피기를 소홀히 하지요. 그야말로 다람쥐 소리가 겁이 나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판입니다. '보면' 알 수 있게 됩니다. 한 번만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고로 보여 주어야지요. 하지만 아예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보여주려 해도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결국 '귀 있는 자는 들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아 영원한 생명을 찾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길에서 인사하는 사람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3) 파견받은 자는 ‘목적’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 목적은 위로부터 주어진 목적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목적이지요. 파견받은 자는 그 목적을 수행하러 가는 사람입니다. 길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에 인사를 나누는 이유는 그가 나를 알고 내가 그를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반대로 나를 조금이라도 그에게 알리고 싶을 때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인지’되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이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인사’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인사 자체가 선교를 위한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임사제는 특별히 바쁜 일이 없는 이상은 성당에 오는 신자들을 맞이해야 하고, 미사가 끝나고 나면 배웅해야 하며, 나아가 수시로 찾아오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 인사는 거룩한 인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파견을 받아 가는 길에 나누는 인사는 우리의 ‘명예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인사는 우리의 파견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사입니다. 그 인사는 ‘나를 드높이려는’ 인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예심’에 관해서 주의히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사명을 받은 이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명예가 아닙니다. 사명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받은 자는 ‘복음선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의 처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난 성격에 대처하기

가끔 성질이 모난 사람을 만납니다. 곧잘 틀어지고 화를 내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과 마주하는 것 만으로도 소모적인 시간이 됩니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그는 성질을 낼 테니까요. 인내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인내롭게 견딜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그와의 만남의 자리는 지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그와의 만남 중에 있었던 일들이 폭풍처럼 나의 생각 속으로 다시금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그 때에 이렇게 대답했더라면….’하는 생각이 밀려드는 것이지요. 올바로 대응하고 다시금 쏘아주지 못한 것이 억울한 셈입니다. 즉, 우리 안의 모난 성질이 그제사 고개를 쳐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이성은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해서 그랬어야 하고 지금이라도 다시 전화를 걸어서 그것을 되잡아야 한다고 고함을 지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성은 ‘감정’의 사주를 받은 이성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그래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모난 성질의 사람은 내가 하는 충고를 새겨 듣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의 작용이 일어날 것이 뻔합니다. 내가 하는 충고에서 전혀 반성을 내비치지 않고 도리어 나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싸움이 시작되게 됩니다. 다음으로, 그런 그의 모난 성격은 어딜 가나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비단 내가 아니라도 다른 더욱 모난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할 것이고 그는 앞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그런 이들과 맞붙게 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모난 성격으로 충돌을 일으킬 사람은 세상에 널리고 널려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모든 것을 진정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옮겨다니기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루카 10,7) 한국 교회의 사제들은 임기가 있고 때가 되면 떠나야 합니다. 말 그대로 이집 저집을 옮겨 다니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런 외적인 형태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장소를 옮겨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안락에 대한 추구를 끊어라’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파견을 받아 가서 충분히 거기에서 살 수 있음에도 다른 집을 찾아 떠나는 것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좀 더 편한 환경, 즉 기왕이면 따뜻한 물도 나오고, 사람들이 더 친절하며, 음식이 더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지요. 사제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본당에 가면 가난한 본당에 머무는 대로 살아야 하고, 부유한 본당에 가면 부유한 게 싫어도 거기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외적으로는 옮겨 다니지만 실제로는 전혀 옮겨 다니지 않고 오직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 파견을 받아 갔다가 장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옮긴다는 수도자, 어느 지역에 파견을 받아 가서 신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옮기는 사제, 주임 사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본당을 바꿔 다니는 신자들은 말 그대로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인 셈입니다. 제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 다니다가는 결국 굶어 죽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일단은 먼저 하느님을 갈구하는 배고픔을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배고픔을 느끼면 우리 입에 들어가는 그 어떤 음식이든지 맛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누구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얼마전 아주 재미난 체험을 했습니다. 일적인 관계로 제 앞에서는 언제나 무뚝뚝한 신부님이 한 분 있는데, 우연히 그분이 다른 동료 사제들과 나누는 카톡 대화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앙증맞은 이모티콘을 써 가면서 동료 사제의 관심을 끌고 있더군요. 사실 누구에게나 ‘어린아이’ 같은 부분이 존재하는 셈이지요. 다만 우리는 많은 경우 사랑받아야 할 대상을 그릇되이 선택합니다.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드는 이 앞에서 사랑을 갈구하고 진정 사랑할 준비를 갖춘 이 앞에서는 냉정하게 대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늘 뒷통수를 맞고 정작 사랑이 필요할 때에는 얻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우리의 외피, 즉 껍데기는 허영심을 바탕으로 사람을 분별하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 우리 앞에 달콤한 것을 내어 바치는 이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눈 앞에서 온갖 감언이설을 하는 이를 신뢰하기 시작하고 반대로 묵묵하게 제 길을 걷는 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빠를 풀어주는 격이지요. 여러분 앞에서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이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들의 말은 달지만 결국 여러분에게 큰 해꼬지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늘 제 갈 길을 아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는 진정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여행

여행을 하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 선호도가 드러납니다. 여러 장소를 방문해 보려는 사람도 있고 한 자리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요. 사람을 만나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자연과 머무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그 모든 선호도는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해서 남이 원하는 것을 살려는 이들이지요. 이들의 여행 패턴은 ‘짬뽕’입니다. 여행사에서 권하는 것, 책에서 읽은 좋다는 것,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가는 여행이기에 자신만의 패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소비적으로 여행을 합니다. 스스로는 수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알찬’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셈이랄까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앉아서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리 수많은 것을 보더라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는 여행이 되고 맙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아셨겠지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면 남에게 끌려다닐 뿐입니다.

등에 입은 권력

어제 참으로 이상한 느낌을 하나 받은 적이 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분을 만나 인사를 하는데 ‘내 덕분으로 잘 살고 있지?’라고 그분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지요. 조금은 엉뚱하고 당황스러운 느낌입니다. 볼리비아에 산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 저런 교회 내의 제단체와 필연적으로 연관을 맺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따로 도음을 요청한 적도 없고 특별히 혜택을 입은 적도 없었습니다. 헌데 단지 어느 단체의 회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오지의 선교사가 왔으니 ‘너는 내 덕분으로 살아간다’라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 참으로 의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어떤 연관도 없는데 다가와서 ’나 … 단체 사람인데…’ 이렇게 자기소개를 시작하는 분은 다시 말하면 ‘나는 너를 개인적으로 전혀 몰라. 딱히 알고 싶은 마음도 없어 하지만 내가 속한 단체는 이렇게 유명한 단체야. 그러니 네가 나를 드높여주고 알아줘야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지요. 사실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은사분들이 있습니다. 틈날 때마다 미사때 기억을 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분들은 비록 가까이에서 단 한 번도 만나뵙지 않았지만 어느 때고 만나면 반가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분이 뜬금없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나서면 당황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 혈연, 학연, 지연이 거의 그런 것들입니다. 나는 초라하고 모자란 사람이니 나의 친척에게서 힘을 얻고, 학교에서 힘을 얻고, 지역에서 힘을 얻는 것이지요. 어느 연예인이 자기 친척이라고, 내가 어느 학교 출신이라고, 내가 어느 지역 출신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등에 입은 권력, 그 권력을 벗을 때에 그는 얼마나 더 초라해질까요?

바쁜 예수님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마르 3,20) 군중은 예수님에게 모여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전할 뿐 아니라 온갖 이적들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그러한 것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던 같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까요?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일을 하셨고 그 일의 결과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일의 결과를 본 셈이지요. 누구든지 큰 희생으로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어 놓으면 그 일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과정과 그 일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 성인이 거룩한 기적을 행하면 그 기적은 좋아하지만 그 성인이 그러한 기적의 은혜를 입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셈이지요.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인내를 견디어 왔는지 어떤 희생을 치루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설령 알아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주저함’은 정작 예수님에게 애정이 필요할 때에 정반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르짖는 결과로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고 정작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소홀히 할 때에 벌어지는 일이지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넓은 아스팔트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좁고 험한 가시밭길입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고 안락하게’ 하려는 이는 훗날 큰 장애에 부딪히게 됩니다. 왜나하면 근본적으로 우리의 신앙의 기반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런 군중들의 특성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장래에 이 군중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짐작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

미쳐 보이는 분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에게 정상의 기준이 존재했고 예수님을 그 틀에 넣으면 ‘미친 놈’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기준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물론 사회적인 상식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때로는 그 상식도 저마다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비교적 조용하게 어울려 살았습니다. 큰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했지요. 그런 가운데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는 그들에게는 깜짝 놀랄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 율법에 어긋나 보이는 수많은 일들, 마치 신흥 종교에 빠져들어 동네 깡패마냥 추종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들은 친척들이 보기에는 큰일날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 들입니다. 그렇기에 2000년 전의 예수님의 파격적 행보가 그닥 무리한 행동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이 들어 보아서 머릿속에 이미 고정된 형태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누군가가 나서서 예수님이 당시에 했던 행동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면 말이지요. 그냥 대학이나 다니고 결혼해서 지 밥벌이나 하고 살면 될 것을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머물고 하느님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니고 힘 있는 자들의 삶을 질책한다면 말입니다. 아마 우리들은 그런 이를 견디지 못하고 ‘미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그 앞에서는 그런 표현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를 만나면서도 속으로는 ‘이 사람은 왜 이러고 살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 지도록 합시다. 사실 이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더 데레사를 사랑하지만 만일 그녀의 곁에 머물렀다면 ‘좀 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 뻔합니다. 우리는 비오 신부님을 사랑하지만 그분의 곁에서 직접 그 모습을 보았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할 겁니다. 솔직해 집시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예

옛 부대 찢어버리기

우리가 가진 고질병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수동적이고 방어적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 되었다는 것이지요. 나는 살인을 하지도 않고, 구타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비난할 수 있는 윤리적 깨끗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리고는 그 상태로 굳어 버리기 시작합니다. 미사를 갑니다. 하지만 가고 싶어서 가는 미사가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가는 미사가 아니라 ‘가야 해서’ 가는 미사입니다. 왜냐면 ‘윤리적 청결함’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신앙생활이 기쁨과 행복의 생활이 아니라 의무와 수동적인 생활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옛 부대에 담긴 옛 포도주가 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한 마디로 정돈을 하면 ‘현상유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으려 하지만 더 좋아지지도 않는 상태. 그러나 그러는 동안 영혼이 점점 굳어가는 상태입니다. 왜냐면 결국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어떻게든 세상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요. 이제 잘 새겨 들으십시오.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나서서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하고 때로는 내가 할 수 없어 보이는 일마저도 시도를 해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아이는 아직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십년을 자기가 알고 있는 ‘가나다’를 반복하고만 있다면 그 아이는 훗날 자라나서 얼마든지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기반이 존재함에도 여전히 멍청하게 ‘가나다’만 반복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힘든 사명을 부여합니다. 새로운 교과서를 주고 배우게 합니다. 때로는 힘에 부쳐서 아이가 들고 가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고 말 과제도 부여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쓰러져 넘어진다고 아이를 힐책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그 아이에게

I´m a Bolivian in South Korea

타지 생활을 오래하면 결국 한국이 타지가 됩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게 되지요. 도로에 차선이 깔끔하게 그어져 있는 것이 신기하고, 인터넷의 속도가 말 그대로 빛의 속도인 것이 신기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덤덤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신기합니다. 감사하고 축복받았다는 것을 마치 일부러 외면이라도 하는 듯이 살고 있는 나의 동족이 낯설게 느껴지는 기분… 그것이 내가 ‘이방인’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하지요. 어린 시절 미군에게서 얻은 과자를 맛보며 엄청난 행복을 느끼셨다는 아버지의 말에서 저는 새삼스럽게 지금 제가 머무르고 있는 나라와 제가 선교하고 있는 나라를 비춰보게 됩니다. 결국 행복의 열쇠는 인간 안에 숨어 있는 것이지 외적인 환경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아무리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아무리 호화스러운 물건을 ‘소유’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마음이 ‘즐기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삶을 즐기는 법을 오래전에 잊어버리고 만 셈이지요.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나눔의 가치를 가르치고, 돌아가서는 하느님을 가르치고… 선교사는 어딜 가든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행복

저는 맛있는 것을 먹으면 행복합니다. 하지만 그 맛있는 것은 ‘비싼 것’이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은 제가 일단 배가 고프고 그리고 먹고 싶어지는 모든 것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에게 선호도를 묻습니다. 멀리서 온 선교사에게 비싸고 귀한 음식을 대접하려고 합니다. 아니요. 저는 짜장면도 먹고 싶고, 쫄면도 먹고 싶고, 돼지국밥도 먹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이전에 배가 고프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느끼게 되는 것이 한국은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이들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먹을 게 너무나 많고 원하면 뭐든 먹을 수 있어서 먹는 기쁨을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열량이 엄청난 값비싼 음식을 먹고, 다시 늘어난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단식 프로그램을 한다며 값비싼 약재를 구해다 먹고… 먹고 토하고 다시 먹던 로마의 환락의 마지막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누기를 배워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마음이 너무나 빈곤합니다. 마음이 복음적으로 가난한 게 아니라, 바늘 구멍하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구두쇠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스스로는 가난하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나눌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행복한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구상의 모든 자원을 끌어들이더라도 불가능한 일이 될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엠빠나다 하나를 둘이 나눠 먹으면서도 기뻐할 줄 아는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다시금 인생의 본질이 무엇이고 과연 행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 이야기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저마다의 관심사가 있고 사실 자기 말고 남들에게는 전혀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을 대화의 주제로 삼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현실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시야를 넓히면 보이는 것들이 있지만 시야를 넓히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보이는 것만 보려 하는 것입니다. 연령별로 곧잘 거론되는 주제들이 있고, 직업별로 거론되는 주제들이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최근 영화나 시사 문제가 거론됩니다. 물론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신앙생활’이라는 또다른 주제일 뿐, 정말 마음 속에 간직한 하느님의 신앙을 나누는 사람을 찾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자신을 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아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지 않고서는 진솔함을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진솔한 사람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를 깨고 속살을 내비쳤을 때에 그 속살에 칼을 깊숙이 박아넣지 않을 사람을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포장합니다. 진솔한 마음은 숨긴 채로 껍데기를 들이대지요. 그러다보니 껍데기에 굳은 살이 배겨서 더욱더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터놓고 정말 진중하게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나눌 사람이 아쉬운 때입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들

치료에 있어서 기본은 ‘통증’입니다. 어디가 아픈지를 모르면 당연히 그 사람은 치료될 수 없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좋아도 스스로 아픈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미없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치료를 찾지 않습니다. 아니, 반대로 자신에게 오류가 산더미 같은데 남을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붕 떠있고 자신의 이야기로 주변을 도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공허함은 참기 힘든 것인데도 정작 자신들은 그걸 모릅니다. 이기적이고 편협하며 오로지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 뿐인데도 자신들은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런 이를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차라리 아프다고, 힘들다고 하면 치료나 시작될 것을, 그들은 스스로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누굴 만나든지 자신의 초라한 생각을 드러내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영적 환자들, 그들에게 섣불리 치료를 언급했다가는 도리어 봉변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자신은 정말 건강하다고 착각하는 환자에게 메스를 들이대는 의사를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그 환자는 깜짝 놀라서 자신을 해친다고 생각하고 그 의사를 공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만나면 영혼이 즐거워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에 만나면 즐거워지는 이들이지요. 사실 굳이 만나지 않더라도 그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랑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지요. 사랑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는 사랑할 뿐이지요. 모르니 설명을 해야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아들을 믿는 엄마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지 못하기에 걱정을 하지요. 아들이 어디에 가든지 해야 할 일을 할 것을 아는 엄마는 자녀를 어디에 보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녀의 마음이 엇나간 걸 아는 엄마는 자녀가 바로 곁에 있어도 걱정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압니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살아갈 뿐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할 일만 해도 충분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이들이 만나면 서로의 기쁨을 나눕니다. 기쁨이 영을 채우지요.

베풀기

사실 저는 가난한 선교지에 있지만 제가 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품위’를 유지할 정도의 돈은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해진 옷을 입거나 어디 가서 ‘구걸’하면서 손을 내밀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누군가가 무엇을 내어줄 때에 저는 기쁘게 받습니다. 그렇게 받은 것이 저와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필요하기도 해서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렇게 내어주는 이에게 아주 소중한 체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부유하면 도울 일이 없게 됩니다. 내가 지금 붕어빵을 먹고 있는데 그걸 나누고 싶다고 주변을 둘러보면 주변에서는 황금 잉어빵을 먹고 있으니 나누고 싶어도 나눌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군가는 ‘수용’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선교지에서 온 선교 사제는 가진 것을 베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천하는 이는 생각 외로 드뭅니다. ‘나눔’에 있어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터라 기회가 있어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삶을 지켜보면 됩니다. 나눔을 실천할 좋은 기회가 와도 그 순간 손이 움츠러드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을 비난한 유다의 모습은 우리에게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낭비되는 것을 보면 가난한 이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가난한 이를 만나면 나 자신의 무엇을 꺼내서 돕고 싶지는 않은 것이지요. 참으로 묘한 아이러니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사탕을 두개 받으면 그 반을 떼어서 저에게 내밀기 때문입니다. 그 사탕을 받아먹는 저로서는 마치 엄청난 부자가 된 기분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혈연의 허상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 뿌리를 찾게 마련이고 사회 안에서 자신이 ‘소속감’을 느낄 공간을 마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특히 피를 나눈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혈연’이라고 표현되는 것이지요.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것은 적지 않은 DNA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사제가 되고 또 이방의 선교사로 일을 하면서 깨닫고 배우게 된 것이 있습니다. 혈연이라는 것이 생각만큼 끈끈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반대로 ‘신앙으로 맺어진 가족관계’가 더욱 친밀하고 끈끈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같은 피를 받았다고 둘의 내면이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가족 안에서도 마음이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그러니 한다리 건너고 나면 ‘피를 나눈다’는 것의 의미는 더욱 상쇄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여기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으로 인해서 다윗 가문이었지만 실제로 그분의 영은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고향에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아직도 신학생 시절 어느 할아버지댁을 방문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야, 신부질 할라꼬 카는기가?” 그렇습니다. 저 지금 ‘신부질’하고 있습니다. 훗날 하느님은 서로 일치하는 마음들을 모아서 새로운 가족을 선사하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서로 ‘친척’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의 내면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전혀 아무런 연관도 없던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모이는 일이 허다할 것입니다.

와서 보라(논산 훈련소에서 한 강론)

찬미예수님, 저는 볼리비아라는 남미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동기 신부님 만나러 왔다가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와서 보라’가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직접 가서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있지요. 군생활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것들을 그려보지만 실제로 가서 체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으로 집을 만들어 놓고는 그것이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하지만 진짜 집은 더 복잡한 것입니다. 수도도, 전기도, 벽의 두께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저도 2000년도에 입대를 해서 군생활을 해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군생활이라는 것 쉽지는 않지요. 하지만 군생활이라는 것은 마치 작은 인생의 축소판과 비슷한 셈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으니까요. 군대도 자신이 오고 싶어서 온 사람은 없지요. 와야 하니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펼쳐진 현실 앞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입니다. 누군가는 늘 불평만 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군생활이 불편하다고 불평하고, 기간병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그렇게 불평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다 적극적으로 삶에 헌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 삶이 결국 사회에 돌아와서도 고스란히 적용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지금 여러분이 처한 환경이 제가 머무는 곳의 환경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물이 있고 전기가 있다는 것, 그 밖에도 여러 편의 시설이 있다는 것은 여러분은 충분히 좋은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젊고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 와 있는 것이지요. 아무도 80먹은 할아버지를 군대에 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

영적 지도자

수많은 이들 앞에 영적 지도자로 나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끈다는 것은 솔직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야말로 맑은 마음이 없으면 머지 않아 ‘꾼’으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지요. 했던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라 형식과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내용만 교묘하게 뒤바꾼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것이 ‘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상대의 영을 분별하고 그 영에 합당한 과정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다르고, 어른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다르고, 노년의 어르신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영적 지도자를 가만 두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런 저런 유혹거리들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 뜻하지 않게 그의 마음을 근심으로 채우기도 하지요. 그런 가운데 영적 지도자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하느님’ 뿐입니다. 하느님께 전심으로 의탁하는 영적 지도자는 그분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길을 찾습니다. 솔직히 모르기 때문이지요.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적 지도자의 과업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올바르게 수행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보람찬 일도 없을 것입니다.

와서 보라

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들어서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세상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해 듣고 그것을 상상하기 시작하면 머릿 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라는 것은 군더더기가 제거된 이미지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레고 블록으로 집을 지어놓고 스스로 훌륭한 집을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집에는 난방도 고려되어야 하고, 수도도 들어가야 하고, 전기 시설도 적합한 전류에 맞춰서 설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상상 속에서 그런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인생을 먼저 살아보고나서 그 뒤에 다시 인생을 사는 이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은 단 한 번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험하면서 다시 살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러한 체험과 방향설정 중에 ‘영원’, 또는 ‘내면의 가치’를 향한 방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험해 보지 못했기에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도 없고, 결국 가르침을 받지 못한 이들은 다시 전해주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지요. 물질적인 생활의 질은 갈수록 나아지는데 영적인 공허감은 더욱 더 가중되기만 합니다. 바로 그 때에 ‘초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여기 한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비록 가진 것도 충분치 않고 경력도 없지만 그가 얼마나 충만하게 살고 있는지 와서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가서 보고 알게 됩니다. 하느님이라는 분이 계시고, 그분이 모든 생을 선물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은 그분의 창조물에 불과하며 우리에게는 보다 중요하게 신경써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입니다. 와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예수님을 상상하기만 하면 전혀 엉뚱한 모습의 그분이 그려질 뿐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구요? 여러분 가운데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교회의 변화

비판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변화를 꾀하는 것이지요. 비판만 하면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습니다. 행동을 시작해야 하지요. 하지만 올바른 행동은 올바른 분별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행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을 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한 법이지요. 그럼 무엇을 분별해야 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사실 수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부담스러운 신앙생활이 보이고, 그런 신자들에게 뜨거운 열정을 전하지 못하는 사목자들이 보입니다. 사목자의 권위와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수도자들도 보이고 돈과 명예에 길들어가는 고위층도 보입니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 신앙에 다가오는 세속적인 사람들과 연애를 하기 위해서 모임에 나오는 청년들도 보입니다. 그러한 모든 움직임 가운데 ‘하느님의 부재’가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안에 하느님이 없습니다. 앙꼬 없는 찐빵이지요. 팥 앙금 없는 붕어빵입니다. 하느님을 다시 불어넣는 작업. ‘성령’을 불러 일으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메마른 가슴에 단비를 뿌리는 작업, 꺼져가는 심지를 다시 지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런 작정을 하니 다시 눈에 보이는 게 있습니다. 이미 그렇게 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좋은 강좌를 하고 좋은 글을 남깁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얼마든지 그런 기회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좋은 수단으로 가진 생각들을 금방 나눌 수 있고, 이역 만리 떨어진 곳의 사제의 강론을 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실천’의 부재입니다. 서로들 똑똑한 머리로 읽기만 합니다. 읽고 또 읽어 머리가 점점 커지는데 ‘실천’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허한 말잔치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잘 살자고 하는데 잘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자고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지요. 용서해야 한다고 말만 하고는 여전히 미워합니다. 나누자고 하면서도 나눌 줄 모르지요. 이기적인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습니다. 머리는 잔뜩 커져서 터질 것

외적인 병, 내적인 병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마르 2,5) 제가 기도를 설명하면서 늘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신 게 아닙니다. 사실 중풍병자는 그들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혼자서 집에서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고 그를 치유와 구원에로 이끌었지요. 사실 ‘치유’는 덤이었습니다. 그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메말라 있었고 얼마나 고통 중에 있었을지 상상이 되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그의 몸의 병, 즉 중풍병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현대의 많은 이들도 비슷한 질병에 시달립니다. 그들의 육신이 아픈 이유는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합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요. 지금까지 병자들을 치유하던 예수님이 심각해 보이는 그 중풍병자 앞에서 병의 치유를 하지 않고 ‘용서’를 언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압니다. 스스로가 왜 아픈지, 어디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지 알지요. 적지 않은 현대인의 병은 ‘마음병’입니다. 과거의 죄책에 근거한 그 마음병은 미래의 불안과 걱정도 끌어오지요. 그래서 그의 육신도 덩달아 아픈 것입니다. 참된 죄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내면이 바로 설 때에 자동적으로 외면도 바로 서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사실 비만은 내적인 병입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습관, 입에 즐거운 것을 찾는 습관이 몸의 비대함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내면을 바로세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법과 사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후려칩니다. - 아야. 방금 네가 한 행위는 나에게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 그래? 그럼 앞으로는 그 행위를 하지 않을께. 이렇게 규칙을 만들자꾸나 ‘타인을 치는 행위 금지’. 이게 세상에 법이 생겨나는 방식입니다. 살다보니 충돌이 일어나고 그러다보니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겨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법을 만들어서 서로 살아가는 데에 피해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하지만 법에서는 ‘사랑’이 나올 구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수입의 10%를 세금으로 내기. 이따위 법에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자발적인 선한 의지의 선택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공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 할 것들이 모조리 정해져버린 사회에서는 정해진 대로 할 뿐입니다. 어느 한 기업에서 사회복지를 위해서 써야 할 기금이 순수익의 0.5%로 정해진다면 그들은 정해진 기금에 따라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자발적인 봉헌이 커질수록 사랑이 커지는 법입니다. 서로에게 강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솔직히 도와주고 싶지 않은데 미루고 미루다가 등떠밀려서 도와주는 사람은 도와주는 행위를 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도와주지 않은 것입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내어놓은 그 돈은 영적인 가치로 치자면 아무런 효과가 없는 돈묶음일 뿐입니다. 이는 실로 미묘한 문제이며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일입니다. 법은 사랑을 만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랑은 법을 보완합니다. 사랑이 없는 법은 차가움 그 자체입니다. 십계명이 단순히 법이 아닐 수 있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사이의 규정으로서의 법만을 추구하는 이는 십계명을 올바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 중에서 인간적인 요소만 취하고 나머지 것들은

믿지 않는 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 (히브 3,12) 사람은 누구나 맑은 마음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어린 시절부터 쌍욕을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나 순진하던 그 시절에는 아예 ‘언어’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러가지 것들을 습득해 나가는 것이지요. 인간의 여린 마음에는 근본적으로 ‘신’에 대한 감각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도 일찍부터 서낭당에 물을 떠 놓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는 ‘영적 존재’에 대한 감각이 늘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그분이 누군지는 배운 만큼 알 수 있을 뿐이었지요. 하지만 인간이 성장하고 ‘자신의 것’이 늘어가기 시작하면서 결국 인간 안에 내재된 그 마음의 자리를 자기 스스로 다 차지해 버리게 됩니다. 즉 처음부터 영원한 존재, 나보다 뛰어난 존재를 위해서 마련되어 있었던 그 자리를 나의 탐욕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을 신앙적인 표현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최고인 사람, 자신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말하지요. 진정한 무신론자들인 셈입니다. 껍데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런 무신론자들은 가톨릭 신앙인들 안에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외형적으로 가톨릭 신앙인의 모습을 취했을 뿐, 실제 내면은 ‘무신론자’들입니다. 자신의 목구멍과 육의 안락이 중요한 부류들이지요. 눈 앞에 벽이 있는데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해서 그 벽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긴다고 해서 그분이 사라질 리가 없지요. 참으로 어리석은 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로서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기가 더 힘든데 말이지요. 우리가 마주하고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하고 계획된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학적 교만이 스스로를

한국 교회의 영적 무기력

돌고 도는 물레방아가 하나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쇄작용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 지도 계층의 무기력이 존재합니다. 영적인 방향 설정을 해 줄 능력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전문 직장인’ 수준으로 시간이 갈수록 전락하는 느낌입니다. 심지어는 본당 사목구 주임도 하나의 ‘철밥통’이 되고 있습니다. 늘 하던 행사를 치르고 교회의 관리직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그런 교회의 지도층, 즉 교도권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평신도들도 무기력해집니다. 사실 신앙생활에는 조력자가 필요한 법인데 매주 교회로 나아가서 힘든 일상을 극복할 힘을 받아야 할 자리에서 너무나도 고리타분한 ‘형식화된 전례’를 접하는 신자들은 그 영혼이 더욱 메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의 그런 메마른 신앙생활은 다시금 그들이 마주하는 교회의 지도층에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이 영적 메마름은 어느 한 계층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진전되어 온 만성 질병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지도층이 나오는 텃밭은 평신도들의 가정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성장 과정, 수련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신학생이 처음 가졌던 순진하고 뜨거운 열정이 신학생의 기간을 거치면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고착화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모습이 ‘상뚜스’로 비난받고 술 잘 마시고 행사를 잘 치르는 전문 인력이 인정받는 엉뚱한 분위기가 결국 엉뚱한 최종 결과물을 양산해 내는 셈입니다. 한국 교회의 영적 무기력은 비단 이 나라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선교사로 일하는 동안 수많은 외국 선교사 사제들을 보아왔고, 그들에게서도 또 그들과 일하는 현지 주민들에게서 비슷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문화된 지식이 신앙을 쇄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엄청 발전을 하고 그에 관련한 논문들이 쌓인다고 신앙이 쇄신되는

복음 선포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예수님의 근본 사명은 ‘복음 선포’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다른 모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근본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병을 고친 것입니다. 사실 모든 병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습니다. 외적이건 내적이건 이유가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해방’이 선포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이유를 불문하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다만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것은 ‘믿음’이었지요.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 목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치유는 ‘복음 선포’를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 개인에게나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서 여러 사람에게나 ‘복음 선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사람이 병을 낫게 한 뒤에 더 많은 죄를 저지를 작정이라면 하느님은 그의 치유를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치유 받은 모든 이들은 이미 죽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치유는 세상의 영생의 복락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치유의 근본에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정밀한 기계일 뿐이고 결국 수명을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의 증거로 때로 한 사람의 생을 조금 더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파견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사명입니다. 이 근본 사명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 주말에 성당에서 하는 봉사도 의미를 지닙니다. 반대로 이 근본 사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천상의 일을 한다고 해도 울리는 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출처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히브 2,11) 만일 다이아몬드가 오직 한국에서 그것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만 생산된다면 세상의 모든 다이아몬드의 출처는 같은 곳이 될 것입니다. 헌데 영적인 면에서 ‘선함’의 출처, ‘거룩함’의 출처는 모두 같은 곳입니다. 즉,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그 모든 선과 거룩함의 근원이십니다. 하느님을 제외하고 다른 선과 거룩함의 근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선과 거룩함의 근원은 하느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그리고 그분의 은총을 입어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이들도 결국 모두 한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형제’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됩니다. 같은 아버지의 자녀이기에 마땅히 형제가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그는 선함을 이루고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신학책을 쓰고 하느님을 연구한다고 해도 바로 곁의 이웃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아는가? 나는 그분의 사랑을 아는가?’라고 말이지요. 그러면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옵니다. 내 안에 분노가 가득하고 시기와 질투, 증오와 불안함이 그득한 사람이라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 다시 생각하고 주파수를 다시 하느님에게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길을 찾기 힘든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바로 ‘길’이기 때문입니다.

피상적인 것을 넘어서

입이 존재하기에 음식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입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음식들은 그 존재가치를 잃게 됩니다. 만일 인간이 귀만 달고 태어났다면(물론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산다는 가정 하에) 들리는 모든 소리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인간의 감각기관들로 인해서 그에 상응하는 대상이 필요하게 됩니다. 눈을 위해서 ‘아름다움’이 필요하고, 코를 위해서 ‘향기’가 필요하며, ‘촉감’을 위해서 감각되는 모든 것들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렇게 감각되어지는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은, 우리가 그 감각 기관들의 중추인 ‘몸’이라는 것을 훗날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현세적인 감각에서 떼어놓는 과정입니다. 즉 우리에게서 눈과 귀와 코와 입과 피부를 앗아가 버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자리들에 전혀 새로운 것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던 자리에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시선이 들어서게 되고, 세상의 향기를 인지하던 감각에 천상의 향기를 인지하는 수단이 들어서게 되는 식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천상의 영광은 하느님의 사랑이고, 천상의 향기는 하느님의 선하심입니다. 그 일이 벌어지게 되는 날, 우리는 우리가 추구해 오던 것을 상실하는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10년 동안 바이올린만 연주하던 사람이 왼쪽 손가락을 모두 잃게 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바이올린 밖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제는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이올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아오지 않은 음악가,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기 위해서 바이올린을 선택한 음악가는 설령 손가락을 잃는다 하더라도 다른 수단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선물할 충분한 여지가 있는 셈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의 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미소한 존재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히브 2,6)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체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가운데 아주 미흡한 것 하나만 뒤틀려도 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생은 길어야 80-90년에 불과합니다. 지구의 나이,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티끌보다 못한 셈이지요. 하다못해 소나무 한 그루도 인간보다는 오래 살아갑니다. 인간이 역사에 남길 수 있는 흔적은 미미합니다. 아무리 제 이름을 크게 남긴다고 해도 지금의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갈지도 의문입니다. 지구의 탄생을 24시간에 비유한다면 인류는 거의 그날 밤 12시가 다 되어서 탄생한다는 비유도 있습니다. 헌데 이런 인간을 하느님이 기억해 주십니다. 도대체 왜? 시간도 공간도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인간에게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아주 소중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바로 그 점이 인간을 하느님의 사랑의 집중포화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 자유는 반대로 ‘죄’를 양산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을 ‘죄스런 상태’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를 치유하기 위한 작업도 수행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아 다시 당신께 돌리려는 노력을 하시지요.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역사 안의 한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지요.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증오하셨다면 죄를 짓는 그 순간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죄를 짓는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최종 결과는 우리 선택의 몫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던가 아니면 반대로 그분의 사랑에서 멀어져서 그분을 등지고 살아가던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의 몫

행복한 삶

며칠 전 포항을 다녀왔습니다. 물론 아버지 신부님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다른 분을 만나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교구의 엄청 선배 신부님 한 분이 저를 잠깐이나마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달려갔지요. 그 신부님도 바쁜 가운데 일부러 포항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직분을 수행하고 계시면서도 굉장히 겸손하신 모습의 신부님은 저에게 당신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다른 것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행복한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해야 사제로서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아무리 다른 모든 것(부와 명예, 권력)을 얻는다고 해도 스스로 행복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고 그걸 가로늦게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스스로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행복한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면서 행복한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저는 행복한 사제였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머물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었고, 또 지금은 지금대로 한국에 나와서 좋은 것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열심히 글을 적기를 바라시면서 진심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격려를 해 주시지만, 교구 선배 신부님의 격려는 특별히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바쁜 일 때문에 서둘러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정말 순식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만남이었습니다.

믿음의 성장과정

기초는 ‘하느님의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면 아무리 신앙에 대해서 설명해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느님은 계십니까? 하느님을 증명해 내면 사실 하느님이 아니게 됩니다. 하느님은 어느 그릇에 담길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증명할 방법은 없는가? 아닙니다. 그분의 발자취는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이라고 우길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선택은 그들 스스로 책임질 것입니다. 그들 역시도 우연의 산물에 불과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도 영혼도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도 없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가련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들이지요. 그들이 가만히 제자리에 머무른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초대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기틀이 잡히고 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을 얼마나 받아들일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사람은 무언가를 안다고 그 즉시 실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짖는 소리를 들은 아이에게 그것이 줄에 묶인 작은 강아지의 소리라고 알려줘도 두려움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만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는 얼마든지 많을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믿는가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누구는 겨우 주일미사나 빠지지 않을 믿음을 지니고 있는가 하면 다른 누구는 주님에게 진정으로 헌신할 믿음, 타인들이 뭐라고 비난해도 길을 바꾸지 않을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에 합당한 실천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와 동시에 합당한 실천이 뒤따르게 됩니다. 믿음과 실천은 자연스레 이어지는 결

더러운 영의 외침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르 1,24) 성경 안에서 등장하는 더러운 영의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자 대뜸 외쳐 댄다는 소리가 의외로 ‘신앙고백’ 수준입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신줄 알고 있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더러운 영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학식은 여느 평범한 신앙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그는 예수님의 존재를 알고 고백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는 바를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여러가지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이들. 나누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이들, 사랑해야 하는 걸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이들, 용서해야 하는 걸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이들, 하느님께 사랑으로 다가가야 하는 걸 알지만 세상을 뒤쫓는 데에 혈안이 된 이들,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하는 걸 알지만 주일 의무만 지키고 정작 주일을 엉망으로 보내는 이들…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내세우는 이들입니다. 아니, 신앙인들 중에서도 월등히 뛰어난 신앙인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모든 의무 사항을 빠짐없이 지키기에 스스로를 ‘좋은 신자’라고 착각하는 그들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1,25)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영들은 복종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갑니다. 다행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내버려두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같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더러운 영들을 우리에게서 내쫓을 수 있습니다. 비록 나갈 때에 큰 소리를 지르고 경련을 일으키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한 사람에게 떠나갈 때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반응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돈을

만물의 상속자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히브 1,2) 상속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상속받는 이가 상속받은 모든 것의 주인이 됩니다. 그러면 상속받은 이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상속받은 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셈이지요. 아드님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아드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는지를 올바르게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엉뚱한 것을 추구하다가 아드님의 상속의 시기에 전혀 엉뚱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에 속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핵심을 파악하면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서로가 마음을 모으고 일치될 수 있는 유일한 길, 분열을 없애고 진정으로 하나되는 길…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바탕으로 세상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흩어져 있던 만물들을 한 자리에 모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 근본 질서를 통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때에 이 질서에 부합하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태어나고 반대로 이 질서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교만한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고 미천한 이들을 끌어올리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사랑에 위배되기 때문이고, 반대로 겸손은 사랑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나눌 줄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무너지고 서로 아끼고 보듬고 나눌 줄 아는 마음들이 한 데 모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질서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만들어두신 질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일의 근본은 ‘회복’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삶 자체와 주변을 잘 둘러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사랑에 부합하는 것과 사랑에 반대되는 것을 잘 살펴 보십시오. 왜냐하면 그 중 하나는 들어높여지고 다른 하나는 내버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출처

기쁨에 대해서 사람들은 ‘발작적 웃음’과 착각을 합니다. 무조건 낄낄거리면 기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사람도 재치있는 무언가를 접하면 낄낄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담아놓은 것이 텔레비전이지요. 텔레비전의 여러가지 장치들은 우리가 거기에 빠져들게 만들고 같이 낄낄거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우리의 현실이 다가오고 그 현실 안에서 ‘우울함’을 체험하게 되지요. 우리의 발작적 웃음이 크면 클수록 그 우울함의 정도는 더 심해져 가는 셈입니다. 신앙적 의미의 기쁨은 ‘충만함’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이 채워져 우러나오는 기쁨이지요. 즉, 우리가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운명,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이미 주어져 있다는 굳건한 믿음 안에서 우리의 기쁨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기뻐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근본적인 기쁨 안에서 우리는 다가오는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즐기게 됩니다. 내면의 충만함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슬픔도, 세상의 기쁨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더는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셈입니다. 내면이 충실한 사람,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

하느님은 어떤 이를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이를 하느님이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에 열심이고 무엇에 최선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이고 최선인 것이 실제로는 하느님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당 봉사자로 열심히 일하면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요? 그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성당 봉사자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서 명성을 얻고 정작 자신의 가정을 소홀히 한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하느님은 그런 이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것, 영적인 것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이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것, 영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좋다는 강좌, 좋다는 신심 프로그램을 모두 쫓아다니면서 소위 자신의 스펙을 쌓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은 그런 이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거룩하다는 분’ 곁에 머물면 하느님이 좋아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좌 신부님을 모시고, 주임 신부님을 모시고, 나아가서 교회의 고위직분에 있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하느님이 좋아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이들을 통해서 우리를 성화 시키려고 하시지, 우리가 그런 분들을 모시면서 온갖 세속적인 좋은 것들을 선사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여기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바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의 몸을 집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생활하신 바를 나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표현, ‘예수님을

예수님의 정치 성향

예수님은 보수였을까요? 진보였을까요? 수많은 이들은 예수님은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드러내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당시의 ‘보수’로 알려져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대사제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신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단순히 ‘진보’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예수님만큼 제대로 된 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빠지지 않는다고 하셨고, 하늘나라의 가르침을 아주 제대로 전하셨습니다. 즉 보다 근본적인 계명의 준수를 요구하셨지요. 즉, 살인하지 말 것이 아니라 아예 미워하지를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잣대를 예수님에게 들이대면서 예수님을 자신의 편으로 초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끌어당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그분에게 끌어당겨져야 합니다. 이를 잊은 수많은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분석하고 또 분석하면서 자기들끼리 싸운다고 바쁩니다. 그러는 동안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들은 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지요. 우리가 살아갈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데, 왜들 그리 싸운다고 바쁜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손을 잡고 헤쳐 나가야 할 과제들도 산더미인데 말이지요. 그러니 죽은 자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 산 이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정치 성향을 굳이 밝혀야 한다면, 예수님은 100% 하느님에게 속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믿을 만 합니다. 아니,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육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으니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고 세속적인 인간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는 바울로파다." 하거나 "나는 아폴로파다." 하거나 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한 몸

옛날 중국 영화 가운데 이런 게 있었습니다. 어느 못된 사람 때문에 한 사람은 일찍부터 팔을 잘리게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 둘이서 만나서 서로를 도와가며 혼연일체의 무공을 이루어 다시 그 못된 사람에게 합당한 벌을 내린다는 내용이었지요. 즉 팔을 잘린 사람은 잃은 팔 대신에 상대의 팔을 얻고, 다리를 잃은 사람은 잃은 다리 대신에 상대의 다리를 얻어서 온전히 한 몸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루어야 하는 공동체라는 개념을 참으로 잘 드러낸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부족함을 지니고 있는 이들인데, 우리가 모여 생활하는 이유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저마다 가진 것을 나누고, 상대의 좋은 것을 받아들여 완벽한 시너지 효과를 내는 하나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팔이 잘린 사람은 상대가 가진 팔을 이상하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그나마 지니고 있는 다리를 으스대며 뽐내고, 반대로 다리가 잘린 사람은 상대의 다리를 험담하면서 자신이 지닌 팔을 추켜세우는 괴상한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부부 사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다름은 서로를 보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이지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아주 훌륭한 모범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어린 예수를 성모님의 인내와 겸손, 그리고 요셉의 책임감과 생활력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온전한 하모니를 이루어 내었지요. 우리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서로 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거나 다투지 말고 가진 좋은 것을 서로 나누어 한 몸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해도 될까요?

어제 낮에 페이스북 메신저로 문자가 왔습니다. 볼리비아에서 제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한 교리교사인데 인터넷으로 안부를 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잘 지낸다고 하고 별일 없느냐고 물었지요. 아니나다를까 별일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해,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지 말아.” 아주 간단한 원리입니다. 하고 싶은 걸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면 안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될까요? 됩니다. 하지만 훔쳐 먹거나, 배가 그득한데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면 안 됩니다. 술을 마셔도 될까요? 됩니다. 하지만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면 안 됩니다. 거의 모든 일에 이 기초적인 원리를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예외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이를 분별할 내적 요소가 많이 부족하기에 보호자의 지도가 필요하지요. 과연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이 교리교사는 사귀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에게 묻지도 않고 거절했을 것입니다. 누군가 다가오니 사귀어보고는 싶은데 그래도 가능한지를 저에게 묻는 것이지요. 저에게 이미 배운 바가 있어서 세상이 생각처럼 그리 ‘환상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저의 의견을 물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압니다. 이 친구는 크게 엇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 안에서 실수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아는 이 친구는 그런 실수들을 만회하고 또 실수들 안에서도 배울 자세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아파하고 그렇게 열심히 배워서 훗날 하느님에게 더 헌신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함구령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루카 5,14) 자기 PR 시대라는 지금의 시대는 스스로를 광고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알려서 사람들이 알게 하고 자신을 판매해야 하는 시대이지요. 헌데 예수님의 면모에서는 이런 시대적 흐름과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즉, 예수님은 남들이 아무도 알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왜? 우리는 생각합니다. 선교를 하려면 알려야 하지 않나?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해서 그들을 끌어모아야 하지 않나?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면 더욱 좋지 않나?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때에 무엇을 알리고 있는가가 중요한 일입니다. 과연 무엇이 알려지고 있고,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다가오고 있는 걸까요? 이 고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선교를 하러 가서 엉뚱한 일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이끌려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병원과 학교를 짓고, 가난한 가정과 아이들에게 돈을 쥐어줄 수 있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잘 모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선교가 아닙니다. 그건 대기업 판촉 행사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돈을 보고 다가오는 이들, 선교사가 가져다 뿌리는 물질적인 혜택으로 다가오는 이들은 그렇게 다시 물러갑니다. 아니, 그렇게 물러가면 다행입니다. 그런 이들이 교회 내에 ‘실세’로 자리잡기 시작하면 훗날 다가와서 일해야 하는 선교사에게 큰 곤욕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 그들의 탐욕을 정돈하지 않고서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핵심은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필요한 경우에 물질적 지원이 있을 수 있지만 무엇이 주된 것인지를 선교사 스스로 분별하지 않으면 스스로 혼동하게 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치십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 치유의 결과가 온전히 그에게만 머무르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고 싶었지 육체적 질병의 ‘치유사’가 되고 싶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것

은총과 그 뒤의 숨겨진 희생

당신이 오늘날 고해성사 안에서 마주하는 용서의 은총은 예수님이 생을 헌신하여 얻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선물하기 위해서 당신을 내어 바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은총을 ‘낭비’해 버리고 맙니다. 그저 건성건성 고해성사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기껏해야 주일의 의무를 거른 정도만 고백을 하고 말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수많은 것들은 다른 누군가의 희생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집에 돌아오면 마주하는 깨끗한 방, 내가 입는 깨끗한 옷은 어머니의 희생의 산물이며, 내가 누리는 수많은 것들은 아버지의 일상의 노동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받을 적에는 아무런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다가 비로소 우리가 그 ‘희생의 주역’이 되면서부터 그러한 것들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좋아 보이는 모든 것들 뒤에는 누군가의 눈물과 땀이 존재했습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수고하여 만드신 창조물이며, 나아가 외아드님의 희생으로 되찾아진 구원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런 복된 곳에 머무르면서 감사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출발한 곳에서 시작해서 ‘더 얻어내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려 합니다. 우리의 생의 시작부터 ‘거저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감사가 없으면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의무’에 불과한 것이며, 의무 안에는 자발성과 사랑을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감사하게 되고, 감사하면서 기뻐하며, 기뻐하면서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루어진 말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4,21) 예수님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해방 선포는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거나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계획한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계획의 실체가 이미 ‘예수님’이라는 분을 통해서 드러났기에 하느님의 약속은 이미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미 모두 이루어졌으니 더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일까요? 아직 남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응답’이지요. ‘부르심’은 이루어졌지만 ‘응답’이 남은 셈입니다. 그러나 응답을 하건 하지 않건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응답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이루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완성에 참여하는가 아닌가의 선택일 뿐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에 동참하는 이가 되던가 아니면 그와 반대로 머물던가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아무리 이루어진 일에 반대를 하더라도 이루어진 일은 완성에 다다른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전능으로 어떻게든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완성에 동참할 기회를 마련해 주시는 것이지요. 즉, 그분의 부르심은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거론하는 일의 심각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주저하고 응답을 뒤로 자꾸 미루려고 합니다.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여전히 세상 일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조금만 더 쾌락에 몸담고 난 뒤에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직 세상은 나에게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이득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선택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기 때문

부와 행복의 연관성

저는 부자가 아닙니다. 저희 집도 부유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의 생각 같은 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켜봐 온 바를 바탕으로 부유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는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부유하게 된다는 것은 일단 돈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많아지면 좋은 것은 ‘편안해진다’는 것이지요. 편안함의 근본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생각의 바탕이 존재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 불편해지기 때문이지요. 먹고 싶을 때에 냉장고에 오렌지 주스가 있어야 하고, 또 기왕이면 그것을 자신의 침대 있는 곳까지 가져다주는 시종이 하나 있으면 더 좋습니다. 그러면 편안하게 그 오렌지 주스를 즐길 수 있겠지요. 돈이 없으면 시종은 물론이거니와 고급 주스를 사먹을 수 없게 됩니다. 기껏해야 시장통에서 귤이나 몇 개 집어 먹을 수 있겠지요. 돈이 많으면 참으로 편안한 세상이 됩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소유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찬바람이 불어대는 추운 집에서 살 필요가 없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더위를 견딜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간단한 도식이 산출됩니다. “부유함 =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기 = 편안함 = 행복” “가난함 =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함 = 불편함 = 불행” 이것이 통상적인 도식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굉장한 의문을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유한 이들의 얼굴에서 생각만큼 ‘행복감’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정반대의 현실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곳에 선교 사제로 살면서 그들의 ‘소박한 행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제가 머무는 곳의 사람들은 정말 가난하고 없고 찌든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왜 그런가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게 가진 탓에 아주 작은 것에도 충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지요. 여

사랑과 두려움

사랑과 두려움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두려움을 알지 못합니다. 반대로 두려워하는 이는 사랑한다고 할 수 없지요. 사랑은 오직 한 분에게서 그 출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지요. 그분은 오로지 ‘사랑’ 뿐입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지금 말하는 두려움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두려움’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합당한 경외심을 가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분의 위대함과 무한함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두려운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것입니다. 공포라는 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앞에서 우리의 무지로 인해서 느끼는 것이지요. 어두운 밤에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이해하기 직전까지는 그러하지요. 하느님 앞에서의 공포는 우리가 그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결과물인 셈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만드셨고 기르셨고 또 넘어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그것도 몇 번씩이나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계속 ‘두려움’을 느끼려고 합니다. 다른 한 편, 앞서 언급한 두려움을 느껴야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의 욕구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리어 스스로를 하느님의 충실한 제자로 내세우면서 사람들 앞에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두려운 줄을 알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준비된 진노의 잔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8)

물 위를 걷는 일

물 위를 걷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사고의 범주를 벗어난 행위입니다. 우리는 물의 성질을 잘 알고 있고, 우리 육신이 물에 빠져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지면 ‘죽음’에 이른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우리의 ‘상식적인 선’의 사고는 여기에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물 위를 걷는다는 생각은 일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 아니 물 위를 걸으려는 시도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따라서 상식적인 사고 체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반증하지요.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적의 근본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십니다. 따라서 이 ‘하느님’과 그분을 향한 예수님의 전적인 의존을 제외한다면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이 상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이 당신의 눈에 드러나고 이미 배워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빵의 기적 때에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믿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신앙의 깊이는 우리가 ‘의심하면서 믿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분에게는 추호의 의심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마치 맑은 유리창처럼 하느님의 뜻이라는 빛을 그대로 투과시키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중적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때로 원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을 내면에 미리 정해 두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신기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내면이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해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 위에 예수님이 떠 있었다는 것에 놀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하느님의 뜻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상황이 그러하니 아무런 일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힘든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의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겨울에 찬 물로 샤워를 한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할 의지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됩니다. 하지만 의지가 없는 일은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가장 하기 힘든 일이 됩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으면서도 가난한 나라를 찾아가고 정말 궁핍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할 의지가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신앙인들이 그들과 다른 이유는 신앙인들은 자신의 의지를 봉헌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이나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이나 겉으로는 비슷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전혀 다릅니다. 예컨대 한 사람은 외적으로 힘들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실제로는 그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편안해 보이는 상황이지만 실제로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10일을 굶고 물은 이틀마다 한 잔씩만 먹으면서 견디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한다면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밥 먹기 전에 하늘을 한 번 쳐다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렇게 간단하고 쉽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나서서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하느님에게서는 도리어 멀어지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느님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지요. 하지만 그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가 멋대로 정한 자신의 뜻입니다. 그걸 단순히 하느님의 뜻이라고

죽음

어제는 가톨릭 대학 병원에 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거기 계신 신부님과 같이 여행을 다닌 적이 있어서 신부님께서 저를 많이 아껴 주시기 때문이지요. 병원 건물이 그 사이에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전에는 성당이 다른 건물 6층인가에 있었는데 어느새 위치가 바뀌어 지하실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 했지요. 제의방을 둘러보고 시간이 되어 미사를 집전하는데 어찌나 고요하고 정갈하고 질서가 있던지 어색해서 혼났습니다. 모인 분들이 대부분 환자분들이라 일종의 간절함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주례 신부님이 한 마디 인사를 드리라고 해서 쭈볏쭈볏 독서대로 갔습니다. “찬미예수님. 반갑습니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적응하는 중입니다. 감기에 걸려서 저도 여러분들처럼 환자입니다.(웃자고 한 이야기인데 별로 반응은 없었습니다. ㅋ) 환자분들 여러 병환으로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그런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또 하느님이 가장 먼저 돌볼 이들은 바로 여러분들이니 우리의 신앙 안에서 거기에 희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저런 군더더기 말들을 더 했지만 대충 이렇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래도 첫 주일을 한국에서 나름 사랑이 필요한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미사를 마치고는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동기 신부님 누님도 만나고, 이런 저런 지인들을 마주할 수 있었지요. 자몽차도 얻어 마셨습니다. 사실 우리 동네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마땅한 의료 혜택이 없어서 아파도 그냥 참고 살거나 심하게 아프면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장단은 다 있으니 우리 동네 사람들은 적어도 죽음이라는 것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죽음에 보다 친근한 분위기이지요. 반면 한국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다가 갑자기 일이 터지면 크게 상심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일상 안에서 중환자를 볼 수가 없지요. 병원에나 와야 정말 아픈

가까이 다가온 하늘나라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 4,17) 회개를 해야 하는 이유는 돌아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길에서 이미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그래, 너희들 아주 잘 하고 있구나. 너희들에게는 별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겠구나. 너희는 이미 잘 하고 있고 아무런 죄도 없는 순수하고 맑은 이들이니까 말이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죄인들,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방황하고 있던 이들을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판단 기준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완벽하다고 판단하기에 그 완벽한 판단을 바탕으로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나도 조난을 당한 상황에서 상대가 물에 빠졌다고 비웃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내가 상대를 건지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물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무엇이 물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단순히 상대가 저지르는 부정을 나는 현실적으로 저지르지 않았기에 나는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혹시 나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않을까요? 나 역시도 같은 부와 권력에 사로잡혀 그런 자리에 있으면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노릴 수 있을 가능성이 존재할 때에 그것을 과감히 뿌리치고 청렴 결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는 각자 스스로 대답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영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그분에 힘입어’ 우리는 메세지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세지는 세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심도깊은 의미, 영원에 맞닿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똑똑하다는 이들은 저마다 자기 식대로 그 메세지를 해석해 버리고 맙니다. 돈이 많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1요한 4,10)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했다면 우리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하느님을 저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선택하셨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응답’일 뿐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아니지요. 부르는 사람의 능력치에 따라서 그 부름에 응답하였을 때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부르는 사람이 동네 슈퍼마켓 아저씨라면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르는 사람이 대기업 회장님이라면 낙하산을 탈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헌데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신 게 아니라 ‘친구’로 부르셨고, 당신 외아들의 공동 상속자가 되라고 부르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분이 내어주실 수 있는 고귀한 직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부르심을 소홀히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은 단순히 율법적 규정 준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도 잘 지켜야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움직임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랑하는 것이 죽는 것만큼 싫다면 그 사람은 전혀 사랑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뭔가에 두려움을 느끼고 사로잡혀 있거나 다른 유익 때문에 사랑하는 척을 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시지요.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맛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우리들을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유혹하려고 들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빵 다섯 개로 드리는 감사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드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허락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덕분이니까요.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을 때에야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빵이 다섯 개 밖에 없다는 것과, 빵 다섯 개라도 있다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사를 드릴 줄 아는 내면의 가치야말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지요.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빵을 수천억개를 주더라도 감사할 줄 모르게 마련입니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면 ‘인간의 욕심’의 기본적인 움직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스스로 잦아드는 법이 없습니다. 한 개를 가지면, 두 개를 가지고 싶고, 열 개를 가지면 스무 개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욕심에는 ‘절제’라는 고삐가 늘 채워져야 하고 나아가서 ‘감사하는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모든 상황에서 감사를 드리라는 말은 단순히 상황이 안정적일 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이 최악인 것처럼 보일 때조차 ‘감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내 삶 속에 시련이 닥쳐 올때 조차도 감사를 드리라는 것이 본질적인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감사하는 사람과 함께 머물면서 그가 걸어야 할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근본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기원은 현세적인 이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근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영원을 선물하셨다는 그 기본적인 바탕 속에서 우리는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셨던 세상의 좋은 것들을 다시 가져 가신다고 해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가져 가실수록 우리에게 최종적인 선물인 ‘영원’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종종 오해를 받고는 합니다. 민중의 아편으로 해석되는 것이지요. 눈에 드러나는 삶은 구질구질하고 고통스럽기 마련인데 그리스도인들은 그 와중에 감사를 드리며 행복해하니 유물론적인 관점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은

공현

벌거벗은 사람이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떳떳한 사람, 기본적인 것을 갖추고 있고 나아가서 자신이 가진 것이 다른 이에게 선익이 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적으로 드러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선과 순수함을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은폐와 작당이 있습니다. 헤로데와 그 부하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여 버리기 위해서 머리를 맞다고 고민을 하지요. 우리는 주변에 무언가를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이 가진 물건을 내어 놓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품위를 더욱 격상 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전혀 다른 성질의 것들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강렬한 빛을 드러내는 이들이지요. 이들은 내면의 가치들, 진리와 선, 사랑과 인내와 같은 것을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 최고의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는 딱히 희망을 둘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진리와 선과 사랑과 아름다움의 근본에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누군가가 하느님을 드러낸다면 그는 가장 최고의 것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지니고 있을 때에 우리는 이런 드러냄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드러내어야 하고, 그 드러냄은 말씀과 행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는 바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드러내어야 할 것을 위해서 헌신하기 보다는 공연한 세상 것들을 드러내는 데에 정신이 없습니다. 무언가에 대해서 정보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정작 자신의 영혼은 공허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말입니다.

받아들이기 나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축적되게 됩니다. 때로는 깜짝 놀라는 것이 전에 어디선가 한 번 스치듯이 본 스페인어 단어가 필요한 상황에서 불쑥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우리의 내면에 축적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해석’하면서 받아들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마주한 두 사람이 받아들이는 경로가 달라서 한 사람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최악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해석하기에 달린 문제이지요. 여름에 휴가를 떠났는데 차가 고장이 나서 한참을 도로에서 기다려야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빠는 오매불망 카서비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아이는 길가에서 태어나 처음 보는 꽃과 곤충들을 만났다고 한다면 훗날 아빠에게 그 기억은 최악의 기억으로, 반대로 아이에게 그 기억은 최상의 기억으로 남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 나갈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변에 악한 사람이 많다고 단순히 불평에만 가득 차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그런 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시려는 하느님을 신뢰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배울 거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잘 배워 두시기를 바랍니다.

도시 방문기

휴대폰을 등록을 하고, 은행일을 보고, 교구청을 가고, 필요한 것들을 좀 사고, 사람들을 만나고... 헌데 이게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한 일주일은 그냥 방에 콕 박혀 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시간도 바뀌고 날씨도 바뀌니 결국 덜컥 고뿔에 걸리고 말았네요. 약을 이리저리 챙겨 먹었는데도 머무는 방이 우풍이 세어서 한기 때문에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침을 삼키면 내 목구멍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를 확실하게 표현해 주는군요. ㅋ 돌아다니면서 이런 저런 서비스를 접했는데 한국은 참으로 발전한 나라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휴대폰을 등록하는 곳에서는 아이패드 앱으로 아예 등록을 받더군요. 서명도 아이패드에 직접 하고... 참 신기했습니다. 은행도 어찌나 깨끗하고 서비스가 빠른지요. 아, 고속도로 주행을 하면서 차가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도로에 차선도 정말 깔끔하게 그려져 있구요. 제가 잠시 가족에게 빌린 차에는 네비게이션도 어찌나 상세하게 설명을 하던지요.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인터체인지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ㅠㅠ) 주유소도 빠릿빠릿하고 음식도 맛나고 같은 나라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편안한 일이었지요. 아, 무엇보다 카드 하나로 모든 기본적인 일이 처리가 가능하다는 것도 인상적인 일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촌놈이라 은행에서 현금을 뽑아 들고 다녔습니다. 지갑이 두두둑 ㅋ) 동네들이 얼마나 변했는지도 모릅니다. 없던 건물들, 빌딩들, 구조물들이 어찌나 많은지요. 한국은 정말 물질적으로 부요한 나라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허’를 말이지요. 그렇게 모든 것을 갖추고 나면 사람들은 아쉬움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지요. 삶의 진솔함을 찾는 이들과, 반대로 자신의 영적 공허를 더욱 큰 소비로 메꾸려는 이들입니다. 길가다가 출출할 때

빛이 떠오르면…

어둠이 드리워진 세상에서 서로를 집어삼키며 살아가던 이들 그들에게 빛이 다가옵니다. 빛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지요. 따뜻한 목소리로 상대를 유혹하던 이의 추악하고 더러운 얼굴 빛은 그 숨겨진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빛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빛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빛이 다가오면 숨어 버리지요. 진실을 감추고, 아는 사실도 감추고, 그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신을 위선으로 둘러싸고 거짓의 꿀을 입술에 바른 다음 여전히 자신의 유익을 위해 헌신할 희생양을 찾지요. 빛이 떠오르면 뭇민족들이 두려워하고 온세상이 겁에 질려 떨게 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게 됩니다. 빛이 떠오르면… 기쁨에 넘치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빛이 떠오르면… 그들의 눈에 눈물이 마르게 될 것입니다.

복음과 나

복음을 나에게 끌어오는가, 나를 복음으로 끌어가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복음을 나에게 끌어오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에다 그리스도의 메세지를 끌어와 쓰지요.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누군가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헌데 상대가 정말 궁한 사정이 생겨서 갚지 않지요. 하지만 이 돈을 빌려준 이는 자신에게 아직 여유가 충분히 있으면서도 손해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상대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따지러’ 가서는 말을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 몰라? 어떻게 내 돈을 꿀꺽할 수 있어? 당장 내놓지 못해?” 라고 말이지요. 이해가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복음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끌어다 쓰고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예수님께서 ‘일곱번에 일흔 번을 용서하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을 따라라, 그 밖의 것들은 모두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와 같은 말씀도 하셨기 때문이지요. 나를 복음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결국 나를 버리고 그분의 십자가를 나누어 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지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쉽고 편한 쪽’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나에게 끌어당기는 일입니다. 이 방향성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오늘부터 당장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말뿐인 사람, 여전히 복음을 필요할 때에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 옛부터 ‘대속’(대신 속죄함)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습니다. 죗 값을 대신 치른다는 것이지요. 누구나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결과가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 죄의 결과를 다른 이들을 통해서 대신 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문화 안에서는 ‘흑기사’로 표현되는 것을 꼽아볼 수 있지요. 해당하는 사람이 술을 마셔야 하는데 그 술을 대신 마셔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지극히 명료한 이유를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없애고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뭔가 폼나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듯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밝혀주는 예수님, 마치 가방의 악세사리 같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예수님의 이 ‘속죄’에 대한 능력이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지요. 헌데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예수님이 자신에게 별다른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같이 어둠의 행실을 자행하지요. 세상에 젖어 살아가고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면서도 예수님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장님 상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또 메말라서 스스로의 어둠을 느끼지조차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한한 사랑의 근원이시요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실 예수님에 대한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져들고 말지요. 그 신앙의 형식은 자신의 사회생활을 위해서 필요할 뿐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져만 가고, 소외된 이들은 더욱 소외되어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언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번번히 그 품을 벗어나고 말지요. 하느님의 어린양이 다시

죄와 불법

죄는 불법입니다. 하지만 불법은 죄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말장난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의미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모든 죄는 불법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의 증오, 이기심, 시기, 원망, 악의와 같은 것은 그 어떤 포장으로 둘러싸더라도 그 자체로 불법이 됩니다. 요즘 세상에는 짐짓 의로운 일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불법행위(주로는 증오)를 감싸는 이들이 적잖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남을 미워하는 이들, 남을 함부로 심판하는 이들은 죄를 짓는 것이고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법이 죄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보다 근본의 사랑으로 그를 위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불법한 행위가 될 수는 있지만 사랑을 완성하는 행위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과 안식일을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병자를 고쳤지만 그것은 사랑을 완성하는 행위였습니다. 저는 가난한 본당의 주임사제로서 불법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습니다. 이런 저런 지역 교회의 규정들을 여러가지 이유로 눈감아 주고 말았지요. (성인 되기는 그른 셈이랄까요? 하하하.) 하지만 저는 죄는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불법 속에서도 저의 사목적 판단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의 스승이시요 친구이신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불법을 자행하는 자로 낙인 찍혔지만, 그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모릅니다. 그 사랑을 이해하는 저도 비슷한 일을 합니다. 저는 인간들 앞에서는 불법을 저지를지 몰라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

가족이 가족인 이유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특별한 격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녀는 부모님을 존중하고, 부모님은 자녀들을 보살펴야 하지만 진정한 가족은 그러한 기본적인 돌봄 가운데 서로 어색함이 없지요. 가족이 아니던 이들이 가족이 되기도 하고, 가족인 이들이 가족이 아니게 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게 아니라 가족이 되어간 셈이지요. 마치 제가 볼리비아에 다른 가족을 두고 온 듯이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서로 가족이 되어갑니다. 반대로 가족이던 이들이 가족이 아니게 되기도 합니다. 유산 상속 문제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가족의 진정한 가치는 떨어져 있으면 알게 됩니다. 저는 이제 볼리비아에서 돌아와서 다시금 제 가족의 가치를 되새기고 있는 중이고, 다른 한 편으로 멀리 떼어놓고 온 가족의 소중함도 되새기는 중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결국 하늘나라에서 온전한 한 가족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은 일찍부터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입니다.

천사가 일러준 이름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라는 존재는 ‘메신저’입니다. 자신의 뜻을 수행하는 이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존재이지요. 천사는 위대하지만 그 위대함의 모든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나약한 존재들인 우리는 곧잘 ‘천사의 위대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가 등장하는 꿈, 그가 전하는 말과 표징과 같은 것들에 사로잡히고 말지요. 그리고 자주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천사들은 ‘하느님의 파견’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가 전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잊곤 합니다.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로운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분 외에는 따로 선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이 지니신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간 가운데 정말 드높아 보이는 이가 있다면 그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의 업적 가운데 정말 휘황찬란한 것이 있다면 그 업적을 이룰 모든 능력의 근원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결국에는 하느님의 외아들입니다. 인간에게 다가오시기 위해서 육을 취하셨지만 그분의 핵심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지를 방문하고, 좋다는 기도를 드리고, 위대하다는 모든 행동을 할 적에도 핵심을 잃지 않도록 합니다. 그 핵심은 하느님이시며 그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계신다는 것을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