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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15의 게시물 표시

성급한 조언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망치게 됩니다. 단순히 어떤 생활의 단편에 국한된 영역이면 기껏해야 요리한다고 계란이나 망가뜨릴 정도이겠지만, 어느 사람의 삶에 대해서 안다고 나서기 시작하면 그는 그 사람의 삶을 망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가공할 위험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화장실을 가야 하고, 일어나면 세수를 해야 한다는 정도나 알지요.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걸음마와 말하기를 가르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이상은 부모도 모르는 것입니다. 아니, 부모 자신의 삶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신 앞에 다가오는 하루하루의 새로움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지요. 이러한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든 휘둘러 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단순히 몇 번의 관찰로, 몇 번의 대화로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조언을 하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다만 ‘아, 이런 현명해 보이는 말을 했으니 그저 나를 높은 사람으로 보아 주었으면 좋겠구나.’하는 욕심 뿐입니다. 누군가의 생의 방향에 대해서 조언할 때에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진리와 선과 사랑의 목적이 아니라면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진리와 선과 사랑에서 거리가 먼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생에 대해서 조언하고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생에 대한 처세술이 잔뜩 적힌 책들은 말 그대로 ‘처세술’이지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방향이 될 수 없습니다. 친구를 많이 사귀라는 조언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친구들이 많이 다가오는 인격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법입니다. 지혜로움은 세상의 지식정보를 많이 안다고 갖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움

원수사랑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태 5,44-45) 이는 이성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아무리 따져 보아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사랑’으로만 이해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해코지를 한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려서 그가 저지르는 짓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도리입니다. 헌데 그를 위해서 ‘기도’라니요? 기도 자체에 대한 이해도 없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도 잡히지 않으니 이 말은 엉터리 말이 됩니다. 실제로 신앙인들 중에서도 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진중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미워합니다.’ 용서를 시도한다고 하지만 완전한 용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를 시도한 만큼 두배로 화를 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표현을 자주 쓰지요. - 용서 할려고 했다. 헌데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지 않으련다. 그렇습니다. 어설픈 용서의 시도가 두배의 증오를 이끌어낸 셈입니다. 이들이 하는 용서는 전혀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참된 용서의 시작은 잘못한 그와 나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용서의 시작은 하느님 앞에 선 우리들에게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용서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살려두고 계신다는 그 사실에서부터 용서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증오할 때에 하느님에게서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의 분노한 마음, 우리의 어두운 마음은 하느님의 반대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다려주십니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이해하기를 기다려 주시지요.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우리는 ‘고집스럽기’까지 합니다. 우

하느님의 선언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신명 26,18-19)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도록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요. 나아가 우리를 드높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찬양, 명성, 영화’를 받게 하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진실하시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고 돌아가지 않으며 그분께 의탁하는 모든 이들에게 들어가서 반드시 뜻을 성취하고야 맙니다. 하느님은 단 한번도 거짓을 내뱉으신 적이 없기에 그분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실하십니다. 여기에는 추호도 의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심하고 또 의심합니다. 이미 약속된 것을 의심하여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나아가 우리 스스로도 그 약속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는 믿지 못해서 스스로를 내던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양다리를 걸치고 삽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지 못하고 반대로 엉뚱한 약속들을 믿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고는 우리가 그대로만 따라하면 행복해 질 것을 말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입니다. 보험을 100개를 든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안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안정이라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때에 주어지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의 삶을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드러내셨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믿지 못했고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만’ 알 뿐 실제의 삶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안하고 안정적이지 못한 공허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언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신명 26,17)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마에 물을 붓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가 우리에게 전하는 방향을 잘 지키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말합니다.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이유는 아이의 세례를 원하는 부모가 그 다짐을 대신하고 굳건히 지키겠다고 약속하기에 세례를 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선언을 공공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배워 알고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던 약속은 어느덧 바람결에 흩뿌려진 먼지처럼 되고 말았지요. 우리는 더이상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려고 하지 않고 그분의 길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노후를 약속하는 수많은 존재들, 그 가운데 핵심은 ‘돈’이고 우리는 돈을 하느님의 자리에 두고 섬기고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돈이 잘 모이는 곳에 나아가려고 하고 돈을 많이 가진 이를 은근히 존경하고 그들과 같이 되고 싶어합니다. 양심이 바르지만 행색이 초라하면 부끄러워하고 반대로 양심 따위는 어떻든 상관없이 백화점에 가서 수백만원치 쇼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우러러봅니다. 겉으로는 그들을 비난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한껏 부러워하고 있지요. 우리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가 무엇인지 잊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것을 하느님의 규정으로 삼았고, 인간이 정한 것을 계명과 법규로 삼아 지키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은 돌보지 않으면서 사제에게 고급 양주를 사다주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유흥비로 수십만원을 쓰면서도 가난한 나라에서 선교하는 사제가 다가오면 제 주머니 돈걱정부터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하느님이 분별하실 일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에제 18,28) 회개와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라치면 단골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영화 ‘밀양’의 한 장면입니다. 큰 맘 먹고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가서 용서를 하려 했더니 자신은 이미 회개를 했고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그 장면에서 관객들은 큰 충격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묘사되는 종교 자체에 반감을 품게 되는 것이지요. “당사자가 용서하지 않은 일을 도대체 누구에게 용서받았다는 말인가? 그 예수라는 작자는 도대체 뭔가?”라는 식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장면에만 주목한다면 그런 반응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전도연은 자녀를 잃은 천사이고 그 범인은 살인마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장면을 보는 누구나 분노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실제는 보다 더 큰 그림 속에서 그려집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반대의 일도 언급하고 있으니 아무리 의인이라도 돌아서서 죄악에 빠져들면 그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인가 하는 것이 질문이 될 것입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그리고 죄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쉽게 나와 너를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인 구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남을 향해 삿대질을 할 때에는 그는 무조건 죽을 죄인이고 나는 반대로 천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쉽사리 우리 자신의 진실한 모습에 대해서 망각하고 맙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어느 사건을 바탕으로 나라를 분별하기 시작하면 우리나라는 무조건 천사와 같은 나라이고 상대 국가는 백번 죽어 마땅한 나라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외국에 저지른 악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날엔 우리는 혼란스러워하는 것이지요. 완벽한 죄인은 없습니다. 완벽한 의인도 없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선과

원한

한 사람이서 싸우는 싸움은 없습니다. 싸움은 두 사람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움 이후에는 ‘불목’, ‘원한’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원한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원한은 일종의 ‘족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원한’을 지닌 상태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3-24) 이 부분이 설명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예물을 제단 앞에 하느님께 드린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는 것을 더 아름답게 받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변에는 온통 불화를 조장하면서 성당에 기금을 낸다고 자신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뇌물’로 통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훗날 하느님 앞에 가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바친 기도의 양과 미사 참례의 횟수를 열심히 나열해 보겠지만 하느님으로서는 그러한 것들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주변과 맺은 관계를 잘 살펴보실 것입니다. 원한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하십시오. 형제와 화해하십시오. 모든 일을 의로움으로 행하십시오. 하지만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거룩한 생활 가운데에서 형제들이 일으키는 내면의 시기와 질투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증오하는 무리들이 주변에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어떤 것이든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면 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마지막 날에 그에게 돌아올 무게가 덜어지도록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기댈 데가 없을 때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지푸라기라도 잡게 됩니다.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마련이지요. 자신이 지금까지 의존해 오고 믿어왔던 것들을 모두 이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갖다 쓸 게 있는 동안 인간의 자존감은 살아있게 됩니다. 아무리 중병에 걸려도 보험이 있고 재력이 뒷받침하는 동안 사람은 ‘교만’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나 안 죽어!”라고 하다가 죽는 것이 가련한 인간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의 특성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를 살리고자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십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지금껏 보살펴오신 손을 잠시 거두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자신에게 재앙을 쏟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잠시 보살피던 손을 거두어 들이셨을 뿐이고 그마저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배은망덕한 것은 우리인데도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참된 신심이 있는 이는 기댈 곳이 하느님 뿐입니다. 그들은 설령 돈이 충분히 있어도 돈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기에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지팡이 하나만 지고 단벌 신사로 온 세상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느님의 힘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댈 곳이 있는 이상 우리는 하느님을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황사가 오기 전까지는 맑은 공기의 소중함에 대해서 따로 성찰하는 사람은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에스테르 4장 17절)

좋은 것

목수에게 좋은 것은 좋은 나무입니다. 대장장이에게 좋은 것은 좋은 철이겠지요. 저마다에게 좋은 것들이 있으니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좋은 것을 자녀들에게 주려고 하지요. 하느님도 좋은 것을 아십니다. 사실 하느님이 모든 선하고 좋은 것의 근원이시지요. 하지만 우리의 욕구들이 혼탁해져 정말 좋은 것을 버려두고 저마다의 좋은 것을 찾을 뿐입니다. 도둑도 좋은 게 뭔지 알기에 그것을 위해서 도둑질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좋은 것은 탁해진 좋은 것이지요. 만일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선하고 정직하게 살겠지요.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도, 남을 무시하는 사람도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은 하느님 앞에는 전혀 좋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되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좋은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 합당하지 못한 모든 것들은 그 가치를 상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나빠 보이는 것 속에 숨겨진 것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아이들은 공부하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공부를 시킵니다. 왜냐하면 아이에게 성가시고 귀찮고 싫은 것이지만 부모님은 그것이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헛됨을 추구하는 사람들, 본질을 찾는 사람들

진중하게 헛됨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소박하게 본질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헛됨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리 진지한 제스츄어를 보인다고 해도 이야기를 들을수록 피곤해지는 자신을 느낍니다. 반대로 소박하게 본질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야기의 길고 짧음이나 언어의 수준에 상관없이 마음이 충만해지는 걸 느낍니다. 대학 교수라고, 어느 의대 학장이라고 하시는 분들과는 그 전공분야의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으로서 그런 분들과 학업이나 의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이유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만나면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눌 뿐이지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의 ‘인격’에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운만큼 인격이 자동으로 쌓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를 허다하게 만납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지은 할아버지나 일용직 노동자에게서 인내와 배려를 만나고, 반대로 고위직, 화이트 칼라에게서 성급함과 교만을 발견하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를 알아차리게 되지요. 상대가 얼마나 진중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몇마디 나눠보면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는 적절한 수준의 반응을 합니다. 본질을 찾는 이들은 본질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런 ‘개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그의 ‘본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진국’이라고도 하지요. 진국이 되십시오. 소리만 요란한 깡통이 되지 마시구요.

사랑하는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어집니다. 그저 필요에 의한 관심만 생길 뿐이지요. 우리는 모르는 동네에서 지나가다 만난 구멍가게 아줌마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지금 심정이 어떤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요. 그저 지금 필요한 껌이나 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에 대해서 신경을 씁니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하고 왜 하는지를 궁금해 하고 그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거나 또는 반대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랑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미워하게 되는 이들은 사실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가 죽든 살든 그것은 그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기에 그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래서 그가 하는 행동이 나의 기대와 맞지 않아 그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 범위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많은 곳에 신경을 쓰고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일과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하느님’도 우리의 관심사의 하나로 존재하지요. 하지만 생각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이용할 뿐, 그분의 마음이 아픈지, 기쁜지를 걱정하려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가장 소중하며 우리의 마음을 가장 섬세하고 느끼고 그리고 나서는 주변의 가장 가까이 사는 이들과 내가 하는 일, 그리고 내가 소유한 것들에 마음을 돌립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구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아픔 때문에 당신이 마음 아파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의 답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이 될 것입니다.

방아쇠를 당긴 요나

방아쇠를 당기는 손은 아주 작은 부분을 담당하지만 총이 발사되게 합니다. 요나의 예언은 그런 역할을 한 셈이었지요. 누구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겠지만 요나가 그 역할을 맡았고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준비되어 있었지요. 방아쇠를 당기는 손에서 조금 더 묵상해야 할 것은 ‘총’이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총은 쇠를 연마하고 다듬고 부품을 서로 조립해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은 그저 방아쇠만 당길 뿐, 총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총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방아쇠만 당겼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총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사람들의 흩어진 마음을 모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미리미리 체험을 통해서 회개의 기반을 닦아두신 것이지요. 거기에 요나는 가서 방아쇠만 당기고 온 셈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명을 맡게 될 때에 우리는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방아쇠만 당긴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래서 그마저도 거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구원하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저 당신이 모든 것을 마련해 두실 테니 우리는 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일은 준비된 대로 일어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겸손하게 우리에게 그 도움을 요청하십니다. 우리더러 방아쇠를 당겨 달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도망치다 도망치다 결국에는 그 일을 수행하고야 맙니다. 하느님은 얼마든지 말 잘 듣는 다른 예언자를 보내실 수 있었지만 요나가 그 일을 수행하기를 바라셨고 그리고 그것이 후대에 우리에게 도움이 될 사건으로 남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고 우리는 다만 가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 쉬운 일을 마다해서 다른 이에게 영광을 넘기는 이들이 있으니 장님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할 때 주의해야 할 점

교도권에 화난 사람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질 난다고 다 때려 치우라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때로 적지 않은 신자분에게 있어 신부님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이해합니다. 좀 더 겸손했으면 좋겠지만 교만하고, 좀 더 검소했으면 좋겠지만 부유하고, 좀 더 진솔하고 사랑이 가득했으면 좋겠지만 형식적이고 행정적인 그 모습은 저도 한 명의 사제로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본 본당 신부의 모습이 모든 사제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 자리에서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비판은 그 잘못을 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하고 그가 사랑과 애정 안에서 그것을 고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지 막연하게 대놓고 사목자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도둑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컵을 하나 깨었다고 고양이는 필요없으니 세상의 모든 고양이들을 멸종시켜야 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논리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비난의 화살을 쏘는 중에 선의의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늘 고려해야 합니다. 비판은 할 수 있지만 바람직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잘못을 하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어 그가 그 잘못을 고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좀 억울하다고 온 동네가 그를 미워하도록 조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둘째로, 그의 오류가 그의 직분 전체를 상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직자가 온유하고 친절하고 검소하고 친근하면 참 좋겠지만 그런 만능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어느 부분에 오류를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만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때로는 소극적이고 수줍어하고 외통수이며 고지식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약점을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약점이 그가 하는 일 전

매일의 회개

예수님의 가르침이 힘든 이유는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라는 것은 어느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생을 다해서 나아가야 하는 변화이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교회적인 용어로 이를 ‘매일의 회개’라고 부르지요. 죄를 짓고 있는 사람에게는 죄 짓기를 그만두라고 하여 회개를 이끌어내고, 죄를 짓는 것을 그만두고 교회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이에게는 의무적인 교회 생활을 그만두라고 하여 회개를 이끌어내고, 의무적인 교회생활을 그만두고 열심히 살려는 이에게는 가난한 이를 보살피라고 하여 회개를 이끌어내고, 가난한 이를 보살피는 이에게는 가난한 이를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하여 회개를 이끌어내고, 가난한 이를 사랑하는 이에게는 부유한 이들마저도 끌어안는 마음의 품을 가지라 하여 회개를 이끌어내고… 우리가 어디에 안주하려고 하는 그 순간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하여 우리를 더욱 ‘완전’하게 하려고 애쓰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방향지시를 받아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안주하고 싶은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어나 가자’고 하시니 말입니다. 이제 그만 한 고을에 머물러서 거기에서 주는 좋은 것을 얻어먹고 쉬고 싶은데 ‘다른 고을도 찾아가자’고 하시니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헌데 우리가 무엇이길래 머리 둘 곳을 찾는단 말입니까?

용서

그런 체험 있으신가요? 누군가를 오해해서 그를 죽도록 증오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 후에 뒤늦게 그에게 사과해야 하는데 자존심 때문에 사과를 미루고 미루고 미루어 보신 적? 사실 우리는 ‘이유가 있어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이유가 있어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공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뿐입니다. 심지어는 누가 내 목숨을 빼앗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우리 스승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지요.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할 이유, 또는 타당성이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그 누구든 용서해야 할 의무, 당위성이 있습니다.하지만 이를 깨닫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 그럼 당장 드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축약하면 다음과 같지요. “누군가가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는데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나요?” 이는 ‘용서’라는 것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나오는 의문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용서는 상대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그가 나에게 행한 악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말이 곧 그가 저지르는 죄악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가 잘 되는 방향으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가 악습을 지니고 있다면 그 악습을 고칠 수 있는 방향으로 도와주어야 하지요. 그 악습을 계속해서 저지르게 놓아둔 채로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책임’과 ‘나태함’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를 고쳐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만용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 예컨대 상대가 저지른 오류를 내가 감싸안는

부자

부자도 종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자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검소한 부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하고 축복도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된 케이스입니다. 이들은 근본 돈 그 자체의 양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가난해도 살고 부유해도 사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에 하느님에게 감사드리고 감사하는 만큼 사랑을 나눌 줄도 아는 부류입니다. 때로 이들은 남들이 쉽사리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자선을 선뜻 하기도 합니다. 구두쇠 부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악착같이 돈을 벌지만 절대로 쓰지 않는 이들입니다. 집에 음식이 썩어 남아 돌고 쌓인 물건들이 삭아도 아까운 나머지 결코 남에게 나누어주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이들은 흔히 말하는 구두쇠입니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인식되는 부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많이 벌고 많이 씁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충분히 쓰고 그리고 ‘남는 것’은 남에게 줄 줄도 압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는 것을 줄 뿐입니다. 이들은 굉장히 계산적이면서 결코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습니다.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수준이 고만고만하면서도 결코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부자 흉내를 내려는 부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말은 ‘돈이 없다’, 또는 ‘돈이 부족하다’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돈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활해야 하는 수준은 결코 부자가 아닌데 부자의 생활 수준과 엇비슷하게 유지하려니 돈이 자꾸 지출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빚을 져가면서도 자신의 수준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빚을 집니다. 이런 이들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결국 자신의 ‘허영심’ 때문에 무너지고 맙니다. 물론 이들은 당연히 남을 돕지 못합니다. 물론 첫번째의 경우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입니다. 사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머지의 부자들이 세상에는 적절히 널려 있고 마지막 부류, 즉 부자 흉내를 내려는 부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늘 그렇게 ‘돈이 부족하다’고

많은 말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마태 6,7)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와 신실함이라면 우리가 하는 말은 ‘공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말 속에는 ‘공허’가 가득차 있습니다. 즉, 텅 비어 있다는 말이지요. 텔레비전을 틀어 보십시오. 영상과 더불어 수많은 말들이 뿌려집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들 속에는 ‘진실함’, ‘선함’과 같은 것들보다는 그들이 바라는 목적들이 가득하기 때문이고 그 목적의 대부분은 ‘이윤’과 관계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유명인사가 나와서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마다의 이기심이 교묘하게 더해져서 이런 저런 말들을 꺼내놓는 것이지요. 텔레비전은 그야말로 여가를 위해서 적절히 쓰지 않으면 중독되기 쉬운 물건입니다. 이러한 세태에서 우리는 ‘기도’조차도 많은 말로 뒤덮으려고 합니다. 기도의 양을 측정해서 기도의 신실함을 가늠하려고 하지요. 레지오에서 활동 보고로 많은 기도를 꺼내 놓으면 사람들은 놀랍니다. 하지만 그 기도의 ‘진실성’은 전혀 드러나지 않지요. ‘그래도 신부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뭐라할 순 없잖아요?’ 맞습니다. 기도를 아예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묵주라도 들고 오랜 시간 앉아있는 사람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적어도 기도 하는 시간 동안에는 다른 활동에 신경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기도 하는 시간 동안에는 ‘죄를 짓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인 표현들이 사실은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기도를 한다니요? 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기도를 한다니요? 기도라는 것의 본질을 ‘땜빵’으로 생각하는 수준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에게 내어바치는 우리 자신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드러나는 활동으로 ‘기도행위’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묵주를

당신 말씀의 사명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사 55,10-11)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떨어질 대상을 물색합니다. 비가 지붕 위에 고이는 법은 없습니다. 비는 떨어져 내려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가장 메마른 곳에 스며듭니다. 만일 지붕 위에 솜뭉치를 올려 둔다면 당연히 그 솜뭉치에도 비는 스며들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비처럼 내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 떨어진 그 목적을 완수하러 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이에게 떨어지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이, 가장 목마른 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스며들어 사명을 이룹니다. 수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신앙 안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는 이는 굉장히 드뭅니다.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낮춤’과 ‘목마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의가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원의를 다 채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갈구하는 사람이 결국 하느님이 뿌려주시는 모든 은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가진 자는 더 가져 부유하게 되고 가지지 못한 이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말의 숨은 뜻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갈구하지 않는 이는 가지고 있던 은총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하느님은 많은 것을 미리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들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욕구에만 집착한 나머지 가지고 있던 것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건강한 몸을 지녔는데 돈을 더 벌어들여 안락한 생활을 누려 보겠다고 악착같이 애쓰다가 결국 돈은 벌지만 건강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경우가 좋은 본보기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본보기를 들면 여러가지 항변이 뿜어

분리 -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이유

우리가 서로 싸울 수 있는 이유는 타인이 느끼는 것에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른손으로 칼을 들고 왼손을 내리찍지 못합니다. 굳은 각오를 다지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몸에 자해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향해 고함을 지를 수 있는 이유, 상대가 아파할만한 이야기를 사정없이 내뱉을 수 있는 이유는 그와 내가 ‘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나는 같은 신경을 공유하지 않기에 그를 향한 물리적 폭력, 언어적인 공격은 내가 전혀 느낄 수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을 향해서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악을 행할 수 없는 이유는 타인이 느끼는 것을 자신이 고스란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의 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입니다. 그렇기에 ‘선행’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선행을 통해서 자신이 ‘우월해진다’고 착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발이 시린데 손이 발에 양말을 신겨 주었다고 해서 손이 자랑스러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손은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몸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고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돕기는 커녕,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불사합니다. 우리는 무척이나 둔감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용서할 줄을 모릅니다. 한 번 받은 상처를 곱씹고 곱씹으며 상대에게 앙갚음할 기회만을 노립니다. 우리는 일치되지 않은 존재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이들입니다. 누가 이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런지요?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입니다. 갈라진 세상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유일한 치유제는 제 짧은 생에서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찾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분이시야말로 우리 모든 지체들의 머리이시고 사랑으로 모든 갈라짐을 일치시키시

중상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레위 19,16) 남을 험담하는 것, 그에 대해서 확실히 모르면서 그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은 그가 낮춰지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그 이면에 내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 중상이라는 것의 숨겨진 면모들입니다. 우리는 곧잘 이런 일들을 많이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를 향한 ‘열등감’이 알게 모르게 숨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보다 하수를 보면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동정심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면 우리의 열등감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를 공격할 수단을 찾게 되지요. 그리고 가장 쉬운 방법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전하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가능한 그 말속에 자신의 의도를 담습니다. 의도 없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에 ‘의도’를 담게 마련입니다. 사람을 살리려는 사람이 있고, 사람을 해치려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드높이려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드높이기 위해 다른 이를 깎아 내리려는 사람이 있지요. 그 가운데 ‘중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을 깎아 내려 최종적으로 자신을 높이는 행위이지요. 참으로 사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기 있다는 연예인에 대해서 그런 일들을 알게 모르게 하고 있으며 우리 주변 사람들을 ‘씹으면서’ 그런 일들을 심심찮게 하곤 합니다. 중상을 하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중상을 하는 본인에게 ‘영적으로’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상을 하는 사람은 두 가지 방향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지요.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과장된 일을 더하기에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교만’과 ‘증오’를 더하는 일입니다. 중상을 하고 다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이를 두둔하지 않기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레위 19,15) 우리는 통상적으로 세력 있는 이를 우대합니다. 그가 가진 힘과 권력을 부러워하며 그와의 친분을 통해서 뭐라도 얻어볼까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쪽으로 그것을 비판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세력 있는 이에게 굽신거려서는 안된다고 그의 권력의 허상을 쫓아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그렇게 행하는 이를 비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반대편의 가르침도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일종의 죄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멀쩡하게 사는데 가난한 이들이 눈에 밟히니 뭐라도 잘 해주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도 오류가 발생합니다. 가난한 이를 두둔한다는 의미는 그들이 ‘오류’에 있는데도 그들을 지원하고 응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지는 않고 그저 ‘던져주기’만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나름의 세상이 구축되어 있고 그들 안에서도 옳고 그른 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부유한 이들이 보기에 그들은 너무나 안타까워보이고 안쓰러워 보이는 것이지요. 어린 아이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관념이 생기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무턱대고 귀엽다고 오냐오냐 하다보면 잘못된 버릇이 생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그들과 함께 머물러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보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사제로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또 그들을 도와주려는 이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늘상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어리광을 부리려 하고 도와주려는 이들은 뭐든 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적절한 조절을 하지 않으면 이내 가난한 이들은 쉽게 얻는 물질을 통해서 ‘탐욕’이라는 내면의 악에 물들어 버리고 맙

거룩함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9,2) 거룩하다는 의미는 조용히 성체조배실 의자에 앉아 묵주를 들고 장시간 기도를 올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룩하다는 의미의 근본은 ‘하느님을 닮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이는 거룩한 사람이고 하느님을 닮지 않은 이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 하느님을 닮음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표출됩니다. - 전례를 엄숙하게 거행해야 해. 그것이 거룩함이야! -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해, 평일미사도 많이 나가고, 그것이 거룩함이야! - 성지를 방문하고 성인의 유해를 가져야 해, 그것이 거룩함이야! - 신부님 수녀님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가능하면 더 높은 고위 성직자 분들과 어울려야 해, 그것이 거룩함이야!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것들이 거룩함이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함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 선을 행하기 - 의로움을 실행하기 -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거룩함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닮는 방법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이 핵심을 잘 수행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바라는 선을 실천해야 하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 의를 실천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거룩함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련된 것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마태 25,34) 하느님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창조하면서 미리 마련해 두신 것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비유로 이야기하면 음식을 담을 그릇과 부가적으로 생산되는 쓰레기를 담을 쓰레기통이었지요. 요리하기 이전의 식재료들은 자신들이 어떤 음식에 사용될지 알지 못합니다. 훌륭한 음식이 될 수도 실패한 쓰레기가 될 수도 있었지요. 하느님이 바란 요리의 제목은 ‘사랑’이었습니다. 레시피는 다음과 같았지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 25,35-36) 그냥 읽기에는 어렵지 않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실천하기에는 엄청난 ‘자기비움’이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굶주림, 목마름, 나그네됨, 헐벗음, 병, 갇힘에는 민감하지만 타인의 일에는 굉장히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가족이 곁에서 힘들어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대단한 일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놀랄지도 모릅니다. 엄청난 치료약을 개발해서 세상의 중대한 병을 치유하는데에 열과 성을 다했지만 자신의 아내가 암에 걸려 나날이 메말라가는 것을 모르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지요. 치료약의 개발은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고 그 치료약은 결국 엄청난 가격으로 가난한 이에게는 주어지지도 않으며 결국 자신의 아내는 암으로 죽어 버립니다. 그의 두 손에는 부와 명예가 쥐어져 있지만 그는 그 어떤 ‘선행’의 결실도 얻지 못한 셈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지닌 지식으로 주변의 이웃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더라면,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보살피고 그녀의 병간호를 했었더라면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데에 조금이라도 더 나은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이 얼

당신은 뛸 수 있겠습니까?

당신 눈 앞에 까마득한 절벽이 있고 아무리 뛰어도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맞은 편의 벼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사랑하는 이가 손을 벌리고 나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뛰어, 나는 네 발을 떠받힐 힘이 있어. 그러니 믿고 뛰어봐.” 정말 엉뚱한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절벽으로 떨어져내릴 내 몸무게를 자신이 감당한다고 하니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저하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의 상황입니다. 현실이라는 절벽이 있고 맞은 편에 영원의 길 위에서 예수님이 팔을 벌리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상황이지요. 하지만 현실이라는 구렁을 뛰어 넘어서 그리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저하게 됩니다. 일단 뛰는 것은 제쳐놓고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나름 다리를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 신심과 전례라는 다리는 우리를 건너편으로 바로 넘겨다 줄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다리를 놓아 거리를 좁힌다 하더라도 결국 뛰어야 할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먼저 뛴 이들의 조언을 듣기도 합니다. 영적 여정의 선배들을 통해서 어떻게 뛰면 되는건지, 어떻게 하면 다리 힘을 기를 수 있는지 열심히 조언을 듣지만 결국 마지막에 부딪히게 되는 것은 다를 바 없습니다. 내 삶 안에서 뛰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뛰어 넘어야 하는 상황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포기와 결단이 마음 속을 휘젓고, 결국 사람은 한가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당신은 과연 뛸 수 있겠습니까?

영의 감옥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1베드3,18-19) 영과 육이 결합된 상태, 우리는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이 둘이 충만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상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다만 관찰할 수 있다면 영이 떠나간 육신을 관찰할 수 있지요. 영이 떠나가면 육은 해체가 시작됩니다. 쉽게 말해서 썩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의문이 시작됩니다. ‘영은?’ 우리는 더이상은 ‘관찰’할 수 없습니다. 영 자체가 관칠이 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영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과 관련된 모든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그 역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들,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집착해 버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눈에 보이는 ’재물’에 민감해지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육에 집착하는 동안 영의 생명이 사라져갑니다.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영을 전혀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절로 죽어가는 셈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영은 ‘죽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을 신경쓰지 않고 방치하고 육만을 챙기게 되면 영은 서서히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감옥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스스로의 탐욕, 이기심, 허영과 같은 것이 스스로의 영을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가두는 감옥이라니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은 어느 식당에 가도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급 음식에 길들기 시작한 사람은 고급 음식이 아닌 싸구려 음식을 접하게 될 때에 ‘먹기 싫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배가 어느정도 고파도 맛있는 음식이 아니면 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설

들짐승은 시중을 들지 않는다.

들짐승은 시중을 들지 않는다. 들짐승은 주변에 서성일 뿐이다. 시중을 드는 것은 천사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지만 남을 돕는 사람은 일부일 뿐이다. 그들은 천사이다. 들짐승은 그분을 해칠 수는 없다. 그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손이 없기에 시중을 들 수 없다. 오직 천사들이, 선의가 가득한 하느님의 천사들이 시중을 들 수 있다. 들짐승은 주변을 서성일 뿐이다. 들짐승은 그분과 머무를 뿐이다. 시중은 천사의 몫이다.

기초항목 세가지

어린 아이를 잘 관찰해 본 결과 사람에게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다음의 세가지라고 생각합니다. - 잘 먹기 - 잘 자기 - 잘 입기 잘 먹고나면 별다른 불만이 없어지고, 잘 자고 나면 피로가 사라지며, 잘 입으면 몸에 딱히 불편함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살펴보면 다음의 세부 항목을 찾을 수 있지요. 먹기 - 먹고 싶은 걸 잘 먹어야 합니다.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거나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부족하게 먹으면 안되지요. 음식의 가격이라던가 음식의 수준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자기 - 잘 잘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잘 잘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은 시끄럽지 않고 빛이 차단될 수 있으며 온도가 적당한 공간을 말합니다. 집의 평수라던가 사는 곳의 위치와 같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입기 -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옷이 필요합니다. 너무 작아서 몸을 조이거나 너무 커서 흘러내리지 않는 적당한 크기의 옷이면 됩니다. 젖어 있거나 너무 딱딱하지 않아야 합니다. 화려함이라던지 메이커와 같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에 필요한 세가지입니다. 인간에게 이 세가지가 충족이 되고 나면 큰 불편 없이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었고 사회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온갖 복잡다단한 욕구 속에서 살아가니까요. 단순히 위의 세가지 욕구가 채워졌다고 만족하고 살라고 한다면 당장 일어난 반발들이 엄청날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자신이 더해놓은 분류 기준만큼 행복은 도리어 줄어들게 되니까요. 기초만 채우면 행복을 시작할 수 있는데 기초 분류 이외에 이것 저것 챙겨야 할 주머니들이 너무나 많아서 거기에다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고 나니 정작 ‘본질적인 일’은 시작도 못하고 있는 셈이지요. 밥 먹었으면 일어나 일하러 가야 합니다. 밥 먹고, 입 닦고, 이 쑤시고, 커피 마시고, 다시 이 닦고, 신발끈 묶고, 기

성숙

열매는 익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시간 안에서 ‘수확’이라는 것은 대략 몇 개월의 정해진 시간을 말하지만 실제로 열매는 먼저 익을 수도 늦게 익을 수도 있습니다. 열매는 ‘때가 차야’ 먹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익지 않은 어른들이 있으니 미성숙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사회 안에서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내는 어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미성숙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 열매를 추수하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반대로 무르익은 영혼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주 어린 나이인데도 영혼이 무르익은 친구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세상 안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기회를 주시느라 추수를 미루십니다. 물론 때로는 엉뚱하게 오염되기 전에 추수해 버리시기도 하지요. 미성숙한 어른들을 만나면 어렵지 않게 그들을 분별할 수 있는 특징이 그들의 ‘교만’입니다. 그들은 남의 말을 들을 줄을 모르며 오로지 자신이 하는 말이 온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인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자신을 죽일 줄 안다는 것이기에 미성숙한 이들은 그 부분에서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이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단순히 고통을 참아받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법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면서 고통을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우리 안의 영혼이라는 열매는 익어야 합니다. 그 열매가 익을 때에 다른 이들이 그 열매를 맛보고 자신들도 같은 열매를 맺을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완성

만일 사람이 완벽하게 말할 수 있게 될 때에 말을 시작한다면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완벽해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면서 완성에 다다르는 존재입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순간 완벽한 신앙을 선사받는 것이 아니라 일단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완성에 이르러 가는 것입니다. 실수하기를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합니다. 시련과 비난과 조롱은 신앙생활의 동반자와도 같습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우리의 신앙도 우리 안에서 점차로 자리잡아 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표현은 없습니다. 당신이 준비가 될 때 쯤이면 어쩌면 당신의 생이 마감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부든 수녀든 교리교사든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완성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출발하지도 않은 길을 진로수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모든 영적 조언은 영적 생활을 시작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법입니다. 발을 똥물에 푹 담그고서 언젠가 여기서 나가면 발을 깨끗하게 씻고 양말을 신고 신을 신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일단 똥물에서 발을 꺼내고 나서 발을 씻든, 털어내든 뭐든 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완성되는 길은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 길에서 저 길로, 저 길에서 이 길로 넘나들기도 합니다. 어느 길에 있든지 용기를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중요한 법이지요.

천방지축마골피

저는 성이 마(馬)씨입니다. 어릴 때는 곧잘 놀림을 당하곤 했지요. ‘천방지축 마골피’라는 것은 단골 메뉴였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나머지 성씨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천방지축 마골피의 기원은 무엇이며 또 우리나라에 왜 그렇게도 김씨, 이씨, 박씨가 많은지도 알게 되었지요.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아도 금방 찾아낼 수 있는 정보들이 있습니다. “김 관장은 "현재 '천방지축마골피'와 같이 희귀한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중국에서 넘어 와 정착한 이라든지 새 왕조를 여는데 공헌한 개국공신으로서 임금에게 새 성씨를 하사받은 이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89116) “김이박씨가 많아진 이유” (출처> http://sajuplus.tistory.com/71) 하지만 결정적으로 성씨는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저에게는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마씨 가문의 일원이고 그 피를 나누어 받았지요. 툭하면 만화나 드라마에서 마씨가 악한 역할로 등장해서 좋지 못한 인상을 남기지만 그런 소소한 이유 따위로 저는 제 성씨를 하찮게 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하지 않은 것으로 조롱 당하는 부당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자신이 높아지는 체험을 하고자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일부러 남을 조롱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즉, 그런 이들은 일종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고 자신이 조롱하려는 대상이 자신보다 나은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을 도리어 반증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지요. 누군가 실수를 하고 오류를 범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가 행하지 않은 무엇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비단 ‘성씨’만이 아니라 은연중에 인종에 대해서 부와

다시 살펴보기

때로는 기초가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한 번 돌아가봅시다. 기본상태 사람이 바쁜 생활이 이어지면 자연 정신이 ‘멍~’해집니다. 그리고 아무런 의욕이 없는 상태에 이르지요. 하지만 ‘영적 의욕’이 없다는 말이지 아무런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욕구가 생생하게 살아있지요. 더 많은 것을 취하고 싶은 욕구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의 근본에는 ‘이기심’이 상존하고 있지요. 내가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취해야 하고 그렇기에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얻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구를 충족시켜줄 최고봉은 바로 ‘돈’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멍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자연스러이 ‘돈욕심’이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게 됩니다. 갈증 사람은 목이 마르면 물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코 물을 찾지 않을 겁니다. 때로는 그 갈증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목이 마른데 배가 고프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밥을 열심히 먹지만 목은 오히려 더 마를 뿐입니다. 중독된 상태도 있어서 목이 마른데 좋아하는 탄산음료만 들이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은 두배로 말라오기만 합니다. 엉뚱한 갈증을 느끼고 엉뚱한 것을 들이켜서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는 상태로 영혼은 더욱 메말라갑니다. 시도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시도를 합니다. 물론 일단 갈증을 느끼고 그것을 해소할 방도를 마련한다는 가정으로 넘어온 셈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시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염경기도, 신심 프로그램 참여, 성경읽기, 평일미사 등등의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다행히 이러한 것들로 시동이 걸려서 길을 찾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셈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시도들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해 보다가 ‘역시 나는 안되는구나’하고 제풀에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끈기 문제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내 안에 ‘끈기’가 없는 것입니다. ‘인내’라고도 표현하는 것이지요. 위에 언급한

병든 이들

나는 내가 건강하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저의 병을 고백하고 저의 부족함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총이 제게서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완벽해서 남을 돕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부족하고 나약해서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그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남에게 나눠 주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 은총의 길이 끊기고 막히게 되어 제가 죽어 버리기에 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저는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이들도 살리고자 합니다. 다른 이들이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걸 압니다. 그들은 스스로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하는 노력들이 이상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살지 괜히 저런다 하고, 저게 다 자기 인기와 명예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합니다. 그런 비난과 비판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다만 듣고 싶어하는 이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듣고 그들의 삶이 바뀐다면 저로서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그들이 쥐고 있었다고 생각한 동앗줄이 불에 타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미약하게 매달려 있던 줄, 세상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던 그 줄이 진정한 힘을 발휘해서 저를 이끌어 줄 것을 압니다. 저는 나약하고 부족하고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바로 그 병 때문에 예수님께서 저에게 다가와 주실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1-32)

재건축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이사 58,12) 집이 있었던 곳, 그러나 무너져 버린 그곳을 다시 건축하는 일, 기초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람들에 의해서 버려져 있던 것을 다시 세워 일으키는 일, 튼튼하게 적을 막아내던 것이 갈라져 약해진 것을 다시 고쳐 쌓는 일,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에 다시 사람이 살도록 복구하는 일… 그것이 하느님의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은총의 보고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거기에서 은총을 느끼기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재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굳건한 가르침들이 있었고 그 근본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근본의 기초인 사랑은 없고 여러가지 잡다한 가르침에 마음이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이 근본 기초를 다시 세워 일으켜야 합니다. 교회는 어둠의 영으로부터 신자들을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둠의 영들이 교회 안으로 침투할 정도로 방어막이 약해 졌습니다. 그것을 고쳐 쌓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사람들이 다가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사람들을 추스리는 데에만 연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거리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들이도록 복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이 수많은 할일들 가운데 하나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신분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간직하고 전할 수 있고, 근본 사랑을 다시 세울 수 있고, 어둠의 영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할 수 있으며,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오신 분이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그런 일을 따라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착하지 않은 착한 일

우리는 착한 일을 한다면서 ‘악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도리어 악의 근원이 되는 것이지요. 너무나 착한 나머지 그 착함을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비난하기 시작할 때가 바로 그렇습니다. 착하지 않은 착한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진정한 착함은 남이 비난받게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나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감수합니다. 우리는 이 착함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취급받은 사실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착한 척을 했다면 온갖 칭찬이 난무했을 것인데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 취급을 당하게 모든 것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건 상선벌악이라는 정당한 원칙에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상벌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칭찬은 상입니다. 하지만 영원의 세계에서 어리석은 이들의 칭찬은 모욕에 불과합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아이가 쿠키를 5개 들고 있는데 하나를 흘렸습니다. 흙이 묻은 걸 다시 주워 들고 있다가 자신이 4개를 먹고 남은 하나, 바로 흙이 묻은 그 하나를 버리는 겸 다른 아이에게 보란 듯이 주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그 아이를 ‘나눌 줄 아는 아이’로 칭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착하지 않은 착한 일’인 셈이지요. 헌데 이 아이는 ‘칭찬’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착한 아이’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착함’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의미의 착함이 아니라 ‘명예로움’의 착한아이 버전일 뿐입니다. 그 아이는 착함으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지요. 이 아이는 착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착한 행동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에게 칭찬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교만은 한껏 드높아지고 그럴수록 자신의 착함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지며 주변의 탄성도 더욱 커집니다. 어른들은 모두 그 아이를 착하다고 추켜세우고

불평불만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엔가는 누군가에게 ‘부족함’을 남길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예수님조차도 모든 이가 원하는 것을 100퍼센트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그리고 고위 사제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언제나 불평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누군가가 불평을 할 때에 우리가 살펴봐야 할 대상은 단순히 불평의 원인이 되는 사람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적지 않은 경우에 불평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불평을 해야할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겠지만 ‘불평을 한다’는 것 자체로 드러내는 면모도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예수님의 불평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굳이 불평이라고 한다면 단 한 번, 게쎄마니 동산에서 수난의 잔을 치워줄 수 없느냐고 부탁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불평이 될 수 없는 것이 결국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는 걸로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셨기 때문이지요. 불평하는 사람은 ‘나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만일 순리에 맞지 않다면 순리대로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불평하는 사람은 이치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일이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불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볼일을 본 후 변기 시트를 올려야 하는가 내려야 하는가가 불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변기 시트는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는 것인데 자신의 마음에 들기 않아서 불평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주면 감사히 먹을 밥인데 음식이 조금 짜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정말 짜서 먹지 못하는 경우라면 배가 고픈 사람에게 주더라도 먹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고쳐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음식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 입맛에 맞지 않아서’ 불평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고 투덜거리고 있을까요? 그것이 정말 순리에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하느님이 좋아하는 단식

이번 설은 재의 수요일과 사순 시기가 끼어 있어서 소위 ‘열심한’ 분들에게는 상당히 신경쓰이는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역 교회별로 지침을 내려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영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참으로 성실하고 철저한 교회입니다. 오죽하면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교회’라는 별칭까지 얻었을까요. 하지만 그 별명이라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별명이 아니라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의미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예의와 법규를 중시해 왔기 때문이지요. 유교의 문화 안에 살아왔지만 유교 신자는 별로 없고 다만 유교의 외적인 부분이 상당히 우리의 삶 안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진 그리스도교적 예법은 어찌보면 우리의 정서와 굉장히 맞아들어간 셈이지요. 사제에 대한 예우, 전례 예절에 대한 엄중함과 같은 것들은 다른 나라 어디를 가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재를 지킴’은 무시할 수 없는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때를 철저히 지키고 나이의 규정도 잘 살펴야 하며, 음식의 종류도 철저히 지킵니다. 즉, 단식의 시기가 언제인지, 몇 살부터 몇 살까지 가능한지, 어떤 음식은 가능하고 어떤 음식은 가능하지 않은지가 단식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잊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단식을 하는가?’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단식을 왜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왜 단식을 하는 걸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식을 열심히 하긴 하지만 도대체 왜 하려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주 친절히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은총

풍선에 공기가 가득차 있으면 작은 바늘로 찔러도 터지고 맙니다. 빠져 나오려는 공기의 압력이 그 바늘이 만드는 작은 구멍으로 일순간 몰려들면서 모든 풍선이 터져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 지점을 찾기만 하면 은총은 그야말로 풍선이 터지듯이 터져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에 은총을 받지도 못합니다. 바람이 빠진 풍선이 힘없이 늘어나듯이 사람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들고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은총에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현세적 축복이지 ‘은총’이 아닌 것이지요. 은총이 뭔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닿기만 하면 터져 나올 주머니인데 그 주머니에 다가가는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은총은 무엇을 두고 은총이라고 할까요?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지요. 파경의 위험, 죽음의 위협, 이집트 피난, 잃어버린 소년 예수,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아들, 십자가의 죽음… 그래서 사람들은 은총을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은총은 육체적 안락, 경제적 부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니까요. 은총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받는 사람, 그분의 이끄심을 받는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평화를 누리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반대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은총은 구하는 사람에게 부어집니다. 하지만 은총을 구하기까지 한 인간은 많은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등산화는 등산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 등산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등산화는 ‘무거운 신발’일 뿐이지요.

하느님의 전능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세6,5-6) 창세기의 노아의 이야기 앞부분의 간략한 설명입니다.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후회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언뜻 하느님의 ‘절대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아니,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모든 힘을 지니신 분이 ‘후회’할 일을 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드는 생각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완벽함에 대한 규정을 상당히 그릇되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돌덩어리’에서 완벽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존재, 모든 것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절대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완벽’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완벽일까요? 실제로 그러한 완벽을 유지하고 살아가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긋나 있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아주 차가운 돌처럼 굳어져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아주 냉정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성요셉이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성요셉 성인이 그렇게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동정 마리아는 이미 돌을 맞고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율법대로 확실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요셉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요. 그것이 진정한 완벽성입니다. 영적 완벽성이지요. 더 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유의지’를 나누어 주셨지요. 그리고 그 자유를 통해서 당신을 사랑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우리에게 한가지 역으로의 희망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자신들의 언어로 그 설명을 듣고 그분의 행적을 바라보면서도 그분이 의도한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반대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 그분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닫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길은 널찍한 길이 아니며 좁은 길이고 험한 길이기 때문에 걸으려는 사람도 없고 걷기 시작하다가도 용기를 잃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실망하고 맙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고,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미워하고 싶은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리 낮아지라 가르쳐도 서로 높아지려 싸우던 제자들이고,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는데 빵을 걱정하는 그들이었습니다.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결국 모범으로 보여주면서 십자가에까지 매달렸지만 제 목숨을 살리고자 도망가버린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인내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헛되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명을 다하지 않고는 돌아오는 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은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유다 이스가리옷) 당신의 말씀은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듣는 순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깨닫지 못했지만 깨닫기 위해서 노력했고 결국 깨달은 바를 삶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다툼 예방을 위한 조언

선이 선을 만나면 기뻐합니다. 악이 선을 만날 때에 두려워하고 파괴하려 들지요. 적대감에서부터 이성이 작용하고 그 이성은 상대를 비난하고 힐책하는 데에 쓰여집니다. 반대로 호의에서 이성이 작용하고 그 이성은 상대를 도와주고 보완하는 데에 쓰여집니다. 이성만 작용한다면 적대감이나 호의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기계가 고장났다고 화를 내는 것은 다른 검사 기계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기계가 잘 돌아간다고 다른 기계가 기분 좋아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인간이 그런 반응을 보이지요. 이성은 고유하게 홀로 작용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총체적이기도 하지만 불완전하기도 한 존재이지요. 화내는 사람 앞에 맞서서 같이 화낼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봐야 불씨만 자꾸 키울 뿐입니다. 싸움은 두 사람이 맞설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완고한 마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마르 8,17-18) 완고한 마음은 사람의 눈과 귀를 막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눈 앞의 사물을 봅니다. 눈 앞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보고 있고, 주변의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장님도 귀머거리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걱정하시는 부분은 ‘마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굳어져 버릴 때에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사랑할 때에 우리는 그가 하는 어리석은 말을 듣지 못하고, 그가 드러내는 오류를 눈감아 버립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가 하는 진리의 말을 듣지 못하고, 그가 드러내는 다른 선한 부분을 보지 못합니다. 결혼하기 전 그렇게나 아름다워보이던 상대였건만 결혼 후에 비로소 보고 듣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콩깍지가 씌여 마음이 굳어 있는 동안에는 상대가 올바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컷 욕하던 사람이 실제로는 정말 고귀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로늦게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굳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적지 않은 이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누룩’에만 관심이 있어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룩은 부풀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 누룩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왕년에 말이지….” “우리 회장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저런 일들을 하시고….” “이 공동체는 내가 일으켜 세웠는데….” “사실은 내가 그 주교님을 개인적으로 좀 아는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누룩입니다.

카인의 변명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세 4,9) 카인은 아우를 지키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여야 했던 사람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말을 꾸며대는 존재입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이것이 주님의 질문이었습니다. 카인은 아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악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하고 거짓을 말하게 하였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거짓과 더불어 카인의 변명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변명은 늘 거짓된 마음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가 변명을 하기 시작하면 분명 아이는 뭔가 그릇된 행동을 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는 변명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실을 말할 뿐이지요. 여기에서 잠깐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부모의 행동입니다. 아이의 변명은 아이의 거짓을 드러내지만, 아이가 거짓을 말하고 변명하게 하는 부모의 행동도 문제입니다. 물론 창세기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악을 행하시지 않기에 창세기에서는 전적으로 인간의 오류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상호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이가 거짓을 말하고 변명을 이야기하면 부모는 단순히 아이를 비난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세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인은 아우를 지켜야 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증오하지 말았어야 했고, 죽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형으로서 아우를 보살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변명하는 자들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하느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자기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취해야 할 자세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진실함’만이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는 태도가 됩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와 표징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 8,12) 이 세대가 있다는 것은 다른 세대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세대에는 표징이 필요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세대가 표징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는 말이지요. 세대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대라는 것은 여러가지 변화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신세대’와 ‘구세대’를 나누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나이 많으신 어른을 보고도 때로는 ‘신세대’같다고 표현하며, 젊은 친구를 두고도 ‘구세대’의 사고를 지녔다고 하기도 합니다. 즉, 신세대와 구세대를 나누는 것이 단순히 시간의 차이가 아니며 모종의 행동양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과거 예수님이 오기 전의 세대는 여러 예언자들과 여러가지 표징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대에 합당한 표징들을 받았지요. 그리고 그것으로 하느님을 찾을 줄도 알았습니다. ‘이 세대’로 통칭되는 지금의 세대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세대입니다. 더는 표징, 이적, 예언자가 필요하지 않고 누구든지 원하면 예수님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 앞의 예수님을 버려두고 다른 표징들을 찾습니다. 그것을 답답하게 여긴 예수님이 그들을 꾸중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들이 찾는 구원이 눈 앞에 있는데 보지 못하는 장님들인 그들은 그 어떤 표징을 보여 주더라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 표징들을 무시하고 천시하며 짖밟아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표징을 알아볼 능력이 있을까요? 우리는 미사를 충분히 소중히 여기고 있고, 성체를 충분히 거룩하게 모시고 있을까요? 아니면 아직도 우리 구미에 맞는 것을 찾아 이런 저런 신심행위를 추구하고 신학적 지식으로 교만에 가득 차기를 바라는 걸까요? 예수님이 말하는 ‘이 세대’는

어머 이건 해야 해!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의견이 같다면 싸울 이유가 없지요. 의견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 가지고 있는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어촌 마을 소년과 농촌 마을 소년이 만나 서로 함께 먹을 요리를 만든다면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어촌 마을 소년은 분명 이 생선이 맛있는데 농촌 마을 소년은 자신의 야채가 더 맛있다고 우겨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존중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사실 무엇을 선택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문제는 ‘틀린 것’이 끼어있을 때입니다. 다름으로 포장해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무고한 생명을 죽여서는 안된다.’와 같은 가치는 의견이 다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닌 것입니다. 다른 것은 서로의 의견을 조정하면 되지만 틀린 것과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염색을 하거나 문신을 새길 수 있지만, 심장에 칼을 꽂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설득과 대화가 필요한 때가 있고, 결단하고 실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면 틀린 것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 되어 버리고 누군가를 굉장히 위태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오늘날 자신의 고유한 분별력으로 ‘이는 반드시 해야 한다’라고 나서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지혜로운가 하는 것은 잘 살피셔야 합니다. 지혜는 ‘말과 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혜는 그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삶이 바탕이 되지 않은 채로 장막 뒤에 숨어서 글과 말로 ‘올바름’을 논하는 이들에게 속지 않도록 합시다.

이성교제와 성

철없는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의 나이가 되면 이성교제는 진지해져야 합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책임지지 못할 행위를 하면서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신이 행한 것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에 그는 비로소 ‘성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사실 세상 사람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관계를 맺는 것에서 우리 가톨릭 교회 신자처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피임기구를 써서 임신을 예방하고 또 임신해도 낙태를 해버리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만 휴머니즘(사람들 사이에서 통상적으로 논의되는 인간됨)과 의학적인 낙태의 부작용이 걱정될 뿐이지요. ‘하느님의 뜻’ 따위는 그 안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태의 이유가 분명하면 얼마든지 낙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은 그저 ‘쾌락을 즐기는 도구’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조금 더 고상하게 포장해서 ‘성은 사랑의 표현’이라고도 하지요. 사랑이 성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두 부부는 ‘성관계’를 책임감있게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곧 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억지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서로를 이해해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의 과정’입니다. 그 안에는 단순히 기쁨과 쾌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바탕으로 둘의 사랑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절대자와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두 인간의 사랑은 한계와 약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에 대한 개념을 ‘자녀출산’에 집중시켰고 사실 아직까지도 온전히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남녀 사이의 충만하고 풍성한 여러가지 종류의 결합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능하면 성

거룩한 부르심(聖召)과 이성교제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성소’는 남자는 신학교, 또는 수도회 여자는 여자 수도회로 자동적으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이는 성소의 좁은 개념입니다. 진정한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이는 모든 신앙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와 ‘이성교제’는 실은 별달리 고려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성교제를 한다고 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럼 이미 결론은 도출된 셈입니다.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를 사귀면서도 얼마든지 근본적인 의미의 성소의 길은 계속될 수 있고 계속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르는 ‘성소’ 안에는 ‘독신생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왜 사제와 수도자와 같은 이들에게 ‘독신생활’이라는 규정을 내린 것일까요? 제가 ‘교회’가 그랬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따로 그런 규정을 내리신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남녀 관계의 아름다운 사랑의 결합을 축복하셨지요. 독신생활은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인간의 규정입니다. 하느님의 법, ‘신법’이 아니지요. 교회 재정의 세습 문제와 여러가지 폐단을 예방하기 위해 세워진 규율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굳어져 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자기 스스로의 온전한 선택으로 ‘독신생활’을 지켜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엄밀히 말해서 교회가 ‘강요’한 적은 없습니다. 독신을 선택하기 싫으면 ‘서품’이나 ‘수도허원’을 포기하면 되는 간단한 것이지요. 물론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10년 가까이를 준비해서 서품을 받기 직전에 그 생활을 포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한국 교회와 같은 분위기에는 ‘역적’으로 몰리기 좋은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는 마치 ‘이성교제’는 ‘성소’에 대립되는 것처럼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성도 사귀어 결혼도 하고 싶고, 특별한 성소의 길도 가고

성(性)의 무결함과 정결함

이 두 관점은 외면과 내면의 차이입니다. 특히나 성과 관련해서 적지 않은 이들이 혼동하는 영역입니다. 사람들은 무결함에 대해서 자주 다투곤 합니다. ‘혼전 순결’이라는 것을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처녀성과 연관해서 생각하려 하지요. 인간의 정결은 그런 외적인 현상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흙먼지가 가득한 운동장에서 논다면 나의 몸은 더러워지겠지만 마음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외적인 것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다루는가가 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실제적인 현상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연인들이 만나고 불타오르고 서로의 ‘성(性)’을 탐구합니다. 마치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둘은 어느새 한 몸을 이루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전부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독실한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결혼 적령기에 이르고, 결혼 직전까지도 스스로의 외적인 성적 순결을 철저하게 지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부분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수많은 청년들은 혼인 이전에 누군가의 성관계를 체험하는 것이지요. 가톨릭 교회의 의견은 익히 알고들 있습니다. ‘결혼 전까지 정결함을 유지하라’는 것이지요. 과연 교회의 걱정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과 ‘혼인’을 참으로 소중히 여깁니다. 이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부분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성性’에 관해서는 엄격함을 유지하고 ‘혼인’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관계가 소홀히 다루어지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이지요. 교회의 이러한 노력이 나쁜 게 아닙니다. 교회의 근본 의도는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현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교회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 강조되어 온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독신생활’은 심지어 성 자체를 터부시하는 결과까지 가져오고 만 것이지요. 이제 슬슬 본론으로 접어들어야 하겠습니다. 성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의문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기까지 누구나 접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의 단순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이가 들어 복잡 다단하고 은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의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기다리는 것은 ‘대답’입니다. 의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에 대답은 ‘외부로부터’ 주어지곤 합니다. - 엄마, 이 꽃은 이름이 뭐야? - 응, 이 꽃은 민들레라고 해. - 왜? - … 여기서 엄마는 말문이 막힙니다. 민들레를 왜 민들레라 부르는지 엄마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마는 다른 이가 전해 준 지식을 다시 전해주었을 뿐, 본인 스스로 그 이유를 성찰해 본 적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배워 얻은 지식과 나 자신에게서 일구어낸 지혜가 존재합니다. 지식은 얼마든지 책을 통해서 누군가의 글과 말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지혜로운 존재는 인터넷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인격체가 아니지요. 우리가 ‘사람’인 이유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겨난 의문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나름대로 고민을 해고 직접 체험함으로 인해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문은 단순히 외부로부터 답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내가 실제로 겪어보고 알아보아야 답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행을 다니고 문물을 많이 보아서 지식적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대하고 다가오는 여러가지 상황들 안에서 ‘지혜’를 얻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얻은 지혜를 남에게 전해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달 방식은 지식을 전하는 것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이 체험할 수 있게 이끌어갑니다. 말로 전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지혜에 나아가게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체득된 지혜는 한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그리고 지혜는 또 다른 지혜를

불안증

과거를 불안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가버리고 규정된 것이니까요. 그것은 확고하게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과거가 미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기에 과거의 어떤 일에 대해서 불안해 합니다. 인간의 불안은 ‘미래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가오지 않은 것에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무엇이 다가올지 모르고 있습니까? 물은 떨어지고, 떨어진 열을 받아서 수증기가 되고, 그 물은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자연은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물들은 제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수증기를 잡아두려 해 봐야 소용이 없고 물을 공중에 던져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비롯하였고 제 길을 찾아갈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에게 돌아갑니다. 아, 이건 알고 계셨다구요? 그럼 뭐가 불안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분 앞에 갔을 때에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모르는 것, 그것이 근본적인 걱정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걱정이 되지 못합니다. 자녀가 아버지 앞에 나서는 것이 어찌 불안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행복이지요. 자녀가 아닌 자, 종은 불안해 합니다. 자녀가 아닌 자, 도둑은 불안해 합니다. 함께 모아들이지 않은 이들, 그저 제 몫에 혈안이 되어 아버지의 품을 떠나간 탕자들이 불안해하지요. 우리는 뉘우치는 탕자, 다시 아버지의 품안에 받아들여진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과 충만함으로 하느님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불안은 우리가 여전히 세상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에 불안이 사라지고 용기가 솟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을 하기에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직도 너무나 강렬할 것 같습니다.

인도네시아 여행

전혀 뜻하지 않은, 하지만 계획된 여행이었습니다. 시작은 이랬습니다. 볼리비아에서 페이스북으로 알게된 한 형제님이 당신이 인도네시아에 사신다고 소개를 하셨습니다. 들으면서 참 멀리도 사신다고 생각을 했지요. 헌데 형제님이 불쑥 초대를 해 주셨습니다. “한번 놀러 오세요.” 그리고 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네 갈께요.” 사실 그때만 해도 지금의 휴가가 있으리라고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볼리비아 대주교님을 모시고 부활이 끝나고서야 한국에 들어갈 생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고 휴가 계획이 수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연말에 휴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의 휴가는 또다른 ‘과업’이라는 것을 아는 저로서는 이번 휴가는 미리 큰 덩어리를 집어 넣기로 계획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에 받아 놓았던 초대를 떠올렸지요. 인도네시아의 형제님과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들어갔습니다. 곧 방문 계획이 잡혔지요. 넉넉하게 날짜를 잡고 오라는 말을 듣고 10일 정도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것들이 미지수였습니다. 어디에 머물지, 어디를 갈지 저로서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지요. 어찌보면 겁대가리가 없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생판 모르는 나라에 페이스북 친구 하나 믿고 불쑥 찾아가는 꼴이었으니까요. (물론 전적은 있습니다. 그렇게 호주를 방문한 적도 있지요. 그래도 거기는 영어를 쓰니까요. ㅋ) 약속 날짜가 다가왔고 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도착하는 순간 제가 정말 다른 나라에 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더위’와 ‘습한 공기’로 말이지요. 하지만 친근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볼리비아에서 익히 느끼던 것들이지요. 별다른 짐이 없었던 저는(심지어 속옷도 챙겨가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단벌 신사였지요.) 공항 수속대를 통과했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비가 오고 있더군요. 그리고 잠시 후 한 부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저를 초대한 분들이었지요.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오랜 친구마냥 거침이 없었습

균형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 - 바오로 - 우리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 나서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이라고 자신을 내세우고, 나아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빛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중개자의 개념이지요. 올바로 전하려면 올바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묘사하는 이 직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 받아도 전하지 못할 수 있고, 잘 전할 모든 수단을 갖고 있어도 잘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둘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한 측에 기울어지고 맙니다. 그저 하느님에게만 붙어 살려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에게만 다가가서 영광을 얻으려는 사람이 그것입니다. 하느님에게만 붙으려는 이들의 특징은 ‘관계의 단절’이라는 특징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모든 은총의 샘이 있다고 생각하고 독선과 아집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들은 남들이 인정하지 않는 자기만의 거룩함을 지니고 살아가지요. 이들 가운데에는 학식이 뛰어나고 자기만의 전문적인 영역을 구축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자신의 신심을 같은 구도에 놓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지닌 권력을 향해서 다가와 굽신거리는 사람을 바라보며 스스로 신심이 있다고 착각하는 부류들이지요. 반대로 사람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은 ‘거짓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얻는 것이 목적인지라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거룩함을 추구하고 다닙니다. 그에 반해서 진정한 거룩함은 무시하고 말지요. 행사, 활동을 좋아하고 열심히 대외적으로 활동하지만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거룩함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성찰하지 못한 탓이지요. 이들은 사람들의 영광을 거룩함과 착각해서 인기있다는 모든 것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정작 내실을 잃어가지요. 마음이 공허해지기 시작하는

카인의 운명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창세4,10-12) 피를 받은 땅은 불의를 당한 이들의 마음을 말합니다. 땅은 마음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성경의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앗이 심겨지는 땅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부당함을 당하고 나면 그 부당함을 행한 대상을 마음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소중하게 품고 있던 이들이 우리에게 해코지를 했을 때에 우리는 그들을 우리 마음에서 자연스레 밀어내기 시작합니다. 땅을 부친다는 말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수확은 마음을 얻는 것, 즉 사랑을 얻는다는 의미이지요. 타인의 마음을 망가뜨린 사람은 어딜 가도 수확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망가뜨린 이는 다른 이에게 가서 기만할 수는 있지만 진실로 그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일을 행하는 본인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타인의 마음을 망가뜨리는 사람, 즉 거짓, 기만, 악의, 방탕, 증오, 시기, 탐욕 등등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해치는 그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는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마음을 둘 곳을 잃어버리게 되지요. 저주는 하느님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는 자신이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의 무서운 부분입니다. 자신이 끌어들이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 것이 저주이지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축복과 저주를 인간 앞에 놓아둘 뿐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발렌타인 데이

A popular hagiographical account of Saint Valentine of Rome states that he was imprisoned for performing weddings for soldiers who were forbidden to marry and for ministering to Christians, who were persecuted under the Roman Empire. (출처 위키피디아 “Valentine's Day”에서 인용) 로마의 발렌타인성인의 대중적인 성인전은 말하기를 이 성인은 결혼이 금지된 군인들을 대상으로 혼인을 거행하고, 로마 제국의 박해 중에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예식을 거행한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서 번역해 보았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 성인을 기리는 날의 원래의 목적이 잊혀지고 ‘남녀 간의 사랑’만 기억하는 날로 변질되어 버렸군요. 거기에 상술이 가중되어 점점 추잡하게 변해가니 아예 이런 저런 아예 다른 걸 기억하자는 날로 바뀌어가고 있구요. 문화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때로는 무서운 것이기도 합니다. 한 번 생겨버린 문화는 굳게 박힌 돌처럼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각 사람에게 자리잡는 습관처럼 문화라는 것은 인류에게 자리잡는 습관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엉뚱한 습관을 들이고 있으니 문제이지요. 발렌타인데이는 ‘참 사랑을 위한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단순히 초콜렛의 가격과 포장으로 사랑을 표현하려 하지 말고, 진정 상대를 배려하고 참고 견뎌주는 것이 필요한 세대입니다. 연애할 때에는 서로를 위해서 죽을 듯 하다가 막상 결혼하고 나면 헤어지려는 부부가 반이상이 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과연 우리가 말하는 사랑에는 인내와 사랑과 온유가 깃들어 있는 걸까요?

손을 내밀어

수많은 손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 손을 부여잡고 나의 일을 거들기 위해서 다른 이의 손을 빌리기도 합니다. 또 내가 못하는 일을 다른 이들의 손을 통해서 이루기도 합니다. 내 주변의 수많은 손이 있지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가 내 주변의 손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그것이 나에게 가장 적합한 행위를 하도록 내가 허락하는 것이지요. 나의 허락없이 나의 몸을 만질 수 있는 손은 없습니다. 그러한 손들 가운데에는 나를 부르는 손이 있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손도 있지요. 그리고 나를 이끄는 손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손을 저버리기 일쑤입니다. ‘필요없어.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내 돈을 벌게 해 주는 손이야.’ 그렇습니다. 이런 말들이 우리가 쏟아내는 말이지요. 내가 간절히 바라는 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고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이끌어 도와주려는 손은 나에게는 필요없는 손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뿌리칩니다. 나에게 다가오던 그 손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다른 이에게 내밀어집니다. 원래는 나에게 주어진 손인데도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손은 다른 이에게 내밀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그 손을 붙잡아 버립니다. 예수님이 내민 손이 있었고 그것을 붙든 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둘은 서로 만나 하나가 됩니다. 더이상 아픔도 슬픔도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손을 거절한 이는 자신의 손을 허무를 향해 내밀어댑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붙잡는가 싶으면 모래만 남아있고,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손을 내밀어보지만 허공을 향해서 손을 휘휘 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마르1,41)

카인과 아벨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카인과 아벨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한가지 기본 전제를 깔아두고 이 이야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고 옳다.’는 것이지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왜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이신 걸까? 하느님은 변덕스럽고 부당한 존재인가?’를 의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이 이야기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이야기의 핵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카인의 불의와 시기, 그리고 증오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둘 다 나름 준비를 해서 제물을 바쳤지만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은 아벨이 진심으로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카인은 온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을 선택하고 카인의 제물은 굽어 보시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은총은 아벨의 제물을 향해서 나아갔고 아벨은 더욱 많은 축복을 받았겠지요. 카인은 자신의 불충실을 수용하고 뉘우치기보다 도리어 하느님에게 화를 냅니다. 우리도 가끔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에게 미흡한 것을 살피기도 전에 누군가 비난할 대상을 찾고 심지어는 하느님에게마저도 서슴지 않고 겁없이 그런 비난을 일삼는 것이지요. 불의를 행하는 자는 올바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합니다. 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있어서 빛을 싫어하지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면 기회는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자신이 지닌 어두움을 더욱 가중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곤 하지요. 물론 카인은 ‘살인’까지 이르렀지만 살인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인간사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증오하기 시작하면 전에 똑바로 바라보던 그의 얼굴을 더는 바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죄악이 내 마음 근처를 어슬렁 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선을 향해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천적으로는 오히

보여주지도 보려고 하지도

우리는 우리가 받게 될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알 수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기에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았고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잃게 되었습니다. 보물을 알아본 사람은 돌아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그 보물을 삽니다. 그 보물의 가치가 다른 이에게 알려져 다른 이가 더 많은 재산을 들고 와 보물을 차지하기 전에 그 보물을 사는 것이 낫겠지요. 하지만 보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다이아몬드 원석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다가 버리고 돌아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100만원짜리 핸드백보다 못한 시대입니다. 보여주지 않아 보지 못하고, 보려 하지 않으니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맑은 마음이라는 것은 두 눈으로 관측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와 머무르면서 직접 살면서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지요. 어딜 가서 무엇을 보느냐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참으로 화려해져서 가서 보아도 껍데기만 보입니다. 가서 보니 높은 건물이 있고, 화려한 제대가 있고, 너무나도 바쁘신 신부님이 계시니 보아도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신앙학교는 보이는데 ‘신앙’은 잘 보이지 않고, 신심단체는 보이는데 ‘신심’은 상실되어가고 있으니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교회를 와도 진리를 체득하기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보려하지 않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보려고 찾기 시작하면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미사가 늘 거행되고, 우리가 배운 학식을 통해서 책을 찾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한다면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도 많지요. 하지만 우리는 예능 프로그램에 익숙해져 있고, 흥미와 재미를 주는 것에 살짝 중독되어 있어서 진득하니 마음을 모아서 성찰하고 묵상할 시간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훈련의 기간은 필요한 법인데 그러기에는 세상의 탐스런 것들이 주변에 너무나

선과 악을 아는 자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3,22) 선과 악을 아는 것과 선과 악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주제입니다. 악마도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이 악마인 이유는 선을 실천하지 않고 악을 행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행위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선이고, 반대로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 악입니다. 이를 올바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고, 또 타인을 추켜세우고 두둔해주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감출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선생님은 가르칠 때 선생님이고, 의사는 치유할 때 의사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살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인내하고 승리해야 하지요. 길은 주어졌고 지팡이와 먹을 거리도 있으니 남은 건 우리가 직접 그 길을 걷는 것 뿐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하시려 하지요. 우리는 그 선물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 선물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지요. 공장에 가서 기계를 돌려 장난감을 만들어야 하는 중노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장난감을 받도록 부모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족합니다. 과연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얻을 수 있을까요?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묵시21,6-7)

오해

사람들은 서로의 뜻을 헷갈려 합니다. 내가 ‘아’라고 했는데 상대가 ‘오’라고 들었다고 하는 경우, 내가 발음을 잘못 했을 수도 있고, 상대가 귀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마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중이 중요한 것입니다. 둘 다 앞으로 나아가는 중에 발걸음 수가 서로 틀리다고 비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근본 의도 자체가 다르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모으려는 자와 흐트리려는 자는 분명 다른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소소한 부분에서 오해가 생기는 것은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런 소소한 오해 하나하나를 모두 체크하고 ‘완벽함’에 이르려고자 하는 것은 무리한 행동입니다. 다만 그의 방향을 분별하고 그가 이르려는 최종 목적지가 바람직하고 좋은 것인가를 분별해야 할 뿐입니다. 이러한 일은 신학교 안에서도, 수도원 안에서도, 본당 공동체 안에서도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표현을 하고 다르게 알아듣곤 합니다. 하지만 근본 방향은 모두 같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며 그 사랑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웃을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변명

변명을 하는 근본 목적에는 ‘책임을 경감’하기 위한 것이 있습니다. 솔직히 곧이 곧대로 말하다가는 모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다른 대상의 핑계를 대는 것이지요. - 왜 늦었나? -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준비를 못했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무언가를 개입시켜서 자신의 책임을 경감시키고 싶어하지요.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시도가 먹혀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속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본심을 가리고 원래 일어났던 일도 숨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달려들어 캐내지 않는 이상은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비슷한 시도를 하려고 합니다. 그 첫 인물이 바로 아담과 이브였습니다. 책임을 묻는, 즉 회개를 요청하는 하느님 앞에 아담과 이브는 서로 다른 대상을 내세웁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여자가 줬으니 결국 당신 탓이요, 당신이 만든 뱀이 꾀었으니 그것도 결국 당신 탓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두 인물은 가장 책임이 없는 분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는 셈입니다. 보시니 좋았던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망쳤는데 마치 스스로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것이지요. 인간의 불행은 여기에서 튀어나옵니다. ‘무책임함’ 왜냐하면 무책임함은 곧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이지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 앞에 숨기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어리석음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스스로 가로막는 꼴이 되지요. 하느님 앞에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맑고 밝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유혹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모든 유혹은 내가 좋아서 다가갑니다. 유혹에서 비춰지는 외양이 나에게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덫을 보고 다가가는 쥐는 없습니다. 덫에 놓인 미끼를 보고 다가갈 뿐이지요. 그래서 모든 유혹은 탐스럽고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가오는 대상을 죽이는 것이지요. 유혹의 수준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결국에는 그 대상을 죽이고 맙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과 그 밖의 모든 것도 ‘유혹’이 되기 시작하면 상대를 죽일 준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 권력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적절한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이 필요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고 살아야 하며, 어느 정도의 평판이 있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아버지는 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지녀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취하려 할 때에 그것은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과학적 근거를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인간 내면의 움직임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혹의 손길은 다가오지만 결국 그것을 부여잡는 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입니다. 이브는 뱀의 유혹을, 아담은 이브의 유혹을 받았지요. 그리고 모두가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눈을 돌려 다시 내가 추구하는 것을 살펴 보십시오. 그것이 정당한 추구인지 아니면 유혹인지를 바라보지 않으면 큰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에 가서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울어봐야 소용 없습니다. 그 모든 선택의 과정은 바로 내가 택한 것이니까요.

듣고 말하기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마르7,37) 듣기와 말하기, 참으로 중요한 두 가지 활동입니다. 제대로 듣지 않으면 올바른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또 말을 똑바로 해야 상대가 잘 들을 수 있습니다. 긴밀하게 연관된 두 가지 활동이지요. 정말 많은 말을 쏟아내는 우리들입니다. 하루를 살면서 하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말을 하는 사람만 말을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하고, 자신 안에 든 것을 쏟아내고 싶은 사람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이들 가운데에는 ‘들을 줄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들을 줄 모르는 그들이 하는 말은 ‘공허’합니다. 흐르는 물이 아니라 고인 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고여든 것을 매번 쏟아내기만 하니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쏟아내는 말의 근원은 자신의 욕구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조금만 들어보면 그 욕구의 기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 건강과 같은 주제로 그들은 하루에도 수도없는 말들을 주고 받지만 그 말이 무언가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먼저는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의 두 귀를 먼저 열어 주시고, 그 뒤에 혀를 만져 입을 열어 주신 순서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인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모릅니다. 다음은 말하기입니다. 올바로 듣기 시작한 이후에는 ‘말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말하는 말하기는 이전까지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말할 바를 알고 말하는 것이 말하기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말할 줄도 모르면서 말을 하기에 문제가 되지만,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희망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상대가 내가 가진 보물을 알기는 힘든 법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으로

겸손과 감사, 그리고 행복

사람이 어느 틀 안에 살아가면 이내 익숙해져 버려서 자신이 틀 안에 있는 줄을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전에는 감사하게 받던 것들을 일상적으로 누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어느새 그것을 우리의 ‘권리’로 생각해 버리지요. 그리고 행여라도 다시 예전의 삶을 겪게 되면 그 순간은 ‘불평,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가난하게 살던 시절, 작은 행복거리들이 있었습니다. 삼촌이 외국에 갔다가 초컬릿이라도 사오면 그것은 행복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음식이 남아도는 요즘, 더 맛깔난 음식이 아니면 행복을 느끼기는 무척이나 힘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누가 밥을 조금 질게 하거나 하면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아도 속으로 불만이 가득하지요.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옛 생각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겸손의 근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누리는 것에 감사할 줄 알 때에 내면에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환경을 추구하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현재 누리는 것들의 가치를 퇴색시켜 버린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어엿한 집을 가지고도 더 큰 집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누리는 것이지만 하느님은 인간이 필요 이상을 원하기 시작하면 깨달음을 주려고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겸손과 감사, 그리고 행복은 아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지도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반대로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삶 자체가 행복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환경적인 요인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에 가나 적응하고 살게 마련입니다. 마음 속에 행복의 씨앗을 심고 싶다면 감사할 거리를 찾고, 우리의 본래의 위치를 너무 높게 잡지 마십시오. 걷지 않고 차를 탈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가 좀 더 안락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완전함과 완벽주의

완전함이라는 것은 ‘꼼꼼함’과는 다른 성격의 가치입니다. 일을 흠없이 처리하는 것은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핵심을 잃지 않는 것은 완전함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콩을 나눠주는데 콩이 하나라도 흘리지 않게 애를 쓰는 것은 꼼꼼함을 챙기는 것이고, 가난한 이가 부족하지 않게 콩을 나눠주려 노력하는 것은 완전함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결국 완전함이라는 것은 ‘하느님’에게로 나아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흠없이 일처리를 하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함을 손상하게 한다면 의미없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전례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자주 발견됩니다. 이거냐 저거냐를 두고 복사들끼리 싸우고, 또 사제는 사제대로 완벽함을 추구하면서 전례를 정성스레 준비하려는 이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잘 하려는 사람이 있고, 정반대로 일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일과 상관없이 머무르는 사람도 잘 추스려서 함께 가도록 하는 것이 완전함이라고 한다면, 일을 잘하는 사람을 ‘완벽’을 이루도록 닥달하고, 일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기회도 주지 않고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것은 ‘완벽주의’에 해당합니다. 만일 하느님이 완벽주의자였다면, 우리는 죄를 짓는 그 즉시 즉결처분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함을 추구하는 분이시지 완벽주의자는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기에 죄인도 기다려주시는 분이시지요. 때로는 우리가 하느님보다 더 하느님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가차없이 심판하고 응징하려고 들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5,48)

함구령

예수님이 입을 닫으라고 할 때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광고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를 두고 예수님은 사실 알려지기를 바랬는데 아닌척 반대의 방식을 썼다고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실로’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치유받은 이가 당신의 명을 따르기를 바라셨지요.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 셈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났고 예수님은 드러나게 동네를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것은 무조건 알린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때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입을 닫아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외적으로만 분별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려진 진정으로 좋은 것은 퇴색되게 마련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 현자가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현자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관심이라는 것이 영적 관심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세속적 관심이 더 많지요. 그래서 그 현자를 이리 불러다 놓고, 저리 불러다 놓고 하는 동안 역으로 현자의 안에 채워져 있던 영적 기운이 흐지부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인기만 잔뜩 입은 껍데기 현자만 남게 되지요. 좋은 것을 찾았으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야 하지요. 그것이 진정으로 현명한 일입니다. 좋은 이를 만났으면 그와의 신실하고 진득한 우정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입을 닫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벼운 마음은 알게 된 좋은 것을 떠벌리느라 너무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지니고 있던 좋은 것, 충분히 누릴 수 있던 것마저도 잃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르

모두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1코린 10,33) 바오로 사도의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생활방식입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는 3가지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 이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뜻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단순히 그 사실만을 본다면 큰 착각을 하는 셈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이라는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하는 사람이고 결국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자신의 뜻이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결국 바오로 사도는 세마리의 토끼를 한번에 잡으려는 욕심쟁이입니다. 사람들과 하느님과 자신의 뜻을 모두 이루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모든 것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에게 유익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표현을 한다면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람들을 이끄려는 자신의 원의를 채우기.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단순한 어릿광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종이었고, 나아가 하느님에게 모든 의지를 내어바쳐 하느님의 마음을 얻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방해를 놓는 자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1코린10,31) 거룩한 뜻을 알고도 방해를 놓는 이가 있습니다. 그에게 근본 의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고 싫고가 중요합니다. “자, 우리 친구 나눠먹을 줄 알아야 좋은 거겠지? 자, 우리 동생이랑 나눠 먹자?” 이 순간, 아이의 마음이 분별됩니다. 좋고 나쁨을 아이는 분별할 수 있지만, 자신이 먹으려던 것에 대한 탐욕도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지요. 이 단순한 구도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 옳고 그르고의 문제이기보다 단순히 내가 좋고 싫기 때문에 나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시사문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전사처럼 게시물들을 올려대는 그들이 과연 정의와 진리와 선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저는 무작정 수긍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의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도 올바로 정돈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가다 만난 걸인에게는 손을 움츠리면서 인터넷 상으로 강아지가 구타 당했다고 화를 내는 이가 어찌 진리와 선과 정의에 밝은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흥분하는 주제를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정말 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라 끼어드는 것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악성 댓글로 어느 연예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에는 혀를 차면서 정작 본인은 내 생활 환경 안에 있는 누군가를 뒤에서 험담하고 있다면 그는 제 꼬락서니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장님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10,31)

나병환자

나병 환자의 고통은 육체적 질병 뿐만이 아닙니다. 나병환자의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무너져버린 몸, 흉측해진 외모, 전염성이 있는 병으로 주변 사람이 점점 다가오지 않아 고립되어 버리는 것, 그것이 나병 환자의 고통입니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6) 그와 대조적으로는 ‘사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제에게 다가갑니다. 심지어는 나병 환자도 사제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사제의 분별을 받고 부정한 자로 선언되거나 반대로 나병에서 치유되어 정결한 자로 선언되기 위해서 누구든지 사제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사제는 대표적인 ‘인기인’입니다. 예수님은 억누르려는 이들의 나병환자였고, 억눌린 이들의 사제였습니다. 억누르는 이, 악한 의도를 지닌 이에게 예수님은 기피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자신의 부당함이 그분 앞에서 낱낱이 드러내 밝혀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억눌림을 당하는 이에게 예수님은 치유자셨고 구원자였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설레고 기쁜지, 아니면 거북하고 자꾸 기피하고 싶어하는 지 말이지요. 성당 가는 것이 그렇게나 싫고 성가신가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명을 알고도 그렇게 느끼는가요? 아니면 뭐든 그냥 귀찮고 싫은 건가요?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마르1,45) 사실 여기에는 숨은 내용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병 환자처럼 취급하는 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나병환자라는 사실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나병을 사제 앞에 들키고 싶지 않아 스스로 숨는 것입니다. 지옥이라는 것은 영적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마련된 피신처인 셈입니다. 자기 스스로 사제를 피해서 숨어드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진영 밖의 거처인 셈이지요.

부끄러움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2,25) 무죄한 이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부끄러움, 수치심이라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무죄한 어린 아이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이들은 옷을 벗겨 밖에 놓아 두어도 온 동네를 돌아다닙니다. 그들은 보여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며 그들의 머릿속에는 ‘알몸 = 수치심’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치심은 교육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른들이 부끄럽다고 하니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수치심은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숨기고 싶은 것이 생겨날 때’입니다. 아이들은 해서 안될 것 같은 일을 하고 나면 어른들의 눈치를 봅니다. 뭔가를 떨어뜨려 깨거나 망가뜨리고 나면 일단 스스로 놀라고 그리고 나서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핍니다. 그리고 주변의 반응을 통해서 수치심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이 몸을 가리기 시작하는 것은 죄를 짓고 나서부터입니다. 가리고 숨기고 싶은 것이 생겨난 것이지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더라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들은 같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목욕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가 파괴되고 나면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니 하느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그 관계를 파괴하고 하느님에게서 거리를 두면서 ‘수치심’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하느님 앞에 뭔가를 숨기고 싶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지요.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은 부끄러움을 녹여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왔지만 서로 옷을 벗고 상대를 맞아 들이게 됩니다. 사랑이 부끄러움을 없애는 것이지요.

협력자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창세2,23) 아담이 이브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뼈와 같은 살을 이어받은 존재입니다. 원래 한 몸이었던 것이 갈라졌을 뿐입니다. 자기 뺨을 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팔을 꼬집고 할퀴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신경망이 연결되어 있고 피를 나누는 동안은 ‘한 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따라서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는 나와 한 몸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내 왼손가락에 반지를 끼워도 오른손은 불평하지 않으며 내 발이 더 더럽고 힘든 일을 한다고 투덜대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만큼 어리석은 존재는 없습니다. 남편을 헐뜯는 아내만큼 어리석은 존재도 없지요. 제 몸을 때리고 제 몸을 비난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지요? 남편은 가정의 우뚝선 머리이며 아내는 가정의 따스한 가슴입니다. 한 몸이었던 것이 떨어져 살다가 결국 만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혼인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혼인은 신중해야 하며, 굳은 결심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혼인은 한순간의 호르몬 작용이 아니며 꾸준한 선택, 상대를 위해서 나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의지적 선택의 행위이어야 합니다. 서로 다투지 말고 한 몸이 되어 살아가십시오. 신앙이라는 것은 그래서 혼인에 있어서 절대적 요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배우자 중의 한 쪽이 신앙이 없는데도 혼인을 하려는 이는 먼저 자신의 신앙을 잘 살펴야 하고 배우자의 신앙을 추스릴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문제는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신앙’과 연관된 문제는 우리가 어느 대학을 들어가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와는 판이하게 다를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근본 선택’이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서로 진정으로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철없는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고자 하

창조4 - 인간에게 허락된 것, 인간에게 금지된 것

숨을 불어넣어 만들어진 인간입니다. 하느님이 직접 불어넣어 만드셨지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유별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 의지’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직 인간만이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은 완전한 것이라서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마저 원한다면 거부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그 인간에게 ‘낙원’을 마련해 주십니다. 모든 것을 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오직 하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만은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지요. 모든 것을 허락받고 단 하나의 제약만이 존재했습니다. 왜? 만일 그 ‘제약’이 없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온통 흰 색으로 꾸며진 방 안에서는 검은 색 물건이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엄마가 흰색 물건을 좋아해서 아이에게 엄마에게 흰색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면, 그 아이는 ‘어쩔 수 없이’ 흰색 물건을 가져가는 셈이지요. 그러나 그걸 두고 아이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다양한 색깔이 있는 가운데 엄마가 흰 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흰 색 물건을 골라 가져간다면 그건 그 아이가 엄마를 신경쓰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가 없다면 ‘죄악’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악을 없애기 위해서 자유를 지운다… 글쎄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유가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지는데 말이지요. 하느님이 인간을 죄짓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상상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여건을 마련하셨고 인간이 선택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누릴 수 있는 99가지를 버리고 허락되지 않은 1가지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들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허락되지 않은 것을 추구하다가 결국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술을 한 잔 하기보다는 ‘폭탄주’를 선호하고, 정상적인 성관

창조3 - 노동과 휴식

하느님은 일을 마치고 쉬십니다. 그리고 그 날을 축복하십니다. 우리 주일의 기원이 되는 날입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토요일이 그 날이라고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그 날의 의미를 일요일로 옮겨서 주일을 지냅니다. 주일은 휴식과 축복의 시간입니다. 휴식을 무시하는 것, 또 무조건 쉬려고 하는 것, 그리고 축복의 시간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휴식을 무시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반드시 휴식이 필요한데도 일주일 내내 무리하게 기계를 돌리니 무리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다음으로 드러난 모습은 ‘지나친 휴식’입니다. 휴식이라는 의미를 무조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무리하게 이런 저런 여가활동을 시도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심지어는 주일미사조차도 거부하면서 휴식을 찾겠다고 나서는 게으른 사람이 나타나게 되고, 또 휴식의 진정한 의미를 찾겠다고 하면서 일보다 더 힘든 여가활동을 추구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술도 마찬가지이니 몸을 상해 가면서 술자리를 가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특히 가톨릭 교회 내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술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종 모임마다 회식을 하고 우리는 개신교가 아니니 마치 술은 얼마든지 마셔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예수님도 포도주를 나누셨지만 예수님이 진탕 마시고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라는 표현이 성경 안에서 등장한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절제’가 없었다고 억측하는 것은 순전히 억지일 뿐입니다. 휴식에 대한 진정한 의미, 그것은 육과 정신과 영의 휴식입니다. 육신은 적절한 휴식을 취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정신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그 내면에서 깊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휴식

창조2 - 인간과 자연

하느님은 터전을 마련하시고 그 안을 생물들로 채우십니다. 저마다의 자리에 합당한 것들로 가득 가득 채우시지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릴’ 임무를 맡기면서 인간을 그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지배(someter)’와 ‘다스림(dominar)’을 동시에 수행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지배자’의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지배와 다스림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수탈과 억압’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권위는 생생하게 살아있지만 사랑으로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지배와 다스림이고, 권위만 내세우고 전혀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수탈과 억압입니다. 인간은 태초에 창조물 앞에서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 창조물은 그 권위에 복종했습니다. 인간은 말 한 마디로 동물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깃들었고 인간은 태초의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창조물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인간을 공격합니다. 나아가 자연물도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홍수가 없던 곳이 홍수가 나고, 가뭄이 없던 곳이 가뭄이 나는 이유는 단순히 자연의 변덕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이 만들어 낸 재앙이 상당수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자정 능력을 넘어서서 오염을 시키고 있으며 결국 그 결과물을 고스란히 입게 될 것입니다. 부자들이 아무리 재물을 모은들 공기가 썩고 물이 썩는 이상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먹을 것을 거두어 들이고 거두어 들인 것은 썩어가며, 동물들은 개체수가 점점 적어져 멸종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일 리가 없습니다. 앞으로의 우리 인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는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요나의 활동으로 니네베는 재앙을 면했고, 1,2차 세계 대전 동안 성모님의 발현으로 인류는 죄악에서 돌아설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하느님은 다른 예언자, 다른 섭리로 인류의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 이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르6,56) 그들은 병자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육체를 지니지 못한 이들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육체의 병은 정신과 무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이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 그들의 영은 어두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유, 그것은 예수님에게 접대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유는 예수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저마다의 ‘부족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의사에게 아픔을 숨기지 않습니다. 의사에게는 솔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치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겉치레 인사를 나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였지만 자신을 열어보이지 못했고 결국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가난한 이들은 그분의 권능을 알아보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육체의 치유, 정신의 치유, 영의 치유를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단순히 종교적으로 쓰이는 형식적 표현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자신의 손에 든 먹을 것을 주지는 않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그건 ‘위선’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면서 가르칠 바를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유로 치유를 베풀었고 빵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 우리는 그런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애써 거짓 위선으로 우리의 죄와 어두움을 가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테니까요.

더러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물론 세상에는 더럽히는 것,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땅에 떨어진 음식물도 더럽게 느껴지고, 오염된 하천도 더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정말 더러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어두움들입니다. 인간이 그릇된 선택을 하기 시작할 때에 그 마음에서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7,21-22)”과 같은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히고 그 사람이 주변의 모든 것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이는 자연을 더럽힐 이유가 없습니다. 생겨난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고 모든 것은 ‘질서’에 따라 흘러갈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의 탐욕은 쓰레기를 처리할 돈을 아끼려 들고 그에 따라서 하천과 거리가 오염되는 것입니다. 모든 환경적 오염의 근본은 결국 인간의 이기심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영적 더러움에 해당되는 위의 사항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금육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무시하는 마음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이지요. 깨닫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조금씩이라도 실천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어느날 갑자기 변하는 일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100원이라도 나눠주는 이는 훗날 더 크게 나누어 줄 수 있지만, 지금 자신이 지닌 것을 꽁꽁 쥐고 있는 사람은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본전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위의 악덕 하나하나별로 설명이 필요하지만 이 글이 길어지면 우리의 ‘지겨워함’이 내면에서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제 그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뒷간으로 나갈 운명

아무리 화려하게 포장해서 먹는다 해도 결국 뒷간으로 나갈 운명의 것들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 좋은 옷, 심지어는 집까지도 ‘영원’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잠시 취하다가 결국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 것들입니다. 영원에 합당한 것을 취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 자신도 뒷간으로 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욕구는 천방지축으로 제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본성이라 그 본성에 고삐를 채워 영원을 향해서 이끌지 않으면 결국 세상 것에 들러붙어 버리고 맙니다. 재주를 양껏 부려 기네스북에 오른다 해도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기를 다루고 학식이 뛰어나다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느님은 원하는 이에게 그러한 재주와 지식을 얼마든지 부여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이 추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면의 가치입니다. 어떤 재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재주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인내’와 ‘성실’이 인간이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가치가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치들도 그 근본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장땡입니다. 물론 가치들이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홀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근본에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핵심으로 두고 나머지 가치들을 수련해 나가야 합니다. 뒷간으로 나갈 것들에 너무 연연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필요한 만큼 구하고, 구한 만큼 감사하면서 쓰고, 때가 되면 내려놓을 준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6,56) 이 구절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에제 49,9) 예수님은 ‘생명의 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단지 예수님에게 ‘접촉’을 하는 것만으로도 은총이 넘쳐 흘렀습니다. 그것을 체험하는 이들의 놀라움과 기쁨은 얼마만큼 큰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구원의 행위를 단순히 육적인 치유만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에게 손을 댄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손을 댄 이유는 ‘믿음’ 때문이었으며 바로 그 믿음이 그들을 진정한 의미의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에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손을 대더라도, 아예 끌어안고 산다고 하더라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전해지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주 강한 향기가 나는 꽃 근처에 있어도 코가 고장나 있는 이들이 아무런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디 근처에 있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은총의 근원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곁에서 구원을 얻고 있을까요?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움’의 은총을 얻을까요? 아니면 단순한 요식행위로 미사에 의무적으로 참례할 뿐일까요? 아주 쉽고 단적인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도리어 그분에게서 은총을 얻지 못하는 죄인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예수님은 우리의 불신에 놀라워하실지도 모를 일이구요.

창세기 해설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 하느님의 창조와 모든 것 이전에 하느님의 영이 세상을 감돌고 있음을 나타냄.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 만물의 속성 안에는 빛과 어두움이 있음. 이 빛과 어두움은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빛이 아니라 영적인 빛과 어두움의 관점으로 보아야 함. 진실과 정의와 선과 사랑, 거짓과 불의와 악과 증오가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임. 하느님은 ‘빛’을 만드셨지만 어둠을 만드신 게 아니며 다만 빛과 어둠을 서로의 위치로 갈라 놓으신 것일 뿐임. 즉, 하느님은 어둠을 만드신 적이 없음.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하심. 이어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 같은 물이지만 서로의 위치를 차지함. 같은 영이지만 서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도 마찬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함.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창조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창세 1,1-2) 우리는 우리의 위치에서 사물들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드로메다에서 우리 은하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합니다.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거울이 없이는 우리 뒷통수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우리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으려고 하고 그 관점이라는 것의 상당 부분이 부족한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즉,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창세기를 ‘과학’이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보려고 한 것입니다. 물론 과학도 많이 발전해서 전에는 지구가 네모지다고 생각한 것을 이제는 둥글다고 알고 있고, 빅뱅에 관한 이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아직 많은 부분이 부족하고 모자란 관점입니다. 이는 아주 간단하게 ‘인간’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으로 아무리 뒤져 보아야 인간 안에 숨어 있는 ‘영혼’을 관찰하지는 못합니다. 언젠가 영혼의 무게가 8그램 이라는 과학의 보고가 있었지만 그 사실을 근거로 우리의 선과 사랑, 그리고 죄악과 탐욕에 대해서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창세기라고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단순히 세상 만물의 ‘물질적 창조’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이것만한 ‘거짓말’이 없는 셈이지요. 지금 현대의 과학의 관점에서 창세기는 정말 엉뚱한 거짓말을 담고 있는 책일 뿐입니다. 차라리 ‘빅뱅이 있었다, 그 첫 폭발 뒤로 물질들이 튀어나와 서로 엉겨 붙으면서 서서히 식어가며 지금의 우주의 초창기 단계를 형성했다…’라고 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창세기는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창세기는 하느님의 ‘창조’ 그 자체를 다룬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창세기를 요리조리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창세기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배워야 하는 걸까요? 그것

섭리와 우리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히브 13,21) 당신이 여러분의 뜻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섭리’입니다. 당신의 뜻은 커다란 강물처럼 흐릅니다. 그 안에 동참하는 물방울 하나가 되던가, 아니면 강에서 벗어나 서서히 말라가는 물방울이 되던가 하는 것 뿐입니다. 강물에 동참하는 물방울은 다른 물방울을 만나 더욱 ‘확장’됩니다. 각각의 물방울이 지닌 고유한 것들을 기쁘게 서로 나눕니다. 하지만 따로 떨어져 나간 물방울은 자신이 가진 것을 서서히 잃어가며 결국 말라 버립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늘 고요하게 가야 할 곳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안에 참여하는 물방울은 복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섭리에 참여하는 물방울에게 크나큰 축복을 내려 당신의 뜻을 더욱 잘 이루도록 도와 주십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이에 대해서는 하느님은 다만 지켜 보십니다. 그가 더욱 지독한 이기심으로 개인의 영달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마음을 돌이켜 섭리에 참여할 것인지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선택을 내릴 동안 하느님은 지켜 보십니다. 필요하다면 경고를 해 주시기도 하지요.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죄악이 하느님에게 속한 것은 아닙니다. 죄악은 손에 쥘 수 있는 어떠한 사물이나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그릇된 선택,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말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그 자유를 사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인 것이지요. 그래서 죄악은 하느님에게 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하는 인간은 여전히 하느님에게 속해 있는 것이지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섭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섭리를 세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섭리가 하느님의 선과 진리, 정의에 바탕한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약한 이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코린 9,19) 강한 사람은 거침이 없습니다. 속이 강한 사람, 속이 튼튼한 사람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습니다. 속이 약한 사람이 음식을 가려 먹지요. 몸이 튼튼한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약한 사람이 부담이 덜 되는 일을 찾지요. 정신이 강한 사람은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도 해낼 수 있습니다. 정신이 약한 사람이 스트레스가 덜한 직종이 필요하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니 영혼이 튼튼한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의 굳은 신뢰로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약한 사람은 이것 저것이 지정되어야 합니다. 몇 시에 기도를 바쳐야 하고, 몇 번을 바쳐야 하고, 어떤 기도를 바쳐야 하는지, 또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있고,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없는지 세세하게 지정해 주어야 하지요. 그런 이들을 위해서는 약한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괜찮다고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무턱대고 그들만을 따라가서도 안됩니다. 그 약한 이들에게도 성장할 기회를 마련해 주기도 해야 하지요. 여전히 약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스스로 가해지는 제약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존중해야 하겠지만 약함 속에 머무르도록 내버려 두어서도 안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주일 미사의 의무를 지키는 건 생각만큼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나의 양심을 바로 세우기 위한 회개가 중요하지 미사 빠졌다고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형식에 그치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강해지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성이 휴식의 필요를 이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떠난 예수님의 일행을 육로로 ‘달려가’ 따라 잡았습니다. 그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뛰어가서라도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싶은 사람의 마음과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쉬지 않았습니다. 아니,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르침을 시작하지요. 사람들은 배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편의 러브스토리입니다. 무덤덤한 마음으로 읽으면 스쳐 지나갈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간절함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녹아들어 있는 구절이지요. 사람들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건 어딜가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주려는 이는 세상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쉬지도 못하셨지만 기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기쁨의 근원은 바로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마저도 이겨버리는 당신의 신앙은 굶주림과 피곤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당신을 기쁨으로 가득 채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목자 없는 양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르침을 전할 목동이 필요합니다.

흔들리는 사람

흔들리는 존재는 서로 대비되는 움직임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대가 흔들리는 이유는 바람이 이리 저리 불기 때문입니다. 만일 바람이 꾸준히 한 방향으로만 일정하게 분다면 갈대가 흔들릴 이유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쪽으로 살짝 기운 채로 멈추어 서 있겠지요. 인간이 흔들리는 이유는 하느님을 향한 선의와 그 반대의 악마의 유혹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정신없이 흔들리게 되고, 결국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이런 대표적인 인물을 찾아보면 헤로데가 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들로 괴로워했지만 죽이지는 않고 살려두고 있었지요. 헤로데는 요한이 진실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삶의 죄스러움이 그의 진실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결국 스스로의 길을 파멸로 이끌어 갑니다. 어느 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운명의 날이 닥치는 셈이지요. 헤로데는 결국 자신의 아내의 사주를 받은 딸 헤로디아에게 요한의 목을 베어 가져다주게 합니다.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우리가 멈춰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후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귤을 먹을까 오렌지를 먹을까를 두고는 고민할 수 있지만 선을 행할까 악을 행할까를 두고는 고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옳다고 말하는 바를 주저없이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니, 그렇게 하지 않음 그 자체가 바로 나의 후퇴를 드러내어 주는 것입니다. 선을 알고도 주저하는 그 순간부터 악마는 눈치를 채고 온갖 감언이설을 통해서 우리를 어둠의 길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것은 갈대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옳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