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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15의 게시물 표시

시선을 들어높이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했지요. 헌데 지금은 자기 나라를 억압하는 로마도 없고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은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와는 정반대로 자신들이 다른 약한 나라를 억압하고 있는 중이지요. 우리가 지금 가장 시급하다고 느끼는 일들은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찰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영원 안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은 이가 세상 안의 목표에서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외적 조건을 바꾼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동네 아이를 한국의 우수한 교육환경에 데려다 놓는다고 절로 그가 훌륭한 사회의 역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변화는 이미 내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내면이 변화되어 정의와 진실과 선으로 향해 있는 이가 자신이 속해 있는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역사는 인간에게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자리바꿈을 가르쳐 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은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그 내면을 바라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셈입니다. 옛날에는 가마를 타고 노비들을 천시하면서 거리를 다녔다면, 지금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일용직 노동자들을 천시하면서 거리를 다닐 뿐인 것이지요. 인간의 내면은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에서 진정으로 드높아지려는 사람은 시선을 들어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을 바라보고 거기에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돌고 도는 수레바퀴같은 인생인데 자신에게는 그 회전주기가 한 번 뿐이기 때문에 이미 수많은 이들이 겪은 여정을 똑같이 겪으면서도 새롭게 느껴질 뿐입니다.

주님이 먼저 가신 길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요한 13,36) 도대체 어디를 가시는 걸까요? 그리고 왜 지금은 안되고 나중에는 되는 걸까요? 단순한 장소의 이동 시간 때문인 걸까요? 어떻게 하면 따라갈 수 있는 걸까요? 성경 안에 표현된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에는 지상의 ‘분석’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예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천상 사정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어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어딘가로 건너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어딘가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지닌 공간과 시간의 관념마저도 뛰어넘는 곳이라는 것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작은 종이컵으로 바닷물을 담을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비유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거기에 지금은 우리가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 새로운 곳에 머무를 자격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고, 반대로 이 땅에 묶인 것이 많다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 아무리 우리가 천상을 그리며 산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의 간극동안 우리가 변화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될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향해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은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으시니까요. 베드로사도는 순박하고 성격이 급했으며 우직하고 충실했습니다. 그 내면에 장단을 모두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그를 주님의 으뜸 제자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가난한 이와 예수님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8)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들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머무르는 그 순간에 우리는 주님을 도외시합니다. 먼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곁에는 늘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선행을 하고는 싶은데 누구를 도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시간, 노력, 재화 그 어떤 것이든 당신이 자의로 내어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선을 단순히 ‘돈을 건넴’이라고 생각해서 하기 싫어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욕심쟁이이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줄 수 있는 것부터 내어주는 것이 훈련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가진 것 중에서 남는 것부터 시작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챙기고 생각하는 마음을 꾸준히 하다보면 그를 사랑하게 되고, 나중에는 나의 필요보다 그의 필요를 먼저 살피게 되어 기꺼이 내어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길가다 만나는 거지에게 100원 한 푼도 아까워 벌벌 떨면서 어느 순간 돈을 많이 벌면 내어놓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순히 돈, 재화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노력 또한 내어줄 수 있는 대상에 포함됩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나라는 오히려 돈으로 도와줘야 할 대상을 만나기가 더 힘이 든 실정입니다. 물건은 집에 남아돌고 넘쳐 흐릅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안에 내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를 직접 만나고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내어주고, 우리의 노력을 쏟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음은 주님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자로서 ‘미사’가 되겠지요. 그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이사 42,6-7) 빛은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마찬가지로 빛과 같은 존재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돈과 그 가치는 볼 수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가치는 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보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눈을 뜬 이들은 다른 이들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장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여전히 ‘내가 도대체 무엇을 더 보아야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거부해서 장님이 되는 이들은 달리 묘책이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머무르기를 바랄 뿐이니까요.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백화점 상품 옆에는 그 상품의 가치가 ‘가격’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보다 소중한 가치들은 ‘가격’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순진무구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가격으로 환산되지 않습니다. 길가의 작은 들꽃의 가치도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지요. 이른 아침의 새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마음’이라는 것은 가격표 따위를 붙일 생각조차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장삿꾼들에게 사람이란 ‘소비자’이요 자신의 물건을 팔아서 이득을 보는 데 도움을 줄 수단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보게 될 때, 바로 우리가 눈을 뜨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그런 가치들을 보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군더더기 일들에 신경을 덜 쓰고 더 소중한 가치들에 마음을 쓸 줄 알게 되지요. 빛을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장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학교에서 한 덕담

학생여러분, 저는 불과 얼마 전까지 한국이라는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볼리비아보다는 부유한 나라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물어보지요. 많은 돈이 절로 좋은 마음을 만드나요? - 아니요. (아이들이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돈이 많다고 절로 마음이 좋아지는 건 아닙니다. 많은 의사들이 있지만 돈이 많다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지는 않아요. 서로를 돕는 것은 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좋은 마음, 선한 마음, 고귀한 마음이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채워넣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는 ‘배움’의 장소이고 배움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여러분은 우정을 배우고,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고, 질서를 배우고, 책임감을 배우지요. 그것이 학교입니다. 여러분은 학교에서 단순히 공부만을 하는 게 아니라 ‘가치들’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사회의 구성원이 될 것입니다. 학업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장차 더 나은 환경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전문직에 종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배우지 못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아무것도 못해요. 아니지요. 그래도 몸을 쓰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보다 ‘내면의 가치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뭐든 수행해 냅니다. 여러분은 시험이 다가올 때에 아프다고 하면서 시험을 치르지 않을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험을 회피함과 동시에 여러분은 2가지 오류를 범하는 것이지요. 하나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을 내던짐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한국 사람입니다. 처음 볼리비아에 왔을 때에는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지요. 그냥 배운 게 아닙니다. 인내하는 시간이 있었지요. 신부님은 참아 견딜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장례식

오늘 장례는 90이 넘은 어느 할아버지의 장례였습니다. 성당 바로 근처의 집이었는데 좀 사는 집 같아 보였습니다. 먼저 장례 예절의 간단한 시작부분을 하고 바로 강론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삶의 현실 앞에 있습니다. 바로 ‘죽음’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엄연한 현실이지요. 이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우리의 생은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태어나서 고생만 하다가 죽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생을 채우는 방법을 강구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쾌락으로 채우려고 하지요. 그리고 그 쾌락을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버둥대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단 한 푼도 들고갈수 없지요. 모든 것은 여기에 남겨지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몸도 남겨놓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그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대로 끝인 걸까요? 그게 아니라는 건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죽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남는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영혼은 남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하느님 앞에 서게 되지요. 그러면 하느님은 그가 준비되었는가를 살펴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학식도 돈도 명예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 가득한 마음만이 중요할 뿐이지요. 여기 우리 앞에 놓인 망자는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이지요. 볼리비아의 풍습대로 우리는 9일동안 기도를 하게 됩니다. 모쪼록 그 시간 동안 가족들이 모여서 망자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서로 일치하고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왜냐하면 장례의 날들에 모여서 서로 돈때문에 싸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세요. 서로 사랑하고

군중의 양면성

우리는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습니다. 환영하던 군중들이 폭군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주제는 ‘왜 변했는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반기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변하는 이유는 사실 변해 보이는 것이지 그 내면은 전혀 변하지 않은 셈이지요. 다만 대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 것일 뿐입니다. 겉이 황금으로 칠해져 있는데 속에는 똥이 들어있다면 처음에는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다가 그 실체를 알고는 기분이 상해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구원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요. 그들은 세상의 구원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정치 상황에서 구원해주고 자신들에게 빵을 주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전혀 엉뚱한 말들을 시작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군중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력한 예수님의 모습 앞에서 군중은 돌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는 ‘바라빠’를 선호합니다. 수많은 이들을 살인한 폭력배를 자신의 진정한 구원자 대신에 살려 버리고 예수님은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왜 반길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실체를 알았을 때에 과연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일까요?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만 그분의 영광스런 부활의 모습만을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영광’이라는 것을 세상의 영광과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많은 돈을 벌고, 편안하게 일을 하고, 내가 원하는 식대로 일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요? 우리는 또다른 그 시대의 군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하루 묵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사제직에 관한 소고

내가 지니고 있는 직분이 나의 모든 것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사제라서 절로 사제로 거룩해지는 게 아닙니다. 군대를 포함해서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이 길었다고 해서 절로 나의 거룩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논문을 써서 그만한 ‘학식’을 지닐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제직이라서 더 낫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직분은 확장 가능성이 그만큼 주어졌다는 것일 뿐이고, 확장 가능성이 넓어진 만큼 더 노력하지 않으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주어지게 됩니다. 작은 소주잔을 물로 채우는 데에는 약간의 물만 필요하지만, 큰 대야를 물로 채우는 데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한 법입니다. 같은 양의 물로 소주잔은 채울 수 있지만 대야는 채울 수 없습니다. 물의 양은 같은데 자신이 ‘선택’한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사제직’을 부러워합니다. 사제직이 ‘누릴 수 있는’ 것들만 바라보기에 그렇습니다. 그 가운데 사제직이 그에게 요구하는 진보의 과정은 무시되고 맙니다. 그러나 각자는 저마다의 노력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결국 모든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겸손되이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사제직이 아니면 사제직에 대응하는 축복을 얻지 못하는가? 아닙니다. ‘성인’을 목표로 삼으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인의 그릇은 사제직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제도 성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여성 사제직의 가능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데 왜 사제직분을 남성에게만 주는가 하는 것을 단순히 사제직에서 비롯하는 은총의 공유 가능성에만 집중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전능 안에서 여성이 사제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남자의 몸에서

선택하지 못하는 죽은 이들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선택권이 사라진다는 것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로서는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말이지요. 그래서 적절한 비유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커다란 그물을 아래 위로 쳐 두고 헬륨을 담은 풍선과 그냥 공기를 담은 풍선을 넣어 두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둘은 그 내부의 성질이 서로 다르지만 같은 그물의 범위 안에서 놀고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상황인 것이지요. 우리의 내면에는 아래를 향하는 성질, 즉 세속을 찾고 이기성을 찾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 이들과, 반대로 위를 향하는 성질, 즉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위해서 이웃의 행복을 찾는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육신’을 지니고 있는 동안은 그것이 바로 드러나지 못하고 걸러져서 나오게 되지요. 따라서 선한 이들은 그 의도를 의심받고(예수님과 수많은 성인들이 그러하였듯이) 반대로 악한 이들은 의인 취급을 받으며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그물이 치워질 때에는 각자의 풍선은 제 안에 든 성질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더 이상의 장막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누군가를 증오하면서도 겉으로는 웃고 다닐 수 있었지만 이제 육신이라는 장막이 사라지고 나면 그 안에 든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본래 머물러야 할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찾아 나서고 싶지만 늘 육신의 약함에 빠져 있던 이들에게 육신이 치워지고 나면 그들은 서슴없이 하느님을 향해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즉 육신을 지니고 있는 동안은 ‘기회’가 주어집니다. 즉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헬륨을 지닌 풍선을 보면서 나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고, 반대로 공기를 지닌 풍선을 보면서 그 길을 탐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물이 치워지는 그날에는 가리워진 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셈이지요.

저는 아니겠지요?

누구를 탓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난 전날 저녁에 제자들은 모여서 만찬을 하는데 예수님이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일어날 일, 즉 제자의 배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모두가 똑같이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길 바랬습니다. 그런 나쁜 짓을 하게 될 인물이 자신만은 아니길 바랬지요. 그러나 그 뿐이었습니다. 자신만 아니면 되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악에 두려웠지만 스승님에 대해서 진정으로 걱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나만 아니면 누가 죽어도 상관이 없는 세상, 내가 소유한 범위의 것이 아니면 다른 것이야 어떤 일이 벌어져도 상관이 없는 세상.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나 이외의 것에 탓을 돌리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나’와 ‘주변’을 분리시키기 시작한 셈입니다. 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이고 바로 저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한 형제의 망함은 바로 저의 탓이기도 한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내려는 은총의 보상은 사실 이미 주어져 있는 것들입니다. 남은 건 열심히 일하는 것 뿐이지요. 남은 건 열심히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그 뿐입니다. 당신은 아니라구요? 크게 죄를 짓지 않았다구요? 그래서 누군가를 해친 적이 없다구요? 천만에요. 그래서 바로 당신입니다.

소경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의 죽음의 날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변화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다시 잊어버리고 말까요? 죽음 이후의 삶의 모습은 이미 성경에 여러차례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냥 오래된 책이고 다 지어낸 헛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종의 교만이지요. 자신이 정말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다른 권위는 인정을 합니다. 어느 누가 ‘무슨무슨 박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면 그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가 먹지 말라는 것을 먹지 않고 먹으라는 것을 먹지요. 그렇게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장님’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당신의 빛이 너무나 밝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어둠이 되어 버리는 셈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들의 수준에 어울리는 빛을 전해 주십니다. 바로 ‘예언자들’이지요. 예언자들은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로서 하느님의 빛을 전해 받고 사람들에게 그 빛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럼 그들의 말이라도 들어야 하건만 사람들은 그럴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여유가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여유를 모두 지워 버리는 셈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다 마음과 노력과 시간을 쏟아 버리고 맙니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을 추구하고 추구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해 버리고 말지요. 하느님이 정말 당신의 고위직을 반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천만에요. 하느님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것’은 아무 상관 않으십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는가를 살피시는 분이시지요. 여기서 또다른 어리석음이 개입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한다는 일이 전부 ‘형식’에 그쳐 버리는 것입니다. 미사를 가면 하느님이 좋

마음의 평화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중에 중요하게 꼽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루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방법으로 이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옆에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의 울음과 모습이 내 감각 기관을 타고 흘러들어와 나를 성가시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편치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쓰는 방법은 ‘회피’입니다. 즉, 아이가 없는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지요. 그러면 나의 눈과 귀에서 아이의 성가심이 사라져 버리니까요. 그렇게 도망을 치고서는 자신의 마음이 ‘평화’롭다고 착각을 합니다. 다음으로는 아이가 울지 못하도록 겁을 주고 윽박지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또한 일종의 회피이지만 나의 노력이 들어가는 부분이라 사람들은 이를 ‘개선’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아이가 겁을 집어먹도록 온통 짓누르고 나서는 아이가 조용해지면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다른 기회에 이번에 울지 못한 것까지 더해서 더욱 극심하게 울어버릴 것입니다. 참된 평화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인내심을 갖고 아이에게 다가가 아이가 왜 우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울고 있는 이유를 해소해 주어야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이고, 뭔가가 필요하면 그것을 가서 구해다가 가져다 주어야 합니다. 결국 그렇게 아이는 행복해 하며 울음을 그치게 됩니다. 이 방법은 더디고 힘이 드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쉬운 길을 선택하는 데에 굉장히 익숙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평화를 누릴 자격을 갖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처세술로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깃드리라고 착각하는 신앙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무언가를 많이 하면 평화가 주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에 매달리고, 평일 미사에 나오지만 상황

나의 일을 평가하기

여러분들이 하는 일을 스스로 평가해 보십시오. 어떤 결과가 나오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방금 무언가를 하셨을 것입니다. 식사를 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 수도 있고, 정말 중요한 결제를 마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적으로 여러분이 한 일을 살펴 보십시오.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여러분 스스로 분별해 보십시오. 예컨대 ‘식사’를 하는 것이 단순히 굶주림을 채우는 행위였는지, 아니면 식사 중에 식사를 준비한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는 행위였는지, 아니면 입으로는 밥을 넣으면서 마음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느라 뭘 먹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감사 드리면서 지금 허락하신 한 끼의 식사를 했는지… 하나의 사소한 행동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본질적인 것을 거의 신경쓰지 못하고 외적인 행위에 치중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정말 소중한 행동을 무시하고 쓰레기와 같은 세속의 번지르르한 일을 찾아 다니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임 신부님과 식사를 하셨다구요? 정말 사제직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하신 건가요? 아니면 그 주임 신부라는 직분과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나름의 세속적 욕구로 하신 건가요? 아니면 당신이 추진하는 사업이 나중에라도 그 주임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사업가적 마인드로 만나신 건가요? 모든 외적인 행위 속에는 숨은 의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별력을 잃었고 장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일인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

만일 우리가 회사에 입사한다면 우리는 그 회사의 입사요강을 잘 확인하고 그에 맞춰서 준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떨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아주 간단한 문제이고 우리는 이미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떠올리면서 우리는 참으로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냥 저냥 하면 들어갈 곳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하늘나라에도 반드시 들어갈 기준이 존재합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에페 5,10) 하늘나라의 입사요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아주 명백하고 간단한 말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들어 보았을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른 미칠듯이 어려운 금욕을 하고 제계를 지키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다만 우리가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보살피라고 하십니다. 그는 나의 아내가 될 수도, 나의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우리 가운데 가장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해 준 것은 하느님 앞에 영원한 상급으로 남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고귀한 신분의 사람을 만나고 성수를 떠오고 나의 이름이 남는 건축물을 짓는다 해도 그 안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나 이웃 사랑보다는 나 자신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다면 소용없는 짓입니다.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결과로 돌아오게 될지 우리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 시험이 있고 그 시험 문제가 나와 있는데도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 시험에 떨어진 결과만 책임지면 됩니다. 세상은 그런 무책임함을 만회할 기회라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영원의 시험에서 떨어져 ‘기회’ 자체를 상실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안타깝고 가슴을 쳐야 할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릅니다.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해야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요한 11,47)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의 의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을 다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이루기를 거부하는 나 자신과 어떻게 타협하면 좋겠소?’ 예수님은 표징을 일으키고 다녔고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우리의 내면으로 비유한다면 ‘진리’를 만난 우리의 정신이 그분을 따르고 싶어하는데 이미 세상에 길들여진 우리의 본성이 그것을 가로막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다. 복잡해 보이는 반응들이 있지만 사실은 2 가지 반응 뿐입니다. 진리에 따르거나, 거부하거나. 진리에 따르는 이들은 옳다고 알려진 바를 위해서 자신을 바꾸어 가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방향수정을 하는 이들이지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믿음을 두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지요.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진리를 거부하는 이들이지요. 바로 복음에 등장하는 이들처럼 예수님의 진실함 앞에서 그분을 해치려고 시도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눈 앞의 것들에 목을 매고 살아가며 영원의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만큼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관심이 있거나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내버려둡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운전대가 내 손에 있는데 내가 원래 가야 할 방향에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고 있지요. 잊지 마십시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8) 아버지의 일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단순합니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술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 사람은 술을 마시면 됩니다. 하지만 조금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술은 그를 행복하게 하는지 말입니다. 만일 그가 절제와 더불어 좋은 시간에 술을 마신다면 나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도 즐길 술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주 그렇게 해서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자주 마셔서 몸을 상하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즐거움’이고 다른 이의 불행을 조장하는 자신만의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 하느님의 일인가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은 지극히 단순하니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만 ‘거짓된 행복’을 벗겨내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이 돈을 벌건 벌지 않건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이 돈을 벌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벌면 됩니다. 다만 하느님은 그 돈이 정당한 수단을 통해서 당신에게 들어오는지, 그리고 당신이 돈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만일 다른 절실한 이가 당신에게 찾아왔을 때에 과연 당신은 그의 필요를 살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좌를 보고 일정량 이상의 돈을 보유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꼼꼼하게 살피시는 감사팀장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지혜로 돈을 소유하고 사용하는지에는 신경을 쓰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영혼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부자가 죄인이 아니고, 가난이 장땡이 아닙니다. 어떤 부자이고 어떤 가난인가가 중요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정말 게을러서 가난하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마르 15,3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방법을 강구합니다. 가능하면 십자가에 올라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 져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다른 이의 몫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이들의 몫이 됩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 자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을 때에, 그 몫은 낮은 이들의 몫으로 떠넘겨집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고통은 가중되는 것입니다. 저마다 십자가의 몫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할 십자가를 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머무르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지면 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면 됩니다. 사랑이 필요한 일이고 그것이 십자가로 다가옵니다. 만일 부모가 이를 소홀히 하고 다만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편한 것만을 추구하면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에 굶주린 아이가 되고 맙니다. 결국 부모의 십자가가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셈입니다.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미루어 두는 순간 그 십자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대신 져야 할 일이 되고 맙니다. 자기가 버린 쓰레기는 자신이 치우면 되지만 그걸 엉뚱한 곳에다 버리면 다른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가련한 죄인들에게 ‘구원’이 다가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커다란 섭리를 당신을 내어 바쳐 이루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올라갔고,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수치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일 뿐인 그 영광을 우리는 증거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진실을 증언하는 이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르 14,61-62)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대사제의 저택에서 있었던 심문 중에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부분입니다. 이 순간 예수님은 ‘진실’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된 진실에 우리는 모두 마음을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 안에는 특별히 예수님의 ‘진실함’이 묻어나오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특히나 예수님께서 두 번씩 ‘진실로 진실로’라고 표현하는 부분들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 ‘진실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입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비록 그분의 육신 생명은 이스라엘의 시골 마을 나자렛 동네 출신의 목수의 아들에 불과하지만 그분의 영은 거룩한 영, 바로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의 구절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바로 예수님,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의 아들이 되어 오신 분을 일컫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이라는 표현은 전능하신 분의 가장 가까운 자리, 특별한 위치가 부여된 자리, 그분의 모든 권능을 수여받는 직분을 말합니다. 하늘의 구름이라는 것은 드높은 천상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름 기둥이 다가와 그들을 이끌고 이집트 병사들을 가로막아 주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때가 되어 하늘의 구름이라는 전능함을 바탕으로 다가오셔서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그와 반대되는 세력을 가로막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심판은 종료되고 사람들은 그분이 하느님을 모욕했다고 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진실을 짓밟는 자들

그들의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자 대사제가 한가운데로 나서서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마르 14,59-61) 일찌기 사실과 진실의 차이에 대해서 밝인 적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실은 일어난 일 그 자체에 대한 언급이고 진실은 그것이 향하는 방향에 대한 것입니다. 악한 자들에게 쫓겨 자신을 살려 달라는 사슴을 두고 사냥꾼이 귀찮아서 곧이 곧대로 말한다면 그는 겉으로 보기에 ‘사실’은 지켰지만 ‘진실’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반대로 사슴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숨겨주고 보살피면서 사슴을 찾는 악한 이들에게는 사슴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지켜내지 못했지만 ‘진실’은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선한 행동입니다. 속이는 자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악합니다. 그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상대를 속여 사악한 결과를 얻어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입을 다문 이유는 그들이 전혀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위해서 털끝만치라도 나은 것을 추구하는 방향성이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아가서 사악한 이들은 그들이 말하는 사실 마저도 서로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오직 진정한 참된 ‘사실’만을 이야기한다면 서로의 말이 엇갈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을 근거로한 증언에 자신의 ‘의도’를 섞기 때문에 전혀 결국 그들의 말도 서로 엇갈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의도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끼리도 서로 온전히 대화하고 의견을 맞출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진실을 알아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율법서에 안식일에 음식을 먹지 말라고 적힌 것은 ‘사실’이지만 배가 고픈 이에게 음식을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사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마르 14,21) 시작점은 언제나 0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0가 아닌 것이 이미 우리는 은총을 많이 받은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탄생의 순간부터 이미 지니고 있는 축복이 많습니다. 인간은 악에서 보호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갓난 아이가 사물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말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실은 ‘보호’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이의 지성이 깨어나 이해가 시작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아이는 점점 자라나고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늘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는 타인의 영향 속에서 수동적으로 자라나지요. 특히나 부모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에게 전해지는 부모의 모범은 그 아이의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부모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이는 곧 나가서 친구들을 사귀고 또 다른 어른들의 모습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분별하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되고, 다른 아이를 이유없이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신이 아는 바 안에서 할 수 있는 결정들이 주어집니다. 이 선택은 온전히 열린 것이며 오로지 자신의 몫입니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어가고, 때가 되면 온전한 독립을 이룹니다. 나아가 자신이 보살펴야 할 가족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의지 속에 깊이 들어있는 자유를 고스란히 지니고 살아가지요. 그리고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퇴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처음 상태보다도 못한 방향으로 물러나는 것이지요. 즉, 복음의 유다처럼 ‘무죄한 이를 해코지’하려는 사람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 악을 더 큰 악으로 갚으려는 사람이지요.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이 나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요. 간단한 예로, 본인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서 담배를

악한 이들의 자기중심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마르 14,11)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가 잘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이 있지요. 이들의 내면은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이들에게 ‘선’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이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선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지요. 이들은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악한 생각과 악한 행동을 두고 ‘선’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이기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하느님의 방향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순간 악으로 더욱더 멀어져만 갑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내가 바라는 사물, 바라는 일, 누군가에 대해서 바라고 있는 것이 정말 하느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그러기를 바라기에 그렇게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에 하느님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상하고 좋은 것을 찾아 다니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는 천하고 더러운 것을 피하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우리를 중심에 두고 가치판단을 하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입니다. ‘방향전환’, 즉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작업이 바로 ‘회개’의 본질입니다. 단순히 사순시기 동안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는 게 회개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나의 내면이 어디를 향해서 가려고 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저 조금 더 오래 살아보려고 담배를 끊을 뿐이고, 마누라의 잔소리가 성가셔서 술을 줄이는 것은 ‘회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본인에게 더 낫기에 하는 것 뿐입니다.

신학의 움직임

신학은 필요한 학문입니다. 그릇된 가르침에 대응해서 올바른 길로 이성을 인도할 때에 참으로 필요한 학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학은 ‘지식’ 안에만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는 바를 실천하지 않는 신학은 죽은 신학입니다. 그리고 그런 죽은 요소들은 악마의 무리도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이가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외친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신앙고백’을 지껄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의 실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이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어둠의 영들은 적어도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서 ‘두려움’이라도 지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아예 ‘인식’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합니다. 아침 방송에 어느 음식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들으면서 ‘참된 지식’에 관한 내용은 공연히 거부감을 느낍니다. 여기에는 신학자들의 탓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학을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겸손에 대해서 3시간을 가르칠 수는 있어도 겸손하지 못한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순명에 대해서 논문을 쓰지만 순명하지 않는 이들도 있지요. 신학은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움직이는 무언가로 점점 더 멀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렇게 정돈된 학문은 책 속에 갇혀 더는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지요. 신학은 필요한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자면 신학은 이제 ‘행동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반드시 실천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한 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오류도 있습니다. ‘실천’을 일종의 사조, 주의로 해석해서 자신과 반대대는 경향에 대놓고 맞서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실천이라는 것은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도 실천해야 하고 겸손도 실천해야 합니다

몸을 숨기는 예수님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요한 8,51) 이 장면을 떠올려보면 한편으로 긴박감이 넘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재미난 모습이기도 합니다. 유다인들 앞에서 한치의 양보함도 없이 맞대응을 하시다가 결국 유다인들이 논리가 안되니 폭력을 행사하고 예수님은 그 폭력을 피해 달아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도 이유없는 폭력을 당하신 분은 아닙니다. 당신이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유는 때가 이르러 그렇게 된 것이지 모든 수난을 아무런 이유없이 다 당하신 것은 아닙니다. 헌데 우리는 기준점을 이상하게 잡아 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오로지 거룩한 모습만을 바라보려고 하기에 우리의 이상향도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 못하고 너무 높아져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턱대고 폭력을 행사하려는 이들은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 폭력은 단순히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없이 우리를 공격해 대는 모든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요즘에는 이 SNS 상에서 무턱대고 타인을 비방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볼 때에 순간순간 모두 맞서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물론 ‘때가 차면’ 해야 할 말을 하기도 해야 하고, ‘때가 차면’ 마땅히 나서서 일을 하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분수를 알아야 하느님도 우리를 당신 뜻대로 쓸 수 있는 법입니다. 얇은 비닐 봉투에 무거운 쇠연장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얇은 비닐 봉투는 상추만 담아도 충분합니다.

영적 지도자를 찾는 사람들

저는 처음에는 ‘저를 이끌어 주세요’라고 하는 이들을 이끌면 되는 줄예 알았습니다. 참으로 순진하고 단순하고 무식했던 것이지요. 허나 그 어설픔이 상대를 이끌기는 커녕 도리어 엉뚱한 곳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신중하게 되었습니다. 소경 상태의 지도자는 다른 소경을 이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끌어 달라는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알게 되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먼저 어딘가로 이끌려 가고 있는 자신을 멈춰 세우는 게 필요합니다. 그럴 의욕이 없이 그저 누군가가 뭔가 있어 보이니 대놓고 부탁하는 것 뿐입니다. 자신은 스스로 전혀 바뀌지 않으려고 하면서 누군가가 다가와서 기적 같은 능력으로 그의 모든 고난을 없애 주기를 바라는 것을 ‘이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영적 이끔의 과정에는 본인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본인의 의지적 내어맡김 없이는 성취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적 지식을 늘린다고 그가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아는 것을 실천하기 시작할 때에 그가 변화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누구를 믿을 것입니까? 누구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나이에, 신분에, 학력에, 출신에 가리워 전혀 엉뚱한 사람을 내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서울대 출신의 나이 지긋한 외국 유학파 박사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마음이 맑은 청년의 지혜 가득한 말은 아예 시작부터 귀를 닫아 버리는 형편입니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좋은 것’을 느낄 뿐, 그것이 실제로 좋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만일 정말 좋은 것이었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그 땅을 사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리 저리 간을 보는 중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간을 본다고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직 전적인 헌신을 통해서만 알게되는 것입니다. “주변의 누군가와 불화가 있어요 도움이 될 한마디 해 주시지요.” 그러나 이렇게 부탁하는 이에게 저의 한마디는

욕구

욕구라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욕구’가 있게 마련입니다. 욕구는 여러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간단하게는 배고픔 부터 시작해서 무언가를 성취하고픈 욕구까지 다양하게 있지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다양한 행위를 하게 되지요. 먹고 마시고 잠자고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행위들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채워지고 나면 다른 욕구들이 슬슬 고개를 쳐듭니다. 이때 올바른 분별력을 내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욕구들의 난잡한 싸움에 끼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괴롭게 만듭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이 마른 것은 정당한 것이고 물을 마시면 해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이다를 마실 것인가 주스를 마실 것인가 하는 것은 나의 기호에 따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이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이다를 선택하기 위해서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이다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면 사이다라는 욕구가 생기게 되고 그와 상응하는 비슷한 다른 것과 비교를 시작하고 좀 더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등등의 일련의 활동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욕구를 지니는 만큼 우리는 더 번잡해 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불행’해 집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인간은 불행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다른 욕구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여러가지 것들을 보면서 그런 것에서 자꾸만 욕구를 불러 일으킵니다. 따뜻한 옷이 아니라 아름다운 옷을 추구한다면서 ‘미적 욕구’를 불러 일으키고 충분한 음식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요구한다면서 ‘식감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식입니다. 욕구의 다양한 발생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님을 시험하기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이사 7,12) 믿을 대상을 잘 골라야 합니다. 약간 썩어 있었지만 믿고 앉았던 의자가 부러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의자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내어맡길 대상을 올바르게 분별해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느님입니다. 즉, 세상에는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가 진실되게 우리를 의지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일은 쉽게 일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지요. 우리는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의지하지 못할 것에 마음을 줍니다. 우리는 세상의 재화, 권력, 명예와 같은 것을 믿고 의지하며 그것에 우리의 영혼을 맡기려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나 그러했듯이 그러한 것들을 믿고 살아난 이가 없습니다. 모두 죽음의 그늘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가 진실로 의탁할 수 있는 분인데 우리는 정작 그분을 믿지 못합니다.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지금의 이 세상에 그분은 무엇을 하느냐고 대어들기가 일쑤입니다. 우리는 반항하는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파악할 수 없다고 하여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헌데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 손 안에 놓고 분별해 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을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둘 수 있는 대상은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대상, 우리를 넘어서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헌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혀 엉뚱한 것을 하느님의 자리에 두고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그래서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을 ‘신비스럽다’고 속이고 그것이 곧 하느님이라고 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대상을 만들어 낸 자들은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책임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스스로 깨닫지를 못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

당신의 뜻을 향한 헌신

우리는 ‘이루는 것’을 좋아합니다. 뭔가 눈에 드러나고 쌓아둘 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뭔가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잔뜩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아무리 큰 성전을 지어도 결국에는 부식되고 맙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음에 비길 수 있습니다. ‘빈 장갑’이 되는 것입니다. 뭔가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을 가득 채운 장갑, 또는 겉치장이 화려한 장갑이 아니라 그 장갑 안에 손을 넣고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장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갑 안에 손을 넣으실 분은 하느님이 되는 것이지요. 신앙인은 뭔가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최고의 신앙인은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가운데에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히브 10,7) 이를 위해서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안에 이미 들어있는 이기적인욕구를 없애는 것입니다. 나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나 자신에게 들러붙게 만드는 욕구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욕구들은 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길을 마련 하십니다. 우리의 욕구가 하나씩 정복될 수 있도록 우리 앞에 적절한 시련을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우리들을 다듬으십니다. 허영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치스러운 일을 허락하시고, 탐욕을 극복하도록 돈을 잃어보게 하십니다. 남을 짓밟는 욕구를 되살펴보라고 누군가에게 짓밟히게도 하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배울 거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지를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내면에 반발심을 더해갑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계획 안에 있음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의 의미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렇습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분은 무능력해 보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악인은 활개를 치고 선인은 핍박받는 현실이 속상하고 하느님에게 부르짖어 보지만 그 어떤 응답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능함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전능함일까요? 아닙니다. 전능함은 우리가 상상하는 식의 ‘무조건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생각이 갈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 세상이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집세를 왜 내야 하는지, 세금이 도대체 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에는 그저 돈을 내고 장난감 집을 사는 정도의 이해력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어른들이 하는 활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활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감지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느님은 그보다 훨씬 넓은 크기로 우리를 압도하십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분의 생각이 우리보다 크다고 아무런 이해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서 답을 얻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의 ‘가능’, 아니 그분의 ‘전능’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요? 마리아의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에는 처녀가 임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이라면 유전자 조작으로 가능한 일이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당신이 전능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불가능’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임신한 처녀가 죽지 않고 아내로 맞아 들여지는 사건이었고 그 가운데 일어나는 사람들의 내면의 움직임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더해서 내면의 불가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도 마찬가지입니

투사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덮씌우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투사’라고 표현하지요. 상대는 그렇지 않은데 내가 그렇게 느껴서 상대도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상대는 배가 고프지 않은데 내가 배가 고파서 그가 지금 전혀 다른 생각으로 슬픈 얼굴을 하는데 ‘배가 고파서 저런다’고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의 속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유한 영역을 지니도록 했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보다 깊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의 마음이 투명한 유리처럼 비추어 보인다면 우리는 당장에 상대의 본심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함부로 더러운 생각이나 나쁜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천국은 그러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투명하게 바라보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곳일테지요. 하지만 지상은 상황이 다릅니다. 서로의 마음은 가리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를 진지하게 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우리는 ‘투사’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어둠을 살고 있으면 내 주변을 어둠으로 투사해 버립니다. 상대가 전혀 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은데 내가 이미 악한 생각에 가득 차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악하게 바라보기만 하지요. 남편에게 집착하는 아내, 또는 아내에게 집착하는 남편은 상대를 믿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그런 상상들이 오가고 그런 욕구들이 죽지 못해서 상대를 바라보면서도 절대로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런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닌 것으로 하느님에게 투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하느님이 등장하고, 복수의 하느님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실제 하느님은 지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진정한 본질을 알고 계셨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로, 그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중 누구도 아니었습니다.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반려동물의 위치

우리 볼리비아도 개가 많지만, 유럽도 만만찮게 개가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유럽에서 개는 단순한 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일부’의 수준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개를 입양하는 법이 마련되어 있고 매일 일정 시간의 산책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준수해야 하며, 년간 세금도 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강의와 미사를 마치고 청년들과 간단히 나눔의 장소로 이동하는데 한 청년이 살짝 다가와 묻기도 했습니다. “신부님, 강의 시간에는 질문을 못했는데요. 신부님이 강의 중에 개들에게도 나름의 혼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생물에게는 생혼이, 개들에게는 각혼이, 인간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요.” “근데 천국에 가면 개들과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왜 마치 개들과 인간은 서로 다른 영혼을 지닌 것처럼 말하는 거죠?” 솔직히 말해서 무엇을 묻고자 하는 질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천국에 가서 간절히 원한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사랑하던 개들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니요, 왜 개들과 인간의 영혼에 차별을 두느냐구요.”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드는 느낌에 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 같긴 한데 그래서 개의 지위를 인간으로까지 격상시키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에게 마음을 쏟을 수는 있겠지만 개는 개지요. 개는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본능은 훈련받을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혼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개는 인간처럼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 청년은 썩 개운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 안에 의문이 온전히 해소되지 않은 느낌을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의 모든 의문을 해소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다만 분명히 하나는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개가 참으로 이쁜 것은 이해를 하지만 개가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엄연한 현실이에요.”

위 아래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요한복음의 동문서답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편으로는 합당한 대답을 하는 것이지만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아래와 위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이 세상에 속하고 속하지 않는다는 개념이 무엇인지 유다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위 아래는 흔히 생각하는 위 아래입니다. 위로는 하늘이 아래로는 땅이 있지요. 위로는 구름이 아래로는 흙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하는 위 아래라는 개념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위는 하느님을 말하고 아래는 그분에서 비롯된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창조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자격을 갖춘 이들입니다. 하지만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이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도, 그냥 피조물의 세계에 남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은 가시 세계, 하느님의 은총이 존재하지만 가리워져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살아가고 모든 것을 확실히 감각한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장님들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감지하지 못하고 ‘기호’를 찾지요. 상대의 아름다운 얼굴은 좋아하면서 누군가의 아름다운 마음은 무시하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래의 것을 추구합니다. 더 많은 소유를 원하고, 더 높은 직위를 원하지요. 그렇게 우리는 세상 속에서 더욱 뿌리박히는 셈입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위에서 비롯된 삶을 증거하고 계시지요. 당신은 썩어 없어지는 밀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지요.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세상에 천착해 있는 이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나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내 손이 닿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어린아이라면 나는 학교갈 준비를 잘 갖추면 되고 숙제를 꼬박꼬박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됩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로서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린아이인 내가 세금 걱정을 할 필요는 없고, 가족을 봉양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아가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훗날 자라서 그들을 도와줄 꿈을 키울 수는 있지만 지금 당장 아프리카로 가거나 거액의 기금을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바를 찾아야 합니다. 저는 선교 사제로서 볼리비아의 본당 신자들을 잘 챙기면 됩니다. 본당의 일이 무리 없이 돌아가도록 하고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제가 세계를 구하겠노라고 나서는 것은 저의 만용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해 내어야 합니다. 분명 내 손이 미치는 곳에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을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방치’가 됩니다. 본당에 수도가 터져 물이 줄줄 새는데 누군가 그것을 해 주겠지 하면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의 태만이 됩니다. 나의 가족이 무방비 상태에서 고통을 당하고 다른 그 누구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데 그것을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나태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이 나태입니다. 때로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쉬는 이는, ‘쉼’이라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태함’이 됩니다. 무턱대고 열심한 이를 칭송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뭐든 바빠 보이는 것이 좋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해야 마땅한 일을 해야 합니다. 노는 것이 필요하면 놀아야 합니다. 이 분별을 잘 해내지 못하면 늘 일

간음한 여인의 용서의 과정

명백한 죄 - 간음한 여인은 명백한 죄가 있는 여인이었고 더군다나 그것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심판과 음모 -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도적으로 그 여인을 예수님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여인을 심판도 했지만 단순히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이 참에 올가미에 가두어서 끌어 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여유 -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시면서 시간을 법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들떠있던 마음이 가라앉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장 대답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흥분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온갖 엉뚱한 반응을 보이기 십상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러 그들에게 시간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생각할 거리 -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합니다. 이제 그들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즉각적이고 표면적인 반응이 아니라 ‘생각’한 반응을 이끌어 내시는 것이지요. 두번째 여유 -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번째 생각할 시간을 마련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인에서 예수님으로 옮겨갔고 이제는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평소부터 그나마 깊은 생각을 해 오던 이들, 즉 나이가 많은 이들부터 먼저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용서 - 이제 예수님은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서 그 여인과 단 둘이 마주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유일하게 여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 분, 하느님의 외아들이 그 여인을 용서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과 일종의 ‘피정’을 한 셈입니다.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그들을 흥분한 현실에서 떼어놓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셨지요. 예수님은 피정의 대가였던 셈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단숨에 배우게 되었지요. 나아가 예수님은 고해성사를 집전하신 셈입니다. 그 여인의 산더미 같은 죄를 일순간 용서해 주셨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용서’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하나는 수산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간음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산나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죄함을 입증하고, 반대로 간음한 여인은 명백히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히 용서를 받습니다. 이는 옛 계약 안에서의 죄에 대한 관념과 새 계약 안에서의 죄에 대한 관념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옛 계약 안에서는 ‘무결함’이 중요합니다. 죄가 없어야 하고 죄가 없음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새 계약 안에서는 ‘용서와 자비’가 중요합니다. 죄가 있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옛 계약의 범주 안에서 살아갑니다. 죄는 단죄하고 무죄함은 풀려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들이 오히려 떵떵거리며 살고 무죄한 이들,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은 억압을 당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더욱 ‘억울함’이 쌓여만 갑니다. 도무지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지요. 죄를 지은 그들에게 어떻게든 돌을 던져야 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은 용서하라는 말을 하니 그리스도교는 나약하고 쓸모없는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지요. 하지만 그 처벌을 우리가 사는 동안에 모조리 이룬다는 것은 다른 한 편의 우리의 과욕이고 우리의 미흡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불의를 놓아두지 않는 분이십니다. 제1독서의 수산나의 이야기처럼 하느님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을 들어주시고 그들의 원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범주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넓은 범주일 뿐입니다. 탐욕스런 부자들과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 안에서 어떤 결과가 드러나게 될지 우리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억압 당하는 수많은

껍질과 열쇠

하느님과 우리, 그것이 시작점입니다. 먼저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리고 우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둘의 연관관계를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생각만큼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진한 어린이라면 주는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우리는 이미 살아온 배경에 따라 의심을 시작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그런 의심과 거부는 우리 안에 먼저 쌓여진 것에 따라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가 손에 다이아몬드 원석을 쥐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그 보물은 ‘돌조각’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그 손에 쥔 것을 달라고 하면 순순히 내어 놓습니다.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돌멩이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원석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내어 놓으라고 하면 당장에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을 왜 가지려고 하는지, 이미 내 손에 있는 것인데 왜 빼앗으려고 하는지를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그 돌을 꼭 쥐고 절대로 내어놓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순하고 맑은 마음이 필요한데 문제는 이미 우리의 마음이 어느 한 방향으로 굳어 있어서 먼저 그 껍질을 깨고 나서야 그 안에 들어있는 마음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껍질을 쉽게 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롭고 강렬합니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에 그분의 가르침은 이해되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해될 뿐입니다.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서 ‘그저 좋은 분’ 정도로만 이해를 하지 그분을 진정으로 나의 ‘구세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서 걷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변화’를 요구합니다. 변화하지 않고 나의 지식적 욕구만을 채우는 가르침은 인터넷으

새로운 계약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 31,33) 새로운 계약은 외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보다 내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입니다. 새로운 계약의 대상자들은 이미 하느님의 법을 마음 속으로 간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마치 자석과 같이 하느님의 뜻이 향하는 곳을 향해 절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온전히 자유로운 자들이라서 누군가 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것 없이 저절로 하느님을 향해서 달려가게 됩니다. 나방이 불을 보면 달려오듯이,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서 강의 상류로 나아가듯이 하느님의 법을 내면에 품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고 하느님에게서 반대되는 것들을 떨쳐 놓게 됩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예레 31,34) 밥을 먹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배고픔을 느끼면 자연스레 입으로 뭔가를 집어넣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법을 내면에 간직한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서 억지로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스스로 하느님을 찾아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것을 역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법이 들어있지 않은 이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내면에 하느님의 법이 없어서 그냥 두면 자신들의 욕구를 따라가는 사람들이고 제 하고 싶은대로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고 그것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세상의 우두머리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요한 12,31) 세상의 우두머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을 거머쥐고 있는 가장 큰 우두머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움직이는 방법을 바라보면 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일까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 분별을 위해서는 많은 ‘부차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그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많은 것들을 겪고 결국 같은 곳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지요. 인간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탄생 이후의 순간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은 ‘생존’을 위한 것이 기본입니다. ‘살아 남으려는 노력’인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살 의욕이 없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서서히 죽어갈 것입니다. 아니, 잠깐 숨만 참아도 머지 않은 시간에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나아가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제 아무리 화려하고 다양한 모습의 부차적인 활동이 있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삶’을 위한 추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죽음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행위들을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왕도 죽고 학자도 죽고 유명한 시인도 결국엔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보다 분명한 어조로 우리에게 감지할 수 있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죽음의 위협과 공포는 은근하면서도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활동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부산히 움직이는 것이지요. 죽음은 그것을 알고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수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살아가면서 괴로운 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첫 숨을 들이키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인간에게는 ‘괴로움’이 늘 함께 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괴로움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괴로움을 다루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회피와 수용입니다. 회피 - 피하는 것은 괴로움을 없애는 ‘빠르고 쉬운’ 방법입니다. 숙제를 하기 싫어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숙제를 면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에 익숙하며 그래서 고난이 생기면 가장 먼저 이 종류의 방법을 떠올립니다. 용서와 사랑을 마주해서도 마찬가지이니 참된 용서와 사랑은 우리에게 굉장한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회피하는 방법으로 ‘증오’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수용 - 고난을 정면으로 대하고 그것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에서 다가오는 고난들을 우리가 나서서 끌어안아 버리는 것이지요. 숙제가 다가오면 숙제를 묵묵히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면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정면으로 다가설 때에 우리의 능력에 따라서 견뎌낼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숙제를 하다가 하다가 다 못할 수도 있고,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시도하다가 시도하다가 결국 이루지 못하고 나 자신의 무능력에 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시도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 안에 힘으로 축적됩니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는 보다 나은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지요. 예수님은 당신 앞에 다가오는 수난의 시간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지요. 당신이 최종적으로 끌어안은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을 얻게 되었고 당신이 정복한 영원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난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율법을 모르는 이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요한 7,49) 이 말은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르치는 참된 진리의 길을 모르는 이들은 스스로를 저주하는 자들입니다. 헌데 역설적이고도 재밌는 사실은 이 말을 진정 그것을 모르는 이들이 내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말하고 행한 것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꺼내는 모든 말과 행동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와서 우리를 심판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웃을 함부로 다루면 결국 우리 자신도 함부로 다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면 우리도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이웃을 보듬고 이해하고 사랑하면 그 역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모르는 이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사실 이 말을 하느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저주가 머지 않아 그들 자신에게 쏟아져 내릴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모르는 자들에게 당신의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당신 아들을 보내시는 사랑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바리사이들이 정말 군중들이 율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더라면 그 율법을 알고 있는 자신들이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을 모른다고 저주를 쏟아 부었고 결국 그 저주는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율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율법은 ‘행동지침’이 아니라 ‘근본 방향’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율법’이라는 이름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실제적으로 강조한 율법은 자기들 멋대로 해석된 행동지침에 불과했습니다. 참된 율법은 ‘사랑’을 모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율법을 모르는 이들은 그들 자신들입니다. 잘 배우고 학식이 뛰어난 그들 자신이 바로 율법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진실한 영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한 7,46) 성전 경비병들이 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성을 직감한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분의 내면에 깃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깃든 사람은 말하는 것이 남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산하여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실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따로 무언가를 꾸며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떠오른 말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자연스럽고 우리의 영혼은 그 자연스러움을 바로 분별해 냅니다. 반면 꾸미는 이들의 말은 화려합니다. 그들은 가능하면 자신이 말하는 것을 숨기는 것이 좋습니다. 밑천이 드러나면 자신의 내면의 빈약함을 들켜 버릴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문적인 용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자신들이 하는 말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깃든 사람은 핵심을 집어냅니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말을 듣는 상대가 최대한 빨리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살게 함이 목적입니다. 꾸미는 이들은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들은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래서 더욱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진리가 전해지는 것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초조해집니다.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자신들이 딛고 서 있던 ‘위선의 상아탑’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그들은 결국 계략을 꾸미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진리를 말하는 이를 공략하여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말과 논리로 시도하다가 안되면 ‘무력’이라도 기꺼이 행사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은 그렇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이들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7,53) 그들은 같은 곳에서 온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각각의 집에는 그마다의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서로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기호가 맞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 서로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의롭고 선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한 데에 모였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따로따로 떨어져 돌아갑니다. 파괴하는 자는 외롭습니다. 그런 이들이 모인 자리는 같은 목적을 위해서 움직일 때에 마음을 모으지만 결국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기심’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저마다의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모으는 자들은 출신이 모두 같습니다. 그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밑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같은 곳으로 와서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이 지상에서 서로 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느낍니다. 다른 이가 아프면 마치 자신이 아픈 것처럼 느낍니다. 그들은 내면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남남이 아닙니다. 서로 따로 떨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 그들은 또다른 공격 대상이 있으면 서로를 위해 연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서로간의 연합은 지극히 일시적인 것이며 영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연합 근거는 ‘거짓’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시기가 다가오면 서로 싸우기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를 공격하고 상스러운 말을 쏟아붓고 나아가 서로를 죽이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운명입니다.

출신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50) 사람들이 ‘학위’를 따려는 이유는 그것이 일단 고정된 형태로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학위는 마치 보석과 같습니다. 언제라도 그것을 보유하고 있으면 그것의 고정된 가치를 해 내는 셈이지요. 하지만 진정으로 공부를 즐기는 사람은 매 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도전거리를 즐깁니다. 그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학습하는 것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요. 그에게는 ‘학위’는 상관이 없는 셈입니다. 학위라는 것은 배움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표식에 불과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도 ‘학위’와 같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공인할만한 신앙적 학위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언가에 가입해서 거기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는 것을 자랑스레 여기지요. 단순히 레지오를 참여해서 그 모임 자체의 신앙적 의미를 되새기는 게 아니라, 레지오의 간부가 되고 레지오의 상위 단체에 올라 감투를 쓰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꾸르실료에 들어가서 연수를 받는 것을 마치 아무나 갈 수 없는 해병대 캠프를 다녀온 듯이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파스카 청년 성서 모임에서 보다 상급의 과정을 수료하고 그 연수를 다녀오는 것을 자랑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 그 자체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을 위해서 각종 신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그 프로그램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세상적 이득을 위해서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비슷한 노력으로 같은 명성의 효과를 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 다른 프로그램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실제로 하는 말과 그의 삶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내세우는 ‘외적 표지’를 보고 그를 분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황실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

눈 먼 자들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지혜 2,21-22) 악은 한 사람을 눈멀게 합니다. 우리가 대낮에 눈을 가리면 마치 한밤중에 길을 다니는 것처럼 조심 조심 걸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이 가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는 함부로 걷다가 주변의 사물들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눈을 뜨기 위해서 ‘진리의 빛’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을 감아버리고 진리의 빛에 둔감해 집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여러가지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자꾸 주변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영적으로 장님입니다. 그는 ‘온유’와 ‘겸손’이 부족한 사람이라서 충돌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변 사람들이 모두 틀려먹어서 자신이 정말 잘 하고 있는데도 충돌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본인의 눈을 떠야 하는 것을 모르고 타인에게 모두 탓을 돌리고 정반대로 자신의 교만에 불을 지피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이 흔히 강조하는 것이 ‘외적인 신심’의 중요성입니다. 그들은 내적 충만함이 없기에 외적인 충실도로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외적인 조건이 하느님에게 합당하다고 우겨대고, 또 여러가지 신심 행위의 양으로 자신의 신앙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기도를 얼마나 하는지 이런 저런 교육 과정을 수료했는지, 나아가 ‘신학 학위’가 있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은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장님 상태에 있습니다. 마치 엄청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닥달하고 못살게 구는 이들인데도 스스로는 마치 ‘예언자’인양 착각을 합니다. 오,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분의 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7,30) ‘그분의 때’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모든 것에는 적절할 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열매는 추수의 때가 오지 않으면 추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적절한 ‘시기’가 있어서 그 시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때를 채우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기는 때가 차지 않으면 뛸 수 없습니다. 아기는 무수한 시련의 시기를 통해서 자신의 다리를 조금씩 단련시켜야 하며 결국 일어나 걷게 되고, 나아가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장의 과정은 아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이런 때를 무시하고 영광스러운 열매만을 탐낸다고 해서 그가 그것을 결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가 얻는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새로운 신발을 사는 때는 그가 적어도 옷에 흙을 묻히지 않을 수 있을 때이어야 합니다. 흙바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이에게 새로운 신발을 선물한다고 해서 그가 그 신발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제 수준에서 그 신발을 대할 뿐입니다. 이제 겨우 바이엘을 치는 아이에게 거장의 피아노 악보를 선물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그 선물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갈구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 스스로 그런 은총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련’은 준비된 이들의 특권입니다. 내가 야기하는 죄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나에게 아무런 죄도 탓도 없는데 나에게 다가오는 시련들은 하느님의 사랑의 표지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이런 시련과 고통을 앞에 두고 하느님을 원망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매번 시험해 보십니다. 과연 우리가 다음의 시련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십니다. 마치 찜통 안에 넣어둔 감자를 젓가락으로 찔러 보듯이 우리

그분이 오신 곳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안다고 하지만 알지 못합니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그들은 아는 것만 알고 보다 중요한 것, 알아야 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자렛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내면’을 식별하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의 외적 출신만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바라보는 것은 그의 ‘외모, 학력, 고향, 경제 수준’ 등등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하고 딱히 관심도 없습니다. 물론 뒤늦게 그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서 알게 되어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의 본질을 낮춰 보았다가 가로늦게 그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을 알아뵙고 찬미를 드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이미 여러번 우리 가운데 계셨고 우리는 그분을 무시하거나, 몰골이 흉하다고 생각하거나, 더럽다고 생각하거나,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분을 외면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만나는 상대의 내면을 분별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그의 외모를 바탕으로 벽을 쌓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그나마 먹히는 이유는 ‘사제’라는 외적 조건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 제가 볼리비아의 원주민 청년 모습 그대로 다가갔더라면 저는 무시당하고, 기피당하고, 심지어는 ‘동남 아시아’라는 별명과 더불어 조롱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는지 안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분을 분별하지 못하며, 그분의 제자들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이들을 따르고 추종합니다. 세상에서 지니고 있는 뛰어난 재주 하나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드높이면서

축일의 진정한 주인

한국에는 사제들의 생일보다는 축일을 축하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근본 의미는 축일의 성인을 본따 거룩한 사제가 되라는 것이겠지요. 물론 사제 만이 아니라 다른 신자분들도 축일을 축하해 주는 것이 한국 가톨릭 안의 관례입니다. 하지만 유독 사제들은 생일보다는 축일을 챙겨주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하지만, 축일을 축하하는 의미는 축일의 이름의 원 주인인 성인의 거룩함이 그 세례명의 당사자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가령 저는 ‘요셉’ 성인이 제 세례명의 주인공이니 저는 요셉 성인처럼 어떤 역격 안에서도 공동체를 향한 책임을 지고, 나아가 사랑 가득한 의로움을 지닌 사제가 되어야 비로소 그 이름에 합당한 존재가 되겠지요. 물론 부족함은 늘 있을테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결국 축일은 그 성인의 거룩함을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그 성인 마저도 하느님이 은총을 부어 주시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니까요. 결론적으로 축일의 원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축일을 계기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그 사제의 필요를 챙기는 것은 아름다운 관행입니다. 하지만 마치 사제 본인이 그 축일에 신자들로부터 마땅히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는 그 날에 신자들로부터 무언가를 은근히 바라고 신자들은 사제와의 개인적인 친분에 따라서 그 날이 다가오면 부담을 느끼는 날로 변해버렸지요.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모든 축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축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찬미 받아야 하며 우리는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종들일 뿐입니다. 사랑이 깃들지 않은 채 억지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세금에 불과합니다.

한국을 떠나며…

아마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선교 사제는 휴가를 어떻게 보내고 또 떠나면서 어떤 감흥일지 말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적어 보렵니다.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한국은 자연이 참 아름답습니다. 한국은 인심이 참 아름답습니다. 한국은 아름다운 언어가 있고, 아름다운 문화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한국 사람인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이야말로 저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한국은 미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너무나 정신없이 바삐 살고, 지나치게 소비하고,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짐은 이미 보이고 있지요. 자연은 망가지고, 마음도 망가지고, 말도 망가지고, 문화도 망가지는 조짐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자연보다는 회색 도시가 많이 들어섰고, 사람들의 마음에 따스한 정보다는 매서운 바람이 느껴지며, 언어는 새로운 말들이 마구 뒤섞여 이해가 안되고, 소모적인 문화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많이 외치고 다녔습니다. 저야 가톨릭 사제이니 당연히 하느님을 회복하자고 외치고 다녔지요. 왜냐면 저는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가운데 계시면 모든 것은 치유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가는 곳마다 하느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물론 모두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입도 뻥끗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제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기를 더 바랬으니까요. 그래서 듣기도 많이 했습니다. 들어주는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차분하게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이면에 내적인 가치를 잃어가는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배가 고파서 감사히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무얼 먹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나 자

부유한 가난뱅이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초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난'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발에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뿌리는 것도 받아들이셨지요. 진정한 '가난'의 의미에 대해서 되새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구도를 현실적 잣대로 적용시켜서 부자들을 공격하게 되고 가난한 자들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게 됩니다. 제가 부유한 이들과도 또 가난한 자들과도 살아본 경험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모조리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역으로 ‘부유함’이 무조건 죄악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문제는 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부유함을 어떻게 모으고 있고, 그 가진 부유함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 축복을 받는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현세적인 축복에 대해서 거부하신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라고 해서, 판잣집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면죄부를 받고 무조건 신앙인의 섬김이 되어야 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도 자신의 선택의 여지는 분명히 존재하며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 주어야 합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들의 권익을 위해서 정의로이 맞서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측을 그 자체로 ‘악’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이나 사회 권익에서 소외된 이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피폐한 이들 모두를 가서 보듬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부자도 가난한 이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지요. 예수님은 의로운 이들이 아니라 죄많은 이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만날 권리가 있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만난 분들은 부유한 가난뱅이들이 많았습니다

개와 돼지

볼리비아에서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갔는데 거기에 다른 곳에서 초대받아 온 사람이 있었지요. 헌데 나름 신자였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동양인이지만 신부라는 것을 알고 다가와서 비아냥 거리는 투로 말을 건넵니다. “신부님, 신부님들도 술 잘 마시던걸요?”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저는 신부님들이 어느 생일 축하 자리에서 맥주를 많이 마시는 걸 봤어요. 그리고 아가씨들과 어울려 춤추는 걸 즐기더군요.” 한순간에 그의 의도를 파악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냥 그렇게 속이 꼬인 사람이었지요. 뭔가를 개선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빈정대고 비웃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웃으면서 ‘아 그래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고 차분하고 정중하게 대답하고는 그 자리를 마감하고 돌아왔습니다. 속이 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단순히 눈 앞에 있는 대상이 곤혹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이들은 좋은 가르침도 먹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도저처럼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지요. 좋은 것을 주면 그것을 물어 던지고 좋은 것을 주는 이를 공격해 들어오는 이들입니다. 진주를 모르니 진주를 주지 말아야 할 돼지들과 같지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6) 그들은 스스로 ‘지옥’과 같은 환경을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주변 사람들의 괴로움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 자들이지요. 그러니 그런 자들이 모인 곳은 ‘지옥’과 같습니다. 그들은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외모로 서로 모여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 자기 자랑이거나 누군가를 향한 공격일 뿐입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척을 할 뿐이지요.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감을 잡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알고 있

표징과 이적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눈으로 드러나는 피상적인 것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맡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 수준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중요한 유리 공예품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함부로 다루는 이들과 비슷합니다. 자칫 조금만 잘못 다루면 유리 공예품이 깨어지게 됩니다. 헌데 참으로 소중한 영혼의 가치인 믿음을 ‘보이는 것’에만 맡기니 그들은 속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다행하게도 성경 안에서 드러나는 표징과 이적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서 속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안심하고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는 ‘속이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표징과 이적이 일어날 때에 올바른 분별이 없으면 속아 넘어가기 쉽고 전혀 엉뚱한 길을 가게 됩니다. 하늘에 구름이 생겼고 내가 그것을 보았다고 해서 내가 이튿날 나에게 힘든 일을 청하는 형제를 갑자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일은 없습니다. 기적을 육적인 감각으로 느낀 이들에게 일어나는 회개는 냄비에 물이 끓는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젊은 시절 성경 공부 연수를 2박 3일로 다녀오면 청년들은 온 세상을 구원할 것 같지만 그 열성은 불과 얼마 가지 못하고 식어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그들이 전혀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기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우연’이라고 불러 버리지요. 길가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왜 나에게 다가왔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과 관계 안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나 자신의 배우자에게 부정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는 상황이 최악입니다. 둘이서 좋아서 자유의지로 동의를 하고 결혼을 했음에도 왜 그가 내 곁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변이 180도로 변화되기를 기다리면서 그것이야말로 ‘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그렇게 했다간 자녀를 망치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바람직한 것을 좋다고 하고, 그릇된 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 신경을 써서 바람직한 것을 좋다고 하면서도 지나치게 지나치게 우쭐하지 않게도 도와주고, 그릇된 것을 나쁘다고 하면서도 그가 거절당하고 내치이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섬세한 작업입니다. 마치 ‘수술’과도 같습니다. 인체에 존재하는 종양을 떼어내되 다른 장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종양만 깔끔하게 떼어내고 다른 장기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간에 붙은 종양을 떼어낸다면서 멀쩡한 췌장을 다치게 하면 도리어 역으로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일을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종양’을 떼어낸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들은 종양을 떼어내기 위해서 활동하는 것은 적어도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양산하는 부산물들입니다. 그들은 사회 안에, 교회 안에 종양을 떼어내겠노라고 나서면서 다른 것들을 마구 건드려 놓습니다. 멀쩡하게 활동하는 것마저도 모두 다치게 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희생이었다’라고 우겨댑니다. 교회를 향해서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마저 다치게 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기보다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사제들의 못난 모습에 그에게 가서 쓴소리를 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까발려서 마치 모든 사제들이 다 똑같다고 해버리는 것은 다른 성실한 사제들을 힘겹게 하는 일입니다. 수술이라는 것은 숙련된 의사가 해야 합니다. 초등학생이 자기 컷터칼을 들고 수술하겠다고 나서다가는 사람잡기 십상입니다. 특히나 영적인 면에서 의사는 ‘사랑’이 없으면 그는 숙련도가

새 하늘과 새 땅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이사 65,17)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서 성경 안에서 묘사된 것들이 모두가 진실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은 같은 말 같지만 다릅니다. 사실은 우리가 지금 두 눈으로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고, 진실은 진리의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한 사람을 두고 ‘그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라고 말하면 그건 사실이고, ‘그는 약속을 하면 지키는 사람이야.’라고 하면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진실이 많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서에서 표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쁨, 즐거움,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집), 수고와 열매’ 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맛있는 과자를 먹을 때 기쁜 이유는 그 과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자의 입안에서의 맛은 ‘쾌락’일 뿐입니다. 그것은 금방 사라지는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과자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과자가 정말 맛이 있지만 내가 누군가와 싸우고 난 뒤라면 나는 그 과자 봉지가 내 곁에 있어도 씩씩거리면서 쳐다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쾌락이 아무리 강해도 내 마음의 기쁨은 그 쾌락 자체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것에 더 좌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이런 기쁨이 가득한 곳이 됩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사랑이 가득한 곳, 서로가 서로의 아쉬움을 보살피고 돌보는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처럼 누가 누구를 욕하고 험담하고 공격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훈련받은 이들’이라서 기본적으로 상대를 해친다는 개념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고유한 공간(집) 하늘나라가 모두를 한데 집어넣은 도떼기 시장과 같은 곳으로 착각해서

구원의 가치?

우리는 흔히 너무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남용한 나머지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되새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석을 너무나도 자주 곁에 두고 바라본 나머지 그 의미에 대해서 무디어지게 된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근본에는 ‘영적 시각의 상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화려한 외부 포장지만 볼 줄 알았지 그 안에 든 것의 실제 가치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나비의 날개짓의 황홀함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고, 어머니가 해 주는 사랑 가득한 밥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서 그 책임감에서 오는 안정감을 굳이 생각하지 않고도 느끼고 즐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유혹이 있었지만 유혹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의 소중한 가치를 저버리고 세상이 주는 달콤한 것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완벽한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유혹에 시달리고 유혹에 빠져본 경험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잃을 위험에 처할 때에 비로소 구원의 가치를 알게 되는 아이러니가 일어납니다. 세상 것에 만취해서 누릴 것을 다 누린 후에 결국 자신에게 주어져 있던 구원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면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습니다. 하지만 만취한 사람이 다들 그렇듯이 토한다고 정신이 없고 다시 새로운 쾌락을 찾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현대인의 일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만취상태입니다. 광고 카피는 계속해서 우리가 세상 것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우리를 붙들어놓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구원의 가치를 담은 저작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나머지는 거의

심판에 대한 착각

사람들은 심판을 마치 하느님이 꽁한 사람이라서 앙심을 품고 있다가 나중에 모아놓은 나쁜 행동 목록을 들이대면서 착한 행동 목록에 비교해서 나쁜 행동이 더 많으면 지옥으로 가두어 버리는 식으로 착각합니다. 즉, 원래는 나쁜 이들이 ‘지옥’이라는 곳에 가기 싫은데 하느님이 억지로 가게 만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이 좋아서 지옥을 찾아갑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미워하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빛을 그들을 위해서 약간은 가리워 주시는 셈이지요. 차분히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 3,19-21) 사실 이 안에 모든 설명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합니다. 그래서 어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사람은 자신의 몸을 감출 곳을 찾습니다.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럽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헐벗은 사람, 영적으로 내세울 덕목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숨기에 바쁜 것입니다. 물론 그의 지상생활은 화려함과 부유함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이 드러나야 할 시기가 오면 그는 숨기에 바쁜 것이지요. 조금만 더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영혼에게 있어서 아주 강렬한 빛입니다. 빛을 즐기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우리는 빛이 다가올 때에 바퀴벌레마냥 도망치기 바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좋다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고 입으로 주절댈 수 있지만, 실제 하느님이 다가오시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서 나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칠 곳을 찾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이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요한 3,19)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는 요한 복음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요한 복음만이 아니라 우리 삶을 성찰하는 데에도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무엇이 빛일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빛이 됩니다. 그분의 선과 진리, 정의, 순수함, 정결함… 모든 것이 빛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어둠’을 형성합니다. ‘돈’은 빛일까요, 어둠일까요? 이런 상투적인 질문에 우리는 쉽사리 돈을 하느님의 반대편에 놓아 버리고서 ‘나쁜 것’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하지만 돈은 ‘칼’과 같습니다. 그 자체로는 빛도 어두움도 아닙니다. 다만 그 쓰임새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마치 의사가 칼로 사람을 구하면 그 칼은 생명의 도구가 되고, 강도가 같은 칼로 사람을 죽이면 그 칼은 죽음의 도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악하게 또는 선하게 이끌어 가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자유의지인 것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더 들면 다음과 같은 것도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무조건 ‘선’인 것처럼 간주됩니다. 공부를 잘 하고 열심히 하고, 공부를 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에요. 공부를 강요하는 근본 목적에 하느님의 방향, 즉 진리와 선과 사랑이 들어있지 않는 이상 ‘공부’라는 것은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간의 불화를 야기시키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숨통을 막는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지요.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의 반대편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인간만이 ‘죄’라는 걸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죄를 짓지 못하고, 강아지가 죄를 짓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 마음 근본 방향을 하느님에게서 반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은 하느님과 반대 방향으로 서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선교사 단상

우리는 타인의 가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게을러서 그런 것이고, 그들의 문화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우월감을 자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유한 이들의 대부분의 소유가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할 몫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달에 같은 시간을 일하면서 누구는 수백만원을 벌고, 누구는 십수만원을 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이미 갖추고 누린 것은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난한 지역의 선교사가 가면 사람들은 ‘가난’에 대해서 그토록 듣고 싶어합니다. 그들의 궁핍함에 대해서 듣고 싶어하고, ‘고생스러움’에 대해서 듣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궁핍하고 고생스러움을 들어야 지금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 정상이 아닙니다. 이건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비교문화’입니다.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비교하고, 내 남편과 남의 남편을 비교하는 일종의 병적 문화입니다. 그래서 선교사의 궁핍한 체험을 듣고는 지금의 자신의 삶과 비교하여 문화적 우월감을 누리고 싶은 거지요. 그러한 선교사의 체험이 역으로 자신에게 만족스러움을 체험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선은 ‘사랑’에서 비롯되어야지 거지 동냥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사랑하기에 그가 필요한 것을 도와야 하는 것이지,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하듯 그가 불쌍해서 내가 다 먹고 남는 것 중에서 떼어 던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선교사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제가 일하는 곳의 친구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나아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지요. 그리고 제가 바라보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한국이 얼마나 부유하고 그 부가 사람들의 심성을 파고들어 영적 삶을 갉아먹고 있는지를 말하지요. 들을 사람은 듣고 듣지 않는 사람은 알아서 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바닥을 쳐 본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의 깊이를 체험합니다.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도망가본 사람은 하느님의 선의 범위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돌아와야 알 수 있지요. 그대로 멸망해 버리고 나면 알 도리가 없는 법입니다. ‘돌아섬’, 즉 ‘회개’는 죄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이 회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하느님을 모욕한 죄인들이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한 죄인들은 자신들이 엇나갔던 만큼 돌아서서 역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헌데 우리 중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지요. 자신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공통적인 증상은 바로 타인을 향한 ‘심판’입니다. 의로워야 심판을 합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심판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먼저 떳떳해야 합니다. 자신도 거짓말을 하면서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때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신도 못된 짓을 하면서 아이가 못된 짓을 한다고 꾸중하는 것만큼 위선적인 행동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 중에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남을 심판하면서 남을 업신여기지요. 물론 겉으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은근히 ‘우월감’을 느낍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저렇지 않아.’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각하는 이들의 도덕적 우월감이 그들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의 오류를 전혀 바라보지 못하게 하지요. 그렇게 닫힌 눈으로 더욱 극심하게 타인들을 재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의 ‘의로

너의 모든 것을 원한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호세 6,6)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성경 안에서 꾸준히 등장합니다. 호세아 예언서에도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의’이고 ‘예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희생 제물과 번제물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뭔가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내다 바치고 손을 터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것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은 내가 벌어야 하는 것이라서 결국 나의 노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머무르기 쉽게 됩니다. 즉 마음은 없이 내어 바치는 행위로 끝나버릴 수 있지요. 보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것’은 여전히 나의 것이고 그 가운데 ‘하느님의 몫’만을 내어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하느님이 분리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신의’와 ‘예지’는 내가 전체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나의 내면이 변화해야 ‘신의’에 이를 수 있고, 하느님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온전히 알 때에 비로소 ‘예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신의와 예지라는 것은 결국 나의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봉헌하는 것을 말하지요. 여기에는 나의 것과 하느님의 것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시간은 나의 시간, 하느님의 시간은 그 중 일부를 떼어줌, 나의 것은 나의 것 하느님의 몫은 그 중 일부를 떼어줌… 이런 분리가 결국 하느님과 우리를 떼어놓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 중의 일부만을 내어 놓으려는 구두쇠 심보를 지니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후회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내어바쳤어도 모자랐으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몫으로 쥐려고 애썼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허무한 것이었음을, 그것을

구체적인 사랑

저는 볼리비아 아이들을 기억해 달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거리가 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특별히 마음을 써서 기억하지 않는 이상, 잠깐 마음에 들어온 그들은 결국 사라져갈 것입니다. 제가 청하는 것은 ‘선의’를 잊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모양새로 다가오던지 그들을 향한 ‘구체적인 실천’을 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모양새가 없이는 마음 속에서 피었다가 스러지는 풀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피어나야 하고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구체적인 대상이 필요합니다. 머나먼 나라의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좋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확장되어 가고 뜨거워진 난로가 비로소 온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스스로 뜨거워질 수 있다고 광고하더라도 열기를 지니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의 때는 바로 지금이며, 바로 여기가 그곳입니다.

영혼들의 상호 연계성

우리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이들과 상호작용을 주고 받습니다. 미친듯이 욕을 해대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정상일 리가 없고, 정반대로 이웃에게 따스한 미소를 건네고 남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그런 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나 무죄한 아이는 마치 말랑말랑하게 녹아 있는 초와 같아서 어른이 누르는 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국이 남게 되지요.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으면 그렇게 남게 되고, 추악한 것을 새겨 넣으면 그대로 남게 됩니다. 물론 회복도 가능합니다. 미움으로 다친 마음은 사랑으로 회복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었는데 아주 더러운 경험으로 전체 그림을 망쳐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하는 말 한마디, 내가 보여주는 실천 하나가 이미 다른 이들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심코 던지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반대로 내가 하는 선한 말, 아름다운 말과 행동은 상대를 치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나쁜 것을 던지면서도 그에게 주먹질을 하지 않았으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돌심장을 지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관계, 하느님께서 날더러 그의 도움이 되라고 소명을 주신 관계가 아닌 이상은 가능하면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편, 자녀, 부모와 같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왜 그런 이를 주변에 두셨고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침묵의 언어

침묵이야말로 위대한 언어입니다. 오직 침묵 속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침묵은 단순한 외적 침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침묵’, 바로 영혼의 고요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침묵의 공간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침묵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존재하고,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침묵을 흐뜨려놓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진지하게 침묵에 잠겨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시끄러웠고, 또 소란을 찾아 다니곤 합니다. 스마트폰을 침묵과 더불어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마트폰을 침묵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외적 환경이라는 것은 사실 부차적인 것입니다. 근본은 우리의 내면에 무엇을 선호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침묵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 때, 그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불안해지는 사람은 하느님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산함 속에서도 무언가를 생산하는 효율적인 활동을 할 수는 있지만 내면의 가치를 점검하는 일은 ‘침묵’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침묵하는 이는 정진하게 됩니다. 가능하다면 외적 고요 속에 머물면서 나아가서 내면의 고요 안에 잠겨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안에서 ‘새로운 공기’를 들이키게 됩니다. 하느님의 평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새로운 공기는 그의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고 나아가서 그의 영혼이 감담하기 힘들었던 일을 지고 나갈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영혼이 준비된 사람은 외적인 시련을 이겨냅니다. 반대로 영혼이 무너진 사람은 외적으로 안녕을 미친듯이 갈구합니다. 외적 안녕의 상징은 돈과 권력과 명예입니다. 내적으로 충만한 사람은 이러한 것들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적으로 피폐한 사람은 이러한 것들만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에 이러한 것들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쉬운 표현이지만 그렇게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잡

탐욕의 수렁에 빠져든 영혼의 운명

개의 눈에는 개에게 필요한 것이 보입니다. 개가 신상 핸드백을 원하거나 고급 자동차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그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시도 자신의 수준에 따라서 필요한 것을 찾게 됩니다. 인간이 세상 사물을 원하느냐 보다 상위의 것을 원하느냐 하는 것은 그 인간의 내면에 있는 영혼의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기본적으로 바라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아닙니다. 영혼은 육체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다음 작업에 착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우리는 ‘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를 바라지요. 물론 사람인지라 잘 입기도 해야 합니다. 몸이 따뜻하게 유지될 정도로 말이지요. 그렇게 몸이 안정되고 나면 그 뒤로부터는 영혼이 본격적으로 원하는 것에 착수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먹고 자고 싸고 입고 하는 것에 자꾸만 얽매이는 영혼이 존재합니다. 바로 영혼 안에 ‘탐욕’이 깃든 영혼들입니다. 이 영혼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더 잘 먹고자 하고, 더 좋은 집에서 자려고 하고, 더 잘 입고자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진보해야 할 시기에 다시 한바퀴를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못이 한바퀴를 돌아 더 깊게 박혀 버리듯이 영혼이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박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의 탐욕이 생겨납니다. 이미 옷이 2벌이나 있는데 3벌을 원하기 시작합니다. 차가 있는데도 더 좋은 차를 원하고, 집도 더 큰 집을 원하지요. 그렇게 나사못은 다시 한 바퀴를 돌아 더 깊이 박혀 버리는 것입니다. 탐욕의 수렁에 자꾸만 빠져들어가기 시작하는 만큼 영혼의 진보는 없게 됩니다. 이 영혼은 사랑하고 이웃과 나누고 기뻐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자신의 육적 안녕을 더욱 보장하기 위해서 허비하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그의 영혼의 어두움은 더욱 깊어만 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은 뻔합니다. 모든 영혼이 추수되는 그날 이 나사못도 뽑혀 버리게 되

아이의 성장

얼마전 아버지와 일본을 여행하다가 길가에서 이상한 나무를 하나 만났습니다. 나무가 아직 많이 어릴 때에 둘레에 쇠로 울타리를 쳐 놓은 모양이었습니다. 나무가 점점 자라면서 그 쇠 울타리를 향해서 가지를 뻗다가 울타리가 있으니 그것을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그 울타리 주변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었습니다. 아이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본래의 모습대로 자라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이를 억누르거나 윽박지르거나 부모의 요구를 강요하기 시작하면 아이는 ‘비틀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목소리가 크고 철이 없는 부모는 마치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이가 원하는 것인양 착각을 하고 아이에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주입’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대부분 ‘돈을 잘 버는 것’에 집중해 있고 정작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서 또 그것을 찾는다고 무리하게 어린 아이에게 이런 저런 취미 생활을 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아이가 원하는 것을 찾아주기 위함이 아니라 이웃집 아이들이 모두 하기에 거기에 꿀리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즉 부모, 특히 어머니의 탐욕인 셈이지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아버지는 일을 하느라 아이를 만날 기회조차도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부모의 경제력에 따른 부산물이 되고 말지요. 집에 돈이 많은 아이는 좋은 학군에 좋은 지원을 바탕으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아이는 그저 그런 대학에 들어가 결국 사회 안에서 자신의 수준에서 허락된 곳에 안착하게 됩니다. 아이가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아이가 필요한 것은 따스한 사랑과 애정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분재는 아름답지만 가공된 아름다움입니다. 마음껏 자라날 수 있는 나무를 온갖 철사로 꽁꽁 묶어서 제가 원하는 모양새로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 모양새가 과연 하느님께

시선이 미치는 범위

사과를 겉만 본 사람에게 사과는 알록달록한 색입니다. 빨갛거나 파랗거나 노랗거나 하지요. 하지만 속을 본 사람들, 또 속을 맛본 사람들에게 사과는 하얀 속살이 있는 새콤달콤한 과일입니다. 거기에 안에 씨도 있지요. 한 면만 보는 사람에게는 한 면만 보입니다. 여러가지를 함께 보는 사람이 비로소 올바른 시선을 갖추게 되지요. 여러면을 보게 된 사람은 한 면만 보는 사람의 시선이 좁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나아가서 자신보다 더 많은 면을 볼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지요. 그래서 자연 겸손해집니다. 그것이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전능과 위대성 안에서 인간은 자연스레 ‘겸손’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람들에게, 특히나 한 면만 보고 있는 편협한 사람들에게는 ‘순진성’으로 내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협함에 사로잡혀 자신보다 시선이 넓은 이를 두고는 ‘편협한 시선’을 지니고 있다고 세상을 순진하게 살아간다고 착각하지요. “신부님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신부님이 우리 사는 거에 대해서 뭘 알겠어요?” 그렇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알고 있지요. 저는 모른다는 것을 압니다. 반면 자신이 모르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의 손길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예레 7,25) 우리는 예수님 시대에 일어났던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났더라면 적어도 우리는 마음을 바로 세우고 예수님을 뒤따랐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분의 기적을 체험했더라면 분명히 뭔가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의심하는 마음은 만일 그 일을 그대로 보았다 하더라도 의심할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의 전말을 잘 알고 있기에 그분을 당연히 알아볼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지금의 시대에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시대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악습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와서 그 악습을 그만두라고 조언하는 이는 바로 예수님의 사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악습을 당장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을 쉽게 무시하고 마는 것이지요. 담배를 피는 사람에게는 담배를 끊으라 하고,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는 술을 절제하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말들을 귀담아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돈을 밝히는 이에게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 하고, 명예를 탐하는 이에게는 진정한 명예는 하느님으로부터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권력의 개가 되어가는 사람에게는 오직 하느님에게만 순종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가르침을 너무나도 쉽게 무시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악한 행실을 유지합니다.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지만 ‘악’을 선호합니다. 미워해서는 안되고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증오에 빠져 살아가고, 남이 잘 되는 것에 마음을 다해 기뻐하기보다는 시기와 질투로 그를 험담할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매번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그런 그의 악습을 충고할 방법을 찾아 사람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그 예언자들을 매번 거

힘센 자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루카 11,21-22) 힘센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가 가장 간절히 의지하고픈 대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입니다. 다른 말로 ‘돈’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요. 사람들은 돈에 의존합니다. 뭐든 돈으로 다 귀결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신기술이 나오고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돈’이 있어야 사볼 수 있습니다. 보험도 돈이 있어야 하고, 교육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부부가 맞벌이를 해서 돈을 벌려면 어린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데 그마저도 돈이 들어야 하게 되었으니 세상은 돈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돈’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돈을 벌고 또 벌어서 자신의 영혼의 안락함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내가 이만큼 벌어 두었으니 나의 영혼아 쉬어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더 힘센 분이 다가오십니다. 실체들의 허상을 드러내고 우리 영혼의 피폐함을 고스란히 밝히실 분이십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돈도 많고 사회적인 위신도 드높고 권력도 잔뜩 쥐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안의 영혼이 너무나도 초라하다는 것을 드러내실 분이십니다. 마치 어린 시절 체육대회의 박터뜨리기처럼 앙다물고 있던 그의 ‘삶’이 깨어지고 나면 다른 이들이 그 안에 든 것을 나누어 쓰듯이 그의 생명은 다하고 그가 지니고 있던 것들은 다른 이들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누가 힘이 센 자인지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세 속에서 하느님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신앙’을 가진 것을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습니다. 모두 자신의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그것으로 안전을 구하려고 합니다. 힘센 자는 돈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힘센 자는 하느님이십니다. 돈에 의지해서 하느님과

사람을 구하는 것

수많은 돈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저는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존엄하게 삶을 꾸려가는 가난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돈만 생각하는 부유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에는 제가 인사를 나누려 근처에 가기만 해도 ‘혹시 뭔가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돈을 아끼기 위해서 마음을 거절하는 부류였지요. 저를 무슨 거지 취급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돈이 사람을 구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사람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이 사람을 구합니다. 마음이 있으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이룹니다. 하지만 마음이 없으면 천만금을 들고 있어도 자신에게는 늘 돈이 부족할 뿐입니다. 특히나 남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남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지만 마음이 없으면 볼리비아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말하는 것만큼 하느님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필요할 때에 찾는 정도이지요. 그래서 하느님도 마음을 주고 싶어도 받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워 하실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음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헌데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찾습니다. 그러니 서로 내밀고 받는 방향이 달라서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셈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일깨우고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돌아가게끔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필요하면 질책도 하고, 구슬리기도 하고, 가르침을 전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고 계셨습니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가장 작은 계명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9) 이 구절이 한때 저에게는 ‘화두’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생각이었지요. ‘잉?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면 안되? 와~ 그럼 금육 철저히 지켜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적지 않은 분들의 생각일 것이고 그런 분들이 생각 외로 꽤나 많을지도 모릅니다. 계명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계명을 문자 그대로의 규정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하느님께서 정말 바라시는 것’으로 이해하느냐의 차이에 핵심이 있습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말이나 글로 표현된 규정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로지 표현된 사실을 그대로 곧이 곧대로 지키기만 할 뿐, 실제로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보이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들이 게임을 심하게 해서 규정을 정하기를 ‘게임하는 시간은 밤 9시 이전까지’이라고 정했더니 아예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게임을 하는 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들은 분명 아버지의 규정을 말 그대로 지켰지만, 실제로는 전혀 지키지 않은 셈이지요. 왜냐하면 아버지의 원래의 걱정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규정에 대해서, 심지어는 십계명에 대해서도 전혀 엉뚱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라, 금육을 지키라는 식의 규정을 규정 그대로 해석하고 본래의 취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말지요. 살인하지 말라고 했더니 온갖 증오를 다 하면서 ‘나는 사람은 안 죽이잖아?’ 하고 변명을 해 댑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지요. 핵심을 바라보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이 말하는 가장 작은 계명이라는 것은 바로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에서 조금이라도 틀어지지 않게 하려는 근본적인 방향성을 의미하지 그것이 말로 표현된 그 규정 자체가

하느님의 자비하심

상선벌악이라는 가톨릭의 4대 교리는 간단히 말하면 선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인즉은 상선벌악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오히려 반대로 보일 수 있습니다. 마치 상악벌선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왜?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악한 이에게는 기회를, 선한 이에게는 단련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이 악한 자의 그릇된 이득을 순식간에 빼앗지 않는 것은 그들이 자기 스스로 내려놓게 함으로써 선을 쌓을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나쁜 이들의 죄를 그때마다 벌해 버린다면 이 세상은 악인들이 깨끗이 사라지겠지만, 그때에 과연 선한 이들이 몇이나 남을 수 있을까요? 아마 단 한 명도 없을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오류와 실수가 있게 마련이고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더욱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편, 선한 이들은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받을 기쁨의 양을 더욱 늘려주기 위해서이지요. 사랑하는 제자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어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싶은 것이 선한 스승의 마음입니다. 선을 수용하는 마음의 넓이를 넓히는 아주 좋은 방법은 바로 ‘시련과 역경’입니다. 그래서 선한 이들은 외적으로는 갈수록 더욱 큰 고난에 맞닥뜨리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이처럼 선하신 분이십니다. 악인에게 기회를 주시고 선인을 가르치시지요. 하지만 이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특히나 자신이 어떠한 고난 중에 있을 때에는 더욱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고난을 거치고 났을 때에 일어나는 결과에 따라서 가로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십자가가 다가올 때에 껴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 세상에 젖어 있는 이라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얼른 길을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용서하기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35) 용서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말과 행동은 저절로 바뀌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애써 말과 행동으로 짐짓 선한척 행동할 수 있지만 우리의 근본이 악하면 결국 악한 말과 행동이 다시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용수철을 눌러두면 잠시 형태만 바뀔 뿐 언제라도 다시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용서가 실패하는 부분은 바로 이 마음입니다.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 배워 알 수 있습니다. 학적으로 연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나의 ‘원의’로 바뀌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은 담배에 해악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끊을 수 없는 것은 여전합니다. 행여 전에 몰랐던 사실에 대해서 더욱 많이 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증오’하는 데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사랑’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증오하는 것이 좋아서 증오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부터 헤어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증오합니다. 사랑은 힘든 작업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사랑’에 대해서 대중가요 수준의 연인들의 불장난을 떠올리기에 사랑은 쉬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천만에요. 사랑은 쉬운 게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고 익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는 ‘증오’라는 더 쉬운 수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증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여러가

추구하여 얻는 것

평화신문의 기자는 저를 빈 신문의 한 구석을 채워줄 ‘만화가’로 찾습니다. 옛 보좌를 하던 성당의 교사들은 저를 ‘추억의 인물’로 찾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둘째아들’로 찾고, 교구청에선 저를 ‘교구 사제’로 찾습니다. 저는 선교지에서는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친구’이며 누군가의 ‘아들’입니다. 저마다 추구하는 대로 저의 일부분을 찾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저를 ‘마진우’ 그대로의 저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추구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물론 내어주어야 얻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저는 자신을 내어바쳐 하느님은 저를 얻을 것이고, 반대로 저는 하느님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을 찾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과연 어떤 모습으로 찾았던가 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받았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에게서 단순하 지혜의 말을 찾아 얻었고,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었습니다. 찾는 만큼 얻지만, 헌신하지 못하면 찾지 못합니다.

양로원에서 한 강론

오늘은 칠곡 동명의 성가 양로원에 주일미사를 하러 갔습니다. 오늘의 만남 역시도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발단은 지난 번의 어느 모임이었습니다. 제가 간 식당에서 저를 비롯한 한 그룹이 모여 있었는데 다른 테이블에 계시던 선배 신부님이 우연한 기회로 우리 테이블에 오셔서 함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가 볼리비아에서 온 줄을 아시고 저를 초대해 주셨지요. 그래서 냉큼 초대를 받았습니다. 팔공산 언저리에 있는 양로원은 요양원과 함께 있는 시설로 꽤나 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은 그리 크지는 않더군요. 원래는 요양원 담당 신부님이 주례였는데 바꿔서 제가 주례를 하고 강론도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고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구 반대편에서 선교 사목을 하고 있는 마진우 요셉 신부라고 합니다.”로 시작한 강론은 간단한 볼리비아의 소개로 이어졌고 뒤이어 어르신들을 향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강론 준비는 물론 따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평소에 묵상한 것들을 꺼내어 놓았지요. “사람의 외면은 시간이 흐르면 성장하고 나아가 노화되어 갑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도 영혼이라는 존재가 있고 영혼도 역시 성장해 갑니다. 어린 시절 욕심을 내던 꼬마가 껍데기가 늙어 어른이 되어도 똑같은 욕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영혼은 전혀 어른이 되지 못한 셈이지요. 어르신이 되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 내면의 영혼이 그걸 수용하지 못하기에 점도 빼고 검버섯도 빼고 피부도 당겨 늘리고 하는 생쇼를 하는 셈입니다. 어르신이 된다는 것은 ‘지혜’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지혜는 무엇일까요? 제2독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지혜였습니다. 그분의 지혜는 우리에게는 어리석음이었지요.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요? 십자가에 있지요? 왜요? 아주 나쁜 일을 많이 해서?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죄많은

담배

어느 유명한 소설가가 담배를 찬양하는 글을 쓴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정말 가리움 없이 순진한 마음으로 담배를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무렵은 그랬습니다. 집안에서도 아버지가 마음껏 담배를 피우는 시대였지요. 그러니 담배를 충분히 찬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텔레비전에 담배피우는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나옵니다. 영화를 보다가 뭔가 모자이크 처리가 된 걸 보고 순간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나름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서겠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흡연이 ‘아이들에게 숨겨야 하는 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알고보니 나쁜 것이었다는 걸까요? 아니면 단순히 시대적인 유행일 뿐인 걸까요? 다시 담배가 공공연하게 확장되는 시대가 올까요? 하지만 웃긴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비행기에 흡연석이 있었어. 그래서 흡연자들이 자기들은 비흡연석을 끊어놓고는 담배 필 때만 뒤로 가서 피고 돌아오곤 했지. 다들 그렇게 하라고 서로들 가르쳐주곤 했어.” 그렇습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도 담배 연기가 가득한 곳에는 들어가기 싫은 것입니다. 자기 옷에 자신이 태우지 않은 담배 연기가 배이는 것은 싫은 것이고, 그런 냄새를 풍기고 다니고 싶지는 않은 것이지요. 참으로 재미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 인도네시아에서는 공항 카페에서도 담배를 피웁니다. 일본에서도 식당에서는 저녁에 담배를 태웁니다. 담배는 과연 우리의 시름을 달래주는 친구인 걸까요? 아니면 어쩌다 공공연하게 퍼져버린 ‘악습’인 걸까요? 판단은 스스로 하시길 바랍니다.

기념하는 방법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방법은 그에 대한 기념물을 남기는 것입니다. 동상이나 그분의 이름을 담은 다른 기념물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그분의 삶을 기념한다는 취지입니다. 다른 형태로는 그분이 산 삶의 모습을 ‘행동’으로 따라해보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등장하는 것이 그분의 삶을 따라 행해보겠노라고 나오는 기념 사업들입니다. 그분의 정신을 받들어 그분이 살아간 삶을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비슷하게 해 보겠다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그분의 삶을 기념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그분의 삶이 참으로 좋았음을 깨닫고 우리도 그렇게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그분의 동상을 세우는 것도, 그분의 이름을 내건 기념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닌, 정말 그분을 이해하고 그분이 하려고 했던 것을 내가 머무는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부랴부랴 그의 위대함을 되새기는 작업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일은 많이 생겨나는데 그분’처럼’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구 성모당에 가면 ‘동상’들이 몇 개 있습니다. 우리가 그 옆에 가서 그 동상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다고 해서 그분의 삶을 따라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그분들을 기념한다면 그분들이 사신 것처럼 살 때일 것입니다. 성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한다면 모두 ‘시련’을 거쳐서도 하느님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우리의 동상이나 기념품은 생기지 않겠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 진정한 의미의 ‘성인’이 되겠지요.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말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요한 2,25) 사람의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숨은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때면 속에 든 이야기를 곧바로 꺼내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입에서 담배냄새가 나도 그것을 꾹 참고 웃으며 상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만일 생각하는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꺼냈다가는 아마 세상은 난리가 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속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의미로는 ‘완충장치’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음모’를 꾸밀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즉 상대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악한 의도를 숨기고 상대에게 다가가서 방심하게 한 뒤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낚아채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약함을 알고 있었고 유다의 음모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친 것입니다. 이번 성전 정화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알고 있었습니다. 내면으로 일어나는 생각들이 어떤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성전의 화려함에 반해가고 엄청난 사람들과 돈 사이에 있으면서 정신을 팔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순간 돌변하여 전에 없던 그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즉, 주변의 상인들을 쫓아내신 것이지요. 제자들의 내면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성전에 대한 의미를 ‘예언’으로 가르치지요. 물론 당시에는 아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이라 함은 오직 건물로 된 성전만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예수님은 수난 당하고 죽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성전 정화 사건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한 성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래서 내적 외적 성전을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하는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유혹

사람이 엇나가는 이유는 그의 구미에 맞는 먹잇감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눈 앞의 유혹거리가 내면에 존재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는 마치 누군가를 미워하는 중에 두 사람이 다가와서 한 사람은 그에 대한 칭찬을 하고 다른 사람은 그에 대한 비판을 하면 아무래도 우리의 마음이 칭찬 보다는 비판으로 더 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엇나갈 방향을 이미 우리의 내면 안에 마련해 두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혹자는 나쁩니다. 유혹자는 자신의 책임에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혹에 빠져드는 당사자에게도 책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강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강제로 무언가를 하게 했다면 그것은 그것을 당한 본인의 죄가 아닙니다. 폭행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힘 센 사람이 약한 이를 폭행을 했다면 그것은 그것을 행한 힘센 이가 죄를 덮어써야 할 일이지 그것을 당한 사람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밖의 유혹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유혹하는 사람과 유혹되는 자가 죄를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혹 당하는 이의 내면에 이미 그 유혹에 대한 ‘선호’가 존재하기에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똥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이는 없습니다. 누구나 똥에 대해서는 자동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좋은 것, 보석이나 돈과 같은 것들은 누군가에게는 유혹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유혹의 요소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돈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닥 유혹의 요소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들어있는 선호도를 파악할 수 있다면 미리 대비할 수도 있습니다. 즉, 평소에 돈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사람은 재물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 배우고 그것의 허망함을 깨달으면 내면에 깃들어 있는 ‘선호도’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 다른 것에 대한 선호도를 내면에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유혹에 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