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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15의 게시물 표시

경외(두려움)

저는 공지사항을 하고 나면 언제나 짤막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어제 미사 공지사항 시간에는 이런 말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사랑으로 하느님을 찾기가 힘이 든다면, 두려워서라도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두려워서 어둠의 행실을 피할 것이고 최소한 영원한 절망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헌데 제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회사 사장을 두려워하기는 해도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십니다. 헌데 인간은 몇 푼 벌겠노라고 다른 이들을 속여댑니다. 특히나 ‘치노’(아시아권 사람, 눈이 작은 사람의 통칭으로 사용되는 말, 원 뜻은 중국 사람)가 다가오면 더 좋습니다. 제가 왜 이걸 아느냐면 실제로 저를 대상으로 그렇게 속이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페인어를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조차 없습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과연 어떠할까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어둠의 행실을 하느님은 투명한 유리잔을 바라보듯이 아주 속속들이 알고 계셨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십시오..” 사실 두려움은 성령의 은사이기도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경외’라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마저도 지니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봅니다. 특히나 미사 중에 껌을 질겅질겅 씹는 걸 보면 저는 한번은 다정하게 ‘미사 중에 껌 씹는 거 아닙니다.’라고 전체를 대상으로 말하지만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러고 있으면 아예 대놓고 그 사람을 직시하면서 말합니다. ‘제가 이미 말했는데도 씹고 계시네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멈추는 것이 보통입니다. 헌데 그러는 중에 심지어는 그 즉시 자신은 절대로 씹은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지요. 경외심은 커녕 최소한의 예의도 없고 심지어는 양심도 없는 경우입니다. 하

절제

어제 저녁 식사 메뉴는 츄라스꼬(석쇠에 구운 고기 덩어리)였습니다. 아프기 시작하면서 종종 ‘아, 정말 츄라스꼬 먹고 싶다’고 했더니 총회장 내외가 구워다 저녁 대신으로 먹으라며 주었습니다. 간만에 고기를 씹으니 얼마나 맛있던지요. 헌데 너무 오래 단단한 걸 씹지 않은 탓인지 이내 턱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간만에 먹는 츄라스꼬의 맛은 일품이었습니다. 만일 늘 먹었다면 그런 감흥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랜 절제의 시간 끝에 만나는 고기 한 덩어리라서 소중하고 맛있었던 것이지요. 한국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먹으면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몇 년 좀 참다가 고국에 돌아가서 먹기 시작하면 음식 하나하나가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즐기려면 ‘절제’가 뒤따라야 합니다. 모든 감각 기관이 만족한 상태를 유지하려다보면 언제나 더 큰 쾌락을 찾게 마련이고 결국 도를 넘는 쾌락을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요. 절제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우리의 본연의 기쁨을 되찾게 도와주고 우리를 늘 깨어있게 만들어 주니까요. 하지만 이 가치가 요즘 많이 사라져 있습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참고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이 생기면 그 즉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문하면 ‘당일 배송’을 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인간은 그렇게 즉각적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법은 없습니다. 시간이 걸리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는 관계마저도 소비적입니다. 상대를 기다려주고 배려해주지 못합니다. 그렇게 상대를 다 소비하고 나면 이제 싫증이 나는 것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에 있어서 교회가 가르치는 자연주기법이라는 것은 언뜻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그런 내적인 절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모조리 즐겨버려 쾌락의 극치를 달리고 나면 자연 상대가 지겨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요. 천천

두려움의 종

종의 특징은 ‘두려움’입니다. 주인이 무서워 죽을 지경입니다. 언제 자신을 벌할지, 내가 이런 것을 하지 않으면 언제 나에게 불이익을 줄지 두렵고 떨립니다. 그래서 합니다. 의무적으로, 억지로 합니다. 하지 않으면 벌받고 불이익을 얻을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간주합니다. 그들은 구원을 잃고 영원한 어둠에 빠져드는 것이 두려워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무언가 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화낼까 두려워서 그것을 합니다. 그렇게 주일미사를 나오지만 미사를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미사가 싫고 꺼려집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미사는 그들에게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의 근본에는 그들의 그릇된 생각과 행위가 있습니다. 아이가 순수하고 마음이 맑을 때에는 아빠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나눕니다. 하지만 아이가 무언가 잘못을 하고 나면 아빠를 보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뵙는게 두려워지는 이유는 우리 안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버리고 뉘우치고 돌아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던 것을 하고 싶어합니다. 고집스럽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을 유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세상 안에서 아직 탐나는 게 많고,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은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미뤄둡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꺼려집니다.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반면 자녀들은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들은 상속자들입니다. 훗날 반드시 그분의 나라를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종들은 하느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그들은 사랑이 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이웃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런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협하고 억누르기 일쑤입니다. ‘너 이런 거 안하면

빛이 다가올 때

어둠이 빛으로 드러날 때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자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빛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깊은 어두움으로 파고 드는 자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반면 빛을 느끼고 빛을 받아들이고 빛의 따스함과 아름다움에 감격해하면서 빛으로 돌아오게 될 자들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의 숨은 속내를 드러낼 때에 사람들은 언제나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그들의 어두운 속내를 드러내는 자들을 더욱 증오하면서 자신의 시커먼 속을 더욱 감추려 드는 자들이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로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는 빛으로 돌아오려 하는 자들, 즉 뉘우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더 깊은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이땅에서부터 지옥을 체험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고 따라서 남들도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시기와 증오와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고 그래서 타인의 행복을 보면 기분이 나빠지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타인의 순수함과 맑음을 파괴하려 들며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 스스로 즐기는 자들입니다. 오,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뉘우치는 자들, 회개하는 이들은 비록 어둠 속에서 생활해 왔지만 빛을 늘 꿈꾸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랑이 그리웠던 자들이고 선을 이해하지만 실천적으로 부족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빛이 다가올 때에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뉘우치고 빛을 받아들이게 되는 자들이지요. 그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희망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사제의 일

달려 나가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달리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도 만만찮은 일인 것 같습니다. 제가 몸이 건강할 때에 최선을 다해서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고 그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와 반대로 몸을 돌보면서 사람들의 요구를 적절히 절제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분별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해야 했던 일이고 무엇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사제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올바른 분별과 더불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사제가 고통받는 이의 조언자가 되어야 하는 건 맞지만 심심한 중년들 술자리 동석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보다 소중히 쓰여야 할 자신을 조금씩 파괴시키는 행위입니다. 사제가 힘든 자매들을 위로자가 될 수는 있지만 2차 노래방을 위한 놀이도구로 쓰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제의 일이고 어디서부터는 굳이 하지 않아도 충분히 다른 이들이 떠맡을 수 있는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은 마음에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도 모조리 떠맡으려고 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원하는 신자들은 많으니 자연 건강이 조금씩 상할 수 밖에요. 담배도 끊고 술도 줄이고 건강에 신경써야 합니다. 신자분들이 흔히 하는 말들처럼 우리의 건강은 단순히 우리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 어느 신부님은 절더러 ‘너는 교회 관물이다’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당황스런 표현이지만 아예 틀린 말도 아닙니다. 사제가 사제직분을 수락하는 서약을 하는 그날부터 우리는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교회를 위해서 때로는 하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하고 하기 싫은 것도 기꺼이 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저 자신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

정의와 사랑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의 위험성은 자칫 어느 정도의 발동이 걸리고 나면 자신이 나아가는 속도를 스스로 주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언제나 사랑과 함께 나아가야 하는데 정의에 너무 열중하다보면 사랑이 뒤쳐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정의를 실행하는 데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정의롭지만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칼질만 할 줄 알지 상처를 보듬지는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여러가지 정치 현황에 관심을 드러내는 적지 않은 이들의 모습에는 바로 이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의로우신 하느님은 또한 가장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칼은 함부로 휘두르면 반드시 쓸데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부족한 장상

여러분들의 공동체의 대표가 부족함을 지니고 있을 때에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아니, 그 전에 하나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완벽한 대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자, 그럼 그의 부족함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를 내쫓을 수 있습니다. 거세게 항의해서 그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하고 그를 공동체에서 축출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보다 나아 보이는 다른 누군가를 대표자의 자리에 앉힐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방향으로 그를 향한 따뜻한 마음을 품고 그의 부족함을 조언하고 그가 그것을 개선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오류를 통해서 배워나갈 것이며 자신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나날이 더 지혜로워지겠지요. 하지만 이 둘은 서로 극단적인 이상향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모습이 존재하며 그가 싫어서 쫓아내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그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고치려 해도 그가 듣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이를 공동체의 대표로 둔 이들의 내면에는 결국 나날이 앙심이 생겨나고 또 공동체 구성원들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이들에게까지 그러한 말들이 전파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결국 최종적인 단계로 둘은 서로의 힘겨루기를 하지요. 대표는 대표의 권한으로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단합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힘이 더 센 자가 승리합니다. 사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더한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공동체는 자신의 대표를 통상적으로 선출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교회는 전혀 그런 과정 없이 대표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주임 사제도 ‘선출된’ 사제는 없습니다. 교구 직권자의 파견을 받아 그가 좋건 싫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적으로 보면 답답하지 않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전제

일치를 도모하기

각 교구별로 각 본당별로 분열을 초래하는 원인들은 상존합니다. 교회는 완벽했던 적이 없으니까요.그러나 그 분열을 가시화하고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이는 불행합니다. 예수님은 죄 지은 이를 심판하고 너희끼리 순수하게 모여 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용서하고 도와주고 살리라고 하셨지요. 특히나 우리 신앙의 씨앗을 심어준 어머니 교회가 아플 때에는 더더욱이나 자녀된 도리로써 돌보는 게 맞습니다. 교회는 앞으로도 완벽하지 않을 것이고 얼마든지 비난할 구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하나가 되고자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신앙의 시련

젊은 교리교사들은 때로 부모님에게 제제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다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런 제제를 받기보다 부모님의 걱정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정말 자신이 사랑하는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더 시간을 헌신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부모에게서 걱정을 받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히려 보좌 신부님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다른 교리교사들과 어울려 노느라 그런 제제를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시련’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쳐야 할 악습에 불과합니다. 신앙의 시련이라는 것을 착각하는 이들이 많으니 자신 안에 부덕함이 있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로 ‘성당’이름을 달고 다른 누군가가 나를 꺼려하면 무조건 자신이 신앙의 시련을 체험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에서 자신의 생활을 올바로 꾸려 나가지도 못하면서 성당이 재밌고 좋아서 나다니다가 그런 시련을 당하는 것은 신앙의 시련이 아닙니다. 신앙의 시련은 내가 이미 나의 악습을 정돈하고 보다 참된 길을 걸어나가려는데 나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빈정거림과 조롱, 그리고 박해의 형태로 나타나지요. 어느 주부가 가정에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면서 짬을 내어 주일 미사를 나가려는데 그걸 아니꼽게 여기는 시어머니의 박해의 형태와 같은 것이 신앙의 시련입니다. 지극 정성을 다해 병든 부친을 돌보고 행여 불편한 것이 없나 살피는 데도 그 아버지가 자식에게 억지를 부리고 화를 내어 인내를 시험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 신앙의 시련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의 시련을 겪는 젊은이들은 참으로 희박합니다. 저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다가 그걸 제지당하니 기분나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술을 자제하고 보다 참된 신심 활동을 위해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꾸준히 기도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 않아 여러분들은 성당에서 가장 마음이 멀어져 있는 젊은 부부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들

오,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이 뒤에서 수근대는 그 어둠의 모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령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지를 안다면 당장 그만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둠 속에 모여서 비방하는 그 모든 말들은 결국 여러분들을 어둠으로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사람의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분의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의 본질을 깨달았을 것이고 모든 어두움을 즉각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눈은 닫혀 있고 마음은 어둠으로 흐리게 되었으니 끊임없이 소문을 만들고 과장하여 여러분은 누군가를 어둠으로 몰고가게 되고 그 결과는 다시 여러분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빛을 지닌 사람은 어둠 속에서 속삭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닌 빛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드러냅니다. 그러나 어둠의 영은 비밀스런 것을 좋아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꾀어내기를 즐깁니다.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누군가의 비밀을 속삭여주는 사람을 경계하십시오. 그의 말을 즐겨 듣느니 차라리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뜻을 음미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은총과 십자가

자신이 청하는 것이 뭔지 모르고 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좋아 보이니 청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은총’과 같은 것입니다. 그게 정확히는 뭔지 모르고 일단은 좋아 보이니 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총이라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아이가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 공부를 잘하게 되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곧잘 아이를 닥달하기 시작하지요. 아이가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는 공부에 매력을 느껴야 하고 맛을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즉각적인 결과를 원할 뿐이지요. 그저 점수만 잘나오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를 억지로 밀어 붙이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힘들어하건 말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결국 아이는 공부에 흥미는 커녕 역겨움을 느끼게 되고 도리어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정말 은총을 원한다면 그 은총에 수반되는 것을 껴안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탐내지만 그분의 십자가를 쳐다보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번 제자들에게 강조하셨지요. 사람의 아들의 운명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탐하지만 사람들에게 비난 당하고 박해를 받고 내쳐지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우리는 ‘고상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하지요. 친구들과 어울려 고급 카페에서 커피와 케익을 먹으면서 아주 고상한 신앙생활을 하려 합니다. 천만에요. 신앙은 그딴 가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은총을 청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각오를 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것을 청하기 일쑤입니다. 당신은 정말 그 잔을 마실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어느 신부님의 선종 소식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옆방이 시끌시끌했습니다. 저는 '절대안정'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방문객이 별로 없었지요. 그래서 '왜 저리 시끄럽지요?'라고 하니 아주머니들이 나가보더군요. 그리고는 '다른 신부님이 와 계세요. 방문객이 엄청 많네요.'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검사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동행했던 자매님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 옆방에 있던 그 신부님이요. 나이가 83세이신데. 돌아가셨다고 라디오에 나왔어요.' 아마 그 신부님은 자신의 사명을 다한 모양입니다. 저는 아직 40도 되지 않았으니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하게 될지... 하느님만이 아시겠지요. 이 순간 저의 의지를 또다시 그분께 봉헌합니다. 당신이 선택하셨으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써 주소서.

우리의 일상에 숨겨진 하느님의 은총

내일부터 다시 주일미사를 거행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슬슬 일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번 병고를 겪으면서 이런 저런 면에서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서 새로이 체험하게 되었지요. 수다스러웠던 탓에 별로 느끼시지 못하시겠지만 인간의 생명은 한낱 입김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가야 하는 것이고, 당신이 원치 않으면 아직 때가 아닌 것입니다. 헌데 우리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젊은 동안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파멸시키지요. 육적으로 영적으로 동시에 말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에 건강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온전한 몸을 지니고 있었지요. 물론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이끌어내는 사명이지요.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기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하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지요. 아주 어릴 때부터 누구를 미친듯이 증오하고 앙심을 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둘러싸여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지요. 헌데 우리 스스로 그 순수함을 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변의 영향도 받지만 우리가 자유의지를 마음껏 활용할 시기가 되면 지금까지 나에게 쌓여온 모든 것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경우에 ‘파괴적 선택’을 합니다. 술과 담배로 몸을 망쳐가고 영적으로도 황폐해져 가기 시작하지요. 반면 세상에 대한 추구는 보다 가중되기 시작합니다. 멋진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어디까지나 세상 사람들이 떠받드는 삶일 뿐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못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당신의 일상적인 은총으로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당연히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전적인 선의이고 자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매일 매순간 무시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하나되게 하소서(개신교 종파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20-23)

살리기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하려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도 수영을 할 줄 모르면서 물에 뛰어 드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분별이 필요한 것이지요. 거기에는 몇가지가 포함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면에서도 분별이 요구됩니다. 1) 그는 어디에 빠져 있는가? 그가 빠진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곳이 단순히 물이라면 뭐든 물에 뜰만한 것을 던져주거나 내가 수영을 잘한다면 들어가서 발을 받쳐 주던지 직접 끌고 나오던지 방법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빠진 곳이 늪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곳에서는 보다 단단한 밧줄이 필요할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그가 어디에 빠져 있는지를 살피고 준비를 하고 다가서야 합니다. 그가 그저 기분이 우울한 것이라면 그가 기분전환을 할만한 무언가를 함께 찾아보면 될 것이지만 그가 깊은 상실감이나 절망감, 누군가로부터 심한 타격을 입었다면 어느정도 준비를 하고 다가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그의 절망감에 같이 휩싸이고 맙니다. 2) 나에게 능력이 있는가?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수영도 못하면서 같이 물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를 끌어낼 힘도 없으면서 밧줄을 몸에 묶고 던져주다가는 그가 당기는 바람에 도리어 나까지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힘이 없으면 구조 요청을 하러 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일은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나 자신의 문제 만으로도 힘겨워하면서 누군가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를 도리어 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그럴 준비가 된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가장 강력한 구원자이신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3) 그는 살려는 의지가 있는가? 이 문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함부로 분별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는 보통사람이 분별할 수 있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2. 이 말씀이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 집도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3. 하지만 이것이 단지 내적 회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내적 회개(inner repeutance)는 육신의 다양한 외적 수행을 수반하지 않는 한, 무가치한 것이다. 4. 죄에 대한 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여도, 즉 참된 내적 회개를 하여도 우리가 하나님 왕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5. 교황은 자기의 권위나 교회법의 권위에 부여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벌도 가감할 수 없다. 6. 교황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음을 선언하신 것과 같이 자신의 판결에 위임된 죄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죄도 용서할 수 없다. 교황의 권한을 넘는 죄는 교황의 용서로 사하여 지지 않는다. 7. 하나님은 인간이 겸손해져서 그의 대목(代牧)인 사제들에게 복종치 않는 한, 누구의 죄도 사하지 아니하신다. 8. 속죄의 법은 단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다. 그 법에 따라, 죽은 자의 죄가 사하여질 수는 없다. 9. 그러므로 교황이 그의 교령(敎領)에서 언제나 죽음과 필요의 항목을 제외한다면, 교황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은 우리에게 자애롭다. 10. 죽어서 가는 연옥을 교회법의 벌로 삼는 사제들은 무식하고 악한 이들이다. 11. 교회의 법의 벌을 연옥의 벌로 바꾸는 가라지가 감독들이 자는 동안에 분명히 뿌려졌다.(마 13:25) 12. 이전에 교회법의 벌은 진정한 회개의 시금석으로서 사면 후가 아니라 그전에 가해졌다. 13. 죽은 사람은 죽음으로써 모든 형벌로부터 벗어나고, 교회법에 관한 한 이미 죽었으며 그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갖고 있다. 14. 죽어가는 사람에 있어서 불완전한 경건이나 사랑은 반드시 커다란 불안을 수반한다.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두려움은 더욱 크다. 15. 이 두

믿음과 행위

여러가지 행위(특히 면벌부의 구입이라는 방식의 예물 봉헌을 통한 자선)를 강조해서 신자들에게 구원에 가까이 다가가라고 가르치던 가톨릭에서 설교자들의 금전적인 부패가 만연하던 당시 95개조 반박문을 내어놓은 루터는 신자들에게 순수한 믿음만 굳건하면 절로 행위가 따라오게 될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오직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안타깝게도 ‘믿음’만을 엉뚱하게 강조하는 풍조가 뒤따라왔고 결국 행위는 없고 믿음만 강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현실입니다. 개신교 형제들의 분리는 가슴아픈 일이었지만 우리에게 여러가지 면에서 배울 점을 시사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성경에 대한 열정으로 가톨릭에서도 뒤늦게 성경 말씀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고 그들의 선교 열정에 우리도 늘 자극을 받고 있지요. 하지만 다른 쪽으로도 배울 점이 있으니 일단 한 번 갈라지고 나면 다시 새로운 갈라섬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는 수많은 종파와 그 종파별로 또다시 세분화된 분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또 얼마나 갈라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믿음은 우리 신앙인의 근본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위의 결과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가톨릭은 풍부한 영적 자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성은 늘 존재합니다. 자칫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으로만 빠져들 위험성과 영혼 없는 행위로만 빠져들 위험성이지요. 그래서 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순수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헌데 그 믿음이 순수해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믿는 바를 실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스스로의 실천으로 인해 증명되어 갈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고 순수해지게 될 것입니다. 행위 없는 믿음은 실체없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

고통

고통받는 이들은 사실 널리고 널렸습니다. 고통은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전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없습니다. 헌데 우리의 원의는 도무지 꺼질 줄을 모르지요. 그래서 인간은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저마다의 고통을 감수하고 살아갈 뿐이지요.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남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바라보고 부러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웃고 있는 사람들도 힘들어 할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볼 뿐입니다. 돈을 엄청 지니고 있던 대기업 회장도 자살을 하고,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주던 유명 배우도 자살을 하고,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들도 자살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그들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행복은 고통을 절제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통은 어떤 이유로든지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에게는 일어서는 것이 고통이지만 일단 일어서고 나면 달리는 것이 새로운 고통이 되고 일어서기 위해서 노력하던 시간들은 잊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들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의 고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 기타를 잡으면 손에 굳은살이 배이기 까지 꽤나 고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굳은살이 박히고 나면 예전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련은 단순히 육적 고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고통의 과정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자꾸만 회피하려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드니까 일단은 도망치고 보려는 이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머지않아 다시 같은 종류의 고통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통은 더욱 가중되게 마련이지요. 피한 만큼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셈입니다.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하느님 이야기를 하는 사제

가끔은 내가 좀 심한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하느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사람들이 지치는 건 아닌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온갖 쓸데없는 말과 정보들에 비하면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끊임없이 하느님과 그분의 속성, 그리고 가치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잠시만 눈을 돌려도 얼마든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다 못해 지하철에서 조금만 주변을 둘러봐도 온갖 것들 자랑하는 광고판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의 모델들이 있고 온갖 현란한 광고 문구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들이 들어 있지요.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꼬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을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선택의 폭을 넓혀줄 뿐이지요. 세상을 받아들여 거기에 호기심을 지니든, 하느님을 받아들이든 선택은 자유입니다. 저로서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을 멈추고 세상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세상은 황홀한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안에서만도 놀거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눈가리고 아웅하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하느님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다시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듣다 듣다 지쳐 떨어질 때까지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만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증언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저의 마지막 날에 제 증인이 될 것입니다.

하지 않는 이유

우리가 어떤 일을 하지 않을 때에 이유는 다양합니다. 1) 못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하지 못합니다. 내가 능력이 되지 않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2)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또한 못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조금은 다릅니다. 나에게 능력이 있고 그 일을 이룰 수 있는데 지금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이 해소되고 나면 당장에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3) 하기 싫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경우를 차지하는 경우입니다. 능력이 안 되는 것도, 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닌데 내가 하기 싫을 뿐입니다. 물론 하기 싫은 이유가 있겠지요.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 하나와 그냥 게을러터져서 그런 것 둘입니다. 사랑하라고 했을 때에 과연 우리는 1)번일까요? 2)번일까요? 천만에요, 3)번입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능력으로 그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당장 실천할 수 있고(1번 충족), 내가 사랑할 대상은 천지에 널려 있습니다.(2번 충족) 그러나 문제는 다만 내가 그렇게 하기 싫은 것 뿐이고 내가 더 신경쓰고 싶은 대상이 있거나 막연히 게을러터진 것 뿐이지요. 정말 주변에 사랑할 대상이 없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언제라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모으고 그분에게 겸손되이 기도를 드리는 것, 성호를 긋고 내가 아는 기도문을 올리는 것은 병상의 환자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기보다는 다른 일에 열중하고 싶은 것이지요. 훗날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계명을 크게 어긴 것이기보다는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음에도 사랑하지 않은 죄’가 가장 클 것입니다.

속속들이 아시는 하느님

CT사진을 찍거나 초음파 사진을 찍거나 MRI사진을 찍으면 속에 들어있는 게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환자일지라도 그런 사진들을 통해서 속에 작용하고 있는 종양과 같은 것을 잡아내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은 서로 교묘히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내가 하는 어두움의 생각을 타인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요. 은밀하고도 추악한 생각, 증오와 폭력, 시기와 질투 그러한 모든 것들을 은밀히 감추고 정작 앞에서는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눈은 그 모든 것을 꿰뚫고 계십니다. 그분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하느님은 그런 생각의 원인과 그런 생각의 기원, 그리고 우리의 의지의 모든 결정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은밀한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눈 앞에 드러나고 있는 일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지 못하면 그 교만이 얼마나 드높아지는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이라는 덕목의 기본은 ‘하느님’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심판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내가 누구이건데 다른 이를 심판하려 든단 말입니까? 같은 행위를 보고 사랑을 꺼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혐오감을 꺼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의 결정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거지를 보고 극도의 거리낌을 느끼는 사람과 그를 보고 진정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을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꼴사나운 이를 보고 속으로 빈정대고 앙심을 품는 사람과 반대로 그의 부족한 인간적인 면모를 안타까워 하면서 그럼에도 그를 사랑할 결심을 하는 사람을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선택합니다. 누구를 탓할 수 없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나쁜 사람이 되는 법도 없고, 돈이 많고 부유하다고 해서 마음이 절로 넉넉해진다는 법도 없습니

의사

어제 의사 선생님을 잠깐 만나 지금까지 돌보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검사 결과지에 대한 면담을 아주 잠깐(5분도 안되는 시간) 하고 면담 말미에 의사 선생님이 덧붙입니다. - 나가기 전에 접수처에 들렀다 가세요. 순진한 마음으로 지금까지의 의료 행위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의사 선생님을 만나 잠깐 이야기 나눈다는 마음이었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바로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가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상담비를 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냐고 하니까 200Bs.라고 합니다. 더 재미난 건 제가 농담처럼 함께 있던 자매에게 제가 이런 말을 건넸을 때입니다. - 그렇게 잠깐 만나고도 200Bs.나 받네요. - 신부님 그런 말 마세요. 저 의사 선생님 원래 상담하면 상담비가 100달러(700Bs.)에요. - 네에? 정말요? - 네, 정말이에요. 그래서 신부님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 찾아와서 잠깐 이야기하고 그 비용을 다 받은 거에요. - 와, 만일에 제가 본당에서 그렇게 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겠지요? 아닌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제가 누군가와 아주 잠깐 이야기하는 비용으로 200Bs.를 청한다면 도대체 누가 신부를 만나러 성당에 나오겠습니까? 신앙 상담도 공짜이요 고해성사도 공짜이요 주일미사는 동전 몇 푼만 봉헌금으로 준비하면 그만이니 볼리비아 사람들이 평소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비하면 얼마나 싸고 좋은 서비스인지 모릅니다. 의사들은 선서를 합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라고 하지요. 그 선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하지만 과연 이 선서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의사가 얼마나 될까요? 그들은 가난한 이들이 아예 근처에도 못오게 막아 놓은 성채 안에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모아둔 월급으로 비싼 병원에서 치료를 감행한 것과는 달리 가난한 이들은 아프면 죽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의사들은 있는 자들, 가진 자들을 성심껏 진

사제의 만남

사람들은 서로를 만나지만 그 만남이 순수한 우정인 경우는 지극히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에 의해서, 어떤 목적에 의해서 만납니다. 의사가 환자를 만나는 이유는 상담을 하고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름 괜찮은 만남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부여하신 저마다의 가능성에 따라 전문 분야를 지니게 되고 그 직분이 쓰여지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의사는 환자들을 열심히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환자들이 병고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하지요. 헌데 의사가 환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만나면 그 의사나 환자는 불행합니다. 의사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게 일하고 있고 환자 역시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진료를 덤탱이를 쓰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신자를 만나는 이유는 하느님을 전하고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목자가 양을 이끌어 좋은 풀밭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사목을 하는 것입니다. 헌데 신자가 사제를 만나서 그의 본당에서의 직분을 이용하려고 하거나, 반대로 사제가 신자를 만나서 신자의 재력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면 둘의 사이는 불행해집니다. 술자리 친구로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제가 신자들이 모인 회식 자리에 참여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심심할 때 불러내어 오로지 한 잔을 퍼기 위해서 만난다면 그것은 불행한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어떤 목적으로 만나려고 하는지, 실은 눈치 빠른 사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 사제는 젊은이들에게는 인기 있는 오빠가 되어주고, 자매님들에게는 편한 총각이 되어주고, 형제님들에게는 고충을 들어주는 술자리 친구가 되어주고, 어르신들에게는 자기 자식보다도 더 마음이 지극한 자녀가 되어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정말 그 자체만을 즐기려 들기 시작한다면 그 사제는 마음에 헛바람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

복음화를 위해 기꺼이 사용되는 존재

방금 본당의 한 자매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문자로 이런 저런 대화를 잠시 주고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조금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매는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저를 사용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그게 뻔히 보이는 일이었지만 모르는 척하고 마지막에는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사제는 공동체를 위해 파견되고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쓰여지는 목적은 그 공동체가 사제직을 통해서 변화되어 가고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변화되지 않고 사제직을 사용해 오기만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공동체의 복음화에 헌신해 온 사제로서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알고도 속아주기 시작합니다. 저는 씨를 심을 뿐이고 추수하시는 분은 하느님이 되셔야 합니다. 저는 쓰여져야 하고 죽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리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복음화는 계속될 것이고 저는 사람들에 의해 열심히 쓰여질 것입니다. 1000번을 쓰여져서 한 명이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것도 보람있는 일이겠지요. 인간적인 ‘효율성’의 면에서는 형편없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앞으로 제 남은 생애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선교 공동체에 있으니 이런 저런 사연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그마저도 불가능하겠지요. 사람들은 너도나도 페이스북을 할 테고 저는 원론적인 이야기나 올릴 수 있게 될 뿐,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은 절대로 나누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좁은 동네에 소문이 퍼지만 누군지 금방 알게 될 테니까요. 아마 그때에는 SNS를 통해서 스페인어로 볼리비아 공동체를 사목하려나요? 모를 일이지요. 사람들이 저를 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좀 더 복음화가 되도록 쓰여지게 저를 추스리려고 합니다. 미사에 헌신할 것이며 고해성사를 주는 데에 주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는 기회를 통해서 사람들을 열심히 가르쳐야

사랑을 키우기

- 신부님 강론 들으면서 저도 참 많이 변했어요. 오늘 병원에 같이 따라가준 자매가 하는 말입니다. - 예전에는 제가 남편에게나 아이들에게 성질을 많이 내었거든요. 헌데 요즘에는 성질을 내기보다는 그냥 듣고 웃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저를 점점 더 신뢰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 놓는 거예요. 그러니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형성이 되더군요. 어느날은 애가 와서 아빠가 자기를 존중해 주지 않고 뭐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한다고 털어놓기도 하더라구요. - 하하. 그게 하느님이 부부를 한 몸으로 이끄는 이유지요. 사실 그러자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거예요. 아버지는 보통은 다들 무뚝뚝하고 고집스럽지만 그래서 집안에서 아버지로서 더욱 권위가 있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자녀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 부족한 면을 채워주는 거구요. 그렇게 한 가정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 신부님이 아프시고 나서 신부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사실 전에는 주저했거든요. 뭔가 다가서기 힘들더라구요.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참 좋아요. 신부님이 주일에 힘들어하시고 그 뒤에 계속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신부님에게 어려움을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지요. -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덕분에 저도 도움 많이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 사실 저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게 좀 힘들어요. 본당에서 누군가에게 인사를 했는데 대꾸도 하지 않더라구요. - 하하. 그 사람이 사랑 안에서 미숙해서 그래요. 사람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랑’ 안에서 자라나야 하는 건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지요. 아직 거기에 미숙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사제라는 직분이 존재하고 그 점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지요. 아직 사람들은 저를 많이 어려워하나 봅니다. 하긴 모든 이와 절친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다만 저마다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고 그 안에서 일치하는 수 밖에요. 제가 맡은 본당의 모든

숨겨진 가치를 바라보기

정말 좋아하던 무언가에 대해서 그 실체를 알게 되어 정말 혐오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황금빛이 나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알고보니 개가 방금 싸놓은 누런 똥이 그 물기 때문에 번득이고 있다는 걸 아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실체를 몰라서 너무나 사랑하는 것들이 많고, 반대로 그 실체를 몰라서 꺼려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것들의 실체는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지니게 되는데 이 눈은 처음에는 세상을 직관합니다. 그래서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이지요. 어린 아이에게 아무리 지폐를 흔들어봐야 그 아이에게는 다른 종이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 아이는 사물의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폐에 그려진 모양새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지폐의 화폐적 가치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셈입니다. 헌데 그 시선은 훈련을 받기 시작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간은 훈련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물들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부모로부터 이쁜 포즈를 수도없이 주문받는 아이는 애써 이쁜 표정을 지으려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칭찬을 얻게 되어 ‘이쁘다’는 개념을 갖게 되고 그렇게 되기를 동경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동생이랑 나눠 먹어야지’, ‘어른에게 공손히 인사 드려야지’와 같은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가치들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들은 나눔의 가치를 알게 되고 공경의 가치를 배우는 것이지요. 그렇게 서로의 시선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지를 보면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피하는 아이가 생겨나는 한편, 그 거지에게 무슨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하는 아이가 갈라지는 것이지요. 단순히 거지를 보면서 외모에 치중하는 아이와 그 거지를 도와줌으로써 따스함을 전해주고 싶어하는 아이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즐기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실체를 모르는 채로

하느님으로 하나되는 이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늘 그리워 못합니다. 매 순간 서로 무엇을 하고 있나를 떠올리고 궁금해하고 보고 싶어 안달을 합니다. 그래서 행여 연락이라도 닿으면 그리 좋을 수가 없지요. 서로 대화를 하는 동안에는 시간이 가는 줄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서로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서 연락을 하지요. 필요가 없으면 연락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서로의 관심사에 집중할 뿐입니다. 상대가 무엇을 하든 그건 사실 중요하지 않지요. 그들은 필요에 의해서 대화는 나누지만 가능하면 빨리 끊고 싶어합니다. 왜냐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니까요. 지금 이야기하는 그 상대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나에게 유용한 무엇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방 표가 납니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위의 예로서 금방 표가 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직분의 중요성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마주하는 태도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우리들은 하느님을 통해서 하나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을 더욱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연결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저마다의 이기심의 구렁 속으로 빠져 들게 마련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아무리 사랑을 쏟아도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이들입니다. 언뜻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관심사가 비슷해서 뭉칠 뿐이지요. 그래서 그 모임은 굉장히 연약합니다. 마치 벽돌을 시멘트를 바르지 않고 쌓아올리는 것과 비슷하지요. 그들은 저마다 떨어져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아무리 서로가 달라도 결국 하나로 모여듭니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지요. 그들은 서로의 부족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

삼위일체

다가오는 주일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겠지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아무리 연상하고 떠올려봐도 세 개를 하나로 묶는다는 생각(1+1+1=1)은 뭔가 이해하기 힘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삼위일체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계시’된 것입니다. 바로 이 주일날의 복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지요.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파견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바로 여기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세례의 기본 양식이며 그 세 분이 같은 지위의 하느님이라는 것, 하지만 실제적인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부는 창조주이시고 ‘아버지’라 불리는 분입니다. 성자는 외아들이신 예수님이시고 인간이 되어 인류의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다가와 당신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분이시지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와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자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한 몸을 이루게 하는 분이십니다. 헌데 이 세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지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모호한 표현 속에서 인간은 많은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세분을 떼어 이해하려고 하거나, 세분을 모두 뭉뚱그려 이해하려고 한 오류가 대표적이지요. 그리고 매 순간마다 교회는 나서서 그렇지 않다고 방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개념들이 함께 파생되었지요. 위격으로는 삼위이고 본체로는 하나라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표현을 달리 했을 뿐,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삼위일체는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건 마치 거대한 빌딩 하나를 작은 박스 속에 우겨 넣으려는

종살이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로마 8,15) 두려움에 따른 생활이라는 것은 지독한 것입니다. 그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무언가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체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고 항상 무언가에 매여 살아가지요.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이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지요.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말하는 그 자유가 ‘방종’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방종으로 인해서 새로운 형태의 구속이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술에 중독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술을 빼고서는 모임이라는 것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항상 무슨 모임이 있으면 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술에 중독된, 술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하면 언제나 술을 끊을 수 있으며 다만 지금은 그러지 않을 뿐이라고 착각하지요. 그러면서 더욱 더 술에 빠져듭니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풀 수 없는 족쇄를 채우지요. 훗날 그 족쇄가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성에 중독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누리는 것을 자신의 자유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는 동안 그들은 더욱 더 성에 중독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족쇄가 되어 훗날 자신을 파멸시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전혀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와는 정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봉헌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선택을 자유로이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 셈이지요. 자유로이 내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

사랑 받으셔야 할 성모님

성모님은 배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이들이 성모님을 두고 왈가왈부하기 일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역사 안에서 위대한 위인이 나오면 그분의 어머니를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헌데 성모님을 두고 자꾸 논리적으로 파고 들어서 말이 안된다고만 하고 있으면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만나서 하느님 앞에 드린 찬송가는 구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아름답기 그지 없으며,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계셨고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와 어머니를 하나로 엮어 주셨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성모신심은 ‘사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지나친 기복적 신앙은 피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묵주기도를 실제로 드려본 신자라면 그 안의 신비들이 ‘성모 우상화’와는 전혀 상관없이 모두 성경적인 근거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어렵니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송 그 자체도 천사가 인사한 말로 이루어져 있고, 그 뒤에 붙는 간구는 우리의 죽음의 시기에 보호를 요청하는 내용입니다. 성모님에 대해서 선포된 교리는 가톨릭 교회에서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승에서 비롯한 것이며 성모님의 구체적인 발현으로 증명된 것들입니다. 무염시태, 동정잉태, 천주모친, 몽소승천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교리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모님의 우리를 위한 애틋한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류 전체를 돌보시려는 그분의 사랑은 이미 여러번 역사 속에서 입증이 되었지요. 큰 전쟁이 있을 적마다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성모님을 애써 무시하려 하고 공격하려고 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니 어찌 모순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내 어머니를 욕하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과연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성모님은 사랑을 드려야 할 대상입니다. 가톨릭 신자 여러분, 주저하지

공부합시다.

불교나 유교의 교리는 이치에 맞고 명확합니다.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간들이 알아듣게 풀어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대부분 이치에 맞지만 간혹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론, 그리고 성모님에 대한 교리와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이는 이들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명료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잠언과 같은 것들은 읽으면 그대로 거의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됩니다. 하지만 생명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 하느님은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형제도를 반대하고 낙태를 반대하며 인공 수정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혹 신자분들 사이에 불교의 교리가 매력적이라고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지만 조금은 부족한 표현입니다. 가톨릭의 교리에도 얼마든지 이치에 맞고 명확한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접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저마다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뿐입니다. 그나마 요즘에는 저마다 스마트폰으로 카톡이나 카스, 페이스북과 같은 수단을 통해 전파되는 짤막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것이 마치 그 종교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을 하곤 합니다. 가톨릭은 2000년에 걸치는(구약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오래된) 풍부한 교리적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불교가 가르치는 바들을 이야기한 성인을 얼마든지 풍부히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고 더 초월적이며 실제적인 내용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결국 교리라는 것도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이지적으로 만나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혜민 스님이나 성철 스님의 글을 읽어도 다음날 미운 사람을 보면 똑같이 미워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불교에서

지옥

어느 순간부터 교회는 ‘지옥’에 대해서 침묵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지옥’이라는 것이 마치 UFO나 환타지 문학의 한 장르처럼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에 상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둠을 향해서 달려가는 이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경고를 마땅히 보내어야 하며 그 일을 소홀히 하여 정의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거기에 빠져드는 이들을 가로막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녀 파우스티나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지옥에 대해서 잠시 소개합니다. “오늘 나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지옥의 구렁 속으로 갔다. 지옥은 지독한 고문의 소굴인데 아주 어마어마하게 크고도 넓다. 그곳에서 나는 이런 종류의 고문들을 보았다. 지옥의 첫 번째 고문은 하느님을 잃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원한 양심의 가책이고, 세 번째는 각자 지금의 상태가 영구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불이 영혼을 파괴시키지는 않으면서 계속해서 영혼을 파고들어 괴롭힌다는 것이다. 이 불은 하느님의 분노로 붙여진 불로써 순수한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준다. 다섯 번째는 캄캄한 어둠과 숨이 막히는 끔찍한 냄새가 지속되는 것이다. 캄캄함에도 불구하고 마귀들과 저주받은 영혼들은 서로를 볼 수 있고, 서로를 통해 남들의 악함과 자신의 악함을 볼 수 있다. 여섯 번째 고문은 항상 사탄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일곱 번째 고문은 처절한 절망, 하느님을 향한 증오, 비열한 말들, 저주와 신성 모독이다. 이런 고통들은 저주받은 모든 이들이 함께 당하는 고문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특정한 영혼들이 받아야 하는 특별한 고문들이 더 있다. 이것은 감각의 고통이다. 각 영혼은 끔찍하고 묘사할 수도 없는 고문을 받는데, 이 고문은 각자가 범한 죄의 형태와 관련된 것이다. 여러 동굴과 구덩이에서 각각 다른 형태의 고문을 받는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나를 지탱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런 고문들의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죽고 말았을 것이다.

볼리비아 어머니의 날

어머니날을 맞아서 볼리비아 신문에 현재의 어머니들의 상황에 대해서 통계 수치가 나왔습니다. Las estadísticas del Censo de Población y Vivienda 2012, refiriéndose al lugar donde tuvo su último parto y el estado civil, muestra que de 2.935.086 madres en el país, 835.786 son solteras; 1,2 millones, casadas; 75.699, separadas; y 52.183, divorciadas. (ver infografía). Del total, 1.657.069 dieron a luz en un establecimiento de salud y 681.042 en un domicilio. 2012년의 인구 및 생활 조사 통계에 따르면 마지막 출산과 혼인상태는 다음과 같다. 2,935,086명의 어머니들 가운데에서 835,786명은 미혼모이고, 1,200,000명은 혼인을 했으며, 75,699명은 별거 중이고, 52,183명은 이혼한 상태이다. 총 1,657,069명이 의료 기관에서 출산을 했고, 681,042명이 집에서 출산을 했다. 미혼모라는 말은 말 그대로 남자에게서 자녀를 얻기만 해서 혼인 없이 여성 홀로 출산을 했다는 말입니다. 헌데 그 숫자가 전체 엄마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엄청난 숫자이지요. 실제로 별의 별 케이스가 다 있습니다. 친인척에게 성폭행을 당한 케이스, 사촌과 관계를 맺은 케이스, 학교 친구와 관계를 맺은 케이스, 물론 대부분은 서로 사랑을 해서 일찍 관계를 맺었는데 남자가 무책임하게 떠나가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그래도 사회 분위기가 미혼모에 대해서 지독한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고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이지요. 반면 부정적

하느님보다 군중을 사랑한 그들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마르 11,32-33) 신앙이 없는 이들의 특징은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지니게 될는지를 예의주시하며 그것을 늘 두려워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의견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입맛에 맛는 것을 제공하고 그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돌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은 코에 붙이면 코걸이이고 귀에 붙이면 귀걸이입니다. 물론 그들도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이의 편에 붙습니다. 그들은 언뜻 보편적 가치를 선호하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의 손을 늘 들어주어야 자신들이 먹고 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하느님에게 반하는 이야기를 하기 일쑤입니다. 아니, 사실 하느님은 애시당초부터 상관이 없었던 것이지요. 인터넷 상에는 언뜻 자신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전혀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군중의 의견을 중시합니다. 여기서 군중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표현입니다. 군중은 많은 수의 집단일 뿐이고 하느님의 백성은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군중은 자신들의 선호도에 따라 연합하고 갈라지기를 반복하는 한편 하느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최고로 삼습니다. 인터넷 상의 스타인 그들은 시사적인 문제를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런 일들에 관심을 지닌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의견을 표출하지 않고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의사를 표출합니다. 또한 그들은 스타의 명언들을 인용하는 것을 즐깁니다. 지금은 우리의 교황님도 스타이시니 언제든지 그분의 말씀이 먹혀든

자유의지의 선택

만일 휘발유통을 손에 들고 불 가까이 가는 아이를 보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백이면 백 서둘러서 그 아이를 가로막고 들고 있는 휘발유통을 빼앗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휘발유통이 뭔지 제대로 모를 것이 분명하고 불이 얼마나 쉽게 붙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할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상황을 바꿔봅시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의식이 분명한 어른이 휘발유통을 손에 들고 온 몸에 휘발유를 바른 채로 불 가까이로 다가간다면 어쩌시렵니까? 더군다가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오랬동안 휘발유와 불의 연관관계와 그 위험성을 가르쳐 왔다면 말이지요? 그는 알고 다가가는 것이고 그것은 분명한 그의 결정인 셈입니다. 그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설령 여러분이 지금은 그 앞을 막아선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기회를 틈타서 다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그 행위를 완성하기로 작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자유에서 선이 나오고 자유에서 사랑이 나오며 반대로 자유에서 악이 나오고 자유에서 증오가 비롯합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선도 악도 저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할 뿐이지요. 그리고 그 본능의 기본은 ‘생존’이 될 것입니다. 세상 그 어느 동물도 일부러 자신의 생명을 상하게 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모든 동물은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지요. 하지만 인간도 통상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 강구하지요.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의식적 선택을 자기 스스로 분명히 합니다. 과연 그가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전혀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면 그는 그 책임을 덜 추궁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회가 분명히 있었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하느님은 계실까요?

이 기초적인 질문은 우리가 하느님을 지적으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서 한동안 계속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지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결코 결론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지성 만으로 인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영역을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죄도 사랑도 모두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 지적인 토론만으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떠나서, 자신의 사랑의 실천 없이도 얼마든지 지성으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지에게 돈 한 푼 주지 않고서도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체험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에는 반드시 영적인 면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인 면은 쉽게 묘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인마다의 고유한 체험으로 간직하게 되는 것이지요. 단 한 번이라도 하느님의 맛을 본 사람은 영원히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감미로우심과 그분의 거룩하심, 그 큰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의 영혼 속에 잊을 수 없는 자국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이들은 비록 잠시 엇나갈 순 있지만 결국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체험이 없는 이들,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호와 선호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이들은 심지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 ‘사랑’ 자체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늘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는 것을 상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절대로 투자를 하지 않는 이들이지요. 하느님이 계시냐구요? 사실 우스운 질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가 계시지 않는데 물질 만으로 구성된 이 세상은

의인과 악인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을 그 즉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나 싫은 소리를 하는 이유가 자신의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일 때 더욱 그러합니다. 나의 미완성에 대해서 상대의 충고를 듣게 되면 누구나 반감이 생기는 것이 기본적인 반응이지요. 하지만 인격이 완성되어 가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그 충고를 수용해서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더욱 더 성장해 가지요. 반면 부족한 이들은 그런 충고 앞에서 ‘회피’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충고를 하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기는 커녕 공격을 하려 들지요. 하지만 절대로 그 앞에서 직접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그가 하는 말이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서 기회를 노립니다. “그들은 칼처럼 혀를 벼리고 독한 말을 화살처럼 시위에 매겨 무죄한 이를 숨어서 쏘려 합니다. 느닷없이 그를 쏘고서는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악한 일을 단단히 꾸며 내어 덫을 놓자 모의하고서는 누가 자기들을 보랴고 말해 댑니다.”(시편 64,4-6) 이를 묘사하는 성경 구절은 많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져 부유해지고 가지지 못한 이들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는 부분이 대표적인 구절이지요. 이는 세상 부의 재분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더욱 더 큰 은총을 받아 선을 완성해 나가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가지고 있던 미흡한 선마저 내동댕이치고 악을 향해 질주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후 세계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세상을 기준으로 생각하지요. 행여라도 자기 가족이 지옥에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럴 걱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군가 어둠의 세계에 속한다면 그것은 그가 좋아서 거기로 간 것이기 때문이고 그에게는 희망이 일절 없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의 지상에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는 동정심의 일말도 그에 대해서 가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훗날 우리는 그가 왜 거기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게 될

착한 사람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은 단순히 유약해서 모든 것을 수용하고 그 누구의 마음도 해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사람을 일컬어 착하다고 하지요. 진정으로 착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을 두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약자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강자 앞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낮추어진 이들에게는 사랑을 받고, 교만한 이들, 자신을 한없이 들어높이려는 이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악이 만연한데 그저 괜찮다고만 하고 있으면 나는 그 악을 수용하는 악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필요할 때에 우리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교적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

어제 저녁에는 동네 아주머니가 저녁을 준비해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한 후배가 음식을 준비해서 나눠 먹었지요.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자려고 하는데 저녁 9시가 좀 넘어서 문자가 왔습니다. - 신부님 주무세요? 저희 밖에 있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 그래서 나가 보았습니다. 아주머니 삼총사가 한꺼번에 우루루 들어왔습니다. 순식간에 절간 같던 집이 사람 사는 것 같은 활기를 찾았습니다. - 신부님 죄송해요. 시내에 나가 있다가 돌아오는 게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 괜찮아요. 후배 신부님이 준비해줘서 저녁은 이미 먹었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문자 보냈는데 못보셨나봐요? - 못봤어요.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차를 끓여 내어오고 과일을 깎아서 밤에 간식하라고 준비를 하고 분주합니다. - 감사합니다. 진심으로요. 이렇게 늘 걱정하고 찾아와 줘서 정말 감사드려요. - 에이 신부님, 그러지 마세요. 감사할 필요 없어요. 덕분에 우리는 신부님과 더 친근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은 걸요. - 나중에 천국 가서 보상 받지 말라고 지금 미리 감사 드리는 거예요. ^^ 이리 농담을 하니 모두 웃습니다. - 이제 소변 색깔도 정상이구요. 속도 특별히 아픈 곳은 없어요. 목요일날 가서 검사만 잘 받고 결과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 모두 안심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주머니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은근한 행복감이 밀려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십자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남의 십자가를 바라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제 십자가’가 있습니다. 헌데 정작 자신의 십자가는 쳐다보지도 않고 남의 걸 보느라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성인전을 읽으면 우리는 그 성인들의 삶을 동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는 그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봉쇄 수도원에서 살아가거나 사막의 은수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살아간 사람이고 나는 여기 현실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각자는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는 교구 사제이자 선교 사제로서 지금은 볼리비아에 와 있으니 여기에서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십자가가 될 것이고,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한국에서 교구 사제로 열심히 일하면서 주교님에게 순명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그때 일어날 것이고 지금은 지금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지요. 내 십자가가 아닌 걸 들고와서 지고 가도 안되고 남의 십자가를 보면서 가벼워 보인다고 부러워 해서도 안됩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십자가가 주어지게 마련이고 그것은 자신의 생애 동안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이지요. 혹자는 이 땅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 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내 삶은 팍팍하고 무거운데 그들은 매일같이 배를 두드리면서 맛있는 걸 먹고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누리는 것 같아 보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삶에 주어져 있는 그들의 십자가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우리가 힘을 기를 수 있게 하고 사랑을 채워갈 수 있게 하는 수단을 말합니다.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행위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9,26)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모습이겠지요.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데 실제로 이런 일들은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공동체에 모임을 할 때에 힘있는 이들, 유명한 이들에게 다가서고 싶어하면서 반대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추하거나 부족한 이들,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이들을 꺼려해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외출할 때에 옷을 고르면서 이미 충분히 단정하고 깨끗한 옷이 있는데도 유명 상표의 옷이 없어서 실망스러운 마음을 지녔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행동이 됩니다. 세속적인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온갖 세속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즐기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나 진실한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앙에로의 초대를 꺼린 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공공 장소에서 식사를 하면서 성호를 남들이 볼까 몰래 긋거나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멀리 휴가지에 가서 어디 새로운 곳을 찾아갈까 고심은 하면서 주일이 되어 미사를 드릴 성당을 찾을 시도는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 행동이 됩니다. 이정도 하면 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케이스에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끄럽게 여기면 그분도 우리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신앙의 증거는 위대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고 소소한 데에서 우리 신앙의 증거가 드러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전하기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5) 인간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신학교 4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공동체 생활에 훈련이 되어있던 저로서는 군대에서 처음 접하는 생활들은 크게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군대라는 곳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다른 것은 군대는 ‘생존’을 훈련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것을 배우는 장소라는 것이었고 반대로 신학교는 ‘자기를 버림’을 훈련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장소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머지 않아 찾아왔습니다. 훈련소 생활 몇주가 지나지 않아서 군대 안에서 늘 그렇듯이 소소한 사건은 벌어졌습니다. 저는 식기 담당을 하고 있었고 식판의 숫자와 숟가락의 숟자는 절대적인 것이었지요. 헌데 숟가락이 모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생으로서 죽는 법을 학문적으로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온 저의 양심은 괴로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도둑질이 없고 소위 ‘위치 이동’만 존재할 뿐이라지만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변명일 뿐이고 그러한 행위는 타인이야 고통받건 말건 나만 살면 된다는 분명한 이기성의 발로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위협과 두려움 앞에 내몰린 저의 양심은 보기 좋게 무너졌고 저는 훌륭히 ‘위치 이동’을 수행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군인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살아 남았지만 반대로 제가 그동안 훈련해 온 이타성과 사랑이라는 것이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었지요. 그러한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고 군생활 2년 내내 간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믿음은 보기좋게 바닥을 내리친 것이었지요. 그 덕에 저는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이론적으로 쌓아왔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오직 진실한 삶의 실천만이 내가 진정으로 지닐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삶이었지요. 군대를 마치고 다시 시작된 신학교 생활은 조금 다른 모습이었

사제에게 조언하기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겠지요. 적지 않은 사제들이 좀 친하기 시작하면 신자분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특히 표현을 함부로 하기 시작하지요. 물론 친구 사이에도 교우 사이에도 이런 일은 벌어집니다. 하지만 사제에게서 이런 일이 더 자주 벌어지고 또 반복되어 벌어지는 이유는 그 누구도 사제에게 조언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예 신학생 시절부터 '이 분은 거룩한 사제가 되실 분'이라는 생각으로 마땅히 건네야 할 어르신의 조언도 삼가하기 시작하니 젊은 사제들이 자신들이 도를 넘은 표현도 스스로 캐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서로 삐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데 사제와 신자간에는 오직 한쪽이 내쏟고 다른 쪽이 참는 관계가 일정기간 유지되다가 결국 신자가 냉담하고 떠나는 일이 벌어지니 결국 누구도 사제에게 합당한 조언을 건네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사제 주변에 모인 중심 세력은 신부님과의 친분을 즐기면서 신부님이 자신을 함부로 대해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제는 물론 인격 함양을 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도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을 하지 않은 탓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본당의 머리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은 본당의 학사님들이나 젊은 신부님들을 존중하시되 도를 넘는 행위를 보시면 마땅히 조언해 주셔야 합니다. 독성죄는 사제를 툭 건드리거나 사제가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을 말을 한다고 무조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제가 본연의 일(미사, 성사, 사목)을 하는데 방해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합당한 조언은 기꺼이 해주셔야 합니다. 젊은 사람은 그렇다치고 나이 드신 분은 어쩌냐구요? 아마 그 정도 나이에도 함양되지 못한 인격이면 상당히 진도가 진척된 것이니 안타깝지만 그 케이스에는 마땅한 도리가 없다는 것이 제 솔직한 의견이기도 합니다. 인내 양성 기회로 삼으세요. 그래도 한국에는 사제 임기가 어느정도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거룩한 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거룩한 것을 접하면 그것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수준으로 나아가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하지만 곧잘 세상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끌어내려 생각하려 듭니다. 그러니 거룩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밖에요. 예를 들어 미사를 아침조회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고 성체를 소꿉놀이 할 때 먹는 가짜 모래밥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초를 다지기

행여 제가 천사를 보았다고 한다면 사람들에게서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요? - 저 신부가 24시간 하느님 이야기만 하더니 결국 돌아버렸나보군. - 혹시 정말 본걸까? 그럴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 에이, 뭔가 잘못봤겠지. 엉뚱한 걸 보고 착각한 걸꺼야. 의심이라는 것은 지독한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수용능력’을 벗어난 것을 접하면 일단 의심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헌데 우리가 훗날 다가가게 될 세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우리의 수용능력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지요. 아니, 들으면 ‘의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부어 주십니다. 때로는 체험으로 때로는 꿈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드러내시지요. 하지만 각자의 능력에 합당하게 그렇게 해 주시고, 그리고 이 땅에서 그렇게 해 주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함부로 발설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의심’을 시작할 것이고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찰하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겪은 체험은 하느님께서 말하라고 명하시지 않는 이상은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공식적으로 공인한 체험들이 있으니 바로 루르드나 파티마의 발현과 같은 것들이고, 성인이 되신 비오 신부님에게 일어난 오상의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전기 작가들은 언제나 과장을 약간 섞는 것이 보통입니다. 객관적인 정보를 적어 내려가지 않는 이상 언제나 의견이 섞이게 마련이고 과장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기 작가들이 묘사한 성인의 모습은 그의 온전한 지상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로 어느 정도는 미화가 되고 과장이 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배우는데 가장 안전하고 검증된 수단입니다. 다만 그것을 읽을 때에 교회의 인증을 받은 해설서를 첨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인들이 ‘직접 쓴 자서전’

신중한 말의 중요성

제 개인적인 체험에 따르면, 영적 조언과 용기를 실어주는 말과 사랑이 가득 담긴 대화로 한 사람을 어둠에서 일으키는 데에는 엄청난 힘과 노력과 시간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 한마디로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우리가 말을 신중하게 선별해서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곧잘 감정에 휘둘려 말을 꺼내는 오류를 범하고 맙니다. 감정이라는 당나귀에 고삐를 제대로 채우지 않으면 우리는 생각없는 말을 자꾸 퍼뜨리게 될 것이고, 나아가 그 결과가 나에게 돌아옴으로써 다시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적 방황을 정당화 하려는 이들

나는 모든 완덕의 추구와 모든 성덕은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이 성덕 안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 점의 의혹도 없다. 하느님의 빛을 받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도 알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엄위하심에 반항하는 크나큰 범죄이다. 그런 영혼은 하느님께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 영혼은 크나큰 빛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은 사탄을 닮는 것이다.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면서 그 뜻에 언제나 충실하게 따랐음을 성찰할 때, 아주 신비스런 평화가 내 영혼 안으로 들어왔다. 오, 예수님, 제가 주님의 뜻을 알게 되면, 그것을 실천하는 은총도 함께 제게 내려 주십시오. 오 하느님.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 중에서... ================= 간혹 자신의 신앙적 방황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명백한 오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미사의 은총에서 멀어지라고 명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찬의 전례의 거룩함을 알고 예수님의 몸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가톨릭 신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어려움(몸을 가눌 수 없는 병환, 미사가 없는 환경 등등)이 아닌 이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셈입니다. 모쪼록 하느님의 자비가 그들에게 머무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정의가 다가올 때에 과연 그들이 무슨 대답을 준비할지 참으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복

이 세상은 행복에 대한 새로운 개념정립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곧잘 행복과 쾌락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이라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느끼는 것입니다. 쾌락을 느끼면 인간은 행복하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쾌락 중에도 불행한 영혼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는 행복을 간직한 영혼도 있지요.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이라는 것은 인간이 참된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반대로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자신이 아닌 것이 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고, 자신에게 소용이 없는 것을 추구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새들은 새들 그대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에 순응합니다. 먹이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그럼에도 새로운 날이 밝으면 다시 노래를 부르면서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정한 때가 되어 더 큰 짐승에게 먹히는 시기가 되면 그렇게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지요. 인간이 행복할 때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때입니다. 헌데 그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언제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학업이야말로 인간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최고의 수단이라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세상 안에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건강과 미모와 같은 육체적인 완성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고, 명예로움을 최고의 인간의 완성으로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데 이 모든 내용들 가운데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고려치 않은 인간 존재는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다 해도 미흡할 뿐입니다. 결국 죽음이 찾아들고 나면 먼지로 돌아가는 존재에 불과하지요.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찾지 않으면 의미가

첫 마음으로...

오, 사제들이여 수도자들이여. 영혼들을 위해 헌신하고 기도로 돌보아야 할 여러분들이 정반대로 보인 그릇된 모범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수많은 영혼들이 훗날 여러분들의 마지막 날 다시 일어나 증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라도 하느님의 자비에 기대고 그분의 은총을 청해 처음 마음 먹었던 일들을 하십시오.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한 목숨 잘 지내려고 이 귀한 성소를 받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극복

하느님은 구름에 가려져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이 흐릿한 게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흐릿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의 한계로 인해서 하느님을 올바로 ‘직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모습이 구름에 가린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분이 신뢰할만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부족함이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가로막는 셈이지요. 벼랑으로 떨어지다가 나무 뿌리 하나를 겨우 붙들었는데 실은 발 아래 1미터에 굳건한 땅이 있는데도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죽자고 나무뿌리를 꼭 쥐고 있는 셈입니다. 그 나무뿌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미모, 건강 따위가 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단 내려와 하느님이라는 땅에 발을 디디고 나면 하느님께서 필요한 나무뿌리를 지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 나무뿌리들을 붙들고 다시 올라가 여전히 매달려 있는 이들에게 아래에 땅이 있다는 것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죽자고 자신이 붙어 있는 나무 뿌리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시선을 넓히면 얼마든지 다른 수많은 기회를 볼 수 있는데 지금 눈 앞의 것에만 매달리는 모습을 집착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런 집착은 신앙인들 안에서도 얼마든지 관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하나의 옵션으로 지니고 살 뿐이고 그것을 자신의 굳건한 바닥이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무 뿌리에 해가 가는 상황이 되면 언제라도 신앙부터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지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와 다투어 자존심이 상했다고 미사에 나오지 않고, 신부님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미사에 나오지 않고, 새 성전을 짓는데 건축 기금이 부담이 될 것 같으니 미사에 나오지 않는 식

자비의 때

지금은 하느님의 자비의 때입니다. 어느 영혼이든지 그분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 자비에 기대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시기이죠. 사람들은 이 중요성에 대한 인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헛되이 보냅니다. 단 한 번의 성호도 긋지 않은 채 말이지요. 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고 돈이 많다고 해도 결국 지나가버리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자비의 때를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볼리비아는 맑음

안녕하세요~ ‘볼리비아는 맑음’의 마진우 신부입니다. 오늘은 저희 프로그램 제목과는 다르게 비가 살짝 내렸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공기가 굉장히 시원하네요. 이런 날이면 늘 생각나는 게 있죠. 짬뽕~ 얼큰한 국물에 해물이 잔뜩 들어간 짬뽕 한 그릇이면 이런 날의 우울함은 가뿐히 날려버릴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첫곡은 황신혜 밴드가 부릅니다. 짬뽕. 자, 잘 들으셨나요? 아주 그로테스크하지만 재밌고 신나는 곡이지요?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멀리 사는 석상희 신부님이 어제 밤에 와서 곰탕을 끓여놓고 가셨어요. 아, 후배 신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 따뜻한 국물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지 않나요? 오고가는 음식 속에 정이 싹트게 마련이지요. 그렇습니다. 구수한 곰탕 냄새가 흐르는 진한 정을 느끼려면 이 곡이 일품이지요. 이동원 박인수가 부릅니다. 향수. 아, 언제 들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곡이에요. 그렇습니다. 지금 바깥으로는 어둠이 내리고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욱 이 곡이 애절하게 와 닿네요. 오늘 저녁에는 총회장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본당 꾸려나가는 상황을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지요. 비록 몸은 쉬지만 마음은 여전히 분주한 느낌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라는 게 그렇지요. 걱정이 끊이지를 않는 법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분주할 때에는 이 곡이 제격이지요. Bobby McFerrin이 부릅니다. Don't Worry Be Happy 아, 이 노래는 제가 개인적으로 참으로 좋아하는 노래예요. 언제 들어도 잔잔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을 가질 수 있지요. 가사 내용도 일품이랍니다. 기회가 되시면 찾아 번역해 보시길 바래요. 오늘 ‘볼리비아는 맑음’ 이정도에서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이런 저런 생각과 걱정이 많으시겠지만 훌훌 날려 버리시고 새로운 하루 즐겁게 시작하시길 바래요.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마지막 곡으로 Pharrell Williams의 Happy 들려

소경 바르티매오의 영적 성장 과정

첫 소식 - 바람과 추구 - 시련 - 극복 - 부르심 - 두 번째 소식 - 포기와 응답 -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확인 - 청원 - 성취 - 제자됨 첫 소식은 간단합니다. 그저 위대한 한 사람이 지나간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그런 소식을 접합니다. 성당에 가면 좋다느니 하느님이 계신다느니 하는 첫 소식을 우리는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이에 그 소식을 접한 이들에게 바람이 생겨납니다. 원하는 것이 생겨나지요.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뭔가 좋은 게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면 가보고 싶어지게 되고 찾아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바로 시련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뭐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하느냐며 그냥 세상살이나 잘 하라고 합니다.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고 그런 종교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거라고 조언을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집에서 반대하고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극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바람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고 찾습니다. 그렇게 시련을 극복하고 우리는 내면으로 성장하며 원하는 것에 더욱 다가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런 우리의 원의를 보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무렵, 두 번째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직접 들려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해주는 자들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그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대변자로 그분에 대해서 알려주고 그 소식을 전해 줍니다.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그가 하느님에게 다가서게 도와줍니다. 이에 당사자는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을 포기하고 일어납니다. 장님인 걸인에게 겉옷은 모든 것입니다. 추위를 피하고 자신을 보호해주는 수단이지요. 하지만 그는 기꺼이 그것을 벗어 던집니다. 그만큼 자신이 다가가는 분의 능력에 신뢰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는 벌떡 일어나서 그분에게

다양성 속의 일치

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으니,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집회 42,24) 성경 안에는 사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모든 지혜가 비유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뭍혀 있는 보물은 파내어야 합니다. 헌데 성경을 읽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것을 다 알아보기라도 한 듯한 태도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집회서의 이 구절은 만물의 서로 상관된 속성을 훌륭하게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제 몫을 차지하도록 하셨습니다. 다만, 서로가 서로의 불완전을 채우게끔 계획하셨지요. 그것이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불완전을 채워주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비난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요. 또 반대로 자신이 가진 장점을 내세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마치 자신은 완벽한 사람이고 자신이 지닌 흠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며 주변의 사람들이 지닌 장점은 아무것도 아니고 반대로 그의 아주 작은 흠은 엄청난 것인 양 수근대고 비판하곤 합니다.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판단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 모두 부족한 사람들이고 우리 모두는 형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고 배고픈 자에게 가진 것을 나누고 소외된 자를 방문하고 아픈 이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채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성격이 다른 것은 그 서로 다른 성격으로 상대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공동체에 나와 다른 형제가 있는 것은 그 다름이 공동체를 충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의 조화를 보기에 앞서 나의 기호와 선호도를 살피기에 불만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서로 짝을 이루게 하여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