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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15의 게시물 표시

빵과 표징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6)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신 일이 큰 인상을 남기고 후대에 남을 것을 알고 계셨지요. 그래서 알면서도 행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표징을 찾은 것이 아니라 빵을 찾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찾는 모든 표징들마저도 ‘빵’을 근본으로 삼지요. 그들은 빵을 통해서 표징마저도 오염시켜버리는 것이지요. 그들의 빵에 대한 욕구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표징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표징이었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표징이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표징을 바라보기보다는 언제나 빵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미흡함에 대해서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수많은 교리교사들이 지녀야 할 자세이고 나아가서 모든 ‘가르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족합니다. 교육자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태의 삶을 유지하고 살아가지요. 그러기 위해서 교육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가르치고 이끌고 충고하고 훈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언제나 제자들과 사람들을 향한 따스한 사랑을 품고 그들을 가르치고 이끄셨습니다. 진정한 목자의 표상이지요. 사람들은 앞으로도 한동안 빵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빵을 통해서 거룩함의 표징으로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야 그들은 그 표징을 전해주는 분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감사하게 되겠지요.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4-35)

보아야 하는 것

보아도 그만 보지 않아도 그만인 것은 보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오히려 보지 않으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아야 하는 것은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으면 계속 그 욕구가 내 안에 남아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보지 않아도 되는지를 사람들은 올바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에 엉뚱한 선택을 합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보아야 하는 분입니다. 그분을 보지 않는다는 것, 그분을 볼 의욕이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의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무엇이든지 보아도 그만 보지 않아도 그만인 것들입니다. 다만 그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의 무언가에 대해 강한 욕구를 가지고 반대로 하느님을 무시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하느님과 별 상관도 없는 일을 추구하고 어떻게든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반면 하느님의 가치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신 그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지요. 훗날 사람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살아온 매 순간순간 선택할 필요가 있었고 그 가운데 늘 하느님을 향한 방향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지요. 한 마디의 대화를 하는 데에도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하느님 아닌 것을 향한 선택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선택했던 이들은 기쁨에 차게 될 것이고, 그 반대는 가슴을 치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깨달음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마태 13,51) 비록 제자들은 ‘예!’라고 대답했지만 깨달음이 진정으로 그들에게 가 닿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늘나라의 가르침은 듣는 순간 순하게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마지막 날 천사들이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인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진다는 그 가르침을 듣게 되면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연상하고 그렇겠거니 하고 그 지식을 받아들입니다. 그 성경 구절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다는 의미는 과연 의인이 누구이며 악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불구덩이에 던져진다는 것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아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의인의 공동체에 머물러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실천에 이르기 전에 사람들은 말씀을 잊어버리거나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묵상을 통해서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않거나, 삶의 여러 정황들에 부딪혀서 의욕을 상실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씀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철저히 깨달았다면 구원 역사는 달리 쓰여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 각자에게 고스란히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의 각자의 구원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에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악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 속에 머물러 살아가게 되고, 의인들은 그 어두움 속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더욱 빛낼 것입니다. 의인들은 세상 안에 머무르면서 한동안 고통을 받겠지만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의인들 가운데에 파고들어있는 악인들을 골라내어 태워 버리는 불이 가득 들어있는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세상 안에는 자신을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악인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차라리 자신의 악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바꿀 희망이나 생기겠지만 자신이 행하는 악을 ‘선’이

하느님의 집 문간

하느님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사옵니다. (시편 84,11) 우리나라 속담에 용꼬리보다는 뱀대가리가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수준일 바에야 높은 레벨에서 허우적대니 차라리 낮은 이들 가운데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성경적 차원에서는 정반대로 가르칩니다. 악인의 천막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합니다. 왜그럴까요? 누군가의 문간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것보다는 다른 누군가의 천막 안에서 떵떵거리며 주인으로 지내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요? 사실 이런 주제로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입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정말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적어봅니다. 하느님과 누군가를 비교한다는 것은 굉장히 우스운 일입니다. 비교한다는 것부터 하느님에게는 사실 모욕적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을 어디에 감히 빗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을 할 뿐이지요. 그리고 일상 안에서 수많은 것을 재어가며 살아갑니다. 즉, 무엇이 더 나에게 유익할 것인가를 놓고 순간 순간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선택을 합니다. 그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자신의 ‘약함’ 뿐이지요. 그러나 그 약점마저도 그는 이겨내고야 맙니다. 반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아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이기성을 바탕으로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선택 되기도 내던져 지기도 하는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지요. 모든 것을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 앞에 끊임없는 변명이 마음 속에서 솟아 나옵니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잖아?’, ‘그럼 날더러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죽으란

구름과 불

그 모든 여정 중에 이스라엘의 온 집안이 보는 앞에서,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탈출 40,38)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 표징은 구름과 불이었지요. 밝은 낮에는 그 안을 알 수 없는 신비로, 어두운 밤에는 뚜렷한 징표로 드러난 구름과 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 두가지를 모두 수용해야 합니다. 알 수 없는 신비와 뚜렷한 징표를 모두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을 ‘낱낱이’ 밝히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신앙은 그리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신조가 낱낱이 밝혀지고 모든 하느님의 속성이 낱낱이 밝혀지면 그것은 더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턱대고 가리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어두운 가운데 빛을 비춰 주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정말 힘들고 고된 가운데, 우리의 영적 어두운 밤에 길을 비춰주는 뚜렷한 빛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신비의 영역이 존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영역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버리면 우리는 균형감각을 잃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가르침은 죄인들에게는 뚜렷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많은 이들은 현세의 삶을 유지, 혹은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방향을 찾아서 최선을 다하지요. 조금 더 나은 집, 조금 더 멋진 차, 조금 더 맛있는 음식, 조금 더 나은 미모 등등 온갖 현세적인 것들을 생각의 범주에 넣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압니다. 그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러나 그 사실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기억하는 일은 언제나 우리를 주눅들게 만들고 두려워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죽음은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피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 연장의 꿈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일이 되는 셈이랄까요?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그리고 마르타는 주저없이 ‘예!’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나자로와 마르타, 그리고 마리아 가족을 사랑하신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는 셈입니다. 굳은 신뢰가 있는, 그것도 영원에 대한 신뢰가 있는 가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들입니다. 반면 이를 믿지 못하는 이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약점, 죽음으로 이끄는 약점을 두려워하고 가리려 하고 위선적으로 내비치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가진 약점을 도리어 자랑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응답 받을 것을 알고 있지만, 세상의 자녀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서서히 자각해 가는 중입니다. 그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셈이지요.

하늘 나라의 제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2) 새것은 새로운 가르침이고 옛것은 오랜 가르침입니다. 율법은 오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담겨 있는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의자는 앉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의자가 고가의 ’골동품’이 되는 순간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원래의 앉는 목적을 상실하고 ‘보관용’이 되고 말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면 곤란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서로간에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헌데 이 가르침이 ‘골동품’이 되기 시작하면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 채로 존재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어느 가르침에 대해서 파고들긴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전혀 와 닿지 못하게 되지요. 설령 옛것을 모르더라도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옛것을 잘 간직하고서 하느님의 제자가 되면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적인 가르침입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지 못한 채로 옛것만 고수하는 이는 박물관 관장일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

환부가 드러나면 고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활동이 가시적인 것이면, 즉 영에 사로잡혀 그 행동이 완전히 변하고 이 사람이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것이 드러나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바로잡으면 되니까요. 문제는,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가려져 있을때입니다. 즉 속에 상처가 나서 썩어 들어가고 생명이 위험한데도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가 없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인 셈이지요. 예수님께서 만난 더러운 영에 걸린 이는 사실 하나의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실제 복음화의 대상은 그 지역 모든 주민들이었지요. 사람을 살리시는 주님을 두고 돼지떼가 죽은 게 아깝고 앞으로 더 많은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에게 떠나가 달라고 부탁한 그들의 영이야말로 정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더러운 영에 걸린 이를 고치고 난 후에 당신을 따라오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일대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 더러운 영에 걸린 이는 치유된 이후에 ‘선교사’가 되어 버린 셈이지요.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채로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이 더 많습니다. 차라리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면 치유받을 수 있을 것을 아무렇지 않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가니 문제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험담하면서 괜찮다고 하니 그게 더 문제입니다. 차라리 더러운 영이 그를 밀어붙여 고함이라도 지르고 괴팍한 행동이라도 하면 도리어 그를 향한 진정한 치료가 이루어질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일치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에페 4,3) 일치를 위한 전제조건은 ‘하나’입니다. 즉 양측이 동일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때에 일치가 가능하지요. 거꾸로 말해서 일치가 힘든 이유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너와 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요. 두 물건을 가까이 붙여 놓는다고 해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가족이 한지붕 아래에서 산다고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영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내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치가 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일치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니까요. 사랑하는 두 사람은 상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자신을 수정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오직 하느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가 바라보는 방향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는 꼴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참된 일치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는 무엇을 보고 계실까요? 그분이 바라보는 하느님은 어떤 방향성으로 드러나는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에페 4,4-6) 희망, 그리스도의 몸, 성령, 주님, 믿음, 세례, 아버지 하느님...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를 진정 하나로 엮어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와 같은 것을 고백하지 않는 이들은 우리가 가진 방향성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말이 되지요. 아마 분열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

신부질

어릴 적 명절이면 언제나 친척 어르신을 찾아 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날은 제가 예비 신학생이라는 것을 안 한 어느 어르신이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예비 신학생? 와? 신부질 할라꼬?” 그 표현은 지금까지도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 어른에게 사제의 소중한 직무는 ‘신부질’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사제의 직무를 아무렇게나 표현하는 그 표현에서 우리는 몇 가지 내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존중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가 지닌 ‘직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단순히 서품을 받고, 단순히 수도서원을 한다고 그 자체로 사람들의 존중을 이끌어내지는 못합니다. 신자들은 그들 앞에서 예우를 갖추겠지만 실은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바라보고 있지요.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제상과 수도자상에 맞지 않으면 속으로 비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직분은 그가 그 일을 실제적으로 수행할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의사가 의사인 이유는 사람을 치유하기 때문이고 스승이 스승인 이유는 제자를 이끌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돈벌이를 하려고 들기만 하면 그는 이윤을 남기려는 장사꾼일 뿐이며, 스승이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지는 않고 그저 시간만 때우고 최소한의 것만 하려고 하면 그는 월급쟁이일 뿐입니다. 사제가 신부질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신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의견은 부차적인 것일 뿐입니다. 한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 핵심이지요. 예수님은 가장 본인의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의 질시와 중상과 험담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이들에게도 내치임을 당해야 했지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신부질을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하던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마지막 판단은 하느님의 몫이니

선교의 두가지 방식

싫다는 걸 억지로 잡아당기면 끌려오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지니고 있으면 자연스레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부류의 것들은 서로 상충되게 마련입니다. 하나를 사랑하는 이는 다른 하나를 무시하게 마련입니다. 성경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몸으로 느껴지는 것, 즉 선교사는 돈이나 물질로 사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를 사랑합니다. 자신들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베푸는 선교사를 현지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곧 한계를 드러냅니다. 물질이 떨어지는 순간 이들의 사랑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를 일단 시작하면 계속해서 그 양을 늘려가야 합니다. 마치 마약을 시작하면 점점 익숙해져서 갈수록 주사량을 늘려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술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이런 식의 선교 방식은 반드시 ‘끝’을 드러내게 되고 그 끝은 비참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전혀 복음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안에 탐욕만 가득하게 되지요. 영으로 느껴지는 것, 즉 말씀의 힘, 성령의 힘으로 사목하는 선교사는 다릅니다. 이 선교사는 초반에 많은 시련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당장 느껴지는 게 없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복음화를 계속해 나갈수록 그 안에 들어있는 ‘십자가’를 느끼게 됩니다. 봉사하기 싫은데 봉사의 자리에 나가야 하고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기 싫은데 그런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복음화의 자리이든지 첫 선구자는 무척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익어야 한다.

예수님은 커리큘럼을 짜고 제자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전해 주셨고 그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용하셨습니다. 곁에 농부가 있으면 농부의 예를 드셨고, 바닥이 있으면 그 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을 적으셨습니다. 그걸 모은 것은 제자들이었지요. 그마저도 정확하고 딱 떨어지게 모인 게 아니라 우리는 복음서를 4개나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계획이 없으셨던 것도 아닙니다. 나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그가 죽고 난 후에 그에게 찾아갔지요. 그리고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한 계획을 날짜를 잡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계획에 따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제 시간에 제 일을 딱 떨어지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때’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현대 사회를 살면서 일분 일초에 맞춰서 움직이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닮은 농부셨지요. 씨를 뿌리고 나면 싹이 트고 열매가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난의 씨앗’이 심겨진 것을 아셨고, 그것을 추수할 때가 다가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의 씨앗이 뿌려진 것을 알고 계셨고 머지 않아서 그 결과가 다가오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직 미흡하지만 신앙의 싹이 뿌려졌고 비록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겠지만 다시 뉘우치고 돌아와 당신의 양들을 돌보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참으로 바쁩니다. 약속한 시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 준비되지 않으면 바로 화를 내는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미리 많은 준비를 해 두었다가 제 시간에 꺼내야 해서 늘 긴장되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삶의 모습을 바라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천천히 익어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신이 우리 안에 뿌리신 사랑의 씨앗이 점점 자라나 싹을 틔우기를 바라셨지요. 그래서 씨 뿌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눈으로 아름다움을 체험합니다. 외모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지요. 일단의 지식인들은 멋들어진 이론에 아름다움을 체험합니다. 논리정연한 글이나 전혀 몰랐던 수많은 지식 정보들을 접하면서 활홀해하지요. 그리고 영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 사랑이 가득한 사람을 보면서 느끼는 아름다움이지요.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번째 아름다움, 즉 외적인 아름다움과 두번째 아름다움, 학적인 위대함과 같은 것들에만 치중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아름다움을 알지만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반면 외모를 바꾸려고 하거나 알지 못하는 지식 정보를 습득하려는 노력은 게을리 하지 않지요. 뒤처지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이 영적인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서는 의지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선과 사랑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을 얻을 수 있지만 내가 그것을 얻었을 때에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에게 남아있지 않고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어 썩어 버릴 것이고 기억해 둔 지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퇴색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지나간 시대의 낡은 정보를 두고 오늘날에 와서 아름답다고 감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휴대폰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더욱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나면 옛 것이 되어 버리고 말겠지요. 그러나 선과 사랑, 진리와 정의는 결코 변하지 않고 그 가치를 발하고 인간은 지상의 삶을 다하고 나면 천상의 삶에서 자신이 지닌 영적 가치를 바탕으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외적인 미모에 많이 치중되는 것 같지만 의외로 내적인 아름다움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이쁜 연예인이라도 그가 하는 행실이 좋지 못하면 우리는 그를 미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가 짓는 모든 표정에서 거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조금 수수하고 못났다 하더라도 일단 그를

대림 1주 주일 강론(2007년 말)

안다고 생각하는 것... 범어성당에서의 일입니다. 한 고등학생 친구가 있었습니다. 인물도 좋고 성당 학생 밴드부에서 드럼도 치던 녀석이었습니다. 전날까지 생생한 표정으로 만나던 녀석이었는데 어느날 밤에 그 녀석 누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 동생이요... 많이... 아프거든요... 기도 좀 해 주세요..." 듣자하니 자전거를 타고 장난을 치다가 머리부터 떨어져 중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부랴부랴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지만 이미 의식은 불분명해 보였습니다. 포항 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일할 때의 일입니다. 한 아저씨가 실려왔고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습니다. 주절주절 말도 하던 그 아저씨가 갑자기 왈칵 피를 토해 내더니 쇼크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모두들 당황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기를 써서 호흡은 살려 내었지만 이미 아저씨의 의식은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보호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의사에게 대들어도 보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습니다.  언제 다가올 지 아는 것은 누구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쪽지 시험 날짜가 내일이라면 나는 오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수능이 언제인지 알기에 고등학생들은 고3때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생을 거쳐 준비해야 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이라는 시험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다가올는지 모르는 시험입니다. 세상 안의 시험은 잘못 치루더라도 그 부분만을 희생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죽음'이라는 시험은 잘못 준비했다가는 우리의 영원한 삶을 날려버리게 됩니다. 헌데 의외로 사람들은 천하태평입니다. 그다지 이 '죽음'이라는 영원의 시험 앞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들의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나에게 죽음이 언젠가는 찾아오겠지만 

우리가 따라야 할 삶

살아야 하는가?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당연히 ‘네, 살아야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수식어가 하나 붙었습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의견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착하게만(순하게만) 살다가 당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런 미묘한 표현의 차이를 극복하고 인간이 정말 진리와 선을 따라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대체로 동의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이 질문은 충분한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아니라도 세상에는 성인이 많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 또 교회가 지금까지 행해 온 수많은 악행을 바탕으로 예수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 등등 수많은 갈림이 생겨나기 시작하게 됩니다.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을 따라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이 질문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이들이 더 많아집니다. 저마다의 교회가 있고 저마다의 규칙이 있고, 서로 상충되는 세부 규칙들도 있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분열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OO본당 OOO신부님의 지도 하에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을 따라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쯤 되면 갈등이 얼마나 심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OO구역 구역장이 말하는 대로 OO본당 OOO신부님의 지도 하에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을 따라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그만할까요? 아마도 이리 저리 갈라진 수많은 의견들이 온전히 하나로 통합되는 날은 지상에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곧잘 지나치게 세분화된 항목을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OO구역 구역장을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그가 말하는 대로 하십시오. OOO신부님을 존경하고 그분이 가톨릭 교회에 어긋나지 않고 예

말씀을 향한 거부감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마태 13,15) 이 말을 듣고 의아해하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이 되어서 사람들을 구원할 생각을 하지 않고 왜 고쳐주지 않으려 하느냐고 성질을 내는 것이지요. 천만에요. 정반대입니다. 하느님은 이 표현을 통해서 사람들이 본인의 뜻을 더욱 확연히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위의 표현을 듣고 마음 아파하면서 보다 더 제대로 듣기 위해서 애를 쓰고 진정으로 치유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위의 표현을 들으면서 하느님을 비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둘은 하나의 같은 표현으로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걷는 이들이지요. 하느님은 그 누구도 잃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대한 신뢰가 없기에 사람들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말씀을 분별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의 감정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중심으로 말씀을 분별하려고 드는 것이지요. 제 구미에 맞으면 좋은 말씀이고 제 구미에 맞지 않고 성가시게 하면 나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힘내세요. 당신이 세상의 중심입니다.’라는 식의 표현을 들으면 좋은 표현이라고 치켜 세워주고, ‘우리는 하느님에게로 다가서기 위해서 지금의 삶을 반성하고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라는 표현을 들으면 권위적이라고 하고 독기를 품기도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바라지만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다고 하는 이가 있으면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려 하고 우리의 의지를 일깨우려 하니 그게 싫은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변화되거나 굳어지거나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하루에도 수십번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아주 작은 봉사와 사랑의 실천 앞에서 우리는 주저하고 거부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고 깨닫기를 거부하는 셈이지요. 그러면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활동은

만질 수 있는 구원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마태 13,16) 구원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만진다는 표현은 굉장히 직접적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만질 수 있는 구원을 지니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직접 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신 분이 ‘인간’이 되어 실존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그 기회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끊임없이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당신을 남겨 두셨습니다. 바로 ‘성체’이지요. 우리는 성체를 통해서 그분을 보고 만지고 심지어는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만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구원을 만져서 구원을 얻은 이가 있는가 하면 구원을 보고 밀치면서 구원을 시기하고 두려워하고 기피하고 중상하고 모략하는 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직접 겪으신 일들이지요. 하혈하는 여인, 중풍 병자, 나병 환자, 간음하는 여인... 그들은 모두 구원을 보고 마주하고 만지고 느끼면서 그분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소위 안다는 자들은 구원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여서 음모를 꾸미고 죽여 없애 버릴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만질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신앙인들입니다. 그 어떤 다른 종교에도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가 지닌 신앙을 온전히 함께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러하였듯이 단순히 그분을 보고 만지고 심지어는 먹는다고 뭔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향한 간절한 신앙,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올바로 체험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성체 앞에서 하품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사의 은총을 잔뜩 받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꽉 막힌 이들이 아니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지고 먹을 수도 있

기도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이 듣고 너를 언제까지나 믿게 될 것이다. (탈출 19,9)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에게 묻고 그분의 의견을 듣습니다. 그런 이들은 사실 ‘남다른’ 이들입니다. 아무나 섣불리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이지요. 기도하는 사람은 남다릅니다. 그러나 과연 ‘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주제이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기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기도를 단순한 기도문의 암송으로 대치하고 기도의 열성을 그 암송의 횟수와 시간의 길이로 대치하기 일쑤입니다. 참된 기도는 성경 표현처럼 ‘내가 너와 말하는 것’,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나누시는 대화입니다. 그리고 대화라는 것은 일방적인 설교, 강연, 독백, 토론, 다툼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지요. 대화라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이르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생각을 전하고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단순히 나의 생각을 전하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고, 또 그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도 대수가 아닙니다. 또 서로 싸워서도 안되지요. 둘의 생각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 즉 참된 기도를 이루는 사람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고함을 질러댈 필요가 없지요. 이미 사람들 안에 깊이 들어 있는 것, 즉 그들의 선과 사랑, 정의와 공정과 같은 요소들에 가 닿을 수 있는 공감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이는 백성들의 신뢰를 얻게 됩니다. 아주 당연한 결과이지요. 그러나 ‘진실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길거리 모퉁이에 서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말이지요.

어둠을 부러워하는 의로운 이들, 빛을 찾는 불의한 이들

빛 / 어둠 성경에는 이러한 대결 구도가 종종 등장합니다. 사실 대결구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어둠은 결코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외적으로 드러나기는 마치 빛과 어둠이 서로 마주해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빛 속에 머무르는 이들은 의로운 이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둠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누구나 약점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온전한 빛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극도로 악한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이상은 빛 속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둠 속에 머무르고 있는 불의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과오로 어둠에 빠져든 이들입니다. 자신의 악행과 죄로 어둠에 잠겨있는 이들이지요. 사실 이런 이들도 상당수 존재합니다. 구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목처럼 어둠을 부러워하는 의로운 이들이 있고, 또 반대로 빛을 찾는 불의한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부러워하는 의로운 이들은 비록 자신이 죄악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어둠의 방향을 바라보고 거기에서 뭔가 즐길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울타리 안에 들어 있지만 언제나 울타리 근처를 기웃거리면서 거기에서 뭔가 맛깔스런 먹을 것을 찾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머지않아 울타리 근처에서 그들을 공격하려는 이리떼의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빛을 찾는 불의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지금의 삶이 불의하지만 언제나 빛을 갈망하는 이들, 자신의 구원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이지요. 하느님은 이런 이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멀쩡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물론 그들의 마지막 순간 그들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즉 빛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가 어둠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최종적으로 그들이 어디를 갈망해 왔는가 하는 것도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노

시련을 통해서 빛을

오늘 장례를 부탁한 아저씨가 장례를 마치고 다시 저를 집으로 데려다 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힘들고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을 통해서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때의 부정적인 것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도와준 셈입니다. 하지만 제 사촌들 중에는 같은 체험을 하고는 더욱 큰 어두움에 빠져 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더군요. 내 아버지 때문에, 내 환경 때문에 하면서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만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 아들놈이 제 잘못으로 화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런 저런 불평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해 주었습니다. ‘네 삶은 네가 선택하는 거야. 이든 저든 우리는 배울 수 있어. 나쁜 것이 있으면 나쁜 것대로 거기에서 좋은 것을 끄집어내면 되는거야.’ 라고 가르쳤지요.” “참 좋으네요. 모쪼록 하느님에게 늘 감사드리는 것 잊지 말아 주세요.” 아저씨를 격려하고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신앙인이었지요. 때로 좋은 환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고 투덜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아저씨의 이야기는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참된 가르침

대학에서 ‘가르침’이라는 것은 지식의 전수를 의미합니다. 교수가 가진 지식을 학생에게 전수해 주고 나면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리도 일상적으로 이런 종류의 가르침을 시행합니다. 신문에서 제일 먼저 읽은 기사를 아직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곤 하지요. 하지만 사실 이는 정보의 전달이지 엄밀히 말해서 가르침이 아닌 셈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정보의 전달’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한 스승님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지니신 사랑을 당신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수했고 ‘부활’까지도 이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다른 가르침, 또는 다른 길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소위 ‘가르친다’고 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예수님에게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영을 바로 세워야 하지요. 가장 우선적으로 깊은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가 습득하는 모든 지식이 유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교회 안에서도 앞서의 가르침, 즉 ‘정보 전달’ 수준의 가르침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르는 교리 지식을 하나 더 배워서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이 흔히 하는 것이 족보싸움, 교리지식 논쟁 따위와 같은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누가 더 위대한가를 가리기 위해서 서로들 다툰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별로 닮지 않은 이들이 ‘가르침’만을 들고 서로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실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차라리 모른다고 했으면 덜 맞을 매를 벌고 있는 셈이지요.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면서 정작 가장 필요한 사랑의 가르침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은총의 공기

하느님의 은총을 가장 쉽게 비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기’입니다. 공기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뜨거운 물체를 만나면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공기가 부족한 곳을 찾아 먼저 거기를 채워 넣지요. 또, 공기를 빨아들이는 이에게 그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제공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뜨겁게 기도하는 이, 열렬한 마음을 지닌 이를 통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을 하시지요. 또한 은총을 빨아들이려는 이에게 그의 빨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무한으로 제공됩니다. 은총을 빨아들이는 능력은 ‘사랑’이지요.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이 ‘흡입력’을 키우지 않고 다른 수단으로 은총이 자신에게 와 닿기를 바랍니다. 즉, 자신들은 그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은 채로 손쉬운 방법으로 좋은 것만 누리려고 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 방법이라는 것은 전혀 손쉬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은총을 얻기 위해서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지요. 그러나 그것이 손쉬운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의지’를 변화시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기도와 외적 행위가 은총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 행위자의 내면이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톤의 물을 쏟아 붓더라도 병에 뚜껑이 덮여 있다면 병 안에는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뚜껑이 열려 있는 병이라면 1리터의 물로도 그 병을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핵심을 놓치기 때문에 공연한 노력을 허비하는 셈이지요. 여러가지 신심 행위, 여러가지 교육과정은 우리를 은총 가까이에 두지만 핵심은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변화되어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그런 여러 신심 행위를 거듭하고, 온갖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겸손은 커녕 도리어 ‘교만’해지기 일쑤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 진정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바람이 존재한다면 작은 성경구절 하나로도 충분히 그 은총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든다는 말은 그분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붙들 수 있는 것, 예수님을 한 자리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이지요.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한한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붙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가셔야 했지요. 이 역시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가신다는 말은 그분의 사랑에 하나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헌데 마리아의 사랑, 인간의 소소한 사랑이 무한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친절하십니다. 마리아의 사랑을 무시하시는 게 아니라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선택해서 그분이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게 놓아주도록 이끌어 주시고 도와 주십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온유하고 친절하며 따스한지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무 사제직의 두가지 면

저는 신학자가 아닌지라 ‘직무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의 기원과 역사와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보편 사제직이 있고, 그 가운데 특별한 ‘직무 사제직’을 맡은 이들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압니다. 그리고 교회가 소중히 가꾸어 놓은 직무 사제직에 수많은 성인들이 언제나 존중하고 순명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도 압니다. 다른 한 편, 직무 사제직을 맡고 있는 당사자로서 그 직분의 중요성과 그 직분을 떠맡은 이의 나약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제라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며 여러가지 인간적인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릇된 판단을 하기도 하고 엉뚱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는 것도 잘 알지요. 저는 교회가 소중히 해 온 직무 사제직을 존중하고 아낍니다. 사제가 없으면 가톨릭 교회의 소중한 보물인 미사도 고해성사로 거행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일상의 삶을 버리고 이 특별한 직무를 떠맡은 이들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인간의 나약함도 직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유혹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첫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그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많은 기도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신자분들 중에 사제의 나약함과 부족함, 심지어는 죄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열심히 사는 사제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사제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이 열심히 잘 살려고 노력하는 사제들마저도 힘들게 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래서 참으로 조심스러운 부분이지요.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사랑일진데 갈수록 저마다의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이 희석되는 느낌이라 안타깝습니다. 신자분들은 많이 똑똑해졌고 사제분들도 나름 세상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자꾸 불협화음이 들려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의와 자비는 공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비 없는 정의는 매서운

참된 변화

한 부자에게 가서 사정사정을 해서 그에게서 남는 돈 10만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부자에게 가서 그의 마음을 얻는다면, 즉 그가 하느님을 경외하게 만들고 그를 하느님 앞에 겸손한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는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전자’를 효율성 있게 일했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에는 눈에 드러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변화는 후자의 경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요한 6,6) 어린아이가 어른과 대화를 하면 어른이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대화를 낮춰 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수준으로 높아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몇마디 어른들이 쓰는 단어를 쓴다고 어린아이의 지혜가 어른의 수준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일을 하실 때에는 사람들의 수준으로 그 일을 낮추어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도 바로 그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어져 드러난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어리석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거룩한 지혜를 갖추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지요. 하느님은 알고 일을 하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일을 합니다. 거룩한 변모에서 베드로의 반응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무엇을 하시려는지 잘 알고 있고 모르는 건 우리들입니다. 헌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이리 저리 재어보려 합니다. 우리의 어줍잖은 지혜로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요. 좋은 시도이지만 많은 경우에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순명’입니다. 특히나 하느님의 거룩한 뜻 앞에서는 ‘순명’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에 순명을 앞에 두고 우리는 반항하기 일쑤입니다. 그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나섭니다. 이해가 될 때까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것이지요. 그럼 하느님이 그에게 당신을 온전히 이해시켜 주시느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택입니다. 우리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온전히 자유로이 행동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속

귀한 것을 사려면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의 ‘대속’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내어 바칩니다. 그 이유는 당신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구하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두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영혼의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가치입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 영혼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지상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헌데 우리는 유혹에 넘어갔고 우리의 영혼을 기꺼이 세상에 넘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얻기 위해서 영혼을 내어바친 것이지요. 이러한 상태를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무언가를 위해서 나의 영혼을 내어바친 상태, 그래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죄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어둠이 당신의 아들을 삼키고 우리 영혼을 풀어주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렇게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의 사건이라고 곧잘 구속 사건을 무시하고는 합니다.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그 오랜 옛날 옛적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따지고 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엄청난 가치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내어바쳐진 제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경우에 내버려집니다. 이는 마치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신비의 약이 존재하는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서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귀한 보석을 뒷마당의 돌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계 예수님은 버려지고 내팽개쳐졌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은 그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분의 수난의 가치, 그분의 성혈의 가치를 아는 이들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마태 20,26) 너희는 나의 자녀들이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는 달라야 한다. 너희에게서는 나의 향기가 나야 한다. 그리고 나의 향기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의 향기여야 한다. 나의 아버지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면서 너희에게 당신의 모상을 내어주셨다. 나의 아버지는 너희를 위해서 기꺼이 나를 보내셨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의 뜻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희생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내가 너희를 위해서 희생 제물이 되기를 바라신다. 나는 너희를 위해서 끊임없이 봉사하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너희에게 선을 행한 내가 너희를 위해서 희생되기를 바라신다. 너희는 이런 나를 닮아야 하고 이런 나를 본받아야 한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실패한 듯이 보일 것이나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죽은 듯이 보일 것이나 죽지 않는다.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이처럼 너희도 나의 길을 따라야 한다. 너희의 상급은 영원 안에 마련되어 있다. 이 땅에서 너희가 안식을 찾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하느님은 너희에게 기꺼이 기쁨을 선사하시겠지만 그것은 너희가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난 뒤가 될 것이다. 나는 이 땅에서 수난 당하고 죽어야 하고, 그것은 나의 제자들인 너희에게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아라. 높아진 자는 낮아지게 된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리를 탐내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 않는 곳에 너희가 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너희는 나의 제자들이다. 너희는 파견된 이들이다. 너희는 나의 말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는 기꺼이 낮은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세상은 그런 너희를 업신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너희의 표지가 될 것이다.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너희가 찬란하게 떠오르는 날이 올 것이고, 억눌려 있던 너희가 세상의 권력들을 심판하게 될

섬기는 사람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6) 두 가지 권위가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고 얻어 지키려는 권위가 그 하나이고, 본인이 갈구하지도 않았고 얻으려고 기를 쓰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권위가 없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과 행동에는 섣불리 이겨낼 수 없는 능력이 존재했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예수님이 얻어내기를 간절히 바라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의 출처는 당신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소소한 재능으로 당신의 권위를 얻어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위의 출처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예수님을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것을 하나도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장 철저한 겸손이 바로 예수님을 가장 높은 분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의 권위를 추구합니다. 우리부터 간절히 얻기를 원하고 그것을 얻고 나면 열심히 지켜야 하는 권위이지요.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그 권위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는 권위가 아니라 ‘권력’일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아주 적은 노력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이유, 사람들이 미모를 얻고자 하는 이유, 사람들이 명예를 얻으려는 이유는 모두 이러한 권력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거나 인물이 뛰어나거나, 명예가 높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가락만 까딱해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높아지고 싶었습니다. 종종 그들끼리 누가 더 높으냐고 다투기도 했고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와서 자기 두 아들들을 높은 자리에 올려 달라고 간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기회를 빌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낮아져야 한다고, 진정한 참된 권위는 낮아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지요. 우리가 자존심이 상

행위 - 신앙 - 행위

성경을 읽다보면 위의 구도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신앙을 중심으로 두 가지 행위가 나뉘어지는 셈입니다. 전자의 행위는 구원을 얻으려는 외적 노력을 말합니다. 즉 율법의 시대의 행위를 말하지요. 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의 상태에 도달하겠다는 노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이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요. 오직 선택된 이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이 학식이 있고 삶이 어느정도 윤택해서 율법적인 생활을 이룰 수 있었던 이들만이 꿈꿔볼 수 있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도 모두가 이룰 수는 없었고 대부분은 위선자로 살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 즉 믿음이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율법적 행위의 준수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예전에는 한계단 한계단 올라서 고층빌딩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면 이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도움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영원한 상급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나 소외되었던 이들, 살기 바쁘고 구원은 꿈도 꾸지 못한 이들이 무척 기뻐했지요.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그에 합당한 생활을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믿음이 거짓된 믿음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니까요. 여기서 두 번째 행위가 등장합니다. 바로 믿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열매’를 말하지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남을 증오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탐욕에 사로잡혀 있고 한다면 그는 자신이 ‘믿음이 없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이냐 행위냐를 두고 곧잘 다투곤 하는 것은 바로 행위가 두 부분을 지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율법의 행위는 파기되었지만 반대로 믿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행위는 더욱 굳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법적 요소를 지키느냐 아니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쩌면 많은 경우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나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거룩함’이란 뭔가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지요. 적어도 손가락 하나를 도려내던지 심한 경우에는 생을 다 바쳐서 이루는 과업을 달성할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하느님이 원하는 거룩함에 도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이 우리에게 심은 생각입니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대단한 업적을 드러내어야 훌륭한 사람으로 취급해 주겠다고 세상은 우리를 가르쳤지요. 그러면서 ‘거룩함’도 그렇게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거룩함에 도달하지 않으면 너희는 쓸모없는 인간이니 아예 시작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요. 즉, 세상의 궁극 목적은 거룩함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거룩함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저마다 하나의 풍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을 이룬다는 것은 풍선의 내부에 가벼운 공기를 채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요. 비록 풍선 자체의 무게 때문에 아직 위로 오르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가벼운 공기를 채워넣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풍선이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하고 훗날 ‘죽음’을 통해서 풍선이 터뜨려지는 순간 우리는 온전히 위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지요. 행여 풍선의 무게를 극복할 정도로 우리의 영혼이 가벼워진다면 우리는 ‘기적의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정하시는 일이고 우리로서는 꾸준히 풍선 안에 가벼운 공기(선, 사랑, 진리, 온유, 친절, 선행, 자비 등등)를 넣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오직 ‘풍선’에만 집중하지요. 언젠가 터져 버리고 말 그 풍선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기를 넣기는 커녕 풍선에 덕지덕지 무언가를 붙여서 그 무게를 더하기만 합니다. 최악의 경우는 풍선 안에 더러운 것(탐욕, 이기심, 시기, 증

마귀 들린 아이?

오늘 한 교리교사가 저를 찾았습니다. ‘신부님, 오늘 교리 중에 비디오를 보는데 한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서 그치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수업 마치고 상담을 해 보니 집에 엄마가 이상한 종교에 가담을 했었다고 하네요. 신부님이 이야기 좀 나눠보셨으면 좋겠어요.’ ‘네, 그러지요.’ 그리고는 그 아이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줄거리는 이러했습니다. 아마 아이가 이런 저런 반항을 좀 한 모양입니다. 헌데 그 아이의 엄마가 이 동네 무당 같은 사람을 데려다 놓고는 주술적 행위를 해 가면서 아이에게 겁을 주고 복종을 시키려 한 모양입니다. 헌데 아이는 그만 겁에 질려 버린 것이지요. 아이가 반항할 때마다 엄마는 아이에게 악마가 들렸다고 했다고 합니다. ‘얘야 잘 들으렴.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시야. 그치? 이 하느님 따로 있고 저 하느님 따로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들이고 그러한 이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지. 그리고 그 교회의 사람들 가운데 ‘사제’라는 이들이 있는거야.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려는 이들이지. 내가 바로 그 사제란다. 그러니 잘 듣거라. 너에게 악마 따윈 없어. 설령 있더라도 지금 신부님이 널 자유롭게 해 줄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너에게 겁을 주려는 사람들 말은 너무 지나치게 신경쓰지 말아.’ ‘네, 하지만 제가 자꾸 엄마에게 대들어요. 그리고 그때마다 엄마가 저에게 마귀가 들렸다고 해요.’ ‘잘 듣거라. 너는 마귀가 들린 게 아니야. 너 엄마 사랑하지?’ ‘네.’ ‘너 하느님도 사랑하지?’ ‘네.’ ‘그래, 바로 그거야. 너는 약함과 악함을 구분해야 해. 너는 하느님에게로 다가갈 줄 알고 엄마를 사랑하고 싶어해. 하지만 지금은 약해서 그렇게 하기 힘든거야. 악함이라는 건 전혀 다른 거야. 그건 아예 사랑과는 정반대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거라구. 하지만 넌 좋은 방향이 어디인지 알고 그것으로 향해서 나아가려는데 아직은 좀 약할 뿐이야. 그러니 걱정하

술자리 문화

아마 여전히 그러하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에 있을 적에 술자리에 가면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미덕이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서로 술을 권하면서 얼른 들이키고 잔을 돌려 주어야 했지요. 특히나 그런 것은 ‘서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소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주는 잔은 얼른 비우고 다시 내어 바쳐야 예의에 맞는 것이었지요. 행여 그 잔을 거부하면 그 높은 사람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곤 했었습니다. 술을 많이 마셔도 멀쩡한 사람은 마치 대단한 무슨 능력을 지닌 것처럼 추앙받고 마시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쪼잔한 사람, 비겁한 사람이 되어 버리곤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마시기를 자꾸 권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은근 기분나빠 하기도 했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이상한 문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술을 처음 접할 무렵부터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술자리에서 다른 문화가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보지를 못한 셈입니다. 그렇게 건강이 망가져가고 절로 술에 중독되어 가는 것이지요. 술은 단순한 기호 식품이고 마시기 싫으면 그만인데 한국에서 ‘술’이라는 것은 마치 친교의 핵심 수단인 것처럼 자리잡아 있는 것 같습니다. 천주교 술꾼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예수님도 포도주를 드셨고 먹보에 술꾼이라고 불렸다’는 것입니다. 천만에요. 예수님은 절제 가운데 드셨고 먹보에 술꾼이라고 부른 것은 바리사이들이 비난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말일 뿐입니다. 물론 음식을 드셨고 포도주를 함께 나누셨지만 절대로 품위를 잃으신 적은 없지요. 제자들에게 폭탄주를 만들어 돌리거나 취해서 추태를 부리신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생각 없는 이들이 만들어 낸 문화가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식 있고 교양 있는 이들은 필요한 때가 아니면 자신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술자리’의 문화는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술이 없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어린 시절 술도 없이 친

빛의 자녀들에게

훗날 모든 비밀들이 까발려지게 될 것입니다. 가리워져 있던 것들이 벗겨지는 날 수치심에 까무러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은 장막을 드리우고 살 수 있습니다. 아직은 속에 시커먼 것을 숨기고 밝고 거룩한 얼굴을 하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쉽게 넘겨 왔던 하찮아 보이던 것들 속에서 참된 가치들이 떠오르게 될 때에 그 보물을 너무나 소홀히 대해왔던 이들이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겨왔던 것들이 한 줌의 흙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그 허무함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일찍부터 예견되어 왔고 단 하나도 허투루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명을 수행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모아서 성경을 읽은 사람이었다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은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쇼핑 사이트의 가격 정보 비교에 더욱 열을 쏟아 왔습니다. 화려한 외모 속의 초라한 내면이 모조리 드러나고 반대로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하찮은 이들의 내면 속에 진주와 보석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날,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분이 힘이 없어서 가만 계시는 게 아니라 그분의 ‘자비’가 정의의 실행을 잠시 멈추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망하는 날 직전까지 먹고 마시고 했었습니다. 고대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지요. 공연한 분쟁에 호기심으로 다가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든 분쟁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다투는 양자는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사랑의 십자가’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의 자녀답게 빛의 길을 걸으십시오. 조용히 침묵 속에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십시오. 공연한 분쟁에 휘말리기보다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한 오늘날입니다

어설픈 식자

사람이 아예 모르면 차라리 겸손해지게 됩니다. 사람이 교만할 때에는 어설프게 알면서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굳게 믿을 때입니다. 세상의 교만한 자들은 전부 어설픈 힘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고수는 자신을 겸허히 낮춥니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지요. 세상에서 교만하고 조금 안다고 온갖 추태를 부리는 이들은 어설픈 식자들에 불과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에 정말 재미있었던 기억이 두 선임병이 서로 다투는데 그 다툼의 주제가 미국의 수도가 LA냐 뉴욕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알려드리면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 D.C.입니다.) 그 둘은 핏대를 세워가며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무언가를 강렬히 주장하고 싶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내세우려는 그 주제에 대해서 생각만큼 잘 알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대를 이어가는 죄악과 자애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탈출 20,5-6) 일단 하느님께서 우리 죄악을 자손들에게까지 갚는 다는 데에 심정 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성격의 부모를 지닌 이의 자손에게 그 영향이 아무것도 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 대 사 대라는 것은 그 부모의 생존 가능 세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 부모가 잘못한 것은 그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고스란히 돌려받게 해 두었다는 것을 말하지요. 자신의 탐욕으로 기른 자식은 그 자식의 악행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축복의 경우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축복은 삼 대 사 대가 아니라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기서부터 이미 현세적인 계산은 엇나간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의 죄악을 자손들에게 갚는다는 식의 표현을 보고 이미 기분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식들을 어떻게 길러야 할 지 모르는 부모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탐욕스러움을 자식들을 통해서 고스란히 이루려는 부모들이 있지요. 자신이 미처 채우지 못한 욕구들을 자녀들을 통해서 채우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참된 가치와 덕을 가르치기도 전에 허영과 탐욕과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부모들은 바로 그 자녀들이 골치거리가 되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들에게 가치와 덕을 가르치고 하느님의 존엄과 사랑을 가르치는 부모는 비록 젊은 시절 희생을 통해서 고통을 겪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노후는 평안할 것입니다. 가치와 덕을 배운 자녀들은 다시 그 가치와 덕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그의 자손들은 축복으로 넘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 십계명에는 살인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공경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잡설

2012년 무렵이었습니다. 제 글을 좋아해주시던 어느 페이스북 친구분이 책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 그해 말에 한국으로 휴가를 나가게 되어 교회 서적을 만드는 어느 출판사의 한 신부님과 만남의 자리가 성사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책에 관한 긍정적 이야기가 오갔고 제가 그린 만화를 가지고도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만화책이건 무슨 책이건 거의 나올 뻔 했었지요. 그러나 휴가를 마치고 다시 볼리비아에 돌아가서 자아성찰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연한 바람으로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그 신부님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책 프로젝트 중단해 달라’고 일방적인 통보를 드렸습니다. 참으로 죄송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글을 쓰는 것은 그치지 않았지요. 그리고 모은 글을 많이 나누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3년이 되어 다시금 몇몇 분으로부터 책을 내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하느님의 뜻이려니 생각해서 용기를 내어 보았지요. 몇몇 출판사에 문을 두드려 보았습니다. 어느 출판사에서는 격려는 하면서도 책은 안될 것 같다는 통보를 받았고 또 어느 출판사는 아예 대답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이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손엘디 형제님을 만난 건 이 무렵이었습니다. 2013년 후반부터 시작된 인터넷 상의 만남은 꾸준히 이어졌고 형제님은 제 글을 관심있게 읽어주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작년이 되어 먼젓번 출판사 신부님과 두번째 컨택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적은 글들의 분량이 상당했고 다시 저서를 출간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요. 휴가를 나가 출판사를 찾아가 출간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초고를 다시금 편집하고 원고를 넘겼습니다. 저는 이때가 제 저서가 나오는 때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 이런 저런 지적과 함께 지금 이 글로는

주님을 향한 목마름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시편 63,2) 최근 나온 매드맥스라는 영화를 보면서 저는 다른 것보다도 저게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사람은 물이 부족하면 불과 며칠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저 사막에서 가솔린을 구하는 것도 일이었겠지만 물이 없이 과연 며칠을 버틸 수 있었을까요? 영화를 보면서 정작 줄거리에는 별 관심이 없고 저 사람이 사막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을까를 한참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을 목말라하는 영혼의 간절함은 대단한 것입니다. 주님을 배고파 하는 것도 아니고 목말라한다는 표현은 그만큼 더욱 간절히 주님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의 말씀의 식탁에 목말라하고 그분의 성체와 성혈의 양식을 목말라하는 이들은 단지 그분이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배가 부른 모양입니다. 무슨 물을 그리도 많이 마셨는지는 모르지만 주님에 대한 갈증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별로 찾지도 않고 만나도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마시고 있나 잘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이 마시는 것은 탄산음료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정신을 혼란케 하는 온갖 향락의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욕구의 목마름을 자극해서 더욱 갈증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헌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세상이 내어주는 탄산음료를 자꾸 들이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마시면서 정작 생명을 전해주는 주님의 샘을 들이키지 않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니, 반대로 생명의 물이 밋밋하고 맛이 없다고 기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길을 정해가고 있었고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목말라하는 영혼은 언제라도 생명의 물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는 물이 모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환호하며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

누군가를 존경할 수도, 동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내가 그와 하나가 됩니다. 그가 느끼는 것이 곧 내가 느끼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은 그분의 위대하심을 알아차리게 되긴 했지만 아직 사랑은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달랐습니다. 사랑이 그분을 찾게 했고 사랑이 그분을 만나게 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제자보다도 가장 먼저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던지 아무 상관 없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늘 마음 속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가 무엇을 할까 궁금해 하고 걱정하게 됩니다. 이 심적 거리가 마리아 막달레나를 제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보았고 제자들에게 알렸고 주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에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가득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이미 그분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매 미사 안에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이미 주님과 함께 머무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자는 밋밋한 반복되는 전례에 지루해 할 뿐이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가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나온다고 해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좋을 뿐입니다. 이러한 비유로써 우리의 사랑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주님 주님’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드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따라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상황이 좋든 나쁘든 나서서 당신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거할 것입니다.

실행하는 사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50) 예수님의 아주 단순 명료한 ‘가족 정의’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랍니다. 다른 건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기준으로 잡고 스스로를 살피면 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으신가요? 거기에는 모두가 아버지 하느님 아래 형제 자매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만 살피면 됩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얼마나 쉽고 간단합니까?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묻지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냐?’고 묻습니다. 묻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그래도 묻습니다. 물어보니 대답해 주어야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묻는 사람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물을까요? 아는 것을 물어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몰랐으니 물어보던지 자신이 하는 것이 의심스러우니 물어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뭔가 열심히 하는데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고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정말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용서를 하라는데 이런 인간도 용서를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일은 너무 힘든 일인데 신부님이 나에게 시키는데 이걸 떠맡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주임 신부님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묻고 또 묻습니다. 헌데 ‘실행’하는 사람은 드물어 보입니다. 묻고 답을 듣고 또 묻고 또 답을 듣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실행하는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여전히 같은 모습입니다. 용서하라 하니, ‘이래도 용서해야 하냐?’고 또다른 질문을 던질 뿐, 구체적으로 용서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실패하더라도 일을 한 번 맡아보라고 하니 ‘지금 내 상황이 이런데도 이 일을 반드시

보라, 여기에 있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마태 12,42)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수많은 관광객들이었지요. 물론 그들 가운데에 절실함을 간직한 ‘순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나머지는 우루루 몰려다니며 휘휘 둘러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한 명의 관광객에 불과했습니다. 가이드 신부님이 하는 말을 흘려 들으면서 그 곳을 구경했습니다. 저에겐 소중한 것이 따로 있었지요. 가는 곳마다 드리는 미사는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니까요. 그러나 나머지는 관광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직접 머무르셨던 나라이고 도시인 만큼 감회가 다르긴 했지만 목적은 어디까지나 관광이었습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에게 관광을 온 게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왔지요. 그녀는 그 지혜를 얻어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마 솔로몬의 지혜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찾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찾는 것을 얻어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찾지 못하는 것을 예루살렘 도성에서 찾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고풍스런 도시와 성벽이 있었지요.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그러한 것들을 찾으려면 마땅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는다면 굳이 예루살렘을 갈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찾으십니까? 그리고 그 찾으시는 것을 어디를 가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여행지에 있습니다. 좋은 물건은 고급 백화점에 있지요. 싼 물건은 시장통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으신다면 여러분은 잘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지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 칭하셨고 이를 먹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

어느 선교사 이야기

어느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게 되었습니다. 헌데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하는 방법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좋은 것을 줍니다. 시내에 데리고 가서 영화도 보여주고, 단체 티셔츠도 맞추어 주고, 여헹도 데리고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먹여 줍니다. 매번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니 외적으로 그는 엄청난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실제로 그는 바쁘기도 합니다. 이것 저것 신경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유지하려다보니 사람들의 요구를 다 채워 주어야 하고 신경써야 할일은 산더미처럼 불어가고 그는 그 모든 요구를 수용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기 스스로를 참으로 분주하게 할 일이 많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선교사’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어느날 이상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날은 본당에서 회식을 마련했는데 먹을 때는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이 청소를 할 때에는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영화를 보자고 할 때에는 자신의 사회생활도 희생해가며 와글거리며 모여들던 교리교사들이 성시간을 할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선교사는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양성’을 시작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때까지 그를 최고의 선교사라고 칭하던 이들이 뒤에서 수근대기 시작합니다. 그가 변했다고 하면서 ‘나쁜 신부’라고 욕을 하는 소리가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 본인에게까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잘 해 주다가 이제 와서 독한 사람이 되었다고 빈정댑니다. 본인이 전혀 하지 않은 일도 만들어서 수근대기도 합니다. 예전같지 않다며 사람들이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주일 미사도 나오지 않기 시작합니다. 그렇게나 헌신적인 것 같아 보이던 사람들이 가장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제서야 그 선교사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상황을 파악하게

표징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2,39) 진짜 표징은 벽의 얼룩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나고 하늘의 구름이 십자가 모양으로 변하고 하는 따위가 아닙니다. 진짜 표징은 전혀 다른 양상이고 눈으로 손쉽게 분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만 알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서서 하느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면서 다른 이가 알아주지도 않을 선행을 할 때에 우리는 진짜 표징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가 그 일을 계속할 때에 그 표징의 징후는 더욱 굳어지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그 어떤 영광스러운 모습이 없음에도 누군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이 할 바를 수행하고 있을 때에 우리는 진짜 표징의 징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요령 없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가짜 표징은 사람을 감탄하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변화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반대로 진짜 표징은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그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도와줍니다. 변화하게 한다면서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만들고 오히려 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건 거짓 예언의 징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로 이런 예언을 즐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증오를 즐기는 사람들, 그들은 거짓 예언자의 거짓 표징을 즐깁니다. 그들은 곧잘 싸움에 가담하고 서로 증오하며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져서 아예 굳어 버리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자녀들은 그러한 이들로부터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속지 않기

장사치들은 우리가 현명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 XX크림을 팔아야 하는데 ‘사람의 외모는 부차적인 것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자신의 노화 자체를 수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식의 표현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현혹할 표어들을 개발해 냅니다. ‘당신의 주름은 수치! 맑은 피부는 당신의 맑은 영혼을 드러냅니다.’는 식의 거짓말을 수도 없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구호를 반복적으로 광고를 통해 접하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어리석은 표현들을 굳은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물건을 파는 이들로서는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그런 헛된 믿음이 있어야 사람들이 지갑을 열어 자신들을 위해 돈을 쓰기 때문이지요. 가능하면 텔레비전 시청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텔레비전은 모든 기술을 총합하고 있습니다. 이미 쌍방향으로 정보 소통이 가능한 텔레비전이 개발되고 있지요. 우리는 우리가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미 상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중이고 정보를 보내는 측은 그러한 정보들을 취합하고 분석해서 더욱 우리에게 매혹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인터넷을 사용하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공연한 시간을 허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저런 쓰레기 정보들을 모조리 보고 나면 마음에는 그 모든 정보가 담겨져 시궁창이 되어 버리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스스로를 인지하지 못하고 괜찮다 하고 있으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많은 경우 세상은 우리를 속입니다. 진실하고 참된 삶에서 참으로 많이 동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길이 진리인 양 우리를 가르치지요. 그리고 진정으로 길을 가르치는 이는 빈정대고 비아냥대며 애써 무시하려고 합니다. 이미 외적으로 이뻐지기로 작정을 한 여인에게 ‘내면을 가꾸는 게 보다 시급하다’고 하는 말은 우스

지혜로운 자

나이가 들어 간다는 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나이의 진행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물론 요즘같은 세태에는 육체적 나이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얼굴의 잔주름을 없애고 잡티를 없애고, 처지는 살들을 다시 메꾸어보려고 성형까지 하는 상태이니 그런 이들의 마음가짐은 짐작해 볼 만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나이가 들어간다는 표현보다는 ‘성숙해진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것 같습니다. 성숙해짐에 따라서 우리가 어리고 젊었을 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이 우리를 두고 드러내 보였던 여러가지 모습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린 시절 마냥 위대해 보이기만 했던 아버지의 처진 어깨를 알 수 있게 되고, 모든 정보의 총 집합소 같기만 했던 어머니의 히스테릭한 면도 눈에 드러나기 시작하며 과거 은사들의 보다 인간적인 면모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두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모두 같은 인간, 나약하고 부족함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성숙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 뿐이 아닙니다. 사람은 성숙해질 뿐 아니라 ‘지혜’가 자라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특별한 부분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이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찾는 이에게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인간은 지혜가 자라나면서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지혜는 하느님의 숨겨진 뜻을 알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하찮음에서 벗어나 거룩한 분의 의지를 받아들이게 도와주는 것이지요. 이 지혜를 통해서 사람은 신비적 차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는 나이를 따라서 절로 다가오는 게 아닙니다. 지혜는 의지를 봉헌하는 만큼 다가오는 것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의지를 고스란히 간직하려고 드는 이

분쟁을 피하기

나는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과 너무나 오래 지냈구나. 내가 평화를 바라고 이야기하면 저들은 전쟁만을 꾀하였다네. (시편 120,6-7) 평화를 미워하는 이들 근처에 얼쩡거리지 마십시오. 전쟁의 불똥이 튈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아서 큰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켜보는 것을 수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수용하기에도 모자란 시간과 노력을 공연한 언쟁에 내어바치는 꼴이지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이 시궁창이 되어가는데도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내세우고 있으니 그들은 그렇게 제 갈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심판관이 되어 이런 저런 것들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아직 우리는 많이 배워야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공연한 언쟁과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완고한 마음

탈출기에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마치 아무런 죄가 없는 이에게 악한 마음을 심어 주어 그가 악행을 저지르도록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표현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절대로 누군가를 죄짓게 만들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런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강론대에서 사람들에게 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말하곤 합니다. 즉 술을 과하게 먹지 말라거나, 아내를 때리지 말라는 내용을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입니다. 술을 마시는 아빠를 두고 거기에 너무 시달려서 제 강론을 듣고 힘을 얻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을 먹고 객기를 부린 것으로 인해서 가족의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그것을 마음 아파 하는 중에 제 강론을 듣고는 뉘우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술을 너무나 사랑하고 자신의 어두운 삶을 너무나 사랑해서 제 강론을 듣고는 오히려 반대로 저에게 적개심을 품는 사람도 있는 셈이지요. 술을 과하게 마시지 말라는 강론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내면에 따라서 전혀 다른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파라오에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동정심’이라던가 ‘선함’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더라면 이스라엘의 탈출 사건은 다른 황제를 통해서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파라오에게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고 바로 신앙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는 단순히 성경 안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우리 가운데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느 신앙인 앞에 참된 길을 향한 방향이 주어지면 그 신앙인은 그것을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이 사건이 엄청난 사건으로 묘사되지만 우리는 일상 안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형식으로 매번 일어나는 것입니

살아남은 양들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예레 23,3) 나는 양인가 아닌가? 아주 단순한 문제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혼란스런 양상을 드러내는 주제입니다. 과연 우리는 양일까요 아닐까요? 양은 무엇을 두고 양이라고 부르고 그럼 양이 아닌 존재들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 문제에 답을 하셨습니다.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것이었지요. 헌데 오늘날 과연 우리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을까요? 아마 성당에 다니는 유치원생들에게 물으면 그 아이들이 주님의 목소리를 더 잘 알아들을 것입니다. - 우리 친구들, 친구들끼리 서로 싸우면 될까요 안될까요? - 안돼요!!!! - 불쌍한 친구 있으면 도와야 할까요 그냥 둘까요? - 도와야 해요!!!! - 자기 전에 하느님께 감사 기도 드려야 할까요 그냥 잘까요? - 기도해야 해요!!!! 물론 오늘날에는 부모님들에게 좀 엉뚱한 교육을 받아서 일단 싸우면 이겨야 하고, 불쌍한 친구는 근처에 가면 안되고, 하느님에게 기도 드리는 건 어리석은 행위라고 대답하는 아이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양들은 주인의 목소리를 압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하는 ‘살아남은 양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양들을 의미합니다. 세례의 외적 행위를 채운 ‘문서상 양들’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촉망받는 직분에 머무른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도리어 바라던 상급은 커녕 벌을 받고, 반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곳에 조용히 머무르던 이들이 찬란한 영광을 입게 되는 일이 빈번할 것입니다.

제 그릇 크기대로

다들 제 그릇 크기대로 살아갑니다. 작은 그릇을 지니고 있으면 작은 것으로 너끈히 채워지고 또 남에게 퍼 줄 때도 작은 그릇으로 퍼 주게 됩니다. 반면 큰 그릇을 지니고 있으면 더 크게 채울 수 있고 또 남에게도 더 많이 퍼줄 수 있게 됩니다. 세상 안에서는 큰 그릇을 지니고 있어서 중요한 일을 떠맡아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작은 그릇을 지닌 이들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세상 안에서는 보잘 것 없는 그릇을 지니고 있지만 신앙 안에서는 엄청나게 큰 그릇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셈이지요. 신앙 안에서 자신의 그릇을 키우려고 노력해 본 사람은 신앙적으로 큰 그릇을 지닌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법입니다. 세상 안에서 성공에 도달하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 다른 이가 지닌 성공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그릇이 일순간 커지기를 바라는 사람이지요. 이런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은 그릇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인 셈이지요. 초라하고 나약한 그들은 제 그릇이 왜 커지지 않나 평생을 투덜대기만 할 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저 미사나 나가는 걸로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지극히 초라한 작은 그릇을 지닌 이들입니다. 이들의 개인적인 구원관은 그저 큰 죄나 짓지 않으면 된다는 지극히 미천한 생각에 머물러 있지요. 때로 신부님이 불러다 그릇을 키우려고 해도 시간이 없다고 능력이 모자란다고 핑계를 대면서 그걸 겸손이라고 착각하는 부류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 안에서 필요한 일, 자신에게 득이 되고 자신에게 명예를 보장하는 일은 도맡아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거기 있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 대접을 받게 되겠지요. 선물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았으니까요. 저마다 제가 원하는 일을 하고 살아가는 셈입니다. 그릇을 열심히 키운 사람은 훗날 하늘 나라에서 그 엄청난 그릇으로 큰 일을 하게 될

양들이 찾는 것

양들이 찾는 것은 맑은 물과 맛있는 풀이고 신앙인들이 찾는 것은 신앙의 모범과 영원한 생명의 가르침입니다. 신앙인들의 영적 갈증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느낄 때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들에게 고기를 내어주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양들에게 두꺼운 외투를 사주어도 소용이 없지요.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에게 엉뚱한 것을 건네면 안됩니다. 신앙인들은 좋은 신앙을 찾습니다. 물론 신앙인이 아닌 이들, 즉 양들이 아닌 이리떼가 섞여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이리떼는 신선한 고기, 양들의 고기를 원하고 신앙인이 아닌 이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들이 먹을 만한 것을 찾지요. 그것은 교회 내의 감투, 인기, 명성과 같은 것입니다. 가난한 선교지에서는 돈을 찾기도 하지요. 물론 가난하지 않더라도 사람들과 엮여서 자신이 하는 장사를 잘 해 보려는 이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리떼를 먹이고 있으면서 자신의 양무리가 잘 돌아간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목동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 번 고기맛을 본 양이 이리로 변신하는 황당한 경우도 존재하지요. 하지만 분별력을 잃기 시작하면 그러한 것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그저 사람들이 추켜 세워주면 그것으로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이 양들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가 최면을 걸기도 하지요. 양들을 물과 풀을 찾습니다. 신앙인들은 신앙의 모범과 가르침을 찾지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 있는 목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목자의 직분을 나누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알아들을 것입니다.

가엾은 마음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사제가 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 목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제의 첫마음입니다.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마음이 사제의 첫마음이지요. 사실 사제가 하는 모든 활동의 근본은 이러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일하건, 병원에서 일하건, 선교를 가건, 본당 신부가 되건 그 근본에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양떼를 가엾이 보는 그 마음입니다. 때로는 쉬는 것마저 희생하고 그 일을 합니다. 때로는 제대로 먹지 못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을 희생해야 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가장 싫어하는 일이라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사제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떼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합니다.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양떼들이 어디로 가야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병원을 운영하는 것도, 선교를 하는 것도 본당에 있는 것도 양떼를 올바로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양떼를 가르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상실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하는 문제이지요. 어느 누구를 탓해서 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모아서 지금 교회 안에서 내가 맡은 부분을 살펴야 합니다. 사제는 사제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구역장은 구역장대로, 신자는 신자대로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무엇을 위해서 지금 내가 맡은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함구령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마태 12,15-16)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했지만 지나치게 알려져서도 안되는 이 묘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치유와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인기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지요. 그분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멀리할 수 있어야 했지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지만 공연히 알려져서 복음화가 방해를 받는 것은 원하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을 시기해서 그분을 없앨 방법을 모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쳐 주면서도 그들의 입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좋은 업적은 잠잠해 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지키기만 했더라도 예수님은 당신에게 허락된 생애 동안 더 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기는 잠잠할 수가 없었고 결국 그 인기가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복음에서조차도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7-21)

성전보다 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마태 12,6) 예루살렘에서 만난 성전 터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습니다. 더군다나 2000년 전의 사람들이 바라보았을 그 성전의 위엄은 대단한 것이었겠지요. 여전히 수많은 유태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과거의 영화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성전보다 더 큰 이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 때문인데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외적인 성전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옷이 중요합니까? 몸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몸이 있어야 옷이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몸보다 옷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허례허식과 가식이 본질을 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유럽에서 만나게 된 수많은 성전들은 그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존재했지만 기도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한 한 사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전혀 엉뚱한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연필의 원래 용도를 모르면 그것으로 젓가락 삼아 국수를 집어 먹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 성전보다 더 큰 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가치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거대한 성전이 너무나 현란하고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에 주님의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하느님의 영은 초라하기 그지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오늘도 헛된 것들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알아볼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기 싫은 것이지요. 왜냐면 나의 마음은 하느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 13,13)

죄 없는 자들 단죄하기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 12,7)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로움일까요? 금요일에 고기를 먹었습니다. 죄입니까? 그럼 금요일에 십수만원 하는 고습 생선회 코스 요리를 사먹으면 죄가 아닐까요? 주일 미사에 빠졌습니다. 죄입니까? 그럼 주일 미사는 절대 빠지지 않으면서 주일 저녁마다 술을 진탕 마셔서 만취하는 것은 죄가 아닐까요? 과연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로움일까요? 위의 예들에서 금요일에 고기를 먹어도 되고 주일 미사에 빠져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라는 보다 깊은 내면의 단계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향수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어딜 가나 향내를 풍기게 됩니다. 반대로 썩은 생선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어딜 가나 악취를 풍기게 되지요.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어떤 것을 지니고 사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향기로운 것으로 만들 수도 또는 악취가 풍기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희생제물’로 상징되는 것은 허례허식을 의미합니다. 즉, 그러한 행위를 하는 이들의 내면에 그 어떤 진정성도 없고 오직 이기적인 목적, 또는 과시하기 위한 목적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삶도 타인들이 자신을 아름답게 보아 주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외적인 형식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그 안에 어떤 진정성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소경이라고도 하셨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라고도 하셨지요.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비’입니다. 자비를 지닌 이, 즉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한 이는 자신의 의지에 향유를 간직한 사람이며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향기를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는

순리

나이가 드는데 주름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보단 주름진 얼굴을 아끼고 사랑하는 게 순리이고 때가 되면 내려와야 하는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둥거리기보다는 겸허하게 때를 받아들여 낮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순리이고 세상에 태어나 나의 뜻을 이루려고 기를 쓰다가 결국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오는 것이 순리이다. 순리대로 살면 마음이 참 편한데 사람들은 순리를 거스르면서 마음마저 편안하려 든다. 욕심이 이만 저만이 아닌 자신의 마음이 바로 순리를 거스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마태 11,28)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한 고생이고 무엇이 진정한 짐인지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그러한 것들을 지곤 합니다. 사람들은 오직 외적인 시야로만 분별하려고 들기 때문에 늘 ‘안락’을 찾습니다. 즉,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가능하면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것은 ‘요행’입니다. 무슨 드라마 주인공처럼 운좋게 억만장자 하나를 만나거나 로또에 당첨 되어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해 온 그 어떤 수고도 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그런 비현실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육체적 안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약간은 불만족스런 상태에서 현재를 어쩔 수 없이 살아나가는 셈입니다. 진정한 고생과 무거운 짐은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 노동과 수고는 고생과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진정한 고생과 무거운 짐은 ‘진실하시고 선하신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그 내면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영혼이 고생과 무거운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안락함을 얻더라도 그 안락함이 ‘도둑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영혼이 고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남의 것을 갈취해서 누리는 평화라면 거짓 평화이고 언제라도 그 갈취당한 이에게 다시 빼앗길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려운 마음에 안정을 얻기 위해서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곤 하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으니 먹고 마시고 놀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하느님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사랑하지도 않았고 사랑할 마음도 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기 자신의 입과 배를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고생과 무거운 짐을 떠맡고는 하지요. 이런 이들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 다른 이와의 참된 사랑의 관계를 구축하지 못합니다. 그는 타인

“나는 있는 나다.” (탈출 3,14)

철학에는 ‘존재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있다’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 말로는 참으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철학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서양의 표현들을 우리글의 적합한 표현을 찾는 것이 어려운지도 모르지요. 존재한다는 것은 눈 앞의 휴대폰이 있다가 그것을 어디 다른 데 숨기면 ‘없다’고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존재론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를 얻음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존재’가 없는 것은 단순히 어딘가로 치워진 게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것을 상상하기는 힘듭니다. 왜냐면 우리가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로 그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존재하지 않음’을 온전히 생각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없던 존재들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하느님은 원래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은 우리가 절대로 온전히 인지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시간과 공간 안의 유한한 존재이지만 하느님은 그 모든 유한성의 존재들을 창조하신 분이시니까요. ‘나는 있는 나다’라는 말은 우리의 주님이신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존재를 부여하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의 주인은 바로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분의 선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더욱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그분의 좋은 것들을 점점 더 상실하게 되지요. 이는 마치 빛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빛을 더욱 받아 밝아지고 반대로 빛에서 멀어지거나 빛을 가리면 ‘어둠’이 생겨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상의 좋고 나쁜 것은 바로 이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근본 자체로 악한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창조된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온전히 좋고 아름답게 머물러 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

하느님의 보증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탈출 3,12) 모세에게 보증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즉, 다른 건 별로 보증할 게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즉, 이는 두가지를 말합니다. 세상적으로는 가장 초라한 보증이며, 신앙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보증인 것이지요. 하느님의 이 약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동일한 보증을 하시기 때문이지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 20) 세상 사람들은 이런 보증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의 삶의 모습을 보아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확고하고 안정된 것인데 하느님의 보증을 받는 이들의 삶은 전혀 확고해 보이지도 안정되어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이보다 더 확고하고 안정된 보증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증한다는데 무서울 것이 없는 셈이지요.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무엇에 기초를 두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 편안함, 정신적 안정감’을 기준으로 확고함을 찾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뜻’에서 확고함을 찾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많은 돈’, ‘드높은 명성’, ‘최고의 권력’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확고함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들은 ‘수단’이 될 수는 있을 지언정 전혀 확고함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지요. 하느님의 보증을 믿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외적 형식을 받아들이는 이는 많아도 진정한 신앙을 살아가는 이는 참으로 부족합니다.

트렌드

10년차 연수의 마지막에 친구 신부님이 책을 한 권 줘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이름만 대면 아는 사람의 책이었습니다. 어느 화가의 이쁜 그림과 더불어 작가의 에세이가 담겨 있었습니다.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유명한 작가의 책이니만큼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 책의 트랜드를 대충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저 자신과 제 글에 대해서도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글이 왜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는지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건 그닥 바라지도 않지만 말이지요. 제가 느낀 것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쓰는 글을 읽어서 여러분들이 손해 보실 건 하나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많이 읽으시고 우리 주님에 대해서 배워 알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삶의 범주에서 조금 더 앞서간 듯 보이는 이들, 즉 더 많은 지식을 갖추고 비범해 보이는 이들을 사랑할 뿐입니다. 왜냐면 그런 이들에게 애정을 주는 것은 전혀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수다거리도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자신을 깎아야 하는 일이지요. 시간과 노력은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는데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일은 하기 싫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려면 자신의 의지를 버려야 하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너무 힘들고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10년차 연수 감사편지

주교님 안녕하십니까. 볼리비아의 마진우 요셉 신부입니다. 주교님과 교구 여러 신부님들이 신경써 주신 덕분에 10년차 서품 동기 사제 연수를 잘 다녀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지 순례는 참으로 의미있는 시간이었고, 이어 스페인에서 이어진 여러 성당과 수도원 순례도 참으로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우리 주님이 직접 머무르셨던 곳에 머물러 그분이 바라보신 풍경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인상깊은 일이었습니다. 단순히 글로써만 체험할 수 있었던 주님의 삶이었는데 그분이 머무르셨던 곳에서 같은 환경을 직접 체험하면서 주님을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에서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스페인의 성당과 수도원들은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예술성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면도 있었으니 그러한 소중한 장소들이 예전의 신앙인들의 뜨거움을 간직하고만 있을 뿐, 지금은 ‘관광’의 명소로만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교구도 같은 노선을 밟지 않도록 언제나 새로운 내면의 변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함께 마음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스무명 가까이 되는 젊은 한국 사제들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는 참으로 뿌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우루루 제의방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는 거룩한 겟세마니 대성당에서 미사 주례를 하면서 주교님과 교구의 발전을 지향으로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동기 신부들의 외모를 많이 변화시켰고 또한 내적으로도 많은 성숙을 이루게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10년 만에 다시 만난 동기들은 예전의 신학교 시절의 유쾌하고 재미난 모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도 하더군요. 신학교 시절의 재치있는 대화들이 고스란히 살아나서 여행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특히나 재외국 사제들은 간만에 만난 동기들을 통해서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한국 정서의 편안함을 만끽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외국에

철부지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마태 11,25)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지식이 엄청난 것이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믿지요. 그래서 늘 가르치려고 듭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진정으로 지혜로운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입니다. 나머지 우리들은 늘 배워 나가야 하지요. 일단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멈춰 버립니다. 더는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닫혀 버리는 셈이지요. 자신이 똑똑한데 새로운 무언가를 들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고립되고 맙니다. 자신이 아는 선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뿐이지요. 철부지들은 뭐든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부지들은 자신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 가운데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은 그래서 ‘철부지’들을 선호하십니다.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드러낼 대상으로 똑똑하고 명망있는 사람을 이용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철부지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십니다. 오히려 그것이 당신에게는 더욱 합당한 일이 됩니다. 이미 능력을 지닌 이를 통해서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신다면 그 능력이 퇴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가장 내세울 것 없는 이를 선택해서 당신의 가장 큰 위대함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내가 별로 가진 재주가 없다고, 내가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고 한탄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우리 자신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하느님에게 나의 의지를 맡긴다면 하느님은 기꺼이 이런 나를 통해서 당신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자신의 특성과 그에 상응하는 자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원하는 음식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을 싫어하는 이는 다른 걸 먹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독극물’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이지요. 그리고 값비싼 음식을 구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먹겠다고 집착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만 모든 음식이 좋은 것은 아니며 음식을 찾는 모든 방식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에게 허용된 것을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간단한 원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이 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지 못한데도 그것을 방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옳지 못하기에 방어를 하려고 듭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면, 그것이 빛이라면 얼마든지 드러내어도 상관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하는 어둠의 행실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느님 앞에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옆에 교황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욕설을 퍼붓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하는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교황님이 곁에 계신다면 그분의 거룩함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갖추고 살아갈 것입니다. 곁에 머무는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 도덕적으로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곁에 머무는 사람도 문제이고 그렇게 분류를 하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돈 많고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는 짐짓 거룩하고 교양있는 체 하고 살아가다가 자신의 부류로 돌아오면 천박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빛의 삶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물 한 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 10,42)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재물을 가진 이는 가진 재물로 도울 수 있고, 시간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으며, 그 밖의 여러가지 재능으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도와주고 싶은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도움이 실제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본당에서 일을 하는 사람을 바라봅시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이유가 존재합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누군가는 사회적으로 맺어놓은 인간관계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홀로 살 수 없는 사람일진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맺어진 인간관계가 있고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다른 누군가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는 그저 돈이나 벌기 위해서 일을 했지만 교회 안에서 일을 하면 사람들이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워주기 때문에 그것이 좋아서 일을 하기도 하지요. 또 다른 누군가는 세상 안에서 할 수 없는 색다른 체험 때문에 그렇게 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다양한 활동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사실 많은 젊은 교리교사들이나 청년들, 교회의 여러 제단체에 참여하는 어른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느님’을 찾아서 다가오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을 구분해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숨어 있기 때문이고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곳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이들이 일하는 곳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곳,

참된 일치

하나가 되자고 말을 한다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인 사람은 서로 말할 필요도 없이 이미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추구하는 바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서로 하나일 수 있는 이유는 서로 같은 장소와 시간을 엄청나게 공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같은 영을 받아 일하기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머물러도 완전히 다른 내면을 지닌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루의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자리에서 보내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서로 마음이 다를 수 있는 것이지요. 세속의 자녀들은 서로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웃고 하지만 그 내면은 처절하게 갈라져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주인공이지요.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화를 해도 늘 자신의 내용을 핵심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기를 씁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최고의 권력, 최고의 권위를 지닌 이가 늘 앞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도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지요. 겉으로 보면 참으로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내면은 피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마다 공허를 말하고 자신이 대화의 주인공이 되어야 만족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자녀들은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사정 만을 서로 나누고 묵묵히 제자리에서 일을 합니다. 그들에게는 말없는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언어’가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말하기보다 살아갑니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되는 말이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세속의 자녀들이 하는 말을 조금이라도 그 내면을 분석하면서 들어보면 참으로 가볍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 자신은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지요. 그래서 대화는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유쾌해 보이는 그런 대화 안에서 이미 서로 상처받고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주님의 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고통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엄마가 치과를 가자고 하면 난리가 납니다. 아이는 가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할 것이고 엄마는 나중에 아이에게 다가올 고통을 생각해서 미리 가서 치료를 받자고 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세지가 평화가 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아픈 곳을 치유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말은 우리가 현재 올바로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즉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어디가 아픈 걸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가 아픈지도 알지 못합니다. 아픈 곳을 알려면 진단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들에겐 스스로 진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마다 모두 박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상당히 아픈데 아픈 곳을 점검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셈이지요. 육적인 아픔은 우리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몸의 통증 시스템이 작용하기 때문이지요. 정신적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트레스가 쌓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고치려는 것은 ‘영적인 아픔’입니다. 그리고 이는 쉽게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영적으로 자신을 파괴 시키지만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쾌락을 누리는 활동이 있습니다. 술을 진탕 마시면서 헛된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우리의 육신은 취기로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의 정신은 마치 즐거움에 가득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이는 자신의 거룩한 영을 파괴시키는 피폐한 활동에 불과합니다. 고급 상점가를 돌면서 물건들을 구경하면 눈은 화려한 물건들로 즐거워지고 마음은 욕구의 간접 충족으로 기뻐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여가활동은 나의 마음 속에 은연 중에 ‘사치’와 ‘탐욕’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활동 중에는 이러한 성격의 활동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기에 모든 것을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38) 십자가는 고통이고 거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일단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많은 의인들은 마치 십자가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나서서 괴롭힘을 당하고 수난을 당하는 모습을 전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나은 방법으로 사건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 외에는 달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를 선택한 것이지요. 그들은 십자가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얻어지는 영광과 상급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주시는 분을 사랑한 것이고, 그 십자가를 먼저 지고 가신 분을 사랑한 것이며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게 도와주시는 분을 사랑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느님의 자녀와 자녀가 아닌 이들을 구분하는 훌륭한 척도가 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고 있나 아닌가를 통해서 두 부류가 나뉘어지는 셈이지요. 아무도 모르게 이웃을 돕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다 쓰고 남은 것을 전해 주면서 그런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서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찬양하게 하는 사람은 전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이 이미 그것을 즐기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희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본인의 의지를 하느님에게 봉헌할 때에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시련거리를 선물받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회사의 가장 어려운 과업을 달성하는 부장이라도 집에서 아내의 설겆이를 한 번 도와주는 것이 그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예언자와 의인을 알아보는 이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41)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예언자는 마땅히 예언자의 상을 받을 것이지만,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도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무언가를 수용할 때에는 그것과 코드가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우리의 선호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없는 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셈입니다. 같은 골목을 지나가면서 누구는 꽃을 보고, 누구는 고양이를 보고, 또 누구는 화려한 고급 상점의 간판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인생길에서 저마다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가 있다는 말은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상당수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예언자가 바로 곁에 있어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예수님이 고향 마을에 갔을 때에 그러했지요. 예수님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셨고 예전의 코흘리개가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분을 지금의 모습, 즉 구원자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그분에게서 합당한 은총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언자가 누구인지 구분해서 그를 받아들이기만 해도 우리는 그가 받을 상급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것이지요. 그가 모두 얻어 놓은 공로를 우리는 다만 그를 알아봄으로써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대로, 메시아 그대로, 그리스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이 받을 상급을 나누어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에페 1,10)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는 계획의 마스터 플랜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체’라는 것지요. 우리의 몸은 머리에 복종합니다. 손가락 하나하나 팔과 다리 모두는 같은 머리에 종속되어 머리의 명을 수용하고 이행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물론 그 머리 안에는 보다 신비로운 ‘영’이 감돌고 있지요. 바로 하느님의 영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하느님의 영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첫째이요, 이웃을 내 몸처럼 돌보는 것이 둘째입니다. 그것이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정말 다양한 모든 활동들에 종사하지만 결국은 우리 머리의 그 두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지체에 일치하지 않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머리가 되어 움직이려는 이들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위주로 만들어 그것에 따라 이루려는 이들이지요.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그의 권력 때문에 그 휘하에 사람들이 몇몇 있겠지만 아무도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말 운명이지요.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의 근본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이웃을 향한 헌신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위대한 개인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셈입니다.

거짓 에언자, 참 예언자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아모 7,12)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 7,15) 거룩한 직분에 종사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밥벌이로 거룩한 직분을 맡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밥벌이로 직분을 맡은 사람은 늘 더 나은 밥벌이를 찾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덜 힘들고 편안하고 안락하며 더 많은 이득을 내는 기회를 찾지요. 그리고 다른 이가 자신의 밥벌이를 위협하면 화를 내고 적개심을 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는 밥벌이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을 갈구하고 사람들의 중심이 되고자 합니다. 목소리가 크고 언제나 자신이 한 일을 광고하고 다닙니다. 반면,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더도 덜도 하지 않습니다. 딱 정해진 만큼, 자신이 받은 사명만큼 수행을 합니다. 물론 그것을 올바로 수행하면 주님께서는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주님이 바라는 종은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종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언제나 고난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난폭한 사람들에게 소외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묵묵히 그것을 참아냅니다.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억울해 하지 않기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마태 10,26)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경우에 억울해합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인데 나쁜 결과가 나의 탓으로 돌려질 때에도 억울해 하고, 또 나의 좋은 업적이 올바로 알려지지 않아도 억울해합니다. 내가 한 잘못이 아닌데 사람들이 전부 내 탓을 하기 시작하면 억울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게 아니라고 항변을 하지만 나의 원의가 올바로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내가 공을 들여서 무언가를 이루어 내었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억울해합니다. 심지어 그 공이 다른 누군가에게로 돌아가도 억울해하기 일쑤이지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억울함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 안에서는 위의 복음말씀이 고스란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은 훗날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전혀 억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인의 감추어진 악행도 선인의 숨겨진 선행도 마지막 날에는 모조리 알려지게 됩니다. 우리 사이에는 전혀 감출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를 확실히 인식을 하고 부끄러움을 당할 짓을 미리 막아야 하고, 또 하느님 앞에서 선한 일을 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식적으로 선행을 하는 이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 하나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자신을 선인으로, 의인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보란 듯이 한 모든 선행의 근본 의도가 ‘이기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수치를 당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창세 50,19) 오직 하느님만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하느님은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의 권위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완전 정반대가 된 케이스지요. 하지만 일상적인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올바르고 공정하게 분별하고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저마다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성경의 요셉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요셉이 당장 형들에게서 시기를 받고 노예상에 팔려갔을 때에는 마찬가지로 억울한 심정에 원망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일의 마무리에 가서 보니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절대로 인간의 권위가 아닙니다. 인간의 권위가 최종적으로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목숨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을 이미 살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우리의 영혼마저도 구렁텅이에 넣을 권위를 지니신 분, 모든 것을 참된 공정과 정의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런 그분을 알면서도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 안에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바

다들 스승이 되고 싶어합니다. 남들을 가르치고 싶어하지요.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 외에는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 외에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스승이 될 것인가? 그것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시사 상식이 가득하면 정치적 스승이 될 것입니다. 학식이 가득하면 학교의 스승이 되겠지요. 음악이나 기타 여러가지에 재능이 있으면 그 특정 분야의 스승이 될 것입니다. 사제는 예수님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워 알고 예수님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제에게서 예수님을 기다리니까요. 헌데 그것이 안되면 사제들은 엉뚱한 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더 전문적인데도 사제들은 그 앞에서 세상 지식의 스승이 되고자 하지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제의 신적 권위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만 실제로는 속으로 이런 저런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말 말할 것이 많고 드러내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제는 ‘듣기’를 훈련해야 하는 것이지요. 저마다 말을 하려고만 하고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서로 다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말수가 적어지기만 해도 현명해 보이게 마련입니다. 물론 단순히 말을 줄이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필요한 때에는 필요한 말을 해야 하지요. 진리와 사랑과 정의와 공정을 드러내어야 하는 때에는 분명하게 드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자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마태 10,32-33) 예수님을 아십니까? 그분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분의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일까요? 그분의 이름을 해석하는 것일까요? 그분을 만지거나 그분과 동시대를 사는 것일까요? 볼리비아는 지금 뜨겁습니다. 교황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당 식구들은 저마다 교황님을 직접 가까이에서 본 사진을 SNS에 올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는 지금 거기에 없지요. 우리 본당의 식구들은 교황님을 만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교황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분의 외모나 그분의 향기를 맡을 수는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분에 대한 전부인 것일까요?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저잣거리에서 만나곤 했습니다. 군중이 밀어닥치는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과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갔을지도 모르지요. 예수님의 체취도 냄새를 맡았을 것이고 예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20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의 외적인 면모를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의 ‘내면’을 안다는 것이지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논할 때에 우리는 흔히 그의 경력을 죽~ 나열합니다. 하지만 그 경력 속에는 그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가 다닌 학교를 아무리 살펴본다고 해도 그가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살기 위해서는 그분이 지닌 영을 지녀야 합니다. 즉, 성령이 없이는, 거룩한 영이 없이는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례를 받고 주일 미사를 빠짐없이 참석한다고 해

선과 악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시편 37,27) 아주 단순 명료한 삶의 지혜입니다. 그대로 행하면 길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악과 선을 구분하는 방법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여기에는 두가지 기준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과 선을 자신을 중심으로 분별하려고 합니다. 즉, 자신이 좋은 것은 모조리 선이고 자신이 싫은 것은 모조리 악이지요. 아주 간단한 논리입니다. 헌데 문제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의 이면에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당장 좋아 보이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망쳐 버리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우리에게는 당장 싫은 것이지만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들이 있습니다. 언뜻 좋은 돈벌이 기회가 생기는 것 같아 보여서 덥석 물었더니 우리에게 사기를 친 것이었고, 반대로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을 떠맡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나의 내면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식입니다. 자기 자신을 선과 악의 기준점으로 삼는 이들은 반드시 넘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내면의 굳건한 심지를 올바로 지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고 나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번째 기준점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선과 악을 분별할 때에 비로소 올바른 기준점, 절대로 변하지 않는 기준점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나 사물, 사람을 두고 ‘하느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도움을 주는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사람은 그들의 선함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악한 사람은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겪는 시련으로 우리가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반대로 세상적으로 좋아 보이는 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과하게 소유하거나 내가 점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나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언뜻 나에게 이득을 주는 것 같아 보이는 일이라도 나의 내면에 교만을 만들어 하

저 나름대로

볼리비아가 여행가기 좋은 곳이냐고, 또 언제 가면 가장 좋으냐고 묻습니다. 헌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주관적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볼리비아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나라입니다. 시골 가는 길의 풀내음을 맡을 수 있고 야밤에는 별도 무지 많이 볼 수 있는 곳이지요. 그러나 벌레를 싫어하고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려는 사람에게 내가 사는 곳은 ‘최악의 동네’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여름은 여름대로 뜨거운 날씨 속에서 일하고는 저녁에 샤워하고 쉴 수 있어서 좋고, 겨울은 겨울대로 시원한 기운을 누릴 수 있어서 좋은데 누군가에게는 여름은 더워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은 곳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변덕은 끝이 없지요. 행복과 불행의 열쇠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끊임없이 좋은 것과 좋은 환경을 찾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의 악이 자아낸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그대로 좋은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든 도시 문명 안에 인간의 탐욕이 녹아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시에 오면 그 아스팔트와 인간들의 탐욕에 도리어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복음 선포자와 박해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마태 10,23) 예수님이 수난 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구원자셨기에 그런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리에서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박해를 피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 있지만 일부러 고통을 찾아다니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박해가 필요 이상의 것이고 우리의 능력 밖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 박해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핵심은 단순히 고통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핵심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한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고 도리어 빛의 말씀에 화를 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귀는 닫혀 있고 그들은 장님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이를 박해하지요. 복음을 들을 기회는 더 많은 이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자는 들을 귀가 있는 이들을 찾아 다녀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억지로 복음을 우겨 넣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들으려는 이들에게 선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분별력으로 이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 이전에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할 의욕이 있는가?’ 라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전할 마음 자체가 없으면 위의 모든 내용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는 이에게는 그 어떤 박해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다만 세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고난을 당할 뿐이지요.

뱀과 비둘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16) 양들이 이리떼 가운데 가면 어떻게 될까요?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공격당하겠지요. 그리고 잔인하게 먹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고 부탁하십니다. 과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행할 모든 악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당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뱀의 슬기와 비둘기의 순박함으로 그 가운데를 헤쳐 나가라는 의미입니다. 뱀의 슬기는 뛰어난 지략을 의미합니다. 뱀은 첫 조상들을 자신의 영리함으로 유혹에 빠뜨린 유혹의 상징이지요.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그런 악한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자녀들의 슬기로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영리합니다. 자신들의 악을 적용하기 위해서 모든 술수를 부리지요.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에 상응하는, 그를 넘어서는 영리함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교묘한 질문에 현명하게 대답하신 것과 같은 슬기가 필요하지요.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맑고 깨끗한 영을 의미하지요. 비둘기는 순박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까이 머물면서도 언제라도 아주 사소한 이상한 일이라도 민감하게 감지하게 되면 곧장 날라가 버립니다.  그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민감한 분별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가능하면 모든 다툼과 어둠의 공격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상징적인 능력, 즉 ‘슬기로움’과 ‘순박함’을 지니고 이리떼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 목적은 사람들에게서 동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런 능력을 지니도록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능력과 함께 사람들과 어울려 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받은 사명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7-8)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은 사명입니다. 선포, 치유, 부활, 일치, 구마라고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선물하려 하신다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지요. 아픈 이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단순히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을 돌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건강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육신은 영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육신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하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회복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먼저 사람들의 영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지요. 죽은 영들은 다시 살려야 합니다. 때로는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실질적으로 죽은 영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부활의 체험을 선사해야 합니다. 물론 그들이 조금이라도 살려는 의지가 있을 때에 가능한 이야기이겠지요. 나병환자들이 상징하는 것은 소외된 이들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육신의 질병보다도 공동체에서 제외되고 소외되는 아픔을 더 깊게 체험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다시금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일치의 은사가 베풀어져야 합니다. 악에 사로잡힌 이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늘날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거의 믿지 않게 되었지만, 어둠의 영은 분명히 존재하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어둠에 봉헌하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악의 세력에서, 마귀들에게서 구해 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거저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거저 받은 은사이니 마땅히 거저 내어 주어야 하는

자기 먹을 것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마태 10,9) 일꾼은 먹어야 합니다. 육신의 일꾼은 삼시세끼를 잘 챙겨 먹어야 하고 중간 중간 참도 챙겨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을 내어서 일을 하지요. 헌데 위의 복음에서의 일꾼은 무슨 일꾼일까요?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입니다. 그 복음은 사랑의 행업을 통해서 전해지지요. 복음을 전하는 일꾼도 잘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하지요. 하지만 이는 단순히 육적인 돌봄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의 일꾼에게는 복음을 전할 기력을 회복하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육체적 정신적 휴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값비싼 음식을 주고 시끄러운 일을 진정시킨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돌봄’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즉, 복음 선포자는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한 법이지요. 나아가 영적인 충만도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는 복음을 지니고 있어야 복음을 활기있게 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복음 선포자가 세속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온갖 세속적인 일에 골몰하고 있다면 당연히 복음의 열정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사제를 존중하고 잘 보살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목적에서입니다. 즉, 그가 더한 열정으로 복음을 충실히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단순히 그가 무언가 대단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 일을 충실히 하도록 힘을 실어 주기 위함이지요. 일하기 싫어하는 이는 먹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 사제들이 잘 묵상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땅한 사람 (마태 10,1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땅한 사람을 찾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마땅한 사람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무엇을 두고 마땅하다고, 합당하다고 보시는 것일까요? 일단 제자들이 가서 한 일은 그 집에 머무르는 것이었습니다. 나그네를 맞이할 줄 아는 이,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전하는 평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이가 바로 ‘마땅한 사람’입니다. 즉, 하느님 앞에 마땅한 사람은 그분이 보내신 이를 받아들일 줄 알고 그가 전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에게 마땅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분의 가르침을 내치고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는 이들일까요?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태 10,14-15)

요셉과 하느님

요셉은 그들 앞에서 물러 나와 울었다. (창세 42,24) 요셉이 원했던 것은 가족의 안부를 아는 것이었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막내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엇나가 있던 형들, 이미 죄를 지은 형들은 그것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궁리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놓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얻음으로써 결국 우리의 전 존재를 온전히 보전하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길들여져 있고 세상적인 사고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내어놓기’를 거부하지요. 요셉은 형들에게 일종의 시련을 줍니다. 그리고 형들이 고민하고 뉘우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뒤에 가서 겪고 있는 감정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언뜻 냉혹하고 잔인해 보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가 고통받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던져 놓으시고 물러나서 사랑하는 당신 자녀들의 이런 저런 모습들을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벤자민을 데려와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아버지와 우리의 모든 가족을 데려와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유의지를 하느님 앞에 내어 바쳐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 길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목자는 길을 아는 존재입니다. 목초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서 양들을 그리로 인도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잃은 양을 찾아 길을 떠나기도 하며 이리의 공격에서 양들을 지켜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군중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 지 알지 못했고 길을 잃어도 누구 하나 찾으러 오는 이가 없었으며 이리와 같은 사탄이 와서 물어가도 그 누구도 방어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에 ‘지도자층’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보다 더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지도자요 인도자라고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셈이었지요. 그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사람들을 이끌었고 결국 이끄는 이와 따르는 이 모두가 ‘율법주의’라는 구렁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그닥 변한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하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야 할 것 같다는 활동을 할 뿐이지요. 수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이 길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걷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영원한 허무로 나아가는 길이지요. 이런 저런 그릇된 가르침과 오류들이 사람들을 덮치고 있지만 그들은 괜찮다고 도리어 그런 가르침들을 따라가서 자신의 거룩한 영을 내어 맡기는 현실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손톱을 어떻게 칠하고, 입을 즐겁게 하는 음식을 어디서 팔며,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개선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는 열띤 논쟁을 펴면서 바로 자기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족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아가 수많은 이들은 길을 잃고 있지요. 신앙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기

오늘로서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마치게 됩니다. 지금은 이곳 시간으로 새벽 1시 40분이네요. 참으로 많은 곳을 돌아 보았습니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 두었으니 원하면 언제라도 다시 꺼내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순례를 통해서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 마음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성지는 절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상상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지는 ‘사람 사는 분주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귀하다는 성지일수록 더욱더 사람들이 가득 들어 차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지를 돌아다니면서 가이드를 하신 신부님이 열심히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물론 다 듣지 못했고 설령 들었다 해도 다 기억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모르고 살아도 별로 상관 없는 내용들이기도 했습니다. 근 37년을 모르고 살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모르고 지내도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성지에 대한 지식 거리 하나가 늘고 주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성지에 대해서 알아야만 할 것은 이미 성경 구절들에 다 나와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한 도성의 엇나감, 사람의 아들의 행보와 같은 핵심적인 내용들은 신약성경을 읽는 것으로도 충분한 일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미 그 누구보다도 성지를 살고 있었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성지에서 실제로 생활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지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한 이들, 그분이 살아 숨쉰 곳 가장 가까이 머무르면서도 그것을 호흡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가는 이들이었지요. 저는 10년차를 맞이한 동기 신부님들과 함께 머무르는 것에 의의를 두었습니다. 동기 신부님들과 함께 거룩한 곳을 거닐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의의를 두었지요. 그리고 성지에 모여드는 신앙인들의 염원에 함께 동참했습니다. 그야말로 ‘관광’이 아닌 ‘순례’를 오는 이들이 뜻을 모으고 마음을 모은 거룩한 장소들에서 하느님께로

일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37-38) 어디의 일꾼인가? 일꾼에게 있어서 첫번째 질문입니다. 과연 어디의 일꾼일까요? 일꾼이라는 직함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항아리 만드는 공장에 들어와 있긴 한데 가진 기술은 돌 던지는 것 뿐이라면 도자기를 만들기는 커녕 도리어 깨부술 것입니다. 어떤 기술을 가진, 어디에서 일하는 일꾼인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이 수확할 것은 당신의 포도밭의 열매들입니다. 그 열매들은 세상의 열매들이 아닙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명예가 아무리 드높아도, 아는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 없습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이는 당신을 충실히 사랑하는 자, 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자 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느님이 원하는 열매이고 하느님은 그것을 추수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일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아무리 사랑의 열매를 추수하는 기술이 있다고 해도 일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추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 일을 구체적으로 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건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야말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의 방향을 올바로 잡고 구체적인 사랑의 일을 시작하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일꾼이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단순히 주일미사 참례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교회 내의 중요한 직분을 맡고 더 많은 교리지식을 갖추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꾼의 일을 보다 열심히 하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 본질적인 일은 될 수 없습니다. 일꾼은 일을 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일꾼일까요? 아니면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밀일까요? 혹시 밀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에 불과하지는 않을까요?

중심 주제

사람은 늘 자신이 생각하던 것을 대화의 주제로 꺼내 놓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창고에서 꺼낼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대화의 주제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주제가 나올 때에 가장 열중하게 되는지를 살펴보면 그의 생각의 중심 주제를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시사, 정치, 경제, 최신뉴스에 너무나도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지요.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합니다. 사랑에 헌신하는 삶을 늘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세상 사정에는 전혀 깡통인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는 곧잘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을 받는 반면, 후자는 묵묵히 들어주기만 할 뿐입니다. 물론 후자의 이가 세상 사정을 듣는다고 알게 되는 것도 아니지요. 아예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생각할 수 있는 중심 요소가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수십가지 주제를 늘 항시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서 결국 그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몇가지 주제를 늘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요. 결국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이나 증권시장 딜러가 아닌 다음에는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그렇게 상시적으로 걱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곁의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지요. 참으로 많은 것에 정신이 팔리는 요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나 다시 마음을 모으지 않으면 곧잘 흐트러지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다시 마음을 주님께로 모으고 한걸음 한걸음 조심히 걸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겟세마니 대성당에서의 강론

겟세마니는 고통의 장소입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은 것이지요. 그 누구라도 고통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은 몇가지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많이 걸어 다리가 아픈 것도 고통이기에 우리는 쉴 곳을 찾고, 더워서 땀이 나는 것도 고통이기에 우리는 시원한 곳을 찾습니다. 선교지에서 벌레가 많은 것도 육체적 고통이고 음식이 맞지 않는 것도 육체적 고통입니다. 육체적 고통 외에 정신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신경 쓸 게 많으면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이 또한 고통의 일종이지요. 아마 대부분의 우리 동기 신부님들은 이 두번째 고통을 겪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사제로 살면서 육신이 크게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조금 더 깊이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으셨을까요? 물론 육체적으로 겪을 수난도 힘드셨을 것이고 사람들의 이런 저런 무시와 냉대로 겪을 수난도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차원의 고통이었습니다. 영적인 차원의 고통은 두 가지로 나뉘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사랑한 이들이 엇나간 길을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분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고통을 겪어볼 수 있었습니다. 제 사랑하는 사람이 참으로 힘든 시간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중략) 우리 주님은 수난의 시간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수차례 경고하셨지요.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씹히고 먹히고 뜯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제가 된 이유입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언제나 사제가 될 때의 첫 마음, 그 헌신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원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진정한 구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마다에게 구원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의미로 작용합니다. 자신이 관심 가지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 지상에서 마늘 엑기스 광고를 하면서 ‘구원! 구원!’이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늘 엑기스를 먹고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었지요. 그 광고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건강의 회복’을 의미했습니다. 오랜 시간 병세에 시달리다가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지요. 집안에 문제가 있는 사람, 가족 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업이 실패한 사람은 사업을 성공하는 것이 구원이 되겠지요. 하지만 참된 구원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영원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 영원의 질서라는 것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기쁨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를 의미하지요. 그것 외에 우리는 다른 희망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현세 안에서 특별한 은총을 입어서 고민하던 문제들이 해결될 수도 있지만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즉 전에 없던 문제에 더욱 시달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고 계시지요. 왜 그럴까요? 우리는 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까요? 어찌보면 간단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지닌 희망과는 전혀 다른 것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희망을 지닌 이들이고 우리는 영원 안에서 희망을 지닌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모습은 그들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에서 희망을 얻지만 우리는 영원을 이 땅에 적용 시키는 데에서 희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이 더욱 가까워지는 데에서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