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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15의 게시물 표시

공소 축제 강론

“얘들아, 조금만 시선을 멀리 두면 많은 것들을 더 현명하게 처리할 수 있어.” 어제 견진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시간동안 강의를 하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흔히들 눈 앞에 당장 드러나는 결과물만을 주시하기 때문에 엉뚱한 짓을 하는거야. 사람이 시선을 조금만 멀리 두면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가 있지. 술꾼들이 왜 술을 먹을 것 같아? 바로 눈 앞에 드러나는 결과물만을 기다리기 때문이야.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지. 그것 뿐이야. 그래서 술자리에 가고 열심히 마시면 다음날 머리가 깨지는 듯이 아프고 속은 울렁거리고 또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일어났던 엉뚱한 일로 아내는 화가 잔뜩 나 있고 자녀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거야. 이런 추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할 수 있다면 술을 절제하고 자제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런 넓은 시선을 가지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아.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술을 마시고 개가 되는 거라구.” 비슷한 이야기를 저녁에 공소 축제 미사에 가서도 했습니다. 축제날이면 늘 빠지지 않는 것이 술이니까요. 여기 사람들은 없는 살림을 쪼개서라도 술은 사먹습니다. 설령 돈이 없어서 밥을 굶을 지경이라도 돈이 생기면 남자들은 술부터 사먹곤 하지요. “술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닙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 그릇된 선택으로 그것을 죄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하루의 힘든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일용직 노동자가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 술 한 잔이 한 병으로, 그 한 병이, 한 박스로 변해가면서 과하게 술을 들이키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사람을 망치는 게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 마음에서부터 우리가 결심해서 나오게 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망치는 것입니다.” 미사 후에 돌아오는 길에 멀리 사는 아주머니 두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미사 좋았어요?” “아이고 신부님. 정말 이야기 잘 하셨어요. 그런 이야기들이 꼭 필요해요. 제가 그런 남자랑 살았거든

아침식사

아침식사를 나누면서 신부님과 다시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50년을 가까이 이들과 살아도 문화적인 측면에서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고 아마 그 가장 깊숙한 곳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찾는 것을 모두 이루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모두 저버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 간극 조절을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사랑’이지요. 사랑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약을 하겠다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그대로 하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든 잘 해 보겠다는데 능력이 부족한 아이를 두고 대놓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셈입니다. 성소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나누었습니다. 성소를 키워 놓으면 다들 성소를 잃어버린다고 하셨지요. 그래도 성소를 키워 놓으니 나가는 것이지, 성소 자체가 없으면 당연히 나갈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애써 볼리비아 현지인을 신부들을 만들어 놓으면 다들 시골에 돌아가서 사목하기를 거부한다고 하네요. 자신은 그런 곳에서 일하기 위해서 양성을 받은 게 아니라고 한답니다. 그리고는 다들 부유한 외국이나 적어도 도심지로 나가기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 자신은 오히려 지금 머무는 시골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기후 환경도 그렇고 조용한 것이 당신에게는 더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이지요. 아마 저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노년에는 그리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 역시도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에 가면 거부감이 들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가난한 동네에 가서 꾸준히 사람들을 열심히 사목하면서 살아보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제 생명을 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겠지요.

영적인 고통

육신의 고통은 다들 아는 것입니다. 몸이 아픈 것이지요. 그리고 누구나 이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때로 훈련을 거듭하면 어느 정도 수준의 고통은 견딜 수 있게 되고 때로는 그 고통을 통해서 쾌감을 얻기도 합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정 수준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목표점을 이루어 내었을 때에 그 고통은 도리어 쾌감이 되는 것이지요. 정신의 고통은 우리가 흔히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심리적 압박감에 의해서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과중한 업무나 지나친 걱정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훈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정신적으로 튼튼한 사람은 사소한 스트레스는 별다른 문제 없이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영적인 고통은 생소한 것입니다. 이는 ‘어둠의 세력’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것이 있고, 하느님의 너무나 위대하심을 통해서 야기되는 두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것은 죄악과 같은 것이로 우리의 영혼을 서서히 좀먹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빨리 떨쳐 버리고 벗어나야 하는 고통이지요. 가만히 두면 둘수록 손해인 고통입니다. 물론 이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이 보통이라서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기 위해서 육적이고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죄가 많은 이들이 중독에 빠져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 중독거리를 찾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느님에 의해서 다가오는 영적인 고통은 성인들에게서는 ‘어둔 밤’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위대하심 안에서 지극히 초라한 영혼이 겪게 되는 고통, 우리의 나약한 인간 본성이 당신의 너무나도 크신 사랑 앞에서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느끼는 고통이지요. 무언가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영혼이 너무나 크신 하느님의 바다에 빠져 버려서 느끼게 되는 고통인 것입니다. 충만한 은총 속에서 너무나 초라한 자신 때문에 겪는 고통이지요.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

너희는 신이다.

어제 수녀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녀님 걱정마세요. 비록 한 번의 특강이지만 최선을 다 할께요. 사실 예수님도 이 고을 저 고을을 다니시면서 며칠씩 머무신 것이 아니라 그저 한 번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생각할 거리를 남겨 두신 거지요.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을 심은 거예요. 그리고 그걸로도 충분했던 거지요.” 그러나 수녀님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투로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이잖아요.” “그렇지요. 예수님은 신이지요. 하지만 성경 안에 ‘내가 너희를 신이라고 부른다.’라는 구절 기억나지 않으세요? 우리는 성령을 안에 모실 수 있어요. 성령도 하느님이잖아요. 그래서 성령을 모신 사람은 또 하나의 신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자기가 신이랍시고 교만하고 오만해지자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겸손한 한 사람으로서 말하는 거예요.” 참조 성경구절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요한 10,34)

약함과 악함

약함은 좋은 방향으로 가는데 다리에 힘이 부족해 넘어지는 것을 말하고, 악함은 방향 자체가 글러먹은 것을 의미합니다. 약함은 꾸준한 훈련으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일 뿐이고, 악함은 떨쳐버려야 하는 것, 가능하면 다가서지 않고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세상에는 ‘약한 이들’이 많지만, 의외로 ‘악한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분별할 때에 그가 약한 것이면 그를 다독이면서 도와 주어야 하고, 그가 악한 것이면 회개할 수 있도록 성령의 권위 안에서 당당하게 나서야 합니다. 하지만 섣불리 악에 사로잡힌 이를 바로 세우겠다고 나서다가는 도리어 그의 악한 의도에 걸려 넘어지게 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나서다가는 큰 코 다치는 법입니다.

견진반 대상 강의

내일 이 본당의 견진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 중입니다. 수녀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굳건한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 주세요. 견진 받고 나면 뭔가 본당에서 봉사직을 맡아서 하라구요. 다들 견진만 받고 나면 이리 저리 떠나고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늘 있는 레파토리이지요. 첫영성체를 받고 나면 더는 성당에 나오지 않고, 견진을 받고 나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건 늘 있는 레파토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아이들이 성당을 나오게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이전에 과연 그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면 본당을 나오지 않는지 올바르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견진을 받을 만한 나이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갖은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에 행복해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무엇이고 그것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처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간단히 배고픔을 생각해 봅시다. 배가 고프면 빵을 먹으면 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하자가 될 것이 없습니다. 헌데 배가 고프지 않은데 억지로 배를 고프게 만들어서 빵을 먹는 것, 또 지나치게 탐식을 해서 필요 이상의 빵을 뱃속으로 밀어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는 올바른 욕구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충족시키고 있을지 한번 잘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당한 경우에 우리는 불필요한 욕구를 과장해서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과연 인간에게는 그런 육적인 욕구 밖에 없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신과 관련된 욕구도 있고 보다 내밀한 영적인 욕구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깨어있는 마음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5,13) 사람이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사물을 인지하고 반응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음식이 다가오면 먹을 수 있고 위험이 다가오면 피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잠들어 있으면 반응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을 들고 와도 자고 있는 아이에게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도둑이 몰래 들어와도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잠들어 있으면 살림을 다 털릴 수 있고, 때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에서 ‘깨어 있어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육적인 ‘깨어 있음’의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깨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깨어 길거리를 다니지만 그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도움이 다가와도 그것을 부여잡지 못하고, 반대로 영적인 위험이 다가와도 그것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수면 속에서 우리는 정말 엉뚱한 반응을 하기도 합니다. 어둠을 선으로 인지하고 다가서는 것이지요. 위험을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아무 정보나 접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관심있게 들여다보고 모든 인간적 만남을 ‘우정’이라는 핑계로 모두 이루려고 하면서 영혼은 정반대로 무너져가는 것이지요. 아마 그런 경험들 있을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하루를 일했다고 생각하고 저녁에는 친한 친구들 모임까지 갔다 왔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알지못할 공허함에 괴로워해본 경험들 말입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누군가와의 의미있는 만남 한 번이 하루를 가득히 채워본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배운 것이 많고 유익한 시간을 보낸 것이지요. 하루의 나머지 피로를 모두 없애 줄 정도로 충만한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열매가 온전히 익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열매가 너무 썩어 온갖 독충을 끌어들이고 다른 열매들에

여행과 우정

늘 여행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은 ‘지금 머무는 곳이 영원한 장소가 아니다’라는 것과 ‘지금 만나는 사람과 지금 하는 일이 절대적인 게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머무는 곳도 지금 만나는 사람도 지금 하는 일도 모두 ‘영원’의 집을 짓기 위한 순간의 과정일 뿐입니다. 물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그 안에서 맺는 ‘우정’은 남다른 가치를 지닙니다. 우정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길이 남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모든 이와 우정을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우정이 존재하지요. 그리고 우정이라는 것은 하룻밤 모여서 술한잔을 들이키며 왁자지껄 떠드는 게 아니라 정말 마음의 방향을 같은 방향으로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그런 우정은 참으로 드물지요. 세상 안에서 보여지는 우정은 서로들 모여 감시하고 비교하면서 겨우겨우 수준을 유지해 나가는 아주 초라한 관계성을 말하니까요. 어디에 머물러서 무엇을 하든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우정이 아니라 조금만 수가 틀려도 토라지는 아주 가벼운 관계에 불과하지요. 참된 우정은 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해서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믿어줄 수 있는 우정을 말합니다. 영원하신 분이신 절대자와의 관계성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일치인 것이지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않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분별

피정 강의를 맡은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3가지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영의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영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총 3가지의 다른 생각들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생각들입니다. 우리의 원의와 그것을 이루고 싶은 생각들이지요.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 무료하다는 생각과 같은 것들이지요. 다음으로 선한 영이 불러 일으키는 생각이 있습니다.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싶은 생각들이지요. 거룩한 것을 찾게 도와주고 올바른 것을 선택하도록 도와주는 생각들입니다. 우리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생각들이지요. 마지막으로 악한 영의 생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파괴시키려는 생각들이지요. 그러나 악한 영의 생각들이 늘 악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마치 지금 하는 생각이 정말 일리있고 이치에 맞는 생각처럼 느껴지게 하지요. 그러면서 결국에는 어둠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누군가를 증오하면서 그를 증오할 합당하고 정당한 이유를 찾아내게 만드는 것과 같은 식이지요. 어둠의 생각은 그 달콤함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신의 본색을 늘 감추고 가리고 있지요. 우리가 하는 고유한 생각들은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죄의 경향에 물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악한 영의 달콤한 생각들이 늘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황들’에 탓을 두고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 속에 언제나 ‘중립적’인 상황 안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사랑도 죄악도 우리

빈수레가 요란하다.

신학자로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 정보로 하느님을 아는 것과 실제로 하느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많은 정보를 지닌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아는 데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적 교만이 참된 ‘겸손’에서 자신을 멀리 떼어놓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겸손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많이 아는 사람은 많은 말보다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살아보면 겸손해지는 자신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신부님들을 대상으로 이런 강론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맑은 사람은 맑고 투명한 물병과 같아서 가지고 있는 맑은 물을 그대로 드러내기만 할 뿐입니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지요. 자신이 사는 삶을 직접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 안에 맑은 물이 없는 사람은 그 물병을 다른 잡다한 광고 문구들로 감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구 안에 온갖 현학적이고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자신 안에 물이 있는 것처럼 속여야 하지요. 실제로는 그 물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한 사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실제 사랑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말이 많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선하다고 의롭다고 외쳐대는 사람일수록 실제로는 선하지도 의롭지도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교회의 최종 권위에 기대고 자신이 하는 말이야말로 권위가 있다고 내세우는 사람일수록 그 내면에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는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구역장이 자신의 덕을 말없이 직접 보여주기보다 끊임없이 이런 저런 덕이 있노라고 광고하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런 덕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꼴이 됩니다. 어떤 신학자가 자신이야말로 진리의 열쇠를 쥐고 있고 교황과 무척 친하고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이들은 틀려먹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틀려먹은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제발 속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테살 4,3) 전혀 엉뚱한 일을 두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가 인간적인 업적을 자기 스스로 마련하고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언제 그러한 것을 원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거대한 성전을 지으라고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순전한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는 이들이 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성전을 짓겠다고 하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질 참된 성전을 예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돈버는 일에 열을 올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당신만을 찾도록 지팡이 하나만 주고 선교 여행을 떠나라 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외적으로 우리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내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번제물과 희생제물에는 관심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신 것은 바로 우리 각자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부정한 요소들입니다.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로 형제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그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1테살 4,3-6) 이는 바오로 사도가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을 바라보면서 충고하는 어둠의 한 단편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부정한 생각과 행위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엇나간 신앙

아직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뜻을 몰라서 묻는다기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싫기 때문에 혹시 다른 길이 있나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닐런지요? 값비싼 가방을 사고 싶고 좀 더 예뻐 보이고 돈을 많이 벌고 잔뜩 교만해지고는 싶은데 구원에서 멀어지고 싶지는 않아서 요행을 바라고 하느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복신앙적인 전혀 엉뚱한 신앙을 선택하는 거지요. 모든 엇나간 신앙의 근본에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누리는 기쁨

형제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환난 속에서도 여러분의 일로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고 하니 우리는 이제 살았습니다. (1테살 3,7-8) 사도들은 다른 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선교 자금이 늘었다고 새로운 건축물을 완공했다고 신자들의 살림이 나아졌다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그들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이유는 바로 형제들의 믿음이 하느님 안에서 굳건해 질 때입니다. 그것이 사도들이 맡은 직분의 존재이유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배우는 이들이 믿음 안에서 굳건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쏟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도들이 모든 일을 한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사도들은 다만 열심히 씨를 뿌릴 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하느님의 도우심 아래 그 형제들이 실천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부분일 뿐입니다. 사도들이 24시간 곁에 붙어서 그 씨가 자라나 자라지 않나를 바라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 받은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몫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누군가를 탓할 수 없습니다. 만일 믿음의 근거가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면 그 사명을 맡은 이를 탓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믿음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면 결국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삶을 압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수난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추구를 압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 안에서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위로거리이고 기쁨이 될 것입니다.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찾기

우리는 공연히 모여서 떠들어댑니다. 외로워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하느님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여서 떠드는 이유는 하느님을 회복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언제나 무언가 재미난 주제를 찾게 되고 주로는 누군가에 대한 정보가 되고, 더 재미난 소식을 찾다가 보니 언제나 누군가의 험담을 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여서 떠들면서 하나가 되기 보다는 오히려 내적으로는 더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 모여서 떠든 멤버들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들과 떠들며 전에 모여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기도 합니다. 언제나 ‘흥미거리’는 필요하니까요. 모여서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에 대해서 배워 나가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연히 모여서 누군가 험담할 대상을 찾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나에게 신앙이 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신앙을 늘릴 마음도 없으면서 신앙타령을 하는 것이지요.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찾고 사람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밤은 어둠의 시간이기 때문이고 하느님이 쉬도록 만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친구들과 만나서 밤늦게 떠들어대고 나면 자연히 다음날 마음이 공허해지게 마련입니다. 자연히 기도가 필요해집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기도는 다시 성령을 숨쉬는 작업입니다. 공허해진 내 마음을 하느님의 진한 엑기스로 채우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신앙인에게 필수적입니다.

삶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힘든 건 일이 아닙니다. 힘든 건 마음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마음,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잃은 마음이지요. 주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마음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집착하게 만드는 마음이지요. 자신에게 집착을 하니 서로를 경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라이벌이 되고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 마음을 어떻게 회복할까요?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하느님을 맛들이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맛들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필요하지요. 먼저는 자신 안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입니다. 생각이건 뭐건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지고 있는 쓰레기를 청소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걸 보지 않으려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답이 없습니다. 자신이 쓰레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답이 없는 겁니다. 교만한 사람은 답이 없습니다. 온갖 쓰레기를 주변에 집어 던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최고로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잘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으면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비워 내어야 비로소 거기에 뭔가 아름다운 것을 채워넣을 수 있을텐데 전혀 비워지질 않으니 늘 똑같은 일상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지요. ‘말’은 말일 뿐입니다. 제가 적는 글도 글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그가 실제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고 해도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리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돈의 유혹에 빠지고 싶지 않다고 해도 거기 빠져 있는 중이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다고 말만 하고 정작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결국 그의 말은 아무런 실효가 없는 것입니다.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잡초는 솟아나게 마련입니다. 1년 365일 피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

그리스도인은 최선을 다하는 이

이 세상에서의 유토피아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모든 이의 궁극적 소망이 채워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주 간단한 예로 사과가 2개 있고 한 사람이 1개씩 먹어야 하는데 저마다 2개를 원하면 평화는 깨어지고 전쟁과 다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정당하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경우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은 우리에게 마땅한 것을 넘어선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실컷 먹고 살찌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또 운동을 위해 재화를 소비하면서 결국 돈이 부족하다고 투덜댑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수많은 행위들 속에는 정말 엉뚱한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당히 먹고 산보 한 번 갔다오면 끝날 일을 우리는 이리저리 너무나 정신이 없이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그 나라가 이 땅에 펼쳐지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물론 그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실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희망은 단순히 여기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의 나라를 위해서 이 지상의 나라, 누가 보아도 한계가 가득한 이 지상의 나라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일 뿐입니다. 조급해 할 필요도 안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악인이 득세한다고 안타까워 할 필요도 없고 선인이 핍박을 받는다고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에 합당한 것을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선인들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고, 악인들에게 합당한 경고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집스런 자유는 저마다 제 갈 길을 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허무와 영원

저는 가끔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생은 참으로 허망한 것이지요. 저마다 1세기도 채 되지 못하는 생을 살아가면서 결국에는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그 허망함을 어떻게든 ‘의미’로 채우려는 시도이지요. 그들은 많은 것을 벌어들이고 자신의 입지를 굳혀 놓으려고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기껏해야 역사 교과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헛된 움직임을 그치고 나면 비로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이게 됩니다. 사람이 불안정할 때에는 올바른 생각에 마음을 쏟기가 힘이 드는 법이지요. 사람은 차분함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하는 활동들을 점검할 필요가 있지요. 부질없는 일들, 공허한 활동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때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영원한 존재들’이지요. 어둠이 걷히고 나면 비로소 눈이 밝아지는 법입니다. 그러면 그때 찬란히 빛을 발하는 존재들을 인지하게 되는 거지요. 바로 하느님과 그분의 소중한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가리워진 사람들의 눈에 ‘하느님’은 한낱 도구에 불과하게 됩니다.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중의 하나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어둠 속에서는 자기 자신이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긋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근본 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존재를 외면하고 전혀 엉뚱한 것에 한눈을 팔다가 시간을 모두 허비하는 것이지요. 한 걸음을 가도 목적지를 향해서 가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서 사람들의 공허한 칭송을 듣는 것보다는 하느님을 향한 한 걸음을 걸어서 하느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수천배 낫습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마태 24,45) 사제의 존재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책임을 지게 되는 존재들이 있지만 특히나 사제는 그 존재 자체로 타인을 위한 존재입니다. 사제가 하는 일은 위의 성경 구절처럼 ‘집안 식솔들을 맡아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는’ 것입니다. 물론 집안 식솔들은 자신의 사목 범주에 들어온 이들을 말하고 양식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설교를 준비하고 여러가지 성사적 행위들과 준성사적 행위들을 이행하는 데에 가장 우선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헌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안되는 것이지요. 함께 살아가는 동료들을 질타하고 비방하고 나서고 또 술꾼으로 대표되는 방탕한 이들과 어울리면서 진탕 먹고 마시기만 하다가는 때가 되어 다가오시는 주님의 질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다양한 직분을 떠맡는 사제들이 등장하게 되었지만 사제직의 본질이 뒤바뀐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사제는 식솔들을 맡아 제때에 양식을 먹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기관장을 하든, 다른 어떤 특수사목을 하든 사제의 이 고유한 영역은 침해받지 않을 것입니다.

빌라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빌라도는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힘의 논리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헌데 그분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을 변호할 줄도 모르는 한낱 시골 마을의 샌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를 아주 하찮게 여겼다. 그저 동네에서 일어난 송사의 한 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의 그 짧은 만남 속에서 빌라도는 그로부터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내적인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데리고 와서 따로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빌라도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빌라도는 큰 계획의 일부분을 맡을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끝으로 그에게는 진리를 만날 기회가 사라지게 될 터였다. 그는 예수에게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이 짧은 질문으로 빌라도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진리를 앞에 두고서 진리를 찾고 있는 지독하게 눈이 가리워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직무를 수행한다. 즉, 귀찮은 일에 손을 씻어버리고 ‘공식적으로’ 책무를 덜어내는 것이었다. 나에게 결정권이 있으나 너희들이 그토록 죽이고 싶어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엉뚱한 반란을 일으켜서 나를 성가시게 할 터이니 나는 로마법에 따라서 손을 씻고 이 사람을 넘겨줄 터이니 너희들 맘대로 하라는 ‘회피’였다. 그는 로마법을 지켰지만 하느님의 법을 어겼다. 우리 가운데에는 빌라도와 같은 이들이 많다. 분명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일인데 성가시고 귀찮고 또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워서 엉뚱한 결정을 내리고 손을 씻어버리는 것이다. 즉 당면한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람들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그와 같은 결정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고통당하는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를 보아 달라는 아내의 부탁 앞에서 그건 여자가 할 일이라면서 손을 씻어버리는 남편들, 부모를 함께 봉양하자는 부탁 앞에서 그건 맏아들의 일이라면서 손

장님들

사람에게서 사랑받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이라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른 사랑의 소스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헌데 그 사랑의 소스를 또다른 인간에게서 찾으려고 하면 또다시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신앙’이라는 것에서 사랑을 얻는 법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보이는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말을 해 주고, 누군가 바라봐주고, 누군가 들어줘야 위로받는다고 생각하면서 참된 위로이신 분의 존재에 대해서 자꾸만 잊어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악과 욕심도 작용을 합니다. 세상 것을 온통 소유하려는 탐욕이 우리에게서 영적인 것을 감지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장님’과 관련한 일화들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이 단순히 그의 육신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서 그 기적을 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장님들입니다. 마땅히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에 시선이 팔려 있으니까요. 우리는 장님들입니다. 그러나 눈이 먼 줄도 모르는 장님들이지요. 차라리 육신의 눈이 멀었다면 지팡이라도 짚고 다닐텐데 마음이 눈이 멀어 눈이 먼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다투고 싸우고 하면서도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없고 모두 남 탓이라고만 생각하지요. 주님 저희의 눈을 열어 주소서. 저희가 올바로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심을 깨닫고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선교

선교를 꼭 다른 어디로 떠나야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로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을 위해서도 선교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선교라는 것은 우리가 얻게 된 신앙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 교회 미디어에서 ’선교’라는 이름으로 접하는 수많은 활동들은 사실 ‘행사’일 뿐입니다. 잠시 거기에 머무르고 얻을 유익을 다 얻어가는 것이지요. 선교지를 진정으로 돕는 방법은 '행사'를 하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것입니다. 행사는 일부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참된 선교는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교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설거지를 돕고, 선교하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선교하는 마음으로 집의 애완동물을 애정으로 돌보면 거기에서부터 참된 선교가 시작되는 것이고 그 진정한 선교를 통해서 감화받은 아이들이 훗날 장성하여 실제 다른 나라를 구체적으로 돕기도 하는 것입니다. 선교지 나라의 가난은 ‘체험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진중하게 고민해야 할 대상입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왜 가난할까요? 그것은 부자 나라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나누는 척 하면서 본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고 상대국의 가난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 움직임을 본질적으로 정비하지 않는 이상, 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자 나라들이 탐욕스런 이유는 ‘탐욕스런 사람들’이 그 나라를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전혀 생각지 않은 방향에 놓여 있습니다. 보다 내밀하고 영적인 움직임을 바탕으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참으로 순진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선교의 핵심은 진정 예수님의 메세지를 세상에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말고 본질적으로 세상을 바꿀 만한 특별할 활동은 저로서는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만이 세상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공사장의 비유

어느 공사장의 모습을 떠올려봅시다. 저마다 다른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합니다. 뼈대를 용접하는 사람, 벽돌을 쌓는 사람, 내부에 전선을 설치하는 사람 등등 여러가지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각자 하는 일이나 그들의 소박한 실수에 대해서 그들은 서로를 두고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특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같은 건물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건축 자재를 몰래 훔쳐나가는 것을 본다면 자신의 특기와는 상관없이 그를 제지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반대로 건물을 망가뜨리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각자의 특기와 직분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일을 하지요.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 나라는 지상에서 ‘완료’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천상에서 완료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지상에서 각자 건축 자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요. 행여 작은 실수가 있더라도 같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안다면 그냥 서로를 존중하면 됩니다. 그러나 전혀 엉뚱하게 건물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교회라는 건물은 어떻게 지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함께 같은 마음으로 건물을 짓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저마다 모두 작업반장이 되어서 아주 소소한 일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들쑤시고 다니는 걸까요?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의 지체일 뿐입니다.

원죄

원죄에 대해서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느님의 뜻에 반대로 돌아섬'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은 늘 세상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기에 원죄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물론 아직 온전히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없는 미흡한 상태의 어린 아이나 자신의 탓없이 하느님을 모르고 양심에 따라 충실히 살아온 이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하느님이 결정하실 부분이고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세례가 원죄를 없애는 이유는 '하느님의 뜻에로 돌아섬'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던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는 성사적 행위인 것입니다. 세례 이후에 하느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우리의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짓는 죄는 우리 각자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사회적인 차원으로 형성되어 다른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원죄와는 다른 성질의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회개가 절실한 것이고 고해성사라는 특별한 성서적 은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되기

착한 사람이 되려면 ‘착하면’ 됩니다.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정직하면’ 되지요. 헌데 착하긴 싫은데 착한 사람으로 보이려 하거나, 정직하지 못한데 정직한 사람으로 보이려 한다면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천적인 덕목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로 그 사람이 됩니다. 선교사는 선교를 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선교를 하는 척 애써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사는 삶 그대로 보여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하게 되지요. 선교를 하기는 싫고 실제로는 다른 걸 하고 싶은데 선교사로 보이려면 복잡해집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면서 선교를 할 마음은 하나도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선교사로 드러나고 싶으면 그걸 열심히 꾸며 놓아야 하지요. 그것을 거짓이라 하고 위선이라 하고 가식이라고 합니다. 사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사제이면 됩니다. 사제가 되는 것은 사제로서의 일을 하면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고 교회에서 부여받은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열심히 하고 있다면 굳이 자신이 그것을 하고 있다고 내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착하게 보이기보다는 착해야 합니다. 착하면 절로 착해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착하면 남들이 자신을 착하게 보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잊지 않도록 합시다.

단순과 복잡

진리는 참으로 단순합니다. 반면 위선과 가식과 거짓이라는 것은 언제나 ‘복잡’합니다. 자신이 본질적으로 아닌 것을 꾸며 대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하지만 사랑하기 싫은 데 사랑하는 척을 하려면 사람들이 어떤 부분에서 사랑하는 사람인지 연구를 하고 또 자신이 지나치게 거기에 몰입해서 정작 자신이 보호하려는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실제로 그것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이지요. 마치 지금 제가 쓰는 이 글처럼 말입니다. 진리를 품은 사람은 매사가 단순합니다. 반면 위선과 가식과 거짓의 사람은 언제나 복잡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치유하는 것은 사랑

칼은 수술할 때 쓰고 무언가를 도려낼 때 씁니다. 그래서 나쁜 종양을 도려내는 데에는 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치유하게 도와주는 것은 보살핌입니다. 따스한 애정과 보살핌이 그를 낫게 하는 것이지요. 정의라는 칼은 수술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칼 자체가 그를 낫게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애정과 사랑의 보살핌이 없으면 그는 냉혹한 칼날 아래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정의’에 집중할 때에 잊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악이라는 신비

똥이라도 제 역할이 있습니다. 똥은 거름이 되어서 아름다운 꽃을 자라나는 데에 도움을 주지요. 우리가 늘 아름답고 좋은 환경에서만 생활하게 될거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맑음과 혼탁함이 공존하는 곳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저마다의 자유로 맑음과 혼탁함 사이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맑음 사이에 살아가는 이들은 혼탁함의 도움을 얻게 될 것이고, 혼탁함에 머무는 이들은 원하면 맑음으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이유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그분께서는 가장 추악한 것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그 추악한 것이 곧 선이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추악한 것은 추악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그것을 비료나 세제처럼 사용해서 아름다운 것을 더욱 아름답게 가꿀 뿐이지요. 금도 ‘정련’이 필요합니다. 정련을 위해서는 불의 시련이 필요한 법이지요. 그 불을 때우려면 적절한 땔감이 필요한 법이고 그 땔감들, 타서 없어져버릴 것들이 바로 그 추악한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운명은 태초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정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유의지가 존재하니까요. 이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망하라고 정해진 인간은 없습니다. 제가 망하는 것이지요. 누구나 선을 행할 수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악으로 기울기만 하고, 또 선으로 다시 초대하는 손길마저도 거부를 하니 그는 악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땔감으로 쓰이고 사라지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전능을 연상해 낸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전능이 우리를 감싸쥐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가지고 놀 생각을 얼른 내려두고 우리가 그분 뜻에 따라서 살 생각을 해야 합니다.

거룩한 도성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묵시 21,10) 묵시록의 어린양의 신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장차 교회가 얻게 될 거룩한 모습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톨릭 교회 자체가 거룩한 도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교회가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빛나는 보석으로 가득하고 열두 초석으로 세워져 있고 열두 성문이 있으며 그 성문을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습니다. 빛나는 보석은 교회의 구성원들의 값진 덕을 의미하고 초석은 신앙의 기초를 성문은 신앙에로의 자비와 사랑의 초대를 그리고 성문을 지키는 천사는 믿음을 분별하는 정의로움을 상징합니다. 그 보석이 실제 보석보다 훨씬 더 찬란할 것이며 아름다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따스한 사람을 만날 때에 느끼는 좋은 마음, 푸근한 마음처럼 훗날 우리가 들어가게 될 거룩한 도성은 영적인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도성의 구성원일까요? 아니면 가라지일 뿐일까요? 가라지도 저 나름의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더러운 양잿물로 청소를 하듯이 좋은 것을 빛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시련거리가 필요한 셈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훗날의 교회의 반영일 뿐입니다. 거울로 사물을 바라보면 그 안에 든 것들이 진실이 아니고 다만 상을 드러낼 뿐인 것처럼 지금의 교회도 천상의 교회를 비추는 거울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는 그 거룩한 도성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믿음의 예복을 갖추지 않아 성문을 지키는 천사들에게 쫓겨나서 어두운 곳에 두 손과 두 발이 묶여서 한탄을 하는 부류도 존재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조급함

지금의 사람들에게 신기한 일이란 자신들이 함부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질 때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에 따라서 ‘우연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 후배 신부님 한 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선교사로 살면서 그렇게 차량을 가지고 일을 많이 하는데 사람이 크게 다치는 큰 사고 한 번도 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히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그것은 ‘우연의 일치의 결과’일 뿐입니다.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과 비신앙인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건을 ‘하느님의 시선’ 아래에서 바라보고 비신앙인은 저마다 자신의 합당한 이유를 찾고 밝혀내려고 애를 씁니다. 사실 비신앙인 상태에 머무르는 행정상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 사건이 일어난 일의 정황을 밝히려고 들며 심지어 예수님의 시대에 일어난 일도 조목조목 그 사건의 의미를 ‘인간적으로’ 분별하려고 듭니다. 거룩한 분의 거룩한 일을 자신의 조잡한 사고 속으로 모두 몰아 넣겠다는 시도인 것이지요. 과연 누가 더 풍요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을까요? 당연히 참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즐기고, 나쁜 일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모든 것이 좋게 작용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 느긋하고 여유롭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반면 세상의 자녀들은 조급하고 참을성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생애 안에 어떻게든 해결책이 나와야 하고 그 결과물을 본인이 스스로 맛보아야 하기에 이런 저런 사건들이 생길 때마다 이리로 저리로 몰려다니며 그 사건의 위중함을 광고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보다 더 위중한 일을 당하고 있음에도 평온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들이 생각하는 위중한 일보다 더 위중한 일

피정(避靜)

정(靜)적인 곳을 찾아 피(避)한다는 의미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만 쓰이는 용어이지요. 스페인어로는 Retiro라고 표현합니다. 다시금(re) 장전한다(tirar)라는 의미이지요. 피정이라는 용어에서조차 동서양의 의미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동양은 뭔가에서 피하고 멀어지는 수동적인 느낌이고, 서양은 다시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느낌이 드네요. 이 둘의 의미는 서로 조화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피정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조용하다는 의미가 단순히 주변의 소음이 모조리 사라진 곳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소음이라는 것은 귀로도 들리지만 생각으로도, 또 영혼으로도 들리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피정을 위해서는 걱정을 내려놓는 작업도 필수이고, 나아가서 영혼을 정갈히 하는 작업도 필수가 되는 것이지요. 일단 피정 장소는 대체로 조용한 곳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니 육적인 정적은 이미 어느정도는 확보하게 됩니다. 문제는 나머지 두 가지입니다. 생각은 어떻게 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생각이 어지러운 이유는 여러가지 것에 신경을 쓰고 한 군데로 생각을 모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가르침이 필요한 법이지요.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게끔 좋은 가르침을 정해진 시간에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정적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영혼이 정적이지 못한 이유는 내면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어두움,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적인 환경 속에서 생각을 정리정돈하면서 영혼의 어두움의 원인을 식별해내고 그것을 고해 사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지요. 이것이 피정의 기본 틀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멋진 피정이라고 한다 해도 이 기본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피정과 수련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영신수련도 피정과 비슷하지만 거기에는 ‘수련’이라는 의미가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서로 힘을 모으고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도 부족할 판에 서로를 이간질시키고 갈라놓으려는 사람이 있다. 건설적인 비판이라는 미명 하에 증오를 즐기는 사람들. 그들은 굉장히 고상한 목적으로 그 일을 하는 듯이 자신을 드러내지만 실제로는 제 유익을 찾을 뿐이다. 하느님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물들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 상표를 믿고 그들의 의견을 순하게 받아들인다. 필요하면 교황도 가져다 쓰고 교회도 가져다 쓴다. 진실이라는 미명 하에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일을 공공연하게 떠벌리면서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우겨댄다. 차라리 영적인 소중한 진실을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리고 그들이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면 그 참된 진리를 받아들인 이들이 훗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절로 그 축복이 돌아오게 될 터인데. 그러나 증오를 즐기는 사람들, 뭔가에 화가 난 사람들이 그들을 찾는다. 끼리끼리 모이는 셈이지.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말 정당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마치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러 가면서 자신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낀 것과 비슷하다. 사실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성령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을 통해서 활동하고 계시니까. 술책이나 교란은 언제나 있어왔고 그러한 것들 덕분에 반대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언제나 시련이 존재하였으며 그로 인해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기도 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진리이시며 선하시고 영원하신 분이다. 그분과 함께 머무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남을 것이며 반대로 그분에게서 동떨어진 것들은 제 명을 다하고 나면 사라져버릴 것들이다. 이집트도, 아시리아도, 로마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사람들은 영원한 영화를 노래하고 꿈꿨지만 모두가 환상이었을 뿐이다. 공연한 분쟁에 휘말려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현세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라.

분리시키기

악마는 신뢰해야 할 사람을 의심하게 만들고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신뢰를 두게 만듭니다. 악마는 일치를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게 되면 자신이 공격할 기회를 잃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약하지만 두 사람이 의견을 모으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는 사람들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즐깁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온갖 수작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지요. 속이는 자, 유혹하는 자의 말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사탕을 발라놓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쓰디쓴 어두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추악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먼저 달콤한 것으로 유혹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사탕발림 말에 넘어가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결국 넘어가고 맙니다. 그리고 모든 어두움이 시작되지요. 그들은 언뜻 자신들이 정의를 위해서 일한다고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악마는 나쁜 짓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양심의 가책을 없애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어둠의 목적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간의 분쟁을 조장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들면서 싸우게 하지요. 그렇게 갈라진 양들을 악마는 유유히 공격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증오하기 시작한 이에게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그의 증오를 키우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증오가 시작되면 모든 이성이 그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작용을 하니까요. 그는 스스로의 증오의 감옥에 사로잡혀 ‘사랑’을 생각하기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언뜻 사람들은 서로 연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기호에 따라서 잠시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것일 뿐, 결국에는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성의 왕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들은 ‘일치’라는 것의 참된 의미를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제가 이런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들을 생각이 있는 사람은 들어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이 ‘어둠’으로 돌아선

마음의 창고

우리 마음에는 작은, 하지만 엄청난 크기의 창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 창고에 우리가 일상에서 받아들이는 것들을 집어넣곤 하지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이 창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헌데 이 창고 안으로 들어갈 때에 늘 거쳐가는 관문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의식입니다. 우리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들어가는 것은 무의식의 창고로 들어가고 우리의 의식을 거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의 창고로 들어가지요. 헌데 우리의 의식을 거칠 때에는 언제나 특정한 종류의 ’해석’이 가해지게 됩니다. 크게 나누어보면 긍정적인 해석과 부정적인 해석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이 의식의 두가지 해석을 통해서 결국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 그 자체로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시기심’으로 받아들이면 그 이미지는 나에게 부정적인 요소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지요. 누군가 정말 좋은 말을 해 주었는데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 ‘혐오감’으로 받아들이면 그건 나에게 부정적인 요소로 남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정말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는데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오히려 나에게 인내심을 전해 준다면 그것은 나에게 긍정적인 기억이 됩니다. 정신 없이 바쁜 중에도 늘 건강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다면 그 모든 시간들이 긍정의 요소로 나에게 작용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저장된 마음의 창고의 요소들은 다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가진 것을 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전해줄 수는 없지요. 그래서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유

장시간 고해를 주면서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대부분 구체적인 삶의 시련 때문이 아니라 관계와 정서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삶이 힘든 게 아니라 삶의 부분 부분에서 서로간에 맺고 있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기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사랑 받고 싶다!” “헌데 아무도 내가 바라는 대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저마다 사랑을 받고 싶은데 그 누구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경우가 이 핵심에서 그다지 동떨어지지 않아 보입니다. 부모님은 나름 열심히 자녀를 돌보는데, 자녀는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남편은 나름 아내를 사랑하는데 아내로서는 남편이 무언가를 더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삶의 환경에서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 삶의 환경에서 무언가를 늘 더 바랍니다. 늘 이런 식이지요. 한마디로 줄이면, ‘이든 저든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천국’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사람들은 자신의 천국으로 상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천국은 타인에게는 지옥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인 이유는 ‘하느님의 천국’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해소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사제가 소개해 주어야 할 단 한가지는 그들이 하느님의 천국을 찾는 법을 알도록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추구하는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눈에 좋은 것이든 우리 눈에 나쁜 것이든 모두를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결국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당장 바라보기에 마

피임

가톨릭 교회는 오직 하나의 피임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자연주기법이라는 것이지요. 여성의 생리 주기에 따라서 임신할 가능성이 없는 날짜에 관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여성의 주기를 고려하여 존중받을 수 있고 남성도 인내력을 기를 수 있으며 관계가 더욱 소중해지고 아름다워지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밖의 모든 피임법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은 전혀 다릅니다. 젊은이들은 일찍부터 관계를 즐기면서 이미 나름의 피임방법을 실행하고 있고,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임신을 막으면서도 서로간의 성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세상이 제안하는 나름 안전한 피임법을 이미 사용하고 있지요. 교회가 제안하는 피임법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가르치는 성윤리는 참으로 현실과 동떨어져 보입니다. 사실 교회의 성윤리를 배울 기회도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냥 성이라는 것은 모두가 쉬쉬하고 살 뿐이지요. 아무도 ‘성’을 교회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이미 다 아는 성적 지식을 배우거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배우거나 인터넷으로 배우거나 서로 간에 정보를 주고 받거나 하면서 배우지요. 교회가 가르치는 성과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사람들에게 성을 가르쳐야 할지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피임과 같은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결정은 성생활의 결정권이 있는 성인 남녀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맡기고 교회는 교회가 걱정하는 것을 솔직히 밝히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이 조금은 민감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자녀출산’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의 탄생은 단순히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로 새로운 생명을 선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릇된

선택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여호 24,15) 우리는 근본적인 선택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인 사고로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말하는 것, 이런 저런 성사를 받는 것이 근본 선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다 사소한 행위들 안에서 진정한 선택이 드러납니다. 페이스북에 아무리 가난한 이를 돕자고 게시물을 공유한들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보고는 애써 외면해버리고 만다면 그는 전혀 가난한 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어느 모임에 강사로 나가서 부부간에 서로 한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열심히 가르치고는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가 피곤해하는 게 멀쩡히 눈에 보이는데도 설거지 하나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는 부부사랑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우리의 선택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인지 세상과 나 자신을 사랑할 것인지 우리는 따로 말할 필요 없이 이미 삶으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이들을 두고는 ‘위선자’라고 표현하지요.

고독 - 사제의 고유한 몫

어제 봉사자 모임을 마치면서 이런 말을 농담처럼 했습니다. “걱정마세요. 제가 늘 도와 드릴께요. 저는 튼튼하거든요. 그러니 뭐든 저에게 말씀하세요. 뭐 제가 울어야 할 일이 생기면 혼자 조용히 방에서 울죠 뭐.” 사람들은 사제를 찾습니다.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에 특별히 더 찾습니다. 위로받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남편과 다투고 난 뒤에, 친구들과 문제가 있고 난 뒤에, 신앙과 현실에 괴리감이 있을 때, 누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그런 모든 때에 사람들은 사제를 찾고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위로를 찾습니다. 글쎄요. 다른 사제들이 어찌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각자에게 맡겨야 할 문제이지요. 각자가 하느님 앞에 대답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들에게 작은 힘과 도움이 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제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저 자신이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 때문에 혼자 방에서 고심하고 고민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힘들 때면 저를 찾는데 제가 찾을 곳이라고는 주님 한 분 뿐입니다. 그래서 사제에게 ‘고독’은 친구입니다. 혼자 조용히 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눈물은 나오지 않더라도 혼자 조용히 방에 머무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반성하고 뉘우치고 다시 스스로 정돈해서 힘을 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성령께서는 그 사제와 함께 할 것입니다. 다들 저 살기 바쁜 터라 타인에게 꾸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저마다 꾸준히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특히나 그가 교회의 사제라면 그는 마땅히 꾸준히 사랑해야 하고 모든 이를 동등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도록 노력하지요. 다만 한가지는 여러분의 기도입니다. 기도만큼은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고 딱히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만큼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제들을 위해서, 특히 여러분들의 본당에 있는 신부님을 위해서

첫 구역 방문

오늘 새로이 맡게 될 구역을 처음으로 방문해서 첫영성체반 아이들과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들과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즐거운 한시간을 꾸려나갔지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성전터에 건물이 들어서는 것이었고, 제가 원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효력을 가지는 성사 증명서를 얼른 갖고 싶어했고, 저는 사람들이 정말 ‘거룩한 일’(성사)에 몸담을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구요. “일단은 주일미사부터 시작하지요. 제일 급한 건 사람들이 미사의 혜택을 입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건물은 그 다음이지요. 그러니 먼저 마을 주민들과 상의 후에 미사를 구체적으로 언제 몇 시에 할지를 정하세요. 그리고 실제적으로 만나면서 그 밖의 일을 상의하도록 하지요.” 아마 미사가 정착되고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기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 행정적인 것만 밝히기만 하고 실제 복음을 받아들일 생각이 아무것도 없는 공동체라면 굳이 제 노력을 거기에 쏟아부을 일은 없겠지요. 그 밖에도 다른 곳에서 거룩한 미사를 갖기를 원하는 곳은 넘쳐 흐르니까요.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마태 6,11)

무엇이 일입니까? 왜 일은 ‘놀이’와 다른 걸까요? 놀이도 만만치않게 힘든 활동인데 왜 우리는 놀이처럼 일하지 못하고, 또 반대로 놀이를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 걸까요? 사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달린 문제이지요. 그리고 핵심은 ‘내가 원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행위는 놀이가 되고, 내가 원치 않는 행위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을 생산하든 말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때로는 놀이를 통해서도 훌륭한 것들이 생산되고는 하니까요. 그럼 ‘내가 원하는 행위’가 아닌 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이의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을 싫어하는 이유는 다른 이들의 의지가 나를 통해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돈을 벌고 싶기는 하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는 일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면 일은 거의 ‘놀이’의 수준으로 변하게 됩니다. 정말 기쁘고 활기차게 일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의욕이 없는 이유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가 가득 담긴 것이고 실제 우리들의 의지는 그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잠을 늘어지게 자고 싶은데 하느님이 우리를 주일에 나오게 한다고 생각해서 주일 미사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하느님의 의지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하느님의 뜻대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루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 것들 뿐입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는 커녕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추수밭의 일꾼들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살지 못하는 이들이

지혜를 향해 나아가는 길

지혜에 도달해가면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많이 보이게 됩니다. 전에는 그저 모든 것을 외면적으로 파악했지만 이제는 그 내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한 사람의 근본 의도가 무엇인지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게 되지요. 그가 무엇을 선호하는지 그가 하는 말이 진실된지 아닌지 상당 부분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인내와 겸손이 늘어가게 됩니다. 참아 견디지 않고 매 순간을 다투고 싸운다면 결코 온전히 지낼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그를 견디고 도리어 그에게 축복을 건네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매 순간 인내가 늘고 하느님 앞에 진정한 겸손이 조금씩 늘게 되지요. 외적으로는 ‘바보’로 비춰집니다. 이 사람이 한편으로는 똑똑해 보이는데 다른 한 편으로는 늘 당하고만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냥 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에는 말을 해야 합니다. 지혜로워진다는 것이 분별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신앙에 중대하게 위배되는 것이 있고 거기에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분명히 의사를 밝히기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의 기준은 참 얕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서 모든 것을 분별하고 그 모든 잡음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흥분하면서 몰려다니곤 하지요. 그러나 그들 중 하나를 잡아서 정말 본인의 생각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외쳐댈 뿐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 하느님의 참된 지혜를 찾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10년이라는 시간에 강산이 겨우 변하는 것과 같은 진득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할 일 앞에서는 폭포수처럼 적극적인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 분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겪어야 할 수많은 시행착오를 인내와 겸손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축복

책을 읽으려면 글을 배워야 하고, 축복을 받으려면 신앙을 익혀야 합니다. 신앙심 없이 받는 축복은 글을 배우지 못한 아이에게 주어진 책과도 같습니다. 아이는 책을 함부로 대하고 결국 의미없이 아무 구석이나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겠지요. 축복을 수용할 수 있는 신앙은 하느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사람에게 신앙을 불어넣고 그가 축복을 받도록 인도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사람은 진정한 축복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무조건 이유없이 많이 벌게 된 돈이 축복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악마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준비되지 않은 채로 엄청난 재물을 얻게 되면 자신의 영혼을 그릇되이 인도하게 됩니다. 때로는 세상의 재앙이 축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엉망으로 꾸려오던 사람에게 다가온 암은 그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하느님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암은 축복의 요소로 작용을 한 것이지요. 세상적인 시각에서 좋아 보이고 나빠 보이는 것이 그대로의 의미로 축복과 불행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은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도록 초대하는 모든 것은 축복이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무엇이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느냐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데에 있지요. 누구는 많은 돈을, 누구는 건강을, 누구는 미모를, 누구는 명성을, 누구는 권력을 자신의 행복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이기심’이 존재하지요.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이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이기심에 존재하지 않고 ‘하느님을 아는 데’에 존재합니다. 하느님을 참되게 알 때에 사람은 비로소 올바른 길을 걷게 되고 참된 행복을 향해서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여러분은 축복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축복은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모쪼록 하느님을 알아 축복의 주인공이

남미 사람들의 뜨거운 신앙

어제 수녀원에 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미의 사람들은 뜨거운 신앙이 있어요. 분명히 있어요. 다만 그 방향을 잘 잡아 주어야 하지요. 정말 하느님을 찾고 자신의 구원을 찾는데 그걸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찾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그 길을 잘 인도할 필요가 있어요.” 아닌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마음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요. 일상 안에서 영적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일상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이지요. 성당을 지날 때면 늘 십자성호를 긋고 묵주도 늘 목에 걸고 다닙니다. 정형화된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이들에게는 신앙은 늘 삶과 함께 동반되어 온 것입니다. 반면 잘 사는 나라에는 법과 형식, 그리고 과학과 이성이 작용을 하지요. 법제 안에서 이것 저것 따지고 들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갈수록 영적인 영역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어르신들이 새벽에 맑은 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일이 허다했는데 이제는 텔레비전 신을 섬긴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이에게 방향을 잡아주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이를 멈추어 세우고 방향을 잡도록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남미는 진정한 의미의 황금어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추수하려는 사람은 여기에서 많은 열매를 추수하게 될 것입니다.

소통

자주 만나기만 하는 것이 소통을 위한 해결책이라면 가족은 그 점에서 전혀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주 만나는 것은 필요한 요소가 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이 열려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여는 방법은 다른 게 아니라 마음 속의 찌꺼기를 치워서 성령이 드나들게끔 해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화해는 참된 소통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모임이든 구성원들이 성령을 지니고 서로 다가서려는 마음으로 만날 때에 그 모임은 진정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만남의 회수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 소통하려는 두 영혼이 만나게 된다면 단 한 번의 만남이라도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봉사자 모임

본당 봉사자 전체 모임을 했습니다. 가장 우선된 회의 주제는 ‘분리’였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고 어느 하나 마음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의견이 나왔습니다. 모임을 더 자주 하자, 같이 모이는 시간을 만들자, 신앙이 부족하다 등등등... 의견들을 수렴하고는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의 어두움이 서로를 부딪히게 합니다. 그 어둠의 근본을 없애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서로 싸울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안에 증오의 씨앗이 없는데 왜 서로 다투겠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핵심은 이겁니다. ‘고해성사 보세요.’ 제가 늘 주일마다 성사 주는 거 아시지요? 이번 주에 모든 봉사자들이 고해성사를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무는 아니지만 거의 의무라고 생각하시길 바래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되려면 우리 안의 어두움이 없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 봉사자들이 이번 주에 고해성사를 보러 올까요? 두고 볼 일이지요.

프레데스 수녀님

올해로 94세이신 프레데스 할머니 수녀님을 찾아 왔습니다. 어제 전화를 받았거든요. 아주 정정하신 분이었는데 최근들어 부쩍 상태가 안좋아지셔서 다음 달에 본국으로 출국하신다고 하네요. 그래서 두번 생각할 것 없이 찾아 뵈었습니다. 양손 가득 과일을 사들고 말이지요. 직접 뵈니 정말 힘이 없어 보이시네요. 한쪽 눈이 자꾸 떨린다고 하십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 보았는데 별달리 나오는 건 없다고 합니다. 딱히 대화를 나눌 힘도 없어 보였습니다. - 신부님, 왜 하필이면 오늘 오셨어요. 금요일이라 대접할 음식도 형편없는데. 우리 할머니 수녀님은 그게 걱정이신 모양입니다. - 괜찮아요. 오히려 음식에 기름기도 없고 잘 되었죠. 사실 이번 방문이 마지막일거라 생각하고 찾아왔습니다. 바쁘게 살다보면 따로 시간내는 것이 참 쉽지 않으니까요. 결단을 내리면 실천해야지요. 점심을 대접한다고 식탁에 가 앉으니 돼지고기 반찬이 있었습니다. 신랑이 왔는데 기뻐해야 한다고 농담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 수녀님, 걱정마세요. 제가 콜롬비아 찾아갈께요.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니 이제 하늘에서 보자는 말을 하기는 너무 잔인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콜롬비아에 놀러 가겠다고 몇번이고 다짐을 했지요. 모쪼록 볼리비아에서 남은 시간 기쁘고 행복하게 계시다가 가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수녀님의 남은 생을 축복하시기를...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이 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원하는 것만 찾지요. 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기초적인 양육과 합당한 교육, 그리고 적절한 보호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은 파워레인저 장난감이지요. 아이는 스스로에게 무엇이 진정 필요한지 알아낼 능력이 부족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도 늘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찾습니다. 광고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필요로하지 않는 것을 원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한 논리이지요. 그래서 광고를 자주 보게 되면 원치 않는 것을 사게 됩니다. 홈쇼핑 채널은 원하는 것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최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홈쇼핑을 보고는 설득당해서 공연한 물품들을 사재고는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의 삶에서도 반추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신앙’이고 ‘복음화’입니다. 헌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지요. 그래서 선교사는 그들의 필요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만 들어주려고 이리저리 분주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작 필요한 일은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는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영적 양식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참된 행복을 되찾아야 합니다. 헌데 이를 올바로 살피지 못하면 늘 하던 행사나 하고 있게 마련이고 신자 수 증가에 열을 올리게 마련입니다. 전혀 엉뚱한 결과가 도출되는 거지요. 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것은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참된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지금의 세상에는 ‘십자가’ 즉 희생하는 삶이 필수적입니다. 헌데 저마나 누리려고만 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우리는 원하는 것

탐욕과 허영

제가 언젠가 어느 부자나라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거기서 교포사목을 하시는 신부님이 어느 부자집에 집 축복식을 해 달라고 초대를 받은 김에 마침 함께 있던 저도 따라가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언덕 위에 있는 집이었는데 그 일대의 땅이 모두 주인 거라고 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집으로 들어가니 주인 내외가 있더군요. 집안 구석구석을 뿌듯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창고에는 물건들이 가득했고 집은 너무나 넓어서 남는 방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고작 나이 많은 두 부부가 사는데 말이지요. 저는 그들이 부럽기는 커녕, 참 안타까워 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화려한 감옥에 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차라리 제가 사는 선교지의 이웃들이 더 행복해 보였습니다. 없는 살림에 차라도 한 잔 나누면서 서로 과자도 나누어 먹고 하느님을 비롯하여 이런 저런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웃을 수 있으니까요. 그 집에서는 값비싼 식기에 음식이 나왔지만 대화 주제도 ‘돈’이었고 부동산, 건축, 세금 따위였습니다. 제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었지요. 따분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그리고 초대받은 죄 때문에 그저 입다물고 그들의 말을 듣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디룩디룩 살찐 것과도 같습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지방 덩어리를 들고 있으면 옷 입기도 불편하고 거동하기도 불편하지요. 그러나 ‘소유’하려는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알았다면(물론 나름대로 열심히 나누고 있겠지만...) 정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을 터인데 그들은 이미 가진 것들을 유지하고 관리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의 정신은 거기에 매여 있었지요. 신앙과 사랑과 봉사따위는 언제나 마지막 옵션일 뿐입니다. 당장 해야 할 사업이 있고 당장 이루어야 할 거래가 있는데 그런 것에 신경쓸 시간은 없는 셈이지요. 어제도 사람들에게 참된 신앙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현명하게 잘 활용해야 한다

정당한 증오?

하느님이 도대체 언제 “그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고 너희를 억울하게 하였으니 마음껏 미워하고 독설을 던지도록 해라.”라고 허락하셨습니까? 제가 아는 하느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잘해주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루카 6,27-28) 엉뚱한 흐름에 쏠려 누군가를 공연히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요한 3,15)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증오의 어둠이 여러분의 마음을 덮지 않도록 하십시오.

위선자들

거룩한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SNS 상에 온갖 거룩한 이미지와 성구들을 갖다 붙이면서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사람들이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보아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속을 알아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속일 수 없으니까요. 그들은 사실 거룩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이 언뜻 거룩하다고 착각하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과 진실한 것, 무엇이 거룩한 것일까요? 당연히 진실한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온통 거짓말을 하면서 자신을 진실한 사람으로 드러내려고 하니 그 자체로 위선인 셈이지요.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느님의 일이라 하느님의 뜻이라 치장을 하고는 결국 제가 원하는 것을 하려 합니다. 그것도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이지요. 심지어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조차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심각하게 증오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이 진정 원하는 일이라고 말하곤 하지요. 그들의 위선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특히나 그들과 함께 머무를 기회를 가지게 되면 그들의 위선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SNS 상에서 순간 자신의 최선을 노력을 다해서 ‘선한 이미지’를 가꿀 수는 있어도 일상의 삶 속에서 진정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감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제 몫을 받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철저히 준비하고 속인 만큼 그 값을 받게 되겠지요. 모쪼록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그들을 회개의 길로 초대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계시고 그것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보이기 위한 일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마태 23,5-7) 사람들은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무엇을 하고 사는지 참으로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선교지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 제가 어떤 선교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같이 체험하면서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그들은 저 나름의 목적으로 찾아오는 것이지요. 남미의 관광 허브로 선교지를 이용하는 이들, 남미의 싼 물가와 아직 남아있는 자연을 즐기면서 프로그램을 하려고 오는 이들, 부유한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려는 이들, 기타 등등의 개인적인 목적들...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잠깐 동안의 방문에 선교지 사람들과 동화되어 그들의 속내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때로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천시하고 낮춰 보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더군다나 한 번의 여행으로 마치 선교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을 바라보면 더욱 안타깝습니다. 8년을 살아도 아직도 모르는 일이 허다한데 잠시 방문을 한 뒤에 마치 그 나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스스로를 선교사인 양 뽐내는 이들을 보면 도대체 얼마만한 교만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뛰어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교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을 닮아 겸손해지기 위해서 오는 곳이지 그곳의 미천한 상태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려고 오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런 움직임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특히나 부유한 나라에 사는 이들은 언제까지나 자신들 안에 자리잡힌 교만한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굉장히 힘이 들거라 생각합니다. 한번은 잘 사는 다른 나라에 방문을 갔다가 거기 사는 교포신자

두려움

어제 성경강의를 마치면서 질문을 하라고 하자 한 형제가 이런 질문을 해 왔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떨칠 수 있지요?” “두려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명백한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성경책을 형제님 앞에 내밀면 형제님은 이 책을 두려워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 책을 책상 안에 숨기고 한 아이를 데려와서는 ‘여기 안에 뭐가 있는데 시커멓고 커다랗고 굉장히 위험한거야. 이제 너에게 이걸 건네줄께.’라고 겁을 주면서 말을 하면 그 아이는 겁을 집어먹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 대상,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이유를 알 수 없는 문제들을 통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두려움은 ‘죽음’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직장을 잃을 수 있고 직장을 잃으면 돈을 더는 벌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지금 누리는 생활에서 불편이 생기고 그게 극심해지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다른 모든 두려움의 근본에는 우리의 근본적인 두려움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 뒤에 일어나게 될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우리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이들이고 세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고 당신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으며 그래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말이 현세의 생명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뒤에 무엇이 일어날지 알고 있으며 우리의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순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 22,37-39) 두 계명이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 순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먼저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웃사랑이 뒤따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휴머니즘’과 ‘신앙’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아름다운 일이지만 하느님 사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미묘한 문제는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 일으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요. 하느님을 먼저 사랑한다는 것이 인간을 내팽개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사랑하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하나의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선교사로 처음 선교지에 도착하면 눈에 사람들이 밟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 안으려고 애써 노력을 하지요. 하지만 이때 오직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그들을 끌어안으려고 애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에게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고 그들의 인간적 삶만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것도 부유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그런 활동은 언뜻 아름다워보이고 좋아 보이지만 여러가지 실질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고 영적으로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나라의 선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물질적인 지원’이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의 선교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간과한 채로 쏟아붓는 물질적 지원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더 동떨어지게 만들고 때로는 예전보다 더욱 탐욕스럽고 이기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차라리 물질적 지원이 없었으면 욕심이나 내지 않았을 것을 돈을 쏟아붓고 나니까 사람들이 더욱 추악하게 변해 버리는 것이지요. 선교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하느님을 사

제멋대로

제가 영적인 사정이나 천상의 사정에 대해서 아무리 쉬운 방법으로 가르쳐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건 제가 가르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마음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생각의 필터를 통과하는 것만을 진실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감옥에 갇힌 이는 참으로 비참합니다. 이는 마치 자신이 자기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 스스로 수감생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보다 깊고 넓고 광활한 것은 자신의 편협한 세계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마치 우물 속에서 하늘만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하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지요. 이들은 신비적인 체험도 이해하지 못하고 천상의 사정은 모두 허풍이고 거짓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합니다. 자신의 현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뜻에서 비롯한 이기적인 생각을 천상의 사정이라고 우겨대는 것이지요. 이는 용도도 모르면서 콜라병을 들고 아주 위험한 물건이라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부시맨과 같은 수준입니다. 천상적인 것을 세속화시키려는 움직임, 그리고 세속적인 것을 천상화 시키려는 움직임, 이 두가지 모순된 움직임 속에서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된 지혜를 얻는 방법을 망각했고 결국 그들은 제 생각의 굴레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라는 것은 뭔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야 반드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관심이 없고 세상에 관심을 둘 때에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가지기를 원하는 이들이 결국에는 더한 죄를 향해서 발판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아예 죄를 지을 생각이 없고 오히려 덕을 쌓는 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이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멀리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분쟁과 다툼과 싸움과 시기는 세상을 사랑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둠 속으로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2,13) 분명하게 일어나게 될 일을 하나 알려 드리겠습니다. 귀담아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물질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모조리 내려놓게 되지요. 사람의 ‘시신’이라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시신은 그가 아닙니다. 그가 남겨놓은 마지막 허물과도 같은 것이지요. 결국 썩어 없어져 흙으로 돌아갈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신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남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영혼의 세계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단순히 육적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가능한 만큼 우리의 영혼의 사정, 내면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적인 것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우리가 성체를 천상의 빵이라 부르고 영혼의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이 아닌 것으로 느끼는 것들, 즉 감정, 기억, 생각과 같은 것들은 모두 고스란히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것, 즉 영적인 것들도 남게 되지요. 바로 온유, 절제, 인내, 사랑, 희망, 신앙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내면에 품고 우리의 죽음의 순간에 그것을 안고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누군가가 오직 ‘물질적인 세상’에만 집착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요. 그가 소중히하던 외적 미모, 그가 중요시하던 은행의 돈, 그가 아끼던 옷, 재물, 집, 차량과 같은

하느님의 잔치에로의 초대의 심각성

친구의 생일잔치는 가면 가는 것이고 안가면 그 친구가 조금 속상해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잔치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따라 달렸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히 인지하지 못합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다못해 우리는 우리의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 안의 모세혈관의 분포와 손톱이 자라는 원리, 표피와 진피의 배치와 땀구멍의 역할과 혈관과의 사이에서 주고 받는 과정, 그리고 DNA의 구성과 원자와 분자 단위의 배치도는 우리가 우리의 온 생을 다 바쳐서 연구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헌데 우리는 세상 만물을 이루신 하느님을 우리의 ‘이성’ 속으로 집어넣어 이해하려고 드니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시며 당신의 표현 대로라면 세상 만물의 주인이고 모든 것이십니다. 그런 분이 하는 초대는 분명 우리 동네 친구의 생일잔치 초대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지요. 여기에는 ‘심각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 초대의 수용 여부를 열어두시는 것은 그 핵심에 우리의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손상해 가면서 초대를 한다면 그것은 초대가 아니라 강요일 뿐이며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책을 오른쪽에 두나 왼쪽에 두나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일 뿐, 그 위치의 배치에 대해서 책이 무슨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는 것은 그 아이의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아주 소중한 결정이지요. 하느님의 초대는 ‘모든 이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그 초대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초대를 무시하고 거절한 것뿐만이 아니라 초대하는 이를 공격하고 죽이려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오, 하느님 그들의 영혼을 용서하소서. 하느님의 초대를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소중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

당신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40,7) 번제물이라는 것, 속죄 제물이라는 것은 고대로부터의 전통이었습니다. 드높은 신이 우리가 내어 바치는 제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언가 좋은 것(축복 - 복을 빌어 줌, 속죄 - 죄를 용서해줌)을 해 주실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의 전통 안에서 ‘미사 예물’이라는 것이 바로 그 형태의 변형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때에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하느님은 예물 그 자체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정성을 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이 부자들의 많은 돈보다 더 소중한 봉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자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의지’가 봉헌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봉헌하기를 바라시지요.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봉헌할 때에 진정한 봉헌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부자들은 여전히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혹은 전능하신 분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소유물의 일부를 봉헌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시겠지요. 그들은 그렇게 하느님과 무의미한 밀당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마음을 이미 아시고 그들이 아직 자신을 봉헌할 의지가 없음을 알고, 오히려 자신의 봉헌물을 통해서 하느님을 움직이려 든다는 것을 알지요.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만일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만한 재산을 지니기는 커녕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헌데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여전히 자신의 소유로 삼은 채로 하느님에게 남는 것 가운데 지극히 일부를 봉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그 봉헌물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

약속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면 무엇이나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기로 하셨고 그것을 지키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헛된 맹세를 하곤 합니다. 이루어지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의 약속의 헛됨을 아시고 그것을 이루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되이 드리는 약속은 하느님도 진실되이 응답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성소’를 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헌신할 것을 약속하지요. 그러나 그 약속은 단순히 그 순간의 ‘네’라는 응답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의 응답이 되어야 하고 실천적인 응답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제나 수도자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그 복장 때문이 아니라 그 실천적인 삶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만 하고 살지 않는 사제나 수도자는 이미 사람들이 곁에 머무르면서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미소 짓겠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에게 헛된 약조를 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나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관된 것일 때에는 정말 진지하게 그것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판관 11,35)

명예욕

한때 다단계 행사를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의 성공담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의 성공한 모습을 비춰주면서 환호하고 찬사를 던지는 것이었지요. 거기서 보여지는 것들은 마치 교회의 신앙 간증대회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앙 간증 대회도 비슷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수많은 이들이 나와서 자신이 어떻게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지금에는 신앙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환호하고 찬사를 던지니까요. 헌데 이 두가지가 핵심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근본적인 추구’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 안에서의 성공과 부귀 영화를 꿈꾸면서 거기에 자극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고, 다른 한 곳은 하느님과 신앙, 영원한 생명을 꿈꾸면서 거기에 자극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두가지가 교묘하게 섞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물질적 부유함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의미의 부유함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찬사’, 즉 ‘명예’와 관련된 것이지요. 누군가는 가난한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고 놀라워하면서 칭찬을 해 주면 그는 그 삶에 헌신하는 보람을 실제적인 보상으로 모두 돌려받고 있는 것이지요. 수도원 안에서 한 수도자가 맡은 소임에 정말 극기와 열성을 다하는 이유가 하느님 아닌 다른 무엇일 가능성은 상존합니다. 수도원 장상의 신임을 얻고 나중에 뭔가 좋은 것을 하나 꿰차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 유행하는 SNS 상에서의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지요. 사람들이 와서 좋아요를 눌러주고 관심을 보여주니 자꾸 더 자극적이고 신랄한 내용을 찾아 그 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언제이고 그 유혹은 상존하는 것이고 제 마음이 거기에 혹할 수 있는 것이지요.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마음은 지상의 인간에게 근본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에 머무른다

사악한 이들

악마는 덜 선한 것을 더 선한 것인 양 속여서 사람을 끌어내리고, 나아가 악한 것을 선한 것인양 속여서 사람을 타락시킨다. 그렇게 속아 넘어가서 떨어지는 이들도 이들이지만, 아예 그럴 목적으로 악마의 일에 가담하는 이들이 있으니, 정말 사악한 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있으니 자녀들은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며 제 갈 길을 가고, 악마와 그 졸도들은 정해진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마태 25,41)

보이지 않는 신앙

꾸르실료 차수가 빠르다고 성덕이 높을까요? 레지오 주회수가 많다고 열성이 더할까요? 주교님을 잘 안다고 하느님을 잘 아는 건 아닐 것 같고, 교황님을 두 눈으로 보았다고 그분의 가르침이 절로 들어오지는 않는 것 같고, 신앙이라는 것은 오히려 낮은 곳에서 겸손되이 실천할 때에 비로소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닐런지요. 묵주를 많이 돌리면서 그걸 자랑하는 사람보다는, 바빠서 비록 묵주는 잘 돌리지 못해도 내키지 않는 사람에게 따스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하는 그 의지가 하느님께는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런지요.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행복한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지닐 수 있는 보물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닐런지요?

먼저 온 이들의 교만

포도밭의 일꾼들에 대한 비유는 여러가지 면모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을 간단히 살펴보면 하느님 편에서의 관점과 일꾼 편에서의 관점으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입장에서 살펴봅시다. 하느님이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일도 없고 받을 삯도 없었을 일꾼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불러서 일을 시키고 일꾼들이 동의한 ‘정당한 임금’을 약속하고 당신이 일을 시킬 때 약속한 몫을 주시려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꾼들에게 넉넉한 임금을 주시려는 분이시지요. 하느님으로서는 당신의 사랑을 베푼 것 뿐입니다. 처음부터 마침까지 그러하셨던 것이지요. 모든 것은 당신의 애정이자 호의였을 뿐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희망, 즉 너끈한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지녀볼 수 있지요. 우리의 하느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이제는 일꾼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두 가지 입장이 나뉘게 됩니다. 즉, 먼저 온 일꾼과 나중에 온 일꾼이지요. 나중에 온 일꾼이야 마냥 좋을 뿐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찾지 않아서 일도 없이 지내다가 삯도 얻지 못하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했는데 어디선가 구세주가 나타나 자신들에게 일을 주고 거기다가 후한 삯도 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문제는 먼저 온 일꾼들이지요. 이들은 분명 주인과 합당한 삯을 받기로 약조를 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헌데 마지막에 가서 뒤늦게 온 이들이 받는 상급을 보고는 그만 ‘심통’이 난 것입니다. 이들은 ‘비교’를 한 것이고 자신들이 나중에 온 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자신들의 노동의 시간과 양의 가치가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착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장 처음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지요. 주인이 부르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교만해져 버린 셈입니다. 만일 이 처음에 온 이들이 ‘비교’하기를 그만

버림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마태 19,29) 버린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냥 사정없이 그런 모든 관계를 내던지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냥 있던 집을 팔고 형제간의 우애를 끊고 부모를 내던지고 자녀도 내던지고 토지도 팔아버리면 끝나는 것일까요? 사람이 무언가를 진정으로 버리게 되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그러한 것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버리게 되는 때는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적으로 집을 버리고 가족들을 떠나 멀리 살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집과 가족에 구애받고 있으면 실제로는 하나도 버린 것이 아니게 됩니다. 선교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우리는 마치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를 나와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선교지에서도 호화스런 삶을 그리워하고, 돈을 욕심내고,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고, 현지에서 만나는 이들을 진심으로 대하지 못하고 한국의 친구들과 한국의 내 가족만을 챙기기에 바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신앙인들이 마찬가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겠노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영원에 마음을 두고 지상의 것을 조금씩 비워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지상의 것에 더는 구애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당장 모든 음식을 끊고 골방에 들어가서 명상이나 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고 감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상태, 그것이 구애받지 않는 상태입니다. 있을 때에는 넉넉히 쓰고 없어지면 부족한 대로 사는 것이 바로 구애받지 않는 상태이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없어지면 죽을 듯이 괴로워하고 부유할 때에는 그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당연시 여기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부자들이 그러하지요.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넉넉히 가졌다고 나눌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

권력

판관기 9장에는 세상의 권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훌륭한 비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댈 곳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한 권력은 결국 사람들을 짓누를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덕성을 지닌 이들, 즉 아무런 야심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려는 이들은 이미 제자리에서 충분히 자신이 하려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권력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들은 어느 정도는 야심이 있는 이들, 즉 자신의 뜻을 다른 이들에게 적용 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입니다. 단지 덕성만 뛰어난 사람은 권좌에 오를 수가 없고, 설령 오른다 하더라도 그의 주변에서 권력을 나눠 먹으려는 이들이 모두 똑같은 덕성을 지닐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설령 가장 뛰어난 성인이 세상의 왕이 되셨다 해도 결코 올바른 다스림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공동체도 늘 이런 저런 분쟁에 휘말렸고, 성녀 대 데레사의 공동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되고 진정한 권력은 오직 ‘하느님’만이 온전히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하시는 그분이야말로 가장 정의롭고 가장 공정하며 가장 자비로운 보살핌으로 만물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권력은 하느님에게 귀속되게 됩니다. 지상의 모든 통치자들은 이를 깨닫고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를 깨닫기에 지상의 통치자들의 지혜는 초라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이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참된 신앙이 있는 사람,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권력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는 참으로 만나기 힘들 것입니다. 지상의 권력이 아마 하느님의 뜻대로 자신의 방향을 진정으로 참된 방향으로 수정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참으로 희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가면서 모든 권력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사랑에 목마른 이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서 행복을 찾는 거지요. 돈을 벌려는 이유도 사랑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돈이 있으면 모든 서비스를 편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고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차피 사람 사는 건 거의 비슷합니다. 삼시 세끼 밥이 있고 극한의 환경을 피할 수 있다면 기본적인 것은 충족되지요. 우리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이유는 사회적인 관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사람은 사랑받고 주목받고 관심받고 싶어하는 거지요. 하지만 사람에게는 또다른 근본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을 주기도 해야 합니다. 사랑받고 싶어하는 만큼 사랑을 내어주기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늘 부족합니다. 사랑을 준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못난 이들, 부족한 이들,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이들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받고 싶어하는 만큼 내어주기도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내어주는 것은 거의 하지 않으려 하면서 많이 받으려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문제들이 파생되는 거지요. 세상은 ‘사랑이 부족하다’고 난리 북새통인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랑을 온통 주시려는 분이시지요.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나누려는 분, 5000명을 먹이고도 넉넉히 남을 사랑을 지니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샘에서 물을 길으면 언제나 충만할 것인데 우리는 그분을 찾지 못하고 우리 사이에서 사랑을 찾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항상 사랑이 부족하고 모자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투고 싸웁니다. 나는 이만큼 사랑했는데 너는 왜 요만큼 사랑하느냐고 싸우고 또 싸웁니다. 하느님은 그걸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면서 우리를 도우려고 갖은 방법을 찾으시지만 우리는 그걸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끼리 다투고 싸운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

하느님의 재앙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신다’는 표현이 등장하곤 합니다. 과연 주님께서 독한 마음을 먹고 당신의 자녀들이 무너지도록 재앙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이 부분에 이해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정의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선한 행동에는 선한 결과가 뒤따르게 하시고, 반대로 악한 행동에는 악한 결과가 뒤따르게 하셨지요. 세상은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주님이 당신의 정의로 설정하신 그 결과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지요. 즉 하느님과 동떨어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라 거듭 거듭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의 실수를 용서하시고 심지어는 잘못도 용서하시면서 우리를 당신께로 초대하지요. 하느님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보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리고 자신의 악한 행동을 계속하는 이상 결국에는 하느님이 설정하신 정의대로 그 결과물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이 정하신 재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그 재앙을 본인 스스로의 선택으로 끌어들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 재앙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로 설정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재앙을 받도록 선택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바로 나 스스로가 이미 설정되어 있는 하느님의 재앙을 나 스스로 감당하도록 끌어들인 것이지요.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탓을 돌리려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하느님에게마저 그 탓을 돌리려 합니다. 아닙니다. 모든 죄와 그 결과물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어,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시고 약탈당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

공동체의 운명

가끔 자신의 수도회의 존속을 걱정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참으로 공연한 걱정이라는 생각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수도회가 그 정신을 유지한다면 하느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남겨 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져야 마땅한 법이지요. 대구교구에서 하는 볼리비아 선교가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그것도 역시 하느님의 손에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의 일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다면 그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치게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영화는 얼마나 지속될까요? 무엇을 두고 ‘영화’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순교자의 피로써 쌓여진 그 신앙의 바탕이 지속된다면 한국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엉뚱한 영화(부유함, 세속적 권력)만을 찾는다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이름을 걸고 생겨난 모든 ‘공동체’의 운명은 바로 하느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공동체의 존속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고 있나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모이면 진탕 술이나 퍼마시고 저희들끼리 싸우기만 하는 교리교사회는 없는 편이 더 낫습니다. 자신들의 그 악한 표양으로 아이들에게 무슨 교리를 가르친다는 말입니까? 그 교리교사회가 사라지고 나면 하느님이 나서서 필요한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고 다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합니다. 그러고 있는 그들. 차라리 영혼들을 책임지는 소명을 떠맡지 않았더라면 매를 덜 맞았을텐데 말이지요.

추수밭의 일꾼

일은 무엇을 일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군대에서는 상당히 많은 일을 합니다. 나무를 여기 심었다가 저리로 옮겨 심었다가 하지요. 그래서 군대에서 하는 일을 ‘삽질’이라고도 표현하고 별 의미 없는 일을 표현할때도 ‘삽질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삽질도 잘만 하면 상당히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삽질을 해서 마을 을 위해 우물을 파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지요. 엉뚱하게 이쪽의 흙을 저쪽으로 옮기고 저쪽의 흙을 이쪽으로 옮기는 일이야말고 속된 의미의 ‘삽질’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일꾼이 부족하다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과연 무슨 일꾼일까요? 추수할 것이 많다는 표현으로 봐서는 무언가를 거두어 들이는 일꾼인 것 같습니다. 물론 거두어 들이려면 씨를 뿌리는 사람도 필요하겠지요. 뭔가를 심고 거두어들이는 일, 바로 하느님의 말씀, 기쁜 소식, 복음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고, 그 열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겨난 신앙을 거두어 들이는 일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안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일꾼들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러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펴봅시다. 과연 누가 일하고 있을까요? 겉으로 굉장히 분주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사라는 행사는 모두 쫓아다니면서 발품을 팔고 열심히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행사이고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성대한 행사를 하더라도 실속은 하나도 없는 일을 하는 셈입니다. 물론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열심히 세속적인 일을 하고도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이전에 그 본래적인 목적을 잘 되새길 필요가 있는 셈이지요. 일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흙을 여기서 저기로 옮겨서 둔덕을 만들고 거기 깃대를 꽂으면 사람들이 와서 박수를 쳐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완전한 사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마태 19,21) 완전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걸까요? 무엇이 완전한 것일까요? 우리는 완전한 분을 오직 한 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세상 피조물이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한 분 완전하신 분을 닮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인간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가장 완벽한 몸매를 가진다거나, 가장 완벽한 외모를 가진다거나 세상의 모든 학식을 이해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완전한 존재는 오직 하나,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복음의 부자 청년, 즉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 이는 다행히 ‘법’을 지킬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이 제정하신 소중한 법이지요. 그러나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사람, 즉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했지요. 무엇이 과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었을까요?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그럼 우리도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도 우리 재산을 다 팔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수도원이라도 들어가야 비로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과연 이 구절에서 핵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핵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 청년이 할 수 있는 것과 하느님이 시키시는 것의 차이입니다. 부자 청년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모든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수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오직 본인의 의지적 노력에 의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 법을 지키는 것마저 온전히 ‘자신의 소유’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것을 간파하고 그 부자청년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이 됩니다. 우리

성모승천 대축일

수녀원 미사를 다녀왔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미사를 드리면서 성모님의 영성에 대해서 설명했지요. “우리는 의자의 구조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의 재료가 무엇이고 어떻게 조립되는지 알지요. 하지만 휴대폰의 구조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하느님의 영역이 있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을 ‘신비’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신앙도 신비이고, 사랑도 신비이고, 심지어는 죄도 신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의 하찮은 능력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묵시록에는 참으로 다양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그런 묘사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신비를 대하는 방법으로, 즉 보다 깊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내적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성모님의 머리 위의 별 열두개가 달린 관, 태양의 옷 등은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라 성모님의 다양한 덕성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묵시 12,1) 우리는 이 내적인 시각으로 신비로서 묵시록을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묵시록을 읽고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 미스터리한 묘사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세상의 무엇으로 치환해서 이해하려고 하니 엉뚱한 이해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제 복음으로 넘어갑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 기뻐 뛰놀고,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나서 기뻐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맘에 드는 무언가를 마주할 때에 기쁨을 느끼지요.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싫어하는 무언가를 대할 때에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내가 싫은 사람은 근처에만 와도 괜시리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잘 안되는 기분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벳은 어머니를 만나 왜 기뻐했을까요? 과연 성모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신 것일까요? 과연 우리

술과 절제

칼은 그 자체로 흉기가 아닙니다.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악할 때에 그 칼이 흉기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방사능도 그 용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선의로 사용도리 수 있습니다. 인체의 내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로 방사능을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술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파괴하는 무기가 되고, 거기에 술만 먹으면 타인에게 악한 표양을 보이거나 폭력적으로 변하는 사람에게 술은 타인마저도 파괴하는 무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볼리비아에는 이 ‘술’, ‘알코올’이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코올을 접하고 거기에 길들어져, 혹은 빠져들어 버려 거기에서부터 온갖 어두움이 파생되게 됩니다. 절제와 더불어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술은 한 사람을 파괴하고 그가 몸담고 있는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폭력적인 남편, 무책임한 남성, 이기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데에 상당히 큰 일조를 하고 있지요. 본당 교리교사가 자기 아들이 3살인데 신부님이 미사 시간에 무슨 이야기 하더냐고 물으니 ‘맥주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한답니다. 그만큼 저는 매 미사시간마다 과한 음주의 폐해에 대해서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가정들이 그 피해자이기도 하지요. 한국은 술에 굉장히 관대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는 이상 몸에 쏟아부어대는 알코올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초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늘 절제와 더불어 즐기시기 바랍니다. 절제 없는 술은 고삐 풀린 개망나니와 다를 바 없습니다.

태중에서 기뻐 뛰는 아기

제가 한창 얼리어답터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을 때에 백화점을 들러서 전자제품이 많이 있는 곳에 가면 은근히 설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의 내면에 그러한 것들에 대한 욕구가 존재했고 그러한 것들을 실제로 접하고 볼 수 있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지요. 반면 백화점 1층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모를 장소였습니다. 그 많은 화장품과 구두와 지갑과 가죽 벨트는 도대체 누가 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요. 하지만 저와는 달리 그러한 곳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다가올 때에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반면 우리에게 거슬리는 것이 다가오면 소름이 끼치는 체험까지도 할 수 있지요. 특히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하곤 합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던 이유는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본질과 구원을 품은 거룩한 여인 앞에서는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노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의 악한 의도를 마주한 예수님은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고 성전의 상인들은 아예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악, 탐욕, 위선과 같은 것에 거부감을 느끼신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마주할때 진정한 기쁨을 느낄까요? 성경 말씀을 마주 대할 때, 혹은 함께 기도를 해야 할 때에, 평일미사나 주일미사에 참례할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느낌일까요? 반대로 술집에 갈 때, 쇼핑을 하러 갈 때, 재미난 영화를 보러 갈 때에는 어떤 느낌일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더 선호하고 있으며 그 선호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전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고통의 분류

비열한 고통과 소중한 고통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결과로서의 고통은 비열한 고통입니다. 물론 그 자체의 의미(회개에로의 초대)가 존재하긴 하지만 차라리 예방할 수 있었더라면 나았을 고통이지요. 담배를 피는 사람은 자기 몸을 스스로 더럽히는 사람이고 훗날 기관지나 폐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분명 스스로의 탓입니다. 그때에 가서 열심히 후회한들 달라질 것은 없지요. 차라리 일찍부터 다가올 결과를 깨닫고 담배를 삼가했더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이를 험담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 험담을 흘려들을 그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내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고통입니다. 아내나 남편을 속이고 엉뚱한 관계를 시작했다가 그 결과물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무수한 종류의 비열한 고통들이 존재합니다. 반면, 소중한 고통들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심지어는 나에게 필요한 것마저 나누어서 가난한 이들을 도울 때에 내가 느끼는 ‘불편’은 소중한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타인을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모든 이들은 영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하느님에게 내어 바칠 때에 하느님은 그 희생의 가치만큼 다른 누군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바로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개념이지요. 우리와 천상교회는 물리적으로 아무런 만남이 존재하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깊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은총의 움직임 가운데 누군가가 당하는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은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소화 데레사 성녀는 24세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겪은 고통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병환 중에 그분의 내적 생활로 쌓은 모든 덕이 후대에 훌륭한 귀감이 되어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있지요.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당하는 아무리 의미없어 보이는 고

선과 악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선과 악의 기본조차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악한 이들을 ‘선하다’고 칭송하고 많은 선한 이들을 ‘악하다’고 분별하지요. 아주 간단한 비유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사탕을 주는 이를 선하다고 하고, 힘든 일을 시키는 이를 나쁘다고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과연 사탕을 주는 모든 이가 선한 것일까요? 그리고 모든 힘든 일이 나쁜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의 한계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사람들을 분별합니다. 그가 나에게 뭔가 건네주면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가 그것을 왜 건네 주는지를 파고들지 못합니다. 그의 내면이 과연 어떤 사람일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고 당장 눈 앞에 다가오는 것에만 관심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세상’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상’ 가운데에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악한 의도를 지닌 이들도 얼마든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다가오는 것들이 마냥 아름답고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때로 우리가 어둠의 세력 가운데에 유혹 당할 때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시지 않고 지켜 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을 극복해야 우리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가장한 악한 위선자들, 그리고 기피의 대상이 되는 선한 이들, 이 가운데 우리는 올바른 분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당신 곁의 사람은 과연 선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악한 사람일까요?

구원이라는 아주 작은 사건

2000여년 전 아주 작은 중동의 시골 마을에서 시작하여 미래에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사건이 터졌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었고 당시에는 거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오직 간절히 구원을 기다리던 이들만이 세상에 다가온 영광을 알아보았지요.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같은 영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아주 일부의 사람만이 그 참된 가치를 알아볼 뿐이니까요.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나누어 받은 이들도 같은 상황입니다. 그들은 뭔가 대단한 일을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마다 제자리에서 그분의 사랑을 실천할 뿐이지요. 지금의 예수님의 명성은 대단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분의 참된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은 여전히 드물기만 합니다. 추수할 것은 참으로 많은데 일하는 이는 그 수가 초라할 정도로 작습니다. 저마다 바쁘고 시간이 없고 여력이 없다고만 할 뿐,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자신의 명성이 드러나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에는 모여드는 사람이 많아서 아예 자리가 부족할 지경입니다. 대기업 입사 면접에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본당 화장실 청소 지원자는 턱없이 부족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대기업을 차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섰지요. 예수님의 일은 모두 계획되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수퍼 히어로를 만들어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움직임이 있었지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영원을 향해 뻗어나가는 움직임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거창하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본질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구원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식의 행위나 엄청난 업적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을 지극 정성을 다해서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일의 우선순위

우리는 일의 중요성을 분별하고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일을 먼저 하게 됩니다. 여행을 가다가도 가스불을 끄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장 돌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시급하고 우선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명백히 드러나는 긴급성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지도 않고 행동하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자동차가 다니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데 그걸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하고 행동할 엄마는 없습니다. 일단은 아이의 목숨부터 살리고 그 뒤의 나머지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동물적 본능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생존 본능과 모성애는 강력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돌볼 줄 알고 목숨을 유지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본능적 차원의 행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특별한 장애가 있어서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다 가지고 있게 마련이지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단순히 육적 본능으로만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정신적 영역과 영적 영역을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동물들에게서 이 정신적 영역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도 학습을 할 줄 알고, 돌고래도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입니다. 헌데 ‘영적인 영역’은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 고차원적인 차원입니다. 동물은 자신의 구원을 걱정하고 고민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육적이고 정신적 차원의 시급한 일을 마치고 나면 우리는 영적인 일을 고민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인지’하고 신경쓸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우리 동네 사람들 가운데에는 장사를 하면서 돈 몇푼을 더 벌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속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상대가 어리숙해 보이고 스페인어를 못하는 외국인 같아 보이면 당장에라도 속일 준비가 되어 있지요. 동전 몇 개를 더 벌자고 자신의 정직함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가정의 평화

침묵에 잠기기

진흙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를 둔 부모는 옷세탁에서 자유로운 날이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어수선하고 지저분한 곳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영혼을 둔 이는 자신의 참된 고독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안식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사실 진정한 안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어지러운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갑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듣지 않아도 될 것을 듣고,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면서 스스로의 내면을 온통 어지럽히고, 그 어지러워진 내면으로 더욱 공허한 것들을 찾는 셈이지요. 하느님의 지혜를 찾으려는 사람은 가능하면 자신을 침잠시켜야 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산골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도를 닦으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도 얼마든지 침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침묵은 물론 외적인 침묵의 도움을 받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침묵을 찾는 이는 얼마든지 시끄러운 환경 속에서도 내면의 침착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번잡함을 찾아 나서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분주히 일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에게 마음을 모을 수 있습니다. 정반대의 이야기도 가능하지요. 우리가 번잡함을 스스로 찾아 다닌다면 아무리 고요한 환경 속에서도 마음이 어지럽게 마련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분주함을 즐깁니다. 정신없고 소란스러움을 스스로 찾아 나서지요. 그러면서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다고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진흙에서 노는 걸 좋아하면서 옷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불평하니 엄마도 아이의 옷을 세탁하다 세탁하다 그만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마는 셈이지요.

규율과 사랑

규율은 무언가를 막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규율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안정장치이지 무언가를 개선시키는 움직임이 아닙니다. 모든 법과 규율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은 개선시키는 힘입니다. 규율과 법은 죽어있고 수동적인 반면, 사랑은 살아있고 능동적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배워야 하지 규율을 지키는 수준으로 만족하면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이들은 ‘규율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삽니다. 주일 미사를 어기지 않았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나머지 시간은 지독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금육을 지켰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고기보다 훨씬 비싼 회를 사먹으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내는 돈은 아까워하지요. 사람들이 규율을 지키는 이유는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적어도 최소한 이 규율만 지키면 구원에서 제외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외적 형식의 규율은 지키면서 내적 규율, 진정한 규율, 참된 법은 전혀 지키지 않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더러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요.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과 영적 보화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연다는 면에서 참으로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이면에는 교회의 규율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얽매어 버릴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일 신자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법을 어길까 두려움에 떠는 수동적인 신자가 되지 말고 사랑의 열매를 얻으려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부부생활의 규율

평신도는 성무일도를 바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살림을 돕고 일상의 기도를 바칠 의무는 존재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는 일상의 문제에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저마다 보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은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다른 위치에 놓여 있고 그에 합당한 규율을 준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규율이라는 것은 울타리처럼 우리가 엇나가지 못하게 도와줍니다. 우리가 아예 엇나갈 생각이 없다면 울타리도 필요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혼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하기를 가르칩니다. 그러면 다른 규율들이 사실상 모두 힘을 잃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마음 깊이 가장으로 존중하고 순명하는데 거기에서 불륜을 걱정해서 이혼에 대한 법을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혼이니 불륜이니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부부의 사랑이 깨어지고 가정이 위태로워질때 드러나는 것들일 뿐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혼인에 대해서 ‘규율’이 많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엇나가기 쉽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사제생활이 쉽지 않고 신학교를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부부생활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고 어려운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하고 자꾸만 엇나간 길을 걸으려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규율들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에서는 모두가 서로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이기에 이런 저런 소소한 규율들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 ‘하느님을 사랑하기’가 유일한 규율이 되겠지요. 그리고 모두는 그 사랑 안에 머무를 것입니다. 모쪼록 그 유일한 규율이 지금의 현세에서도 많은 가정들의 핵심 규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저런 복잡한 여타 규율을 따져볼 이유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영혼

하느님께서 영혼을 붙들고 일을 하실 때에 어떤 영혼을 선호하실까요? 당연히 쥐기 쉽고 가벼운 영혼일 것입니다. 그 말은 그 영혼이 참으로 겸손한 영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재능이 없는 이에게 그 즉시 재능을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이 내려오셨을때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존재하지 않던 능력으로 세상 사람들의 여러가지 언어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인간적인 능력과 재능이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핵심은 ‘겸손한 영혼’입니다. 겸손한 영혼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위치를 아는 영혼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고 그분이 허락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무언가 조금이라도 낫게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런 가운데 자신을 뽐내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뭔가 잘 한 무엇으로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더라면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주제에 지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 미모, 학력, 경력, 학위, 명예, 권력과 같은 모든 것이 마치 자기 스스로 이루어 낸 업적인 듯 생각하고 으스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 그의 미천함의 바닥을 아시면서 그를 내버려 두십니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인간이라도 자신의 수명을 넘어서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만한 이들을 통해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보다 더 겸손과 사랑을 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혼 안에 겸손과 사랑이 점점 완성되어가면 결국 하느님은 당신이 계획한 일에 그 영혼을 쓰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위대한 일이지만 우리의 시선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힘들어하는 친구를 찾아가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일이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그 힘들어하던 친구가 자살까지 생각하다가 하

성체를 모신다는 것의 의미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6) 어느 수녀님에게 아주 재미난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녀원에서 수련기를 보내면서 수련장 수녀님이 가르쳐 주신 게, 늘 예수님과 팔짱을 끼고 함께 다닌다고 생각을 하라는 것이었어요. 헌데 화장실까지 함께 가기에는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화장실 갈 때는 화장실 문 밖에서 예수님에게 ‘여기 잠시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하고 화장실을 다녀오곤 했어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것은 말 그대로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살기 위함입니다. 위의 요한의 복음 구절처럼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주님도 그 안에 머무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미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헌데 이를 형식적으로만 생각하고 버릇처럼 성체를 모시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를 마치고 나면 때로는 세속 사람들보다 더 세속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모여서 누군가를 험담한다던가 술을 진탕 퍼마신다던가 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체를 참되게 모셨는가 아닌가는 외적 형식을 준수했는가 아닌가가로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태도를 보이는가 아닌가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복재를 지키고 미사 직전에 고해소 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 믿음으로 성체를 받아모시는 사람은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집에 모시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올바른 길을 몰라서 그 길을 걷지 않는 게 아닙니다. 걷기 싫어서 걷지 않는 거지요. 술꾼이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건강을 상한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는 그걸 알고도 술이 좋고 술을 마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조금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신앙의 길을 몰라서 차선책으로 다른 방식을 선택하고 거기에 매달릴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교회의 가르치는 사명을 맡고 있는 이들의 책임감도 존재합니다. 아예 보석을 사는 게 귀찮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좋은 보석을 사고 싶어하는데 그것을 가리고 올바르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탓은 보석을 사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석을 광고해야 할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요. 보석을 보석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전혀 엉뚱하고 하찮은 것으로 드러낸다면 누가 과연 그 보석을 올바로 알아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이때 사람들은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누가 사람들을 가르칠 사명을 지니고 있는가를 두고 왈가왈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된 질타의 대상은 교회의 교도권의 직무를 나누어 맡고 있는 이들이 되는 것이지요. 바로 주교와 사제단입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주교와 사제단은 예수님의 진리를 올바로 깨닫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직무로서의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 합당한 존경과 사랑을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이지요. 일하는 이는 먹을 자격이 있고 목자는 양들의 털과 젖을 먹을 자격이 있는 법입니다. 다만 그가 성심껏 올바로 일을 할 때에 말이지요. 이리가 와도 쫓지도 않고, 늘상 양들 속에 파묻혀서 그들의 털로 옷을 해 입고 젖을 짜먹으면서 여유롭고 풍요롭고 안전한 삶을 누리기만 한다면 양들은 조금씩 그 목자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상황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사제는 결국 신자들의 텃밭에서 자라납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는 사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이

종교간의 화합

아주 간단한 이야기이지요. 교만하고 타인을 증오하는 가톨릭 신자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겸손되이 선을 행하고 모든 이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불교 신자가 하느님 보시기에는 당연히 더 이뻐 보이는 법입니다. 종교간의 대화와 화합이라는 것은 모든 종교색을 그 무늬까지 똑같게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선의 근원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구할지를 논의하는 데에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외적 형식이 아니라 내면

‘호기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강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일상의 십자가를 꾸준히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기심에 넘어가서 거기에서 전하는 가르침을 듣고는 그것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전혀 엉뚱한 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속아넘어간 자들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속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 ‘속임’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당에 오면 우리는 원하는 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앞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뒷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지요. 저마다 자신이 편한 자리를 선택해서 가서 앉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영적으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신앙생활의 방법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례로 볼리비아에 교황님이 방문했을 때에 수많은 인파들이 교황님의 미사에 몰려 들었습니다. 본당마다 수많은 청년들이 교황님의 미사에 가기 위해서 저마다 ‘봉사자’로 나섰지요. 봉사자로 나서면 교황님 미사하는 곳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봉사자들이 여전히 지금도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의 방향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교황님’을 보러 간 것이지 그 교황님이 정말 소중히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러 간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큰 행사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이지 진정한 봉사를 실천하러 간 것이 아니었지요. 만일 지금의 교황님이 소중하다면 그것은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잘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교황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일상의 미사 안에서 당신의 몸을 매번 나누어주고 계십니다. 둘이나 셋 이상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늘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굳이 어딘가 특정 장소를 찾

예수님을 아는 방법

무언가를 판단하려면 적절한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이 종종 스스로의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예수님보다 자신이 배우는 학문을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적 흐름 가운데 예수님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만을 뽑아내려는 부류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려면 과연 무엇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에 대한 기준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 기준은 전부 세상의 학문들에서 차용하게 됩니다. 고고학, 심리학, 물리학, 역사학, 지리학... 등등에서 예수의 복음을 분석하고 그 가운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꼽아 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 일어나게 되는 문제는 다음의 비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곤충을 한 마리 잡아서 다리를 떼어내고 머리를 떼어내고 몸통을 떼어내서 열심히 연구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업적을 모아서 논문을 만들고 각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나서서 자신이 연구한 업적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떼어낸 부분들을 다시 열심히 조합해서 ‘이것이 곤충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곤충은 이미 죽어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학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총체적인 예수님, 예수님 그대로의 예수님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서 이해할 때에 그의 면모를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와 ‘사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진실되이 아는 사람은 그를 ‘관찰’한 사람이기보다는 그와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은 결국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만남과 사귐의 대상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이시며 구원 그 자체이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당신의 우정 안으로 초대하시고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에 이르게 하시니까요. 자신이 배운 학문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재단하려는 이

어둠의 체험을 피하기

물가에서 노는 아이가 물에 빠지지 않을 확률을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통계학자들 심리학자들은 모여서 아이의 심리를 연구하고 아이가 물에 들어갈 확률을 계산해 낼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가 물가에서 놀지 않는다면 그 모든 확률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어둠 근처에 머무르면서 죄를 짓지 않을 확률을 계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예 어둠 근처에 얼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체험’이 사람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엉뚱한 체험, 하지 않아도 될 체험은 오히려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쓸데없는 책을 많이 읽는다고 지혜가 느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지혜는 성경을 진실한 마음으로 읽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더욱 풍부히 전해집니다. 삶에 도움이 되는 체험, 필요한 체험을 선별해서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국에 우리는 우리의 어두운 탐욕이 이끄는 대로 엉뚱한 체험으로 우리의 몸을 내던지고는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둠의 영은 언제나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헌데 기름까지 지고 불로 다가가다니 그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필요한 건 사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랑’을 찾고 있지요.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는 이유는 그 돈을 벌어서 내가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편의라는 것은 내가 수고를 하지 않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때에 내가 느끼는 기분 좋은 느낌이지요. 돈이 없으면 스스로 음식을 구하고 수고를 해서 밥을 해 먹어야 하지만 돈이 많으면 밥을 사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가 우리에게 하는 수고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즉 그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많은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의 결과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나아가 돈을 벌려는 이유는 다른 이의 주목을 받고 그들의 관심을 추구하는 이유도 있는 것입니다. 돈이 없고 가난하고 후줄근하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지만, 돈이 많으면 사람들이 쳐다봐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관심과 부러워하는 눈길이 좋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을 ‘사랑의 결과물’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결과물은 오직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으로 ‘편의’를 살 수 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상대의 진정한 애정을 사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의 노력의 결과물로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3만원을 드리면 축복이 적고 10만원을 드리면 더 많은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은총을 물질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엄청난 착각입니다. 우리가 바쳐야 하는 것은 우리의 애정입니다. 오직 진심으로 자신을 내어 바치는 사람만이 사랑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을 휘 둘러서 표현하면 바로 위의 내용과 같은 말이 되는 것입니다.

두가지 면담

어제 성경 강의를 마치고 한 부부가 저를 따로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자꾸 거짓말을 하고 엇나간다는 것이었지요. ‘한 사람은 주변의 영향을 받지요. 특히나 어린 아이 때에는 거의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래서 부모의 상태에 따라서 아이의 정서도 결정이 되는 셈이지요. 부모가 매일같이 다투는 집의 아이가 정상일 리가 없지요. 그러니 아이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모님의 삶을 성찰하는 데서부터 그 해결책을 찾아 나가야 해요. 아이를 줘다 팰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순간 아이는 조용해 질 거예요. 그러나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해요. 호스에 물이 새는데 수도를 잠그지 않고 힘으로 그 구멍을 막으려고만 들면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지요. 수도꼭지를 찾아서 그걸 잠궈야 비로소 일이 진정되는 거예요. 하지만 아이가 자라나면서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그 친구들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 부모님으로서는 마땅히 아이를 ‘알아야’ 하는거죠. 아이가 어떤 친구와 어울리고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부모님으로서 관심을 갖고 애정으로 다가설 필요가 있어요. 결국 모든 것을 치유하는 것, 올바로 만드는 것은 ‘사랑’이에요. 모쪼록 아이에게 지극한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래요.’ 그 상담을 마치고 나서는 바로 다른 아주머니와의 상담이 이어졌습니다. 봉사자로서 공동체에 일하는데 어느 성격이 이상한 자매 때문에 심하게 마음이 아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그동안 가르쳐 온 대로 반발하거나 복수심을 품지 않고 열심히 참고 가라앉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마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종류의 힘든 일은 끊이지 않을 거예요. 우리 주변에는 늘 두 가지 손길이 있어요. 하나는 악마의 손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손길이지요. 헌데 악마는 우리가 좋아하는 걸 알아서 그의 손길은 사탕발림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언뜻 달콤하게 느껴지지요. 어두움의 길로 초대하는 손길은 언제나 우리가

빚진 사람

용서에 관한 이 쉽고 훌륭한 비유를 두고 사실 다른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들은 그대로 실천하면 되고, 실천하기 싫으면 그 결과를 감당할 준비를 하면 됩니다. 이 비유가 전하는 메세지는 간단합니다. ‘자비를 입으려면 자비를 베풀어라.’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다시 세속적인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줘서 내가 다시 그 혜택을 받는다면 결국 기브엔 테이크 아닌가? 하느님도 결국 세상과 별반 다를 게 없군.’ 하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큰 오류입니다. 세상은 정확하게 주고 받습니다. 심지어는 덤으로 주는 것까지도 실은 모두 계산된 것이지요. 1000원을 주면 정확하게 1000원 가격, 혹은 그 이하의 가치의 무언가를 사게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장사꾼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헌데 이 용서에 있어서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1000원을 내었을 때에 수천억원을 일시에 건네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하찮은 행위들로 하느님의 자비를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니다. 우리는 다만 작은 성의를 보일 뿐이고 하느님은 그 작은 것을 받으시고도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우리가 뭔가 드리지 않았는데도 이미 주시는 분이십니다. 헌데 문제는 우리의 ‘사악함’에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받아놓고도 한 푼도 내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엄청난 자비의 선물을 스스로 거절하는 꼴이 됩니다. 마음 속에 미움의 불씨가 지펴져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불꽃으로 영원히 스스로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고 세상의 논리로 이웃을 판단했으니 우리에게도 마땅히 그 판단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고장난 차

미국에서 온 아이들이 시골길 순례를 떠나는 날 하필이면 차가 고장 났습니다. 차축 부근이 심하게 손상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른 바꿔 달라고 했지요. 아마 예전 같았으면 불안하고 어쩔 줄 몰라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평온합니다. 하느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일이 일어나게 두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트럭에 실었던 짐을 가지고 돌아오려는데 한 아저씨가 짐 옮기는 것을 자기 차로 도와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지요. 하느님은 그 아저씨에게 선행을 할 기회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돌아와 자매들과 오붓한 커피 타임을 즐겼습니다.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교황님의 미사때 있었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매들의 말에 의하면 청년들이 걸으려 했던 그 길은 참 위험한 길이라서 언제라도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우리 청년들을 보호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돌아오니 담당 신부님이 오후에 당신이 하려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합니다. 오히려 시간이 부족해서 걱정이었다고 하네요. 어쩌면 하느님은 청년들이 얼른 돌아와서 신부님이 마련한 그 프로그램을 할 수 있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릅니다. 차는 고쳐지겠지요. 그리고 또다시 고장나게 될 거구요. 하지만 저마다의 자리에서 일어난 소중한 체험들은 오직 이 순간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안배하시는 하느님에게 감사드릴 뿐입니다.

더 나은 삶

우리는 이런 저런 것들 가운데 좋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왔습니다. 더 나은 옵션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상은 내가 겪은 것들 중에 제일 나았던 것이 최고의 옵션이 되는 것이지요. 물건은 그렇게 고르는 게 맞습니다. 내가 보고 더 나은 것을 고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삶을 그렇게 고르고 또 나아가 타인에게 내밀 수는 없습니다. 삶의 다양성은 각자에게 주어진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모두가 다 대학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대학은 더 많은 학습 능력을 지닌 아이가 배움의 길을 더 걷기 위해서 가는 곳이어야 합당한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 대학은 또다른 ‘기초과정’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되어 버렸지요. 그렇다면 ‘나은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은 지상에서 어떤 종류의 삶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를 들어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과 함께 나아가는 삶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이러한 삶은 지상에서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무슨 일을 하건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비유로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게 하루를 꾸려 나가는 일용직 노동자의 삶이 하느님 없이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으로 살아가는 대학병원 의사의 삶보다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실입니다. 제가 일하는 본당의 사람들은 한국의 전문 직종의 사람들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초라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실하게 하루를 꾸려 나가면서 나름의 소박한 ‘행복’을 누립니다. 비록 스타XX의 커피는 없지만 자신들 나름의 커피와 차를 마시면서 같은 수준의 행복감을 누리고, 비록 고급 백화점 쇼핑은 하지 못하지만 시장통에 나아가 먹거리를 고르면서 비슷한 충족감을 누리지요. 아니 오히려 반대로 이들을 그런 고급 백화점에 데리고 가면 도리어 불편해 합니다. 자신들의 초라함이

닫힌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대화’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대화의 자리에서 타인을 마주하고 상대하겠지만 이미 그의 마음 속에는 설득당할 용의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모든 가능한 근거를 마련합니다. 특히 자신이 ‘해 보았다’고 하기 시작할 때에는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일치를 저해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자기 중심주의’입니다. 이기주의라고도 바꾸어 표현할 수 있는 이 표현은 타인의 풍부한 생각과 여러가지 다양성을 흡수하는 것을 가로막지요. 그리고 이 두 강력한 생각이 부딪히기 시작하면 언제나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말은 이정도로 하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한 아이를 두고 선생님과 어머니가 면담을 하기 시작합니다. 선생님은 아이가 학교에서 보이는 모습이 어딘가 이상한 게 있어서 어머니에게 설명을 하려고 하지요. 헌데 어머니로서는 아이는 자신의 자존심인 것입니다. 지금껏 아이를 아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한 게 아니라 아이를 통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충족시켜 왔던 것이지요. 공부 잘하는 XX아이 엄마, 말 잘 듣는 XX아이 엄마, 말썽 일으키지 않는 XX아이 엄마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엄마에게 아이는 그 아이의 인격 그대로의 아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악세사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헌데 선생님이 아이 때문에 학교에 어머니를 불렀으니 이미 이 어머니는 그 자체로 기분이 나쁜 것이지요. 둘이 서로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보편적인 관점에서 아이가 보다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서 어머니에게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이 정신나간 선생이 멀쩡한 아이를 두고 바쁜 사람을 불러 놓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사사 건건 선생님이 하는 말에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뿐입니다. 결국 선생님은 어머니의 상태를 깨닫고 설득을 포기하고 맙니다. 어머니가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자신이 도와주려는 말들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될 테니까요. 어머니는 지독히 이기적인

환경

교황님께서 환경에 관한 회칙을 발표하셨습니다. 오늘 회의의 주제는 바로 그 ‘회칙’이었지요. 과연 환경을 어떻게 보존하고 가꾸어야 하는 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열띤 논의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환경은 정치 문제라고 주장하는 신부님부터 시작해서 다시 교구청 내에 환경에 관한 부서를 새로 설립해야 한다는 신부님 등등 여러가지 의견이 개진되었습니다. 저도 나름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환경에서 중요한 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과연 환경을 개선시키는, 깨끗이 하는 부류인가 아니면 반대로 환경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부류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환경만이 아니라 영적인 환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나는 주변에 빛을 주는 사람인지 아니면 어둠을 퍼뜨리는 사람인지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주변에 어둠을 뿌리고 다닌다면 그분이 강론대에서 하는 말은 아무런 힘도 없어질 테니까요. 어린아이가 버스에 타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쓰레기를 버리는 걸 목격하면 그 아이는 그 뒤로 그것을 본받게 되고 같은 행위를 하게 됩니다. 즉 쓰레기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사제로서, 본당 신부로서 본당에서 쓰레기를 청소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그것을 따라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그날로부터 쓰레기를 치우는 아이가 되겠지요. 동네를 깨끗이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마다 자기 집을 청소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력이 남는 사람은 주변 청소도 하면 보다 더욱 깨끗해 지겠지요. 우리는 사제로서 사람들이 청소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굳이 청소분단을 만들어서 동네를 다니면서 일일이 청소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온 동네가 깨끗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솔직히 교황님의 회칙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읽을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었지요. 오늘 사제 총회에서 귀동냥으로 들

평화의 오케스트라

평화는 마냥 입을 닫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반대로 매순간을 떠들어대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열정적으로 함께 연주를 할 때에는 함께 동참해서 그 열정에 파묻히고 또 정적의 순간이 찾아오면 그 정적 속에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자신의 개인의 삶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이 함께 열정적으로 연주에 참여해야 할 때인지, 아니면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할 때인지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두가 조용히 머물러야 할 때에 홀로 엉뚱한 소리를 내고 있다던가 화음을 맞추어서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연주를 해야 할 때에 홀로 불협화음을을 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언뜻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타인을 파괴하려 들고, 또 자신은 침묵을 지킨다고 하면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식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귀가 음악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해서 자신이 음악 소리를 들을 의지가 없다면 말이지요. 그에게는 하느님의 연주가 전혀 들리지 않는 셈입니다. 지금이 평화의 시기인지 일을 해야 하는 시기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싸우고 다툽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히고 그들의 마음에 앙심을 남기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평화의 전사’라고 착각을 하지요. 자신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평화와 정반대된다는 것을 스스로는 절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정의를 위해서 했다고 우겨대면서 정작 하느님의 참된 정의는 바라보지 못하는 장님들이지요. 훗날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많은 속이는 자들이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참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이들이 거의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 할머니가 평화의 사도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