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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15의 게시물 표시

어린이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2) 어린아이와 같은 이가 되라고 합니다. 어린아이의 나약성과 무지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순수성과 좋은 의미로서의 의존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맑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신기함으로 다가옵니다. 어린이에게는 이미 존재하는 관습, 습관 따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장점입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은 먼저 지니고 있는 선입견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기 이전에 자신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벌이가 되거나 이익이 되는 것은 좋아하고 그 반대로 자신에게 힘겨운 일은 싫어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 앞에 좋은 것도 주시지만 때로는 힘든 일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선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심지어는 악한 사람들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뜻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다음으로 어린이들은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절대로 혼자서 뭘 하겠다고 나서지 못합니다. 그것은 어린이들의 특권이기도 하지요. 어린이들은 스스로 뭘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일이든지 아버지의 손길에 기댈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부정적 의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조차 모조리 부모님의 손에 맡기는 못된 어린이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존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 뒤를 충실히 응원하는 아버지가 있느니 그 믿음을 바탕으로 생활을 충실히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순수성과 신앙적 의존성

책에 실리게 될 인터뷰 최종 편집본

예수님의  첨병 사제 -  해외편 ‧ 마진우 요셉 신부   나는  귀한 손님 태우고 가는 당나귀입니다    2005년  사제수품 . 대구대교구 범어, 고산본당 보좌를 거쳐 2008년 6월 남미 볼리비아로 파견되었다. Cristo Salvador(구원자 그리스도)본당에 이어, 2013년도부터  Nuestra   Señora Aparecida (우리들의  아빠레시다  성모님: 브라질의 주보 성인)본당을 맡아 사목하면서 볼리비아  산타   크루즈에  거주하고 있다.      비행기  대기시간 제외, 편도 약 32시간. 그런데도 국내 많은  여행족이  이 나라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꼽는다. ‘지상에서 천국과 가장 닮은 곳’이라 불리는 우유니 소금 사막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기 또 한 사람, 마진우 신부 역시 8년 전 덜컥 이곳 해외선교 파견에 자원(!)했다. 그런데  여행족의  ‘그것’과는 이유가 달랐다. 그저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라 위치도 모른 채 신청한 것이었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지만, 그는 그곳 볼리비아에서 사제 생활의 기본을 새로이 다져 준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사제로서의 능력이 바닥부터 다시 다져지는 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본국이라면 언제나 신자들에 둘러싸여 기본적인 존경과 사랑을 바탕으로 사제 생활이 시작되고, 그 생활에 점점 익숙해져 가겠지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우선 ‘언어’와 ‘문화’라는 장벽 때문에 사제이지만 지극히 낮은 위치에 처하게 됩니다. 즉 이곳의 언어와 문화를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하다못해 여섯 살짜리 아이한테서도요.   나아가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 사제로서 제 본연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한국에서 누리던 존경과 사랑이 절대로 나 자신의 인간적 능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 덕분에 받았던 것임을 알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닮고 또 사람들에게 그분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야 제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데 합당한

성직자와 수도자의 겸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이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가르침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 흐르듯이 흘러갑니다. 하지만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릴 수 있는 가르침은 좀처럼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고 믿어버리고 있다면 그에게는 더는 가르칠 것이 없고 그저 그 자신이 직접 부딪혀가면서 배울 수 있을 뿐입니다. 사제나 수녀들끼리 함께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저마다 스승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배웠으니 더는 듣고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을 전하려고 해도 좀처럼 전해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즉, ‘겸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지요. 신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어른들이 굽신거리고, 본당에 나오면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아예 어른 행세를 하니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사제’라는 신적 직분 때문에 행여라도 하늘의 화를 입을까봐서 사람들은 그에게 쉽게 다가서지지도 못하고 뭔가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어 조언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도 꿀꺽 삼켜 버리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는 착각 속에서 살기 일쑤이지요. 세상 그 어느 가정도 문제 없는 가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 10명 중에 9명이 천사라도 1명이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고, 또 가족 외에서 다가오는 문제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헌데 한 본당의 그 수많은 구성원들에게서 문제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반드시 뭔가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큰 문제도 있게 마련입니다. 사제는 그런 상황에 늘 노출되어 사랑으로 보듬고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헌데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측근들에게 둘러싸여만 있으면서 그들의 찬사를 받게 되면 현실을 직시하기는 커녕, 자신이 만든 이상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훗날에는 크게 부딪히는 경우가 많지요. 제가 서품성구를 ‘겸손과 기도’로 선택한 것은 바로 사제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겸손’이기 때

성인들의 고통

성인들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인전을 읽어본 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하느님은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없는 평온하고 안일한 삶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지요. 그들은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묵묵히 갈 길을 걸어갔습니다. 고통을 싫어하는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삶입니다. 누구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안달하는 이 세상에 다가오는 고통을 묵묵히 지고, 또 심지어는 더 고통당하기를 원했으니 말이지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쉽게 도출되는 결론은 ‘아, 아무나 성인이 되는 게 아닌가보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늘 나라에 가고 싶어하는 이라면 누구나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 말인즉슨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시련과 고통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견뎌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절대로 그것이 즐겁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이 즐거워지면 그것은 더는 고통과 시련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나 마라톤을 하는 사람은 아주 가벼운 라이딩이나 조깅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라이딩이라도 처음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나 처음 마라톤을 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의 일이 성인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처음 당하는 시련과 고통은 힘겨운 것이지만 인내가 자라고 나면 점점 그러한 시련들에 익숙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더한 고통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타인의 삶을 구원하고 싶다고 자청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어쩌면 자신이 체험하게 되는 여러가지 시련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고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원한 고통 속에 내던져질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는 것이야말고 성인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마찬가지 고통을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와 하느님의 나라의 선포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루카 9,60) 제가 하는 주된 일 중의 하나는 ‘장례’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일단 급하게 장의사를 불러서 관을 구하고 시신을 넣고 친지들에게 연락을 한 뒤에 사제인 저를 찾아옵니다. 저는 매 미사 때마다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제발 부탁이니 죽기 전에 저를 찾으라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사제의 입에서 나오는 거룩한 가르침은 죽은 이에게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에 사제의 성사 거행으로 은총을 입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제를 찾는 기회의 본질적인 의미가 변화되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런 장례의 초대를 받으면 저는 일단 갑니다. 장례의 기회는 가장 좋은 복음 선포의 기회이니까 다른 미사가 있거나 정말 공동선을 위한 일이 아닌 다음에는 장례는 결코 빼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서 열심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가르치지요. 그러면 초대받아 온 모든 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듣습니다. 예수님은 장사를 지내겠다는 이에게 ‘너는 가지 말고 나를 따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라’고 하셨습니다. 대신에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고 하셨지요. 그는 장사를 지내는 곳에도 갈 수 있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셈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그는 가서 성심 성의껏 장사를 지내러 오는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희망을 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망자를 기억하러 오는 손님들을 정성껏 모시고 불편함이 없이 해 드리면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희망을 전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비록 가족을 상실한 슬

천사

하느님의 전령인 그들은 따로 육체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찍부터 알아왔지만 그들을 따로 표현해 낼 순 없고 순전히 인간들의 상상에 의존해 왔습니다. 결국 생각해 낸 수단은 '날개를 단 인간'이라는 것이었지요. 일단은 우리처럼 지적인 존재이니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고, 거기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바쁘게 다녀야 하니 날개라는 형상을 붙여 준 셈입니다. 영적인 존재는 원래 '천사'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천사들도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 먼 옛날 하느님에게 대적하는 천사가 나타났지요. 우리로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상상하기 힘이 들지만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혹자는 우리 인간이 지상에서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머물다가 구원을 받으면 하느님 가까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고 그것을 질투내어 견디지 못한 한 천사가 반항한 것이 시발점이라는 '속설'도 있긴 합니다. 그렇게 악한 마음을 지니고 떨어져 나온 천사가 바로 '악마'입니다. 천사와 악마의 역할을 뚜렷합니다. 천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영적 존재이고 악마는 그 반대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 두 존재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와 여러가지 조언, 또는 유혹을 합니다. 꿈에 천사를 보았다는 숱한 증언이 성경에 나오고 악마의 존재도 수시 때때로 드러나곤 합니다. 이 천사들은 여러 등급이 있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의 대천사들과 그 밖에도 여러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 각자를 인도할 사명을 맡은 '수호천사'들이 있습니다. 수호천사들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살피며 하느님에게 보고를 드리고 또 하느님의 지시를 우리에게 전달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교부들의 문헌에서 나타나는데 우리가 깊은 죄

보았다고 믿느냐?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50) 예수님은 직접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거기에 있는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놀라곤 했지요. 당나귀를 가져오라 할 때에도 그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을 먼저 알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누차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그런 일들은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거룩한 이들의 기이한 능력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성인전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요상한 능력에만 관심을 갖기가 일쑤이고 그런 능력을 지니고 싶어하지요. 그런 능력들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런 능력들이 있기 전까지는 어떤 수난과 시험의 과정을 거쳤을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셈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신기한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신기한 일을 보게 되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하고 반대로 일상적인 일들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곤 합니다. 병이 치유가 되던지, 내가 원하던 소원이 이루어지던지 하는 식의 일을 기다리고 바라면서 하느님이 내 이성의 의심의 선을 넘어서는 것을 보게 도와주면 그제서야 하느님을 믿겠다고 일종의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언제냐구요? 바로 그들의 죽음의 때입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죽고 나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땅에 내려놓고 나면 과연 그때부터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이해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현세의 수많은 것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탐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셈이지요. 우리의 정신은 흐리멍덩해져 있고, 볼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찾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표지’와

악은 내면에서

악이라는 것을 착각하면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악은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주체의 내면에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기셨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 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이 왜 그렇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고 하느님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그런 예수님의 행위의 진실성이나 하느님의 뜻과 부합하는지 전혀 상관없이 다만 자신들의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그에 반대하곤 했습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금육이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교회법으로는 교회에서 정한 재계를 지켜야 한다고 하지요. 맞습니다. 교회가 지키라고 하는 것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행위를 충실히 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지키는지 알고 지키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금육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것들,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도달하기를 바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절제의 훈련이고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 육적인 즐거움을 참는 것이며, 나아가 그렇게 절약한 것을 가난한 이를 위해서 쓰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헌데 이런 내면적인 가치는 온데간데 없이 금요일만 되면 병적으로 ‘고기만 안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고기는 먹고 싶은데 고기는 먹지 말라고 하니 사제에게 와서 묻는다는 것이, ‘어떤 고기는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닭은 안되고 계란은 되느냐는 둥, 그럼 회를 사먹으면 되겠다는 둥, 결국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신들의 욕구가 가로막히니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채우려고 안달하는 모습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행위의 규정을 지키겠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하느님에게서 엇나가 있는 셈입니다. 행여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일년에 한

우리 잘못의 결과

우리는 일단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다른 무언가에게 탓을 돌리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 행한 것을 인정하는 데에 따라오는 수치심과 그 중압감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무조건 강아지 잘못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탓을 돌리지 못하고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탓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약자들은 곧잘 억울하게도 강자들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에 자신의 죄는 최대한 숨기고 다른 누군가의 죄를 최대한 드러내려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수치를 피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대한 결과도 받아들이기 힘들면서 과연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잘못의 결과를 짊어질 수 있을까요? 헌데 우리는 마치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하곤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잘못도 지고 가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듯한 인상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자주 만나게 되지요.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사실 다른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 스스로 싸질러놓은 오류들을 우리 스스로 메꾸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더는 오류를 만들어내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꾸려 나가는 이들은 나아가 다른 이들의 십자가도 나눠 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두고 ‘그럼 성인이라도 되라는 거냐?’라고 항의하듯 따지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이는 ‘성인’이기 때문입니다. 쉽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려운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구원으로 향하는 길은 좁고 험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사목회의

사목회의를 했습니다. 늘 제일 게으른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정작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말보단 삶을 드러내지요. 직접 사는 것으로 모든 말이 필요없어지는 것입니다. 평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공연히 계속 자신이 의롭다는 소리를 하길래 참 좋은 의견이긴 한데 그럼 그걸 누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당연히 할 말을 잃었지요. 사목은 ‘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을 잘 알고 그들의 현실에서 한 걸음 더 하느님에게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모습을 꿈꿀 수 있고 이런 저런 일들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한껏 부풀린 계획을 실행하려고 들다가는 일도 무너지고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사목은 근본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목’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모든 활동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병원도 학교도 하는 것입니다. 헌데 그런 방향을 상실한 채로 사목이 세상의 일과 구분이 없어지기 시작하면 더는 ‘사목’이 아닌 셈이지요. 제 팔도 하나 올바로 휘두르지 못하면서 온갖 일을 펼쳐놓으려는 사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만 바라보는 사람, 본당에는 참으로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품고 하루 또 하루 걸어나가야 하지요. 인간적인 위로를 찾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통증

문득 하나를 이해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통증’이 있어야 체감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파야 비로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 통증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통증이 있어야 비로소 사물을 올바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통증은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통증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통증으로 하던 일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발가락이 아픈데 다시 공을 차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까요. 하지만 영적인 통증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전히 ‘둔감’합니다. 분명 통증을 느끼는데 그 통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사라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다고 스스로 믿는 셈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 미움 때문에 마음 괴로워 하면서도 그 미움을 그치지 않으니 하느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어리석은 이들일 뿐입니다. 증오가 자신 안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 놓았는데도 그 증오를 그치지 않으니 우리는 정말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몸의 통증에만 집중하는 사람들, 정신적 고통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통증에 둔감해지게 됩니다. 몸을 살리겠다고 영혼을 죽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이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

뒷통수를 수도 없이 맞을 것입니다. 넘어지고 좌절하겠지요. 그런 일이 있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를 수 없듯이 훈련 받지 않은 영혼은 어둠의 세력의 음모에 맞서 견뎌낼 수 없는 법입니다. 문제는 배우려 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특유의 ‘교만’이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이지요. 별달리 보이는 것이 없으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한 편으로 본인은 이미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전혀 보지 못하고 있으면서 말이지요. 사랑해야 할 것 같다 말한다고 사랑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사랑을 실천해야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인내를 지녀야 할 것 같다 말한다고 인내가 불쑥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인내는 구체적으로 곤란하고 속상한 일을 참아 견딜 때에 커지는 것입니다. 머리만 성인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지식’을 믿고 자신이 그 등급에 이르렀다고 착각하는 이들이지요. 꾸르실료 교육을 다녀왔다고 자신이 그 교육이 지향하는 바에 이미 이르렀다고 착각하고, 파스카 성경 모임을 완료했다고 그 성경 지식들이 이미 자신의 덕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요. 과연 누가 정말 그 덕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누가 그저 그런 지위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훗날 당신 백성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헌데 정말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양떼 안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하다가 거기에서 제외되는 일이 발생할 것이고, 반대로 저들은 하느님의 양떼에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 가운데에서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서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장권은 우리의 세례 증명서나 교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한 낙인이 우리의 내면 안에 찍혀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꼴찌가 되고 꼴찌는 첫째가 되겠지요. 가슴을 치고 이를 갈면서 후회를 하는

수난과 고통에 대한 몰이해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 9,45)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사람에게 ‘본다’는 행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그에게는 색깔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감촉이 존재할 뿐입니다. 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감지할 수 없는 대상은 그에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 셈이지요. 그래서 ‘구름’이라는 것은 우리로서는 눈을 들어 올려 하늘을 쳐다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에게는 많은 설명이 있고 나서야 겨우 감을 잡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영원에 대한 감각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검증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세상에서는 ‘돈’이 단연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눈에 보이고 쌓아둘 수 있고 그 영향력은 직접적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외적 치유의 기적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지만 그분의 가르침은 많은 경우 숨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심지어는 당신의 제자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비유를 풀어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특히 그분께서 가르치신 ‘수난과 고통’의 가르침에 이르러서 제자들의 몰이해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 가르침에 있어서 제자들은 다시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리고 싶었고 고통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한동안 누가 예수님의 첫째 제자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다투곤 했던 것입니다. 우리라고 그것을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모습에 가깝지요. 우리는 종교라는 것을 고통당하기 위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위해서 종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러가지 취미 생활 가운데 하나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종교가 현실을

필요와 탐욕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5) 필요와 탐욕은 전혀 다른 두 가지입니다. 배가 고픈 아이가 밥을 먹는 것을 두고 탐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탐욕은 배가 이미 부른 아이가 더 맛깔난 것을 원할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가 고플까요?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배가 부릅니다. 우리가 이미 누리는 수많은 것들을 아직 하나도 갖지 못한 이들이 지구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헌데도 우리는 필요가 아닌 탐욕으로 수많은 것들을 더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이것은 탐욕이 아니라 필요라고 설득하는 것이지요. 균형감각을 되찾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균형감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최고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상정되어 있어서 언제나 무언가에 궁핍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준으로 삼는 대상은 절대로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이 정도는 해 줘야.’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언제나 합당한 기준일 거라고 착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필요한 것은 가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필요한 것을 지니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탐욕의 대상을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탐욕에 사로잡혀 욕심을 부릴 때마다 우리의 수호천사는 슬퍼할 것이고 반면 어둠의 영은 기뻐 뛸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를 넘어서서 지니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누군가의 몫을 우리가 억지로 지니고 있는 셈이지요. 모든 탐욕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점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와서 그 모임에 대해서 어땠느냐고 물으면, 누군가는 그 모임에서 마신 포도주가 어떤 종류였고 얼마나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 줄구장창 떠들어 댈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는 어느 친구의 핸드백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에 관심이 모일 수 있지요.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 모임의 성격, 서로 나눈 대화에 촛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같은 모임을 가졌지만 서로가 가진 관심사에 따라서 그 모임은 전혀 다른 것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같은 성당에 머무른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것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참된 의미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종교활동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그 수많은 청년들이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모임에 나온다고 착각하지는 마십시오. 이성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나올 수도 있고, 별달리 할 일이 없어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또 장사를 하려는 목적으로 나올 수도 있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정말 하느님을 하느님의 자리에 두고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힘들어도 따라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욕구를 가운데 두고 하느님을 끌어다가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데 사업이 성공하라고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식이지요. 마치 하느님이 고사상의 돼지머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거의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수난의 시작 앞에서 모두 혼비백산 도망을 치곤 했지요. 우리라고 무언가 더 나을 것이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결국 제자들은 새로운 결심을 다지게 됩니다. 아직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날이 다가올 것이니 그때에는 우리 모두 주님의 참 모습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그분을 하찮게 여겼던 모든 행위를 슬퍼하

죄짓기를 즐기는 이들

제가 관찰한 사실 중의 하나는 ‘죄를 짓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하고 싶어서’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더 나은 것을 취하는 행동을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 어둠의 행위에 가담하는 사람에게도 그 선택의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게 마련이고 그는 결국 자기 스스로 어둠의 행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술을 마시고 진탕 취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행위들보다 자신에게 좋기 때문입니다. 절제를 통해서 술을 마시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가서 가족들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을 자극시킬 흥분거리를 찾고 결국 술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도 그 행위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행위보다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가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온갖 이유를 내면에 간직하고 그를 미워하기를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우중충하다고 투덜대지만 결국 그들의 삶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은 본인들 자신인 셈입니다. 마음 속에서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을 꺼내어 주변에 흩뿌리고는 주변이 칙칙하다고 투덜대는 사람, 술을 먹고 밤사이에 자신이 구토를 해서 침대를 온통 더럽히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침대가 더럽다고 투덜대는 사람과 같지요.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맙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향한 선호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다 해도 결국에는 불만에 가득하게 되고 불행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선과 행복은 오직 하느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위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충고

수술 도구는 날카로워야 합니다. 수술 도구가 무디면 수술이 이루어질 수가 없지요. 수술 도구는 날카로울수록 더욱 정확하게 환부를 도려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 수술도구를 사용하는 이의 기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타인을 향한 충고가 늘 온유하고 온화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때로는 정곡을 짚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위는 건드리지 말아야 하지요. 그러나 공연한 다른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영적 수술을 집도하는 이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픈 곳이 분명한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비타민약을 처방하고 플라시보 효과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환부가 보인다면 정확하게 도려내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좋은 충고는 바로 그런 수술과도 같은 것입니다. 매주마다 술을 먹고 떡이 되어 들어가서 늘 가정불화를 일으키는 남편을 앞에 두고 ‘하느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십니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고, 보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처가 곪아 썩어 들어가는 환자에게 비타민을 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하게 이야기하는데 술을 그만 드세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당신의 영혼이 파멸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인터넷 상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딱히 자신의 양심을 아프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나누어지는 글들은 아무나 먹어도 되는 비타민과도 같은 것이지요. 사람들은 그런 비타민을 먹으면서 ‘나는 좋은 약을 먹고 있으니 괜찮을거야.’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지니고 있는 병은 더욱 악화되기 일쑤이지요. 수술을 받겠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픈 수술 도구를 참아 견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무뎌진 영혼, 어둠에 사로잡힌 영혼은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합당한 수술 도구들이 필요하고 합당한 고통이 필요한 법입니다. 치유의 과정이 너무나 순탄하면 다시 같은 습관에 빠져 들고 같은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목정보 인터뷰 내용

예수님의 첨병 사제 - 해외편 ‧ 마진우 요셉 신부 2005년 사제수품. 대구 범어, 고산본당을 거쳐 2008년 6월 24일 남미 볼리비아 선교파견. <- 이 내용이 맞는지요? 또 현재 사목하고 계신 본당 명을 알려주세요. 볼리비아 산타 크루즈라는 도시에 있습니다. 처음 파견된 본당은 Cristo Salvador(구원자 그리스도)본당이었고,2013년도부터 지금까지 Nuestra Señora Aparecida(우리들의 아빠레시다 성모님: 브라질의 주보 성인) 본당에 있습니다.  Q. 청소년시절 신부님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만화 그리는 것은 언제부터 좋아하셨는지? 혹시 만화가를 꿈꾼 것은 아니셨는지요? 청소년 시절에는 별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정말 장난꾸러기였지요. 처음에는 구미 신평동에 살았는데 살던 아파트 앞에 논이 있어 거기에서 개구리도 잡고 송사리도 잡고, 아파트 공원에서 잠자리도 잡고 했었습니다. 한번은 개구리를 한 양동이를 잡아다가 욕조에 넣어두었다가 어머니에게 된통 혼난 적도 있지요. 그러다가 대구로 이사를 갔는데 환경이 급격하게 변한 나머지 그때부터 지극히 내성적인 아이로 성격이 변했지요. 자연과 노는 것을 좋아하고 여전히 경상도 사투리가 남아 있는 촌동네 아이가 대구 사투리를 쓰는 아스팔트 가득한 도시와 세련된 아이들 사이에서 기를 펼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래서 성당에 더 마음을 두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성당은 시골이고 도시고 가리지 않고 같은 신앙으로 같은 미사를 드리고 어울려 놀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별다를 것 없이 조용한 아이였지만 성당에서만큼은 기를 펴고 살았습니다. 이미 예비 신학생이던 고2때 성당 친구들과 댄스 그룹을 조직해서 성탄 가요제에 나간 적도 있었지요. 그때 교리교사를 하던 형 친구가 춤추고 노래하는 그런 제 모습을 보고 형에게 ‘쟤가 신학교 간다는 그 애 맞냐?’고 할 정도였지요. Q.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사제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슬픔

가족이 세상을 떠나서 슬퍼하는 사람이 있고, 여전히 살아있는 가족이 마음이 떠나서 슬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가 보다 참된 슬픔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찰나적인 것에 슬퍼하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영원을 상실한 사람을 바라볼 때입니다. 그런 슬픔 속에서 동정심을 얻고 그런 이들을 보살피려고 노력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척이나 사랑했던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감정이 격해져서 울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의 마음은 그가 체험하게 될 영원한 나라에 대한 기대감으로 행복에 벅차오르게 됩니다.

내가 누구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 9,20) 주님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묻습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에 따라서 그 대상의 가치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과연 우리에게 ‘누구’일까요? 신앙이라는 것,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대상의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제와서 예수님을 외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면 단순히 역사적으로 2000년 전에 존재했던 한 뛰어난 사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내적으로 보는 시각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분을 내적인 가치로 바라보게 되면 비로소 보아야 할 것들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그 내적 가치라는 것을 전혀 엉뚱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리더쉽의 귀감’으로 삼고, 누군가는 ‘경제학의 지표’로 삼고, 누군가는 ‘기적의 치유자’로 삼곤 합니다. 그 외에도 저마다 생각하는 내적 지표를 바탕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실제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 안의 ‘성령’만이 그분의 참된 실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을 지닌 이들만이 예수님을 원래의 자리에 놓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이고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참된 가치를 알고 사람들을 이끌어 주십니다. 오직 성령에 가득한 사람만이 예수님에 대해서 참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과 나약함은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무르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곧잘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실체를 다시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루카 9,20-21) 누군가 고백을 한다고 해서 그 고백이 다른 이들에게 쉽게 이해되어질 리가 없습니다. 오직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영적 여정

교리교사의 어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얼마 전부터 해당 교리교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기를 원했고 고해성사를 볼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망자는 마지막까지 회복과 삶의 희망을 간직한 채로 그것을 거부했고 결국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망자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을지, 그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을지 어떠했을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병자성사과 고해성사를 통해서 분명한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의 표지를 얻을 기회를 접하지 못하고 자신이 정해놓지 않은 순간에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한 번 거부하면 그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느님을 회복하는 데에 더 많은 힘을 쓰게 됩니다. 이는 마치 지금 해야 할 과제를 미뤄 놓으면 나중에 그것을 따라잡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소비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것들을 미뤄두다가 마지막에 밤새기로 해낼 가능성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그건 마치 여러가지 운이 겹친 성공 신화들과 같은 것이지요. 진정한 성공은 한 사람의 내면에 성실성과 책임감이 존재할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헌데 ‘요행’을 바라다가 성공한 사람들이 전면에 비춰지고 반대로 쫄딱 망한 사람은 결코 주목받지 못하기에 세상은 그런 사람들의 성공 신화를 바라보면서 부러워하고 자신들도 그런 기회를 꿈꾸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돌이키는 것도 꾸준한 움직임이 필요한 일생의 과업입니다. 헌데 이를 미뤄두고 미뤄두다가 죽기 직전에 요행을 얻어서 회개하고 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안일한 생각이지요. 헌데 그런 사람이라도 일생동안 자신의 직업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노력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셈이지요. 왜 다들 그렇게 영적인 여정을 우습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노력할 줄은 알면서 자신의 영혼의 참된

회개에 가장 적합한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늘 하는 변명이지요.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구원의 길에 본격적으로 이를 수 없다. 아직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라고 변명들을 합니다. 그럼 언제가 가장 좋은 시기인 걸까요? 위와 같은 변명을 둘러대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상상하는’ 좋은 때가 있습니다. 그 때라는 것은 주변에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것들이 모조리 사라지는 때이지요. 그래서 온전한 평화 중에 머무르는 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평화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문제’와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마지막이 이렇게 다가오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한 순간에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하느님은 그런 마지막 순간에도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이 그 마지막 기회마저도 올바로 부여잡지 못하고 떠나버리고 맙니다. 가장 적합한 회개의 때는 ‘지금’입니다. 내가 회개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바로 지금이 가장 적합한 회개의 때입니다. 인간의 결심이라는 것은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결심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심이 서고 나서 나의 약점 때문에 쓰러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결심을 세우는 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순간, 현재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결심에 따라 죄를 짓거나 선을 행하거나 합니다. 약점을 지닌 존재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선을 행하려고 결심을 해도 그것을 완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 그리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을 해도 때로는 유혹에 빠질 가능성과 위험이 있다는 것은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이든 한 걸음씩 더 다가서고 있는 중인 셈이지요. 회개의 가

기쁨이 없는 삶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것은 원하던 것이 채워질 때입니다. 그래서 탐욕스런 사람은 자신의 생에 기쁨이 거의 0%에 가깝고 불만이 거의 100%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탐욕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 어느 순간이고 제대로 채워지는 적이 없으며 아주 가끔 채워지더라도 이내 새로운 탐욕거리가 생겨나 이전의 만족감을 없애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기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오직 하느님 외에는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에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장 최악의 것 안에서도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마련하신 거룩한 섭리와 뜻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기쁨은 꺼지지 않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에게 기쁨을 찾아 헤메지만 결국 한계를 만나게 될 뿐입니다. 서로를 필요에 의해서 찾고 그 필요를 채우면 서로 헤어지고 하는 통에 우리가 서로 친구인지 연장인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필요한 때만 친구일 뿐인 것이지요. 참된 친구는 비록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않아도 서로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친구들은 서로 모여 깔깔대며 웃지만 마음이 서로 갈라져 있지요. 그리고 언제라도 사소한 일이 생기면 서로 완전히 원수가 되기 일쑤입니다. 참된 기쁨을 간직하십시오. 그 기쁨은 우리가 시선을 들어 높일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헤로데의 불안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9) 헤로데는 불안합니다. 제거했다고 생각한 무언가가 다시 나타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목베어 죽였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이지요. 그의 아내의 증오와 연회장에서의 딸의 공연, 그로 인한 명예심에 들뜬 헛된 약속과 그 기회를 이용한 헤로디아의 복수에 관한 일련의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불안합니다. 의로운 것을 없애버렸고 하느님에게 맞섰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군주가 될 지는 몰라도 그의 내면의 불안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이지요. 의인에게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의인은 어딜 가나 평온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할 환경 속에서도 의인은 평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스스로 한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며 하느님의 눈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마음은 평화 중에 있으며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헤로데는 훗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그 회개와 구원과 은총의 순간을 헛되이 보냅니다. 그는 예수님을 실컷 조롱하고 돌려 보내지요. 자신이 기다리던 모습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눈으로 드러나는 기적거리를 기다렸고 예수님은 그의 앞에서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의 남은 생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끝까지 장님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오직 외적으로만 사람을 분별했고 그의 앞에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출세의 길만 보였을테지요. 그는 주변 사람들을 그 진정한 가치로 돌아볼 줄 모르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무시하면서 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

단상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즉, 현실적인 구원자가 나타나서 지금의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해내고 자신들의 민족을 숨통 트이게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들에게는 전혀 구미에 맞지 않는 시골뜨기 잡것에 불과했습니다. 전혀 정치적이지도 전혀 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지요. 그냥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마약과도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사람으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어쩌면 지금 세상의 현실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무슨 용한 존재가 나타나서 자신의 갑갑한 현실을 구제해주기를 바라고 있지요. 슈퍼맨이라도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방향은 그릇되었고 그들의 욕구와 호기심은 전혀 엉뚱한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인터넷의 화제 거리를 찾아 다니면서 정작 진정한 생명을 찾는 법을 모르고 있지요. 한국을 살펴봅시다. 각종 문제가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굵직 굵직한 사건들이 시간이 멀다 하고 터지고 있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그런 문제들을 끌어안고 전면에 나서서 해결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또 영웅적인 인물을 목말라하지요. 그러다보니 전혀 엉뚱한 인물에게 속기도 많이 하고 헛걸음을 하기도 합니다. 참된 평화를 외쳐대길래 거기에 갔더니 온통 싸움질일 뿐이고 서로를 이간질 시켜서 다투게 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정말 큰 이슈가 되었으며 연일 뉴스에 떠들어 대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탐욕스런 사람들은 멈출 줄을 모르고 같은 오류를 반복해서 하고 있고 그 결과로 같은 사건들이 반복되고 있는 중이지요. 삼풍 이전에라고 그런 일이 없었을 리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고 터질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중인 셈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흔들리는 잡초처럼 이리 몰려 다니며 흥분하고 저리 몰려 다니며 흥분하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첫 사명의 주의사항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루카 9,3-5) 열두 제자에게 맡겨진 첫 복음선포 사명에서 주의할 사항입니다. 1) 의지처 - 하느님만 의지하기 오늘날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에 필요했던 도구이지요. 길을 떠나는 데에 의지할 도구이고 행여 들짐승을 만나면 자신을 방어할 도구였던 것입니다. 이를 잘못 해석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무것도 지니지 말아야 할 것’처럼 과격하게 해석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하느님만 의지하기’라는 것입니다. 이를 첫번 사명때에 예수님은 보다 엄밀하게 당신 제자들에게 강조하셨고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2) 정주 - 사명을 완수하기 일단 들어간 곳에 사명을 마칠 때까지 머물러야 합니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지 말아야 하지요. 돌아다닌다는 것은 제 잇속에 맞는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제 성미에 맞지 않으면 자신이 파견 받은 곳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일단 파견을 받아 한 곳에 같으면 그 곳에서 사명을 다할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경고 - 올바른 것을 실천하기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일 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지만 반대로 세상의 적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구분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두려움없이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과 치고 박고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마을 떠나고 그들의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의 표시를 드러내면 됩니다.

병의 치유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루카 9,6) 치유는 하느님의 고유한 행위입니다. 하느님은 참된 치유자이시지요. 치유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치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육신과 그 육신을 움직이는 정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영의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뭔가 잘못되어서 자기 손가락을 물어뜯는 버릇을 지닌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때로는 너무 심하게 물어 뜯어서 손가락에 상처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의사는 그때마다 그의 손가락을 치유해 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의 정신이 올바르게 서지 않는 이상은 그의 육체적 상해는 계속 반복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사람의 ‘영’이 바르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정신과 육신을 혹사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영혼과 정신과 육신을 같이 돌보아야 하고 따라서 가장 온전한 치유자는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직분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육의 치유자가 존재하고 정신의 치유자가 존재하고 영의 치유자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훌륭한 기술을 가진 의사는 육신의 병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고, 정신적으로도 여러가지 치유의 수단들이 존재합니다. 좋은 책과 한적한 여행과 지혜로운 이와의 만남과 같은 것은 정신을 휴식하게 하지요. 그리고 사제들은 영의 치유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예수님의 시대에는 의학 기술 자체가 오늘날만큼 그리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과 정신의 치유와 더불어 육신의 병까지도 고쳐주었지요. 오늘날에도 사제들은 예식 중에 기름을 바르지만 그때에는 기름이 진정한 치유의 수단으로 쓰이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육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의학적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지요. 즉 실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고 치유해

믿음과 성령의 일치

저는 공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말 집이 허물어질 정도라서 무너져 사람이 다칠 정도라면 모를까 건물을 짓고 수리하는 것은 제 관심사 밖에 있습니다. 물론 언젠가는 저에게도 그런 일들이 맡겨질터이고 그때는 책임감을 가지고 수행해 나가야 하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저로서는 관심도 없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건 바로 하느님의 참된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그 성전은 사람들의 신의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주춧돌로 시작해서 전체의 건물을 이루고 서로 사랑으로 결합되는 성전, 저는 그것이 진정한 성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붕이 없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뭐든 이루어낼 수 있게 됩니다. 멀쩡한 집에서 서로 갈라져 다투는 집안을 떠올려 보십시오. 차라리 집이 없다면 집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일치 단결할 것입니다. 헌데 번듯한 외적 건물 안에서 서로 뿔뿔이 흩어져 싸우니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화의 부족이 아닌 것이지요. 그것은 그들 안에 내재된 탐욕과 신앙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말씀의 들음과 성령의 실천으로 이루어진 가족이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가족의 의미였지요.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같은 가족의 모습을 꿈꿔야 합니다. 피의 결합은 진하지만 결국 그 역시 세상의 한 관계에 불과합니다. 천국에서는 더이상 육체적인 피의 결합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성령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일치를 이루게 도와줍니다.

누가 살 것인가? / 책 / 욕구에 따라 / 의사는 병든 이들에게

누가 살 것인가? 내가 살고자 하면 주님 당신이 죽고, 주님이 살게 되면 내가 죽게 됩니다. 나의 생은 유한하니 결국 다시 죽게 되고 그때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살면 그분은 영원히 살게 되니 나는 죽음을 모르는 자가 됩니다. 단순한 이론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이는 이미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외된 이를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이미 쌓여있는 구두를 두고 신상 구두 하나 새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이니 결국 위선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책 구원은 책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순간 선물 받을 수 있지요.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글씨를 읽을 줄 모르면 책을 선물로 받아도 소용이 없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찾고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을 선물하시지만 그들은 거기에 적힌 생명의 말씀을 읽을 줄 몰라 다시 그 책을 내동댕이 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사랑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라는 주석을 달 줄 알아야 하지요. 그래야 그 구원의 책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루'는 하느님의 구원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도 사랑도 모른 채로 그 겉표지 색깔만 보고 그 안에 든 글씨를 읽지도 않고 하루를 낭비하게 됩니다. 슬픈 일이지요. 욕구에 따라 실제로 사람을 움직이는 건 그 안에 내재된 욕구입니다. 외부적인 자극과 동기가 마련되더라도 욕구가 없다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구가 있다면 사람은 그 대상을 찾아 나서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고 우리의 욕구를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있는 욕구를 억지로 없다고 속여서도 안되고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을 타인에게 탓을 돌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우리 안에 내재된 욕구의 방향이 그릇된 것까지도 수용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갓난쟁이가 2층에서 화분을

공연한 호기심

세상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모르지만 노력하면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알 수는 있지만 몰라도 되는 것,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을 지적 호기심이라고 하지요. 좋게 말하면 탐구능력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공연한 호기심이기도 한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노력해서 알게 되는 사람은 좋은 의미로 탐구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억지로 알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엉뚱한 곳에 쓰려고 하는 사람이지요. 지나친 호기심은 결국 우리를 일종의 오류로 이끌어가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들,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이 산더미처럼 있는 가운데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자신의 지적 능력을 죄짓는 데에다 쓰는 사람들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고 그들을 위해서 더 나은 무언가를 찾으려면 그 일만 해도 산더미 같은데 어젯밤 이웃집의 부부싸움에 관한 소식을 알고 싶어서 혈안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알고자 하는 이유는 그 부부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연한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고 싶은 것일 뿐이지요. 그렇게 해서 다른 이들에게 또다른 소문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공부하고 배우고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국에 우리를 죄악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는 온갖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늦추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성경 읽기는 싫어하면서 다른 이들을 험담하는 데에 쓰일 요소를 찾아 얻는 데에는 그렇게나 열정적인 것일까요? 그건 바로 우리 안의 영혼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수함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이미 상실해버린 셈이지요. 사실 새로운 것을 더 알아야 할 필요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더한 신학적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가장 단순한 사실, 하느님을 모든 것을 동원

첫째와 꼴찌

사람들은 왜 그리 ‘첫째’가 되기를 즐기는 것일까요? 왜 꼴찌가 되면 안되는 것일까요? 첫째가 되면 우선권을 분배 받습니다. 즉 좋은 것을 먼저 즐길 수 있지요. 그리고 첫째가 되면 다른 이들에게 지시할 권리가 생기게 됩니다. 지시라는 것은 나의 짧은 혀로 다른 이들의 몸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요. 즉 첫째가 된다는 것은 내가 가진 힘을 통해서 나에게 모든 편의와 안락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덧붙여 명예까지도 제공되지요. 누구나 첫째를 우러러보고 자신도 되고 싶어하니까요. 모든 재화와 권력과 명예가 첫째에게 집중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피라미드의 정점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첫째에 대해서 그런 외적인 인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첫째의 위치에 숨어있는 부정적인 가치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첫째의 자리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 뿐이지요. 그래서 나머지 인원들이 모두 첫째의 자리를 노리게 됩니다. 즉, 다툼과 불화가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첫째에 머무르는 사람은 그래서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이들이 잔뜩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첫째의 자리는 유한합니다. 세상 그 어느 첫째도 자신의 수명을 넘어서 다스리거나 머무른 적이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이 허락한 지상의 삶 동안에만 보장되는 것이고 그마저도 자기 자신의 교만과 죄악으로 단축되기 일쑤인 것이지요. 사람들은 첫째를 외적으로만 바라보고 부러워하지만 기실 첫째의 스트레스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오랜 생을 누리기가 참으로 힘든 자리이지요. 첫째의 재화는 유한한 것이며, 첫째의 권력은 사람들의 증오에 기반한 것이고, 첫째의 명예는 표면적인 것일 뿐입니다. 결국 첫째는 하늘나라의 꼴찌일 뿐입니다. 아니, 그의 지상 생활에서 그가 선행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울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역사책 안에 쓰여진 황제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유명한 가수를 기억하며 억만장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마저

부끄럽게 여기면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9,26) 어느 남자가 간암 말기에 혼수 상태에서 꿈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얼굴에 의로운 분노를 지니시고 근엄한 목소리로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 너는 나를 부끄럽게 여겼다. -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언제 주님을 뵙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 그렇다. 너는 나를 보았다. 너는 언젠가 ‘사회복지’활동을 한다면서 어느 복지 기관에 간 적이 있었지. 너는 그때 그들 사이에 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역겨움을 느꼈지. 내 코에서는 콧물이 흐르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있었고 너는 다른 누군가가 나를 떠맡기를 바라고 있었다. 너는 분명히 나를 부끄럽게 여겼다. - 아... - 그리고 너는 내 말을 부끄럽게 여겼다. - 네? 저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당신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더라면 그것을 무시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 아니다. 너는 분명히 들었다. 네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 떡이 되어갈 때에 나는 네 아내의 목소리를 빌어 너에게 전화를 걸어서 몸조심을 하고 일찍 들어오라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했지. 헌데 너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 수치스러워했고 전화를 숨겨서 받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과는 아주 상스러운 더러운 농담을 지껄였고 너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아내에 대한 모독적인 농담을 하는 것을 삼가하지 않았지. 너는 내 말을 진심으로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지요.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심으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해 왔던 선한 일들이 가식이고 위선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엄청난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의 진정한 회개는 하느님의 동정심을 얻을 수 있었고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부터

미사

어제 저녁 성인 견진반 교사들이 찾아와서 오늘 강의를 부탁했습니다. 주제는 ‘미사전례’에 대한 것이었지요. 과연 미사란 무엇이며 전례적으로 어떻게 준비하고 참여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강의를 부탁했습니다. 미사란 무엇일까요? 성체성사라고도 표현되는 것이지요. 미사는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파스카 만찬을 나누시면서 거기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선언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를 기억하여 행하라고 하신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왜 그러셨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답은 간단합니다. ‘나를 기억하라’는 것이었지요.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이미지와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미지와 목소리의 기억은 이미 당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는 애써 그분의 수의를 찾아내어 모습을 되살려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사실 별 의미없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이미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이 의도하신 바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의도하신 바는 뚜렷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당신의 삶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는 이들의 삶을 먼저 살아 보이신 것입니다. 바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었지요. 우리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례한다는 것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자 마음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미사에 참례한다는 것이 ‘형식화’로 끝나지 않도록, 즉 죽어버린 행위로 끝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은 신앙’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죽은 행위를 채우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끝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채로 외적으로 교무금을 내고,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형식적인 판공을 보면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를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 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1티모 6,3-5) 교리에 대해서 논쟁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바탕 하에 다른 이들을 ‘공격’하려고 하지요. 만나서 얼마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숨길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들은 참된 가르침을 따를 생각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사납게 싸우려들지 않을 것이니까요.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대부분 ‘이득’입니다. 종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은 자연히 ‘인기’가 중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대중의 뜻’을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정작 예수님의 시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화를 위해서 일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정 ‘이득’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런 저런 논쟁거리에 불을 붙였다가 정작 다수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들고 일어나면 자기 변명을 하기에 바쁩니다. 처음부터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는 별 상관이 없었고 사람들의 욕구를 이득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득의 근거가 되는 이들이 화가 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했으면 주변을 살펴보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게 되었고 분별없는 이들을 속이기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그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루카 8,10)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비유라는 것은 1차적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초를 통해서 생을 비유하는 표현은 일단 ‘초’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사람들은 초가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쓰이는지 알기 때문에 초가 녹는다던지 빛을 낸다던지 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삶’에 대해서 그 의미에 다가설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1차적인 의미에 머무르기만 하는 사람은 그 초에서 더는 삶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알려고 하는 이’를 분별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비유를 바탕으로 예수님이 설명하려는 본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그 비유를 들으면서 비유 자체의 표면적 의미는 이해했지만 그 비유가 진실로 전하고자 하는 본질적 의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언뜻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보지 않으려 한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눈과 귀에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려 하고 자시의 삶을 건드리는 내용에 대해서는 꺼려합니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연속극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개선시키는 것을 성가시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익숙한 미사를 좋아하지만 그 미사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보기를 거부하고 듣기를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충분히 보여주었고 들려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길을 찾는 사람이면 부족하지 않게 보여주고 들려 주었습니다. 그들의 지성의 범위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때로는 그 이상을 넘어서도 보여주고 들려

성체를 씹어 먹어도 되는가?

어제 첫영성체 교리교사가 저에게 한 질문입니다. 첫영성체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아이들에게 성체를 올바르게 모시는 법을 가르쳐야 할 것 같은데 자신은 옛날에 그렇게 배웠다는 것이지요. 즉 성체를 모실 때는 씹지 말고 조심스레 삼키라고 배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적지 않은 예비자 교리반에서 이런 내용들을 가르치곤 합니다. 성체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교육 내용이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성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듯이 먹어도 됩니다. 씹거나 씹지 않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의 순간 빵을 녹여 먹으려고 기를 쓰지 않았습니다. 빵은 빵처럼, 포도주는 포도주처럼 마셨을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내면입니다. 무엇보다도 성체에 대한 ‘신앙’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성체가 정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믿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정성된 마음으로 모셔야 하고 그렇게 모신 다음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체를 모시는 진실한 방법입니다. 성체를 씹지 않고 조심스레 삼킨 후에 미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서 가족들과 티격태격한다면 도대체 그 외적 행위가 무슨 열매를 맺는 것입니까? 성체를 가루 하나 흘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모셨다지만 그 순간 뿐이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가 과연 성체를 본래의 의미대로 모신 것일까요? 외적 행위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연필은 글을 쓰라고 있는 것이지 거기 부차적으로 달린 지우개의 모양이 동물인지 과일인지 하는 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체는 우리가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 모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씹든 씹지 않든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참고로 거의 대부분의 사제들은 큰 성체

인내

참아 견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참는다는 것은 무언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미뤄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냄새가 나도 참는다는 것은 뭔가 싫어하는 냄새가 나서 그 냄새를 맡으면서도 코를 막지 않고 버티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정말 참는 걸까요? 아니면 나중에 일어날 폭발을 가중시키는 것일까요? ‘참다 참다 견디지 못한다’라는 표현처럼 우리는 나중에 2배 혹은 3배로 폭발해 버리는 건 아닐까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은 전혀 참아 견딘 게 아닌 것이 됩니다. 진정한 ‘인내’는 후속조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 순간을 견디어 내고 나중에는 그 순간에 대한 미련이 없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참는다고 하면서 반대로 ‘앙심’을 키워나가고 있다면 그것은 전혀 참은 게 아닌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인내’는 ‘용서’ 또는 ‘관용’과 늘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인내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셈이지요. 우리는 진정 우직한 바위처럼 그 순간을 견뎌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야 하지, 마치 풍선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게 그 순간만 일시적으로 모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 안에서는 이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견뎌야 하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너그러이 용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인내하는 사람이라야 그의 내면에 평화가 감돌게 되는 것입니다.

속으로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루카 7,49) 그들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비겁했고 그들의 생각은 부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고 그렇기에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반박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악의’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많은 이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생각을 속으로 합니다. 그 생각들은 부정적이며 음험하고 상대를 해치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들은 상대가 해를 입기에 이르기까지는 공개적으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원하는 어둠의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절대로 공개될 수 없는 셈이지요. 악마들은 ‘비밀’이 생겨나는 것을 즐겨합니다. 비밀은 사람의 마음을 묶어두는 참으로 좋은 수단이니까요. 어둠의 자녀들은 자기들끼로 모여서 쑥떡대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이 원하는 일이 일어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폭발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기 전까지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일어나고 난 뒤부터는 ‘사실’이 되니 더욱 떠들기 좋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많은 이들이 ‘수다’를 즐기는 방식입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음험한 수다를 즐기고 일이 퍼지고 나면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요. 비밀스럽지 않은 이야기는 별로 재미가 없고 흥미가 없습니다. 뭔가 누군가가 심각하게 손상될 비밀이 있어야 비로소 ‘재미’가 가중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은 바리사이들의 마음과 별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 합니다.

스스로 쌓는 벌

하느님이 벌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을 쌓고 그것을 우리 위로 쏟아붓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번 하면 나중에 그 거짓말이 들통날 때 그만큼의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거짓말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수치도 점점 늘어가는 거지요. 하느님은 일이 더 심각해 지기 전에 그를 도와주려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런 하느님의 호의를 거절하고 거짓을 자꾸만 더해가는 것은 바로 그 스스로의 선택이지요. 그러다가 끝까지 뉘우치지 않아 결국 모든 것이 결과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당하는 벌입니다. 우리 스스로 쌓았고, 우리 스스로 회복할 기회를 무시했고, 결국 우리 스스로 고통당하는 셈이지요. 우리가 세상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만큼 그것에서 멀어질 때에 고통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한국 음식을 사랑하는 만큼 외국에 나가 살 때에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 음식이든 저 음식이든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먹은 사람은 한국이든 볼리비아든 무슨 음식이 나오더라도 감사히 먹을 수 있지요. 하지만 한국 사람은 꼭 김치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걸린 사람은 김치가 없는 곳에 가면 마치 죽을 듯한 시늉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러가지 색다른 문화의 음식에 감사하기는 커녕 역겨워하게 되지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좋게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게 만들었지요. 그것을 파괴하고 그 파괴의 결과물을 우리 위에 내리쏟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분이시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죄악은 그런 하느님의 사랑과 호의를 너무나 간단하게 무시하곤 합니다.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그러지 않고 훗날 어느 재앙이 다가올 때에 하느님을 욕되게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미 비뚤어진 사람은 모든 탓이 있는 자신

내면과 외면

오늘은 병자 성사가 있었습니다. 온 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손가락까지 잃어버린 자매였지요. 놀라운 것은 이 자매의 증언이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중환자실에 있을때 꿈에 주님을 뵈었어요. 붉은 옷을 입고 저를 지켜보고 계셨지요. 그리고 저는 한 무리의 사람들 가운데에 섞여 있었어요. 그들은 모두 어두컴컴했고 기괴한 형상이었지요.” “자매님, 우리가 외적인 사물을 보는 것은 우리의 육신의 눈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신의 눈도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그 눈으로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몸이 망가진 사람이 있더라도 내면이 맑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외적으로 멀쩡하더라도 내적으로 망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비록 자매님의 외모는 화상으로 엉망이지만 내면을 잘 가꾸셔야 해요.”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외적으로 멀쩡해도 속에 온갖 탐욕과 거짓과 사악함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외적 모습만으로 아무런 일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두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훗날 그들이 자신의 육신을 잃게 될 때에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쪼록 그 슬픈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마음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