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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16의 게시물 표시

회개와 결과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임금님께서 이 일로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임금님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2사무 12,13-14) 사람들은 뭐든 쉽게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일단 ‘회개’를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인생길이 마치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는 것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회개는 어둠을 바라보던 상태에서 빛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회개는 쉽지 않은 것이지만 다른 과정에 비하면 비교적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는 쉽게 멈추어 서지 않습니다. 핸들을 꺾는다고 해서 그 차가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던 힘에 의해서 넘어지고 데굴데굴 구르게 됩니다. 방향을 제대로 돌리기 위해서는 속도를 줄여야 하고 어느 정도 속도가 줄어들었을 때에 핸들을 꺾을 수 있습니다. 어둠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이 갑자기 회개하는 일이 드문 이유입니다. 그렇게 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 이미 가던 속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특별한 도움이 없이는 갑작스러운 완전한 회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속도를 줄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종의 회개가 됩니다. 방향을 본격적으로 바꾸는 것은 그 속도가 어느 정도 줄어 들었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일단 회개는 속도를 줄이는 것부터 시작을 합니다. 자신이 하던 악습을 조금씩 내던지는 데에서부터 회개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악에 상응하는 결과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의 죽음’으로 상징됩니다. 다윗의 마음은 이미 뉘우쳤고 하느님에게 방향을 돌려 있었지만, 다윗이 달려가던 그 길에 대한 후폭풍은 다윗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어둠의 행위들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들이 있고 우리는 그

겁과 믿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알지 못하는 만큼 겁을 냅니다. 뻔히 아는 것을 겁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동물들은 처음 대하는 것을 경계하고 바라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것에 익숙해지면 더는 경계하지 않습니다. 어제 고양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갈 때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차를 탄 고양이는 몸이 바짝 얼어 긴장하고 아주 조심스레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것에 겁을 냅니다. 특히나 가장 겁이 나는 것은 ‘생명을 잃는 상황’이지요. 사실 수많은 것들이 최종적으로는 여기에 연계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겁을 내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직장을 잃는 것이 왜 겁이 날까요? 직장을 잃으면 돈 벌 수단을 상실하고 돈이 없으면 생존과 관련된 여러 것들이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겁’은 우리의 ‘죽음’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아직은 미지수이기 때문이고 또 언제나 죽음의 주변에는 ‘고통’의 향기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고통받기 싫어하고 죽기 싫어하기에 겁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즉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비참의 상태에서 진정으로 구원하는 이름은 이 이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생에서 다가오는 고통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열어주셨지요. 그래서 그분의 길을 따라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 즉 스스로 고통을 껴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 얻게, 즉 죽음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올바로 이해하면 할 수록 우리는 겁을 상실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모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신중하고 분별있고 사려깊게 되는 것이지요. 그 어떤 극악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왜 이런 일이 벌

두 가지 세상

두 가지 세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지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익숙해져 있고 전문가들이 되어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쓰고 어디에 취직을 해야 하고 집을 어떻게 사고 세금은 어떻게 내는지 등등을 사람들은 잘 알고 대처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그들, 특히 어른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 내고 있지요.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거의 무지합니다. 이 세상은 진리가 그 바탕이고 선과 사랑과 정의의 세상입니다. 그 밖에도 여러가지 덕목들이 존재하지요. 그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형성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심지어 보이는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이라 할지라도 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온전히 무지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두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됩니다.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지요. 그리고 두 세상을 습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이는 세상을 더욱 쉽고 빠르게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상의 일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른 한 편의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물론 이는 모두가 똑같지는 않습니다. 무엇에 중점을 두고 가르침을 받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요. 돈의 가치를 가르치는 부모와 좋은 마음의 가치를 가르치는 부모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어떤 가르침을 접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영혼은 무엇을 더 중요시하고 거기에 들러붙는가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보다 소중히 여기는 분들이기를 바랍니다. 조금씩 배워나가다보면 눈이 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똑똑히 바라보게 되는 그날, 여러분들은 이미 보이는 세상 안에서 전혀 다른 행동방식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죄악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어둠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그 어둠을 극복하고 이겨내느냐, 아니면 그 어둠에 묻혀서 더 큰 어두움으로 달려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왕으로 불리는 다윗에게도 죄악은 존재했습니다. 그는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삶을 파멸로 이끌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뉘우쳤고 상응하는 댓가를 받아 들였으며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의 힘겨운 오류 앞에서 무너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고 뉘우치는 이를 다시 받아들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죄악은 나쁜 것이지만 그 죄악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이는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돌아올 마음이 없는 이를 억지로 끌어당기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적어도 그 사람의 의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강제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나약한 이, 비록 자신의 죄악에 쓰러졌지만 뉘우치고 돌아오는 이에게 대신 힘이 되어주신 분이십니다. 다윗는 뉘우친 죄인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회개한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상실

현시대의 문제는 ‘하느님의 상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의도적으로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고 우리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정도만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지요. 하느님을 거부하려는 사람은 끝까지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강제로, 억지로, 의무적으로 우리가 당신을 섬기게 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신앙’에 있어서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그 본래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요. 강요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요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기보다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육신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육신을 위한 준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더 넓은 창고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웃의 필요를 과감히 무시할 필요도 있었지요. 이제는 더는 서로를 돌보아주지 않게 되었고 그것이 합당한 일이 되었습니다. 저마다 제 몫을 합당하게 챙기면 죽어가는 이를 돕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은 ‘옵션’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쏟고 남은 것을 쏟는 여가활동처럼 되었지요. 그런 상태로는 절대로 올바른 신앙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근본적인 선택이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기본적으로 헌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형성될 수 없는 것이지요. 계속 이리저리 합리적으로 재기만 하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셈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관측하고 나서 그 첫 걸음을 내딛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서 신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분을 따라 나설 작정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성적이고 합

드러남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마르 4,22)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운명지워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 감추인 것은 하나도 숨김 없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그 드러남을 수치스러워하게 될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드러남을 기뻐하게 될 사람들일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거룩한 일을 하였다고 해도 내면에 숨기고 있는 것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짐짓 의로운 척, 거룩한 척을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의롭거나 거룩하지 않고 정반대로 음험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아무 중요성도 없어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안에는 숨겨져 왔던 보물들이 존재할 수 있지요. 인내, 겸손, 사랑, 온유, 관용과 같은 것들이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어두움을 지니고 안심해서도 안되고, 반대로 자신이 한 일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속상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나라?

- 북한은 나쁜 나라지요? 볼리비아 사제 모임에 참석하면 흔히 듣는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 그들이 하는 잘못은 나쁜 짓이지만 문제를 잘 이해해야 해요. 거기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원래 하나였어요. 그러다가 강대국들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분열되기 시작했지요. 한 나라가 악명을 얻었다고 해서 그 모든 구성원이 나쁜 건 아니에요. 결국에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들이고 사랑해야 하는 형제들이지요. 그리고 그 악명이라는 것도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의해서 규정되는 경우가 많아요. 만일 볼리비아가 온통 마약이 판을 치는 나쁜 나라라고 한다고 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나쁜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에요. 북한에서 하는 여러가지 일들이 옳지 못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결국은 다시 하나로 뭉쳐야 하는 형제들이지요. 사람들은 자연스레 더 많이 외쳐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것이 군중의 특성이지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광고가 성공하는 이유도 그것이지요. 사람들은 여러번 반복해서 듣고 바라봄으로 인해서 그 물건이 필요하다고 막연히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인데도 말이지요. 전쟁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적절히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야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긴장감이 풀어지게 되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큰 손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규정해 놓고 매일같이 나쁜 사람으로 규정한 이들에 대해서 비방하는 말을 떠들어대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일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마다 제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분열을 야기하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를 죽일 듯이 대하던 이가 하늘 나라에서 그 상대와 마주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아니

사제상

현재의 사제상은 과거의 사제상으로부터 생명력을 이어받고 또 미래의 사제상에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현재의 사제상을 올바로 바라보게 되면 과거의 사제들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고, 또 다가올 미래의 사제들이 어떠할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의 사제는 과연 어떠한가? 여전히 독선적이고 아집에 사로잡혀 있으며 교만한 모습이 보인다는 의견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차마 공개적으로 말은 하지 못하고 신음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다른 한 편, 그 사제상을 깨닫고 전혀 새로운 사제상을 준비하는 이들도 보인다. 겸손하고 포용적이며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과연 미래의 사제상은 어떠할 것인가? 아직은 희망은 있다. 많은 젊은이들은 새로운 시대상에 부합하여 성장하고 있으며 여전히 영적 요구는 높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사제들이 양성될 것이고 배출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은 상존한다. 기본적인 사제 성소자의 숫자는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고 머지 않아 신앙은 그 자체로 화석화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여전히 외적인 신앙 형식의 준수가 요구되고 일상화되어 있어서 미사에 의무적으로라도 참석하는 이들이 성당을 채우고 있지만 앞으로 영적인 양식을 충분히 주지 않으면 그나마 ‘의무’로 유지되고 있는 이 외적 형식도 메말라버릴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 없는 적적한 성당에는 젊은이들이 갈 이유가 없으며, 자신들이 간접적으로라도 체험하지 못한 삶의 방식을 젊은이들이 쫓아갈 이유도 없다. 그렇게 성소는 서서히 메말라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사제들에게 달린 문제이다. 사제들이 희망을 주고 충만함을 주고 사랑을 베푸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은 교회를 찾아올 것이고 서로 사랑하고 주님의 길을 배워 나가면서 성소를 다져나가게 될 것이다. 성령의 불을 지펴야 하고 내적인 성전을 새로이 새울 줄 알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한국 교회의 재건을 위한 주제가 아니라 전 세계교회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보고 또 보아도, 듣고 또 들어도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마르 4,11-12) 이 구절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그들이 이해하고 싶은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이해하고 싶은데 하느님께서 가로막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이해할 의도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알아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보고 듣게 되어 마음이 돌아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할 마음이 없었고 마음을 바꿀 의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현학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수수께끼처럼 들렸고 비유 자체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비유 안에 들어있는 속 뜻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 즉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다시 묻고 물어 결국에는 그 뜻을 파악하게 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지나치지 않고 다시 그 뜻을 파고들고 파고들어 결국 그 안에 포함된 보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신학을 배우는 평신도의 예를 들어 봅시다. 그가 진정 배우려는 것이 예수님인가 아니면 단지 신학을 배워서 자신의 학식을 높이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가 하는 데에서부터 근본적인 노선의 차이가 존재하게 됩니다. 정말 신학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알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배움에서 실천할 거리를 발견하고 더욱 겸손해지고 사랑을 완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배움을 통해서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는 사람은 더욱 교만해지고 하느님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신학을 배움으로 인해서 한 사람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더욱 멀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길

은총과 자비와 평화(2티모 1,2)

은총은 가장 기본적인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은총이 없이는 우리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명 자체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기회를 통해서 내려오는 은총(조력은총)이 있지만 사실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은총(상존은총)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자비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유혹에 시달리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지요. 바로 이 때에 필요한 것이 자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도와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지요. 자비는 나약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평화는 아무 일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사실 이런 저런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면 그는 평화로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실하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이기적인 마음이나 악한 의도로 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낮동안 일을 많이 해도 밤에는 평화로이 잠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이 평화를 간구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 첫머리에 나와있는 이 단어들은 지극히 짧은 인사이지만 그 안에 포함된 의미가 엄청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같은 단어들로 서로에게 인사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박해 당하는 예수님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 22,7) 사울은 그리스도를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만난 적도 없는 그리스도를 박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사울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신앙을 지닌 모든 이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나머지 지체가 모두 그 아픔을 느낍니다.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나머지 모든 지체가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지만 그들은 곧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아픔을 느끼고 사울을 회개에로 초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굳은 믿음 안에 연결되어 있을 때에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그 즉시 하느님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하느님은 너무나 크고 선하신 분이어서 우리에게 악을 가하는 이들 마저도 구원하고 싶어 하시기에 당신의 정의의 실행을 늦추시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당하는 고통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의미있는 것입니다. 내 몸의 아주 작은 불편이라도 우리가 곧 신경을 쓰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체의 아주 작은 신음소리 하나도 하느님은 소홀히 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고통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 안에서 이렇게 고통스러운데도 하느님께서 당장 이 고통을 해결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다른 뜻이 있으시기 때문이고 따라서 나에게 이 고통을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의 표현들이 모두 어리석은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도 않고 모든 고통은 사라져야 할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리석음의 상징’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면 그 기적의 능력으로 세상을 쓸어버리면 될 것을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은총의 샘

우리가 위대한 성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성인에게서 비롯하는 모든 것이 마치 그 성인에게서 고유하게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모든 거룩함의 샘은 하느님이십니다. ‘거룩함’과 관련된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셨기에 거룩해지는 것이지 그분이 원하지 않으셨고 주지 않으셨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대단한 일을 하신 분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모든 은총의 샘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을 끝까지 쫓아가 박해한 악인으로 역사에 남을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를 선택하셨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물론 이 부르심에는 각자의 응답도 중요합니다. 하느님이 부르시고 이끄시는 것에 대응하는 응답이 필요하지요. 하느님은 인간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응답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은총의 샘은 주님이지만 그 샘을 받아들이는 이는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그 어떤 성인이든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것을 거절할 자유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성인전에 나오는 찬란한 이야기들은 성인들의 일생에서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시간들은 모두 인내와 성실성 안에서 견디고 또 견디어 내어야 했던 시간이지요. 따라서 그 어떤 성인이든지 그 길고 고된 길 가운데에서 다가오는 은총을 거절할 충분한 여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고귀한 부르심과 인간의 성실한 응답, 이 둘이 서로 만나서 세상에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부르심 없는 응답이 존재할 수 없고, 응답 없이 강제로 이루어지는 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각자 저마다에 상응하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모두가 적절히 응답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복음선포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5-16) 복음의 선포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이 길에 진정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한 순간부터 복음의 선포는 우리에게 당면과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신앙을 사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물론 이 복음 선포의 양식을 단 하나의 방법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생판 모르는 장소에 가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믿으라’고 하면서 주절주절 성경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복음선포의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탈렌트를 가진 사람도 필요하겠지만 보다 본질적인 복음 선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을 사는 것이 복음 선포의 핵심입니다. 복음을 아무리 말로 잘 풀어낸다고 해도 그 복음을 직접 사는 사람이 더 나은 법입니다. 사람은 말로 감화되기 이전에 삶으로 감화되기 때문입니다. 말을 아무리 멋들어지게 잘 해도 그의 실제적인 삶이 정반대라면 그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복음은 삶의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선한 사람, 온유한 사람, 친절한 사람, 겸손한 사람이야말로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 그 자체가 복음을 증거하는 셈이지요. 삶 자체로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복음 선포자인 셈입니다. 저녁이면 조용한 곳을 찾아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홀로 성경을 읽는 어머니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자라온 아이는 따로 신앙에 대해서 열과 성을 다해서 가르치지 않더라도 자신이 힘겨워질 때에 어머니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면서 신앙을 찾게 될 것입니다. 아이를 억지로 교리반에 보내고 복사단에 보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교의 방법이지요. 수많은 어머니들이 자신의 삶은 신앙적으로 가꾸지 않으면서 자녀들에게는 성

물질선교

오늘도 미사를 마치고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설명합니다. “신부님, 집에 이런 저런 일이 있는데요. 혹시 돈을 좀 빌려 주시면 안될까요?” 그래서 안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돈을 쉽게 빌릴 수 있는 은행이 아니라고 했지요. 겪고 있는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돈을 빌려 주는 것은 상태를 개선시키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고 해 주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 선교지에서 어느 선교사든지 빠지게 되는 유혹 가운데 하나는 ‘물질 선교’입니다. 일단 외국의 부유한 나라에서 일하러 와서 적어도 자금 면에서 고통 당하는 일이 없고, 또 한국의 어느 본당에든지 가서 불쌍한 모습을 보이면 도와 주려는 사람이 쇄도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선교사는 이런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즉, 자금을 끌어와서 쏟아 부으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는 유혹이지요. 이런 저런 ‘자선사업’을 구상하고 건물을 지을 궁리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자금은 전부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외지에서 들여오는 것이지요. 이런 물질선교는 그 결과가 빨리 나타납니다. 즉,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고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교회를 가득 채웁니다. 뭔가 떡고물 떨어지는 일을 기다리고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손을 벌리기 위해서 모여드는 것이지요. 처음 선교를 와서 말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 사람들이 북적대는 교회를 보는 것은 흐뭇한 일이지요. 또 일단 기본적인 겉모습은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이니 스스로도 뿌듯함을 느끼고 나아가 대외적으로도 뭔가 이루어 놓은 것처럼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고 하니 그 단 맛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고, 돈으로 흥한 자는 돈으로 망하는 것이 세상 논리이듯이 마찬가지로 돈으로 하는 선교는 그 한계가

선택의 중심

하느님은 우리를 언제나 선택의 중심에 두십니다. 우리는 선택을 할 때에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중립의 위치에 있게 됩니다. 악인도 선택을 할 때에는 올바름과 그릇됨의 중간에 위치하게 되고, 선인도 선택을 할 때에는 올바름과 그릇됨의 중간에 위치하게 됩니다. 악인이라고 해서 선을 선택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반면 선인이라고 해서 악을 선택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도 없지요. 다만 이미 내면에 선호도가 생겨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선호도가 선택의 중립성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악인에게는 ‘기회’가 되고, 선인에게는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악인이 악만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대부분의 악은 초창기의 선택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가장 극단의 상황에서도 선을 선택할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인이 선을 선택할 때에는 그래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의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선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인이 선을 선택할 때에는 언제나 그만한 의지의 자발적인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상을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겠지요. 한 사제가 사목을 할 때에 그가 사제라고 해서 선의 선택을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제는 늘 물질의 유혹, 이성의 유혹, 명예의 유혹, 권력의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즉, 일을 쉽게 하고 싶고 육신을 안락하게 하고 싶은 유혹에 늘 시달리는 것이지요.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선택으로 다시 사목에 헌신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양들의 목소리를 듣고 양들을 이끌어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악인이라고 해서 회개의 기회가 끝난 사람은 없습니다. 악인이라도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선택할 기회가 열려 있게 됩니다. 죽기 일보 직전이라도 진정한 회개를 한다

파견된 자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1,18-19) 기름을 부음 받은 자, 영을 수령한 자는 파견된 자입니다. 파견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히 그런 지위들을 수여하십니다. 파견을 받은 자는 사명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이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자입니다. 그 일은 다음과 같은 일입니다. 1)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 세상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재화가 없는 이들도 가난한 이들이지만 정말 가난한 이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을 믿는 이들입니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것만을 움켜쥐고 자신이 아는 것만 알고 자신의 세상 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가난한 자입니다. 비록 물질적인 재화가 부족해서 불편한 생활을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이들은 사실 부유한 이들입니다. 참된 복음은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잡혀간 이들에게 선포되는 해방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싸워서 유배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의아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이 잡혀가는 것을 반드시 물리적인 범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은 죄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어둠의 주인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즉 사탄의 노예들이 되고 맙니다. 일단 죄에 사로잡히게 되면 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힘들게 되지요. 사명을 받은 이는 이렇게 사로잡힌 이들을 구해 내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빛을 밝혀 주고 그들이 어둠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지요. 3)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기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눈먼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거룩한 가르침을 전하는 이

거룩한 가르침은 언제나 반발을 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가르침은 우리 안의 그릇된 흐름을 수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거짓말을 하는 아이에게 ‘진실하라’는 가르침은 거북함을 주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거짓말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미 진실한 삶을 사는 아이에게 ‘진실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런 저항감을 주지 않습니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게 ‘아내에게 충실하라’는 가르침은 거부감을 줍니다. 이미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헌신하는 남편에게는 아무런 느낌이 없고 편안한 가르침일 뿐이지요. 이처럼 거룩한 가르침은 언제나 반발을 야기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을 전하는 이는 언제나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힐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는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일상적인 중상과 모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가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악한 의도로 이루어진 계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이가 거룩한 가르침을 계속 전하는 곳에는 그릇된 것이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략을 짜서 그를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자신들 스스로 악의 최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마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처럼 거룩한 이들도 거룩한 죽음(그러나 세상에는 억울하고 말도 안되고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는 십자가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데에는 단순히 육신이 파괴되는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명예도 파괴되고 관계도 파괴되고 감정도 파괴되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거룩한 이들은 이러한 순교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지막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무너지지 않으며 반드시 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의

자유

우리의 사랑은 자유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그 누구도 없습니다. 억지로 사랑하는 순간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온전한 자유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를 오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전적으로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야지만 당신이 계획한 아름다운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의 자유를 건드리지 않으십니다. 그 자유를 건드리는 것은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첫번째 명제는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온전히 존중하시고 거기에서 사랑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명제를 벗어나면 일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때로 우리 사이의 관계 안에서 제약을 받곤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가정에 ‘자유’롭고 싶은 남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제가 번 돈을 흥청망청 쓰고, 가족들을 핍박하고 윽박지른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다른 이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중이지요. 그는 자신의 자유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자유를 제약할 자유는 없는 셈입니다. 따라서 그는 훗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는 가족들에게서도 마찬가지 관찰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유의 억압을 당하면서도 그 가족들은 ‘자유’가 있습니다. 같은 악행으로 그에게 되갚는 복수를 실천하던지 아니면 하느님의 정의를 믿고 아빠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던지 하는 선택의 여지가 있지요. 행여 어느 아들이 ‘왜 아빠만 그렇게 사느냐? 나도 그렇게 살겠다!’고 하면서 아빠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면 그 역시 스스로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자유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자유는 ‘사랑’을 하기 위한 전제

자비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얼마나 나에게 잘해 주었는지 오늘 보여 준 것이다. (1사무 24,19)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선발 되었다가 하느님께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한 탓에 얼마 가지 못하고 다음 왕인 다윗에게 밀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의 ‘시기’가 시작되지요. 자신의 탓으로 잘못해서 떨어져 나갔음에도 사울은 자신을 반성하기는 커녕 자신의 권력 안에서 타인을 시기하고 비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에게 충실해서 사랑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기보다는 잘 하고 있는 타인을 깎아 내리려고 하지요. 은근히 대화 속에서 상대를 깎아 내리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는 합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뭔가를 잘해볼 생각을 하지는 못하고 타인의 명성을 깎아 내려서 그것을 즐기려는 아주 나쁜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녀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과 사랑과 인내와 겸손으로 상대를 대하고 상대가 우리를 비난할 여지를 남겨주지 않지요.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의로움 안에서 악인들의 악을 고발하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기에 더욱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사랑은 그 완전성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 크게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따라서 악인을 향한 자비는 하느님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충고

옛날 한 선비가 절벽을 따라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에 이백 보 정도 앞에 한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길을 두드리며 마주 오는 것이 보였다. 장님의 열걸음 정도 앞에 절벽 쪽으로 작은 꽃이 하나 피어 있었는데 향이 무척 강한 것이었다. 장님은 그만 그 향기에 취해 절벽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래서 그 선비는 장님을 고함쳐 불렀다. “이보슈!!!! 어이!!!!! 멈추시오 당장!!!!!” 장님은 그 부르짖음에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선비는 허겁지겁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헉, 헉, 지금 당신이 걸어가던 쪽으로 엄청난 구렁텅이가 있었소. 그러니 그쪽으로 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혹시 가까운 곳에 가는 거라면 내가 이 절벽이 있는 곳을 벗어날 때까지 동행해 주겠소.” 헌데 장님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선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혹시 무슨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으시오?”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소만, 초면에 그렇게 고함을 지르는 법이 어디있소?” 장님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선비에게 말을 내뱉었다. 선비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응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요?” “좀 더 부드럽게 말을 걸고 주의를 줄 수도 있었을 것 아니요.” 선비는 기가 찼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미안하오. 앞으로는 내 조심하도록 하지요.” ========== 충고를 하는 이들은 언제나 상대를 생각해서 조언을 합니다. 그리고 조언을 듣는 사람들은 언제나 조언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조언 앞에서 딱히 기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었던 위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장님이 절벽에 나가 떨어지고 온 몸이 부서졌음에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면 그때에는 떨어지기 직전에 들었던 조언이 얼마나 필요했던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어둠의

미움, 고해성사, 미사

제가 남편 땜에 성사를 네 번이나 봤어요.근데 성사를 보고 나서 좀 나아져야하는데 제 맘은 성사 보기전과 똑같아요.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것이 무뎌져 죄인 줄도 모르겠어요.하지만 힘든건 여전하거든요. 저희 본당 신부님께 (상담을) 부탁 드려었는데 바쁘신가봐요.연락 주신다고 하셨는데 여전히 답이 없으셨어요. 지금 현재로써의 남편은 모든것이 다 싫어요. 먹는거 자는거 난 힘든데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거 꼭 절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요.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은채로 회사 출근 했어었거든요. 지금은 물론 그 정도는 아니지만요. 이러는 제가 싫어서 평일미사 두 주나 드리지 않았어요.저 힘들어도 평일미사 매일 드렸었거든요. 1) 상대를 향한 미움의 씨앗과 그 나무 2) 고해 성사에 관한 문제(올바른 뉘우침) 3) 힘들 때에 미사의 가치 먼저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해서 정돈을 해 보면 가장 먼저는 남편을 향한 어두운 마음의 시작을 들 수 있습니다. 두 분은 물론 사랑으로 첫 시작을 하셨을 것이고 지금의 상태는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첫 이유가 있을 것이구요.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그 첫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 원인을 제공하는 이에게 있다기보다 그 원인에 준비되어 있지 않고 올바로 수용하지 않는 본인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분위기가 좋을 때에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꾸며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장미꽃으로 다가오지 않고 설령 그렇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장미꽃이 물리고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문제는 내 주변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에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변에 늘 나에게 필요한 존재를 배치하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은 자매님에게 가장 필요한 사

예수님과 친척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 3,20-21) 군중과 친척들의 분명한 대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도움을 구하면서 그분과 제자들에게 밥을 먹을 시간조차 주지 않는 한편,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그분의 일을 가로막기 위해 붙잡으러 다닙니다. 친척들은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과 함께 호흡하면서 살아온 이들이지만 가장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런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적으로만 분별하고 외적 관계를 내적인 것에 앞서서 분별하게 마련입니다. 더군다가 우리 안에는 ‘교만’이 늘 작용하기 때문에 상대가 나보다 우위에 서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내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면 그를 통해서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리기보다 그를 시험하고 깔아내리려고 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군중들도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필요한 것들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 예수님을 진정한 예언자로 알아본 이들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예수님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 빌라도의 심판대 앞에서 군중들은 그분을 못박으라고 외쳐대고 말았지요. 참된 하느님의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일쑤이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 반쯤 미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의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향한 움직임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거슬림’일 뿐입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적인 가치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이고 내적인 가치를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참된 가치를 담아내기

같은 사물을 두고 원하는 대로 쓰게 마련입니다. 나무토막은 베게 대신으로 쓰일 수도 있고 불을 피워 한 순간 몸을 덥히는 데에 쓰일 수도 있고 조각을 해서 아름다운 상을 만들어 보다 소중한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양한 쓰임새가 있습니다. 저는 사제이지만 또한 만화가이기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 블로거이기도 하고, 그냥 재미진 시간을 보내는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저에게 다가와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취해갑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다 취하고 나면 그 밖의 것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지요, 한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재능보다 하느님에게서 비롯한 것을 얻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저의 사제직은 제 재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에게 와서 제 존재를 뛰어넘는 하느님으로부터 비롯하는 요소를 만끽하려 하지 않고 그저 인간적인 재미 만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월요일마다 하는 성경모임에 나가서 언제나 성사를 보라고 하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오후의 한 시간 정도 별다른 할 일이 없어 모이는 모임에서 저를 흥미의 대상으로 접하고 집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눈이 찢어진 동양 남자가 자기네 말로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 신기한 것이지요. 물론 그 가운데에는 저를 ‘사제’로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마다 필요한 것을 취하는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우리들의 성향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엉뚱한 방식으로 찾습니다. 제가 필요할 때에만 찾지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마땅히 감사와 찬미와 존경과 신의와 사랑을 드려야 하는 분이지 우리가 필요할 때에만 찾는 동네 구멍가게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그릇되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과 신앙에 대한 이러한

머리와 몸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머리’의 역할을 담당하십니다. 세상에 머리가 없는 몸은 없습니다. 머리가 떨어지면 그 즉시 생명이 중단되게 마련입니다. 교회의 일원은 반드시 머리에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머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왼쪽으로 가자고 하면 왼쪽으로 가야 하고, 오른쪽으로 가자고 하면 오른쪽으로 가야 합니다. 받아들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러지 말라는 것은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머리는 전체의 몸을 생각하고 가장 나은 결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른손에서 피가 철철나는데 왼손이 머리더러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 손가락을 봐요. 아직 반지가 없잖아요. 그러니 머리님, 어서 움직여서 저에게 반지를 끼워 주세요.”라고 한다면 머리로서는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는 모두가 당신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고통 당하는 자녀들이 안타까워 죽을 지경입니다. 헌데 이미 생활환경이 월등히 나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곤 합니다. 저녁으로 뭘 먹을지가 고민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녁이 없어서 고민인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머리라면 과연 어느 지체를 더 소중히 여길까요? 각 지체와 머리는 같은 ‘신경’과 같은 ‘핏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느끼는 것이 같고 나누는 영양분이 같습니다. 머리와 온 몸은 같은 성령을 통해서 모두 함께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사랑을 나누어 먹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도가 영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에게 의지를 봉헌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지요. 하지만 이 기도라는 것을 외적인 행위 만으로 축소 시켜서도 안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 어떤 사랑도 없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드러나게 보란 듯이 기도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내면의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골방에서 문을

영적 아이와 영적 어른

사람에게는 수많은 걱정거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걱정거리는 사람의 능력치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높은 장애물도 거뜬히 뛰어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작은 단을 올라가는 것을 힘겨워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어린 아이가 해야 할 걱정일 뿐입니다. 이처럼 각 인간의 내면의 영혼은 그 수련 단계에 따라서 걱정거리가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이웃을 돌아보고 이웃의 필요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이지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제 스스로의 일을 알아서 하고 나아가 다른 이를 책임질 나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어른은 이미 자신의 일로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영혼들로 고민을 합니다. 그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해서 고민을 하지요. 영적 어른들이 보기에 어린 아이들은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으로 공연한 내적 힘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이 고민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아직 성장하지 못하고 미숙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은 열심히 고민하고 기뻐하거나 슬퍼하다가 다시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나 고민을 시작하곤 합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면서 아이들이 성장하도록 돌보지요. 어린 시절 하던 고민을 어른이 되어서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플레이 스테이션을 살까 엑스 박스를 살까 하던 고민을 어른이 되면 더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게임을 손에서 내려놓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세상에는 몸은 나이가 들어 50, 60이 되어도 여전히 영은 미숙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30년 전에 하던 고민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그 외적 형태만 달라졌을 뿐, 내면으로는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고민입니다. 때로 이런 영적 어린아이들이 어른이 아는 거룩한 ‘정보’를 알았다고 어른을 가르치려고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아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워 들은

성과사랑(생명의소중함)

1.동성애자를 우리청소년들이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요?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그 둘이서 서로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벗어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한 형제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육체적으로 행하는 같은 성 끼리의 부자연스러운 관계마저도 합당한 것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특히나 인성이 형성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합당하지 않은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분명히 가르쳐 줄 필요가 있습니다. 동성애자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들이 행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2.피임에 대한 생각을 알려주세요~ 피임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은 단순한 육적 쾌락의 행위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 고유의 역할의 차이와 사랑, 나아가 남녀가 혼인으로 일치하여 사랑의 정점에 이르는 구체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만일 성이 제 목적대로 올바르게 이루어진다면 ‘피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서로 존중하고 살아간다면 자연스러운 주기 안에서 다가오는 자녀라는 선물을 너무나도 감사히, 또 소중히 여길 것이고 서로의 사랑은 더욱 깊어갈 것입니다. 피임이라는 것은 바로 이 근본적인 선을 벗어나기 때문에 생기는 필요성입니다. 둘이 하느님 안에서 관계를 갖지 못하고 나아가 서로 온전히 사랑하고 자녀를 책임질 정도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가 생기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것이지요. 만일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교적인 가치 안에서 살아간다면 ‘피임’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상적이지 않고 지금의 육적인 세상에서 성관계의 유혹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임의 다양한 방법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큰 죄가 되는 ‘피임’의 방식은 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즉

악인들도 사랑한다.

악인들도 서로 사랑한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사랑한다. 즉, 상대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지니고 있으면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상대 그 자체를 사랑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서로 필요한 것을 취하고 그것이 바닥나면 그 뒤에는 원수가 되곤 한다. 선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한다. 기본적으로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온유하고 인내롭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인들은 ‘악’을 사랑하지는 않고 다만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가련한 영혼을 구하고 지키고 보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를 바탕으로 그리한다. 자신이 부러지는 갈대인데 쇠를 꺾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모한 짓에 불과하다. 그러한 일은 오직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 머물 때에만 일어나는 일이며 이는 특별한 성소를 통해서 그리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 좋은 시기에 상대가 나에게 유익할 때에만 사랑하겠노라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는 늘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나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악에서 구함을 받아야 하기도 한다. 기도 없이는 하느님의 참된 사랑에 이를 수 없다.

하느님에게 감사드리는 사람

여행 가이드를 하면서 비가 왜 오는지를 설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닥에 흙이 왜 있는지를 설명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비가 내리고 바닥에 흙이 있는 건 어느 동네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여행 가이드는 듣는 이들이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 말이 많아지게 되고 다른 곳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그곳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해야 하며 때로는 이야기를 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하느님이 만드신 자연이 감탄의 대상입니다. 우유니의 소금 호텔의 기원과 역사보다는 우유니 소금 평원 그 자체를 형성하신 하느님의 손길이 놀라울 따름이고, 마추픽추의 정교한 돌들보다는 마추픽추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산 자체를 이루신 하느님을 더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인간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사람의 몸 자체는 하나의 위대한 작품입니다. 우리 인간은 내면이 정말 조화롭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하나라도 작동을 올바로 하지 않으면 당장에 불편을 느끼게 되지요. 헌데 그 몸이 우리의 수명이 유지되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그 기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놀라움은 육체보다도 ‘영혼’에 존재합니다. 인간은 ‘영원’을 상속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영원을 함께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을 상속받을 수 있는 영혼이라는 존재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기능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감정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하루를 다양하게 꾸며내곤 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내면이 차분하고 끈기가 있는 영혼은 그 힘든 하루를 잘 이겨낼 수 있으며, 반대로 아무리 몸이 편안하고 안락하다 할지라도 내면이 무너진 영혼에게는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런 스스로의 존재와 그 존재를 이루신 하느님에게 찬미를 드리고 감사하지 못하는 영혼은 세상의 그 어떤 유적지를 가더라도 씁쓸한 맛을 느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씁쓸함은 시간을 더해 갈수록 늘어갈 뿐입니다. 이미 볼 것을 다 보았기 때문

12사도와 유다

사람의 마음을 아무리 읽는다 해도 끝까지 보이지 않고 가려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라는 장막 뒤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자유의지가 정해진 운명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건 더는 ‘자유’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뽑은 12 사도들은 예수님이 ‘희망’을 지니고 뽑은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던 셈이지요. 그래서 12사도 중에 배반자 유다가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12 사도들은 단순히 가난한 이들로 이루어진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세리 마태오도 있고 특정 ‘당원’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즉, 다양한 이들이 섞여 있었던 셈이지요. 그리고 단순히 외적인 표지 만으로 모인 이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적 외적으로 가장 합당한 이들을 모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내적인 상태로는 뜨거운 사랑이 가득한 사람, 책임감이 가득한 사람, 열정적인 사람, 순한 사람 등등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에 유다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구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세속적인 물이 가득 들어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유다는 예수님의 구원 사업을 위해서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이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했고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끝까지 변화되기를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설명을 들어도 끝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 분들은 바로 본인의 마음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면 됩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지만 왜 삶은 변화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유다가 끼어있었던 이유와 그의 마지막 선택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될지 모릅니다.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

예수님의 사명이 언제나 성공적이었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으뜸 제자들마저도 간혹 예수님을 오해하곤 했지요. 당신은 영혼을 이끌러 오신 분인데 그분에게서 세속적인 바램을 채우려는 이들이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영혼을 이끌기 위해서 고통과 희생은 예비된 것인데 제자들은 당신의 수난 예고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지요. 책 한 권 읽었다고 예수님을 이해한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피정 한 번 갔다와서 마음이 움직였다고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마음이 꾸준히 이어지도록 의지적으로 노력해 나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적 약점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힘든 길을 걸으셨을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마음이 오늘과 다른 이들입니다. 어제는 성인이었다가 오늘은 다시 넘어져 있고, 또 조금 용기를 내는가 싶다가 또다시 쓰러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의 쓰러짐, 그 자체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으려는 나태함과 차갑게 식어버린 내면’입니다. 우리는 관습과 전통 속에서 종교생활을 하지만 ‘사랑’할 줄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실제적인 사랑의 순간 앞에서 용기를 잃어버리는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교무금을 꼬박꼬박 내고 판공을 보고 주일 미사를 빠지지는 않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머무는 이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는 것을 힘들어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여전히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인간성’을 벗어버리셨기에 천주성 안에서 더 많은 권능으로 일을 하시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의 부당한 모습 앞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큰 고통을 감내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더는 육신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은 없으시겠

호기심의 대상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12) 알려지는 것은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만일 명예심이 드높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든 알려서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알게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로 행동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입을 닫으라고 열심히 명령하십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명예’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예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과장하게 됩니다. 원래의 자신의 모습보다 더욱 과장되게 자신을 표현해야 돋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과장된 모습을 좋아하는 이들의 시선을 끌 수 있게 됩니다. 즉,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끼리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알려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는 ‘선교’라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회가 좋든 나쁘든 꾸준히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을 전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팔아 자신을 드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내가 OOO를 방문했는데 아 글쎄 장미향을 맡은 거 있지? 그리고 얼마전 꿈에서는 성모님을 보았는데 말야, 나한테 이러이러하게 하라 하시는 거 아니겠어? 내가 요즘 기도를 열심히 하기는 하지. 하루에 20단은 기본으로 바치니까 말야.” 이런 식의 표현을 하는 사람은 진정한 예수님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알려져야 하지만 신앙이 있는 이들,

다윗의 승리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1사무 17,50) 인간은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입니다. 다만 언제 어떻게 떠나느냐 하는 것이 서로 다를 뿐,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예비된 현실입니다. 그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유하고 힘있는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늦추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들은 언제나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힘과 재력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줄 듯이 착각하면서 살다가 죽음으로 생명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죽음은 곧 재앙입니다. 그들에게는 삶, 특히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삶의 핵심입니다. 반면 가난한 이들에게는 죽음은 동반자가 됩니다. 그들에게는 기댈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음을 수용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 너머를 준비하고 살아갑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를 돕고 베풀줄 아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부유한 이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움켜쥐는 동안 가난한 이들에게는 하늘에 재물이 쌓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느님에게 기대는 이의 상징이고 골리앗은 세상의 힘에 기대는 이의 상징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맞붙었을 때에 결국 이기는 것은 하느님에게 기대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승리는 권력을 상징하는 ‘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기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승리는 현실 안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현실 안에서, 즉 이 세상 안에서는 골리앗이 늘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합니다. 힘있고 권력있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착취한 것으로 자신의 배를 불립니다. 그리고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더욱 착취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또다른 현실, 즉 영원의 현실 안에서

분노와 슬픔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3,5) 우리는 어떤 상황 앞에서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노의 출처는 다양합니다. 어떤 분노는 이기적인 분노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손해가 갈 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나 자신에게 손해가 갈 때에 느끼는 것이 이기적인 분노입니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가 있으니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분노입니다. 하느님도 때로는 분노하십니다. 당신이 정하신 길을 따르지 않는 어리석은 인간들 앞에서, 당신의 자비를 철저히 무시하는 인간들 앞에서, 당신이 내미는 손을 자꾸만 뿌리치는 인간들 앞에서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쌓여진 분노는 결국 그 분노를 쌓아올린 이에게 쏟아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그에 대한 주님의 진노와 질투가 타올라 이 책에 쓰인 모든 저주가 그 위에 내리고,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실 것이다.”(신명 29,19)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의 진노와는 달리 ‘사랑’이라는 사명을 지니고 오셨기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슬퍼함’입니다. 그들의 마음의 완고함 앞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진노대로 심판하시지 않고 슬퍼하십니다. 왜냐하면 최종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우리 분노의 출처를 올바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분노인지 아니면 거룩한 분의 뜻에서 기인하는 분노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분노 앞에서 그들의 영혼에 대해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수를 다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 안에서 ‘이미’ 심판을 스스로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에 그들을 맡기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마 이 마지막 권고는 적지 않은 이들에게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2) 오래된 것은 익숙해진 것을 말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익숙한 것은 ‘세상’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지되는 것들에 점점 익숙해져 갑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는 것들에 익숙해져가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익숙한 것, 옛 것이고 헌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이 보이는 세상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규정과 법률이 필요하지요. 장사를 하는 데에는 상도덕이 필요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윤리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영원한 빛이신 분이고 하느님의 말씀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시지요.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익숙한 세상, 옛 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르침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새로운 가르침, 즉 새로운 포도주를 담아내기 위한 새로운 부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영신을 위한 것, 영혼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을 새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끌어내리려는 시도를 합니다. 영원의 축복을 지상의 축복으로 뒤바꿔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지상의 생명의 연장으로 뒤바꿔 버리곤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의 가치, 인내와 겸손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니 그들은 귀머거리이고 장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바꾸어 내면을 선하게 가꿀 생각은 않고 외적으로 규정을 준수할 생각만 하지요. 왜냐하면 그게 쉽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한 시간 정도 미사에 나와 수동적으로 앉아 있는 것이 지금 불목하는 형제와 화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법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로운 가르

주일에 해야 하는 일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마르 2,24) 가톨릭 신자들에게 주일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 날일까요? 주일은 주님의 날이고 거룩한 날입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보내야 하는 날이지요. 헌데 이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미사를 참례하는 것은 거룩한 행위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마 아닐 수도 있다는 표현에 몇몇 분들은 반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사는 무조건 거룩한 행위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미사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이에 따라서 각자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미사는 거룩한 행위가 아닙니다. 수업에 온다고 모두가 배우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배울 마음이 있어서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정말 오기 싫은데 억지로 와서는 과자나 몰래 먹고 만화책이나 보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수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아이가 되는 것이지요. 반면 전혀 거룩해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것도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습니다. 어느 신자인 며느리가 주일에 가정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서 불교 신자이며 거동이 불편하신 나이 드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절에 다녀 오면서 마음 속으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열심히 대송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바친다면 하느님은 그 며느리를 벌하시기는 커녕 오히려 칭찬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며느리 안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외적인 행위로 감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밀밭에서 이삭을 뜯어 먹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굶주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다니며 굶주림을 참아 견디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먹이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그들에게서 꼬투리를 잡아 비난하고 고소할 마음 뿐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킨 이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면의 생각

규정을 근본적으로 지키는 것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르 2,19-20) 신부님, 이러이러한 경우에 금육을 지켜야 하나요? 미사는 언제부터 들어가면 늦는 건가요? 하루에 몇 번 성체를 모실 수 있지요?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단골로 묻곤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 밖에도 질문의 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이런 다양한 질문들 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워낙에 다양한 법규정 속에서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음의 질문들은 어떨까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까요, 그러지 말아야 할까요? 사람은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할까요, 악을 행해야 할까요? 이와 같은 질문은 너무나도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정답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마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든 법규와 계명은 바로 가장 근본 방향성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근본 방향을 벗어나는 법규와 규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하느님을 증오하기 위한 법이나 인간을 향한 사랑을 외면하는 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근본 방향에 합당한 것입니다. 단식이라는 규정은 그 순간에 합당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함께 머무는 동안, 즉 교회의 진정한 신랑이 교회와 함께 잔치에 머무는 동안은 거기에 초대받은 모든 이들은 기뻐 즐기는 것이 보다 우선적입니다. 이는 근본 방향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 안에서 이 근본 방향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순간에 지침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다가는 아마 세상의 모든 책을 다 규정집으로 채우고도 종이가 부족할지도 모릅

진실한 제사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시편 50,16-17) 이 말을 거꾸로 살펴보면 하느님의 훈계를 싫어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뒷전으로 하더라도 하느님의 계명을 늘어놓을 수 있고 그분의 계약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현대식으로 표현을 하면 착하게 살지는 않으면서 거룩한 척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지요. 그리고 이렇게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형식을 준수하고 관습을 지키면서도 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외적 규정을 지킨다고 내면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일 미사에 와서 앉아 있더라도 마음은 얼마든지 다른 데에 가 있을 수 있는 법입니다. 하느님은 외적인 것을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외적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는 제사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하고 거룩한 제사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리러 갈 때에 내면을 잘 살펴야 합니다. 단순히 외적 예절에 참여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고 내면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우리의 증오, 탐욕, 무절제, 시기와 같은 것들을 살피고 씻어내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의 준비 없이 외적으로만 드리는 미사는 오히려 하느님 앞에 부당한 행위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1사무 15,22)

그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 함께 여행 중인 친구에게 이렇게 운을 띄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지 아니?” 그러자 그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건, 자기 의지에 반대되는 일이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곧잘 넘어서지 못하는 장벽이 하나 있으니 바로 ‘의지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거짓도 오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들은 너무나 부족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 마저도 속이려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지가 동하면 무슨 일이든지 해 내고야 맙니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을 하려고 하면 그것만큼 힘든 일이 없습니다. 헌데 오늘 성모님은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물론 성모님은 당신의 원의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에 포도주를 마련하여 신랑과 신부가 실망하지 않게 하는 일이었고 기쁨이 이어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은 온전히 하느님이신 아드님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정은 아드님에게 맡기고 성모님은 언제라도 그 결정에 순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속에서 그 내면에 흐르는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이 장면에서 마치 성모님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이룬 것처럼 인식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성모님은 엄청난 신뢰 안에서 당신의 의지를 내어놓긴 했지만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에 순명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성모님의 바람이 이루어졌지만 성모님은 당신의

은사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1코린 12,11) 뭐든 공짜는 좋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공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사는 ‘일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전체의 몸에 봉사를 하기 위한 것이지요. 손은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 전체의 몸에 봉사를 합니다. 발은 튼튼하게 온 몸이 쓰러지지 않게 지탱하는 역할을 하지요. 눈은 바라보는 일을 끊임없이 하고, 코는 냄새를 맡아 사물을 분별합니다. 우리가 얻게 되는 은사는 전체의 몸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 받는 것이지 그 은사를 받는 사람 혼자 즐기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그 은사를 얻어서 남들에게 뽐낼 생각이기 때문에 은사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은사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는 기도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온 몸으로 봉사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교회안에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 기적을 올바로 알아듣고 하느님에게로 마음을 모으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모든 지체가 눈이면 우리의 몸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모든 지체가 손가락이라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저마다의 능력을 골고루 부여받았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봉사할 생각이 없다면, 즉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없다면 은사를 청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아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전체의 몸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듬뿍 부어지게 되고 그는 이미 일을 시작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우유니에서의 복음 선포

우유니 여행에는 보통 6명이 한 팀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행 중에 4명의 프랑스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명은 혼자 여행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3명은 단체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따로 떨어진 한 친구는 자신이 가톨릭이라고 말했고 나머지는 종교가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둘째날 밤에는 공동 숙소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페인어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톨릭 신부인 걸 아는 프랑스 사람들이 저에게 신앙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대화를 기억할 순 없지만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람은 교육만으로도 착하게 살 수 있지 않는가? 도대체 왜 가톨릭 신앙이어야 하는가? 왜 굳이 미사에 가야 하는가?” 그래서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 교양있게 살 수는 있지만 착해지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했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서로의 바운더리를 존중하고 살 수는 있지만 ‘희생’하는 사랑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고 했지요. 우리 신앙의 근본에는 예수님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양의 다른 종교와 가톨릭 교회, 즉 그리스도 교회의 차이를 잠깐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전통의 근본을 이루는 유교나 아직도 한국에서 많은 교세를 자랑하는 불교는 인간의 삶에서 진리를 찾아나가는 방향의 종교이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 근본이지만, 반대로 가톨릭,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으로 만드시고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당신의 사랑을 나누게 만든 종교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 안에서 모든 성사들이 나오는 것이며 가톨릭이 실천하는 미사 역시도 그분이 명하신 것으로 우리가 마땅히 지키고 거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지요.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탓 없이 예수님을 모르고 그분의 메세지를 몰라서 그분에게 다가서지 못한 채로 그저 양심적으로 살명 하느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병따개는 병을 따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입니다. 전화기는 전화를 걸어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요. 저마다 필요한 용도가 있고 사람들은 그 용도 때문에 그것을 찾습니다. 신앙은 무엇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무엇하는 분일까요?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필요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신앙이고 예수님이고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전혀 ‘쓰임새’가 없는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고 ‘종교’를 찾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자신들에게는 더 쓰임새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이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이 없이도 지금 이 세상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 안의 뛰어난 자녀가 되려고 하지 굳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으며 나름대로 양심적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의인’이 되었고 예수님이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저는 제가 의롭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저에게 오류와 잘못이 많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한시적인 세상 안에서 희망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이 필요하고 하느님의 자녀됨이 간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가르칩니다. 혹시나 같은 갈망을 지닌 이들이 있다면 제가 가고 있는

함구령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마르 1,44) 예수님은 당신이 활동하실 때에 있던 교회와 교계제도를 싸그리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부터 이루어진 믿음의 무리와 그들의 관습, 그리고 그들 안에서 뽑힌 하느님의 사제들을 존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해야 할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보다 중요한 계명에 순종하셨지요.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신 일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 앞에서 진리를 가르치실때 만큼은 당신은 보다 높은 권위에 순종하신 셈입니다. 오늘날 걸핏하면 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비판이 무엇에 방향지워져 있는 것인지 올바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반항하는 마음으로 그리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보다 높은 하느님의 권위에 기대에 교회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 그리 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적 계시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그것이 특히나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그 이유는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서 은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런 특권을 얻은 것을 자랑하고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기 위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적 계시를 접한 이들은 함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도 바라시는 일입니다. 그들은 다만 사제에게 가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에 대해서 상담을 하고 합당한 지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아주 사소한 체험을 주변에 퍼뜨리기 일쑤입니다. 장미향을 맡았다느니 꿈에 뭔가를 보았다느니 하는 말을 쉴 새 없이 떠들고 다니는 것이 일반이지요. 행여 주변에서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분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사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곤 합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참된 치유가 있고 참된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드러나는 기적을 찾고 육신의 치유만을 원합니다. 마음이 나쁜 사람이 육신이 치유된다고 해서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는 치유를 받고 더 많은 악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단순히 불치병이 고쳐졌다고 기적이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그가 선을 향해 방향지워져 있을 때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그것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치유에 앞서서 예수님의 목적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소식을 전하고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되돌리는 것이었지요.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깨닫기에 사람들의 눈은 너무나도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사탕의 단 맛에 매력을 느낀 아이에게 좋은 음식을 준다고 한들 그 아이가 좋은 음식의 가치를 올바로 알아보고 맛들이기까지는 시간과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매력에 푹 잠겨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들 스스로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은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좋은 피정에 참여하고 좋은 강론을 들으면 그 순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강한 빛이 내리쬐여 그들이 빛을 향유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빛이 있을 때가 아니고 빛이 사라질 때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빛을 바라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빛을 보고 빛을 즐기는 것, 즉 음식이 있을 때에 그 음식을 먹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행

여행을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행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건질 수 있는 것은 화려한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소중한 체험’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체험은 풍경이나 맛있는 음식보다는 개인적인 성찰과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통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 자체가 여행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까요? 최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장 멋진 광경을 보고 사람들의 서비스를 받고 싶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것을 감사로 받아들이며 사소한 데에서도 행복을 느끼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을까요? 저마다의 여행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헌데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다투고 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나는 이런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상대가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시기하느라 여행 기간 내내 불행해 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의 여행, 즉 우리의 삶은 우리만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타인이 절대로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고 아주 작은 데에서 행복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소박하고 사랑이 넘치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들고 지치는 여행길에서 작은 안식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청원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1사무 1,17) 하느님에게 드리고 싶은 청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묵묵부답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직접 우리의 귀에 들리는 수단으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떻게든 응답을 주십니다. 제가 적는 이 글도 그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고 계신다고 저는 여러분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둔하고 고집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응답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영광을 기적처럼 드러내시거나 하다못해 천사라도 와서 표징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엉뚱한 바람이 우리의 청원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어줍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에게 우리의 청을 내어 맡기는 것이 아니라, 쓰기 좋은 도구로서의 하느님을 우리 손아귀에 쥐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다고 하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줄 수 있는 최고의 도구인 셈입니다. 내가 가진 탐욕과 욕구를 너끈히 채워줄 수 있는 존재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도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내던져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최종적으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 신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셈이지요. 사무엘 상권의 위의 구절에서 한나는 엘리 사제에게 순명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나서야 하느님의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한나는 사무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순명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 즉시 이루어 주실 때까지 고집을 피우고 반항하고 있을까요?

싸우는 이들

지려고 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싸움은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우는 사람들은 지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지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집중하고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필요하다면 거짓말이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말이지요. 세상에는 싸우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마다 정당한 주장을 내세우고 이것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입니다. 싸워 이겨서 이 세상 안에서 뭔가 결론이 나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는 동안 하느님께서 할 일은 없어집니다. 자기네들끼리 모두 결론을 내고 심판을 하기에 하느님께서 나설 일이 없게 됩니다. 상대는 적이고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며 반대로 우리는 옳고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은 제외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하느님이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세상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싸우는 이들입니다. 그 선두주자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실패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으로는 영원 안에서 승리하신 분이시지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의 눈에는 실패자로 보여집니다. 고통 당하고 수난 당하고 모욕을 당하니 당연히 세상 안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절대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한 상급을 준비한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들은 눈속임일 뿐이고 거짓 기만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여전히 세상 안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또 이면에는 하느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는 가식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그대로 보존될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되면 누가 하느님에게 소중한 열매가 될 지는 분명한 일입니다.

사랑

한 남자가 종이에다 하트를 그려 여자에게 줍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알다시피 하트는 사랑의 표지야. 그러니 이걸 너에게 주는 걸 통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두기를 바래.” 그리고 나서는 여자를 두드려 패기 시작합니다. 이게 사랑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3살짜리 어린 아이라도 아는 일입니다. 누군가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 당신도 아시다시피 세례라는 것은 내가 당신의 자녀가 된다는 표지입니다. 그러니 이 세례를 통해서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는 제 멋대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세상 것을 욕심내고 하느님이 꺼려하는 것들(증오, 분노, 탐욕, 무절제, 시기, 쾌락 등등)을 온통 즐깁니다. 이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3살 짜리 어린 아이라도 아는 일입니다. 미사에 나온다고 해서, 금육을 지킨다고 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러한 외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당연히 그 내적인 것이 외적인 여러 상황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모른 채 지내 왔습니다. 그리고 엉뚱한 일련의 행동양식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표지로 삼고 지내왔지요. 하지만 실제적인 삶에서는 하느님과 별 상관없이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충분히 분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다못해 주님의 기도 한 번을 바치더라도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쳐야 합니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놀더라도 모든 것을 온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쌓아올리는 구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원을 뭔가를 쌓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세례성사를 쌓고 그 위에 첫영성체를 쌓고 그 위에 견진을 쌓고 그 위에 혼배성사를 쌓으면 다 이룬 것이고 그리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요.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구원은 무언가를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례를 받는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 새로워져야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즉 복음의 말씀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외적으로 무언가를 잔뜩 쌓는 게 아니라 내면이 바뀔 때에 구원이 우리에게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 강론때에 한 말입니다. 한국에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마치 어느 대학의 교과 과목 배우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무슨 코스를 거치고 나면 그 다음 코스를 밟고 그렇게 해서 무슨 자격증을 따내는 것처럼 신앙을 생각합니다. 아는 신심 강좌는 죄다 찾아 다니면서 지식도 넓히고 인맥도 넓히면서 자신이 신앙적으로 어느 단계에 이르렀다고 착각을 하곤 하지요. 아닙니다. 일자 무식이면서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한 번 외우는 할머니가 그 교만한 사람보다 영적으로 훨씬 위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느님은 외적 타이틀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내적인 진실한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한 인간의 내면 안에 든 것을 모조리 살펴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 진정 겸손과 사랑이 있는지, 아니면 겉꾸민 위선만 가득한 사람인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타인을 속일 수는 있어도 결코 나 자신과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구원은 겉으로 쌓아 올리는 무언가가 아니라 선과 사랑과 진리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본질

사람들은 교회에서 참되고 선하고 의로운 것만을 보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돈도 보고, 명예도 보고, 권력도 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서 살아갑니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교회에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원하는 것을 찾아서 올 뿐이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는 천사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이들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모두를 당신 사랑으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은 잘나고 착한 사람만을 당신께로 모으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모자라고 약하고 유혹에 빠지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납니다. 착한 이가 되는 사람들은 그러한 가운데에 다시 일어나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다가오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위한 의사로 오신 분이시지요. 우리 영적 환자들을 위한 영혼의 의사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온전히 순결한 이들로만 이루어진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하느님이 지상 교회에서 바라신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돕고 부축하고 권고하고 훈계하고 이끌어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이 바라신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자신들만 따로 빠져나와서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겠다고 하는 이들이 제대로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은 잃은 양을 되찾아 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시지 튼튼한 양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서로 좋은 풀이 있는 정보를 나누는 모습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선교는 교회의 기본 사명이며, 고통은 교회 안에 예비된 것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것

사람들 앞에 돈을 보여주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를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 명예를 드러내면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를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 권력을 제시하면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를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 참되고 선하고 의로운 것을 계시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를 따르게 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이사 42,6-7) 색맹은 색을 보지 못합니다. 눈 앞에 사물이 있어도 색을 구분해 내지 못합니다. 그 외적인 형태는 볼 수 있지만 그 다채로운 색깔은 전혀 보지 못합니다. 신앙의 눈이라는 것은 인간의 외적인 모습을 넘어서서 그 내면의 향기를 분별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외면이 초라해도 그 내면의 향기가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외면이 화려해도 그 내면이 썩어 문드러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빛이십니다. 그 빛은 우리의 내면을 비추어 우리가 내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주님은 우리가 착한 사람, 공정한 사람, 진실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면의 가치는 외적으로 절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면 만을 보고 그를 분별하게 됩니다. 그런 그들은 장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적으로 화려한 것들 중에는 역으로 우리를 어둠으로 이끌고 가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내를 둔 남자가 유혹을 당하는 데에는 아름다운 여인, 그러나 그 내면의 마음이 어긋난 여인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탐욕에 빠지는 데에는 외적으로 화려한 재물들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명예욕에 빠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찬사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모든 유혹의 외면은 화려하고 따라서 사람들은 그 유혹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을 속박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 죄의 종이 되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 거짓말에 묶여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에 속박을 당합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 한 분 만을 세상의 주인으로 두고 살아가며 나머지는 모두 자유로이 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성령과 불의 세례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루카 3,16) 볼리비아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인구의 80%에 육박하는 이들이 가톨릭 신자라고 자신을 내세웁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성당으로 데려와서 세례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는 첫영성체 나이에 이르기까지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들이 받는 세례는 물로 받는 세례입니다. 그 물은 외적인 표지가 되고 사람들에게 교회의 일부가 되었다는 외적인 확신을 줍니다. 물로 씻김으로 인해서 죄를 사함 받았다고 느끼게 해 주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은 외적인 것에 그칠 뿐입니다. 외적인 것이 곧 내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하는가에 따라서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이 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편지에 하트를 그려 보낸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시큰둥하면 그 외적인 표지의 하트는 내적으로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글씨 하나만 적어서 보내더라도 감격하고 감동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외적인 세례를 내적인 간절한 준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외적으로 우리에게 확실한 표지를 주는 거룩한 성사를 내적인 준비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그러합니다. 모든 성사들과 축복들, 모든 거룩한 표지의 행위들은 그 이면에 내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야 그 본래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세례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로만 세례를 받으면 그 외적인 표지를 간직하고 그 증명서를 받아서 장롱 속에 넣어두면 그만입니다. 그리고는 저 살고 싶은대로 살면 그만이지요. 왜냐하면 그 증명서는 나의 삶과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내적인 세례는 한 인간을 변모시킵니다. 낡은 인간을 버리고 새 인간이 되게 도와줍니다. 내적인 세례를 받은 이들

경외와 의로운 일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사도 10,34-35)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하느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같은 표현을 조금만 달리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표현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곤 하지요. 그것을 아는 것은 두뇌가 아니라 삶인데 말입니다. 하느님을 절실히 사랑하는 이, 위 성경 구절의 표현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리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이, 즉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 걸까요? 무엇보다도 우선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규정된 규칙을 준수하는 것에 앞서서 ‘하느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매사의 모든 일을 하느님과 더불어 결정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규정준수’로 뒤바꾸어 버렸습니다. 정해놓은 몇 가지 규칙만 지키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육은 지키고 내적인 욕구의 절제는 지키지 않으며, 주일미사는 지키고 그날 저녁의 방탕한 술자리는 즐기는 모습을 보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가식이 나오고 위선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재정립 되었을 때에, 사실 우리는 이미 두 번째 계명을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무시하면서 살거나 이웃에게 악을 행하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더해갈수록 모든 인류를 사랑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가 흠이 많거나, 과오가 있거나, 죄에 빠져 있더라도 그를 위해서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