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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16의 게시물 표시

내적인 충만함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 9,2) 중풍병자에게 절실한 것은 중풍을 고치는 것이라는 것이 통상적인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내면의 고통을 바라보았고 가장 아픈 그곳을 우선적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외적인 것만으로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겉은 멀쩡한데 속이 썩어 나가는 사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자살을 하면 이슈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생긴 것도 멀쩡하고 인기도 많은 사람이 훌쩍 떠나 버리니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내면에 보다 더 많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돈으로는 사람의 진정한 마음을 살 수 없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 돈으로 권력을 사서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는 있어도 사람들의 사랑을 얻어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내면을 보셨고 그의 가장 절실함을 보듬어 주셨습니다. 즉,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육체적인 치유 없이도 이미 그에게 행복을 돌려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증거가 필요했기에 예수님은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의 육체적인 건강마저도 일으켜 세우는 진정한 메시아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지요. 우리는 내면이 공허하기에 육체적인 쾌락을 쫓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충만이 아니라 내적인 충만입니다. 그리고 그 내적 충만은 오직 진정한 구세주를 만날 때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

피 검사중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2디모 4,6-7)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상복부에 통증이 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일찌기 급성 간염을 앓았던 터라 이번에는 지체하지 않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추천해서 처음 간 병원은 그닥 좋지는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저 간단한 진료를 하고는 진통제를 내주고 내일 초음파를 찍어 보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병원은 영세한 곳이어서 초음파 기계 하나 없었습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인터넷을 검색해서 그나마 가장 신뢰할 만한 병원을 찾아 보았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볼리비아의 추기경님이 입원해 계시던 병원을 검색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찾아갔지요. 애써 태연한 척 다시 병원 의사를 만나고 작년의 병력과 지금의 병세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의사는 이곳 저곳 누르고 저에게 통증이 느껴지는지를 물어보고 혓바닥의 색깔도 확인하고는 피검사와 초음파 검사를 받고 결과물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좋은 병원이었기에 다행히 초음파 기계도 있었고, 검사실도 있었습니다. 피를 뽑고 초음파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에 다시 의사를 만났습니다. ‘담낭에 담석이 좀 있습니다.’ ‘그거 혹시 연말까지 기다리면 안될까요?’ ‘담석의 크기가 크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은 담석의 크기가 작아서 움직여서 관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담즙이 역류해서 상태가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주 정도는 쉴 수 있겠지만 그 뒤에는 수술을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을 처방받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공동체 형제들과 신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물론 한국의 주교님에게도 편지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교님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돌아오라’는 말씀이었지요. 그래서 돌아갈 작정입니

겁을 내는 이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태 8,26) 겁이라는 것은 밑바탕이 부족한 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물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이가 물을 두려워하게 마련입니다. 이미 여러번 수영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물을 즐기지요. 적군의 세력과 전술을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고 내가 그보다 더 준비되어 있다면 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겁을 내는 것의 근본을 쫓아가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최종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해서 맞설 밑바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바로 이 죽음에 대항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자녀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이들입니다. 우리가 겁을 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잃을 것이 없고 설령 잃더라도 다시 회복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셈이지요. 하느님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분이지요. 오직 믿음만이 하느님의 존재를 우리에게 확고히 인지시켜 줍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사람은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그분의 손길 안에서 용감하게 살 수 있는 반면, 믿음이 약한 사람은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게 되고 세상의 것들에 자꾸 기대려 하게 됩니다. 믿음이 우리의 힘입니다. 물론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집입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안락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때로는 집이 집이 아닐 수도 있지요. 그래서 청소년들은 때로 ‘가출’이라는 것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 즉 예수님에게 집은 모든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 어떤 곳도 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정으로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느님 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 역시도 하느님 아닌 곳에서는 참된 안락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돌아가기 전까지는 온전한 안락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받고 온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저마다에게 일거리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사명이고 한 영혼이라도 더 하느님에게로 초대하는 사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이 세상에 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뿐입니다. 그러고나면 훗날 진정한 의미의 집을 얻게 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마태 8,20)

혀가 풀린 이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루카 1,63-64) 혀가 묶인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즈가르야는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남들의 호기심을 살 만한 말들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연예인이 결혼을 했고, 성형을 했고, 지금 사회 문화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이 이런 저런 것이라는 이야기를 잔뜩 하지요. 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고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그들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잔뜩 하지만 그런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진솔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꾼을 찾습니다. 누군가 진실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방적인 관계이기 때문이지요. 상호적인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드는 것, 우리가 이미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비로소 혀가 풀리게 되고,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들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 이유도 바로 그분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비웃었다가 혀가 꼬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불러 모으는 것

어찌보면 지극히 간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꿀이 있는 곳에 벌들이 모여들게 마련이지요. 꿀을 지니지 못하면 엉뚱한 것으로 유혹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엉뚱한 것으로 모여든 것들은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이지요.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인들은 그렇게 모여 들었습니다. 오직 제자들의 굳은 믿음과 그들이 가르치는 말을 듣고 모여든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점차 희석되어 가면서 교회는 전혀 다른 것을 내세우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려한 건물은 관광객을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관광객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호기심을 채우고 나면 더는 할 일이 없게 마련입니다. 반면 거룩한 장소는 순례객을 모으지요. 그리고 순례객들은 거룩한 곳을 참배하고 자신의 신앙을 키우게 됩니다. 우리가 지닌 교회들이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반대로 생각해서, 우리 교회는 과연 무엇을 지니고 있을까요?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근본적인 방향성을 점검해 보자는 것이지요. 정말 우리 교회는 거룩함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거룩함을 빌미로 여러 취미활동을 양산하고 기타 부수적인 수익에 골몰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신앙을 상실하고 거룩함을 상실하고 나면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불과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여가 활동을 충족 시키고 호기심을 채워주는 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서로의 시기와 질투, 야욕과 탐욕이 투쟁과 분쟁을 불러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 직분을 맡은 이들은 이 거룩함을 내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루카 1,16) 그 누구도 하루의 전부를 올인해서 봉사만 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뒷간도 가야 하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봉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선교지에서 선교를 한다지만 24시간을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분주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때로는 방에 앉아서 영화도 보고, 또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가고, 휴가도 가고 하는 것이지요.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봉사의 내적 가치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봉사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봉사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랑의 실천의 정도를 판가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타인을 위해서 하는 활동의 방향은 모두 ‘하느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는 봉사활동의 가치를 판가름하고, 나아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활동의 가치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운동을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 운동을 해서 자신의 몸매를 이쁘게 가꾸어 남에게 드러내어 보이려고 한다면 그 운동은 ‘이기적인 운동’이 됩니다. 하지만 운동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하고 그 건강함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더욱 활기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 운동은 바로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운동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활동은 일정한 방향성을 지닐 수 있고 그 가장 큰 두 방향은 바로 하느님과 하느님 아닌 것으로 크게 나뉘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온전히 하느님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활동은 오직 하느님을 향해서 방향 지워져 있었고 그는 그 방향성 안에서 가장 극단의 극기를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의 그 누구도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을 정도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정도로 그는 인간의 내적 가치에서 가장 최고를 구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 모두는 하늘 나라에서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 아니 그보다 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즉, 우리 모두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

여호야킨은 자기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열왕 24,9)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는 죄로 인해서 불행을 겪습니다. 물론 주변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자신의 죄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결과가 자기 자신에게 또 이웃에게 남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을 예비하게 되고 그것을 실제로 겪으며, 또한 주변에도 그 불행의 씨앗을 남기고 그것이 훗날 싹이 터서 열매가 될 때에 그 결과를 더불어 받게 됩니다. 이러한 씨앗을 우리는 나아가 후손에게 남겨주게 됩니다. 온갖 어둠을 지니고 사는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씨앗을 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덕행의 모범인 부모가 자녀에게 그릇된 씨앗을 남길 수도 없지요. 그래서 언뜻 죄악은 유전적인 성질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죄는 본인 스스로의 몫입니다. 아무리 유혹이 가득한 구덩이 안에 살아도 그것들을 역으로 이용해서 자신의 덕을 쌓는 데에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장 최고의 환경, 잘 보호받고 올바른 지도 속에서 사는 중에도 결국 스스로의 영혼을 망쳐 버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전자가 세리 마태오라면, 후자는 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악행은 자녀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하지만 결국 죄를 지을 선택을 하는 것은 그 자녀의 몫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은 채로 홀로 살아가면 결국 죄악에 손을 대게 됩니다. 거룩한 영향력이 없이 자기 스스로의 힘 만으로 어둠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덕을 쌓아야 하고 주변에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잘 알고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도움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불법과 합법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마태 7,23) 합법한 불법이 있고 불법한 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외적인 것으로 합법성을 따지곤 합니다. 그래서 흔히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고 반대로 죄 있는 자들을 용인하곤 하지요. 뉘우치는 죄인은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음탕한 의인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있습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단죄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이는 그 못된 마음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 반대로 자신이 저지를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에게 돌아가려는 이는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마태 7,22) 마찬가지의 말을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일 미사에 나가고 때가 되면 단식을 하고, 교무금을 꼬박꼬박 내고 판공도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적인 일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 모든 일을 어떤 목적으로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마지못해서 주일 미사에 의무감으로 참석을 하고, 그 어떤 뉘우치는 마음도 없이 기계적으로 성사를 보고, 교무금은 감사함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아까워 죽으려는 마음으로 내고, 단식을 다이어트를 위해서 하는 거라면 그러한 행위들은 가식이고 위선일 뿐입니다. 예수님에게 유일한 합법은 ‘사랑’ 뿐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법을 일삼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억지로 봉사활동을 한답시고 시설에 가서 활동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집안 식구들의 부족함을 인내로이 견디고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법입니다.

심판하지 마라

심판이라는 것은 한 인간을 요모조모 따져서 그의 최종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수술대에 환자를 올려놓고 그를 최종적으로 진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가장 전문가에게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수술대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사람의 외면을 바라다 볼 뿐 그의 내면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술칼을 들고 그에게 다가서면 자칫 그를 낫게 하기는 커녕 크나큰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에 관한 심판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유보된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한 인간의 전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 숨쉬는 동안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가운데 이미 서로를 심판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바라보는 식별, 분별과 심판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관찰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인간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고 최종 심판은 하느님의 손에 맡겨 두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도둑질을 합니다. 우리는 그의 도둑질을 관찰할 수 있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이런 저런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도둑질로 인해서 그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죄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가 잘못하는 순간마다 우리를 심판하고 처단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살아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남았고 다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죄인들일 뿐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인자와 자비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분별은 해야 합니다. 누군가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괜찮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올바로 분별하고 그를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어야

티와 들보

예수님의 비유는 언제나 내적인 것을 지향하기 위해서 외적인 표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라봄’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내면의 바라봄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 앞에 있는 사물은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물건인지 아닌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분간해 냅니다. 하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과연 어떨까요? 우리는 영적으로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을 올바로 분별해 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탐욕을 경계한다면 유혹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외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만으로 ‘좋다’고 생각하기에 나쁜 이들이 쳐 놓은 덫에 빠져들고는 하는 것이지요. 특히나 내적으로 시력이 멀어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내적으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스스로를 위대한 스승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말을 많이 하면서 많이 가르치려고 들지요.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 즉 자신의 눈에 들보를 지닌 이들이 겨우 티 하나가 박힌 이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것이지요. 자신은 인내, 겸손, 사랑, 관용 따위가 하나도 없고 도리어 분노, 질투, 증오,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누군가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두고 이런 저런 조언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태 7,5)

믿음의 자녀

과거의 시대에는 족보가 중요했고 혈육으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피로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피로 이루어지는 자녀는 피에 관련된 것을 받게 됩니다. 즉, 유전적 형질을 받게 되고 유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자녀도 유사한 것을 받게 됩니다. 즉 믿음 안에서 내려오는 것을 받고, 또한 그 유산도 받는 것이지요. 믿음 안에서 자녀됨으로 인해서 우리가 받는 형질은 여러가지 하느님의 덕입니다. 즉, 선, 사랑, 진리, 자유, 평화, 기쁨과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믿음의 자녀들의 유산은 ‘구원’입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이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올바로 지켜내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외적인 확고한 표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를 매순간 새로이 해야지 유지할 수 있습니다. 즉, 세례를 받고 증명서를 받았다고 우리의 믿음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새로운 결심으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하지요.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 ‘가능성’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것은 각자에게 달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는다고 말은 할 수 있지만 믿음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피로 이루어지는 자녀는 한 번 태어남으로 자동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자녀는 매 순간의 의지적 선택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과 영신의 생명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3-24) 예수님은 두 종류의 생명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 우리가 쏟는 관심은 반비례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하나를 신경쓰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됩니다. 그 두 종류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과 영신의 생명, 즉 영혼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누구나 잘 아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바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육신의 생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요. 반면 영신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우리는 무지합니다. 거의 아는 바가 없지요. 그래서 그것을 찾을 줄도 모르고 추스릴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영신의 생명을 숨쉬고 살아왔습니다. 맑은 마음을 지닌 이는 이 영신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 영신의 생명을 지닌 사람은 정직하고 책임감있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에는 우리의 순수함으로 인해서 이 영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를 지으면서 이 영신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잃은 영혼의 기쁨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지요. 바로 육신의 쾌락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갖가지 쾌락을 최고로 누리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돈’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돈이 있어야 자신의 육신의 안락과 쾌락을 최대치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른이 되어서도 이 영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은 육신의 안락에 대해서 큰 미련이 없습니다. 그는 다만 하느님이 선물하신 것으로서 육신을 대하고 보살필 뿐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책임감있게 돌보지만 육신에 얽매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두 생명의 결론은 이미 나 있는

용서

악인들도 서로 용서를 합니다. 즉, 모든 손해가 기워 갚아 졌을 때에 그들도 ‘용서’를 베풉니다. 그리고 그런 용서는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가해진 손해가 모두 메꾸어졌을 때에 누구나 용서할 마음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배우는 용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수많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는 초자연적인 것이고 천상적인 차원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역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천상적인 차원의 용서를 베풀지 못합니다. 우리는 늘 ‘손해보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되고 따라서 결코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용서는 우리의 믿음을 역으로 드러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지요. 즉, 상대에게서 아무런 회복을 얻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수많은 이들이 이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지식적인 차원에서 알지만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용서에 이르지 못합니다. 용서는 어느 순간 가능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려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그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자라고 믿음도 자라게 됩니다. 상대의 부족함과 나약함과 오류를 감싸 안을 줄 아는 내적 의지를 키워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우리 스스로의 죄도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

몸의 등불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마태 6,22-23)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은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찾고 사랑을 찾는다면 우리의 몸은 그 눈이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서 선하고 사랑이 가득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눈이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복수할 일을 찾는다면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그에 따라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어두운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빛을 찾고 빛으로 다가가면 더욱 환해지는 것처럼, 반대로 어둠을 찾고 어둠에 다가가면 우리는 더욱 어두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생각하고 구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어두움이라면 우리는 훗날 온전히 어두운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둠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그것이 어둠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어둠이라고 반드시 자신의 정체를 명확히 드러내라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은 그 어둠을 덮어버리고 사람들은 그 외적 화려함을 쫓아가다가 결국 어둠에 사로잡혀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돈을 많이 번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재화로 얻어지는 외적 화려함을 쫓아서 부유하고 힘있고 권력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요. 그것을 자신의 빛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대로 나누고, 돕고, 서로 희생하여 사랑하는 것에서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그것이 진정한 빛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사람은 어둠 속에 잠겨 머무르다가 반드시 큰 일을 당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하느님의 마지막 경고인 셈이지요. 하지만 그 순간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다시 빛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절망해 버리고 말 것인가 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빨대

인간은 빨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어디에 꽂혀 있는지에 따라서 무엇을 빨아들이는지가 결정되지요. 세상에 꽂힌 사람은 세상을 빨아들이고 반대편으로 세상을 쏟아냅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세상을 들이마실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의 트랜드와 관심거리가 그에게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지요. 반대로 거룩한 것, 하느님에게 꽂힌 사람은 하느님을 빨아들이고 반대편으로 하느님을 쏟아냅니다. 그에게 다가서면 ‘하느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어디에 자신을 꽂아두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빨대 건너편에 있는 것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디에 꽂힌 채로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빨대는 자신이 꽂힌 것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물건들을 저마다의 위치에 놓아두고 사용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걸레는 더러운 곳에 두고 갈수록 더 더러워지며, 반대로 고급스런 식기는 아름다운 곳에 두고 매번 닦아서 광을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면 갈수록 세상을 닮게 됩니다. 세상의 헛된 관심거리에 마음을 두고 마음이 갈수록 공허해지지요.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면 갈수록 하느님을 닯게 됩니다. 우리의 내면이 보다 더 정화되고 거룩한 일들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과업이 일순간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매 순간을 살아갈 의무가 주어지지요. 그리고 그 동안 우리는 결정을 하고 우리의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새로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꾸려나가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 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어떤 일도 어렵지 않았으며, 잠든 후에도 그의 주검은 예언을 하였다. 살아생전에 엘리사는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 (집회 48,12-14) 우리는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그들과 우리 사이에 일종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을 벌이곤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마치 그들을 ‘신화’ 속의 한 인물, 즉 가상의 인물로 취급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부족함에서 기인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 외에 일어나는 기이한 일들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여러가지 신기한 일들을 들으면서 일단은 의심부터 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전설 듣듯이 흘려 넘겨 버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예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의 인간적 고행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언자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가 듣기에 신기하고 괴이한 모든 일들을 당신 뜻대로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오직 하느님의 뜻대로 일을 수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가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일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쉬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사람이 된 것이지요.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뜻에 우리를 온전히 내어놓을 수 있다면 예언자들이 일찍이 했던 일들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데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빛을 전하고 깨우침을 주어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은

혀로 싸우지 않기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2디모 2,14) 디모테오는 혀로 싸우지들 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대상과 삶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맞서야 할 대상은 바로 어둠의 세력들입니다. 사탄과 그 추종자들이지요.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래서 ‘말’로는 그를 당해내지를 못합니다. 그는 그 어떤 논리에도 맞설 논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는 말로 싸워서는 안됩니다. 그와는 ‘삶과 기도’로 맞서야 합니다.  악마는 영리하고 영악하지만 하나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말하는 것을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그들은 빛의 천사까지도 흉내를 내면서 현란한 말을 꺼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말하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을 줄여야 하고 삶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는 삶으로 이야기를 하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말들은 오직 우리가 진실되이 살아가는 것을 바탕으로 나와야 합니다.

누구에게서 애정을 구하는가?

우리가 사람에게서 애정을 구한다면 우리는 사람의 구미에 맞는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은 저마다의 관심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관심사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이들의 보편 관심사를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부유함이나 화려함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더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애정을 구한다면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이 감탄하는 외적인 모습보다는 내면을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는 진실한 사람, 탐욕이 없는 사람, 겸손한 사람, 성실한 사람이 더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방식이 이미 우리 안에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는지를 드러내어 줍니다. 우리가 겉멋을 추구하면서 헛된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사는지, 아니면 진실한 것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지는 우리가 누구의 시선을 더 신경을 쓰고 사는지에 달린 셈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칭송을 하면서 속으로 비난을 하고 비판을 하고 욕을 합니다. 세상적인 것을 내세웠을 때에 언제나 주변에서 그것에 대해 감탄하는 사람들을 만나겠지만 사실 그들이 내면까지 거기에 감탄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질투와 시기와 아니꼬움과 비웃음을 참아 가면서 그들 앞에서 외적으로 찬사를 던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머무르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하느님 앞에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완전의 의미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6-48) 완전이라는 것에 대해서 성찰해 봅시다. 완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흠을 메꾸는 것을 상상합니다. 즉,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어떤 물건이 그 어떤 흠도 티도 없는 것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는 완전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완전은 보다 능동적이고 활력있는 것이며 단순히 제자리에 머무른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완전은 ‘사랑의 발산’입니다. 즉 우리는 완전을 물질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이를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들여 ‘율법의 준수’를 상상합니다. 즉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고 판공을 보고 교무금을 내는 식의 완전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인 차원의 완전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완전은 행동하는 완전이며 사랑하는 완전이지요. 마치 어떤 병에서 향유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그 일대를 모두 향기롭게 만드는 것과 같은 식의 완전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끊임없이 넘쳐 흐르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완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완전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완전, 즉 우리에게 선을 내어놓지 않는 형제들 앞에서도 선과 사랑으로 보답하는 완전이어야 합니다.

악인에게 맞서는 방법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마태 5,41)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다가오면 절대로 그와 맞서면 안됩니다. 오히려 그가 우리의 희생적이고 선한 행동 앞에서 더는 악한 의도를 지닐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의지는 단순한 사물이나 물건이 아니라서 그 순간으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악의를 지닌 사람은 그 악이 상쇄되도록 온전히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악한 의지가 마지막까지 다 채워질 때까지 그는 악한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이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악인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선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강요’ 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에게 정말 솔직히 필요한 것을 청할 뿐이고, 그렇다면 그 요구는 그대로 들어주면 된다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악인의 손아귀에 걸려들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평소의 삶을 정갈하게 가꾸고 악인들이 활동하는 곳을 스스로 삼가하고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악인에게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기회가 생기게 되고 그들과 얽히게 되는 일이 생기지요. 바로 그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악인들의 요구에 두 배의 선으로 응답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악을 본질적으로 상쇄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지요.

죄와 의로움, 그리고 회개의 기회(중요!)

먼저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율법의 준수 여부는 사실 죄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단순히 외적으로 미사를 참례하면 좋은 행동, 그리고 술집에 가면 나쁜 행동으로 분별을 합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미사에 오기 싫은 것을 사람들의 위신과 평판 때문에 겨우겨우 나온다면 그가 참례하는 미사는 본질이 사라져버린 외적인 껍데기를 위한 위선적인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의 옛 친구들을 복음화하기 위한 열정으로 친구들이 모인 장소를 찾아 술집을 간다면 그를 두고 단순히 술집을 방문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동은 단순히 그 외적 표지의 가치로만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본질적 의도와 가치가 중요한 셈입니다. 죄와 의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 해가 있고 아래에 구덩이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인간은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셈입니다. 눈을 들어 해를 바라볼 수도 있고, 아래로 구덩이 속을 바라볼 수도 있겠지요. 인간은 이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위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갈망할 수도, 또는 아래로 구덩이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 든 것을 갈망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가 서 있는 위치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핵심은 그가 어디를 바라보고 갈망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죄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이런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의지적으로 무시하고 아래 구덩이를 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의 서 있는 위치는 중요하지 않지요.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 또는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디를 바라다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 됩니다. 우리가 위로 빛을 갈구하고 하느님을 찾고 있는 중인지, 아니면 아래로 어둠의 세계를 갈망하고 있는 중인지가 바로 우리의 죄와 의화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것, ‘돌이킴’이라는 것은 바로 아래로 구덩이를

용서와 사랑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루카 7,47) 때로 삶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던 것들이 갑자기 소중해지는 순간들이 다가오곤 합니다. 평소에는 숨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물 속에 잠수를 하고 나서 몇 초 기다려보면 그 공기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곤 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무언가 늘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존재라든가 가족의 일치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잃고 나서 느끼는 소중함들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두고서도 거의 깨닫지 못하는 핵심적인 중요성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올바로 깨닫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것이 가장 부족하게 느껴지는 때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은총으로 붙들어 주시기에 실상 우리가 은총 없이 살아가는 때는 한 순간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보살핌은 우리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거부할 뿐이지요. 우리는 애써 그 보살핌에서 멀어지려고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추구하곤 합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얻고자 노력하지요. 그러다가 은총의 끈을 놓쳐버리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바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이 죄를 지으면 무엇보다도 양심에서 바로 신호가 옵니다. 마치 물에 빠지고 나면 숨을 참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요. 영혼의 질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존재라서 그러한 질식 상태에서도 삶을 유지할 수 있고 심지어 익숙해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심이 질식하고 마비가 되면 그때부터 인간은 육신의 쾌락을 뒤쫓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일하게 자신을 만족시키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허한 인간의 찬사들을 추

오토바이 회사 축복식

여러분들은 길 위에서 일을 합니다. 길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알려주고 그 가는 길을 쉽게 만들어 주지요. 길이 없으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수풀을 헤치는 참으로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하지만 길이 있으면 그 여정이 많이 수월해집니다. 영혼에도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혼의 길을 따라서 걸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많은 이들이 이 길 없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길을 따르지요.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한 사람이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 잔뜩 취해서 집에 돌아와 아내를 구타하고 또 다른 여자를 탐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영혼의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요구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육신의 욕구가 자신의 길이 되어버린 사람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영혼의 요구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찾지요. 하지만 전혀 엉뚱한 방법으로 구원을 찾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사제를 초대해서 축복받은 물을 끼얹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스스로의 삶을 바꾸어 나갈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 컵에 비를 받으려면 컵을 똑바로 받쳐 들고 비가 오는 곳에 서 있으면 됩니다. 다만 컵을 꺼꾸로 들거나, 무언가로 가로 막거나, 컵에 구멍이 나서 새지 않으면 됩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비처럼 내려옵니다. 우리가 그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쳐다보고 있거나, 아니면 죄와 오류로 그 마음을 가로 막거나 혹은 구멍을 내지 않으면 축복은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우리는 영혼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진리이시요, 생명이시요 사랑이신 그 분이 바로 영혼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하느님에게 이를 수 있습니다.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 길은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사랑을 찾는 게 아

선한 사람이 되는 것

악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실천해야 선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선의 실천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커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성전을 짓는다지만 뒤로 커미션을 다 받아먹고 사람들의 찬사를 즐기며 자신이 남긴 업적으로 더욱 더 오만해지는 사람은 전혀 선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선의 실천은 사람들의 눈에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선한 의지로 한 작은 기도가 어떻게 드러나는 행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육신 하나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은 눈에 드러나는 악행을 한 적이 없다고 스스로 착한 신앙인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아닙니다. 선을 실천해야 선한 이가 됩니다. 성당 안에서는 활동적이고 모든 궃은 일을 다 떠맡으면서도 정작 가정 안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군으로 군림한다면 그는 전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부님과 가까이 지낸다고 선한 이가 되는 게 아닙니다. 사제직에 걸맞는 선의를 지니고 열성과 봉사하려는 마음과 실천이 그를 선한 이로 만드는 것이지요. 주교님을 개인적으로 잘 안다고 선한 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교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도리어 교만의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당을 제대로 꾸미는 것은 얼마나 값비싼 꽃을 쓰는 가가 아니라 어떤 희생과 봉헌의 마음으로 성당을 꾸미는가 하는 것이 더 관건이 됩니다. 제대 위의 꽃을 꾸미는 방식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여 서로 불화하는 자매들이 있다면 그 꽃이 아무리 어려운 방식의 꽃꽂이로 꾸며진다 하더라도 도리어 거룩한 장소를 망치는 행위가 됩니다. 전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 드리기 위한 행위이지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정확하게 법규와 제도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바람과 지진과 불, 그리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열왕 19,11-12) 하느님은 바람 속에도, 지진 속에도, 불 속에도 머무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바람은 이리 저리 휘몰아치는 세파의 움직임을 상징합니다. 누가 죽었고, 어떤 사고가 일어났고, 정치적으로 어떤 것이 화제이고 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바람을 뜻합니다. 갈대는 바람에 따라서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지진은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의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직장을 잃는 두려움, 죽음의 위협, 관계가 파괴되는 두려움 등등이 때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목소리는 그 두려움 속에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불은 격정, 분노, 진노 등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향한 원한과 분노에 사로잡힐 때에 우리는 마치 불처럼 속이 타오르는 것을 느끼곤 하지요. 심지어는 의로운 일을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런 ‘격정’에 사로잡혀서 일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과거가 대표적인 케이스이지요. 그는 격정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나서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비로소 우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너무나 섬세해서 우리가 세상의 바람에 정신이 팔려 있거나, 두려움의 지진에 흔들리고 있거나, 격정의 불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듣지 못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침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들은 지나갑

일곱번의 기다림과 작은 신호

엘리야는 자기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아라.” 하고 일렀다. 시종이 올라가 살펴보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는 일곱 번을 그렇게 다녀오라고 일렀다.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시종은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가 시종에게 일렀다. “아합에게 올라가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병거를 갖추어 내려가십시오.’ 하고 전하여라.” (1열왕 18,43-44) 우리는 예언자를 뭔가 신비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기적을 행하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요.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예언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불확실성’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이 다른 이유는 ‘마지막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분이 보여주시는 아주 작은 신호라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예언자’로 만드는 것이지요. 바로 그들의 신앙이 그들을 예언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내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즉각 일어나야 하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동시에 화를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곤 하지요. “아니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느님은 도대체 뭐하시는거야? 들어주지도 않고?!” 이는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명령하는 거지요. 상사는 부하에게 명령을 하고 그 명령은 바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부하는 상사에게 명령할 수 없습니다. 조언을 하고 상황을 설명할 뿐이지요. 그러면 상사는 자신이 아는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분별을 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명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다만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들어 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다만 우리 눈에 느리게 보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고, 또한 지극히 작은 신호라도 캐치할 수 있는 아주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문제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런 문제들 가운데에는 아주 소소한 것, 이제 막 시작된 것이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주 심각하고 뿌리깊은, 오래 전부터 예비된 문제들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이 우리 근처에서 일어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를 향한 일종의 메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올바로 읽어내어야 하고 올바로 대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문제가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회개’에로의 초대가 됩니다. 즉, 내가 문제를 야기하는 주체라면 우리는 그 문제를 올바로 바라보고 우리의 뉘우침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가 바뀔 때에 그 문제도 당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반대로 그 문제가 내 주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장’의 토대가 됩니다. 내가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내 주변에서 나에게 문제가 다가온다면 그것은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문제를 감싸 안아야 하고 우리의 십자가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니다. 실제로는 나 자신에게서 시작된 문제인데 그것이 한 대상을 거쳐 오면서 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문제처럼 내비쳐진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외도를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당연히 그 남자를 비난하고 화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내는 남편의 그 외도가 실제로 자기 자신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남자의 순수한 악한 의도가 외도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내로서의 허영과 교만과 불충실이 남편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고 그 남편이 다른 애정에 허덕이게 만들어서 결국 유혹에 빠져들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남의 탓을 하는 데에는 전문가들이지만 우리 자신의 오류를 바라보는 데에는 참으로 부

고통

인간은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떤 유형의 고통이든 일단 피하려고 보는 것이 통상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을 키우기 위해 운동이 필요하고 정신을 확장하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육과 훈육이 필요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철이 들어서 이 교육과 훈육을 스스로 받아들인 아이는 그에 힘입어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고통을 어떻게든 기피하려는 아이들도 있으니 이런 아이들에게는 합당한 인도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영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영혼에 고통이 가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영혼에 유익하고 필요한 고통이 있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이를 회피합니다. 영혼은 과연 무엇이고 무엇이 영혼에 고통스러울까요? 육신은 살과 근육과 뼈로 이루어져 있고 이러한 것들을 단련시키는 방법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감정과 이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역시 그에 상응하는 훈련법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영혼 안에는 ‘의지’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의지에 반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고, 이 의지를 훈련하는 것이 영혼의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대부분 ‘자기 자신’으로 방향 지워져 있습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이기심’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지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알아 나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모든 촛점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런 인간에게 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작업, 즉 우리의 영혼을 만드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작업이 바로 ‘신앙’을 가르치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모든 교리교육은 바로 이 영혼의 훈련을 기본 바탕으로 삼습니다. 즉,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리고 그분의 뜻을 전하고 그 뜻에 순명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고통스러움을 피

증오의 감옥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6) 그때에는 흐리멍덩한 도덕적 상태는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 우리의 자유의지가 시험을 마무리하는 순간, 하느님의 자비는 사라지고 하느님의 정의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우리 안에 남아 있던 모든 요소들이 하느님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마지막 한 닢을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자유의지의 근본 방향에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은 구분하는 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참된 부모가 누구인지를 바라보면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을 추구할 것이고, 그분의 사랑을 닮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자녀들은 세상을 추구할 것이고 세상 안에서 통용되는 법칙을 준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는 ‘용서’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해코지를 당하더라도 용서할 수 있고 용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하신 것이고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주님의 기도에도 그 구절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세상은 용서가 없습니다. 세상은 합당한 거래를 할 뿐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반드시 기워 갚아야 하고 손해를 모조리 메꾸어야 그때서야 비로소 ‘용서’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

예수님의 기쁨과 슬픔

예수님이 기뻤다면 그 기쁨은 맛있는 음식과 연회, 혹은 좋은 술이나 옷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즐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슬펐다면 그 슬픔은 육체적 고난이나 과중한 업무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올바름을 내치는 이들의 닫힌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행복과 슬픔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여전히 좋은 것을 취하는 데에 있고, 우리의 슬픔은 고통을 당하거나 무언가를 잃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분별 기준이 없다면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대상이 과연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분별할 기준도 없는 셈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나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그분의 진리를 자신의 중심에 세우고 사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틀만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에 유익이 되게 살아가느냐, 혹은 아예 예수님 없이, 그분을 철저히 무시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갈림이 있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색채는 누구나 지닐 수 있으며 자신의 약력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적어 넣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가 어떤 교회를 자주 들르고 외적으로 어떤 면모를 보이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핵심은 우리가 예수님과 ‘공감’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공감’하는 바를 ‘실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공감만 할 뿐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끊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깨달음이지요. 오히려 자신이 끊어야 하는 이유를 아는데에도 불구하고 더욱 피워야 하는 자신의 내적 욕구를 재확인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사랑해야 하는 상황에서 증오와 복수심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박해 중에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 5,10-12)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장및빛 길이라는 것은 환상입니다. 어쩌면 가장 처절하고 지독한 가시밭 길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의로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의로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로움을 만나면 기뻐하고 반기는 것이 아니라 억누르고 무너뜨리려 합니다. 술을 즐기는 친구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가족들을 위해서 일찍 돌아가야 하겠다고 하면 친구들은 그런 친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더한 유혹으로 그를 끌어 들이려 하고 조롱하고 구박하곤 하지요. 그들의 마음이 어둠에 더 친근하기 때문에 그런 어둠의 방법을 더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가운데 누가 전에 머무르던 삶의 패턴에서 벗어나 빛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면 그 주변에서는 그것을 방해하는 움직임이 늘 시작이 됩니다. 세상의 악은 각 개인의 ‘자유의지’가 곁들여져 있기 때문에 ‘적극적’입니다. 우리가 맞서야 하는 악은 의지가 없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분명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악은 단순히 수동적인 어둠이 아니라 꽤나 능동적인 어두움입니다. 그렇기에 의로움을 찾는 이들은 이런 능동적인 악에 맞서야 하는 것이고 그 흐름이 강하면 강할수록 괴로움을 당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에게 가해진 악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에게 가해지는 악의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행복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욕구가 집착이 되는 순간

우리는 욕구를 가지고 있고 무언가를 원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이지요. 하지만 그 욕구가 ‘집착’으로 변하는 순간을 우리는 캐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욕구가 집착으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훗날 우리에게 돌아올 괴로움을 미리 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한 여인이 이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를 지닐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연령대에 맞게 그에 합당한 수준의 깔끔한 모습을 선보일 수 있지요. 어릴 때는 귀여운 모습, 한창 성숙할 때에는 아름다운 모습, 또 노년에는 그에 합당한 차분하고 지혜로운 모습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활짝 피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수많은 여인들은 그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내면에 형성해 가기 시작합니다. 즉, 유명배우의 아름다움이 자신이 아름다움이 되기를 바라고, 또 자신의 나이에도 맞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하지요. 즉 50대의 여인이 20대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기를 쓰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한 것을 ‘집착’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지닌 욕구는 우리가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집착’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 스스로가 괴로워지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채울 수 없는 욕구를 가지게 되는 셈이니까요. 그리고 다른 수단을 써서 억지로 채우더라도 나중에 그것을 한번에 잃고 나면서 나의 마음이 더욱 괴로워 질 것이 뻔합니다. 누가 나에게 빌려준 물건은 손에 쥐고 있다가 주인이 오면 다시 돌려주면 됩니다. 하지만 내가 쥐고 있는 동안 내 것이라는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훗날 주인이 와서 그것을 되찾아가려 할 때에 나는 괴롭게 됩니다. 이미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물건을 ‘빼앗긴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와 상황에 맞게 아주 아름다운 선물들을 주셨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라는 제품?

우리는 완제품을 구입하는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무언가를 정성을 들여 기른다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치킨을 사먹지 달걀을 사서 키워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도 ‘손쉬운 방법’, 또는 ‘효율적인 방법’만을 찾습니다. 그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은 율법의 준수를 말합니다. 법적 규정의 준수를 말하지요. 최소한의 규정된 무언가를 하고 나머지는 내 멋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규정된 것 외에는 적어도 누군가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법규가 인기가 있습니다. 판공을 지키는 법, 주일 미사를 늦게 와도 법적으로 허용되는 시기, 금육재를 어느 선까지 지켜야 하는 지 등등을 재고 따지고 해서 그 최소한의 규정을 이루고 나면 나머지 삶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살고 싶어합니다. 한편 하느님의 나라는 씨앗으로 주어집니다. 완성품이 아니라 우리가 길러야 하는 무엇인가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실망하고 중간에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사랑에 마음을 쏟고 인내를 기르고 믿음 안에서 걸어나가는 것보다는 그냥 별 생각없이 살고 내 육신의 욕구가 기대하는 것에만 신경쓰고 사는 것이 속편한 셈입니다. 책임있는 가장이 되는 것보다 무책임한 가장이 되는 것이 자기 스스로에게 편하고, 절제 있는 삶을 사는 것보다 무절제한 삶을 사는 것이 쾌락을 누리는 데에 더 나은 방법이기에 그것을 손쉽게 선택하는 셈입니다. 즉,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셈이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너질 때에 그들이 과연 무엇에 기댈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의지하던 집이 기초부터 무너지는 마당에 과연 그들이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소홀히 하고 온통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만을 추구해 온 그들이 과연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될까요? 하느님의 나라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씨앗을 뿌리고 물을 적절히 주고, 비료와 양분을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법과 사랑

사랑의 신뢰 관계가 없으면 형식이 중요해집니다. 그를 잘 모르니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절차와 예의 관계가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내가 누군가와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데 선물로 양말을 하든 과일을 하든 행여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선물을 하지 못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사회적 지위와 연륜을 따져가면서 그에 합당한 선물을 준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례라는 것은 원래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행위를 말합니다. 헌데 이 감사와 찬양이 그분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면서 ‘법적인 절차’로 변질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을 지켜야 하는지 저것을 지켜야 하는지,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고 무엇이 뒤따라야 하는지가 참으로 중요하고 마치 전부인 것처럼 대두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근본에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찬미’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는 갓난쟁이가 아니라서 철없는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합당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이 전제되었을 때에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의를 갖추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두려워해서가 아닌 것이지요.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이 근본적인 시각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을 매서운 심판관으로, 깐깐한 행정관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미사에 나가고 성사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하고 그 은총을 받아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미사는 지루하기만 한 행위가 되고 고해는 판공이라는 이름의 의무가 되고 나머지 예식들도 저마다의 두꺼운 규정집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하는 겉치례 예식이 되니 당연히 마음이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명백한 죄인은 되고 싶지 않으니 이런 저런 규정들을 따지고 최소한 그 울타리는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 법적 규정 안에서 궁금해하는 것들이 과연 정말 그것이 궁금해서

죽은 외아들과 과부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루카 7,12) 희망을 걸고 있던 외아들이 죽으면 그 과부는 슬퍼합니다. 특히 ‘과부’라는 입장은 자식 말고는 더는 그 어떤 희망도 없는 존재를 의미하지요. 남편이 없는 여인은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 하고 그나마 자식이 장성하면 자신의 노후를 맡길 생각이었는데 바로 그 자식이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죽은 아들은 우리의 죽은 영을 의미합니다. 슬퍼하는 과부는 그 죽은 영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지요. 우리는 지상의 생을 살아가면서 소위 물질적 세상이라는 ‘남편’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아들’에 대한 희망을 조금씩 키워 나가지요. 그러나 죄는 우리의 외아들을, 즉 우리의 영혼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지 못하는 채로 슬픔에 잠겨 죽음이라는 이름의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이 다가옵니다. 죽은 이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지요. 그리고 그분은 단 한 번의 명으로 그 죽은 아들을 되살립니다. 그러자 그 죽은 아들은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지요. 즉,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을 시작한 것은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모든 이가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지요. 인간이 절망할 때는 외적인 환경이 극적으로 비참해질때가 아닙니다. 인간이 가장 절망할 때는 ‘영원’을 상실할 때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분주히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 무덤을 향해서 달려가는 이들이 있으니 큰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도 사랑하시고 관심을 보이시지만 그들이 예수님에게 일을 하시도록 허락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어느 아기의 죽음

태어난 지 이틀 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하러 갔지요. 가는 동안 물어보니 태어나면서부터 심장에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수술을 해서 잘 된 것 같았는데 그만 죽어 버렸답니다. “한 어린 아이가 왜 세상을 떠나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지요. 아마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맑은 영혼이 하나 필요하셨던지, 아니면 이 아이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던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들이 수두룩하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명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인간은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 자란 성인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를 위한 연장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더욱 빛내고 밝히라고 세상에 남겨두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비단 사제에게서만 들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내 주변의 선한 이들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남편의 처지를 걱정하는 아내의 목소리, 젊은 자녀들의 비행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목소리와 같은 것들이 모두 하느님의 목소리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그릇된 욕구는 우리를 눈멀게 해 버립니다. 우리가 색안경을 끼고 있으면 사물들이 정상적인 색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욕구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는 좋은 충고를 ‘성가심’으로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피하고 꺼려하게 되지요. 안타깝게도 이런 장님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채로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첫째 사랑과 둘째 사랑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29-31) 사랑에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싶겠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서가 바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이웃사랑이 이어집니다. 물론 이 두가지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엉뚱한 가정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은 채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만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참된 것이면 당연히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 인간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향한 애정어린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사랑을 ‘하느님 없이’ 이루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벗어나서 사랑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즉, 자기 자녀가 다른 아이를 실컷 패주고 오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그 자녀가 그러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자녀를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는 자기 자녀를 두둔하고 나서지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난 이웃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하기 위해서 이웃의 재산을 슬쩍했다는 가장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나서 행하는 이웃을 향한 사랑은 그 자체로 길을 벗어나고 마는 것이지요. 사실 이들의 이웃사랑은 그 자체로도 합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이웃’과 ‘그 밖의 사람’을 나누고 자기 이웃만 사랑하려는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합당하지 않은 이웃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게는 모든 이가 당신의 자녀이

죽음, 인내, 수용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2디모 2,11-12)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의 죽음에서 보장된 것은 그분과 함께 살아남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의 인내에서 보장된 것은 그분과 함께 다스림 그분을 거부하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부정 그러니 이 자명한 사실을 두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분을 안다고 하고, 그분과 함께 참아 견디고, 그분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삶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 말인즉슨 이 땅에 주어진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일을 해도 휴식을 취해도 모든 것을 ‘나’를 위주로 운영해 온 셈이지요.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 것은 취하고 나에게 부정적인 것은 거부하는 식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헌데 그 분별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초라해서 우리는 때로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해가 되는 것마저도 필요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우리에게 유익한 것도 내쳐버리곤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 그분을 위해서 살다가 그분과 함께 죽기까지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내어바쳐야 하는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것을 단순한 일회적이고 최종적인 결과로만 생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참된 죽음은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에게 봉헌할 때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의지를 우리 안에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일종의 죽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내라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중요한 덕목입니다. 우리는 참아 견뎌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올바른 길에 들어서고 나면 마냥 꽃길만을 만나지는 않습닏.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만족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도움이 필요한 이를 찾아서 우리 밖으로 나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우리의 심장은 참으로 신비한 부위입니다. 우리 뜻대로 뛰는 게 아니라 자율적으로 뛰고 언제 멈출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그 심장이 잘 작용하도록 도와 줄 수는 있지요. 몸에 해로운 음식을 삼가고 적당한 운동을 하면 심장을 더욱 튼튼히 만들 수 있고 반대로 아무 음식이나 먹고 운동도 하지 않고 하면 심장도 덩달아 약해지게 됩니다. 심장은 온 몸으로 피를 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을 때에 가장 먼저 답답함과 아픔을 느끼기도 하고 또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에 마구 두근거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장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 바로 심장(하트)을 그리는 거지요. 예수님의 심장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심장은 곧 아버지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전혀 떨어져 있지 않지요. 사실 우리 모두의 심장, 즉 사랑은 바로 예수님의 심장에서 얻어내는 피로 뛰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자녀들의 상태에 따라서 두근거리기도 하고 또 반대로 답답함과 통증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지요. 열렬한 사랑을 만나면 기쁨과 희열을 느끼고 엇나가는 자녀들을 보면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은 살아있는 심장이며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심장과 일치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고 어디에서 슬픔을 느끼십니까? 우리 주님과 같은 기쁨과 슬픔을 느끼시나요? 아니면 그와는 아무 상관 없는 기쁨과 슬픔을 느끼십니까?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마음써야 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이 아픔을 느끼는 곳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이 기쁨을 느끼는 곳에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로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님을 드러내는 꼴이 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가련한 이가 힘을 얻고 교만한 이가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가진 자들이 나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