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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서로를 기쁘게 하는 이들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1코린 7,33-34) 바오로 사도는 이런 걱정이 세상일에 대한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마저도 하지 않는 부부들이 적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상대가 행복해지기를, 상대가 기뻐하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서로 보듬어주고 아껴주는 사랑으로 가득하겠지요.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상대의 기쁨보다는 자기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에게서 갈라진 마음이 더욱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기성은 고질적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대에게 다가설 뿐입니다. 진정한 이타적인 사랑은 초월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10개의 사탕만 주어져 있다면 우리가 다른 이와 거래를 할 때에 1개 이상의 사탕을 받지 않는 이상 다른 이에게 함부로 사탕을 내어주지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에게 1억만개의 사탕을 줄 아버지가 늘 든든하게 후원자로 존재한다면 내 손에 든 10개의 사탕은 기꺼이 누군가를 위해서 내어줄 수 있지요. 이처럼 우리가 진정한 이타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시며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 놓으셨는가를 올바로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타인에 대한 사랑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유익을 챙기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많은 부부들이 ‘섭섭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서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으면 나의 넘치는 부분으로 상대를 메꾸어 주고 또 나의 부족한 부분을 상대의 좋은 점으로 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욕구만 바라보면 언제나 부족함만이 남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상대에 대한 섭섭함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도움을 주려는 이, 도움을 주는 행세를 하려는 이

도움을 실제로 주려는 사람이 있고 도움을 주는 행세를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은 외적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상대에게 집중하고 있고 그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전하려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도움을 주는 행세를 하는 사람은 도움을 주는 것 같은 그의 행동으로 자신에게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건 도움 받는 사람의 내면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실제로 주려는 사람은 도움 받는 이의 필요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필요한 도움을 주지요. 반대로 도움을 주는 행세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줄 만한 것을 줄 뿐입니다. 아무리 새 것으로 보이는 어떤 물건이라도 자신에게는 쓸모가 없는 물건인 셈이지요. 생색을 내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 살면서 이런 체험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언제나 유익한 도움을 줍니다. 비단 금전적인 도움만이 도움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본당 마당을 한 번 쓸어도 그것은 필요하고 유익한 도움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는 생색을 내는 사람은 온갖 것들을 들고 오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쓰레기로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합당한 도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실제로 주려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일할 거리를 찾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는 행세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투덜대곤 합니다. ‘아, 정말 도와주고 싶은데 도무지 도울 방법이 없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지요. 아닙니다. 도울 방법은 무엇이라도 있습니다. 다만 그 돕는 방법이 자신에게 마땅치 않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돈이 많거나 지위나 학위가 높은 사람이 화장실 청소하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로 그 일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때로는 큰 돈을 봉헌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가져올 유익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받아 챙길 것을 이미 받은 셈이지요.

내 말을 듣는 자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같은 방향에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위치에 있더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 모두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같은 선상에 있더라도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갈라지고 맙니다. 너희 말, 내 말, 나를 보내신 분은 같은 방향에 존재합니다. 즉 나를 보내신 분이 최종 목적지이고 그분의 뜻을 전하는 것이 ‘내 말’이며 그 말을 받아서 전하는 것이 ‘너희 말’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하는 말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가 진실된 말을 하는지 거짓된 말을 하는지, 그가 하는 말의 내용이 무엇이며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그것이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하느님인지를 올바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턱대고 따라가다가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외아들은 그 사랑을 받아서 전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마땅히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같은 방향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같은 방향에 있고,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어받은 예수님의 말을 전하고 있을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는 분명하게 갈리게 됩니다. 그렇게 전해지는 말을 듣고 실천하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또 나아가서 예수님을 보낸 분, 즉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전해지는 말의 방향성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거부하면 그와 동시에 예수님과 하느님을 동시에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 안에는 ‘속이는 자들’이 끼여 있습니다. 즉 자신의 말,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때로는 악하기도 한 말을 마치 ‘하느님의 말’인 양 속여서 전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우리는 반드시 이 사업을 이루어야 한다고 외쳐대기도 하고

천사의 오르내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51) 하느님의 아들은 실제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분이 ‘하게 될 것이다’고 하는 말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때에 ‘과연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를 연상하면서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진리가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바입니다. 훗날 하늘은 열리게 되고 그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 말인즉슨 하늘이 존재하고 천사들이 존재하며 사람의 아들과 그 하늘을 연결시켜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지금의 우리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 앞에 환히 열려 있다는 것이지요. 천사는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에 보이는 세상 만을 만드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물질 세계와 비물질 세계를 모두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눈으로 관찰하는 물질 세계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비물질 세계도 활성화 되어 있고 어쩌면 물질 세계보다 더욱 활발한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이 이 비물질 세계에 환히 열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천사들의 시중을 받기도 했고 사람의 생각을 알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보이는 세계만 인지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도 분명하게 인지하고 계셨다는 것을 드러내지요. 그리고 사실 우리도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실히 볼 수 없을 뿐이지요. 우리도 때로는 영혼이 느끼는 것을 마치 실제 감각한

예수님이 제자들의 사랑 없음을 꾸짖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루카 9,52-55)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열정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두둔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원의를 표현을 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고 예수님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합당한 반응은 그저 그들의 마을에서 빠져나와 다른 마을로 가는 것이면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강도높은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표현을 두고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세상에 더욱 필요한 본보기가 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 앞에서 우리는 ‘완충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심판과 질책이 아니라 인내와 온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즉 적대감과 분노와 투쟁의 정신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설령 그 용서와 사랑이 우리를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지라도 말이지요.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 9,45) 모든 좋은 말들과 글들이 다 먹혀드는 것은 아닙니다. 듣는 사람의 이해력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도 아무리 좋은 글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주 좋은 술을 준비해서 따라줄테니 받아가라고 하는데 하다못해 비닐봉지라도 들고 와야지 보자기를 들고 오면 술이 술술 빠져 나가는 법이지요. 우리는 주어지는 것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주어지는 가르침에 합당한 자세와 이해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헌데 과연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르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대학교 수업은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마쳐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검정고시라도 통과해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영적인 내용도 그 수준이 있게 마련입니다. 무턱대고 좋은 내용이라고 듣고 읽어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지요. 오히려 진정한 가르침을 들으면 제자들의 반응처럼 묻는 것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하느님에게로 이끄는 가르침은 처음에는 솜사탕처럼 다가옵니다. 아주 부드럽고 맛깔스럽고 입에 달지요. 그래서 누구나 순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가게 되면 다음으로는 조금 더 단단한 음식이 나오게 됩니다. 이해를 하는데 힘이 쓰이고 실천하기는 더욱 어려운 가르침들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다가오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이는 첫 단계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이고 오직 쓴 맛 만이 가득해 보이는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해력이 떨어졌고, 심지어는 그 참된 가르침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했지요. 저마다의 수준에 맞는 가르침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젊음의 날, 불행의 날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코헬 12,1)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에서 비롯한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합니다. 사람이 생기가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 선택을 하는 것과 어쩔 수 없어서 마지못해 하는 선택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몸이 튼튼하고 얼마든지 외적 활동을 할 수 있음에도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 집안에 머무르면서 아내의 살림을 돕고 아내와 정겨운 시간을 보내는 남편과, 늙어서 더는 움직이지를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집안에 찡그린 얼굴로 사는 남편은 전혀 다른 두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우리가 젊고 혈기 왕성하고 얼마든지 다른 것들에 우리의 애정을 던질 수 있음에도 하느님에게 헌신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미 누릴 쾌락을 다 누리고 이제는 늙어버려 아무런 기력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신앙에 헌신하는 것은 그리 칭찬할 만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올바로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다 시험해 보려고 하지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 자신의 소중한 시간이 허비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훈련하고 쌓을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원하고 바라는 이기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다가 아무런 상급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자신의 욕구)을 다 챙기고 그 나머지 찌꺼기를 하느님에게 드리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받게 될 것도 찌꺼기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머무르는 동안 하느님은 지극히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잘못을 그분은 기꺼이 용서하시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날,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그 날에는 당신의 정의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모든 것이 태초부터 정해진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십시

모든 것에 하느님을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코헬 11,9) 코헬렛의 저자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독려합니다. 흔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뭐든지 금욕하고 절제하고 삼가하기만 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누릴 만한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시니 좋게끔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을 축복하시지요. 다만 우리는 당신에게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과연 하느님의 뜻에 벗어나는 활동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성당에 가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고 술집에 가면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일일까요? 이것이 우리가 쉽게 빠지기 쉬운 율법의 함정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행위를 구분해 버리고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규정해 버리고 말지요. 그래서 그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은 마음껏 누리기도 하고 또 반대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제쳐두고 율법적으로 해야 할 것만 같은 일만 신경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미사를 가는 것은 좋은 일인가요? 통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 표현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아니 신부님, 어떻게 신부님이 미사 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을 하십니까?’ 하지만 사실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하느님에 대한 아무런 애정도 관심도 사랑도 없이 그저 다른 이들 앞에서 짐짓 의로운 체하기 위해서 미사를 나간다면 그 미사는 그에게 그 어떤 영적 가치도 지니지 못합니다. 아니 도리어 그의 세속적인 마음 때문에 스스로에게 장차 심판과 책벌의 원인이 되기도 하겠지요. 사제는 미사 중에

섭섭한 하느님

어제 모임에서 한 할머니가 자신은 성경을 한 달 만에 다 읽었다고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느님은 참 너무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많은 동물들을 희생하고 죽이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할머니는 들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한 달 만에 읽었다는 표현 속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 할머니가 아니라 다른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하느님은 절대로 너무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섭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나의 생각이 하느님보다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즉, 내가 하느님을 보니 그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지요. 그분의 지혜는 완전합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부족할 따름이지요.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자신이 죄가 많고 그것을 뉘우치고 싶고 그 확인을 받고 싶은데 방법을 찾다보니 동물을 비싼 값으로 사서 그 피를 흘려 그들을 죽게 하면서 그것을 지켜보고 스스로의 죄가 없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참된 뉘우침을 지닌 이라면 누구나 용서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행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피흘림 없는 제사를 지니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미사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사는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제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희생됨으로써 그분이 우리 대신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다만 그 피흘림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당하고 계십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반드시 피를 흘려야지만 당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르신들도 자녀들이 엇나가면 고통스러우시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가 엇나가는 것을 보고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말하지 마라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루카 9,21) 베드로가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성령에 힘입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함부로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다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참된 진리이고 좋은 것이라도 그것을 곡해하고 망가뜨리려는 사람에게 전해지면 만신창이가 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럴 때에는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숨기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것을 품고 그것을 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전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모든 것이 원래의 의미대로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아이에게 교육을 시키기를 원한다고 대학 교육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 수준에 맞는 교육을 실시해야 하지요.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은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전해져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는 ‘신앙 고백’ 안에서 스스럼 없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앙고백의 말마디 자체는 이제 공론화 되었지만 그 실제적인 뜻은 여전히 잠겨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가르침은 그 대상을 잘 분별해서 전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면 안됩니다. 그들은 그것을 물어 뜯어버리고 우리를 공격하기까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교만한 사람들, 즉 자기 자신들이 하느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착각하는 이들 앞에서 우리는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가르침도 물어뜯을 것이며 오직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이 최고의 진리라고 착각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입을 다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가르침

현재를 들어높여 영원으로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코헬 3,11)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지구 상에 살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실 거의 모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로 사람들을 만나면 볼리비아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고 하면서 마치 볼리비아를 잘 아는 듯이 이야기를 하지요. 하지만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것은 편집되고 꾸며진 것들입니다. 생생한 이야기가 절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곳의 기후며 냄새며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이 모두 담길 수가 없는 셈이지요. 결국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하는 모든 말은 ‘편협’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자신들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본 것이 분명한 볼리비아의 현실이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 앞에서 저는 가만히 들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영원 안에 머무르시는 분이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모든 관점을 바라보시는 분이시지요. 숨은 것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생각을 헤아리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다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우리의 의지를 맡겨 드릴 뿐이지요.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영원의 뜻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존재합니다. 과거는 우리가 현재 기억하는 것이고 미래는 이루어질 현재이지요. 우리는 방금 지나간 시간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저는 현재 만을 어찌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미 쓰여진 글을 수정하는 것은 과거에 손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통해서 수정이라는 작업을 하는 것 뿐이지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소중한 현재입니다. 그리고 이

허무한 인간과 영원의 씨앗

코헬렛의 저자는 ‘허무’를 노래합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순환할 뿐이지요.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긴다고 해도 영원 안에서 흘러가는 우주 속에서는 지극히 작은 발버둥일 뿐입니다. 먼지 보다도 못한 셈이지요. 헌데 왜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목할까요? 우리가 그렇게 허무하기만 한 존재라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토록 신경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우리 안에 소중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자신도 그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중한 것이 그 내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에 맞닿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가능성’을 품고 있지요. 이는 마치 씨앗과도 같습니다. 씨앗은 싹이 터서 자라나고 마침내 커다란 성체가 되기 전까지는 씨앗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씨앗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지요. 바로 우리 영혼은 하나의 씨앗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우리 존재의 허무를 노래하면서 그 이면에 우리의 마음을 들어 높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찰나에 지나가버리는 우리의 삶이 들어높여져 영원에 가 닿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허무함을 느끼고 마음을 들어높여서 영원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허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합니다. 무엇을 실제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허무 안에서 모두가 빠져드는 게임에 똑같이 빠져듭니다. 더 많이 갖고 벌고 오르고 또 그 이면에 잃고 빼앗기고 떨어지고 하는 게임을 하는 것이지요. 아예 그러한 것들을 초월해서 마음을 들어높이면 진정으로 평온함이 나의 내면을 지배할 것인데 우리는 조급하고 안달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지진이 일어나고서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미처 느끼지도 못하고 하던 일을

헤로데의 죄책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카 9,9)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은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일까 하면서 온갖 추측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예수님의 본질은 온데간데 없이 바로 요한을 떠올립니다. 자신의 내면에는 요한에 대한 두려움, 즉 의로운 이를 합당한 이유없이 살해한 자신의 죄스러움이 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내면에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 저지른 모든 일의 결과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을 결정하게 됩니다. 행여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 자신과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영원의 삶 안에서 마주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시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잊으면서 동시에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도 잊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에 대한 희망을 잃은 그들은 지상의 삶에 치중하게 됩니다. 온갖 탐욕과 이기심에 갈수록 더욱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으로 인해서 세상의 것들에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세상을 이용하지만 세상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거룩한 결과 역시도 우리의 마음 속에 조금씩 쌓여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미 이 지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훗날 맞닥뜨릴 현실, 즉 하느님과의 만남 앞에서 우리는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일 수 있을지, 아니면 두려워하고 수치스러워하며 그분을 피하려고 할지는 이미 시작된 일이지요. 그 선택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헤로데처럼 자신의 죄책에 시달리며 다가오는 구세주를 의심하는 일은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얻고 잃는 것

좋은 술을 마시면 무언가를 얻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적으로 얻는 것은 중독으로 인한 건강의 악화와 관계의 파괴입니다. 나아가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술, 즉 값비싼 술을 향한 집착으로 인해서 내면에 탐욕이 자라나게 됩니다. 이처럼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게 내면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은 성가신 일처럼 보입니다. 내 재물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의 소중한 돈, 내가 좋은 옷을 한 벌 더 살 수 있는 돈을 공연히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훗날 우리가 자선에 보탠 돈이 커다란 내적 보화가 되어 돌아온다면 어떨까요? 상황은 정반대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일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좀처럼 살펴보지 못합니다. 올바로 보지 못하니 올바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지, 어떠한 것에 더 마음을 두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공연히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맙니다. 서로 다투는 이유 가운데 대부분은 ‘재물’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이 주변에 둘러서 있는 것 같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를 서로 다투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신뢰를 둔다면 성실히 일하고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만일 제가 볼리비아에서 한 고생과 지금 신설 본당을 위해서 하는 고생 이후에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도움을 충분히 얻는다면 나는 세상 안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받을 상을 다 받은 셈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저는 헌신할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보상이 없어도, 행여 일이 틀어져서 모든 질책이 저에게 떨어지더라도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지요. 서로 싸우는 사람들의 내면 안에는 ‘자기 자신’이 들어있지 ‘하느님’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들의 삶은 전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비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악에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존재였지요. 그런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요. 마태오 복음 안에는 수많은 자비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제물은 고상한 것이고 거룩한 이들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미사때에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준비되고 거룩하고 소위 ‘교회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바라신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우리끼리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비가 필요한 것이지요. 자비는 죄인들에게 필요합니다. 죄를 지을 때에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 스스로 온전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이 찾는 것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만 두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느님이 찾는 것은 죄인들입니다. 그들을 불러 다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고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끼리 모여 고상한 미사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죄없는 사람들끼리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기들끼리 오손도손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초대하는 공동체’이며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이자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인들에게 열린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것이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사랑’

사람이 보는 것과 하느님이 보시는 것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21,2)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한 것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로 이미 길을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한 것이 있다면 모두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드러내어도 하느님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배경, 자신이 노력해서 쌓아올린 모든 것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걸 자랑하고 싶어하지요. 즉, 그 자체로 이미 스스로 하는 것을 올바르고 좋은 것이라고 상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남에게 드러낼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멋들어진 자동차를 새로 산 것이 왜 자랑거리가 됩니까? 자동차는 필요에 의해서 구입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일 내가 하는 일에서 자동차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사면 되는 것이고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좀 더 크고 튼튼한 차를 필요로 하고 지금 내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헌데 누군가에게 그 자동차는 곧 자신의 자랑거리로 변하게 됩니다. 마치 그 자동차가 자신의 위대한 능력을 드러내는 듯이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교만이고 허영일 뿐입니다. 자신이 그닥 쓰지도 않고 자신에게 필요도 없는 차를 샀다는 걸 자랑하려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일 뿐이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위대해 보이는 어떤 일이나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남들이 따지 못한 학위를 따거나 남들이 가지 못한 곳을 갈 수 있었다는 것, 혹은 우리가 다른 이를 돕는 선을 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 되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전혀 다른 나라에서 아무런 기회도 없이 태어났더라면 애시당초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 되었겠지요. 우리에게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의 선물인 셈입니다. 그러나 자랑하는 이들은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의 것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마음 깊은 곳을 살피시는 분이십

듣기와 실행하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 (루카 8,21) 먼저 사람들은 듣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들음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들음은 높은 곳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겸손’이 없으면 ‘들음’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적는 글만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저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자기 스스로 하는 생각이 제가 적는 것보다도 훨씬 고상하고 드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애시당초 저에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때로 흘끔 흘끔 저를 감시하듯이 바라볼 순 있어도 정말 마음을 열고 제 글을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자기 생각 안에서’ 저보다 한참 위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듣는 것이 약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단 한 번 읽어 보아서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입니다. 좋은 책들을 두류 섭렵했으니 이미 많은 것이 자신들 안에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이들이지요. 그들은 하느님마저 다 파악했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보다 위에 있는 이들이고 교만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듣지 못합니다. 스스로 듣는다고, 아니 이미 많이 들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하나도 들은 것이 없는 셈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듣는 것은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들을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귀로 들어오는 소리 안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옷을 비닐에 싸서 물에 넣으면 물을 전혀 흡수하지 않습니다. 옷은 그대로 물에 넣어야 하고 푹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물을 잔뜩 머금게 됩니다. 우리도 우리를 둘러싼 교만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또 푹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을 흡수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실행’입니다. 듣는다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나면 들은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헌데 이 구체적인 실행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듣지도 않을 뿐더러

불의한 재물과 친구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루카 16,9) 탐욕이라는 것은 참으로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탐욕은 사람의 마음을 재물에다 묶어 놓아 그 밖의 다른 것들에 장님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탐욕은 사람의 눈을 가리워서 무엇이 더 소중한 가치인지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지요.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는 교회 안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사람들이 다투고 싸우는 이유에는 ‘돈’이 연루된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물론 비단 돈 때문에 싸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좀 더 확대해서 서술하자면 ‘소유’하려는 마음 때문에 싸우는 것이지요. 예컨대 친구 사이에도 서로를 소유하려는 마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한 친구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참된 우정은 서로를 자유로움에로 초대하는 것이 마땅한데 누군가를 오직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는 마음 때문에 서로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만의 것’으로 삼으려는 마음이 많은 것들을 망치게 됩니다. 그것이 돈에 들러붙으면 탐욕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정에 들러붙으면 시기와 질투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다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 덜 소중한 것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원의 우정을 위해서 지상의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원한 거처에서 나를 맞아줄 우정을 위해서 지금 이 땅에서 가진 것으로 많은 이들을 도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아는 것과 이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곤 합니다. 누구나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에 이르기까지는 요원한 일이 됩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서 쇼핑할 때에는 언제나 돈이 모자르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서 돈을 내어야 할 때에는 백원 한 푼도 아까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숨기고 싶은 적나라한 현실인 것입니다.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루카 16,10) 사람이 작정을 하고 나서면 한 두어시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요. 그러나 자신이 아닌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나중에는 정체가 드러나고야 말지요. 회사에 새로운 사람이 왔는데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친절한 척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인내는 바닥이 나고 사소한 일에 흥분을 하고 나면 자신이 형성한 그 헛된 평판은 사라지고 맙니다. 성실성이라는 것은 내적 가치입니다. 맡은 일에 충실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 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신앙 안에서 성실성, 즉 하느님에게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쌓기가 더욱 힘든 가치이지요. 우리의 신앙은 커다란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20대 때에 한창 성경 연수 프로그램이 활성화 된 적이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하곤 했지요. 하지만 신앙은 그런 한때의 프로그램이나 감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오히려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서 조금씩 쌓여 가야 했던 것이지요. 수많은 청년들이 그 프로그램을 거쳤지만 참된 신앙은 그런 ‘연수’가 아니라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일들에 열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작은 일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장차 큰 일들을 대할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지요. 작은 일은 소홀히 하면서 큰 일은 잘 해나가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니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을 철저하게 지키자는 것일까요? 한 푼도 낭비하지 말고 재물 목록을 만들고 철저하게 감시하자는 것일까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루카 8,18) 만일 위의 표현을 경제에 관한 서술로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섭섭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한 이가 된다는 말이니까요. 하지만 위의 말은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위의 말은 ‘배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이미 받아들인 빛으로 주변을 분별하고 더욱 많은 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자신에게 빛이 있다고 착각하는 이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정도의 설명이면 사람들이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천만에요. 사람들이 재물에 대해서 마음을 빼앗긴 정도는 심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수와 양으로 따지는 걸 좋아합니다. 신앙생활도 곧잘 수와 양으로 치환되곤 하지요. 자신이 몇년도부터 신자였는지, 혹은 무슨 교육과정 몇 기인지를 따지고 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영적인 설명을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제 깜냥대로 받아들여 화를 내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제가 좋은 글을 쓸 때에는 단 한번도 대꾸하지 않다가 조금이라도 자신과 연관되는 서술에 발끈해서 표독스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이들, 그들은 참으로 초라한 이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가진 이들은 가진 것을 나누고자 얼마나 노력할지 모릅니다. 빛은 등경 위에 놓아져 밝혀져야 하니까요. 하지만 가진 것

선과 악, 의로움과 불의

사람들은 선과 악에 대해서, 의로움과 불의함에 대해서 사실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고 의로움을 행한다고 하면서 불의를 행하곤 하지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선은 ‘자신에게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선은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좋은 것이 남에게 나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사람들은 의로움을 ‘정해진 것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율법적인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자칫 소중한 것을 망가뜨릴 수 있는 편협한 의로움이지요. 진정한 선과 의로움은 하느님에게서 비롯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참으로 선하시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는 선과 의로움은 지극히 부족하고 단편적인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성’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향할 때에, 그분의 진리와 사랑에 머무를 때에 모든 것은 선한 것이 됩니다. 또한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있을 때에, 하느님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머무를 때에 모든 것은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도록 합니다. 관제탑이 있고 비행기들이 공항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헌데 안개가 끼어 좀처럼 공항이 보이질 않습니다. 다만 관제탑은 레이더가 있어서 모든 항공기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지요. 통상적으로 왼쪽으로 접근해서 오른쪽으로 선회해야 하는 것이 일반인데 한 비행기가 전혀 다른 쪽으로 방향이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왼쪽에서 정상적으로 오는 비행기가 무전을 합니다. “관제탑, 여기는 1호기, 지금 공항에 접근 중이다. 방향을 알려달라.” “1호기, 1호기. 오른쪽으로 회전해서 내려오라.” 이 말을 듣고 오른쪽에서 오던 비행기가 대답을 합니다. “관제탑 여기는 2호기, 그럼 우리도 오른쪽으로 회전하면 되는가?” “안된다. 2호기는 왼쪽으로 선회하라.” “1호기에게는 오른쪽을 지시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하지만 2호기는 왼쪽으로 돌아야 한다.” 오른쪽이라는 방향은 비행기의 위

모든 것은 드러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루카 8,17) 이 말은 한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두려운 표현이기도 합니다. 즉, 의인들에게는 너무나 기대하던 진리이지만 악인들에게는 너무나 두려운 진리이지요. 의인들은 자신의 빛을 드러내고 살아갑니다. 물론 그들은 드러내려고 하지 않지요. 하지만 그들이 지닌 빛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애써 숨기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빛이 드러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인들은 자신의 어둠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철저히 숨기고 또 숨기지요. 그리고 외적으로는 선을 가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열매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표정은 어둡고 그들의 반응은 신경질적이며 그들은 포악하고 사납습니다. 죄는 어두움 속에서 행해집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죄스럽고 부끄러운 줄 아는 행위라면 그것을 드러내 놓고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의 수많은 범죄는 밤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으슥한 장소에서 이루어지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훗날 환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였습니다. 감춰진 것은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라는 것이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짧은 현세 안에 모든 것이 환히 드러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요. 자신들도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서 타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정의를 바라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영원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감춰진 것은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몰래 행한 선도, 우리가 숨어서 행한 악도 모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진리와 거짓은 그때 가서 분별해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판단하지 마라’라고 가르치셨지요. 진정한 판단, 즉 심판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인간의 면모는 오직 한 부분일 뿐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믿고

영적 장님

볼리비아에서 강론을 할 때에 이런 비유를 자주 쓰곤 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한 장님이 있습니다. 거기다 코도 막혀서 냄새도 맡지 못합니다. 그가 더듬더듬 손을 더듬어 물건을 찾다가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그것이 너무나 좋아서 몸에 치덕 치덕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볼 수도 냄새도 맡을 수 없었지요. 헌데 그러다가 번쩍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코의 감각도 돌아오지요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니 자신이 스스로에게 바르고 있던 것이 바로 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적 장님의 상태인 사람을 묘사하기 위한 비유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자리에는 비유에 해당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앉아 있었습니다. 술을 진탕 마시는 사람, 아내를 구타하는 사람, 돈 욕심을 내면서 가족들을 무시하는 사람 등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 비유를 들으면서도 올바로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한국에도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적 시선을 회복하지 못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하는 경우는 크게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마다 쉬쉬하고 있겠지요. 사람들은 수치스러움을 압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떠벌리지 않습니다. 만일 어린아이였다면 자신이 하는 일이 수치인지도 모르고 하겠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죄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알고서부터 우리가 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는 가능한 영적 어두움을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쓰러질 수 있습니다. 누구든 죄를 지을 수 있지요.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서 쓰러지고도 뉘우침이 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스스로의 탓이 됩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다시 쓰러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힘이 부족하다면 왜 청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혜로움

우리가 무언가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을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간은 영리하지만 그 영리함을 지혜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영리함으로 박사과정을 딸 수 있지만, 그 박사 학위가 자신의 가정 생활의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영리함을 한 방향으로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를 두루 본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주변의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숨은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영혼이라 부르고 그 주인을 하느님이라 부릅니다. 사실 모든 지혜는 바로 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활용하는 부분은 우리 지체의 어느 부분이 아닙니다. 지혜는 심장에서나 두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영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혼에 집중해서 그것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학위를 지니고도 어리석은 사람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정반대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외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본당의 난다 긴다하는 사람들보다도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느 할머니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가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할머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일테니까요. 우리가 집착하는 것에서 눈을 떼어야 합니다. 그래야 높이 올라서 더 많은 것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집착에서 벗어날 때에 하느님과 영원에 눈길을 둘 수 있게 되고 그리고 다시 세상을 바라볼 때에 그 허망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비로소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에 마음을 사로잡혀 있을 때에, 나의 일, 내가 갖고 싶어하는 것, 사람들과의 관계, 건강과 미모, 그 밖의 온갖 잡다한 것들에 사로잡히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

하느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왜냐면 하느님에게 당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서로 갈라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곧 말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 말은 곧 이루어질 능력이 있는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말을 꺼낼 수 있고, 말하는 것과 다른 실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성실성이 부족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수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하는 일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SNS에 아름다운 글귀로 장식된 사진을 올릴 뿐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의 내면으로 가난한 이들을 경멸합니다. 행여나 그들이 나에게 손해를 끼칠까 두려워하지요. 그들에게서 나는 냄새를 경멸하고 그들에게 다가서기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 앞에서 짐짓 의로운 척을 하기 위해서 그들을 옹호하고 도와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도울 마음은 하나도 없는 셈이지요. 하다못해 아주 작은 손해에도 발끈하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우리의 생각은 올바르게 되고, 자연 우리가 하는 말에도 ‘권위’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실천하게 되지요.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그분에게서 지혜를 얻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말을 꺼내고, 자신이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말수가 줄어들게 되지요. 쓸데 없는 말들, 세상이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는 소음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그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다 올바르게 인식하게 됩니다. 유행을 따라서 뭔가를 먹고 입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을 얻고 그것을 누릴 줄을 알게 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닮는 일은 단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실천에서부터 서서히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일로 동기가 제공될 수는 있지만 스스로의 의지를 다하지 않으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사람이 선하게

시기하는 마음

타인의 좋은 무언가를 보고 부정적인 마음을 지니는 것을 ‘시기’라고 합니다. 타인의 좋은 것은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인데 그것이 나에게 전해져와서 나의 어둠의 요소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은 타인의 그런 요소들이 사라져 버리거나 그가 뭔가 잘못되어서 불행해지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한글 속담에도 아주 간단명료한 표현이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바로 어둠의 마음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행복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에게 뭔가 좋은 것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들은 타인의 좋은 것들이 전부 어둠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오직 자신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에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오류가 있습니다. 타인의 행복을 자신에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과연 어떠한 것으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남는 선택은 ‘소유하는 것’ 뿐입니다.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기뻐할 수 없는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 안으로 두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지님(재물에 대한 탐욕)으로써 주목 받으려 하고(명예), 또 남들이 자신들의 목적대로 움직여주길(권력) 바라게 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서 건강해야 하고(건강에 대한 집착) 또 모든 이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외모도 꾸며야 합니다. (외모에 대한 집착) 이런 이들은 저마다의 왕국을 만들어놓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언뜻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결코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들이 기분이 좋을 때에 남들에게 잘 대해주거나 혹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에 부합할 때에 그에게 잘해주는 것 뿐입니다. 그들에게 타인은 오직 ‘이용 가능한 수단’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타인들의 행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어둠의 마음이고 지옥의 마음입니다. 천국은 나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이 되고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곳입니다. 서로 부족함을 채우고 돕고 사랑하는 공동체이지요.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지혜 3,9) 위에 언급된 모든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저 가운데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손으로 쥘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뢰, 진리, 믿음, 사랑, 은총, 자비, 거룩, 선택, 돌봄… 이러한 일련의 내적 가치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라고 해서 온전히 보이는 것만 의지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보이지 않는 흐름을 추구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마피아라도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 사람을 부하로 두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뢰’라는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또한 그는 부하들이 자신에게 진솔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영악하게 사기를 치는 부하를 좋아할 보스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들도 ‘진리’가 좋다는 것을 아는 셈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돈, 권력, 명예을 믿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다만 하느님이 아닐 뿐, 다른 무언가를 향해 언제나 주어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소유한 것들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주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지요. 그들도 사랑을 압니다. 물론 지극히 단편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지요. 그들도 자신의 가족은 끔찍하게 아끼곤 합니다. 비록 돈으로 사긴 해도 그들은 사랑의 대체품으로 다른 이성을 찾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은총 대신에 ‘재수’, ‘복’, ‘행운’을 찾습니다. 즉 자신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무언가에게서 ‘좋은 것’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들도 때로는 자비를 실천합니다. 누군가 지은 죄를 곧이 곧대로 처벌하지 않고 때로는 용서하기도 하지요. 물론 그렇게 해서 그의 마음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들도 선택할 줄 알고 선택 당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뇌물’

부끄럽게 여기지 마라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9,26)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 같이 자랑스러운 분을 우리가 어떻게 부끄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냐? 그래서 너는 지난 번에 외인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홀로 성호 긋기를 잠시나마 주저한 것이더냐? 아, 그리고 지난 휴일 동안 네 친척들과 모인 자리에서 성당에 갈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넌 가족과 함께라는 미명 하에 너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했었지. 그리고 네 아내가 하는 속된 생각을 앞에 두고 충분히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과연 너는 나를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단 말이더냐? 우리는 일상 안에서 수많은 도전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선택을 하게 되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 안에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요. 우리의 삶은 두 방향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불이익’을 겪게 됩니다. 남들이 다 뇌물을 받고 사정을 봐주며 일하는데 홀로 그러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이들의 눈총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복음에 온전히 눈뜨지 않은 미숙한 상태라면 그 미숙함 때문에 용서 받을지도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질책 당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아직 배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우리의 탓이기 때문이지요. 신앙은 단순히 우리의 여가시간을 투자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을 보다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중요한 선택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차원을 넘어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수용하고 그 안

의인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지혜 3,4) 세상에서 의로움을 간직한다는 것은 공기를 넣은 풍선을 물 속에 집어 넣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풍선은 물의 압박을 받고 위로 떠오르려고 하겠지만 풍선에 줄이 묶여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동안은 그럴 수 없게 마련입니다. 의인들이 세상에서 겪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압박을 받습니다. 세상은 의인들이 자기들 식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의인들이 적절히 타협하고 어둠의 행위에 가담하기를 바라지요. 즉 그 풍선이 그만 터져버리고 자신들과 동화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가슴아파 하시는 일을 마다하는 의인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의인들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을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거부감일 뿐이지만 일단 세상 사람들의 눈에 제대로 걸리기 시작하면 의인들에게는 본격적인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합니다. 시기와 질투, 공연한 다툼을 하려고 시도를 하지요. 그래서 의인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부류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들, 하느님 안에서 머무는 의인들은 그에 대비하는 여러가지 무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겸손과 기도, 온유와 절제, 관용과 사랑과 같은 여러가지 영적인 대응책으로 그들에게 맞서게 됩니다. 세상 안에서는 의인들이 무너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제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지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의인들의 생은 벌이고 고통이고 괴로움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큰 착각입니다. 의인들은 ‘희망’으로 더욱 부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압박이 심해질수록 의인들의 내면에는 희망의 싹이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의인들은 결국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승리가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1코린 15,44) 바오로 사도는 물질적인 몸과 영적인 몸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물질적인 몸이 죽고 나면 영적인 몸이 살아난다고 가르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1코린 15,44)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지닌 몸은 바로 물질적인 몸입니다. 이 몸은 물질계에 종속된 몸입니다. 일정한 공간 안에 머무르는 몸이지요. 그래서 그 한계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습니다. 즉 어디를 가고 싶어도 반드시 물질적인 수단을 통해서 갈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훗날 우리가 영적인 몸을 입으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물들과 소통하게 됩니다. 우리는 공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방에 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들어오신 것처럼 우리는 현상계의 법칙들을 초월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습니다. 사실 과학은 이를 밝혀내지 못합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물질계의 법칙을 관측하고 그것을 공식화 하는 것인데 영적인 세계는 물질과 상관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는 셈이지요. 다만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부활한 모습을 관찰한 사도들과 다른 성인들의 증언으로 짐작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지금 지니고 있는 몸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책임있게 우리의 몸을 다스리기를 바라시지요. 하지만 지금의 물질적인 몸에 종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혼이 몸을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몸을 올바로 잘 보전하는 것과 몸에 집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입니다. 예컨대 옷을 단정하게 입는 것, 터진 곳을 꿰메 입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이미 옷이 충분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색깔에 집착해서 혹은 디자인에 집착해서 옷을 마구 사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을 건강하게 잘 보살펴야 하지만 건강에 집착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몸은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들을 귀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루카 8,8) 예수님은 종종 이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귀가 없어서가 아니라 들을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이가 앞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듣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말하는 이의 말은 허공으로 공허하게 사라져 버리곤 하지요.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이 인간이 되어 우리들 앞에 오셨지만 모두가 그분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그분을 모함하려고, 혹은 작은 실책을 잡아서 상부에 보고하려고 염탐하기 위해서 온 이들도 있었지요. 그들은 말씀을 망가뜨리려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저 지루한 말씀의 시간이 끝나 빵조각이나 얻어 먹으려고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혹은 그나마 인기가 있는 예수님을 얼굴이나 보려고 호기심에 온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분을 듣도록 말이지요. 그러나 모든 이가 그분을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이들만이 그분의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귀로 들어오는 것은 음성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나의 내면에 받아들이면 그것은 뜻있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방식으로 말씀을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입에다 씹다가 뱉으면 전혀 몸으로 영양이 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단순히 귀로 듣는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 본래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말하는 이’도 중요합니다. 정말 하느님을 전하려는 열망이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시간을 때우려고 말하는 이들도 존재하고, 또 하느님에게 사람을 이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는 이 본인에게 사람들을 이끌려고 말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마치 자석이 서로를 향해 이끌리듯, 말하는 이와 듣는 이들이 서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일행을 시중든 여인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3) 재산, 재물이라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헌신해서 모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생명인 양 아끼곤 하지요. 왜냐하면 실제로 자신이 투자한 생명의 일부분이 물건이 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주인이 누구신지 잘 압니다. 생명의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시지요. 그래서 재물에 대해서도 원 주인의 목적대로 사용할 줄을 알게 됩니다. 즉 자신에게 무엇이 있든 그 모든 것의 원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있는 재산을 올바른 곳에 쓸 줄 압니다. 단순히 모으고 쌓는 것, 혹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것이지요. 그들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찾는 데에 눈이 열려 있으며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스스럼 없이 내어줄 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주변에는 바로 그런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이들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위해서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어놓는 데에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내어놓지 못해 안달했겠지요. 그들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했다면 예수님이 그들이 하는 일, 즉 그들의 얼마 안되는 재산으로 당신의 일행을 돕는 일을 가로막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유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마음 깊은 곳으로 삶의 본질을 체험하게 된 이들이었지요.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부유한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여전히 부유하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탐욕은 하늘에 가 닿아 있으니까요. 그들은 언제나 목마르고 굶주린 영적으로 불쌍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올바로 알았더라면 참된 주님을 알아뵙고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줄 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현세에 희망을 두는 불쌍한 사람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1코린 15,19) 사도들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사도들은 주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았고 그로 인해서 주님을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 신뢰를 바탕으로 아직 오지 않았지만 반드시 오게 될 일에 대해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도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믿기 때문입니다. 제 역시도 숱한 고난이 있었고 지금도 인간적으로는 힘든 일을 떠맡고 있지만 그 일을 기쁘게 하는 이유는 그 일을 주시는 분을 믿고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분께서 저를 당신 나라에 받아들여 주실 것을 믿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직 현세만을 위해서 이런 일들을 한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면 도무지 이런 일들로는 현세 안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돈을 벌겠다고 다짐하는 사람,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명예와 권력을 얻겠다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소위 ‘거짓말’을 끊임없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에게 영원을 기다리게 하고 현세의 고난을 잘 견뎌 나가 사랑 안에서 믿음을 품도록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헌데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가르치는 그 본인은 현세 안에서의 자리를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다면 그는 정말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며 거짓 투성이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비록 그는 세상 안에서 얻는 것으로 호위호식 할 수는 있겠지만 다가올 마지막 순간 때문에 결국 불안 속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에 희망을 둡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상급을 얻을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요엘 2,23-26) 오늘날 인간들은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고 믿습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비가 오나 안오나 상관이 없고 바람이 불든 불지 않든, 가뭄이 오든 홍수가 나든 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1년 365일 돌아가고 소위 성공한 인간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모든 것들이 ‘하늘’의 운에 달려 있었습니다. 농부는 곡식을 심고, 어부는 고기를 잡고, 사냥꾼은 사냥을 하지만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배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로 하늘에 계신 분, 즉 하느님을 경외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과거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먼저 인간에게 다가서서 그들을 한껏 배불리 먹이십니다. 외적 내적으로 축복을 충분히 내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지상에서 편히 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머무를 때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특히 인간은 내적으로 영적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당신의 은총을 충분히 나누어 주시지요. 이렇게 하느님은 먼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신 후에 인간들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기다리십니다. 먼저 사랑을 한껏 베풀어주신 다음에 인간들에게 사랑을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당신에게 사랑을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하느님에게 감사 드리기는 커녕 스스로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더욱 재물을 모으고 쌓으면서 점점 더 하느님을 잊어가

영혼의 수확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묵시 14,15) 열매는 익어야 딸 수 있고 사람의 영혼도 익어야 추수가 됩니다. 또한 추수할 때에 썩은 열매는 버려지고 이는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 성경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이용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지요. 하늘 나라 자체를 손에 쥐고 보여줄 수 없으니 이런 저런 비유로써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묵시록에 등장하는 ‘추수’의 모습은 바로 마지막 종말의 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수확할 때’가 되면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헌데 그 수확은 ‘곡식이 무르익을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생각을 가다듬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언제 익을까요? 한 인간이 성숙했다는 표현을 우리는 언제 사용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그의 몸이 성인이 되어 드러나면 그는 성숙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철없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그가 겉으로는 멀쩡하게 제 구실을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면이 전혀 성숙하지 않은 탓이지요. 인간은 다양한 면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혼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분에 집중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해야 그 영혼이 성장하는 것일까요? 과연 영혼이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몸은 음식을 원하고, 정신은 지식을 원합니다. 영혼은 다름아닌 ‘사랑’을 원하지요. 우리는 사랑에 관해서 민감해져야 하고 사랑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로이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거저 얻어지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음식을 얻기 위해서 ‘수고’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 (루카 12,21) 지혜로움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를 지닌 사람은 하느님을 잘 아는 사람이 됩니다. 앞뒤를 바꾸어 말해도 됩니다. 하느님을 잘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대학 교수라도,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나 권력가라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어리석음은 재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모으고 쌓을 줄 알지만 나눌 줄을 모릅니다. 그것 자체가 바로 그가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성당에 나와서 아무리 중요한 직분을 맡고, 거룩한 전례에 자주 참여한다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그가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면 그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예외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은 가난한 이도 부유한 이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시지요. 헌데 부유한 이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축재를 하고 가난한 이들을 무시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돌보는 하느님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유한 이가 부유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도우심 덕분이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행여 그들을 지구상에서 가장 외떨어진 곳에 두었다면 그들은 지금의 부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부를 누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렇게 얻은 것을 보다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잊고 사는 것이지요. 그들은 지독한 구두쇠입니다. 사실이 그러하니 있는 이들이 돈을 섬기는 것은 가난한 이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보다 더 철저하고 명확합니다. 그들은 얻는 것이 없으면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그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자선은 거의 찾아보기 힘이

편하고 쉬운 것이 좋은 것?

어느 샌가부터 쉬운 것, 편한 것이 ‘좋은 것’이 되고 어렵고 힘든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쉽고 편한 것을 찾게 되었고 어렵고 힘든 것은 피하게 되었지요.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들은 삶을 더 쉽고 편하게 하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어렵고 힘든 일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제시합니다. 십자가는 결코 쉽고 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의 아름다운 외적 모습에 다가서다가 그 안에 숨어 있는 십자가를 발견하고는 도망가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순히 사람을 고생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무엇이 삶의 진리인 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 세상의 가식적인 얼굴을 보여주고 이런 세상을 견뎌내고 힘을 길러 진실하고 의롭게 살아가려면 십자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결국 좋고 나쁨의 의미가 더욱 깊은 차원으로 바뀌게 됩니다. 무조건 편하고 쉬운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이 좋고 나쁨을 가르는 핵심이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기에 좋은 것이 되고, 일시적인 쾌락은 우리를 허무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좋지 못한 것이 되고 말지요. 여전히 사람들은 이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영양분이 되지도 못하는 것을 바라고 그것 때문에 시기하고 다투곤 합니다. 그로 인해서 십자가는 그 본래의 가치를 더욱 잘 드러내게 됩니다. 십자가는 현대를 치유하는 유일한 영적 치유약입니다.

십자가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민수 21,4-9) 조금은 이례적으로 독서 말씀을 모두 인용했습니다. 왜냐하면 한번쯤 읽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도 똑같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가는 길은 그 자체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전력이 있는 백성이었습니다. 즉 구원의 체험을 간직한 백성이었지요. 수많은 재앙이 이집트 인들에게 펼쳐지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었고 홍해를 건너면서 하느님의 위대한 힘을 체험한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러한 모든 것을 ‘잊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불평을 쏟아 놓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백성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헌데 그들은 ‘죽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하느님은 광야 생활 동안 필요한 음식을 주었습니다. 헌데 그들은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양식이 ‘진저리’가 난다고 표현합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니 오히려 성가신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이에 하느님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