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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주님의 영이 머무르는 이의 지혜로움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이사 11,2) 지혜(sabiduría), 슬기(inteligencia), 경륜(prudencia: 신중, 주의, 조심, 절제), 용맹(valentía), 지식(conocer a Yavé), 경외(respetarlo) 주님의 영이 머무르는 이는 자신이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 알기에 그의 길은 힘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는 스스로 가는 길을 통해서 더 많이 배워 알게 되고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어느 대상에 집중하면 그에 대해서 더 많이 배워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가진 지식을 마구잡이로 사용하거나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쓰지 않고 신중하고 조심해서 쓰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표현할 때에 우리는 많은 경우에 ‘피상적인 지식의 양’으로 그것을 가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시험 문제의 답을 많이 알면 그는 세상 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지식을 가진 이가 자신이 아는 지식을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쓰려 한다면 그는 사실 전혀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우리의 앎은 보다 전체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통상적인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영리하거나 지식은 많지만 지혜롭지는 못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안다는 것, 즉 지혜롭다는 것은 총괄적인 인지를 의미합니다. 하나의 가치에만 집중하지 않고 대상의 총괄적인 가치를 가늠하고 신중하게 분별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누군가가 뜬금없이 나에게 값어치 있는 무언가를 선물하겠다고 나설 때에 단순히 그 물건이 값비싸기 때문에 받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선사하는 그의 의도를 올바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가와 사랑

사랑이 사람을 살립니다. 질타와 비난이 누군가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충고는 필요하지만 사랑이 제외된 충고는 날이 무딘 수술도구처럼 사람을 해칠 뿐입니다. 섬세하게 혈관을 자르고 봉합해야 할 수술 자리에 드릴과 도끼를 들고 들어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무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사랑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았더라면 잊을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추구할 것이며 그것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따라가기는 커녕 도리어 멀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이 사실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예수님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해야 했고 자신에 반대되는 이들에게 정당한 세상법에 따라서 심판을 해야 했고, 혹 예수님이 다른 힘있는 군대를 끌어올 수 있으면 그것이라도 끌어와서 싸워 이겼어야 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리석게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성경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코린 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1코린 1,23)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살아가면서 스스로 가장 의로운 신앙인이라고 착각합니다. 때가 이를 것이고 사람들은 준비되지 않은 채로, 즉 십자가의 사랑을 전혀 배우지 못한 채로 그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훈련을 하나도 하지 않은 이가 마라톤에 들어가는 듯한 모습이 연출될 것입니다. 훈련을 단단히 한 몇몇 되지 않는 사람들은 기쁨에 설레이는 반면 전혀 훈련이 되지 않은 이들, 그저 텔레비전 모니터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스스로 마라톤 훈련을 하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믿음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마태 8,10-11) 백인대장은 로마인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율법의 굴레에서 ‘제외된’ 이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알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하느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있었고 그분을 마음 속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이 신뢰는 단순한 친구 사이의 신뢰를 넘어선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우리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서서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에게서 초월적인 존재, 즉 하느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인대장은 그 초월적인 존재와 그분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해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가족을 위해서도 그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거룩한 신앙을 바로 자신의 종의 안녕을 위해서 드러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는 자신의 현실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님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에게 오실 필요가 없다고 그저 한 말씀만 하시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감탄을 금치 못하십니다. 세상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이들이 수두룩하고, 또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우리의 신앙의 테두리에서 제외시켜 놓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도 알지 못하고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신앙의 가이드, 구름과 불길

주님께서는 심판의 영과 불의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오물을 씻어 내시고, 예루살렘의 피를 닦아 내신 뒤에, 시온 산의 모든 지역과 그 회중 위에 낮에는 구름을, 밤에는 타오르는 불길로 연기와 광채를 만들어 주시리라.  (이사 4,4-5) 여행사에서 준비하는 여행을 가면 언제나 가이드가 있게 마련입니다. 여행 가이드는 관광지에 익숙한 사람으로 모든 일의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전에 필요한 것을 챙겨주고 예상되는 위험에 준비하게끔 하고 여행객들이 다른 엉뚱한 것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막아 관광의 핵심에 집중하도록 도와주지요. 우리 신앙 여정에도 가이드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엉뚱한 데에 쏟아버릴 에너지를 아끼게 만들고 신앙의 본질에 집중하도록 도와주게 하지요. 물론 가이드가 없이도 여행을 다닐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가장 기본적인 사전 정보는 알아보는 법입니다. 하다못해 여행지 지도라도 들고 있어야 하지요. 이처럼 하느님을 찾는 이들도 저마다의 가이드, 혹은 지도를 들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가이드는 바로 하느님 당신 자신이겠지요. 당신만큼 당신 자신을 잘 아는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 가이드가 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신 것이지요. 바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행객들 중에는 가이드를 따라 다니는 것을 엄청 싫어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신앙 여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가이드, 즉 예수님에게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지요. 그들이 가이드를 떠나서 손에 쥐게 된 지도 역시도 가이드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여행과 신앙의 여정은 사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행은 싫으면 안가도 그만이고 또 여행은 그 종류에 따라서 아주 간단한 여행부터 복잡하고 험난한 여행까지 다양한 것이 존재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여정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루카 21,34) 방탕은 정상적인 길을 완전히 벗어나 삶을 문란하게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취는 중독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말하고 일상의 근심은 우리가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정상적인 결혼 관계를 벗어나 불륜을 즐기는 자들, 탐욕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이들의 것을 훔쳐서라도 갖고 싶은 것을 얻으려는 이들, 권력의 도를 지나쳐 자신에게 허락되지도 않은 것을 남을 윽박질러 하려는 자들은 방탕한 자들입니다. 술과 도박과 쇼핑에 중독된 이들, 일상적인 쾌락을 즐기는 데에 혈안이 되어 거룩한 영적 즐거움을 망각한 자들, 세상 안에서의 입지를 어떻게든 확장하려고 노력할 뿐 자신의 영혼의 요구에 귀가 먹은 자들은 만취한 자들입니다. 신앙을 살아가지만 여전히 일상의 작은 걱정거리에 얽매여 진보하지 못하는 이들, 이제는 사슬을 끊고 나아갈 때인데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이들, 신앙 안에서 박차를 가하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일상의 근심에 마음이 물러진 이들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는 그날이 덫처럼 덮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덫에 걸려든 먹잇감처럼 놀라게 될 것이고 미리미리 신경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의 자녀들, 방탕한 삶을 즐기지 않았고 만취 상태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일상의 근심이 마음을 물러지게 허락하지 않은 이들은 기쁨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징표를 읽어내기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루카 21,31) 우리는 많은 일들을 사전에 예측해 낼 수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그 빗방울이 모이고 모여 결국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그 마침이 있는 법입니다. 이 세상도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은 너무나도 장대해서 우리가 그 시작과 마침을 직접 목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거대한 모래사장의 한 알의 모래알과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니까요. 무구한 역사의 한가운데 우리의 삶이라는 시간을 얻어 태어나고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분명히 다가오는 시작과 마침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일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시작과 마침을 제대로 체험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잘 관찰하면 그 시작과 마침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제대로 된 지각 없이 태어납니다. 처음부터 어른들처럼 주변을 인식하는 아기는 없습니다. 아기에게는 모든 것이 경이이고 따라서 모든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움의 시기가 다가옵니다. 이런 저런 것들을 익히고 습득하는 과정을 거치지요. 처음에는 아주 쉬운 것들로 시작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그 깊이와 범위가 넓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선과 악’에 대한 인식도 생겨나고 따라서 ‘죄’에 대한 인식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죄들을 짓게 되지요.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하면 안되는 것을 하고 탐하기도 하는 등 우리는 엇나가는 삶을 탐하고 그것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구원에로의 초대가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수많은 기회들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어둠과 빛의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되고 우리의 결단으로 빛을 향해 나아가거나 반대로 어둠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

바빌론의 멸망

수금 타는 이들과 노래 부르는 이들, 피리 부는 이들과 나팔 부는 이들의 소리가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고, 어떠한 기술을 가진 장인도 다시는 네 안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맷돌 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등불의 빛도 다시는 네 안에서 비치지 않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묵시 18,22-23) 성질 못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싸움 잘 날이 없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러한 이들 가운데 빛의 자녀들, 즉 선한 이들을 끼워 두셨습니다. 완충제 역할을 하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나마 이 세상은 숨돌리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가 이르면 하느님은 이 완충제 역할을 하던 이들을 모두 당신의 나라에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서로의 충돌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금을 타는 이들, 노래를 부르는 이들, 피리 부는 이들, 나팔 부는 이들은 그나마 삶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기술을 가진 장인은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고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내적 보화를 지닌 장인들 즉 성인들을 의미합니다. 맷돌 소리는 곡식을 가는 소리, 즉 사람들의 영혼을 채울 양분을 준비하는 이들의 노력을 상징합니다. 등불의 빛은 그나마 희미하게라도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던 가능성을 의미하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응답을 의미합니다. 멸망할 운명을 지닌 도성 바빌론 안에서는 그 어떤 긍정적인 면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탕녀는 뭇 남성을 유혹하여 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바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악에 빠지게 만든 존재, 사탄을 의미하지요. 그 탕녀는 심판을 받게 되고 증오의 불구덩이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타오르는 연기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이들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의로움으로 자신을 가꿔온 이들, 거룩함으로 인내 가운데 머물렀던 이들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어둠이 빛을 만날 때

빛은 어둠을 향해 뻗어 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빛과 어두움의 만남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두움이 빛을 만날 때 모두 그 어둠을 빛으로 밝히고 빛으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어둠은 자기 나름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자신 안에서 어둠을 조장하는 요소를 없애고 빛을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빛을 피해 더욱 어둠을 짙게 만들던지 하는 것이지요.  빛의 자녀들은 이러한 과정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빛의 자녀들은 빛을 찾고 그것을 즐기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러하지는 않습니다. 어둠에 익숙하고 어둠을 즐기는 이들은 빛이 다가올 때에 도리어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엄마가 다가오면 엄마를 피하려고 합니다. 엄마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거짓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체험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 속에 살아갈 때에 우리는 빛을 피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죄스런 삶 가운데에서 우리는 신앙을 점점 기피하고 멀어져 가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영혼의 빛이시고 마음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의 어둠을 밝히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그 빛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지요. 빛을 받아들이는 이는 그 빛과 더불어 살아가고 빛을 즐기게 되지만, 빛을 거부하는 이들은 빛에서 멀어지고 빛에 두려움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은 어둠을 찾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둠이 빛을 거부해도 빛은 어둠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빛이 없는 이들, 즉 마음 속에 평화와 기쁨이 없는 이들, 극성스럽고 부산스러우며 짜증을 잘 내고 때로는 시기와 증오에 머무르는 이들을 빛으로 초대하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사랑

많은 돈이 사람을 살리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랑이 사람을 살립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좋은’일은 그러합니다. 사람이 돈을 수억 벌어서 다른 이를 돕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도울 사람은 한 푼 없어도 남을 돕습니다. 이건 저의 체험에서 나오는 말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부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사제라는 직분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게 합니다. 부유한 이들은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얻은 교양이 있기는 했지만 희생적이거나 헌신적이지 않고 오히려 방어적이고 교만하고 위선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일로 골치아파 했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내세우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고 속은 썩어나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가지지 못한 이들은 교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식기를 어떤 순서로 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에스컬레이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해서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으니,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배를 고파 보았기 때문에 남들이 배고픈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삶의 기본적인 문제에 고통스러워 했기에 남들이 고통스러워할 때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연대하고 일치하여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을 ‘획일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선한 부자도 (드물지만) 분명히 있었고, 또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탐욕이 하늘까지 미치는 사람도 적잖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해본 이가 다른 고통당하는 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요. 지금의 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 있습니다. 저는 요즘도 제가 일상적으로 누리는 것들에 새삼스럽게 놀라곤 합니다. 제가 몰고 다니는 차가 얼마나 발전된 기술의 집약체인지, 그리고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삶 속의

평화로움의 특권

평화로움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 즉 자신에게 집중해 있는 이는 평화로움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것을 고수하기 위해서 남들과 다퉈야 하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더 나아 보여야 하고, 자신의 말을 누군가가 반드시 들어야 하기에 그는 언제나 마음이 바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침묵 중에 있을 때에 우리의 평화가 드러나게 됩니다. 즉 평화로운 이는 침묵 안에 잠겨들게 되지만 불안한 이는 그 침묵을 깨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는 텔레비전을 선호하고 세상의 온갖 잡다한 기사들에 마음을 두지요. 그러한 것들로 정신을 산만하게 해야 비로소 자신 안에 빠져들어 느끼게 될 여러가지 두려움들을 예방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감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들에 빠져드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낙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더욱 쾌감에 빠져드는 활동을 해야만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중독상태인 셈입니다. 그들은 물 한 잔을 마시면서도 평화를 누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미각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다른 일상적인 것들에는 전혀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먹다남은 빵 한 조각을 꺼내들고 차 한잔을 마시면서 이 글을 적습니다.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 좋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아시고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곡식의 추수, 포도의 추수

곡식은 성실히 일한 사람이 얻는 결과물을 상징합니다. 농부는 열심히 땀흘려 일한 값으로 곡식을 얻어내지요. 그에 반해 포도라는 것은 취하는 술을 만드는 재료로 쾌락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쾌락에 빠져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곤 하지요. 그리고 수확을 담당하는 두 사람이 보내집니다. 한 분은 사람의 아들과 같은 분으로서 곡식의 추수를 담당하고 다른 이는 불에 대한 권한을 지닌 천사로 포도의 수확을 담당합니다. 헌데 포도를 수확한 천사는 그 포도를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다 던져 넣어 버립니다. 아마도 포도는 거기에서 짓밟히고 산산조각이 나겠지요. 마찬가지로 쾌락의 종으로 살아온 이들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 넣어져 산산이 부스러질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들이 빨아낸 양분을 축적해 두지요. 아무 이유 없이 거저 이루어지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기호가 있고 그 기호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얻어냅니다. 탐욕스런 사람은 재물을 얻어내고 명예에 목마른 사람은 인기를 갈구하고, 남을 지배하는 것을 즐기는 이는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얻게 되지요. 그렇게 얻은 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채워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채운 것은 열매로 드러나게 되지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이가 하느님의 열매, 즉 진실과 선의와 사랑과 기쁨과 희망을 지니지 못하고, 또 반대로 하느님에게 속한 이가 흥청대는 술잔치와 탐욕, 방탕, 위선에 빠져 살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한 인간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신을 채워나가고 결국 열매는 무르익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곡식이 되거나, 혹은 분노의 포도확에 들어갈 포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악인들의 열매를 부러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포도는 탐

무너지지 않는 성전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5-6) 반드시 일어날 일을 두고 언제? 어디서? 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합니다. “과연 나는 준비되어 있는가? 아니면 무엇이 부족한가?” 사람들은 신앙이 있다고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위 성경 구절의 ‘성전’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꾸며진 화려한 건물입니까? 아니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무언가 입니까? 사람들은 외적인 화려함에 사로잡혀 성전을 칭송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은 때가 이르자 말 그대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 성전을 다시 세웠지만 세상의 마지막에 가서 또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외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물론 깊은 신앙을 지닌 이는 외적 삶의 모습도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이 곧 내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적인 것,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라져 버릴 것들로 성전을 쌓지 마십시오. 영원한 가치들로 성전을 쌓아 가십시오. 서로 돕는 마음, 서로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집을 지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과 땅의 임금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루카 23,37) “네가 왕이더냐? 그렇게나 강한 왕이더냐? 헌데 지금 이 꼴이 무엇이냐? 발가벗겨지고 매맞아 십자가에 무력하게 달려 있는 꼬락서니가 아주 보기 좋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유명했더냐? 기적을 행하는 사람? 구원을 이루는 사람? 그러면 무엇을 하고 있느냐? 어서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어서 이 나라를 구원해 보아라. 아니, 무엇보다도 너 자신의 목숨부터 살려보아라.” 모르긴 해도 십자가 주변에 모여든 이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조롱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권력을 두려워하는 이들이지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기에 마음대로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권능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힘을 가지고 있어야 세상을 평정한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상대를 내리누를 수 있는 무기와 근육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지식과 명예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기를 씁니다. 세상 안에서 아주 약간의 권력이라도 쥐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한 것들이 자신을 드높게 만들어주고 자신에게 힘을 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심지어 성당 안에도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겸손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자신의 위신을 끝까지 지키려는 이들, 자존심이 깎이는 것을 죽는 것보다도 더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었던 이유는 제자들의 발을 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왕좌에 오르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왕관을 쓰지 않으시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그분은 왕홀을 쥐신 게 아니라 차가운 쇠못을 양 손과 양 발에 지니셨습니다. 그분은 온갖 명예와 권능을 누리시기보다는 온갖 세상의 수치와 모욕을 한 몸에 받으시고 죄인들 가운데에서 죄인처럼 다루어 지셨습니다

예언자의 죽음에 기뻐하는 땅의 주민들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묵시 11,10) 우리의 몸은 편안한 걸 좋아하고 괴로운 걸 싫어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할 때가 있으니 그것을 억지로 견뎌야 할 때도 있지요.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그러한 뚜렷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평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괴로움을 겪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이지요. 하지만 모든 이가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고 맙니다. 예를 들어 고해성사때에 우리가 겪는 수치는 영혼의 괴로움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가 저지를 잘못에 대해서 수치를 겪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기 위한 필요한 일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수치를 피하려고 하고 최대한 수치스럽지 않은 방법으로 고해성사를 보려 합니다. 그래서 이 신부님, 저 신부님을 골라 찾아다니고 이 본당 저 본당을 옮겨다니기도 합니다. 그렇게 회피해버린 수치는 결국 우리 영혼에 도리어 독소가 됩니다. 우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고해성사의 ‘법적 사죄’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게 쉽게 얻어낸 용서는 다시 똑같이 같은 죄를 반복하는 오류에 빠져들게 만들 것입니다.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 앞에서 천상의 것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하는 모든 말이 아름답게 여겨지지만은 않습니다. 도리어 심한 내적 고난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언자들은 온유와 친절과 겸손으로 애써 고통을 줄이려 노력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땅의 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 자체를 없애 버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아무리 꽃으로 꾸며도 십자가는 십자가인 것이니까요. 그래서 땅의 주민들은 예언자들 앞에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다가 예언자가 죽으면 그들은 슬퍼하

대구대교구 신설 본당 설립 메뉴얼(사수동을 예시로 함)

인사 명령 확인(교구청에서 정해주는 장소 확인 예: 사수동 성당 주임은 1대리구청에 머무름) 인사 이동(머무를 곳으로 이동) 해당 대리구장 신부님 방문, 신설 본당에 대한 일련의 정보 확인(예: 본당용 토지 위치 확인 및 그 밖의 정보들/ 어떤 본당에서 주로 분리되어 나오는지 등등) 본당 설립 계획 토지 방문 확인(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토지의 넓이, 기울기, 현재 상황, 사람들이 작물을 심었는가 아닌가 등등/ 기술이 좋아져서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상당수 있음) 신설 본당 구역임을 알리는 현수막 출력해서 배치 교적이 넘어올 본당 주임 사제와 어떤 구역을 할당 받을지 논의후 확정하기(예: 사수성당은 1대리구 3지역 매천성당과 5대리구 신동 성당 주임 사제와 협의해서 사목 구역을 확정함 / 사수동, 금호동, 지천면 용산리) 본당용 인감 도장 만들기 - 20mmX20mm 이하 규격으로 본당용 도장 만들기(지나치게 크면 통장의 인감란을 벗어날 수 있음) 본당용 컴퓨터 구입(양업 시스템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윈도우가 반드시 정품으로 설치된 것이어야 함) 양업 시스템 교육 받기(전산실 방문 문의후 날짜 정해서 받으면 됨) 회계과에서 당해년도 회계 지침서 받기 본당용 통장 만들기(대구은행) 은행을 방문해서 법인 통장에 필요한 서류 목록 확인(대구은행 - 사업자 등록증, 법인 인감 증명서, 사용 인감계, 위임장, 대리인 신분증; 주민등록증, 사용인감계의 도장) 교구청 회계과에서 증명서 교부 및 날인 신청서 작성 당일이나 익일에 교구청을 다시 방문해서 신청한 서류들 받기 해당 은행에 가서 받은 서류와 주민등록증, 본당 인감 도장을 지침해서 통장 개설(필요에 따라 복수로 개설할 수 있음) 해당 지역의 신자들이 주로 다니는 성당(사수동 성당의 경우 매천성당이

평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루카 19,42) 야쿠르트를 가져오는 건 야쿠르트 아줌마, 택배를 가져오는 건 택배 아저씨… 우리는 세상의 움직임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기는 커녕 오해를 하곤 했지요. 그래서 평화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로 평화를 논하곤 했습니다. 미사일로 평화를 논하고 군사비를 늘리는 것으로 평화를 이야기했지요. 그들은 우리에게 약속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우리를 위한 벽을 쌓으면 쌓을수록 그 벽을 뚫으려는 이들, 넘어오려는 이들이 늘어만 갈 뿐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화’가 무엇인지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지요. 우리의 힘을 길러서 상대의 입을 틀어막는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벽을 높이 쌓아서 서로 쳐다보지 않는다고 평화가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내적인 가치이며 안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바로 우리 영혼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평화는 평화이신 분을 받아들일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모든 전자제품에 전기가 통해야 그 용도를 발휘하는 것처럼 우리가 평화를 위해서 진정으로 일하게 되는 때는 바로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그분의 성령을 받아들일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논하는 평화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야말로 모든 분쟁을 종식시키는 진정한 평화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빛을, 절망에 희망을, 증오에 사랑을, 불신에 믿음을 부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위한 발걸음이 됩니다. 단순히 이 나라의 평화만을 빌지 않겠습니다. 온 세상의 평화를 빌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실천이란 과연 무엇인가?

세상에 어둠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류와 죄와 잘못으로 점철된 역사와 그것에 가담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 빛과 그 자녀들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구분을 어떻게 할 것이며 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참고 견뎌야 한다고 하지요. 무엇이 바람직한 일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님이 악에 맞서서 어떻게 저항해 왔는지 혹은 그들을 품어 왔는지 살펴본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갚는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명백한 죄가 있어도 그것을 심판하기보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자 했고, 한 사람에게서 99가지의 오류가 발견되어도 단 한 가지의 희망 때문에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판단을 조심할 것을 거듭 당부했지요. 우리가 남에게 던지는 시선으로 먼저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를 요구했습니다. 누군가 뇌물을 받는 게 싫다면 나는 행여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은지, 누군가 탐욕에 빠져드는 것을 두고 비난하고 싶다면 나는 그런 탐욕스런 마음이 있지 않은지 먼저 살펴보도록 요구하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잃은 양을 포기하고 99마리를 살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99마리를 우리 안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가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그런 살리려는 사랑의 절정은 바로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 죄도 없는 당신을 죽이는 이들에게 생명을 내어주신 분이었지요. 때로 성격이 급한 이들이 다가와 물을 때가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뭔가 하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왜 하지 않고 있겠습니까? 선한 이들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성실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꾸준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일이라는 것이 성

문을 두드린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묵시 3,20-21) 문은 손으로 두드립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방법은 다릅니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문을 두드립니다. 진리와 생명의 말씀, 믿음과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두드림을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분이 하는 말에 흥미를 가질까요? 한국에 돌아와서 미사를 많이 드립니다. 우리 한국 신자분들은 참으로 열심합니다. 자매님들은 미사보를 곱게 쓰고 남자분들은 정장을 입으시고 근엄하게 거룩한 전례에 참례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례는 때로 너무 상투적이 되어 버려서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는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독서 말씀을 ‘독서자’에게만 맡겨 버립니다. 즉, 그들이 알아서 읽게 두고 정작 우리는 미리 읽지도 제대로 듣지도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문을 두드릴 때에 문 안에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문을 두드린 손님은 떠나 버리고 맙니다. 신부님께서 때로 가정 방문을 하는데 아무도 집에 없고 또 집에 있으려 하지도 않으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택배 만큼은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우리의 관심사를 너무나도 잘 드러내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말씀이 선포될 때, 즉 거룩한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별 관심이 없다가 인터넷 기사나 텔레비전 뉴스는 집중을 하고 듣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을 얻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는 그분을 만나 얻고, 세상을 찾는 이는 세상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분과 함께 은총의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거룩한 음식을 먹고 싶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로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묵시 3,17-19) 묵시록에서 하느님은 교회의 오류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마지막 바람은 그들의 멸망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사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내적인 면에 존재합니다. 속에서 곪은 것이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내면의 영혼이 헐벗어서 그것이 외적인 오류와 죄악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에 세속적인 쾌락으로 그것을 대체하려 하고 그러다보면 외적으로 그러한 기쁨들을 찾아 나서다가 결국 죄악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내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분이 허락하시는 평화에 만족하지 못하니 그 대체품으로 재물로 얻어지는 기쁨, 명예와 권력을 통해서 누리는 기쁨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치유하는 방법 역시도 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내적인 충만감을 돌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희망과 사랑의 삶, 그리고 굳건한 믿음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이 따라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건물을 세우고 도로를 내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내적 변화로 초대하고 결국 그의 의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또한 영적인 전쟁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투쟁을 외적인 것으로 치환하려고 합니다. 정말 변해야 할 내적인 것을 소홀히

자캐오의 숨겨진 이야기(픽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 19,8) 자캐오는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주님, 그리고 저처럼 일하는 다른 세관장들을 주님 앞에 고발합니다. 그들은 곧잘 다른 이들을 등쳐먹으며 거짓으로 돈을 횡령하고 아주 사악하고 게으르고 탐욕스런 집단입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 그들을 고발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제가 나서서 그들의 잘못을 빈틈없이 찾아내고 그들의 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드럽지만 엄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캐오야. 멈추어라.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네가 고발하는 그들의 잘못들을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거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의 집에 와 있고 너와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에게 집중하고 있다. 나는 너의 잘못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너를 기다렸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너의 회개이고 그것은 먼저 말한 것들로 충분하단다. 자캐오야. 내가 바라는 것은 세상이 불타오르고 모든 악인들이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다. 나는 병자를 찾아 고치러 온 의사이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란다. 너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죄인이었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군중들 사이에서 너를 비난하거나 헐뜯지 않았다. 그러기에 너는 나를 받아들였고 너는 스스로 회개를 이루었다. 너희는 서로 용서하여라. 누가 네 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도 대어 주고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너희가 세상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거라. 그러나 너희는 스스로 심판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

다시 볼 수 있게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루카 18,40-41) 그가 청한 것은 다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보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굳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스스로 눈 먼 줄 모르는 장님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장님에게는 당연히 눈을 뜨는 은총을 베푸시지만 단순히 눈을 뜨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덧붙여지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예수님은 허투루 하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행동과 말들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경에게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소경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신과 영혼의 구원자라는 것을 동시에 믿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육신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수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나아가 영혼을 구해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대로 일어납니다. 치유를 받은 장님은 그 자리에 머물러 제 목숨 살릴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군중은 그 모습을 보고 감명 받아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그는 일개 소경이고 걸인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전하는 복음 선포자로 변한 것입니다. 그는 전에는 쓸모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권능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많이 하십니다. 하느님은 드높은 것에서 당신의 힘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보잘것 없는 존재에게서 당신의 힘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무엇을 원할까요? 정말 원하는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시편 1,1-2) 우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어린 시절에 즐기던 것을 내려놓게 마련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누방울 놀이를 하거나 흙장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는 이미 자신들의 놀이거리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성숙해감에 따라서 변하는 것도 존재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미성숙할 때에는 오직 ‘쾌락’에 관련된 것, ‘자기자신’에 관련된 것만을 즐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적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는 것,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즐기게 되고, 또 우리의 영적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는 것, 인내하는 것을 즐기게 됩니다. 시편에서 노래하는 저 사람, 즉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무엇을 찾고 있을까요? 우리는 보다 드높은 것을 향해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 줄 알아야 합니다. 여전히 세상에 시선을 두고 그러한 것들을 부러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성장하고 일어나 나가야 합니다. 나에게만 집중된 시선을 들어높이고 하느님과 그분의 자녀들과 연관된 것들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이웃을 바라보고 그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가르침, 즉 용서와 사랑을 듣고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사 전례 총지침 중 5장 성찬례를 거행하는 성당의 설비와 장식

제 5 장 성찬례를 거행하는 성당의 설비와 장식  I. 일반 원칙  288. 성찬례를거행하기위하여하느님백성은보통으로성당에모인다 . 그러나성당이없거나작을경우에는이토록큰신비를거행하는데손색이없는적당한곳에모일수있다 . 성당이나 이러한 장소는 거룩한 행위를 거행하고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 알맞아야 한다 . 거룩한 건물이나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필요한 물건은 참으로 품위가 있고 아 름다워야 하고 천상 현실에 대한 표지와 상징이 되어야 한다 .  289. 그러므로 교회는 예술이 주는 고귀한 도움을 항상 찾고 있으며 모든 민족과 지역의 고유한 예술적 가치들을 인정한다 . 그뿐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술품과 예술 가치 를 지닌 보화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필요하다면 새로운 요구에 적응하고 각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예술도 장려한다 . 그러므로 예술가들의 모임을 구성하고 성당에 설치할 예술품을 선정할 때에는 믿음과 신심을 굳게 하고 본래의 뜻과 목적과 조화를 이루는 참된 예술 가치를 추구하여야 한다 .  290. 모든 성당은 봉헌하거나 적어도 축복해야 한다 . 주교좌 성당과 모든 본당의 성당은 성대한 예식으로 봉헌해야 한다 . 291. 성당을 새로 짓거나 고치거나 구조를 바꿀 때에는 교구 전례위원회와 성 미술위원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 교구장 주교는 성당 건축 규정을 정하거나 새 성당 설계를 인준하거  나기타건축에관한주요사항을심의할때에도이위원회의의견을듣고도움을받아야한다 . 292. 성당의 장식은 겉보기에 화려하기보다는 단순하면서도 고상해야 한다 . 장식에 관련된 물건을 고를 때에도 그 재료의 품질에 유의하면서 , 신자들의 교육에 유익하고 거룩한 장소  의 존엄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 293. 성당과그부속건물에현대의요구에맞는설비를갖추려면거룩한전례거행에직접관계되는요소만생각할것이아니라 , 신자들이모임을가질때의편의도도모하고 , 많은  백성이 모이는 곳에 흔히 갖추는 시설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