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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세상에 자기 혼자만 완벽하게 거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행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크든 작든 오류가 있고 미흡함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들이 서로 부딪히게 되는 것이지요. 차량에는 ‘완충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로의 왠만한 요철은 크게 미동이 느껴지지 않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서도 ‘완충장치’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작은 미동은 크게 느껴지지 않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완충장치가 훌륭하게 갖추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아주 초라한 모양새를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성마른 사람’, 혹은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고 부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완충장치가 잘 갖추어져 있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스프링도 때가 되면 닳게 마련이고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되면 ‘피로도’가 증가하게 되고 결국 관계가 파괴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런 일을 미연에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신앙’이라는 특별한 장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지상적인 차원에서 천상적인 차원으로 들어높여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우리에게 참된 지혜를 전해줍니다. 그 지혜는 우리에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우리를 참된 방향으로 이끌어주지요. 물론 보다 구체적인 사안들 안에서 때로 우리는 움직여야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오류를 조용히 다가서서 충고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가 닿기 전에 우리는 이미 ‘험담’이라는 것을 통해서 일을 더욱 키우게 마련이지요. 문제가 커져서 장상의 귀에 들어가게 될 때는 사실 많은 오류들이 지뢰처럼 터지고 난 뒤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좀 더 겸손할 줄 알았더라면, 그리고 하느님에게

여인들의 거룩한 수다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루카 2,38) 여성들은 그 특유의 감수성과 섬세함으로 주변에 수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역사는 남자에 의해 이룩된 듯이 보이지만 그 곁에는 언제나 여성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활동이 있었습니다. 남자가 힘들게 사업을 마치고 들어오면 그 곁에는 아내가 다가와서 이든 저든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지요. 그런 아내에게 힘을 얻어서 더 굳건하게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또 정반대로 그런 아내가 싫어서 일부러 밖으로 나다니면서 자기 개발을 하는 남성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은 모이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습니다. 그것을 ‘수다’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말이 많은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의 내용과 의도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여성들의 수다는 얼마든지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바로 성경의 ‘한나’와 같은 여성들이 대표격입니다. 이 여성은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고 그 거룩함에 감동하여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여느 복음 사도가 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일을 했으니 어쩌면 그 가치는 더욱 드높은지도 모르지요. 우리 본당의 자매들의 수다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남편에 대한 비난이나 이웃에 대한 험담이 아니라 진정으로 빛을 찾아나가는 여정에 대한 나눔이었으면 좋겠고 그 빛을 찾아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정보들을 주고 받는 거룩한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들은 훗날 셈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이 현세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영원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헌데 우리가 한 말마디들이 모두 쓰잘데기 없는 것이고 나아가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었다면 훗날 돌아오게 될 그 결과물은 과연 무엇이 될까요? 반대로 우리가

글을 쓰는 까닭

- 그분 이름으로 죄의 용서 - 그분을 아는 여러분 - 악한 자를 이긴 젊은이들 - 아버지를 아는 자녀들 - 강하고 하느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악한 자를 이김 이상의 내용은 요한 사도가 이 글을 읽게 될 무작위의 사람들이 위의 내용을 상기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도 이 글을 읽으면서 위의 내용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은 이들입니다. 처음부터 의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죄인이었고 죄 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곧잘 누군가에 대해서 증오를 품고 시기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보다 다투고 싸우기가 일쑤였지요. 우리는 분명히 죄 중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런 어두움에서 빛으로 다가오게 된 이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외아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그분의 구원을 위한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우리가 받아들인 그 구원의 빛으로 악한 자를 이기게 된 것입니다. 그 악한 자는 이미 우리에게서 힘을 상실하고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긴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올바로 알게 됩니다. 가장 전지전능하신 그 분, 그리고 그 분 안에 숨어 있는 ‘사랑의 뜻’을 올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며 악한 자를 이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신학의 줄기입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이런 가르침 안에 머무르는 우리들이 행여라도 다른 마음에 빠지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부탁을 더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

하느님과의 친교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1요한 1,6) 빛이신 분과 친교를 나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빛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적인 빛을 의미하며 우리가 알기 쉬운 표현으로는 양심의 맑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과 살아가는 이는 영혼이 맑아야 하며 그 안에 어두움이 끼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어떤 오류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곧잘 과거의 죄책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죄책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의 과거의 어두움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합당하게 준비한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앞에 나의 과거의 어두움을 뉘우치고 고백하고 치유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와의 어두운 인연을 끊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현재를 분별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이로부터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동안 다시 쓰러질 것이고 또다른 오류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 하느님에게 되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이 의지적인 노력이 바로 우리를 점차적으로 완성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는 죄책에서 헤어날 방법이 없으며, 또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현재를 선으로 메꿀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엇나간 마음은 언제나 ‘이기적’인 수단과 방법을 찾으려고 하고 이는 우리를 선으로 이끌기는 커녕 더한 악으로 언제나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은총도 선도 모두 하느님의

용기를 잃지 않기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베드로는 그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예수님을 질책하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칭하십니다. 사제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사제는 사람들의 의지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하늘나라로 가는 여정, 즉 우리 주님께서 먼저 가신 ‘십자가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정상적인 반응은 거부입니다. 그 누구든지 십자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사제는 다시 용기를 불러 일으키고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그럴 만한 힘이 없는데 다른 이들을 살리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모한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올바로 서 있어야 하고 그 힘을 바로 기도를 통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지쳐 쓰러질 것이고 뒤처질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실망을 하게 되면 이 길을 걷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누군가는 깃대를 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의 선봉장은 당연히 직무적으로 그 일을 맡고 있는 사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실패 사례들을 언급할 것이고, 해 보아도 안되더라는 말을 반복해서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사제는 할 수 있다고, 해 보면 된다고 답을 해 주어야 합니다. 부족한 이들을 격려하는 것과 그들에게 온통 매여서 정작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야 합니다. 물론 부족하고 나약하고 때로는 죄까지 지어서 힘들어하는 양들을 데려오고 보살펴야 하지만 절대로 우리의 방향성을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받는 미움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공자가 한 이야기 중에 다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했다. “그것만으로 좋지 않다.” “마을 사람이 모두 싫어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했다. “그것도 좋지 않다. 마을의 착한 사람이 좋아하고 악한 사람이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646회. 331논어, 자로24) 헌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술 더 떠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덕을 벗어난 초자연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인간은 ‘생존’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헌데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는 죽을 작정을 하고 나서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그 첫 테이프를 끊으신 셈이지요. 예루살렘에 가면 그분의 적대자들이 득실거리는데도 예수님은 그리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하면 스스로 내어줄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성애에 사로잡힌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바친 대상은 살릴 만한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사랑의 크기는 우리가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큰 사랑의 근원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지상에서는 함부로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이라는 선물이었지요. 그 영원에 사로잡힌 이들이 순교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머나먼 선교지에서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 학대와 폭정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죽는 이들이

상관있는 사람들

우리는 처음에는 서로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상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알아나갈 때에 우리는 점점 서로 상관있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이가 그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타인에게 먼저 다가서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다가선다면 뭔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그에게 있을 법하기 때문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필요한 것이 채워지고 나면 다시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곤 하지요. 우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이런 저런 능력을 개발합니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찾는 것은 ‘그런 능력을 지닌’ 나이지 나 자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다른 데에서 발견하면 언제라도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다른 이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전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만큼은 다른 이가 함부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좋은 옷도 신발도, 혹은 좋은 교육도 찾다보면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아이를 보살펴 온 엄마의 무한한 사랑의 시간만큼은 그 아이에게 있어서는 다른 그 어떤 존재도 대신 메꿔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복음화를 위한 한 사제의 꾸준한 노력, 진정으로 이웃을 하느님에게 초대하고 싶어서 하는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것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간절히 노력할 때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상관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바로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이지요.

힘든 용서와 불가능한 용서의 차이

용서하기 힘들다 - 용서를 하려고는 하나 내면에 쌓인 앙금이 많아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용서하지 않겠다 - 그 어떤 가능성 이전에 이미 나의 의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비록 외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은 유사하겠지만 이 둘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용서는 사랑이 완성되어 갈 때에 드러나는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외적으로 뚜렷이 존재하는 어떤 완성품이 아니라 우리가 서서히 이루어 나가는 우리의 내적 의지의 결과물이지요. 그래서 용서라는 것은 당연히 서서히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축적되어 가는 만큼 용서도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처음부터 용서를 시원하게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자신을 깎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배워 알게 되고, 그분의 외아드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용서라는 것을 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큰 용서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용서도 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용서는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서서히 수많은 인고의 노력을 통해서 나의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힘든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용서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훗날 하느님에게 용서를 갈구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헌데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선을 쏟아 넣어 주시려고 해도 그 통로를 우리 스스로가 막아 버린다면 우리 안에서부터 많은 것들이 무너지게 마련인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인간이 원하는 것

우리는 원하는 게 많고 다양합니다. 그래서 그 원하는 것들이 서로 충돌하기까지 하고 싸움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단순하고 명료하며 다른 군더더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대해서 배우게 되어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당신이 바라시는 전부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기는 하지만 그와 동등한 수준에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를 바랍니다. 즉, 돈을 많이 벌고 사람들 사이에서 칭찬을 듣고 다른 이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기를 원하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서는 하느님의 소중한 원의와 동등한 수준에 놓아 버리는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욕구는 서로 충돌합니다. 그리고 자꾸만 시끄러워지지요. 애써 법이라는 걸 만들어 적용시키고 조절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애당초 사라지지 않는 욕구를 잠재울 방법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시끄러움은 잠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가중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참된 평화에 이르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원하는 것들 가운데 무절제하고 어지러움을 야기시키는 것들을 잠재울 필요가 있겠지요. 하지만 이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장 거룩해 보이는 행위 안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이를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참된 겸손과 솔직함, 그리고 진리에 대한 사랑이 존재해야 합니다. 거짓은 곧잘 우리를 속이며 아주 작은 거짓에서부터 점점 발달해서 크나큰 어두움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우리는 솔직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

똑같은 대상이 다가오더라도 저마다 기다리는 것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들이 있는가 하면 주인이 던져주는 소세지를 기다리는 개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들은 다른 이들, 도둑이나 강도가 오면 으르렁대고 짖겠지만 소세지를 기다리던 개들은 도둑이나 강도가 소세지만 던져 주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제가 좋아하는 하느님만 기다리다가 허송세월을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하느님’은 결국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나의 욕구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성모님은 서로를 마주하면서 기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면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이룬 결과물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을 간절히 바라던 그분들은 서로를 참된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었지요. 우리는 과연 어떠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며 무엇을 반기고 있을까요? 우리는 나의 심심함을 메꿔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헛된 욕구를 채워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진정으로 영원을 선물하시는 하느님을, 그분의 아들을,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의 삶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요? 대림의 시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곧 다가오시는 아기예수님을 잘 알아보려면 우리가 진정으로 기다리는 것의 실체를 올바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별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 (1테살 5,21-22) 좋은 것과 악한 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외모가 아무리 준수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좋은 것이 될 수 없고 반대로 외모가 초라하다고 그것이 악한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 근본 방향성에서 의도하는 것과 목적하는 바가 있으며 바로 그 근본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따라서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악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그것을 올바로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분별하는 법을 올바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악한 것을 좋은 것인 줄 알고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크게 후회를 하기도 하고 반대로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보지 못하고 내치고 있다가 나중에 크게 후회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악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가난을  피하려고 하고 돈을 벌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그런 이들이 주변에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그 모든 일련의 행동들 안에서 사람들은 가난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잊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하셨습니다. 태중에 하느님의 아들을 모시고서도 그 부부를 받아들이는 변변한 여관 하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이라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장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공생활 중에 끊임없이 돌아 다니시면서 머리 누일 곳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바로 그 가난에서 하느님을 향한 참된 신앙이 자라나게 됩니다. 기댈 곳이 없는 형편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떠올리게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올바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유함은 어떨까요? 사람들은 돈만 많으면 뭐든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돈이 많은 사람들의 삶의 행태를 올바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의인의 승리 악인의 패배

영화는 짜여진 각본이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의인이 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그렇게 만들어지는 이유는 현실이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는 의인이 핍박을 당하고 악인들이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악은 영리합니다. 악은 단 한 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늘 깨어 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가운데 이익이 되는 것을 선별하고 손해가 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모인 본당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성당에 오는 것은 이미 지니고 있는 신앙을 향유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없는 신앙을 찾아 얻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고, 또 심지어는 신앙의 그 어떤 연계 없이도 얼마든지 성당에 나올 수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성당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우리는 ‘악’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악은 언제나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을 보려는 움직임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신앙’을 진정으로 수용하게 될 때에 우리는 십자가를 끌어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우리의 시선이 바뀌게 되고, 따라서 이미 알고 분별하고 있지만 때로는 참아 견디는 시간이 많이 늘어나게 됩니다. 즉, 이전에는 몰라서 당했지만 이제는 알면서 그것을 참아 견디는 것이지요. 그럼 결국 바뀌는 것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몰라서 당하는 사람은 억울해 합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인내하는 사람은 최종적인 결과물을 알고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이 지상의 삶에서 영화로 대리만족하는 그 일이 바로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그리고 악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다만 하느님은 악인이 하나라도 더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분이시고 또 그들의 그 어리석음으로 의인의 내면에 거룩한 덕이 마련되기를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일꾼이 되기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38) 여기서 잠깐, 일꾼들은 누구를 의미할까요? 천사들, 주교님들, 사제들? 일꾼은 어떤 교계적 직무가 아니라 바로 일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위의 구절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청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한 바람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 스스로 일꾼이 되자는 결심을 세우는 것이지요. 우리는 곧잘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하느님은 기적을 이루시지만 그 기적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기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추수할 밭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해 내어야 합니다. 영혼들을 구하고 그 영혼들을 하느님의 품에 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우리가 도와 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다 하시도록 떼를 쓰거나 우리는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도성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이사 26,1-2) 의로운 이들을 위한 성벽과 보루, 그것은 거룩함으로 이루어진 벽이라 세상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을 뿐더러 어둠에 물든 이들은 그곳을 올라오기도 버거워하는 곳입니다. 담배에 찌든 사람에게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은 주리가 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많은 시간을 금연해야 할 테니까요. 이처럼 세상의 논리에 찌들어 있는 이들, 그것을 나날이 실천하여 거기에 중독되어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이 마련하신 거룩함의 진리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고 다가서기 괴로운 일처럼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에게는 반대입니다. 그들에게는 도리어 그 성벽과 보루가 문을 활짝 여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이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느님의 거룩함의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겠지요. 이 일은 세상 안에서도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또 훗날 ‘완성될’ 일입니다. 이 일이 완성되고 나면 그야말로 두 부류 사이에는 거대한 구렁이 생겨나게 되어서 서로 건너갈 수도 없게 되지요. 하지만 이 세상 안에서는 여전히 서로를 마주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거룩한 이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생애 동안에 모든 것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너도나도 일종의 ‘조급증’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한한 시선으로는 이 일이 빨리 완결되어야 할 것 같은데 좀처럼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악인들이 빨리 멸망하고 의인들이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세상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헛소리로 들릴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귀 기울이던 것마저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루카 10,22) 이 표현을 들으면 마치 무언가 중요하고 좋은 것을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소외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아버지라는 분이 좋은 분 같은데 그걸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알음알음으로 아는 이들끼리만 나누는 모습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아버지는 모든 이에게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드러내는 분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니까요. 간만에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아서 음식을 먹는데 국에 머리카락이 하나 있었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친구와의 만남의 순간이 중요하고 또 머리카락 하나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그저 젓가락으로 그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다시 친구와의 대화에 집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머리카락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서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의 청결함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음식에 머리카락을 빠뜨릴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기분나쁜 것인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친구와의 친교를 망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서 소중한 것이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23-24) 수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은 들을 수 없던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듣고 있습니다. 즉, 수많은 예언자들과 임금들에게는 ‘법규정

게임과 삶

게임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 생리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수많은 노력을 쏟아가면서 레벨을 상당히 올리고 나면 당연히 애착이 가게 되지요. 하지만 그러다가 그 ‘틀’에서 벗어나서 게임을 떠나 버리면 그 모든 것은 무너져 내리게 되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은 ‘게임’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생은 영원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생에서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정말 게임처럼 허망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반대로 가장 소중한 것을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잃어버리고 말게 될 요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으는 재산이나 세상 안에서의 위치, 사람들의 일시적인 관심과 같은 것들이지요. 이러한 것들은 지나고 나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투자한 것의 최종 결과물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 끝은 허무입니다. 반면 영원의 길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일치하려고 노력하며 온유와 친절과 절제와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내면에 갖추려고 노력한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영원’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아무리 강조한다고 한들 사람의 마음이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30년간 들여온 습관이 하루 아침에 바뀌기는 힘든 것처럼 세상의 논리에 찌들어온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이며 행동하는 양식이 순식간에 바뀔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방탕, 만취, 일상의 근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날은 반드시 다가올 날이며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날입니다. 그 날에는 우리가 지상에서 신경써 오던 모든 일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날은 곧 ‘육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하기도 하고 또 엉뚱한 것에 신경을 쓰느라 그 날을 잊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내용들이 바로 ‘방탕, 만취, 일상의 근심’과 같은 것들입니다. [방탕] 우리가 길을 엇나가서 나쁜 일을 이루어 내는 데에 마음을 쓰고 있다면 우리는 방탕한 자들이 됩니다. 방탕이라고 해서 꼭 집을 나가거나 극도로 사악한 일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때에 우리는 방탕의 길을 걷게 되는 셈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 멀어져 그를 증오하고 용서하라는 가르침에서 멀어져 그에게 저주를 퍼부을 때에 우리는 이미 하느님에게서 상당히 멀어진 이들이 되는 것이지요. [만취] 만취는 일상의 쾌락에 중독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술이나 담배, 마약 같은 것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내면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참된 가르침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잡다한 쾌락에 사로잡혀 갈 때에 우리는 만취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쇼핑, 드라마, 세속적인 수다, 지나친 취미활동 그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를 만취 상태로 이끄는 계기가 되는 것들입니다. [일상의 근심] 일상의 근심은 세상의 걱정으로 어두워지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충실하고 매 순간을 충실하다면 걱정할 것들이 없는 것들이 우리의 불성실과 게으름으로 일상의 근심거리가 되는 것들도 있고, 또 지나간 과거의 죄책이나 다가올 미래의 불안으로 일상의 근심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과거는 성사를 통해서 끊어 버리고, 미래는 현재를 충실히 살면서 준비해 나가

그리스도인과 성격 유형 검사

인간의 외모가 서로 다르듯이 인간의 내면도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외모에 대해서 우리가 서양 사람인지 동양 사람인지, 피부가 검은 사람인지 흰 사람인지를 분별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도 비슷한 유형을 나누어 볼 수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등장하는 여러가지 것들이 인간의 성격 유형을 검사하는 여러 지표들입니다.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알아두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일이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더 수월하거나 혹은 더 힘들거나 하는 것을 나의 내면을 미리 파악함으로써 적절히 조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때로는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자신의 성격 유형으로 인해서 바로 ‘자유의지의 영역’이 뒤덮여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성격이 원래 강해서 그런 것이니 내가 타인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것은 내가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엄연히 존재하고, 이는 심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사랑과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격 유형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 성격이 내성적이라고 해서 늘 방 안에만 있으면서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 성격이 외향적이라고 해서 늘 그것을 좋게만 쓰라는 법도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뚜렷이 드러나는 성격 유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성격을 주관하는 내면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것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격 유형 검사로 인해서 사람들은 이를 그릇되이 이해하는 오류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내성적인 사람이 저지르는 악은 분명한 악이고 반대로 내성적인 사람이 이루는 선은 분명한 선입니다. 그것은 성격과는 상관없이 나의 의지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격 유형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뉘우치고 돌

의심

멀쩡히 잘 살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남편이 다른 여자와 길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아내의 친구가 보게 되었고 그리고 그 사실을 아내에게 전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객관적인 정보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최근에 알게 된 어느 유명인의 바람난 기사거리를 들추어가며 엄청난 의심을 더해서 그 정보를 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심’이 끼어들기 시작한 부부는 머지 않아서 관계가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의심’이라는 것이 이루어내는 파괴적인 결과입니다. 물론 그 의심은 단순히 그 자신만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수다스러움’과 ‘허영심’, 그리고 ‘과장’과 같은 것들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누군가가 받아들이게 된 하나의 사실과 정보로 인해서 그것이 과장되게 되고 말은 전해지게 되어 결국 파괴적인 결과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 결과물이 최종적으로 드러나기 직전까지는 아무도 거기까지 가 닿게 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 든 예는 극단적인 경우이고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이런 일을 자주 겪게 됩니다. 어제 웃으면서 만난 친구가 오늘은 어째 달라 보이는 이유는 그 사이에 내가 듣게 된 어떤 하나의 소식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심을 부추기고 상대에 대한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독이 든 말의 씨앗을 먹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침묵’을 훈련할 줄 알아야 하고 분별력을 기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머무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 인간적인 위로를 찾아 다니는 순간부터 우리는 원하는 인간적 위로와 더불어 우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끄는 어둠을 불러 들이게 될 것입니다.

신앙적인 감동

신앙적인 감동을 느끼는 것과 감정적인 흥분을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입니다. 신앙적인 감동은 결국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에게 대해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거룩한 내면의 변화라고 한다면 감정적인 흥분은 우리의 감정이 자극을 받을 때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심리적 반응이기 때문이지요. 적지 않은 신심 프로그램에서 노리는 것은 많은 경우에 신앙적인 감동이기보다는 ‘감정적인 흥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프로그램들은 감추어져야 하고 외부에 발설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에 감정적인 흥분의 정도가 감쇄되기 때문이지요. 이미 다 아는 것에는 흥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신심 프로그램들이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신앙적인 감동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다가감으로써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적인 감동은 비밀스러움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는 행위이고 늘 하는 행위이더라도 그 안에서 나의 내면의 변화에 따라 그 감동이 느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사’입니다. 우리가 가장 쉽고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뭔가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됨으로써 감정적 흥분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미사는 매일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체험하게 된 이에게 미사는 날마다 신앙적인 감동을 전해줍니다. 우리는 감정적인 흥분을 찾아 헤매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신앙적인 감동을 찾아야 합니다. 

고해는 누구에게 보아야 할까요?

신자 측에서는 이런 사제를 찾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일단 내 목소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제, 그리고 한 번 만나고 나면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제, 그리고 무슨 죄든지 그냥 다 좋으니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 좋은 말 몇마디만 해 주는 사제… 하지만 이런 사제를 찾아다니는 신자의 그 마음 자체는 사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비유를 하자면 병에 걸렸는데 가장 불성실한 의사를 찾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번 한 번 만나고 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임시로 파견된 의사라서 환부를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고 그저 다 괜찮다고 하면서 아무 약이나 처방해 주는 의사와 똑같은 셈이지요. 그렇게 상처를 보고 나면 상처가 낫는 것이 아니라 도로 상처가 썩어들어갑니다. 하느님 측에서는 이런 고해를 주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좋은 의사가 하는 일 그대로입니다. 그는 환자가 아파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노력은 하겠지만 의사의 본질적 사명은 단순히 고통을 줄이는 게 아니라 이 고통을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아픔을 무릅쓰고서라도 원인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합니다. 필요하다면 상처를 더 벌려 보더라도 그 원인을 파악해 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상처에 가장 적합한 치료방법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제는 고해자와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라 고해자를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해는 한 사제에게 ‘지속적’으로 보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그리고 사제로서 올바른 분별을 위해서 때로는 필요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해 당사자로서는 어떻게든 빨리 죄를 내던지고 도망가 버리고 싶겠지만 올바른 고해 사제는 고해자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분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고해자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합당한 도움이 되는 조언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나게 되는 적지 않은 신자들은 아직 신앙적 유아기 상태를

읽기 싫은 성경

성경의 신학적 연구 내용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절 하나 단어 하나로 논문을 써 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런 모든 연구를 섭렵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세상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성경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읽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읽고 그 안에 든 것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읽어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성경에 접근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요? 이는 성경이 어떻게 쓰여졌는가를 올바로 아는데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은 과학적 진리를 서술한 과학 참고 도서도 아니요, 역사적 사실을 나열한 역사책도 아니며 사람들을 그저 감동시키기 위한 문학책도 아닙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성경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러한 방향에’만’ 빠져들기 시작하면 성경은 그릇되이 이해되기 십상입니다.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통해 저술된 것이며 따라서 성령을 통해서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역시 동시에 가장 어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성령을 통해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령은 거룩한 영이고 하느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하고 또 그렇게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성경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영이고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영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자신 안에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올바로 살아 나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탐욕이 가득한 사람이 ‘청빈’이 주제인 책을 읽으려고 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 중의 하나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즉, 몇 장 읽다가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내용들에 가슴이 시려서 책을 덮어 버리던가 아니면 그 책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

지금의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물론 찾고 찾고 또 찾으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거의 모든 방법들은 이미 세상에서 먼저 찾아서 다 실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과거 교회 내에 학식이 있는 이들이 세상보다 많았을 때에 미처 사회가 다 하지 못하는 일을 교회가 도맡아 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짓고 병원도 지은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날 세상에 속한 이들이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욱 사리에 밝은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교회의 일처리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정도지요. 그래서 중요한 건 ‘방법’이 아닙니다. 방법은 사실 저마다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서 무엇이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전하려고 하는 것, 과연 무엇을 진정으로 전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여정이 2000년을 넘게 걸어오면서 가지들은 많아졌는데 정작 그 가지들에 수액을 공급해야 하는 줄기가 제대로 보살펴지지 않는 셈입니다. 수많은 방법론들과 신학들이 존재하는데 그 안에 진정한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방향전환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우리가 가장 최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신앙의 본질, 즉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여기에 집중하지 않은 채로 다른 모든 것을 돌보는 교회는 결국 제대로 힘을 얻지 못해 지탱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본당의 수많은 활동 단체들과 그 수많은 사목 회의들 안에서 우리는 ‘본질’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안에 머물러 계시는지요? 아니면 그저 드러내기 위한 과시용 활동들이 그 자리를 가득 메우고 결국 거룩한 성전의 제단 위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흉측한 것, 즉 이기심과 위선과 가식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살펴 보아야 합니다.

기쁨의 종류

우리의 삶에는 여러가지 기쁨이 존재합니다. 맛난 음식을 먹는 기쁨부터 시작해서 하느님을 마주하는 기쁨까지 다양한 종류와 ‘수준’이 존재하지요.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이런 기쁨들을 찾아갑니다. 가장 기초적이고 강렬한 것은 바로 우리 오감으로 체험되는 기쁨들입니다. 이를 쾌락이라고 부르지요. 어린 아이가 모빌을 보면서 신기해하는 것, 까꿍을 하는 엄마 얼굴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또 단 맛을 즐기게 되는 것, 부드러운 인형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어린 시절의 강렬한 기쁨의 체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다음으로는 감정적인 기쁨과 이성적인 기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 따스한 체험이 있을 때에 아이는 기뻐합니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기분을 알아채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의 웃음에 자연스럽게 물들어가고 또 그와 반대로 주변 사람들의 어두운 감정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요. 그리고 무언가를 새로이 배우는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새로운 동식물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탐구해 나가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어 ’관계’의 기쁨입니다. 부모와 맺는 관계, 또 친구와 맺어가는 우정의 관계 안에서 기쁨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행동을 하기도 하지요. 적장 본인의 성취감보다는 다른 이들의 얼굴에 미소를 보기 위해서 무언가에 열중하는 아이도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관계의 기쁨 가운데 최고의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지요.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 속에서 체험하는 가장 내밀하면서도 가장 강렬한 기쁨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기쁨들은 우리의 인생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어느 한 기쁨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드러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서 성당의 조각물들에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고, 성당의

뜻을 수용하기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야 늘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이익’입니다.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따져보고 단 0.1퍼센트라도 이득이 존재할 때에는 움직이는 것이지요. 물론 개개인의 욕심에 따라서 그 비율에서 차이가 나는만큼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이냐 아니냐를 바로 세례의 유무로 따지고 드는 것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여부는 그의 외적 조건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수도 없이 반복해서 가르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날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대표적인 이야기이지요. 우리는 그 내면의 방향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바로 이 세상의 효율성과 이득을 벗어난 범주를 살아가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뜻’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비록 지금은 손해를 보지만 하늘에 계신 분이 참되고 올바르시니 언젠가는 당신의 의로움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신뢰하는 이가 바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 순종의 최고봉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다투고 싸웁니다. 저마다의 이득이 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육이 있다고 사제가 보내더라도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당장 거절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겉으로야 온갖 이유를 들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결국 마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좋은 직분을 합당한 사람에게 수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다른 수만가지 이유를 대겠지만 결국 자신이 아직 하기 싫다는 것이 가장 으뜸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자신에게 별로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흐름이지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별을 바탕으로 직무를 수락하고 거부하는 경우도 있을테지요. 하지만 무언가를 못하겠다고 잡아빼

연중31주 홀수해 평일강론 모음

2017 년 11 월 5 일 주일 [( 녹 ) 연중 제 31 주일 ]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 자신을 모시는 동안은 자기 자신이 가장 드러나 보이고 돋보여야 합니다 . 그래서 그들은 자기자신을 최고의 가치로 만들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합니다 . 바로 거기에서 파생되는 것이 교만이고 허영입니다 .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나타냅니다 . “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 ( 마태 23,5-7) 2000 년 전의 말씀이지만 사실 오늘날 사람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여전히 우리 교회 안에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드높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 특히나 한국은 등급을 매기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가장 먼저 사람을 만나면 묻는 것이 그의 ‘ 나이 ’ 입니다 . 그래서 나이가 차이가 많이 나면 자동적으로 위계질서가 생기고 등급의 차이가 생겨나는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나이가 들면 배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 저는 반대의 경우를 적잖이 보았습니다 . 나이만 들었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허황한 생각으로 가득한 어르신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 그들은 스스로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그 자신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실체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 자신이 높아지려는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