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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17의 게시물 표시

올바른 제사의 개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이다. (집회 35,1-5) 여전히 우리는 ‘제사’의 개념을 물리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는 몇 개를 얹어야 하고 십자가의 위치는 어디여야 하며 십자가는 사제를 보아야 하는가 신자를 보아야 하는가 하는 식의 요소들이지요.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꼼꼼하게 챙기려고 하고 그것이 어긋나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은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물을 제 자리에 두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그러한 것들은 ‘돈이 넉넉한 이들’에게는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은 그러한 것들을 챙길 여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기도상을 마련할 여유자금이나 공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집회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핵심’ 가르침을 전합니다. 정말 너무나 알짜배기라서 여러분들이 많이 많이 알아 두었으면 하는 가르침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내적인 가치들로 드리는 진정한 제사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구약이 마치 옛 것인 양, 이제는 쓸모없는 가르침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제물을 많이 바치고 있으니 바로 ‘미사 예물’이나 ‘봉헌금’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제물은 그러한 외적 자산을 내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서 ‘율법을 지킨다’는 의미는 올바로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법적 규정을 빠짐없이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율법의 본질,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

버린다는 의미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마르 10,29-30) 복음에서 말하는 버린다는 의미는 무시한다거나 내팽개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일 뿐입니다. 진정한 버림은 내면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음식을 쓰레기통에 집어 넣는다고 해서 음식을 향한 나의 애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버림은 그것을 향한 나의 내적인 집착을 끊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것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집착하는 내 마음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형제에게 집착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부모님을 섬기는 것과 부모님에게 집착하는 것은 다릅니다. 자녀나 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지니고 살겠지만 그것에 집착하는 것과 그것을 올바른 의미로 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무언가에서 마음을 떼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내적으로 선호하는 다른 무언가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바람난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여자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적으로 더욱 선호하는 무언가를 얻게 되면 그 이전의 것에서 마음을 떼어놓을 수 있게 됩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가 마땅히 돌보아야 할 것들을 내던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 위해서 그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엉뚱한 가치들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들을 내던지곤 합니다. 유산을 좀 더 얻어내기 위해서 부모를 향한 효심을 내던지는 경우가 대표적인 것이지요. 그 밖에도 우리는 세속적인 욕구 때문에

교적

교중 미사 중에 열과 성을 다해 강론을 하고 미사를 마치자마자 한 명이라도 놓칠까 싶어서 입구에 나와 신자분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헌데 한 자매님이 옆의 나이 지긋하신 남편분을 가리키며 한탄조로 나에게 이야기를 하신다. "이 사람이 내가 교적을 옮기자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말을 안들어요." 별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우리 어르신이 왜 그러실까요?" "지난 번 있는 본당에 40년째 교적을 두었거든요. 그래서 미련을 못버리나봐요." 그래서 웃으면서 그냥 두라고 했다. 어린 아이의 사탕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자기가 원치 않는데 사탕을 내려 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깟 교적이 뭐라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 판에 교적 하나쯤 원래 다니던 곳에 두게 하는 게 무슨 대수랴. 사람은 나이만 들었지 아직도 미숙한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이 약한 이들이 되어 주라고 했다. 교적이라는 것은 다만 신자분들의 현황을 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분 앞에는 주교님의 명을 받들어 사수동에 파견된 본당의 사목구 주임으로서 영혼을 이끌어야 할 영적인 아버지인 주임 사제가 있다. 그분은 신앙인으로서 인간적인 미련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에 '순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한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 셈이다. 그분은 여전히 이전 본당에 교적을 두는 것이 자신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인간적 위로'를 가져다주는 셈이다. 예전 본당에 교적을 두는 것이 그분에게 마음의 위안이 된다면 그리 하게 두는 수 밖에 없다. 적어도 그분은 성당은 꾸준히 나오고 내가 드리는 미사에는 참례하고 있으니 천천히 배워 나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깨닫게 되리라 생각한다. 자신이 집착하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세상이 감추려고 하는 진리

가진 자들이 계속 가진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들이 위로 상승하면 안됩니다. 가진 자들의 특권이 유지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평등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차별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돋보이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들은 차별을 지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별에 적절한 법적 용어를 붙여 그것을 정당화하겠지요. 이 사회는 기회를 잡은 부자들을 전면에 부각 시킵니다. 즉 ‘가난한 이도 언제든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좋은 기회가 오지 않는 성실하고 책임있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왜 모든 이가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노력을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그 노력이 엄청난 보수로 주어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노력이 쥐꼬리만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이 시점에서 투쟁을 내세우곤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싸워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식의 투쟁은 그저 ‘뒤집기’를 할 뿐입니다. 즉 아래에 있던 세력이 위로 올라가고 반대로 위에 있던 세력이 아래로 내려갈 뿐이지요. 물론 그마저도 일어나지 않으니 아래에 있던 대표 세력 몇몇이 위로 올라가고 말고 상황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로 유지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외적인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남들을 짓밟고 싶어하는 마음, 그렇게 심하게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남들 위로 올라서고 싶은 마음, 즉 남들보다 내가 더 특별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재주와 특성이 있고 그로 인해서 이미 특별합니다. 그 특별함은 하느님께서 잘 알아 주시는 것이지요. 헌데 우리는 우리의 특별함으로 인해서 다른 이들의 소중함을 무시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즉 다른 이들도 그들 나름대로 소중하지만 저마다가 가진 특별함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무언가를 더욱 부각시켜 다른 이들이 그에 범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두 가지 기억

신학생 시절 실제로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문득 떠올랐다. 하나는 염색사건이다. 지금까지 대충 기억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문득 기억이 분명해졌다. 나는 대구교구의 역사 안에서 신학생때 처음으로 머리를 염색한 신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발단은 윤리신학 시간이었다. 당시의 윤리신학 교수님은 지금의 대구 가톨릭 대학교 총장이신 김정우 요한 신부님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들은 확인해 봐도 좋다. 나는 평소부터 당시(2000년대 초반) 젊은이들이 머리를 진하게 염색하고 물들이고 다니는 것이 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하지만 당연히 ‘신학생이 그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나에게 떠올랐고 나는 막연히 그 욕구를 참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 윤리신학을 배우고 있었고 논문도 쓰고 있던 나로서는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그 어떤 윤리신학적 하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윤리신학 시간에 용기를 내어서 신부님에게 여쭈었다. “신부님, 신학생이 염색을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와? 염색 하고 싶냐?” “네,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왜 그러고 싶지?” “신학생은 염색하면 안된다는 고정관념을 깨보고 싶습니다.” “그런 취지라면 내가 응원해주지.” 그리고 나는 그 날로 미장원에 가서 염색을 하고 왔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슨 색깔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일단은 큰 이슈를 불러 일으키진 않기 위해서 짙은 밤색으로 염색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머리카락은 짙은 밤색이 되었다. 염색약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서 신학교 안으로 들어왔고 볼 일을 보러(큰 것) 공동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동기들이 그 안에 들어와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니 진우 염색한 거 봤나?” “응” “가 와카노? 신학교 나갈라 카나?” 동기 신학생들 뿐만 아니라 아마 수많은 신학생들이 적잖이 놀랬으리

버림받은 느낌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이사 49,14) 신앙생활이 농도를 더해가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우게 됩니다. 헌데 그 십자가라는 것은 결코 익숙해 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됩니다. 세상에 ‘편안한’ 십자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시간이 가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익숙해 질 것 같지만 언제나 새로운 십자가는 새로운 고민 거리가 됩니다. 그러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위의 성경구절과 같은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실 적지 않은 성인들에게도 다가온 유혹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내려놓으려는 유혹입니다. 사실 이러한 유혹은 아무나 겪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이 편하고 좋을 때에는 이런 유혹을 겪지 않습니다. 이런 유혹을 겪는다는 것은 그가 이미 상당한 십자가(자기 죄의 결과물이 아니라 십자가를 말합니다)를 체험하고 난 이후에 다가오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외침을 기억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표현을 했지요. 그리고 그 가장 버림받은 느낌이 그분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바로 하느님의 위대한 일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완고한 마음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마르 10,5) 완고한 마음은 굳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의 살이 부드럽지만 그 아이가 성장을 하고 궂은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손에 굳은살이 배이는 것처럼 마음도 처음에는 부드럽고 순수하고 온유하지만 점차적으로 하나의 생각이나 사상에 굳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 완고한 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고집스런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집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좋은 쪽으로도 얼마든지 고집스러울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지켜 나가려는 뜻으로 고집스러워 질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고집스러워지는 이유는 정반대의 이유가 대부분입니다.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고집스러운 것이지요. 누군가를 증오하는 데에 고집스럽고, 세상 것에 집착하는 데에 고집스러운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 즉 용서하려는 결심을 하지 못하며 눈을 들어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완고한 마음에 필요한 것은 ‘법’입니다.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에게는 신호등이 필요없지만 반대로 질서를 어기려는 사람에게는 신호등이 필요하고 그것을 어겼을 때에 그에 합당한 ‘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려는 사람에게는 죄의 벌이 아무 상관이 없지만 죄를 지으려는 사람에게는 죄의 벌이 필요하지요. 바로 더 큰 죄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완고합니다. 그래서 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법은 더는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스승에게 묻기를 두려워하는 제자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마르 9,32)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가려는 방향과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두운 밤길에 나타나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렇게 밤중에 나타난 대상이 나의 안위를 침해하고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상이 될 것이라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길을 가고 내가 가는 곳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도리어 설레이며 기뻐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즉 수난에 대한 예고를 알아듣지도 못할 뿐더러 묻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우쭐대기를 즐기고 남들보다 나은 사람으로 취급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 주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게 될 것이라는 예고는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뭔가 개선시키려는 것이지 도리어 무언가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 나의 현재의 삶을 조금 더 낫게 하고 싶은 것이지 무언가 성가신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겪고자 애를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첫 길에 들어섰다가 시련이 시작되면 곧잘 신앙을 내던지곤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성숙한 사람을 드러내는 척도는 그의 종교적 ‘경력’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30년 동안 했다고 그가 신앙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성숙하려면 사랑이 자라나야 합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오늘 진정한 사랑의 행위를 서슴없이 해 내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은 전혀 발전이 없습니다.

믿음과 시련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집회 2,4-5) 우리가 ‘믿는다’고 표현할 때 과연 그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은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믿는 이들을 위해서 그에 적합한 시련을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편안하고 좋을 때가 아니라 반대로 우리에게 시련이 닥칠 때이기 때문입니다. 즉 금은 불로 단련될 때에 순수해지고 믿음은 시련으로 단련될 때에 순수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하느님 외에도 믿을 구석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충분하니 하느님에게 믿을 여지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다른 것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가장 먼저 하느님에게 두었던 신뢰를 거두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얼마만한 비참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가 지닌 믿음에 비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세상에 근간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비참한 상황에 놓일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가 된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이사악을 잃을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를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바쳐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것을 내려두고 하느님의 명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초라한 자존심을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39-42) 이기심과 탐욕은 사람을 눈멀게 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구에만 집중하는 이기심은 우리가 눈을 감아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외적 사물에만 집착하게 하는 탐욕은 우리의 눈 앞에 망원경을 두어서 어느 사물 하나만 바라보고 바로 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내면을 서서히 ‘악’으로 변질시켜 가게 됩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선’이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려면 그저 자신이 흘린 땀의 결과물에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의 방향을 따라 걷다가 어느 순간 자유의지의 선택을 맞이하게 되고 ‘악’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악인’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주는 행동양식이 아니라 바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악인이 ‘갈취’하려고 드는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고 하지요. 그것도 그가 원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서 내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을 들으면서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악인은 맞서 싸워야 할 판에 도로 악인의 술수에 더욱 넘어가게 방조하고 또 그로 인해서 ‘악인’이 추구하는 나쁜 방향을 허용하고 그의 악을 조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악인의 악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악인의 그 악한 의도에 물들어 우리도 악한 것을 끄집어 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요. 이제부터 마음을

갈라진 언어

말이 부족할 때에는 사랑이 드러납니다. 소통의 수단이 적을 때에 더욱 드러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둘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려 서로 소통하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이 아무리 잘 되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우리는 서로 대화하지 않습니다. 바벨의 사건은 인간들이 자신들이 지닌 재주를 더하고 더해서 자신들의 교만을 들어높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흩어 버리셔서 그들의 악이 분산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악은 같은 언어를 지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갈라진 외적인 언어는 그들의 갈라진 내면을 고스란히 담아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어 이 갈라진 틈을 메꾸어 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온 인류를 예외없이 하나로 묶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를 드높이 들어 올리고 소통의 한계로 인해서 그것을 온전히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저마다의 바벨탑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욕구는 상대의 욕구와 부딪쳐 깨어지고 무너지지요. 이러한 가운데 신앙인들이 하나의 언어로 진정으로 모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혼란하고 서로서로 갈라진 세상에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색깔?

기억 나시는지 모르겠지만 일전에 시내를 거닐다가 만나게 된 어느 야당 대표의 집회 영상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태극기를 들고 차로를 지나가는 집회의 영상을 담았습니다. 딱히 뭘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늘 마주하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소개를 한 것 뿐이었지요. 하지만 댓글로 드러나는 저마다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장면대로 장터의 아이들이 몰려와서 우리가 노래할 때에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할 때에 너희는 울어주지 않았다고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갑론을박이 펼쳐졌지요.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대로는 콜로세움이 열린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일부의 사람들은 저의 정치성향을 규정해 내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의 노선이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그 순간부터 일종의 ‘적’이 되는 것이었지요. 지금까지 제가 공들여서 가르치려고 했던 내면의 사정은 온데간데 없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바탕으로 숨겨져 있던 것들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좀처럼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는 근본 방향들을 찾아보기란 힘이 들지요.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올바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언가에 사로잡히게 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을 어지럽히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쉽게 우리 내면의 보물들을 빼앗아 가 버리는지 관찰해야 합니다. 사건을 눈에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거기에 해석을 가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심판을 가하는 것은 저마다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색깔을 그냥 그 색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 색깔이 역사 안에서는 어떤 의미를, 정치 안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해석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색깔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다고 심판을 내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 가지 태도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하늘나라를 갔는데 나와 생각이 완전

두 방향성

인간의 내면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물이 불을 끄고, 또 기름은 불을 키우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사랑 받고 싶어 하지만 그 사랑을 어디에서 어떻게 추구 하느냐에 따라서 그 양상은 너무나도 달라지게 됩니다. 사실 거의 모든 행위는 하나의 목적에 촛점 지워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지요. 하지만 그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추구하고 얻어 내는가 하는 것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관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의 관심사인 돈에서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돈을 왜 벌고자 할까요? 그 안에는 어떤 요소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일단 돈을 벌면 편안합니다. 돈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살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고, 뼈가 빠지게 일할 필요도 없지요. 왜냐하면 나는 쉬고 싶지 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련의 문장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지요. 바로 ‘돈’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돈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때로 다른 무엇과 충돌을 합니다. 간단하게는 ‘다른 이들’과 충돌을 하지요. 내가 원하는 호텔방은 다른 이도 원하는 호텔방이고, 내가 사려는 차는 다른 이도 사고 싶어하는 차이고, 내가 원하는 쾌락은 다른 이도 원하는 쾌락이어서 그 ‘다른 이’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더 많은 돈은 다른 이를 효과적으로 걸러내는 좋은 수단들을 제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 내가 이용하는 것들에 다른 이들을 범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아서 결국 ‘이기성의 감옥’에 그를 가두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만일 그 ‘다른 이’

피를 흘리지 마라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창세 9,2-6) 하느님은 먼저 모든 것을 우리의 음식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과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이들은 피가 있을 법한 고기를 아예 끊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대로 ‘피를 흘린 자’가 되는 것을 기피하기 위해서 수혈도 하지 않고 또 수술도 받지 않으려고 하지요. 헌데 참으로 웃기는 일입니다. 고기는 먹고 싶은데 피는 끊어야 하니 피를 직접적으로 먹지만 않겠다고 말을 바꿉니다. 즉 피를 충분히 빼낸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에 상응하는 온갖 세부규정도 마땅히 필요하게 될 것이구요.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마르 7,18-19) 사실 모든 음식, 사람이 섭취가 가능하도록 만든 모든 음식은 사람을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그 음식을 어떻게 마련하고 준비하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 사탄에게 하느님은 괴로움입니다. 이는 마치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환자에게 꽃을 선물하는 것과도 같지요. 그는 혐오감에 떨면서 꽃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일이 사탄에게 일어나는 것이지요. 한 인간이 하느님을 전혀 생각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게 될 때에, 그의 업적은 아무리 인간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사탄스러운’ 것이 됩니다. 어쩌면 이 표현을 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성경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봅시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베드로는 그에 반박을 합니다. 왜 반박을 할까요?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스승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싫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 사랑에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제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왜 말씀하고 계신지에 대한 베드로의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의 사랑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표현하는 ‘휴머니즘’이 아니라 하느님을 배제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표현을 듣는 셈이지요. 바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 예수님이 자신을 사탄이라고 부르고 나에게서 물러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표현은 제자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한 충격 요법이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 따끔한 훈계 안에 가르침을 담아 주십니다. 즉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사탄’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때로 우리에게 빛의 천사를 가장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르 8,26)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르 8,26)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 저 마을은 너에게 좋은 것을 건네지 못한다. 호기심에 가득찬 마을, 그래서 병자를 자신들의 호기심을 채울 수단으로 이용해 먹으려 드는 저 마을로 너는 들어가지 마라. 인간의 호기심, 지나친 호기심은 자신들이 정작 바라보아야 할 대상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들이 관심 가지는 것만을 보게 한다. 그래서 저들은 눈 먼 이들이다. 나는 너의 눈을 치유해 주었고 그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눈을 치유받아야 하는 것은 저들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들의 마음은 걸어다니는 나무, 메말라서 먼지가 푸석푸석 나는 나무이다. 저들은 비록 걸어 다니지만 그 내면에는 그 어떤 생기도 열정도 없다. 저들은 호기심거리를 찾아다니는 이들, 너는 저 마을에 다시 들어가서 저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뉴스거리가 되지 말아라. 너는 집으로 가라. 너를 기다리는 곳, 너를 반겨주는 곳, 사랑하는 너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라. 비록 가난하여 별 볼 일 없지만 그곳에는 너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 너는 거기에서 충분히 사랑받을 것이고 거기에서 네가 체험한 것들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저 마을에 가지 마라. 저 마을은 너에게 순간의 명예를 부어 줄 수는 있지만 그 뒤에는 너를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호기심 거리에 몰두할 것이다. 너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그곳에서 너는 영혼의 눈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 상황에 대한 신앙인의 자세

사실 굉장히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관심가지는 것이기도 하고 또 굉장히 신경이 곤두서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마치 성경의 비유처럼 장터의 아이들이 서로 맞서서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가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대립하는 장면이 그대로 연상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과연 우리 신앙인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옳은 것일까요?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분별’과 ‘심판’은 전혀 다른 두 가지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올바로 분별해야 하지만 심판해서는 안됩니다. 분별은 검은 것이 검다고 하고 흰 것이 희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은 검은 것이 검으니 그들은 지금 당장 지옥불에 떨어져야 하고, 흰 것은 희니 지금 당장 그에 합당한 천당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칫 가라지를 뽑다가 멀쩡한 밀까지 뽑아 버릴 수 있으니까 그렇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또 국민으로서 분별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응을 할 필요는 있지만 마지막 심판은 하느님에게 맡겨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우리 안의 심판을 결정짓게 해서 우리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다투기를 종용합니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의 정도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의분’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외적인 격함으로 드러내고 누군가를 끊임없이 비난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기까지 하며 그로 인해서 나의 온 정신을 어지럽힌 채로 나의 나머지 일상조차도 흐트리게 된다면 바로 그것으로 우리는 뭔가가 정도를 벗어났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처한 위치에서 우리는 합당한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국민으로서 우리의 소중한 주권을 표현할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겠지요. 우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

볼리비아 혼인 문화에 대한 1문1답

평화신문 기자분께서 질문을 해 주셔서 답변을 적어 보았습니다. ①볼리비아의 가톨릭 신자 젊은이들은 혼인성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일단 가톨릭 신자라는 규정부터 올바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다 가톨릭 신자라고 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문화적인 바탕 아래에서 세례는 받지만 신앙생활은 거의 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래서 질문의 경우에 가톨릭 신자는 그나마 주일미사라도 꾸준히 나오는 젊은이들(넉넉잡아도 약 5퍼센트 남짓, 이 점에서는 한국 가톨릭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을 대상으로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젊은이들은 혼인성사에 대해서 지극히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맺는 계약으로 이혼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지요. 하지만 그 밖의 구체적인 지식에 관해서는 ‘본당 사목구 주임’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소에 얼마나 관심있게 혼인과 성사에 대해서 가르치는지에 따라서 그들의 이해의 척도가 달라지지요. 이는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적지 않은 이들이 혼인성사라는 것이 있다는 것만 알지 그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동반한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실 젊은이들이 혼인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혼인은 그들이 죽기 전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요.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혼인은 50이 훌쩍 넘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책임한 젊은이들(주로 남자쪽)이 많고 혼인의 결심 자체가 불안하기 때문에 젊어서는 주로는 동거를 하는 것을 선택하고 서로의 성적이고 경제적인 필요를 충족하는 정도로 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는 모두 태어난 아이들에게 돌아가지요. 불안정한 그런 생활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나게 되고 결국 엇나간 내면을 형성하고 마니까요. 어쩌면 한국의 가톨릭 신자

노아의 방주 - 타락한 인류의 마지막 희망

노아의 이야기는 예견된 재앙과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가운데 선택된 노아의 고초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그 ‘노아의 방주’가 실존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 다니곤 하였지요. 그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한 게 아니라 그 일이 물리적으로 정말 있었는지를 따지고 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야기는 개 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품에 자를 들고 길이를 재는 격이지요. 예술품은 그것이 표현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인데 그것에 과학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오류가 많다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성경을 그렇게 대합니다. 그리고 ‘맹신’에 빠지거나 ‘불신’에 남게 되지요. 즉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여 피를 먹지 않는다고 하거나 또는 성경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내용이라고 그 전체를 부정하는 식입니다. 다시 이야기의 중심으로 돌아와서 인류는 그 자신의 타락상으로 창조주로부터 마련된 재앙을 겪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은 ‘희망’을 남겨 두시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당신의 종에게 ‘방주’를 만들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선별해서 골라 담아 그 재앙에서 살아남게 하십니다. 인간의 타락 - 재앙의 시작 - 희망의 준비 - 재앙의 실행 노아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는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타락한 존재들을 모두 청소하는 계획을 마련하시고 그 와중에 작은 희망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면 살아남게 되고 그 밖에 머무르면 재앙에 휩쓸려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방주 안에는 정결한 것만이 아니라 부정한 것도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결한 것은 충분히, 그리고 부정한 것은 최소한 만이 허락 되었지요.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에

사제의 균형감각

예로부터 가톨릭 사제들은 대표적인 ‘컨텐츠 생산자’ 였습니다. 가톨릭 사제들로 인해서 이루어진 지적 업적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생각할’ 여유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글을 쏟아낼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만일 절더러 일반 신자분들과 같은 시간의 노동 환경을 제공하고 이런 저런 글을 쓰라고 한다면 아마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볼리비아에서 선교 사제로 아무리 바빴다고 하지만 그래도 저는 방으로 돌아와 침묵하고 말씀을 성찰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육신을 움직여서 해야 하는 노동은 고되었지만 마음 만은 편안했던 셈이지요. 사제들은 자신들의 그런 보장된 환경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로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얻게 된 그런 좋은 묵상의 여건을 그야말로 묵상을 하는데 써야 하지요. 사제는 끊임없이 묵상하고 성찰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또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일에 바쁘진 않지만 다른 의미로 바빠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에 바빠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단순히 지적인 연구로 다가가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머무르는 이유는 바로 인간에게도 다가서기 위함 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물들면 안되지만 세상과 동떨어져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목적지를 올바로 상기해야 하며 반대로 사람들과 아주 가까이 머물러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균형감각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다가서다가는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기 십상이 되고, 또 너무 떨어져 있으면 우리의 본질적인 복음 선포 사명과 상관없이 살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 거리감을 잘 유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리도 부딪혀 보고 저리도 부딪혀 보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하느님에게 올바로 붙어 있는 사람은 이 거리감을 올바로 유지하게 마련입니다. 하느님

누룩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21) 무엇을 말입니까, 주님? 알려 주십시오.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우리의 닫힌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저 당신에게 빵을 챙겨 드리려 한 것 뿐인데, 당신이 누룩 이야기를 하셨으니 당연히 우리로서는 빵을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각 아닙니까? 헌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무엇을 걱정해야 합니까? 당신이 하신 기적들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아직도 그 일들을 떠올리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하마터면 굶주려 죽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이들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헌데 그 일에 다른 어떤 의미가 있었던가요? 남은 빵의 수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 였던가요? 주님 알려 주십시오. 저희는 도무지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제자들이 한탄할 만한 말을 대신 적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일상 안에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기고 나면 그것을 들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서 한탄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그 해결책을 얻을 수 있는지 애원 하면서 기도를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묵묵부답입니다. 아니, 묵묵부답인 것 처럼 보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대꾸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 외아드님의 모습만을 보여주지요. 우리는 아무리 눈을 깜빡여 보아도 보이는 거라고는 그분의 십자가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다가오신 그분, 즉 성경이 있지요. 부모의 훈육은 그 뜻을 헤아리지 않으면 그저 나에게 ‘통증’으로 만 다가올 뿐입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고 멀리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을 올바로 인지할 때에 그 훈육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이야기하신 것은 그 ‘누룩’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누룩처럼 지니고 있

가톨릭의 다양한 얼굴

제가 보기에 가톨릭교회는 각 나라마다 자신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 신자들은 오로지 한국에서만 살아서 여기 있는 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하지만 가톨릭은 그 특유의 보편선으로 모든 이에게 저마다의 얼굴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에서 가톨릭의 특징은 ‘지성적’ 입니다. 한국만큼 모든 메뉴얼이 잘 준비된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한국은 어느 본당을 가더라도 신학교급에 해당하는 전례를 준수하고 또 사람들의 기초 지식도 굉장히 뛰어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에 지성을 굉장히 많이 사용을 합니다. 즉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더 나은 신앙생활을 약속한다는 막연한 내적인 신념이 흐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교육과 피정이 즐비합니다. 손을 뻗어 찾기만 하면 온갖 영성강좌들이 있지요. 남미 가톨릭의 특징은 ‘감성적’ 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미는 열정의 나라이고 사람들은 크게 알지는 않아도 자신들의 열정으로 신앙으로 나아옵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감동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많이 쓰지요. 그래서 각종 성인상들이 즐비하고 집집마다 엄청난 수의 성상들이 곳곳을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로 아는 것이 없어 곧잘 도전이 다가오면 거기에 설득되어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뜨거운 신심 자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 외의 각 나라들은 저마다의 특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럽은 ‘문화적’으로 가톨릭일 수 있을 것이며, 북미는 북미 대로의 특징이 있겠지요. 다른 곳은 제가 오래 머물러보지 않아서 뭐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저마다의 특징들은 각 나라 사람들의 특색에 따라서 발달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즉 각 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기반으로 자라난 것이지요. 학업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문화 토양에 뿌리내린 복음의 씨가 자라난 것이 우리나라의 가톨릭이 되었고, 또 남미의 문화 토양을 바탕으로 자라난 것이 남미 가톨릭이 된 셈입니다. 이렇게 가톨릭의 얼굴은

깨달음과 실천

우리는 ‘아!’하고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엉킨 실타래를 마침내 풀어낸 것 같은 지성적인 기쁨을 얻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이 그 상태에서 머무르게 된다. 즉 그 깨달음으로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깨달음은 ‘시작’이고 ‘전조’일 뿐이었다. 진정한 깨달음, 우리가 ‘영적인 깨달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삶’에서, ‘구체적인 실천’에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좋은 책, 쉽게 설명하는 책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게 책을 읽은 뒤에 현실적인 삶으로 돌아오면 바로 내 곁의 형제 하나도 제대로 용서하고 감싸 안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별을 찾은 동방박사들은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여정의 마지막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빌라도는 진리이신 분을 바로 앞에 두고도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권력과 그의 명예심이 그의 참된 결단의 행동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아주 작은 빛 하나로도 길을 떠나 진리를 만날 수도 있고, 반대로 진리를 바로 눈 앞에 두고서도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깨달은 것을 실천해야 한다. 물론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아예 인지 자체를 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실천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닫는 것에서 멈춰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좋은 글을 읽고는 ‘아!’하고는 거기에서 멈춰 버리고 만다. 세상의 재물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배우지만 이내 다시 탐욕에 사로잡히고, 미모에 집착하고 세상이 주는 쾌락들에 목을 매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 빛을 받아들이는지 거부하는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카인의 행동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창세 4,7)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곧잘 ‘하느님’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둘의 제물을 다 받아 주었으면 별일 없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하느님을 초등학생만도 못한 존재로 가정하는 우리의 오류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행위들이 있고 반대로 하느님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행위들이 있지요. 즉 하느님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헌을 사랑하시고 반대로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행동, 억지로 하는 행동, 아까워하면서 하는 행동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십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물은 그것이 하나는 땅의 소출이었고 다른 하나는 양 떼에서 나온 소출이어서 하느님이 달리 받아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바치는 태도에서 드러난 것이었고 그것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구절이 바로 위에 언급된 성경 구절입니다. 아벨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 반면, 카인은 이미 바치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기피하는 죄악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서 그는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은 당연히 없습니다. 이는 성경을 바탕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을 바탕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내적인 의지에서 선과 악을 끄집어내고 그 꺼낸 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선을 기피하기 시작하고 악을 선호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선’을 혐오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에

무지의 죄

사람은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요? 간단하게 대답하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답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죄를 짓기 위해서는 그 죄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나의 의지가 분명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은 죄스런 행위가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정말 그는 아무런 탓도 없이 그런 죄스런 행위에 가담하게 된 것인가? 바로 여기에 우리의 의문의 핵심이 존재합니다. 물에 빠져 죽었다면 물가에 다가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물에 빠져 죽게 될 의도는 없었다 하더라도 물가에 다가서지 말라는 표지를 무시했을 가능성은 존재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훗날 되물어지게 될 책임의 근본입니다. 비록 심각한 죄 그 자체의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 심각한 죄에 다가서게 된 계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우리는 일상 안에서 ‘이정도 쯤이야’를 반복해서 실천하다가 결국에는 심각한 잘못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우리는 몰라도 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소홀히 해서 그 죄에 빠진다면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배우고 익혔어야 할 그 ‘책임감’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자격증을 따긴 했는데 사람을 수술할 줄 몰라서 수술대에 놓인 사람을 죽게 놓아 두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어야 할 의사의 탓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세상의 무언가를 얻고 나면 그것을 잘 쓰기 위해서 그것에 대해서 열심히 배웁니다. 헌데 우리는 우리가 얻게 된 신앙에 대해서 어떤 책임감을 지니고 있을까요? 과연 그것을 잘 배워서 올바로 쓰려고 할까요? 아니면 마치 필요없는 물건을 샀다는 듯이 창고 한 구석에 처박아

죽음 뒤에 삶에 대한 호기심

죽은 뒤의 삶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세하게 안다고 해서 우리의 현재의 삶의 순식간에 뒤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현세를 살아갈 충분한 영적 지혜와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 습득하고 실천하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지요. 헌데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영원의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그들은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우리는 그 나라를 염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원의 행복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고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가 영적으로 더 뛰어난 이가 있어서 그것을 설명해 준다고 해도 그것을 이전보다 더 원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지금의 내가 과연 무엇을 원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예를 통해 이해를 가다듬어 봅시다. 할머니가 집에 아주 좋은 선물, 어린이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좋은 것을 두고 손자에게 전화를 해서 초대를 합니다. “진우야, 이번 명절에 할머니 집에 오면 아주 좋은 걸 주마.” “그게 뭔데요?” “좋은 거란다.” “설명해 주세요.” “글쎄. 지금 우리 손주가 너무 어려서 할머니가 딱히 마땅히 설명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손주가 좋아하는 사탕보다 훨씬 좋은 거란다.” “무슨 사탕인데요? 뽀로로 사탕인가요?”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이지.” “에이, 안가지고 있는거죠? 못믿겠어요. 나 할머니 집에 안갈래요.” 여기서 부족한 것은 아이의 상상력이거나 할머니의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족한 것은 아이가 할머니를 향해 가지는 신뢰와 내적인 염원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하찮은 지혜로 하느님의 모든 선물을 파악하려고 듭니다. 그리고 몇가지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조합해 내기도 하지요. 그러나 실체는 우리의 상상을

마약에 중독된 아들

오늘도 볼리비아의 지인으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마약을 하면서 점점 무너져가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게 너무 힘든데 도무지 방법이 없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성당 가는 것도 그만두고 기도도 안하고 하느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제가 떠오른 모양입니다. 다른 것들이 다 무너지는 중에 그나마 저라는 한국 사제가 떠오른 모양이지요. 다시 하느님에 대해서 상기 시켜야 했습니다. 저는 이제 볼리비아에 없고 등을 두드려 줄 수도 가서 아들을 만나 조언을 해 줄 수도 없습니다. 다만 기회가 닿는 대로 다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상기시켜 줄 수 있을 뿐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도록, 다시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에게 돌아가고 내적인 힘을 길러 힘든 상황을 견뎌내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이지요. 한국에서 누가 힘들다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의 고통이 더 큰가를 가늠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오렌지냐 사과냐를 두고 고민하는 것과, 먹을 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부모 가정, 교육의 부재, 마약, 알콜중독, 생존의 위협을 겪고 있는 곳의 현실은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볼리비아보다는 여기가 낫지 않겠나?’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환경적으로는 맞는 말이고 영적으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볼리비아는 살아나가기에 힘든 여러가지 환경이 있지만 사람들이 하느님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환경적으로 훨씬 나은데도 사람들의 마음이 메말라 있습니다. 쓸데없는 가르침에 사로잡혀 시간을 허비하고, 엉뚱한 것들에 마음을 온전히 다 소진해 버리고… 그러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여기니 그런 이들에게 ‘철부지’와 같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것을 시도해 본 사람이면 아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저를 한국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