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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17의 게시물 표시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영광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요한 5,44) 눈에 보이는 인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마음과 영혼. 사람들은 그 내면에서 표현된 외적인 것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광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다니는 학교를 자랑하고 우리가 지닌 학식을 자랑하고 우리가 지닌 외모를 자랑하며 우리가 지닌 인맥을 과시하는 등등 우리는 남들에게 보여줄 것이 많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말 남들에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전해지는지, 또 남들이 내비치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는지를 조금만 성찰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남들이 자랑할 때에 속으로 비웃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하지요. 우리는 그렇게 헛된 영광을 서로들 주고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공허하고 피폐한 마음입니까? 진정한 영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영광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올바로 받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해서 영광을 추구하지 못하고 그분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가련한 영혼들입니다. 그저 이 세상을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먼지에 불과하지요. 착한 척을 해서 착한 이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받을 것이 아니라 ‘착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설령 날더러 착하지 않다고 비난해도 내가 하느님 앞에서 진실한 사람이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영광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착한 사람이지요.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하고, 그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가 서로에게 던지기 위해서 만들어 낸 영광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자리에 있든지 만족할 줄 알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나 탐

분명한 실체

실체가 없는 채로 현세의 고통을 참아 견디도록 종용한다면 그것은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고 단순히 현세의 고통만을 경감하는 역할을 하는 아편이다. 하지만 다가오는 실체가 분명한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기다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희망이 된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는 부르짖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아무리 외적으로 신앙적인 표지를 잔뜩 지니고 있어도 결국에는 자신의 불신앙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반대로 믿음을 올바로 지닌 자는 외적으로 아무리 험한 일을 당해도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곳에 가 닿게 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허황한 이야기들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다가올 실체들이다. 신앙인은 그 믿음을 고백하는 자이어야 하며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세상은 끊임없는 투쟁과 다툼으로 자기 앞에 놓인 현실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흥분해 있는 동안에는, 또 어딘가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진리를 올바로 바라볼 수 없다. 마음을 추스리고 진리와 대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리, 즉 우리가 나약하고 부족하다는 것부터 올바로 직면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바른 방향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없는 마음에 진리가 스며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느님이 없는 마음에는 반드시 다른 대체재가 그 안에 준비되어 있고 그러한 대체재는 반드시 어딘가 엇나간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게 되기 때문이다. 나침반이 잘못되어 있는데 그것을 열심히 따라가 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먼저는 나침반을 수리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우리는 다가올 분명한 실체, 즉 영원 안에서의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이 현세를 올바로 살아가야 한다.

아직도 그렇게나 배워야 하는가?

지식의 전달은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교통질서는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교통질서를 지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래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신호체계이고 그것을 어겼을 때에 받게 되는 처벌인 것입니다. 생명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다들 들어본 내용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도 이웃도 사랑하기 싫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율법’이 등장하고 그에 상응하는 정의의 결과에 대한 공지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아서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서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갖 복잡한 체계가 나타나게 되고 또 그것을 배우고 익힌다고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의 핵심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 정보의 양’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빛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빛을 원하고 그 빛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 5,6) 건강해지고 싶으십니까? 왜냐면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십니다. 우리가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마음이 무너져 있는 것을 보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좌절해 있고 실망해 있고 쳇바퀴 같은 삶에 지루해 하고 절망해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무너져 있지요.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올바른 방향성도 추진력도 없이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하지만 우리의 내면이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말이지요. 문제는 예수님이 아니지요. 문제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무너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이 참으로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나는 환자가 아닌데 환자 취급을 한다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수십년을 앓아오던 중풍 병자에게 ‘건강해지고 싶냐’고 묻는 것도 이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반드시 던져져야 했습니다. 너무나 오래 그런 상태로 지내온 나머지 자신에게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늘상 탐욕을 부려오던 터라 탐욕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늘상 자존심을 세우고 살아온 터라 교만한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늘상 이기성에 사로잡혀 지내온 터라 무엇이 자신에게 부족한지를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건강해지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그냥 이대로 지내면서 가끔 가다가 누가 나에게 던져주는 떡고물이나 받아 먹고 싶은 것일까요? 정말 개선되고 싶은 용의가 있기는 한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소경에서 복음 선포자가 되기까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어 있었던 이, 그래서 사물들을 올바로 분별할 수 없었던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똑바로 바라보게 된 세상 속에서 그는 가장 먼저 ‘부조리’를 체험하게 되지요. 자신의 눈을 뜨게 만들어 준 이를 세상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죄인이라고 매도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잠자코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분명히 일어난 일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몇번이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번번이 자신의 의견이 내쳐지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지요.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근처를 돌아 다니시면서 하늘 나라에 대해서 열심히 가르치고 계실 터인데 사람들은 그리로 가서 예수님에게 따지고 묻지는 않고 예수님 주변에 서성이면서 예수님이 은총을 베풀어 준 사람을 성가시게 합니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혜를 감당해 낼 자격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정면 승부를 거부하고 주변에 자신들이 감당해 낼 만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겪은 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라고 압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를 압박했다가 그의 부모를 압박했다가 하면서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예수님께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확인하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영역에 머물러 있던 이가 이제는 예수님의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어 일을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호세 14,2) 주님의 올곧은 길은 의인들에게는 지침이 되고 죄인들에게는 고역이 됩니다. 진리의 길은 의인들에게는 따르기에 너무나 힘이 나는 길이 되고 죄인들에게는 성가신 길이 됩니다. 죄인들은 꺾어진 길을 좋아합니다. 죄인들은 공정하고 참된 길보다는 은밀하고 부정한 길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멀쩡히 있는 자신의 가정보다는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불륜의 관계를 선호하고, 정당히 노동해서 땀흘려 벌어들이는 것보다는 일은 적게하고 쉽게 얻어내는 결과물을 좋아합니다. 학생이 공부해서 성적을 얻기 보다는 요행을 바라는 것도 비슷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내적인 결심을 다진 이, 신앙의 길을 올바로 시작하는 이라야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적지 않은 우리들은 여전히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은 즉 ‘자기 자신의 피상적 욕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른이 몸에 좋은 하지만 식감은 떨어지는 음식을 아이에게 주려는 것과 아이는 입에만 단 음식을 먹으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이가 마음을 바꾸어 어른이 주는 음식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익숙해져 가야 하는 것인데 자신의 입에만 달다고 그것을 먹겠노라고 계속해서 나서면 그 아이는 결국 자신의 건강을 해쳐 버리게 되고 서서히 자신에게 병증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날때부터 의인이기에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고 또 날때부터 악인이기에 비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면이 저마다의 길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정해서 그 길을 실제로 가면서 의인이 되고, 또 하느님의 길을 벗어나기로 결정을 해서 그 길을 실제로 가면서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알콜 중독자가 되는 사람은 없

아버지의 의미

요셉은 비록 양부였지만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낸 사람입니다. 아무리 성모님의 영성이 뛰어나다 하지만 임신한 몸으로 베들레헴에 혼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요셉은 성모님을 도와 여행 갈 채비를 차리고 그리고 오랜 여정 동안 성모님을 옆에서 보석처럼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비록 예수님은 성모님께서 모시고 계셨지만 가족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지시는 요셉을 통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요셉이 하자는 일에 순명했지요. 바로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 가정 안의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 가정의 수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입니다. 즉 몸으로 치면 ‘머리’의 역할을 맡는 것이지요. 머리는 결정하고 행동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몸을 돌보지요. 탈중심주의와 해체주의로 대변되는 오늘날 ‘아버지’는 막연한 ‘권위주의’가 되어 그 의미가 많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원래의 위치가 많이 사라져 버렸지요. 그러나 여전히 하느님의 뜻은 한 가족이 아버지라는 가장을 중심으로 하나로 일치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가장이 정말 사악해서 하느님의 뜻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을 명하지 않는 이상, 기본적으로 가족 구성원은 가장의 명에 순순히 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족의 구도가 올바로 잡히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불순명하면 자녀들 앞에서도 ‘순명’이라는 가치를 가르칠 수 없게 됩니다. 자신도 지키지 않는 것을 자녀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우리는 요셉 성인과 그 성가정을 통해서 이 올바른 가족의 구도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시작하면 그 가족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용서

용서라는 것은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용서 해야 한다고 듣기는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에 애를 많이 먹지요. 그리고 용서를 하려고 하니 여러가지 것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기도 합니다. 즉 그를 용서하지 못할 수백 수천가지 이유가 아른거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전혀 뉘우치지 않는데도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도 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용서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고 그 안에 숨어있는 본질을 꿰뚫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용서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테니까요. 먼저 세상 안에서의 용서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그가 다가와서 잘못을 뉘우치고 끼친 손해를 기워 갚습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비로소 용서를 하는 것이지요. 세상은 철저히 ‘주고 받음’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 십자가 상에서의 용서와 원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용서는 어떤 것일까요?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의와 자비’라는 것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마치 하나의 검에 날이 선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본질의 두 가지 측면이지요. 그리고 정의와 자비 모두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사랑은 자비로워야 하고 또 사랑은 정의로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는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정의’는 반드시 실현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영원 안에서는 반드시 정의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바로 이 확고한 믿음 안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 안에서의 확고한 정의,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정의에 대한 믿음이 굳게 서 있다면 우리는 그 정의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을 고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이름은 ‘자비’가 되는 것이지요.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실대로 갚음을 받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결과를 얻

영화 ‘침묵’ 감상평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 보실 분들은 읽지 마세요)

사실 모든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영화는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감독의 의도대로 영상으로 표현된 것을 바라보아야 할 뿐이다. 그리고 때로는 주인공의 내적 독백을 들어야 할 뿐이다. 하느님은 박해 가운데 있는 선교사의 그 모든 고통의 순간에 침묵하신다.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미 대답을 보내 주셨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박해의 위협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선교사였고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언어 때문에 고생도 했고 남들이 좀처럼 가지 않으려는 곳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해야 했다. 4인조 택시 강도도 당해 보았고, 댕기열과 급성간염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 하느님은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하느님은 이미 하신 말씀을 나에게 보여주셨을 뿐이다. 그 말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셨다. 결국 돌이 생긴 쓸개를 떼내러 비행기에서 구토를 해 가며 한국에 왔고 또 오자마자 다른 신부님들이 좀처럼 떠맡지 않으려는 신설 본당을 짓는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때마다 나에게 환시 중에 나타나서 계시를 주신다거나 내가 힘들 때에 옆에 다가오셔서 위로를 해 주시거나 한 적은 없다. 하느님은 침묵하셨고 그 침묵 가운데 묵묵히 당신 외아들을 나에게 보여주셨다. 영화는 박해의 잔학상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선교사의 고민을 드러낸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교사의 고민에 동참하느라 대부분의 노력을 쏟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고민해 보아야 한다. 과연, 그 박행을 집행하는 이들의 내면은 어떠한 것인가? 진리를 전하러 온 선교사 앞에서 자신들의 나라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동족을 스스럼 없이 살해하며 그 선교사를 압박하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할 여지가 없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생각을 올바르게 갖추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일본인들의 박해의 원인이 천주

내적 평화와 기쁨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이 진실한 것인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좋은 지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적 평화와 기쁨입니다. 우리의 내적 평화는 외적인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외적인 평화는 안락함, 많은 재화, 내 일을 대신해주는 수많은 이들로서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평화는 거짓된 평화이고 깨어지고 말 평화입니다. 진정한 내적 평화는 안으로부터 솟아나와서 우리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적 평화는 외적인 폭풍우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두번째 지표인 기쁨은 바로 그 내적 평화로부터 자연스레 따라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외적인 일시적인 쾌락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재미난 코메디 프로를 보더라도 잠시 웃을 수 있지만 그 웃음은 곧이어 다가오는 현실의 장벽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은 내적인 평화에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두 가지 지표가 없다면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어딘가 엇나가 있는 것이 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외적인 표지들(주일미사, 평일미사, 각종 금욕 행위, 봉사활동 등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 두 가지의 내적인 가치가 없으면 그 삶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하는 무언가가 됩니다.

보이기 위한 것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마태 23,5)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영예를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람들의 애정을 추구할 때에 우리는 비참해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절대로 제대로 된 찬사를 던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드러날 수 있는 위대한 일은 잠깐의 감탄을 자아낼 뿐입니다. 누가 히말라야 산에 올라갔다고 해서 우리가 그 일을 늘 되새기면서 꾸준히 감탄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람이 다른 기록을 세워 버린다면 앞서 그것을 달성한 사람은 잊혀져 버리고 말지요. 사람들에게 얻는 찬사는 이처럼 거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잠시 끓어 올랐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는 이들의 내면도 공허가 가득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들, 세상에서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닌들 그것을 가지고 영원을 위한 일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허무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보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면에 진정으로 빛나는 보석을 갖추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옷보다는 내면으로 갖추는 거룩함이 더 낫습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수많은 활동보다는 겸손하고 인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외적으로 활동하지 마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적 활동은 ‘내적인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외적인 활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내적으로 준비되어 있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외적인 일은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드러나는 일이라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박이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은 속에 익은 것을 제대로 먹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썩은 속을 아무리 화려한 외면으로 치장한 들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악인가?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 1,16-17)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과연 인지하고 있을까요? 과연 그 악의 결과가 자기 스스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올바로 알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경우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악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들이마시는 그 연기가 자신의 폐에 어떤 작용을 하고 그 온갖 유해 물질들이 피에 섞여들어 구체적으로 각 순간마다 자신의 세포들에 어떤 파괴작용을 미치는지를 늘 바라보고 그 결과를 예측하면서 담배를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담배 한 대를 빨아들이는 동안의 좋은 기분 만을 즐기고 싶은 것이지요. 그 결과는 나중에 어떻게든 알아서 되겠지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올바른 인지를 지니고 있다면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을 멈출 방법을 구체적으로 찾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행동이 악을 실천하는 이들에게서도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실천하고 있는 일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악을 저지를 수 있지요.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악인들은 자기 스스로를 ‘좋은 사람’, ‘그나마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분별된 것으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단의 자매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어린 이야기가 잔뜩 나오게 되지요.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바른 한 걸음

천 걸음의 헛된 걸음을 걷는 것보다 한 걸음 바른 방향으로 걷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혹자는 천 걸음을 걷는 동안 다리에 힘이 붙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한 걸음을 제대로 걸으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도 우리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힘이 길러지게 마련입니다. 천 걸음을 걷고 어둠의 길에 접어드느니 한 걸음의 빛의 길이 더 나은 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분별 안에서 올바른 결정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 분별의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나중에는 엉뚱한 길을 걷게 됩니다. 분별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스승을 두고 올바로 배우는 일은 분별을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엇나갑니다. 그 이유는, 다른 스승을 두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판단을 믿기 때문이지요. 마치 베드로가 스승에게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분별을 너무나 과신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어떤 어두움이 끼어들어 있는지, 어떤 헛된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자신의 판단이 분명하고 뚜렷하다고 과신하는 탓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엇나갑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으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에게서 상당히 멀어져 있는 모양새가 됩니다. 그리고 예언자의 목소리는 허공에 메아리칠 뿐입니다. 아무도 받아들이는 이들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허공을 떠돌던 그 목소리를 찾는 이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고 그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지혜를 찾아 여정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온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날에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고 믿어왔던 것들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반대로

복음을 위한 고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2티모 1,8) 이 짧은 문구에는 참으로 많은 영성이 녹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을 위한 나아감이 우리 자신의 힘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힘에 의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혹자가 말하듯이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어서 우리의 주체성을 없애 버리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힘에 의지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기’를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해도가 없는 배는 아무리 자신의 힘이 엄청나도 엉뚱한 곳에 가 닿게 마련이고 암초를 피할 수 없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항해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체험적으로 하나의 방식을 찾아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다른 환경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순간 현실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든 과정은 올바른 ‘나침반’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여정은 반드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기를 두려워합니다. 끝까지 자기 자신이 일을 처리하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전혀 신앙적인 발전이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자신들이 만든 로드맵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에 나름의 영리함으로 아무리 궁리를 해도 결국에는 한계성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지요.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는 주제도 참으로 심오한 것입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곧 ‘고난’을 포함한다는 것이지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 이 세상 안에서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쁜 소식은 분명히 기쁜 소식입니다. 그 기쁨은 가장 완전한 기쁨이고 영원한

신앙을 위한 신심인가 신심을 위한 신앙인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가지 종류의 신심활동을 접하게 됩니다. 꾸르실료, 레지오, 성령 세미나, 떼제 기도, ME모임 등등이 있지요. 그리고 그러한 활동에 몸을 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활동에 익숙해지게 되지요. 하지만 단순히 익숙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집착’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실천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신앙이지 특정한 신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근본적인 신앙생활만 잘 실천할 수 있다면 사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옷을 입고 있다면 다른 장신구들은 달 수도 달지 않을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옷의 따뜻함이 아니라 외적인 장신구의 중요성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때로는 엉뚱한 일이 벌어집니다. 몸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데 아름다운 장신구를 찾겠다며 몸을 혹사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헌데 우리가 지나친 주변 활동에 집착하다 보면 우리는 그러한 특정한 신심을 위해서 공동체 전체의 안녕을 무시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사람은 저마다 취향이 다르고 저마다 가진 재주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심 활동이라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에 올바르게 이르기 위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저마다의 환경과 현실, 그리고 저마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서 합당한 활동을 고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직업이 다양한 가운데 주기적인 모임을 전제로 하는 특정 신심은 교대 근무를 하는 이들이나 근무 시간이 일정치 않은 이들에게는 상당한 장애를 지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이 신앙에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고 싶어하는 주님의 뜻을 가로막은 채, 인간이 만들어 낸 특정한 그룹의 부흥을 위해서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선교 강의록

선  교 사수성당 마진우 요셉 신부 선교의 부담 선교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부담스러움’입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선교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지요. 마치 선교는 그에 대한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숨을 쉬고 밥을 먹듯이 선교는 자연스럽고 신자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선교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일 먼저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좋아하는 일, 선호하는 일이 있습니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며,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것을 즐깁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얼마든지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생각이y 있으며 그것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그러한 것들을 향한 욕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할 때에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배고픔의 욕구가 있기에 밥먹는 것이 기쁜 일이 되는 것이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구가 있기에 잘 생긴 사람을 보면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에 있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선교를 향한 욕구를 올바로 갖추는 것입니다. 즉 선교를 하고 싶어하게 되는 것이지요. 영혼이 원하는 것 인간의 내면에는 수많은 욕구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옷을 사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맛있는 밥을 한 끼 먹는 것이 중요한 법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 추구하는 욕구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숱한 욕구들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 영혼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초컬릿을 잔뜩 먹어 입맛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우리는 이 영혼

가장 성공한 예언자 요나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면서 요나의 마음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나를 참으로 불쌍한 사람으로 봅니다. 하지만 요나야말로 가장 성공한 예언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명의 목표를 최고로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왜 존재할까요? 단지 사람들을 성가시고 귀찮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변하지도 않는 그들에게 다가서서 양심의 가책을 주고 돌직구를 던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바로 사람들이 예언자에게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짐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짐을 덜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언자는 그들이 받게 될 징벌을 피하게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영적 치유의 과정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마련이고 그래서 예언자는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예언자도 인간인지라 짜증도 나고 귀찮기도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기도 한 것입니다. 그 점에서 요나는 솔직했지요. 하지만 말씀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예언자로 선택된 이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벗어나서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사랑하셔서 그를 재난에서 구해 내시고 그에게 힘을 북돋아 주시고 그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는 자신이 사명을 이룰 곳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지요. 헌데 요나 예언자는 자신이 사명을 이룰 곳, 즉 통상적이라면 괴롭힘을 당하고 죽어 마땅한 곳에서 기적과 같은 일을 체험한 셈입니다. 즉 그 곳의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듣고 모두 회개해 버린 것이지요. 요나 예언자로서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충분히 반발을 예상하고 결국 그 자리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사람들이 그 말씀에 순종해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소양이 부족한 요나는 하느님의 이런 처신에 투덜거리지만 하느님은 마지막까지 그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즉 하느님은 구하시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요나는 자신이 뿌린 씨가

가장 작은 이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과 만나기… 그럼 누군가가 반드시 물을 것입니다. “누가 가장 작은 이들입니까?”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을 찾는 법은 우리의 세상적 자아가 거부하지만 천상적 자아가 다가서기를 원하는 이들을 찾으면 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두 자아가 분열되어 있기라도 하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길가다 걸인을 만나면 우리의 천상적 자아는 그 즉시 ‘불쌍함’, ‘동정’을 느낍니다. 이 추운 날 한길에 나앉아서 구걸을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세상적 자아는 그 즉시 반대 의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의 흐름에 저항하는 ‘이론’을 찾아냅니다. 그는 원래 가난하지 않다는 둥,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대부분의 이런 경우가 사기꾼들이었다는 둥,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런 종류의 체험담을 읽은 적이 있다는 식의 반발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분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이런 반발은 실제로 그러한 내용들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의 ‘돈을 아까워하는 마음’과 ‘남들 앞에 나서 누군가를 돕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별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지요. 굳이 걸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안에서 이런 일들을 자주 체험합니다 특히나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이런 일들을 체험하곤 합니다. 우리의 늙으신 부모님, 우리의 아내와 남편, 우리의 자녀들에게서 이런 일을 체험하지요. 그리고 우리가 자주 만나는 친구들 가운데에서 볼품 없는 이들, 성격이 모나서 아무도 다가서려 하지 않는 이들을 바탕으로 이러한 체험을 합니다. 우리는 누가 우리 주변의 가장 작은 이들인지 이미 알고 있

갓난쟁이 사수성당

지난 주 사목회의를 하면서 한 형제님이 ‘직제를 시급하게 올바로 갖춰야 한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즉 먼저 필요한 위원장들을 뽑아서 빨리 구조를 정비하자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에 온전히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사수성당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당연히 수많은 것들이 미비하겠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미비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에 우리 성당을 비교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존재들은 그 고유의 특이성으로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수성당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성당은 미흡함을 지녔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기의 다리를 억지로 잡아 당긴다고 다리가 자라나진 않으니까요. 모든 것은 제 때가 있을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더라도 절로 이루어질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본당에는 사목 구조가 미흡합니다. 아직 없는 위원회들이 많지요. 하지만 우리 성당에는 다른 본당에 없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가족과 같은 분위기이고 모든 신자들이 저와 함께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장점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아기가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지만 그 나름의 순수함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과 같이 우리는 지금 본당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본당을 다른 기성 본당에 비교해서 부족한 것들에 한탄을 하기 시작한다면 우리 본당은 늘 기준에 미달하는 몹쓸 본당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제 본당을 사랑합니다. 저의 사랑은 제 본당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부족하고 미흡하기 때문에 전해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과 미흡함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이끌어 내리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본당이 마냥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본당은 부족하기에 더욱 열심히 일하려는 사제와 신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본당에는 복음 말씀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도우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6,65-67)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무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12명만 뽑은 것이 아니었지요.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에 12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도전적이었고 그것을 따르기 위해서는 의지의 동의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의 완성에 이를 즈음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신앙’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산을 오르는데 초반에는 얕은 구렁을 넘다가 점차적으로 경사가 높아지고 그렇게 겨우 정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아래가 보이지 않는 벼랑 앞에 세워두고는 믿고 그리로 뛰어 내리라는 것과도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다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갑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이성’이라는 것을 쓰겠지요. 말씀을 듣고 분별하고 해석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은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의지’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서히 성장해 가겠지요. 헌데 최종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전적인 신뢰’ 즉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막혀 버리고 맙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결심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요. 수많은 이들이 이 ‘신앙’ 앞에서 좌절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추구하던 하느님이 아니라며 그분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 초자연의 신비를 뛰어넘을 용기가 생겨나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날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렇게 묻는 이유는 떠나지 말라는 부탁임과 동시에 우리의 자유에

신랑을 빼앗길 날 (마태오 9,15)

신랑을 만나야 빼앗길 것입니다. 아직 신랑을 만나지도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신랑을 만난 기쁨도, 빼앗기는 날의 절망감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일상의 무게에 눌려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신랑을 만나는 것이 힘든가? 그렇지 않습니다. 신랑은 자신의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 애가 타는 사람입니다. 신부가 들어오라고 문을 열기만 하면 언제라도 달려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문을 열지 않는 신부, 신랑에게 관심이 없는 신부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문을 열지 않는가? 그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탓이 없는데도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는 탓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랑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알고 행하지 않는 이들의 문제가 됩니다. 또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아직 신랑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이니 그들은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신랑을 알지 못하게 되는 신부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신랑을 만나면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신랑과 함께 머무르는 동안에는 기쁨을 잔뜩 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기회가 자주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머지 않아서 신랑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랑이 있는 동안 신랑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 알고 그 기쁨의 추억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도 신랑을 다시 만날 희망에 부풀어 살 수 있게 됩니다. 신랑을 만났는데 그 기쁨을 충만히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신랑을 잃는 날은 그야말로 최악의 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다리가 다 자라지 않았는데 빨리 걷기를 강요받는 어린아이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달릴 수 있을 때에 달려야 합니다. 신랑과 누리는 기쁨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신랑과 함께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사라지는 날은 우리 주변에서 사랑이 메말라 버리는 날이 될 것

화내지 마십시오.

“우리는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로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매순간 ‘분노’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노기 띤 얼굴’로 상대자를 바라보신 적이 있지만 예수님의 의로운 분노가 우리에게 올바로 자리잡히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분별있게 ‘의분’을 느끼기에는 아직 많은 부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분노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이고 곧잘 오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하면서 올바른 분별력을 잃어버리기가 너무 쉽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역으로 분노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더 시급하고 절실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원수인 악마가 가장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 성급하게 화내지 마라. 화는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자리 잡는다. (코헬 7,9)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티토 1,7)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야고 1,19) 이처럼 성경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화는 절대로 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화내는 것에는 상당한 절제와 인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에게 절대로 이런 절제와 인내를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화내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화를 낼 수록 우리에게는 절제와 인내가 상실됩니다. 그리고 절제와 인내가 사라진 인간은 가장 조종하기 쉬운 인간이 됩니다. 텔레비전의 홈쇼핑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빨리 서두르도록 해서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게끔 종용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조급하도록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단식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6-7)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무언가를 참아 견디고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적극적인 의미의 고행, 즉 나의 의지를 동원해서 내가 평소에 시도하지 않았던 이웃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재의 수요일 단식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식’이라는 말을 듣고 과연 얼마를 굶어야 하는지, 어떻게 굶어야 하는지, 고기는 먹으면 안되지만 콩으로 만든 가짜고기는 먹어도 되는지 등등을 궁금해 합니다. 즉 단식 규정을 철저히 지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고는 지극히 이기적인 구원관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메뉴얼에 적힌 대로 단식을 지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단식이 나의 사랑을 키우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호등을 지켰다고 나의 양보하는 정신이 자동으로 크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양보는 나의 내적 선함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단식이 외적인 규정의 준수가 아니라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오는 것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단식을 하는가 하는 것이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즉, 하느님이 바라는 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냥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우기는지 하는 것을 판가름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우리는 그대로 단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

신앙과 일상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5) “신부님, 할 일이 천지인데 기도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고 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내적인 신앙생활과 외적인 종교생활의 일치를 올바로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과 세상의 생활이 무척이나 동떨어진 두 가지 활동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즉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록 우리는 절로 세상의 생활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더욱 신앙에 충실할수록 우리의 외적 생활, 우리의 일상 생활도 더욱 충실해집니다. 이는 나침반이 올바로 작동하는 배가 항해를 더 잘 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반대로 나침반이 망가진 배는 아무리 배가 크고 화려하고 속도가 빠르더라도 쉽사리 암초에 부딪히거나 엉뚱한 목적지에 이르고 말겠지요. 하느님이 제시하는 생명이라는 것은 편협한 구원관 속에서 한 사람이 천당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이 제시하는 생명이라는 것은 보다 원대한 섭리 안에서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변화되어 이 세상 안에 충실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며 그 길을 똑바로 걸어나가서 나중에는 영원한 나라에도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어느 버스 기사가 신자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성당 활동에만 목을 매달고 운전도 엉망으로 하고 다른 사람과 툭하면 불화를 일으킨다면 과연 그 모습을 하느님께서도 좋아하실까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하느님은 세상 안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실하는 이를 더욱 사랑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상을 더욱 충실하고 성실하게 꾸려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이들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부님, 할 일이 천지라서 기도 하면서 해야겠어요.”

사순을 곡해하지 않기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이 시작되면 온갖 ‘운동’들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일단 가장 먼저는 사순저금통이 배급되지요. 그렇게 우리는 잔돈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순을 맞아서 ‘희생’을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희생은 ‘담배 끊기’, ‘술 절제하기’ 등입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러한 일들(가난한 이들 돕기, 자신의 건강 보살피기, 절제를 훈련하기 등등)은 사순이 아니라 평소에도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물론 사순이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수는 있지만 사순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은 아닌 셈입니다. 사순의 본질적인 의미는 회개와 성찰, 반성, 참회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무언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 돕기가 다른 이들 앞에서 드러내듯이 보이는 허영이 될 수도 있고, 건강을 보살피겠다는 것이 육신에 대한 집착의 어긋난 방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은 바로 그런 내적인 엇나감을 바로 세우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한 대표적인 사순의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이 오심을 준비하는 기간을 ‘길을 닦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길을 닦는 것은 낮추어진 것을 높이고 높아진 것을 낮추는 일입니다. 낮추어진 마음은 죄스런 마음들, 하느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고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그만두고 다시 내면을 희망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니 우리의 그릇됨을 깨끗이 하시고 다시 본래의 궤도로 올려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반대로 높아진 마음은 교만하고 허영심에 가득한 마음, 세상에 물든 마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얻고 누리려 하면서 마음을 들어 높입니다. 사순은 그런 들어높여진 마음을 다시 정상궤도로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우리에게는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형제 자매라는 것을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