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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17의 게시물 표시

독(毒)

독(毒)은 멀쩡하던 육체에 스며들면 그 육체를 파멸시켜 버립니다. 영혼에게도 독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악한 의도(증오, 원한, 시기 등등)이지요. 누군가 독한 마음을 품고 악한 의도를 품으면 그 독이 상대에게 뻗어나가 그의 내면에 파고들어 결국 그 상대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육신의 독에는 그에 상응하는 해독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악한 의도는 어떻게 상쇄되는 것일까요? 상대의 악한 의도를 잠재울 수 있는 것, 그 가장 기본 바탕은 우리의 인내입니다. 그리고 ‘겸손’입니다. 이러한 덕목들은 독이 파고들어도 당장 영혼에 스며드는 것을 일단 가로막을 수 있게 됩니다. 인내와 겸손이 없으면 없을수록 어둠의 영이 던지는 독은 우리의 내면에 금세 파고들고 말지요. 그러나 이러한 덕목들은 ‘해독’, 또는 ‘치유’의 기능은 없습니다. 영혼의 독을 해독하고 치유하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사랑스러운 이만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치료제로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적인 것이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름답고 좋은 것을 선호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기들을 좋아하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치료제로서의 사랑은 보다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내어주는 사랑이고 자신을 헌신하는 사랑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감싸안고 나서는 사랑이지요. 바로 이러한 사랑이 영혼의 독을 중화해 나가게 됩니다. 독은 반드시 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가능한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해독제와 치료제가 있다면 이미 독이라는 것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겠지요. 우리가 사랑에 더욱 헌신하는 만큼 우리의 내면은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 그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루카 24,31)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았을 때에 성경 저자는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라지실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다만 그들의 눈에서 가리워졌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내면 안에 자리잡은 것이지요. 예수님이 내면에 자리잡게 되면 그들의 삶은 변화하게 됩니다. 즉 내면의 중심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전까지는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지상의 삶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살 궁리를 하였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안에 자리잡고 부터 그들은 반대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천상의 삶을 추구하게 되지요. 우리는 매번의 미사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닫혀 있기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은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받아먹는 것은 그냥 빵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을 알아보는 이들은 미사를 통해서 힘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고 힘을 얻고 가슴이 타오르는 체험을 하지요. 그들이 먹는 빵은 천상의 삶을 살아가는 양식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행동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되지요.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본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늘 가는 미사에 가서 늘 하던데로 빵조각 하나를 얻어먹고 온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은 ‘교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여전히 증오에 사로잡혀 있고, 탐욕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눈을 열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진정으로 받아모실 수 있게 됩니다.

배와 바람과 주님

배는 우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호수에 부는 바람과 물결은 우리 삶에 늘 존재하는 일상적인 크고 작은 시련을 의미하지요. 그 바람과 물결은 우리의 진로를 늘 방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 닿으려는 곳으로 우리가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지요. 그리고 그 배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싶어하시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분의 다가옴이 너무나 범상치 않게 보여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들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돈을 벌고 성공을 하는 등의 일들이지요. 헌데 예수님의 다가옴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분은 물 위를 걸어오시니까요. 우리의 삶이라는 배에 정말 이상한 방법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다가옴을 두려워하지요. 그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의 선과 진리와 사랑을 드러내시지요. 그분은 비록 이상한 방법으로 다가오긴 하지만 그분이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이미 익숙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이를 좋아하고,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며, 우리는 사랑하기를 즐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에로의 부르심이 주어질 때에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살아오던 삶과 많이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고 익히 알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선한 삶이고, 진리의 삶이며, 사랑의 삶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제서야 그분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 주님을 모시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순간 배는 이미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아 있는 법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시기 전에는 열심히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너무나 힘들었던 그 곳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려고 하는 순간 이미 가 닿는

매력적인 불교?

집을 짓는 방법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참으로 비슷할 것입니다. 먼저는 기초를 놓고 그리고 기둥을 세우고 마침내 대들보를 얹는 것이지요.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대들보부터 공중에 붙들어매고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것도 비슷하지요. 그래서 모든 종교들은 비슷한 양태를 지니는 것이지요. 결국 바람직한 인간, 정돈된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불교가 가르치는 바, 수덕을 위해서 필요한 바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큰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생히 살아계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 안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신비적 영역’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놀랍습니다. 하느님을 매우 닮아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수많은 업적들을 이루어 내었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분의 지혜로움은 세상 그 어느 인간의 지혜 가운데 으뜸이라도 이길 수 없지요. 그분이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근본 패러다임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을 위한 선인들의 희생…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감싸안는 사랑. 이는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때로 불교가 매력적이라고 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조금 안타깝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톨릭 신앙의 정수를 아직 맛보지 못했으니까요.

영으로 다시 태어나기

육신으로 태어남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탄생, 즉 몸이 형성되어 어머니의 모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지상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을 말하지요. 육신으로 태어난 이는 자연스럽게 육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헌신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쉬고 먹거리를 찾아 울음을 터뜨리지요. 그리고 육신을 위험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피하고 움츠러들기도 합니다. 반면 그 육신 안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은 이 영혼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 안에 뭔가 색다른 것이 있기는 한 것 같이 느껴지지만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영혼도 비슷합니다. 영혼의 탄생이 필요하고 영혼이 형성되면 그 모체에서 독립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하고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영혼으로 태어난 이는 자연스럽게 ‘영혼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헌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 지상의 공기를 숨쉬고 지상의 먹을 거리를 찾는 것이라면 영혼에게는 영혼의 공기와 영혼의 먹거리가 필요하지요. 또한 영혼에 위험이 되는 것에서 스스로를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빚어져 독립적인 자유를 지니고 나오긴 했지만, 자기 스스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올바로 알지 못해서 자신의 소중한 영혼을 지상의 것에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시지 않아야 할 공기를 마시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며 나아가 피해야 할 것을 오히려 받아들이는 중이지요. 그래서 영혼이 병들어가고 심지어는 죽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병증은 육신으로 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무시해 버리고 말지요. 우리는 영혼을 되살려야 합니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영혼은 육신의 운명을 뒤따라가게 됩니다. 즉, 결국 죽어 버릴 운명이지요. 우리는 육신에 치장을 하고 좋은 것을 먹이고 가꾸고 다듬지만 결국 육신

맥빠진 부활

가난의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 소유의 기쁨은 없다. 고독을 즐기지 않은 이에게 진정한 만남의 기쁨은 없다. 침묵해보지 않은 이에게 주님의 명을 따르는 기쁨은 없다. 낮아짐을 체험해보지 않은 이에게 높여짐의 기쁨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올바로 즐기지 못하는 이유이다. 부활은 그저 종교행사로 끝나버리고 우리는 넘쳐 흐르는 계란과 부활 밤의 각종 행사 준비로 너무나도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부활을 보낸다. 아무리 알렐루야를 외쳐 보지만 마음은 더욱 공허해질 뿐이다. 올바른 사순이 없었기에 부활은 더욱 비참할 뿐이다. 부활의 체험이 없는 신앙은 앙꼬 없는 찐빵과도 같아서 이러한 공허한 나날이 반복되다 보면 스스로 신앙을 잃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다, 애시당초에 잃을 것조차 없었다. 신앙을 잃은 게 아니라 지금까지 지녀오던 호기심과 흥미를 잃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신앙이라도 있었더라면 우리는 산을 옮겼을테니까.

날카로운 화살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이사 49,2)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을 이렇게 훌륭한 무기로 만드신 것은 영원히 감춰두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절실한 순간에 그것을 꺼내어 쓰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0년을 숨어 계셨습니다. 철저히 드러나지 않고 당신의 신성을 숨기고 계셨지요. 그리고 때가 이르러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뒤에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지요. 우리 신앙인들은 마냥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 그저 힘겨워하고 괴로워하기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갈고 닦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 갈고 닦은 것으로 하느님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둠에 빠진 이들을 멸하시려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어둠에서 사람들을 살려 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도구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어둠에 빠진 이들은 신경질적이고 못되고 이기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에게 다가가서도 사랑을 가르치는 도구가 필요한 것이고 그 도구는 ‘진정한 사랑’ 즉 ‘십자가의 사랑’을 훈련한 도구일 것입니다. 때가 이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화살통에서 화살들을 꺼내어 필요한 이들에게 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그들의 마음 안에 잘 파고들 수 있도록 지금부터 열심히 사랑을 날카롭게 잘 갈고 닦아 놓아야 할 것입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 49,6)

세족례 유감

볼리비아에서 세족례를 할 때에 저는 세족례 당일에 사람들을 직접 골랐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 나왔고 저는 그들의 투박하고 거친 발, 그리고 말 그대로 먼지가 잔뜩 묻은 발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맞이하는 첫 세족례는 이상한 사전 조건들이 자꾸만 붙었습니다. 대상자를 먼저 선별해서 발을 미리 씻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각 사람마다 수건은 다르게 써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일찍이 볼리비아에서 하고 있던 걱정 아닌 걱정이었지요. 바로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해 오던 관습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뭔가 뒤바뀌면 너무나도 어색해 하고 싫어합니다. 세족례는 제자들의 먼지 묻은 더러운 발을 예수님께서 직접 씻으시면서 그 의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더러워서 그 누구도 함부로 만지지 않으려는 발을 씻는 것이지요. 이미 집에서부터 잘 씻겨지고 그날 새로 산 양말을 곱게 신은 발에 물 좀 뭍히고 깨끗하게 세탁된 수건으로 닦는 식으로는 세족례의 본질이 너무나 무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는 한국법을 따라야 하겠지요.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사제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에 어떻게든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 밖에요.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작은 예식 하나 안에 깃든 수많은 찌든 관습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 관습이 진정 사랑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지요. 세족례는 겸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는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침이지요. 헌데 세족례가 그것을 받은 사람을 겸손하고 겸허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도리어 드높고 영예롭게 만들어 버리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만의 착각이길 바랄 뿐입니다.

단상

세상에 거의 모든 성인들은 지상에 살아있는 동안 그 가치를 올바로 평가받은 적이 거의 없다. 사람들은 그들을 곡해하기 일쑤였고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며 비난하고 또 나아가 그들을 파괴하려는 시도까지 일삼았다. 그러나 그들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가를 알아본 이들은 그들을 보살피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미약한 힘이나마 성인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고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은 세상적인 시선으로는 지극히 나약한 힘일 뿐이었다. 기도라는 수단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었다. 그들은 기도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고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도왔다. 기도는 거리도 상관없고 물리적인 수단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한 이들이 서로를 돕기 위해서는 최고의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언제나 부족함이 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부분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부족함을 기꺼이 메꾸어 주시지만 그것을 무턱대고 우리에게 밀어 넣으시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적인 필요만을 공허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굶어 죽는 형제를 소홀히 하는 내가 사업 자금 천만원이 부족하다고 아무리 청한들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없는 셈이다. 먼저는 사랑하는 이를 돌보는 마음을 갖추어야 순리에 맞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탐욕은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 자신의 고통과 부족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눈을 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돕기는 커녕 그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감시하고 또 심지어는 그를 가로막기도 하는 것이다. 눈을 떠야 한다고 부르짖는다고 눈이 떠지지는 않는다. 본인 스스로 뜨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한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죄

갈라지는 두 운명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요한 8,21) 자신이 매달려 있는 것의 더러운 실체를 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원 요청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벗어날 생각은 커녕 도리어 그것을 사랑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지게 됩니다. 인간은 죄를 사랑합니다. 물론 이렇게 표현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올바로 이해하고 나면 실제로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법 규정의 어김’이 아닙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판공 때마다 울며 겨자먹기로 고백하는 ‘주일 미사 미준수’ 따위의 피상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죄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이라도 가장 근본적인 내면의 방향성이 하느님을 향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 교회의 유명 신심단체 회원인 A씨를 바라봅시다. 그는 성당 일에 정말 열심입니다. 주 중의 적지 않은 시간을 성당에서 보냅니다. 여가 시간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신경질적이고 특히나 집에서 가족들과 올바른 친교를 이루지 못합니다. 친척들과의 관계도 거의 무너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성당에만 와서 자신이 선호하는 신심단체의 일을 할 때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과연 그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는 ‘대리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일상적으로 노력하고 개선시켜 나아가야 할 것은 소홀히 하고 대신에 거기에서 부족해지는 인간적 애정을 ‘교회 신심단체’를 바탕으로 채워 나가려는 것이지요. 교회는 그의 내면의 정서적 불안의 대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는 장소, 즉 하느님의 뜻을 자신 안에 충만히 실현하기 위해서 더 배우고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서 나아가는 장소가 아니라는 말

들어올려진 사람의 아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요한 8,28)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당신의 모습을 올바로 드러내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일단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게 앞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 쓰는 아이의 마음 속에는 이미 엄마의 소중함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달아나고 없는 법입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럼 나 간다 너 혼자 잘 해봐’라고 나서기라도 하는 날에는 더 놀라서 두 배로 울게 되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사로잡혀서 사람의 아들을 바라볼 겨를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저마다 추구하는 욕구를 향한 집착이 너무나도 강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의 아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를 조금 더 환기시키기 위해서 현실에 대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10억짜리 사업을 하던 사람이 이익금 3억을 받을 것을 2억만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2억을 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잃은 1억원이 너무나 아까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 이가 자신의 주변에서 100만원이 없어서 고통받는 이웃의 현실을 보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손으로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것입니다. 물론 그냥 들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아 들어올리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제서야 그 분을 보고는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해서는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를 찾아가 보지도 않고 돈이나 부쳐대던 아들이 결국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머니의 숨겨진 진실, 아들을 위한 끊임없는 희생과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는 후회감… 자신이 소홀히 대하던 아내, 다른 여인에게 눈이 팔려 외도의 시도를 수도 없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

믿지 않는 신앙인들

치료하지 않는 의사를 의사라 할 수 없고, 가르치지 않는 교사를 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타이틀만 지니고 있다고, 그저 학식만 따고 있다고 해서 붙여지는 칭호는 본질을 망각하고 왜곡한 것이 됩니다. 신앙인들은 ‘믿기’ 때문에 신앙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세례만 받았다고 해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살아가는 내적 결심이고 구체적인 외적 실천의 행위입니다. 가난한 이 안에 살아 숨쉬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이는 그들의 외적인 추함에 그들을 기피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믿는 이는 자신의 내적인 그런 믿음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런 믿음을 구체적으로 살아가기에 신앙인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생활은 세상의 평범한 다른 이들의 삶과 남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좀처럼 하지 않으려는 일을 신앙인들은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신앙인들은 가진 것을 내어 놓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비천해지는 자리를 기피하려 하지만 신앙인들은 겸손과 순명이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맡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들의 믿음을 드러내는 외적인 표지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인들이 ‘짠 맛’을 지니고 있는 이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앙인들에 대해서 은근한 매력을 지니게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신앙인들이 이러한 짠 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신앙인’이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음에도 이 세상에는 이러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저 신앙인의 타이틀만 받아 두고는 실제로는 믿음의 생활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잇속에 밝고 자신을 희생해서 남들을 도우려 하지 않는 신앙인들입니다. 주일 미사나 겨우 나오고 그마저도 얼른 도망쳐 버리는 개인주의적인 신앙관에 사로잡힌 이들이지요. 이들은 언뜻 믿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

영적 건축

집을 짓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세상 안에서 집을 지으려면 건축 재료들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벽돌을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벽돌을 쌓고 그 사이에 시멘트를 바르고 하면서 벽을 쌓아올려 갈 것입니다. 벽돌의 재료도 여러가지가 있으니 싸구려 재료부터 고급 재료들이 있지요. 그런 재료의 차이에 따라서 건축물의 완성도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면에서도 건축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보들을 접하고 그것들을 외우고 이해하면서 우리 내면에 지서의 건축물을 쌓아올릴 수 있지요. 얼마나 다양하고 고급 정보들을 습득하느냐에 따라서 지성의 건축물의 종류도 더욱 튼튼해지고 고급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는 어떻게 건물이 지어질까요? 영혼과 관계되는 고유한 영역은 과연 무엇일까요? 영적인 면에서는 ‘사랑’이 그 재료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히 표현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순수 그 자체로 남아있는 경우는 잘 없고 우리의 이기적인 욕구들과 많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 정말 그 여인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의 결심을 다지기보다 그 여인의 외적 조건들이 마음에 들어서 사랑하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합니다. 그녀의 외적 아름다움과 그녀의 성격과 같은 것이 내 마음에 드는 것이지요. 이 사랑의 근본 안에는 ‘의지’라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의지가 포함되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이끌리는 매력이 아니라 ‘결심’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순수해지려면 사랑 앞에 ‘장애’가 있는데도 사랑으로 다가서려고 노력할 때에 그 사랑의 순수성이 더 짙어지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의인은 사랑하려고 하겠지만 그리고 의인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어 바치려고 하겠지만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려고 드는 경우는 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당신의 사랑의 정점을 드러내신 것이지요. 따라서 영혼의 건축물을 짓는 데에는 우리의 ‘의지’ 즉 ‘결심’이 중요하게

공동체의 장

공동체의 장이라는 직분은 장으로서 누리는 ‘권리’와 더불어 ‘책임’이 뒤따르게 된다. 단순한 공동체의 구성원일 때에 지니는 권리보다 더 많은 권리를 지니는 한편, 그에 상응하는 더 많은 책임이 늘 요구되는 것이다. 이를 잊기 시작하면 그는 권리만을 누리고 책임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결국 구성원들에게 마음으로 내쳐지게 된다. 또한 그 직분은 ‘고독’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직분이다. 단순한 구성원일 때에 다른 이들과 맺던 관계는 장이 되는 순간부터 다른 차원에 들어서게 된다. 공동체의 장은 언제나 ‘신중함’과 ‘균형감각’이 요구되고 정의를 올바로 실천하도록 요구되기 때문에 한 측의 의견에 지나치게 기울다보면 언제나 그릇된 분별에 빠지기 쉽고 반대측의 부정적인 의견에 휘말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까지 친하게 지내오던 관계도 공동체의 장이 되는 순간부터 자제할 필요가 있게 된다. 사람들은 감투를 쓰고 싶어한다. 그 이유는 그 감투를 통해서 다가오는 권리들이 달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감투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감이 요구되는 법이고 또한 인간적인 고독이 수반되는 법이다. 이를 간과하면 그는 감투의 달콤함만을 추구하고 본질을 무시하는 이가 된다. 그리고 그의 행태는 이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확연히 드러나게 되고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가 지닌 권력의 힘 때문에 그를 따르기는 하겠지만 결코 마음으로 존경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합당한 준비와 특별한 사명감이 없이 이 장의 직분을 선호하는 사람은 기름 가마니를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도 같다. 그는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고 그 권력이 가져다주는 씁쓸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 열매는 언제나 최후에 다가올 것이니 그러는 동안 그는 더욱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고 훗날 자신에게 다가올 재난을 키우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장의 직분’은 필요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특별한 사명감, 즉 신앙에서 기반하는 봉사정신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요한 11,38)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셨던 것은 죽어버린 자신의 친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기에 그것이 그분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거기에 모여든 이들의 변하지 않는 마음, 여전히 세상을 추구하고 진정한 빛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 때문에 안타까워 하신 것입니다. 라자로는 부활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일찍부터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많은 시간을 지체하여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완전히 죽어버린 한 인간이 다시 살아 나오는 것을 목격하여 이 사건을 절대로 잊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은 그대로 일어나게 됩니다. 라자로는 죽어버렸고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분명하게 두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생명의 복음을 지니고 오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생명이셨고 또 누구든지 원하는 이에게 그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었지요. 역설적이게도 문제는 죽은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큰 일이 될 능력이지만 예수님에게는 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육신이 골백번 죽었다 깨어난다 하더라도 영혼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한 인간의 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발단으로 ‘수난’의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전까지 잘 간수해 오던 마지막 방어선을 이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서 무너뜨려 버린 것이지요. 악인들의 시기와 증오는 바로 이 라자로의 사건을 통해서 폭발하게 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앞당겨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없더라도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징표는 주어져야 했고 사람의 아들은 이 일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지 못하는 마음, 자신의 영혼을 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