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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17의 게시물 표시

단상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을 여러가지 다른 수단으로 받아들인다. 즉 그것을 말하는 이의 권위로 받아들이거나 비록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체험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진리나 교리들은 때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바로 이 때에 우리 앞에 도전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바로 교회의 권위 때문이다. 교회가 자신이 살고 고백하는 것을 우리는 그 권위를 통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헌데 이 교회는 완전하지 못하고 약점을 지닌 이들이 모여 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하지만 그 구성원들이 모두 거룩하지는 못하다. 그리고 때로 우리는 교회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주어진 지도자의 인간됨을 목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이들,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기까지 가 닿지 않은 이들은 바로 눈 앞에 주어져 있는 롤 모델의 나약함과 부족함에 실망을 하고 자신이 거머쥐어야 할 신앙의 선물 마저도 내던지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체험이다. 헌데 이 개인적인 체험에는 위험성이 있으니 바로 내 안에 올바른 분별력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단 맛을 좋아해서 몸에 해로운 음식을 좋다 하고 몸에 유익한 음식은 그 맛 때문에 싫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체험적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들은 곧잘 오해되고 우리에게 그릇되이 작용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래서 여러가지 사이비와 이단들이 득실거리는 셈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들이 나의 개인의 체험적으로 좋다고 그들을 말하지만 그 자신들의 체험 자체에 오류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해소할 올바른 방법은 무엇일까? 본질에 충실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양산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가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올 수만 있다면

술과 담배

얼마 전 성당에서 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식사 자리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한 형제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자꾸 강론대에서 술 담배 좋지 않다는 이야기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찔리는 사람이 좀 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즉시 ‘담배’가 되어 버렸습니다. 담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담배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에 대해서 또 어떻게 담배를 끊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꺼내었고 이 주제는 그 자리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이야기는 강론대에서 공공연하게 다 했으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술과 담배는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무조건 술을 마신다고 질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도한 음주, 습관이 되어가는 음주를 질책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담배는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자신이 도로 입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절제있게 술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술, 즉 알코올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호락호락하게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취기를 얻기 위하여 찾는 술은 현실 도피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 쓰일 수 있고 현실이 힘들 때마다 찾는 술은 자신의 건강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데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독과 파괴는 지극히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라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자각하는 때는 이미 시기가 늦어버린 셈이지요. 담배에 관해서는 조금 더 엄격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담배는 그 자체로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연기와 냄새는 담배를 즐기지 않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피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사제가 할 일은 사람의 내면을 바로세우는 일입니다. 헌데 영적인 것만을 다루라고 한다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면 사제가 할 말은 없습니

기싸움을 하는 이들

어느 본당을 가든지 ‘기싸움’을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더 힘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는 사람이지요. 그런 이가 내세우는 것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믿음, 희망, 사랑, 기쁨, 겸손, 인내, 친절, 온유’와 같은 것은 드러낼 수 있는 지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싸움을 하는 이들은 ‘특정 신심 프로그램 차수, 수료증, 어느 높으신 분과의 친분관계, 자신이 하루에 바친 기도 중에 숫자를 세고 드러낼 수 있는 것들, 성무일도 바침의 유무, 친척 중에 사제나 수도자의 유무’ 등등을 드러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게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어 나를 낮추어 보려는 이들이 다가올 때에 과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바로 거기에 필요한 구절이 다음의 구절입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42)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에서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로 우리의 보다 소중한 것들을 가져가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 앞에서는 ‘겸손, 온유, 친절’을 내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내어주는 그 가치들이 우리 안에서 더욱 크게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먼 훗날에 그들, 즉 우리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려고 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크게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를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능력조차 없는 것이지요. 용기를 내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수난 당하시고 침뱉음 당하시고 구타 당하시고 온갖 수모와 불의를 겪으신 주님께서 결국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한 16,8-11) 주일미사에 빠지고  교회 규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진정한 죄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지 않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법과 신자의 의무를 지키면  의로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로움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심판은 아주 소소한 일들까지  모두 체크 당하고 기워 갚아야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헌데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고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부터 벌써 심판에 동참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를 스스로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 사랑에 동참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 행동으로 드러내신 바가 바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미 죄에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죄의 규정이 따로 필요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 선을 넘으면 선이고 선을 넘지 못하면 악이라는 규정이 필요했고 그것에 온통 마음을 쓰며 지키려고 하지만 정작 사랑하지는 않는 이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이 곧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 가는 예수님에게 의로움의 길이 있지요. 예수님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이 의로움을 찾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한 표징을 찾곤 했습니다. 바로 곁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다른 표징들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나의 바로 곁에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는데 도대체 그 사람들을 놓아두고 어디에서 하느님의 표징, 의로움의 표징을 찾겠

큰 착각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요한 16,2) 정반대의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이 좋은 일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릇되이 형성된 신앙관에 의해서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서로 증오하고 이간질하고 다투고 싸우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둘러대고 있습니다. 죄인을 위해 죽으러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을 모독하는 행위이지요. 눈에 드러나게 다른 이를 배척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지닌 어떤 위치나 타이틀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이들 높이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 즉 교만에 빠진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내가 너보다 이런 부분을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높은 위치에 두려는 사람, 그러면서 정작 자신보다 낮은 그들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그냥 그 격차를 즐기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은 영적으로 드높지도 않을 뿐더러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고의 소유자일 뿐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더 잘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사제가 있는 것도, 수도자가 있는 것도 그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에서 분리되어 더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얻은 힘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함이지요. 헌데 그것을 망각한 채로 ‘분리’만 시킨다면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갈수록 상실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직분이 고귀하여 사람들의 존경은 받지만 사람들에게 다가서서 하느님을 살갑게 전하려고 하지는 않는 이상한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의 특징은 절대로 자신이 하는 일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는 신념이 이미 눈 앞을 가리워서 사랑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죽도록 증오하면서도 그것은 ‘정당한 증오’라고 둘러대는 것이지요. 자신의 마음이 어지럽고 평화가 전혀 없는데도 그 탓을 바로 내가 증오하

존재목적

모든 존재에는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의 목적은 잘 드러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복잡성으로 인해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교묘히 가리고 전혀 다른 목적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일단은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이는 모든 생물들의 공통된 존재 목적이지요. 생존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다른 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내면 안에 존재하는 생명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등 따시고 배 부르면 그만이지만 인간은 등 따시고 배가 불러도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문화 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배가 고파도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즉 인간의 존재 목적은 보다 심오한 무언가에 미치는 것이지요. 인간은 바로 내면의 생명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외적 육신 외에도 다른 무언가가 내면에 생생히 살아 숨쉰다는 것이지요. 가톨릭에서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길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은 이 내면의 생명력 추구를 위해서 전혀 엉뚱한 일들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사람들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고 권력을 쥐려는 식이지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의 생명력이 확장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런 헛된 방향으로 매진하면 할수록 내면의 공허는 더욱 극심해지는 것이지요. 아무리 돈을 벌어봐야 탐욕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으며, 세상 안에서 명예를 얻고 또 얻어봐야 그 뒤에는 다시 명예를 잃고 절망하게 되고,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면 주변에서 모두 그를 공격하여 넘어뜨리려 하니까요. 인간의 내적 생명력의 근원은 그런 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인간들이 부차적으로 만들어낸 엉뚱한 방향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둠의 계획도 깃들어 있지요. 즉, 사탄은 인간들이 다투고 서로 싸워서 진정한 길로 가는 것을 가로 막으려 하니까요. 인간의 원래

실천하는 이

법칙에 대해서는 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해서는 따질 수가 없습니다. ‘가난’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세미나를 펼치고 각종 논문들을 저술할 수는 있지만 ‘가난한 이에게 다가가서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사상가들이 넘쳐나고 실천하는 사람은 부족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이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다가가서 이론으로 따지고 들다가는 그분의 권위에 압도당하곤 했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힘이 있었던 것은 그분이 당신이 가르치는 바를 직접 드러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도, 또 그러고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않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때로 언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서로의 똑똑함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장에서는 그다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굶어 죽어가는 이를 앞에 두고 그에게 오렌지를 주어야 하는지, 사과를 주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든 저든 내가 지닌 먹을 것을 나누어 그를 살려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어떻게 하면 교회를 살릴지’를 논의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믿는 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세미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 둘 곳을 잃고 공허해하는 이들에게 다가서서 뭐라도 먹여주는 이가 필요한 오늘입니다.

우리 세대의 재앙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이고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아주시고 견뎌 주시며 기다려 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하느님을 두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버리곤 하지요. 하느님의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악행들은 단죄 당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잘못 쓸때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재앙이 내렸을테지요. 그러나 일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참으시고 견디시고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의 고통을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당신의 외아들의 수난도 지켜보셔야 했지요.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이셨으니까요. 잊지 맙시다. 하느님의 자비를 낭비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하느님이 무력하거나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냉소적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랜 탐욕이 지구상의 환경재앙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의 영적인 무관심이 우리의 영적 재앙을 준비하고 있는데도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때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영원하지 않으며 유한한 존재라는 것, 우리가 실제로는 하잘 것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내시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제야 놀라서 다시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입니다. 그 재앙이 지나가고 나면 또다시 그들은 일상의 어지러움에 마음을 담궈 버리니까요. 그렇게 수많은 세대들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한 세대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면 다음 세대는 또다시 자신들의 삶을 산다고 바쁘게 되고 또다시 망각은 시작되게 됩니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은 자신들과 거리가 먼 것처럼 살아가지요. 악순환의 반복인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생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고자 헌신합니다. 그들은 외치고 부르짓고 호소하지요. 사람들이 제발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굼뜬 그들은 좀처럼 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 10,25-26) 지난 주일 저는 신자분들에게 ‘우리는 과연 양인가?’를 질문했습니다. 왜냐면 자신들이 양이라고 착각하는 수많은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양이라고 하는 이유는 판공을 거르지 않았기 때문이며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과연 양이 되는 조건일까요? 그럼 상황을 바꾸어 봅시다. 악한 이들은 판공을 거르고 미사에 빠지는 이들일까요? 다른 질문도 가능합니다. 판공을 거르지 않고 미사에 빠지지 않는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올바른 길을 잘 걸어가는 신앙인들일까요? 이 질문에 수많은 이들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생각해 본 현실이기 때문이지요.  정말 대외적으로 열심하다는 어느 단체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 단체에 들어가서 보니 그 사람이 정말 게으르고 불성실하며 인격적으로 미성숙하고 곧잘 이간질을 시키며 주임 신부님이나 본당의 다른 간부들 앞에서는 정말 화려한 언변과 놀이 기술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애쓰는 사람인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일미사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또 심지어 주일미사도 띄엄띄엄 나오는 이가 있어서 정말 게으르고 불성실한 신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가 남들 모르게 하는 선행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 앞에서 수없이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말씀은 당신의 삶이었지요.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삶따위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당시의 대제관의 추천서를 받아 왔더라면, 공적으로 선언된 문서나 학위를

성체

예수님의 몸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셨고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한 인간으로 존재하셨지요. 이는 마치 우리의 몸에서 영혼을 따로 떼어내서 조사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먹으라고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몸을 먹지요. 물론 우리가 먹기 쉽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빵’이라는 형상을 사용하십니다. 실제의 몸의 형상 그대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신성과 인성을 그대로 주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그분을 받아 모시면서 양측으로 다 받아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 입에 들어가는 빵으로만 그분을 모시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분을 나의 영혼으로 받아모셔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여기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미사에 나오고 성체를 모시지만 그저 외적인 형상의 빵을 집어먹을 뿐이지요. 실제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낭비한 성체의 은총을 나중에 꼽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수많은 성체 가운데 하나의 은총도 우리의 삶으로 이루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주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놀라지 않게, 우리가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게 당신을 철저히 숨기십니다. 그리고 선택된 영혼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영혼들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예수님의 현존을 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박해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예수님의 현존애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구의 충족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올바르게 받아 모실 때에 그러합니다. 바로 영과 육으로 모두 경건히 받아모실 때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몸을 제대로 받아모실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