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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 10,25-26)

지난 주일 저는 신자분들에게 ‘우리는 과연 양인가?’를 질문했습니다. 왜냐면 자신들이 양이라고 착각하는 수많은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양이라고 하는 이유는 판공을 거르지 않았기 때문이며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과연 양이 되는 조건일까요? 그럼 상황을 바꾸어 봅시다. 악한 이들은 판공을 거르고 미사에 빠지는 이들일까요? 다른 질문도 가능합니다. 판공을 거르지 않고 미사에 빠지지 않는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올바른 길을 잘 걸어가는 신앙인들일까요?

이 질문에 수많은 이들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생각해 본 현실이기 때문이지요. 

정말 대외적으로 열심하다는 어느 단체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 단체에 들어가서 보니 그 사람이 정말 게으르고 불성실하며 인격적으로 미성숙하고 곧잘 이간질을 시키며 주임 신부님이나 본당의 다른 간부들 앞에서는 정말 화려한 언변과 놀이 기술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애쓰는 사람인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일미사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또 심지어 주일미사도 띄엄띄엄 나오는 이가 있어서 정말 게으르고 불성실한 신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가 남들 모르게 하는 선행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 앞에서 수없이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말씀은 당신의 삶이었지요.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삶따위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당시의 대제관의 추천서를 받아 왔더라면, 공적으로 선언된 문서나 학위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저 그 권위에 수긍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그 목소리를 따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목소리, 즉 예수님의 삶의 방식,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수난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그 삶의 방식은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드높이고 찬양하고 왕좌를 내어주는 현실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었지요.

그들이 찾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상의 영화를 바라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양’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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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먼저 사제들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사제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화(聖化)'
즉,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가까이로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악마들로서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사제들은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축복 받았다고 느끼게끔 한다.
축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제가 마음을 담아 전하는 강복의 위력은 한 사람의 하루를 밝힐 수 있다.
그 밖에도 사제가 거행하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사효성(일어나는 일 만으로 이루어지는 효력) 자체 만으로 위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배에 해당하는 악마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악마가 할 최선의 작업은,
그 사제직의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은
사람들이 그 사제의 인간됨을 보고
코웃음을 치게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결국 그의 모든 사제직의 직무수행마저도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게 주된 목적이다.

그래서 그가 가진 인간적 약점을 최우선의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욕구'가 될 수도 있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으며,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누구는 이성을 돌처럼 바라보고 돈을 하찮게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명예욕과 지배하려는 마음이 대단할 수 있으며,
누구는 돈이나 명예, 권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이성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누구는 '나은 생활', '윤택함'에 관심을 갖고 재물의 종이 되어간다.

사제직은 '나약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는 그 인간이 아니라 그가 지닌 사제직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악마의 목적은 그 '인간의 나약성'을 교묘하게 유혹해서 끝까지 드러내어
그가 지닌 '사제직'이 더럽혀…

세족례 유감

볼리비아에서 세족례를 할 때에 저는 세족례 당일에 사람들을 직접 골랐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 나왔고 저는 그들의 투박하고 거친 발, 그리고 말 그대로 먼지가 잔뜩 묻은 발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맞이하는 첫 세족례는 이상한 사전 조건들이 자꾸만 붙었습니다. 대상자를 먼저 선별해서 발을 미리 씻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각 사람마다 수건은 다르게 써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일찍이 볼리비아에서 하고 있던 걱정 아닌 걱정이었지요. 바로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해 오던 관습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뭔가 뒤바뀌면 너무나도 어색해 하고 싫어합니다.

세족례는 제자들의 먼지 묻은 더러운 발을 예수님께서 직접 씻으시면서 그 의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더러워서 그 누구도 함부로 만지지 않으려는 발을 씻는 것이지요. 이미 집에서부터 잘 씻겨지고 그날 새로 산 양말을 곱게 신은 발에 물 좀 뭍히고 깨끗하게 세탁된 수건으로 닦는 식으로는 세족례의 본질이 너무나 무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는 한국법을 따라야 하겠지요.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사제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에 어떻게든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 밖에요.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작은 예식 하나 안에 깃든 수많은 찌든 관습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 관습이 진정 사랑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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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사랑과 고통

하느님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얻는 보상은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 구원이라는 것을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존재하지 않던 것을 마지막 순간에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을 점점 키워 나가다가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탄절에 자고 일어나면 받는 선물이 아니라 지금부터 우리가 조금씩 만들어나가 성탄절에 완성시키는 선물인 셈이지요.

좀 더 본격적으로 ‘구원’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쉽게 말하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주권을 펼치시는 행복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그 나라는 단순히 들어간다고 즐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지금부터 우리가 준비해 나아가야 하는 나라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주권을 지금부터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사랑이 넘치는 나라에 들어가서도 전혀 그 사랑을 즐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편하고 쉽게 채우는 것으로 대체해 버리고 말았지요. 서로의 욕구를 채우는 과정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치환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증거는 자신들이 원하던 것들이 상대에게서 사라질 때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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