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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17의 게시물 표시

혼자 살기

코린토 1서의 바오로 사도의 의견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조금 지나친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는 현재를 ‘재난’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인에 대해서 어찌보면 지나치게 ‘보수적인’인 심지어는 지나치게 ‘종교적인’ 의견을 제시하기까지 합니다. 즉 혼자 사는 사람이면 차라리 그대로 혼자 살라는 것이지요. 물론 현대의 사람들은 이런 바오로 사도의 글과는 크게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떻게 하면 결혼을 잘 할까, 어떻게 하면 배우자를 만날까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의 이 글은 당시에만 해당되던 글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에 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시적인 분별에 사로잡혀 이 글을 적은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들, 즉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일종의 재난의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저는 지금의 시대의 목자로서 분명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참된 사랑을 통해서, 또 하느님을 향한 헌신을 위해서 남녀간에 하나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혹은 사회적인 풍습이나 자신들의 욕구에 의해서 그런 관계를 맺으려고 드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고스란히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설령 원하는 대로 결혼을 하더라도 그게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예견한 대로 현세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잠깐 현대에 일어나는 현상을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습니다. 마치 현대의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의 충고를 받아들이듯 ‘싱글’의 삶을 선택하는 경우가 적잖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방향이 아니라 순전히 이기적인 싱글의 삶입니다. 즉, 누릴 쾌락은 다 찾아 누리면서 절대로 상대와의 계약이나 책임 관계에 물려 살아가지는 않겠다

증상 완화가 아닌 치료

많은 현대인들이 종교를 찾는 목적은 진정한 치유가 아니라 ‘편안함’을 위해서입니다.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힘든 삶에 ‘안락’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용도로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쉽게 다가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어떨까요? 그리스도교도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는 구체적인 방법에서 조금 다른 면모를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기 때문이지요. 아픔을 잊게 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완화’시키는 방법들이 있지요. 약물을 이용해서 신경계를 둔하게 만들어서 급한 통증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그 상처 자체를 치유하고 아픈 부위 자체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방법에는 그에 상응하는 치료행위가 필요합니다. 흔히들 감기약은 치료약이 아니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감기를 낮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감기 증상들을 완화시켜 고통을 경감시키는 방법이 있을 뿐이지요. 감기의 구체적인 치료는 ‘휴식’과 ‘쉼’이기 때문입니다. 즉, 몸의 면역체계를 정상화 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수많은 죄악과 오류들은 그 증상 완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분명히 잘못되어 있는 것을 그저 ‘괜찮다’,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일시적인 감정적 위안을 가져다 줄 뿐이지요.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한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게 하고 그로 인해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직면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교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그 주변에 서성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수십년간 해왔다지만 신부님과 저녁에 술이나 먹을 줄 알았지 실제적인 신앙적인 고민을 직면해 보지 않은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특정 신심행위의

감추어진 말씀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 9,45) 우리의 눈은 가림막이 있으면 건너편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귀는 방음벽이 있으면 근처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에 상응하는 가리는 존재가 있으면 아주 가까이 있는 것도 감지하지 못합니다. 영혼의 이해력은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지금의 문명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이는 다른 동물들이 같은 시대를 살아오면서 절대로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감히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진리’에 대한 이해입니다. 누군가가 기사를 읽으면 그 기사 안에서 설명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같은 것들에 대해서  파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는 조금 다릅니다. 여기에는 원작자가 의도하는 바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인간은 가리워져 있는 저자나 감독의 의도를 파악해 내어야 합니다. 그것은 슬픔일 수도 있고, 기쁨일 수도 있으며, 진한 감동일 수도 있습니다. 헌데 우리는 신앙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바로 곁에서 관찰해 보지만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그분은 더욱 드높이 계신 분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분의 심오함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그 가운데 바로 그분의 ‘사랑’이 있습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겠다는 사람은 때로 존재했지만 죄인들을 위해서 죽겠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을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소위 ‘물들까봐’, 즉 자신들도 그분의 행위에 가담해야 할까봐 심지어는 묻기까지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기성’이라는 가림막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

과거에 묶인 이들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현재를 올바로 직시하지 못하게 됩니다. 현재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과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의 어느 시점, 특히나 죄책에 사로잡혀 있다면 지금의 모든 사건과 사람들을 동일 선상에서 물들여 버리고 말지요. 헤로데는 자신이 죽인 요한에 대한 죄책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듣고도 곧바로 요한을 떠올리게 되지요. 그는 자신의 어두움을 회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우리는 곧잘 과거의 어느 사건, 과거에 형성된 나의 이기적이고 어두운 생각에 집착하곤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현재의 사건과 사람들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새로이 해야 합니다. 옷을 깨끗이 하려면 세탁을 해야 하듯이 우리의 정신도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맑은 영으로 씻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작업에 도움을 주는 것이 고해와 거룩한 미사, 그리고 기도와 진리에 대한 올바른 교육들입니다. 새로운 생각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옛 생각들이 씻겨 나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분으로 우리를 새롭게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껏 들은 것은 예수에 대한 소문일지 모릅니다. 이제는 그분을 직접 만나러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와서 보라’고 하시는 분이시니까요.

듣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 이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한 아이가 제때 밥을 잘 먹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놀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흐뭇하게 그 아이를 바라볼 것이고 아이는 그런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 속에서 나날이 성장해 가겠지요. 하지만 아이가 늘 바르게 자라는 법은 없습니다. 때로는 사고도 치고 부모님에게 반항도 하고 하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의 교회는 완벽주의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여드는 곳이기에 늘 올바른 일만을 기대하기는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말씀 앞에 귀를 막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귀머거리이거나 듣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교회 안에서 나름 입지를 굳히고 존경받는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참된 것’에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 안에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어서 다른 이들의 충고가 그들에게 들려올 리가 없습니다. 또한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이들은 말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지만 절대로 실행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실은 말씀의 내용과 정반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은 용서하라고 하는데 그들은 증오하며, 말씀은 심판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들은 심판하고, 말씀은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기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것만을 추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로는 말씀을 아주 잘 아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실행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예수님의 형제의 위치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겠지요. 모쪼록 지나치게 늦지 않았을 때에 구원을 향해 돌아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악령들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레지오 강복을 들어갔는데 이런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신부님은 악령 들린 사람이 보이십니까?” 그래서 대답해 드렸습니다. “설령 보인다고 한들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런 이가 있다면 누군가가 악령이 들렸다고 이야기해 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손을 펼쳐서 다들 앉으시라고 신호를 드리고 저도 앉아서 차근차근 설명을 드렸습니다. “제 앞에 병이 있네요. 이 병을 제가 손으로 움직이면 이 병은 순응하고 그에 따라 움직입니다. 제 손의 힘이 이 병의 무게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이렇게 물질계는 강한 존재가 약한 존재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영혼은 이런 병처럼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자기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것은 하느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가 어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에게 다가가 상태가 위중하다고 위협을 한다면 그가 과연 순순히 자신이 가던 어둠의 길을 내려놓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성으로 알고 있지요.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면 안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악습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서 그의 잘못을 바로 지적하고 고치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위협하면 그들은 그들의 악습을 고치기는 커녕 더한 어두움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즉, 전에만 해도 드러내던 어둠의 모습을 이제는 더 감추고 숨어들게 되겠지요. 더욱 음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에게 악령이 보인다느니 해서 겁을 주는 게 아니라 반대로 더 큰 사랑과 인내와 겸손과 온유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들이 선한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이 지녀오던 악습을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결정하면서 살아갑니다. 보다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에서 좋은 것을 드러내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

조금의 단련과 다가오는 큰 은혜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지혜 3,5) 게으른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련하는 사람은 그 단련의 결과물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단련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헌데 무엇을 단련할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위해서 시간을 쏟습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돈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합당한 곳에 투자를 해서 돈을 더 벌까 온갖 궁리를 할 것이고 그렇게 할 수록 그들의 능력을 개발되어 나갈 것입니다. 또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은 그대로의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겠지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것을 훈련하고 단련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법’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중요하게 되는 주제이지요. 다른 모든 것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무색해지는 반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신앙인들 안에서 납득되는 논리일 뿐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리석다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좀 더 잘 놀고, 좀 더 많이 벌고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으니 그와 반대되는 일, 오히려 그에 방해가 되는 일은 어리석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의 단련은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느님을 배워 알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에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어리석다고 할 것이며 그와 반대되는 유혹을 끊임없이 내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단련에는 어마어마한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상급이지요. 이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특정한 행위로 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

영적인 고통과 사랑에 관하여

인간의 고통은 여러 면모로 다가오지만 가장 즉각적이고 분명한 것은 신체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체의 고통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겪는 신체의 고통 외에도 다른 고통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때로는 신체의 고통을 넘어서는 통증을 느끼게까지 하기도 합니다. 젊은 연인들은 실연의 고통을 겪기도 하고 어른들은 돈욕심에 사로잡혀 모종의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드물지만 영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사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무언가를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육체의 고통을 극심하게 겪는 이가 정말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는 이가 없다고 한다면 실제로 그를 육체적으로 도와주기도 해야 하고, 또 심리적으로 고통받는 이가 있다면 그 역시 도와주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런 영역들은 이미 세상에서도 그 대응방안이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회복지를 하는 이유가 바로 첫번째 사안에 대응하기 위함이고 정신과 진료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두번째 사안에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세번째’ 영역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고통이지요. 우리의 신체가 적절한 훈련을 받을 때에 높은 산을 올라가도 쉬이 피로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적절한 훈련을 통해서 미리 힘을 길러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제들은 그런 고통을 예방하고 또 실제적으로 고통이 다가올 때에 양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의 고통은 ‘사랑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고통이거나 ‘사랑에 상처를 받아서’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사랑을 갈구하지요. 하지만 쉽게 사랑을 내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도나도 사랑이 부족하다고만 할 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늘 사랑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지요. 사제가 사람들에게 합당한 사랑을 내어주려면 먼저 자신이 사랑을 담뿍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

정의의 불뱀, 자비의 구리뱀

정의라는 것은 공정함을 실천하는 것으로 사실 의로움 앞에서 힘을 잃는 것입니다. 정의는 불법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 마련되는 것이지 올바른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정의는 기껏해야 잘 하는 이들에게 상을 줄 수 있을 뿐인데 이미 선을 실천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거룩한 삶 자체가 행복이기에 특별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정의는 주로 불법을 저지르는 악인들에게 날을 세웁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십니다. 어둠을 그냥 지켜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늘 준비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그 정의는 ‘자비’ 앞에서 주춤하게 됩니다. 자비라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서 정의에 앞서는 것이고 보다 지혜롭고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이미 지나간 자리에는 자비가 활동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먼저 자비에게 정의의 자리를 양보하시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것 역시도 죄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의인이 자비를 필요로 할 이유는 크게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지요. 그들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 자비는 어마어마한 것으로서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도 그 즉시 심판을 받지 않고 자비를 입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느님의 자비의 상징입니다. 바로 구리뱀이시지요. 누구든지 쳐다보면 살라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비롭고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자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쳐다볼 줄 알아야 하고 그분에게 다가서서 구원을 얻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한 편, 그분의 자비의 시대가 끝나고 나면 보다 채비를 갖춘 정의가 다가온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비가 강하면 강할수록 정의는 더욱 엄해지게 됩니다.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에 상응하는 책임은 더욱 늘어나는 것이지요. 불뱀은 언제라도 다가와서 우리를 물

술로 알아보는 죄악의 비유

술에 너무나 찌든 사람이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보거나 의지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이 좋은 걸 안마시고 살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 술을 마셔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저게 그렇게 좋은가? 나도 한 번 마셔볼까?’라고 생각을 하고 술을 마시다가 끊게 된 사람은 ‘나도 저렇게 살고 있었지’라고 생각을 한다. 죄악에 찌든 사람이 아직 심한 죄악에 도달해 보지 못한 순수한 사람을 보거나 중한 죄에 있다가 힘겹게 돌아선 사람을 보면 ‘어떻게 이런 정도의 죄도 짓지 않고 산단 말인가?’라고 생각한다. 죄악의 위중함과 깊이를 모르는 사람은 ‘그 정도는 죄를 지어도 되는가?’ 하면서 죄에 다가서 보려고 하고, 죄악에 빠져 있다가 돌아선 사람은 ‘나도 저렇게 살고 있었지.’라고 생각을 한다. 우리가 순수함을 보존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늘 유혹에 시달리게 되고 어둠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상태에서 다시 되돌아설 줄 알아야 하고 그리고는 다시 어두움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할 줄 알아야 한다. 

투자할 시간이 소진되는 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투자를 합니다. 그리고 투자한 만큼의 결과물을 뽑아내지요. 금을 재료로 썼는데 은그릇이 나오진 않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구요.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내어놓고 그것으로 결과물을 얻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투자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정말 소중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유한한 시간을 지니고 있고 우리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그것을 투자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그 시간을 투자합니다. 누구는 술을 진탕 마시는 시간에, 누구는 자신의 취미 활동만을 하는 시간에, 누구는 돈을 버는 데에, 또 누구는 악을 저지르는 데에 시간을 쏟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물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의로운 삶’이라는 투자처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탐탁치 않게 여깁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세상의 재미난 삶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의로운 삶, 다른 표현으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좀처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마감되고 말지요 . 하지만 인간의 유한성은 ‘죽음’이라는 대표적인 결과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유한한 인간에게는 죽음 외에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죽음을 수용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전혀 다른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영원하신 분’을 신뢰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약속된 말들을 믿었고 영원한 상급을 기다리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믿는 이들’ 즉 ‘신자’라고 부릅니다. 신앙생활은 요행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선에로 나에게 있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수십년을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온 이는 하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착해지기

착함은 그저 가난한 동네에 만원짜리 몇 장 보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착해지는 데에는 내적인 변화가 요구됩니다. 착함은 보다 일상적인 것이며 존재의 근원에 가 닿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해 보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착함에 가 닿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의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착함은 말 그대로 ‘선’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착한 척을 하기만 한다면 실제로 우리는 증오와 원한과 앙심을 선호하면서도(그러한 것을 그대로 나의 내면에 남겨두면서도) 겉으로는 불쌍한 상황에 동정을 보이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증오에 온갖 정당함을 부어 넣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성을 짜내어 우리의 증오를 정당화 시키고 합리화 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꾸며진다고 해도 원래의 것이 성질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증오에서 나온 것은 증오일 뿐입니다. 곧잘 정치판에 분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인으로서 주변의 상황을 인지하고 그에 적절한 반응을 할 필요는 있지만 흔히들 사람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쏟아부어 증오와 원한을 형성한 뒤에 그것을 교묘히 감추고 자신의 증오의 논리를 합리화시켜주는 온갖 이론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증오를 정당화 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이들도 얼마든지 성당에 나올 수 있고 행사와 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준비해야 할 예복, 즉 진리와 선과 사랑의 예복, 즉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그 아름다운 예복을 올바로 준비하지 못할 것이며 훗날 하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선을 즐기지 못하는 이는 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착해져야 합니다. 반항하는 아이가 되지 말고 하느님의 선에 순종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착해짐은 멍청해짐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그 지혜는 세상의 영리함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전해져오는 지혜로움일 것입니다.

영적 정화의 과정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찐득한 더러움이 엉겨붙은 옷이 새하얀 옷이 되는 과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먼저는 더러움을 떼어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 더러움은 어느새 천의 올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어느 것이 더러움인지 어느 것이 원래의 천인지 구분하기 힘든 지경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능한 할 수 있는 데로 옷에 붙은 껌을 떼어내듯이 나의 영혼에 들러붙은 악습을 분별해내고 떼어내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이들이 ‘실패’를 하고 포기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큰 덩어리를 떼어냈지만 옷에는 여전히 ‘자국’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국을 없애는 데에는 그저 우리 손의 힘으로 비비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 자국을 없애는 데에는 특별한 세제나 표백제가 필요한 법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더욱 순수함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가르침의 은총을 얻어야 합니다. 이 두 번째 단계 역시 수많은 이들이 ‘실패’하는 구간입니다. 비록 큰 얼룩이 없어졌다고 할지라도 옷이 완전히 새하얗게 되기 위해서는 늘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나 주변에는 내 옷을 얼룩지게 할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마지막 단계에 이른 영혼들은 더는 세상의 지저분한 요소들을 즐기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소중히 간직해 온 은총을 상실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는 당연히 짓지 않겠지만 죄로 이끌 요소들도 분별을 하고 점점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이 작업을 자신도 모르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호도 안에는 이미 좋은 것, 사랑스러운 것, 희생하고 인내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잔뜩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거룩함을 이루는 이들이 세상과 완전 등지고 살아가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세상 안에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다만 예전에는 그들을 오염시키던 것들이 더는 그들을 오염시키지 못하게

악인에게 하는 경고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에제 33,7-9) 악인에게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지적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의인이라도 자신의 소소한 잘못을 지적당하고 나면 기분이 상하게 마련입니다. 헌데 악인이 자신의 잘못, 수치스러운 죄악을 지적당하고 나면 그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이 일은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먼저는 그 악인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자신에게 독극물을 쏟아넣고 있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면 죽기 때문입니다. 늪에 점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을 내버려두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살리기 위해서 충고를 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이 일은 충고해 주는 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타인의 오류를 알고 있으면서도 충고해주지 않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깊은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그것을 내버려 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우리가 마땅히 그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이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가 죽은 책임이 우리에게도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힘들지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비로소 모든 책임은 그 일을 꾸준히 실천하는, 그 악을 꾸준히 실천하는 이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가 어둠으로 빠져 들 수도

유명하다고 철들진 않는다.

유명세와 철드는 것은 별로 상관없는 두 가지입니다. 헌데 사람들은 유명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이 굉장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유명인사가 한 말이라며 마치 인생의 철학을 다 담고 있는 듯이 되뇌이는 모습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옳은 일일까요? 생물학 박사가 유명해진다고 해서 철학에 도가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수가 유명해진다고 해서 그가 모든 종교의 진리를 파악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들은 유명세로 인해서 세파에 시달릴 것이고 그렇게 정신없는 가운데 자신의 참된 본질을 상실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어린 충고를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저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올바로 듣고, 우리가 이해한 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에 비로소 우리도 그분의 지혜의 은총을 나누어 지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는 천덕꾸러기가 되겠지만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지혜를 지닌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곧잘 사람들의 의견에 휘둘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명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만 사람들의 인기에 부합하는 표현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명세가 추락하는 날, 그리고 하느님 앞에 서는 날, 자신이 내어놓았던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합당한 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약점을 안다면 보완하고 개선시켜 나가야 하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초등학생이 공부할 능력이 없고 어리다고 해서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고 매일 놀기만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훗날에는 져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라는 학교에 들어서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배움을 소홀히 하

인간에게 무서운 것은 인간

자연 재해가 일어나 살던 집을 빼앗길수도 있고, 불의의 사고를 당해 지체를 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충분한 사랑과 관심으로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오히려 그런 어려움 중에 진정한 인간애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건 외적 환경이 아니라 바로 다른 인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의 ‘악’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무너뜨리려 하고 짓밟아 버리고 공포에 떨게 만듭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잔혹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선과 사랑을 배워서 조금이라도 자신들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빛을 아무리 비추어 주어도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유의지’라는 신비의 영역은 빛 대신에 어둠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1테살 5,3) 하느님은 이 모든 것 너머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의로운 분이라서 결국 저마다 제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에게는 의로움을 넉넉히 주실 것이고 자신의 파멸을 준비하는 이에게는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마지막 한 순간까지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 자비는 길 잃은 양을 위한 것이고 그들이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빛의 따스함을 체험해서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들이 국제적으로 지역적으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더 정신을 차리고 참된 진리를 향해서 마음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성당 안의 마귀 들린 이

때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거룩한 날이지요. 합당한 휴식을 하면서 오직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찬미하는 데에 쓰이는 날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주일과 같은 날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일과에서 멀어져서 하느님을 떠올리며 하루를 거룩하게 보내어야 하지요. 회당이라는 곳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모이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성당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지요. 우리는 성당에 모여 함께 거룩한 말씀을 듣고 하느님에게 감사와 기쁨의 기도를 올립니다. 헌데, 그 소중한 날, 그 거룩한 장소 안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안다고 하고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까지 합니다. 마귀는 다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당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일날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들어오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거룩한 마음일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세상의 영, 더러운 마귀의 영에 들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더러운 마귀의 영은 자신의 본질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다른 누구보다도 거룩한 사람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의 외적 활동으로 자신을 치장해서 자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인 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실제로는 더러운 영을 지니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꾸짖습니다. 더러운 영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고 그를 쫓아 내십니다. 그러자 그 마귀는 그가 붙잡고 있던 이를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를 칩니다. 한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갈 때에 그는 자신이 사람들 앞에 내동댕이 쳐진 느낌을 받습니다. 겉으로 위선을 떨던 그의 내면이 진리를 마주하여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오던 은밀하고 수치스런 일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기분이라 그는 마치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을 느끼게 되

의인을 향한 악인의 공격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29-30) 사람들의 악은 예수님을 극단으로 몰아가지만 예수님은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오십니다.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요. 예수님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사람들의 죄악을 한 몸에 지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악은 언제나 선을 밀어붙입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왜냐하면 선은 악에게 ‘부담스러움’이기 때문에 악에게 있어서 선은 사라져 없어져야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이들, 세상안에서 정의를 추구하고 평화를 찾으며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이들은 언제나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의 도전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그들 특유의 괴팍함과 음험함, 사악한 영리함으로 선한 이들을 압박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악한 이들은 ‘대화’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대화라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악한 의도를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이들은 짜증, 분노, 고성과 같은 수단에 익숙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침착하게 나누는 일에 미숙하며 그렇게 해야 할 마땅한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합일점을 찾아야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상대를 이겨야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언제나 벼랑으로 밀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의인들에게 초자연적인 도움을 내려 주시곤 하십니다. 그리고 의인은 자신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그 밀어붙이는 이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때가 이르게 되면 의인들은 그에 합당한 수난을 당하게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추가를 하면, 적지 않은 악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야말로 수난을 당하는 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나 의인과 악인을 나누는 훌륭한

우리는 문제가 있는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습니까? 설령 나 자신에게는 특별히 문제 없는 하루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걸로 끝인가요? 나는 나 혼자 살아가는 사람 맞습니까? 아니면 타인의 오류와 그릇됨은 결국 나의 책임이기도 한 것인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우리는 ‘올바른 시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올바름’의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할 것입니까? 저마다 다른 근거지에서 이 ‘올바름’을 시작한다면 결국 자신의 근본 거처에 따라서 서로 부딪히게 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수학적인 명제를 이야기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연 과학적인 명제를 이야기한다면 언젠가는 두 부분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의견이 존재하게 될 것이고 결국 둘은 하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 같은 근거지에 서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신뢰의 근거를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같은 신앙인들은 비록 다른 모양새를 지녔지만 분명한 하나의 동일한 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의 근거를 제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이 하느님을 같은 분별의 근거로 삼고 모든 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질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드러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뜻을 두고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많이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이 이것을 원하신다 저것을 원하신다 하면서 갈라진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이 이런 진리를 말씀 하시다가 또 다른 진리를 말씀 하시다가 하실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오직 그 진리를 따르려는 맑은 영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성경과 교회가 바로 그 대표적인 두 주자입니다. 성경을 적은 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