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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17의 게시물 표시

의심

멀쩡히 잘 살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남편이 다른 여자와 길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아내의 친구가 보게 되었고 그리고 그 사실을 아내에게 전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객관적인 정보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최근에 알게 된 어느 유명인의 바람난 기사거리를 들추어가며 엄청난 의심을 더해서 그 정보를 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심’이 끼어들기 시작한 부부는 머지 않아서 관계가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의심’이라는 것이 이루어내는 파괴적인 결과입니다. 물론 그 의심은 단순히 그 자신만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수다스러움’과 ‘허영심’, 그리고 ‘과장’과 같은 것들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누군가가 받아들이게 된 하나의 사실과 정보로 인해서 그것이 과장되게 되고 말은 전해지게 되어 결국 파괴적인 결과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 결과물이 최종적으로 드러나기 직전까지는 아무도 거기까지 가 닿게 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 든 예는 극단적인 경우이고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이런 일을 자주 겪게 됩니다. 어제 웃으면서 만난 친구가 오늘은 어째 달라 보이는 이유는 그 사이에 내가 듣게 된 어떤 하나의 소식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심을 부추기고 상대에 대한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독이 든 말의 씨앗을 먹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침묵’을 훈련할 줄 알아야 하고 분별력을 기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머무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 인간적인 위로를 찾아 다니는 순간부터 우리는 원하는 인간적 위로와 더불어 우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끄는 어둠을 불러 들이게 될 것입니다.

신앙적인 감동

신앙적인 감동을 느끼는 것과 감정적인 흥분을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입니다. 신앙적인 감동은 결국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에게 대해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거룩한 내면의 변화라고 한다면 감정적인 흥분은 우리의 감정이 자극을 받을 때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심리적 반응이기 때문이지요. 적지 않은 신심 프로그램에서 노리는 것은 많은 경우에 신앙적인 감동이기보다는 ‘감정적인 흥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프로그램들은 감추어져야 하고 외부에 발설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에 감정적인 흥분의 정도가 감쇄되기 때문이지요. 이미 다 아는 것에는 흥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신심 프로그램들이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신앙적인 감동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다가감으로써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적인 감동은 비밀스러움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는 행위이고 늘 하는 행위이더라도 그 안에서 나의 내면의 변화에 따라 그 감동이 느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사’입니다. 우리가 가장 쉽고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뭔가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됨으로써 감정적 흥분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미사는 매일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체험하게 된 이에게 미사는 날마다 신앙적인 감동을 전해줍니다. 우리는 감정적인 흥분을 찾아 헤매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신앙적인 감동을 찾아야 합니다. 

고해는 누구에게 보아야 할까요?

신자 측에서는 이런 사제를 찾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일단 내 목소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제, 그리고 한 번 만나고 나면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제, 그리고 무슨 죄든지 그냥 다 좋으니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 좋은 말 몇마디만 해 주는 사제… 하지만 이런 사제를 찾아다니는 신자의 그 마음 자체는 사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비유를 하자면 병에 걸렸는데 가장 불성실한 의사를 찾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번 한 번 만나고 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임시로 파견된 의사라서 환부를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고 그저 다 괜찮다고 하면서 아무 약이나 처방해 주는 의사와 똑같은 셈이지요. 그렇게 상처를 보고 나면 상처가 낫는 것이 아니라 도로 상처가 썩어들어갑니다. 하느님 측에서는 이런 고해를 주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좋은 의사가 하는 일 그대로입니다. 그는 환자가 아파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노력은 하겠지만 의사의 본질적 사명은 단순히 고통을 줄이는 게 아니라 이 고통을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아픔을 무릅쓰고서라도 원인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합니다. 필요하다면 상처를 더 벌려 보더라도 그 원인을 파악해 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상처에 가장 적합한 치료방법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제는 고해자와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라 고해자를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해는 한 사제에게 ‘지속적’으로 보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그리고 사제로서 올바른 분별을 위해서 때로는 필요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해 당사자로서는 어떻게든 빨리 죄를 내던지고 도망가 버리고 싶겠지만 올바른 고해 사제는 고해자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분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고해자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합당한 도움이 되는 조언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나게 되는 적지 않은 신자들은 아직 신앙적 유아기 상태를

읽기 싫은 성경

성경의 신학적 연구 내용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절 하나 단어 하나로 논문을 써 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런 모든 연구를 섭렵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세상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성경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읽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읽고 그 안에 든 것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읽어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성경에 접근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요? 이는 성경이 어떻게 쓰여졌는가를 올바로 아는데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은 과학적 진리를 서술한 과학 참고 도서도 아니요, 역사적 사실을 나열한 역사책도 아니며 사람들을 그저 감동시키기 위한 문학책도 아닙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성경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러한 방향에’만’ 빠져들기 시작하면 성경은 그릇되이 이해되기 십상입니다.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통해 저술된 것이며 따라서 성령을 통해서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역시 동시에 가장 어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성령을 통해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령은 거룩한 영이고 하느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하고 또 그렇게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성경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영이고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영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자신 안에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올바로 살아 나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탐욕이 가득한 사람이 ‘청빈’이 주제인 책을 읽으려고 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 중의 하나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즉, 몇 장 읽다가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내용들에 가슴이 시려서 책을 덮어 버리던가 아니면 그 책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

지금의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물론 찾고 찾고 또 찾으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거의 모든 방법들은 이미 세상에서 먼저 찾아서 다 실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과거 교회 내에 학식이 있는 이들이 세상보다 많았을 때에 미처 사회가 다 하지 못하는 일을 교회가 도맡아 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짓고 병원도 지은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날 세상에 속한 이들이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욱 사리에 밝은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교회의 일처리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정도지요. 그래서 중요한 건 ‘방법’이 아닙니다. 방법은 사실 저마다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서 무엇이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전하려고 하는 것, 과연 무엇을 진정으로 전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여정이 2000년을 넘게 걸어오면서 가지들은 많아졌는데 정작 그 가지들에 수액을 공급해야 하는 줄기가 제대로 보살펴지지 않는 셈입니다. 수많은 방법론들과 신학들이 존재하는데 그 안에 진정한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방향전환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우리가 가장 최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신앙의 본질, 즉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여기에 집중하지 않은 채로 다른 모든 것을 돌보는 교회는 결국 제대로 힘을 얻지 못해 지탱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본당의 수많은 활동 단체들과 그 수많은 사목 회의들 안에서 우리는 ‘본질’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안에 머물러 계시는지요? 아니면 그저 드러내기 위한 과시용 활동들이 그 자리를 가득 메우고 결국 거룩한 성전의 제단 위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흉측한 것, 즉 이기심과 위선과 가식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살펴 보아야 합니다.

기쁨의 종류

우리의 삶에는 여러가지 기쁨이 존재합니다. 맛난 음식을 먹는 기쁨부터 시작해서 하느님을 마주하는 기쁨까지 다양한 종류와 ‘수준’이 존재하지요.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이런 기쁨들을 찾아갑니다. 가장 기초적이고 강렬한 것은 바로 우리 오감으로 체험되는 기쁨들입니다. 이를 쾌락이라고 부르지요. 어린 아이가 모빌을 보면서 신기해하는 것, 까꿍을 하는 엄마 얼굴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또 단 맛을 즐기게 되는 것, 부드러운 인형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어린 시절의 강렬한 기쁨의 체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다음으로는 감정적인 기쁨과 이성적인 기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 따스한 체험이 있을 때에 아이는 기뻐합니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기분을 알아채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의 웃음에 자연스럽게 물들어가고 또 그와 반대로 주변 사람들의 어두운 감정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요. 그리고 무언가를 새로이 배우는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새로운 동식물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탐구해 나가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어 ’관계’의 기쁨입니다. 부모와 맺는 관계, 또 친구와 맺어가는 우정의 관계 안에서 기쁨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행동을 하기도 하지요. 적장 본인의 성취감보다는 다른 이들의 얼굴에 미소를 보기 위해서 무언가에 열중하는 아이도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관계의 기쁨 가운데 최고의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지요.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 속에서 체험하는 가장 내밀하면서도 가장 강렬한 기쁨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기쁨들은 우리의 인생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어느 한 기쁨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드러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서 성당의 조각물들에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고, 성당의

뜻을 수용하기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야 늘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이익’입니다.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따져보고 단 0.1퍼센트라도 이득이 존재할 때에는 움직이는 것이지요. 물론 개개인의 욕심에 따라서 그 비율에서 차이가 나는만큼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이냐 아니냐를 바로 세례의 유무로 따지고 드는 것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여부는 그의 외적 조건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수도 없이 반복해서 가르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날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대표적인 이야기이지요. 우리는 그 내면의 방향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바로 이 세상의 효율성과 이득을 벗어난 범주를 살아가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뜻’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비록 지금은 손해를 보지만 하늘에 계신 분이 참되고 올바르시니 언젠가는 당신의 의로움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신뢰하는 이가 바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 순종의 최고봉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다투고 싸웁니다. 저마다의 이득이 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육이 있다고 사제가 보내더라도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당장 거절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겉으로야 온갖 이유를 들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결국 마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좋은 직분을 합당한 사람에게 수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다른 수만가지 이유를 대겠지만 결국 자신이 아직 하기 싫다는 것이 가장 으뜸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자신에게 별로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흐름이지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별을 바탕으로 직무를 수락하고 거부하는 경우도 있을테지요. 하지만 무언가를 못하겠다고 잡아빼

연중31주 홀수해 평일강론 모음

2017 년 11 월 5 일 주일 [( 녹 ) 연중 제 31 주일 ]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 자신을 모시는 동안은 자기 자신이 가장 드러나 보이고 돋보여야 합니다 . 그래서 그들은 자기자신을 최고의 가치로 만들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합니다 . 바로 거기에서 파생되는 것이 교만이고 허영입니다 .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나타냅니다 . “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 ( 마태 23,5-7) 2000 년 전의 말씀이지만 사실 오늘날 사람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여전히 우리 교회 안에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드높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 특히나 한국은 등급을 매기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가장 먼저 사람을 만나면 묻는 것이 그의 ‘ 나이 ’ 입니다 . 그래서 나이가 차이가 많이 나면 자동적으로 위계질서가 생기고 등급의 차이가 생겨나는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나이가 들면 배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 저는 반대의 경우를 적잖이 보았습니다 . 나이만 들었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허황한 생각으로 가득한 어르신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 그들은 스스로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그 자신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실체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 자신이 높아지려는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