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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꽃들에게 희망을   제 1 장 옛날에 줄무늬진 작은 애벌레 한 마리가 오랜 동안 자기의 둥지였던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세상아, 안녕」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햇빛이 비치는 세상은 참 찬란한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곧 자기가 태어난 곳인 나뭇잎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또 다른 잎을 먹어치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잎을... 또 다른 잎을... 이리하여 점점 크게... 더욱 크게.. ...더욱 크게 자라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먹는 일을 중단하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삶에는 그냥 먹고 자라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지 않겠는가.」 「지금과 같은 삶은 재미가 없어지는데.」 그래서 줄무늬 애벌레는 자기에게 서늘한 그늘과 먹을 것을 제공해 주던 그 다정한 나무에서 기어 내려왔습니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땅 위에는 온갖 신기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풀, 흙, 땅 속의 구멍들, 그리고 작은 벌레들 - 모든 것이 그를 황홀케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자기처럼 기어다니는 다른 애벌레들을 만났을 때 그는 몹시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는 일에만 열중 하느라고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삶에 대해서 나보다 더 아는 게 없구나」하고 그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어느 날 줄무늬 애벌레는 기를 쓰고 기어가고 있는 애벌레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나 사방을 둘러보니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커다란 기둥이 하나 보였습니다. 그들 틈에 끼여서 기어가다가 그는 알아냈습니다... ... 그 기둥은 무더기 져 쌓여서 꿈틀거리며 서로 밀치는 애벌레들의 더미라는 것을... 애벌레로 이루어진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애벌레들은 애써 꼭대기로 오르려고 하는 것 같앗습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는 구름 속에 가리워져 있었으므로 거기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줄무

말과 행동

신학교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경우에 '말'은 가장 말이 많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행동에서는 굉장히 뒤쳐지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에서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말로 메꾸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 이들의 말은 무게감이 없기 때문에 굉장히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유행을 주도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년 내내 그 말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 개그 프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 저것을 흉내내면서 다니면 그 개그 프로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도 그 프로에 대해서 알게 되기도 하곤 했습니다. 술과 향락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경우가 통상적이었기에 그런 이들이 주도하는 모임에서는 언제나 술이 빠지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 또 반대로 어떻게 하면 노력하지 않고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와 같은 것도 심심찮은 주제가 되곤 했습니다. 대침묵이나 그 외의 신학교의 규율도 그들은 틈만 나면 깨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감시자가 없으면 침묵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규율도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자신들의 후배들에게는 더욱 철저히 규율을 요구하기도 했고 없던 규율도 만들어서 적용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반면 맡은 바 책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바로 그들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수락한 책무에 대해서 성실한 이행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그들의 몫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일을 말만 많이하는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실천에 필요한 소중한 시간을 공연한 호기심거리에 모두 빼앗겨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 기사들은 저마다 관심을 가져달라고 아우성이고 텔

위선

악을 악의 모습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있으니 사람들은 지레 그것을 알아보고 피합니다. 하지만 악을 '선'으로 가장해서 실천하면 사람들이 그것이 악인지 모르고 다가서게 되고 결국 그의 내면에 숨어있던 악을 체험하고 난 뒤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위선이라는 것이 그것을 실천하는 이에게 배로 더 중한 책임을 묻게 되는 이유입니다. 위선을 저지르는 자는 악을 실천하는 잘못과 더불어서 선을 망가뜨리는 잘못을 함께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착함'이 좋은 가치로 인식되기 때문에 속에 악한 것을 지니고 있더라도 외적으로는 열심한 척, 신심있는 척 하는 위선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오히려 세상보다 더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악해도 결과가 좋으면 인정받기도 하는데 교회에서는 외적으로 매섭고 사나우면 배척당하기 때문에 본모습을 숨긴 악이 더 활개를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위선적인 모습을 지닌 이들에게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그들을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 주변에 가서 머물러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느끼게 됩니다. 선한 얼굴을 하고 다가와서는 나의 비밀을 모조리 캐내려는 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비밀이 모든 이에게 알려져서 곤혹을 겪으면 비로소 그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속에 숨긴 것이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날까지 계속 하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느님의 전능을 올바로 깨닫게 되면 소위 '회개'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어둠을 잔뜩 품은 채로 죽음에 이르게 되겠지요. 그리고는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영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섣불리 돕겠다고 나서다가는 그들의 교활함에 오히려 사로잡혀 그나마 성하던 나의 영혼도 해악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저마다의 능력치에 따라서 활동해야 하고 아무리 선한 뜻도 그 가능성을

수능이 다가왔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치를 벗어난 문제를 다룰 때에 흔히 종교를 찾곤 합니다. 물론 초보적인 추구이지요. 그리고 그런 위기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곧잘 다시 예전의 삶의 태도로 돌아가곤 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적인 것에 손을 털고 다시 예전의 세속적 욕망이 가득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런 이들의 신앙생활에는 '진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필요하기에 찾는 것이지 신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내어맡기는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수능이 다가왔습니다. 수많은 고3 수험생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신에게 매달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신의 뜻을 찾으려고 다가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욕구에 신의 능력을 끼워 맞추려고 찾는 것일까요? 이는 수능이 끝나고 나서 어렵지 않게 그 결과물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배은망덕함, 이것이 자신의 욕구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무시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단어인 것 같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 수능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은총이라는 사실을 언제가면 깨닫게 될까요? 하지만 저의 이런 표현은 그들의 사나운 내면을 자극할 수 있으니 그냥 지켜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수능은 앞으로 그들이 마주하게 될 수많은 시련의 한 조각임을 직접 체험해가며 배우고 또 그 모든 시련들 안에서 정작 추구해야 했던 것은 '성공'이 아니라 바로 그 시련 자체가 하나의 배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리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테니까요. 그냥 두면 됩니다. 어차피 제 길은 제가 선택하는 것이니까요. 그들이 지혜를 찾았더라면 남방 여왕을 따라서 솔로몬을 찾아왔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솔로몬의 화려한 궁만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성모당에도 갔다가 갓바위에도 갔다가 자신의 유익에 도움이 될만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빌어볼 것입니다. 그냥 둡

내면에 달린 문제

내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특정한 시간에 취미 활동을 하기로 작정을 했는데 그것이 방해를 받는 일이 생긴다면 바로 거기에서부터 소위 '스트레스'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는 외부에서 전해져 왔다기보다는 나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원하던 욕구가 방해받음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감정적 반응인 것이지요. 만일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나에게 다가오는 일을 수용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면, 아니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면 그 사람에게는 갑자기 일이 생긴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어떤 공간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외적 반응이 결정됩니다. 하루종일 모든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절히 그 선을 제어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늘 짜증을 내는 사람, 투덜거리는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반면 묵직한 사람, 내면이 깊은 사람은 모든 일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그 본질을 성찰합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반대로 '덕'을 쌓을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의 근본에는 우리의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성인이 되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지순례를 하겠다고 가서도 죄만 짓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은 느린

신자들의 사랑이 '맛'을 찾는다면 교도권은 '영양분'을 식별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사랑은 빠른 반면 교도권은 느릴 수 밖에 없습니다. 맛은 향기로운 냄새와 입소문으로 번져가지만 실제 영양분이 있는지 없는지는 천천히 여러가지 각도로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외적인 향기와 맛에만 이끌려서 영양분은 커녕 독소를 품고 있는 것으로 다가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도권의 식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독을 품고 있는 것은 갖가지 향기로운 향료로 신자들을 끌어들여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적인 면에서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신자들은 그 속에 든 것을 분별해 낼 능력이 부족해서 자신을 죽음에 이끌 수 있는 것을 '좋은 것'으로 간주하고 또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변에 마구 퍼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목자의 주변에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는 마치 우리더러 이런 것을 하지 말라, 저런 것을 하지 말라 하며 귀찮고 성가시게 구는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고 일하는 이들입니다. 물론 모든 목자가 '완벽'하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리를 저는 목자도 있고 등이 굽은 목자도 있지요. 하지만 목자는 결코 혼자 일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서로 친교 안에서 일하고 그 뒤에는 부족함을 메꾸어주는 교회가 늘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열매 - 식별의 근거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마태 7,16) 식별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열매'입니다. 선한 내면을 지닌 이는 그 선한 곳간에서 끊임없이 선한 열매를 내어 놓아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선물합니다. 반면 악한 내면을 지닌 이는 그 안에서 악한 열매를 내어 놓아 주변과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키기 일쑤입니다. 사람은 현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온갖 논리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숨길 수 없는 것은 바로 그의 열매입니다. 그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이라는 훌륭한 칼로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그의 내면에 따라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판사나 변호사라도 내면이 사악하면 그 훌륭한 지식으로 돈을 벌어들일 궁리만 하고 억울한 사람을 돌볼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반면 소박한 것을 지니고 있는 가난한 이라도 주변에 힘든 사람이 있으면 도울 줄 압니다. 이 열매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이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만남과 상대에 대한 배려 속에서 우리의 열매는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잘 가꾸어 나가야 하며 사랑의 씨앗을 잘 키워 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마태 7,17-20)

하느님이 세운 교회

한국 교회를 소개할 때에 흔히 '평신도가 세운 교회'라는 별칭을 붙이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 이 표현에 대해서 조금은 이상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는 것이지 신자들 가운데 특정 집단이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성령을 받아들이고 그 성령의 활동을 왕성하게 시작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대에도 우리 평신도가 힘을 내어서 온 세상을 복음화하는 데에 힘쓰자고 나선다면 바람직한 표현이겠지만 마치 특정 집단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형태로 한국에서는 평신도가 모든 것을 했으니 사제나 수도자는 발언권이 없다는 식으로 의사를 이끌어간다면 여기에는 오류가 상당히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사제도 수도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었고 성령이 가득한 분이셨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게 가서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시면서 당시의 사제 직분을 존중하셨습니다. 우리는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 서로 힘을 더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를 세웠다는 그 평신도도 실은 교도권이 내놓은 '천주실의'라는 교리책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도권은 평신도들의 초대와 박해를 감내한 노력으로 인해서 이 한국땅에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리고 수도자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퍼뜨리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지체가 없습니다. 정치적 논리에 사로잡혀서 어느 집단의 우열을 가리는 사상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서로 도와 주님의 빛을 만방에 전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평신도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그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유로운 이들

법은 우리의 행동 범위를 제한하는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이 늘 올바르지 않고 그릇된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동을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억압하고 강박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마음껏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제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제한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겸손'할 줄 알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여전히 법에 매여 사는 사람들에게 스캔들을 일으켜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점 때문에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절제합니다. 그러나 그 본질적 자유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 안에 머물러 있다면 법을 두려워할 줄 알고 법을 올바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러 있다면 자유를 만끽할 줄 알고 그 자유를 올바로 실행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영적 진보의 도식

선한 사람이 늘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선하니까 그 선한 성정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선하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지 무턱대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한 사람은 기본 성정이 선하긴 하지만 모든 것을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것을 수용하지만 아닌 것에는 과감하게 아니라고도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하느님을 따라가면서 '십자가'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래서 그의 내적 영역이 확장되고 넓어지면서 사랑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악한 이도 받아들이는 여유를 지니게 됩니다. 그의 악한 성정과 악한 의도를 알면서도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이기 위해서 그 악을 수용하는 것이지요. 헌데 이 모습이 외부 사람들이 보면 정말 멍청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 됩니다. 도식화 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악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사람 악을 저지르지만 뉘우치는 사람 악을 알아보고 저지르지 않지만 구체적인 선을 행하지도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약하고 실수를 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약함을 극복하고 악을 분별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더 많은 선의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타인의 악을 분별하고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사람 물론 여러분의 이해를 위한 것이지 이것이 '공식'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도식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한 사람이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약하다가 내일은 선에 적극적일수 있고 또 다른 날은 유혹에 빠져 악을 저지르고나서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갈망하는가?

최고급 승용차를 산 사람이 친구들에게 자랑을 시작합니다. 그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삽니다. 그리고 그 부러움 가운데에는 '시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그 자랑하는 친구가 쫄딱 망해 버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악한 마음도 포함된 셈이지요. 그래서 이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자랑으로 주변 사람들의 악한 의도를 끌어당기는 셈입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것을 바탕으로 주변에서 다가오는 대상이 달라지게 됩니다. 세속적인 요소를 드러내면 세속적인 마음들이 다가옵니다. 반면 거룩한 것, 영적인 것을 드러내면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루한 미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에게는 그만한 은총의 수로가 따로 없지요. 남미에서 선교를 하면서 사제의 존재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방치된 공동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번의 미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비록 자기네 말을 어눌하게 하는 사제라도 큰 도움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영적 양식을 누리는 법을 제대로 배우면 우리는 많은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만' 찾아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서 다가갔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예수님을 목말라했지요. 그들의 힘든 삶에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미 잘 사는 이, 이미 누릴 게 많은 사람은 그러한 위로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가진 것을 쓰기에도 바쁘기 때문이지요.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25)

사제의 인격

교회가 세상 안에서 힘을 지니고 있을 때의 향수를 지닌 분들이 많습니다. 동네에서 신부가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고 나름 지식있는 사람이었으며 동네의 유지이기도 한 시절이 있었지요. 아직도 대형본당에서는 비슷한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당연히 신자를 수천이나 거느린 지역 유지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세상도 많이 성장을 해서 더이상 예전처럼 주임 사제가 동네의 식견있는 어르신이자 유지로 간주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에 그렇지만 세상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그래서 현대에 사제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좋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제는 사제직 그 자체로 부여받는 영적인 능력과 더불어서 ‘인격적 성숙’도 마땅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기본도 안 된 인간’으로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직도 신자 어르신들의 향수에 젖은 대우에 길들여져서 세상 안에서 기본도 되지 못한 인격성으로 자신을 드러내다가는 욕을 먹기가 일쑤입니다. 사제는 어르신들에게 공손해야 하고 신자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또 인내심을 갖추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고 서서히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이런 기본적인 덕성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로 단순히 오랜 기간을 신학교에서 공부해서 사제직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는 이제는 크게 인정을 얻지 못하게 되는 세상입니다. 사제는 너무나 드높은 사제직에 늘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인격적 소홀함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흔히 말하는 ‘신부도 인간인데’라는 말이 사제직의 드높음에 부족하다는 표현으로 쓰일 수는 있지만 인간이 덜 된 것을 감싸주는 의미로 쓰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 주사를 부리고 지나치게 화려한 취미활동에 헌신하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비흡연자들이 있는 곳에서도 거침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21,2) 사람은 저마다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이유는 뚜렷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바람직한 길’ 혹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싫은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고치기보다는 그냥 그것과 함께 머무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차선책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걷는 길은 우리 자신에게는 ‘바른’ 길인 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지요. 심지어는 악한 이들도 자신들이 하는 선택 만큼은 자신에게는 바른 선택이 됩니다. 자신이 지닌 내면이 바라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이의 마음을 당신의 선으로 살피십니다. 그리할 때에 당신의 마음에 드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나뉘게 됩니다. 바로 선과 악의 활동 영역이 나뉘는 거지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된 동안에는 우리가 선택하는 활동이 모두 ‘바른 활동’이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부터 각자의 길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이는 마치 멈춰 있는 물 안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던 물고기들이 강물에 던져지게 되면서 강물을 거스르는 물고기와 강물에 흘러 내려가는 물고기로 나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바름’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바름은 단순히 우리를 고생스럽게 하거나 성가시게 하는 바름이 아니라 진정한 바름입니다. 그 바름에 익숙해져 갈 때에 비로소 우리의 모든 것이 올바로 회복되어 가는 것입니다.

속에 든 것을 알아보기

차별을 하지 말자는 주장, 혹은 관용을 가지자는 주장이 옆길로 새면 ‘선과 악’에 구분을 두지 말자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진정한 어둠의 세력의 농간이 시작되지요. 사람들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은 채로 서로가 다르기만 할 뿐 모든 것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악’을 스스럼 없이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워낙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겉으로 알아차리기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이러한 분별에는 굉장한 내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론 아주 어린 아이, 영이 맑은 아이, 혹은 영이 섬세한 어른은 그 즉시 느끼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금방 느끼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고 올바른 분별을 위해서는 합당한 훈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한번은 한 사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내가 하는 일 중에 어느 특정 영역에 집중하면서 그 진의를 가려내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그가 내린 결론은 내가 나 자신의 이익에 집중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독히 편협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전체를 보지 않고, 보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마치 길게 그어진 선 가운데 한 부분을 전자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고는 이 선은 뒤죽박죽이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선은 전체적으로 보면 깔끔하고 잘 그어진 선이지요.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등장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 그 보고 싶은 것은 벌써 우리의 내면이 결정해 놓은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느냐만 관심을 가집니다. 하지만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고 있는지를 보려는 사람은 전혀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됩니다. 세상에서 멋져 보이는 모든 의견이나 활동이 다 ‘선’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의견이나 활동 가운데에는 지독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지금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은 다음에 훗날 크게 사기를 치려

구조가 바뀌길 원하는 이들

단지 같은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들의 내면에 같은 생각이 깃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과 사랑을 키워나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증오와 원한을 키워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성당 안에 같이 머무른다고 다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더 열렬히 따르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을 빛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당이라는 외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야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움직이지 않는 물은 고이게 되고 썩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맑은 물이었다 할지라도 그 물이 고여서 정체되어 버리면 썩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순진하게 받아들였다가도 그 신앙이 더는 움직이지 않은 채 고여서 ‘교만’과 ‘탐욕’에 젖어들기 시작하면 그 신앙은 썩기 시작합니다. 제도가 바뀐다고 사랑이 절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물통을 아무리 높은 곳에 둔다고 절로 물이 움직여지는 게 아닙니다. 물은 흘러야 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각자의 개인의 고유한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런 고유한 활동들이 모이게 되면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큰 틀을 뒤바꾼다고 해서 자동으로 움직임이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법을 세우면 겁이 나서 사람들이 따릅니다. 세상은 그렇게 틀을 바꾸면 개인이 뒤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공포와 두려움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의 손길을 받은 이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사랑받는 이만이 사랑할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일은 바로 이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우겠다면서 성경을 들여다보지만 좀처럼 예수님께서 실제로 행하셨던 바를 찾아내고 그것을 뒤따라 살아가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큰 틀을 바꾸어 사람들을 지배하려 했던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약하고 미천한 이들에게 사

하느님 이거 해주세요

“우리 아들, 딸을 대학 붙게 해 주세요.”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 청원입니다. 다만 문제는 다들 그렇게 기도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자녀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셔야 하지 않나요? 단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두 나라가 싸웁니다. 그리고 두 나라의 군대에 참전하고 있는 두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희가 이기게 해 주세요.” 하지만 전쟁은 결론이 나고 결국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됩니다. 그럼 그들의 기도는 무의미한 것이었을까요? 하느님은 승자의 기도에 손을 들어주고 패자의 기도는 내쳐버린 것일까요? 일단은 긍정적인 면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이 문제를 바라봅시다. 어려운 순간에 하느님을 떠올리고 그분께 청원을 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일은 분명히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청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앞서 대학에 대한 기도나 싸움의 승리에 대한 기도나 중요한 것은 본인들의 의지이고 본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무시당하고 잊혀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하는 행위와 하느님을 떠올리는 행위는 좋은 것이지만 그 다음 단계로 하느님을 떠올린 뒤에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지 아닌지에 대한 주제에서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원기도는 장려됩니다. 우리가 누구나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처음에는 누구나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할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계속 고집하다가는 서서히 ‘좌절감’을 체험하게 되겠지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본질적인 신

허용범위

깔끔한 걸 좋아하는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청소 좀 하고 살아라!” 하지만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치웠는데도 매의 눈을 가진 엄마의 눈을 피하기는 힘듭니다. 사실 자녀들은 큰 쓰레기만 치워 놓으면 평소의 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엄마의 결벽증을 견뎌낼 수는 없는 셈이지요.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 여성을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또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시끌시끌합니다. 이런 종류의 목소리는 늘 있어왔고 세상은 그에 발맞추어 변화되어 왔습니다. 아픈곳에서는 신음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 신음을 듣게 되면 움직임이 시작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 바뀌어야 할까요? 어느 선이 적정선일까요? 모든 이의 바람이 일시에 충족될 수 있을까요? 그 바람 자체는 정당한 것들일까요? 그런 여러 바람과 일들에도 하루는 지나가고 또 내일의 새로운 태양이 밝아옵니다. 하느님은 그 안에서 가장 활발히 일하고 계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하느님의 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은 세상 안에서 인간의 ‘이기심’에 좌우되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활동 안에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재앙’인 것도 포함이 됩니다. 하지만 자연이라는 것은 원래 정해진 힘의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원래 그리 되도록 한 것인데 인간들이 탐욕으로 인해 뿜어대는 여러 결과물들이 거기에 영향을 미쳐서 재앙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진정한 의미의 재앙인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뭐가 바뀌어야 한다고 외쳐대는 사람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뭐가 바뀌길 바라는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삶을 필두로 무언가를 바꾸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고 자기 게시판에 온갖 정치적인 글로 도배를 한다고 나라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실제

싸우지 마십시오

악인도 눈치라는 것이 있어서 완전 백프로 무결한 사람에게 좀처럼 대들지 않습니다. 그 일은 예수님에게 일어났지요.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소소한 오류를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흠도 티도 없이 소송에까지 휘말리는 일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뭔가 일이 있었는데 나의 탓이 그리 크지 않은데 상대가 우길 수는 있겠지요. 악인들도 자신들이 크게 성가시지 않은 이상은 크게 문제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악한 의도와 더불어서 ‘게으름’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가신 일은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어떤 일에 자신의 악을 본격적으로 저지르는 것은 상대의 어느 부분에 자신의 악이 부딪혀서 충돌을 빚어내게 될 때 시작이 됩니다. 그 누구도 ‘공기’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기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움직임을 그 자체로 감싸 안아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정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되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일종의 ‘영적인 공기’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즉, 상대의 모든 영적 활동을 기꺼이 감싸주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신앙인은 거의 충돌 없이 지냅니다. 충돌 그 자체가 신앙의 미성숙성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리고 충돌을 일으킨 사람은 곧잘 ‘정의’를 들고 나서기 시작합니다. 즉, 참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싸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왜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모든 부당한 고발에 대해서 조목조목 정의를 들며 따지지 않고 차라리 침묵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뭘 몰라서 그래, 내가 더 똑똑해. 그래서 나는 참된 정의를 위해서 이 싸움을 반드시 성공으로 이루어내고 말겠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두십시오. 그가 시작하는 싸움을 그가 스스로 마치게 두십시오. 사람들 사이의 모든 싸움은

신앙의 활동성과 공동체성에 대한 오해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활동성과 공동체성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주의적 신앙’에 대해서도 오해가 존재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은 채로 하는 모든 활동을 ‘개인주의’라고 한다면 반대의 주의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공동체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지요. 동양 문화권은 예로부터 ‘관계’를 중시해왔고 그 관계 안에서 주도적으로 이끌고 외적으로 활발히 움직이는 것이 미덕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 늘 두각을 나타내고 그 반대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늘 무언가 부족하고 모자란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지요. 하지만 신앙 안에서 활발한 활동은 반드시 외적으로 드러나는 활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도 얼마든지 활발한 활동이 있을 수 있고 바로 그 내적 활동에서 외적 활동이 기인해야 합니다. 역으로 외적으로는 활발히 움직이는데 실제로 내적으로는 지독히 고여있는 썩은 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입에서 기도는 줄줄이 나오지만 그 기도문에 전혀 동의하지 않은 채로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 외적으로 활동은 하는데 그 외적 활동이 자신의 우월감에 사로잡힌 교만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면 그는 내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 진정한 ‘공동체성’은 모두가 무언가에 열중해서 다같이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공동체성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의 몸’ 신

체험된 신앙

자신에게 없는 이야기는 만들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고작 며칠을 남미 여행을 다녀와서 마치 남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과장될 수 있고 허풍을 떨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자신은 정작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그럴듯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절대로 남에게 필요한 자양분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자양분은 그것을 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체험으로만 전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 길을 걸어보고 여러 위험요소를 알고 난 뒤에 해 줄 수 있는 진정한 조언이 있지요. 그런 구체적인 체험이 없이는 소설을 쓰게 되고 그런 소설을 읽은 사람은 환상에 사로잡혀 여행을 하다가 큰 일을 당하곤 합니다. 신앙 안에서도 오직 체험으로만 전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내 안의 죄를 끊어버리고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그것을 위해 노력해 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 이의 인도를 따를 때에 많은 것들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고 쓸데없는 노력 없이 신앙 안에서 진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은 자신이 추상적으로 연구한 것들을 진리라고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외적 권위만을 보고 그런 것을 따라가다가 낭패를 보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야고 2,18)

증언

우리는 ‘증언’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가령 제가 이 글에서 저만이 체험한 어떤 것을 꺼내 놓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양분될 것입니다. ‘저 신부님이 말하는 것이 정말일까?’ ‘저 신부님은 그런 면에서는 거짓을 말할 분이 아니니 사실이라 믿어’라는 식이지요.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그 증거를 보기를 바랍니다.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의 향연을 보고 싶어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기적을 본다고 해서 믿으라는 법도 없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끊임없이 의심이 피어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심은 때로는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참되고 올바른 증언까지도 의심하기에 이르고 맙니다. ‘사람이 착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돈이 최고가 아닐까?’ ‘신앙이 가르치는 것을 모두 살아낼 순 없어. 사람은 적당히 사는거야.’ 라는 식으로 점점 변질되어 가는 내면을 지니게 됩니다. 타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뢰의 나약함은 나 자신의 이기성에 비례합니다. 내가 이기적인 만큼 나는 오직 나의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인과의 외적인 관계는 존재하지만 내적인 연계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에 신뢰를 두지 못하게 됩니다. 성인들은 통공을 나누고 함께 친교를 이룹니다. 하지만 죄인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갑니다. 우리는 선한 이웃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

“사랑하는 가족이 지옥에 있는데 제가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먼저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걱정은 그 자체로 시기상조입니다.  하지만 행여 누군가가 하늘나라에 간다 해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에 희망을 두고 그들에게 선의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에는 우리가 이해하게 됩니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력이 작용하여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면이 어둠으로 가득한 이, 하느님의 빛에 대한 수많은 기회를 모조리 자신의 의지로 거부한 이가 제 갈길을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의 분별에 대한 굳은 신뢰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머무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분별이 완전하고 참되다는 굳은 신뢰를 하고 하느님을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런 그분이 결정하시는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설명들을 통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기까지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지상의 삶을 책임감있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금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일어나는 일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레 1,19)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당합니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있었고 구해 주셨지만 그의 육신은 적대자들의 음모와 죄악에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를 통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구원에 대한 생각이 바로잡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세상의 고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니고 하느님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지 세상 안의 구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놀려댈 것입니다. ‘너희가 하느님을 믿는다더니 꼴이 좋구나!’ 하고 놀려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비난과 빈정거림을 들을 때에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오해와 왜곡된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안정된 삶을 얻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 삶을 지속해 나갑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구원은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참된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통해 그 본질이 드러날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세상 안의 어느 지점이고 그것이 모든 이들의 눈에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도 그 길을 기꺼이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길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리워져 있고 그래서 오직 믿는 이들만이 그 길을 선택하고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들을 성인으로 추대하고 신앙인들은 그들을 복되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맞서는 이들은 우리가 내적으로 지닌 진리와 성실과 책임감, 선함과 의로움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식탁

잘 모르던 어떤 부자가 한 상에 100만원짜리 식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밥을 먹는 내내 옆에 종업원이 와서 무릎을 꿇고 접대를 하고 혹시 뭐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더 가져와야 하는 것은 없는지를 묻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걸 다 먹고 나니 배가 찢어질 듯 아프기까지 합니다. 이런 자리를 우리는 ‘가시방석’이라고 부릅니다. 아름다운 식사의 자리는 외적 화려함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함께 하는 이들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사이라면 설령 음식이 치킨 하나 뿐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리는 편안하고 푸근하게 마련입니다.  남미에서 반미사를 드리고 미사를 마치면 그 미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한 집에서 소박한 식사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거기 모인 모든 가난한 참석자들이 다 똑같은 음식을 받아 먹습니다. 그리고 그 식사 자리는 유쾌하고 재미납니다. 아이들은 나와 제 부모 사이를 오가며 장난을 치고 어머니들은 제 앞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라며 아이들을 부추기기도 하고 아이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이 외운 주님의 기도를 옹알거리며 바칩니다.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식사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방식을 달리해야 합니다. 유명 백화점의 옷가게를 아무리 둘러본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찾기 힘든 것을 우리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해진 옷을 죄송스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진 영혼을 죄송스러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옷매무새를 고칠 줄 알면서 정작 영혼을 돌볼 줄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엉뚱한 일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불가능을 이룰 수 있는 힘

여러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인류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미리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이라는 근거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참으로 훌륭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가장 주도적인 힘을 유지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의지’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안 될 일도 하겠다고 작정하고 나서면 어마어마한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손가락을 네 개 가진 소녀가 피아니스트가 되거나 두 팔을 잃은 이가 두 다리로만 일상을 유지하는 등의 모든 일들이 바로 ‘의지’를 통해서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이 의지를 자극시키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신앙’만큼 훌륭한 것이 따로 없습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의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케 생각하게 도와주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은 실천할 의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의지와 가장 강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곧 의지의 활동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끌리는 사랑을 찾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위대한 일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심지어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케 해 줍니다.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우리를 선으로 향하도록 만들어 주셨지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어느 방향으로 향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사랑으로, 그것도 주님의 사랑으로 맞추어 나가고 훈련시켜 나갈 때에 아직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즉 저마다 자신의 이기성에 따라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당연히 다른 의지와 맞부딪히게 되고 결국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관점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과 따르지 않는 이들, 즉 하느님의 의지를 따르는 이들과 그에 반해서 자신들의 이기성을 추구하

심리학의 한계

현대의 심리학은 인간의 내적 영역을 단순히 ‘학문’으로 변화시키고 모든 것이 상대적인 듯이 대합니다.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부딪히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합니다. 즉, 선과 악의 차이가 없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를 뿐이고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며 그 안에는 선도 악도 없다는 것이 심리학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의 오류입니다. 이들은 흔히 서로의 성격 유형을 구분하고 그 차이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걸 바탕으로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물론 그 모든 학문적 영역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영역을 거기에 내던져버려도 안됩니다. 인간에게는 분명한 선과 악의 추구가 존재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그것이 악한 행동인 줄을 본인은 압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자행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한 행동이 수치인 것을 알기에 그에 대한 수없는 변명을 하곤 합니다. 반면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그 일을 하는지 분명히 알기 때문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악은 교묘하고 영리하고 기민합니다. 마치 양파처럼 몇 겹이나 자신을 둘러싸고 안에 들어있는 시커먼 욕구를 감추려고 하지요. 반면 선은 명료하고 뚜렷하고 천상의 지혜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숨길 것이 없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언뜻 남을 도우려는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언뜻 성경을 공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학적 교만을 채우려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 생활에 충실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다른 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기초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어둠의 활동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줍니다. 선과 악의 방향은 뚜렷이 존재하고 사람은 저마다 그 결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

선택과 결정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면 될 일을 미뤄두고 또 미루어 두다가 결국 그 일의 본질이 추구하는 바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이다. 비빔국수를 오른손으로 비벼야 할까 왼손으로 비벼야 할까? 도대체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될 것인가? 중요한 건 비비는 것이고 면이 불기 전에 먹는 게 중요한 법이다. 엉뚱한 것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면이 퉁퉁 불어버려 원래의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불어터진 면을 억지로 먹어야 한다. 선을 실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의심없이 용기있게 실천하지 못하는 나를 반성하고 더욱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면 될 문제이다. 하지만 선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마찬가지로 선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기도를 바칠 것인가 하는 것은 둘 중 뭐든 해보면 된다. 그래서 하나에서 일이 잘 안풀리면 다른 것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생활 안에서 사람들이 선택을 고민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선과 악의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라 교묘하게 뒤섞인 가치들의 선택의 문제이다. 남편에게 충고를 해 주는 게 좋을 것인지, 아니면 침묵을 지키는 게 좋을 것인지는 그 두 행위를 하려는 근본적인 의도에 달려 있다. 둘 다 남편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면 해보면 된다. 하지만 사실 그 안에 내가 답답해서 그걸 해소하려는 욕구가 있으면 거기서부터는 내 안의 욕구가 정당한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것인지를 살펴보면 된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게 아니다. 아는데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힘들어서 차선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하느님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부족한 것이다.

정말 힘든 문제일까?

초등학생 수학에나 사용되는 덧셈과 뺄셈의 오류를 우리가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카이스트에 다니는 대학생이나 알만한 내용의 오류를 우리가 분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교회 내의 영역 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죄없는 사람을 때리면 되느냐 안되느냐를 두고 고민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잡 다단한 교회법에 해당하는 사연을 지닌 이가 다가와서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합당할 것인가 하는 유형의 질문은 당연히 복잡함을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고차원적인 문제는 고차원적인 이들에게 맡겨서 도움을 얻으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고차원적인 문제를 고심할 이유는 크게 없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쉬운 일인데 복잡하게 간주해서 손을 놓아버리는 경우’입니다. 직장 안에서는 복잡한 프로젝트에 매달려서 수많은 시간을 고심해서 일의 해결점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이 멀쩡한 사람이 성당에만 오면 초등학생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당장 눈 앞에 드러나 있는 분명한 일에 대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주저하고 있게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서 펴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일에 매진하면 됩니다. 헌데 그분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해 버리면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욕구가 뒤섞여서 하느님의 일로 포장될 때에도 비슷한 경우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술이 너무나 좋은 레지오 간부가 회원들에게 레지오 주회는 ‘끝까지’ 참석해야 한다면서 술자리를 종용한다면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을 바탕으로 ‘레지오’라는 거룩한 신심행위를 더럽히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마주한 수많은 신앙 현안들이 반드시 전문가의 분별이 필요한 사안일까요? 아니면 그 일만큼은 내가 하기 싫어서 미뤄두는 것일까요? 성당에서는

아브라함의 자녀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마태 3,9) 간단한 이야기를 한 번 해 봅시다. 여러분이 시장에 갑니다. 그리고 수박을 사기 위해서 수박이 늘어선 과일코너에 가지요. 그리고는 수박을 하나 집어듭니다. 왜냐고 물어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수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집어든 수박이 여러분이 상정한 기준에 합당하기를 바랍니다. 즉, 싱싱하고 맛이 들어 있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몇가지를 검증합니다. 두드려서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꼭지가 싱싱한가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조금 갈라서 속의 내용물을 보기도 합니다. 헌데 여러분이 정한 그런 기준들에 부합하지 않는 수박이라면 여러분은 다시 그 수박을 내려놓고 다른 수박을 집어 들겠지요. 위의 성경 구절은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물론 유대인들을 고르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는 그것을 검증하셨습니다. 헌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자부심에 거꾸로 속이 곯아버린 수박이 되고 말았습니다. 쓸모없는 수박이 되고 만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들기로 하셨습니다. 이 두번째 하느님의 자녀들은 혈통이나 육욕에서 비롯되는 이들이 아니라 거룩한 영에서 태어나는 이들입니다. 영과 진리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이 되지요. 그것이 바로 지금의 ‘교회’입니다. 하지만 이 ‘교회’를 외적인 틀에 묶어두려고 한다면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지요. 베드로 사도의 수위권을 이어받아 지상에 세워진 저승의 세력도 무너뜨리지 못할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올바로 소속된다는 것이 단순히 외적 형식과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 살 때’ 가톨릭 교인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영위할 때

속을 들여다보기

로봇에게 센서를 달아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80년대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센서를 달아준다고 해 보아야 그 수준에 맞는 센서를 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옛날 칼라 텔레비전으로 보는 수준의 화면을 인지하는 센서를 가지게 되겠지요. 만일 오늘날 로봇에게 최신의 센서를 달아준다면 그 로봇은 수만가지의 색상을 분별하고 세밀한 모습을 분별하는 센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메라 기술이 그때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분별력의 섬세함이 너무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지요. 예수님은 그가 이미 드러내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영혼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영혼을 당신의 영혼으로 바로 바라보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누가 따로 설명을 해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믿음을 가진 척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넘치고 내면이 침착하고 영원에 대한 관심사가 남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믿음을 지닌 사람은 반대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흉내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이 불안정하고 언제나 위태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영원에 관심이 없어서 그것을 애써 흉내내어 보지만 결국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관심사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우리가 집중하다보면 상대의 관심사가 드러나게 되고 그의 내면이 분별되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선한 사람인지 선을 흉내내는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고, 또 기본적으로 선하긴 하지만 어떤 나약함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부분이 보완되어야 하는지도 드러납니다.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꺼이 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서 내면이 변해가게 되고 영적인 정밀도도 더해가게 됩니다. 그래서 유혹을 더 쉽게 피하게 되고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