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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18의 게시물 표시

하느님의 궤를 모시는 백성의 즐거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의 순간은 다양합니다. 누군가 취직을 할 때에 기쁨을 느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고백을 해 올 때에 기쁨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여기 우리는 1독서에서 어느 백성의 기쁨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고 온 힘을 다해 춤을 추고 함성을 지르고 나팔을 불면서 기쁨을 한껏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궤’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궤는 언제나 이스라엘 곁에 머무시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곁에 두고 기뻐하는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기쁨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것과 같은 기쁨이지요.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체험을 그리워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궤를 모셔 들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당에 나오는 이들에게는 이 목마름이 존재할까요? 어쩌면 적지 않은 이들은 너무나도 일상화 되어 버린 만남에 오히려 식상해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계약궤 하나에 온 기쁨을 표현하던 백성들이 있는가 하면, 구원이신 분 그 자체가 음식이 되어 목구멍에 넘어가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지요. 우리의 마음이 기뻐하는 것에 우리의 보물이 있는 법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재물을 즐거워하는 이들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니 불쌍하기 그지 없는 이들입니다.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일시적인 것을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꾸로 일시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영원한 것을 제멋대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아는 체 하는 이들

자기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특징은 세상의 ‘지식’을 많이 갖추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정보’들이 자신의 현명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사랑을 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그들의 오류입니다. 그들이 많이 아는 것이 그들의 내적 성숙을 반영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지요. 그들은 많이 알아서 더 교만하거나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의 앎이 그들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지요.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렇게 많이 알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한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 하나 조차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 몸의 호르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우리 몸의 세포들이 저마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리는 온전히 파악하지 못합니다. 헌데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알아 본 들, 책을 많이 읽어서 이런 저런 지식을 쌓아본 들 과연 얼마나 알 것입니까?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무한히 작은 존재라는 것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 참된 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럼 기본적인 ‘겸손’을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오히려 진정한 지혜에서 멀어지는 꼴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여전히 배울 게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여전히 모르는 것을 배워 삶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법도 배워야 하고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부터 올바로 사랑하고 나아가 나의 가족, 나의 이웃,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그렇게 배울 것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종교를 지닌다는 것

종교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 가운데에는 실제로 그렇게 종교를 사용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실제 종교라는 것, 우리가 신앙하는 가톨릭 신앙이라는 것은 그 진실한 내면을 들여다볼 때에 결코 인간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그렇지 못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파라오의 마법사들은 모세의 기적을 흉내낼 수 있었지만 절대로 모세와 같은 범주의 일을 해내진 못했지요. 마찬가지로 인간의 능력이 발달하면서 현대에는 과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에게 영혼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부분에 있어서 진정한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나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 영혼이 추구하는 것을 올바로 찾는 이는 결국 하느님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동방박사들이 별빛을 따라 오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과도 같지요. 반면 인간의 내면의 영적인 활동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 이는 아무리 외적으로 그 비슷한 흉내를 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와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의 교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다들 저마다의 ‘신념’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도 그 자체의 ‘신념’을 형성하고 그것을 신봉하는 셈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계신 것을 증명하기도 힘들지만 계시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인간에게 영원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면서 지금의 이 현실마저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지요. 즉, 신앙을 통해서 현실도피를 추구하는 이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신앙을 왜곡하고 신앙으로 현세의 이윤을 추구하며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우리들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숨김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도들과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내용으로 가르침을 바꾸어서 전해 준 것입니다. 이 작업을 하려면 먼저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남에게 전하는 사람은 앵무새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말마디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야기하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은 같은 내용을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전해줄 수 있게 됩니다. 가끔은 사목 현장에서 제가 한 강론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절대로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마음이 그 가르침에 대해서 그렇게 느낀 것일 뿐이지요. 비슷한 예로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에 제자들이 저마다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나선 것과 비슷합니다. 만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저마다 ‘그럴 가능성이 존재할지도 모르니 스승님에게 확답을 얻어야 하겠군.’하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은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너는 아니다’하고 대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일 수도 있다’는 여운을 늘 남기십니다. 물론 그러한 가운데 예수님을 배반하는 당사자에게는 그것만큼 분명한 뜻도 따로 없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완벽하게 선할 수 없습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고, 우리는 언제나 흔들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자유의지로 끊임없이 선하신 하느님을 선택하는 연습을 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 선하고 바로 서 있던 이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반대로 오늘 악에 잠겨 있던 이라도 내일은 회개할 수도 있는 법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선에 머물러 있는 동안 꾸준히 주변을 선으로 채워 나가야 합

부르심에 대한 고찰

부르심이 다가올 때 그것을 알아듣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이 부르는 방식으로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매혹적인 요소로 우리를 불러서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욕구를 한껏 끌어올리고 그 욕구로 인해서 우리가 다가서게 합니다. 마치 강렬한 불량식품의 맛과도 같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부르심은 은근하게 다가옵니다. 아무도 모르게 다가와서 잔잔한 여운을 남기지요. 사람의 내면을 서서히 차오르게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도외시되는 부르심입니다. 그렇기에 그 길을 선뜻 따라나서는 사람도 없습니다. 부르심이라고 해서 모두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만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나가는 모든 여정이 ‘부르심’이 됩니다. 한 가정 주부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길을 따를 때에 그녀가 하는 모든 집안일이 그 자체로 성화가 됩니다. 늘 차리는 식사를 차리고 청소를 하더라도 그녀는 진정한 평화 중에 그 일을 묵묵하고 성실하게 수행해 내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부르심이 없다면, 그는 아무리 교회 안에 거룩한 직분을 맡고 있다 하더라도 큰 의미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의 삶은 고독하고 삭막하게 되며 그 공허를 채울 위안 거리를 찾다가 엉뚱한 길로 빠지게 됩니다. 사무엘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는 자신이 처음 겪는 체험에 놀라 반응하긴 했지만 합당한 반응이 아니라 엉뚱한 반응을 하고 말았습니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데 인간에게서 그 답을 찾은 것이지요. 물론 엘리는 하느님의 예언자이긴 했지만 여전히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 역시도 사무엘이 받은 부르심을 두 번이나 소홀히 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깨달음을 얻은 엘리는 사무엘에게 적합한 조언을 하게 되고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원래의 그 가치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다가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이들은 예수님이 필요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있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조금은 도발적인 제목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의 한측으로 고정된 사고를 되짚어보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취급을 당하는 기분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역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없다는 취급을 당하면 전혀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모든 것이 있는 나라다. 밤늦게 거리를 다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치안도 훌륭하고 거의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벗어나 있을 정도로 문화 수준도 높으며 음식점에서 가방을 의자에 걸어두어도 되고, 신발을 입구에서부터 벗어두어도 된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고르고 사고 그 물건을 다음날 받아볼 수 있으며 책은 심지어 당일날 받아보기도 한다. 24시간 편의점이 곳곳에 있으며 어느 시간이든 야식을 시키면 배달을 해 주기도 한다. 인터넷의 속도는 가히 획기적이며 카드 하나만 들고 다니면 모든 결제가 가능하기도 하다. 과연 한국에 없는 게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그 없다는 것을 일부러 찾아 다니기도 한다. 온갖 여행을 다니면서 한국에 없다는 것을 다 발견해서 책을 적어내고 여행기를 만들어내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소개하기도 한다. 정말 한국은 없는 게 없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이 글이 제목부터 의도하는 바와 같이 한국은 텅 비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모든 소식이 순식간에 공유되고 모든 뉴스가 빛의 속도로 알려지지만 정작 그 엄청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런 것을 해야 한다, 또 저런 것을 해야 한다고 저마다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느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르는 영혼들이 많다. 어른들도 돈과 자신의 욕구를 제외하고는 바르다는 인생길을 제시하기 힘들고 젊은이들도 세속적 의미의 성공 말고는 딱히 다른 롤모델을 갖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이 학원 저 학원에 시달리고 있으며 어르신들도 생의 마지막에 참된 보람이라 할 만한 것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서로 책임지기

어제는 사목회의를 했습니다. 본당의 현안들이 안건으로 오갔지요. 회의는 서로 의견다툼을 하는 게 아니라 홀로 해결하기 힘든 부분을 꺼내놓고 함께 해결점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같은 ‘공동체’라는 것을 잊지 않을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고 한 몸에서 가장 중점이 되는 부분을 보살피는 것이지요. 내년도는 저로서는 분주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없던 저녁미사도 생기고 금요일 저녁에도 신자교육을 늘리고 또 첫영성체 교리교육도 제가 하겠노라고 이야기해 버렸습니다. 사실 웬만한 한국의 신자분들은 다 신앙을 가르칠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주저할 뿐이지요. 누군가 나서서 하려는 마음이 없이 뒤에서 누군가 가면 뒤따라는 가주겠다는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총대를 메어야 합니다. 총대를 멘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일을 자진해서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책임은 지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특히나 오늘날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가중됩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식도 부모도 책임 지기 싫어하는 사태가 발생하니까요. 바로 이 책임을 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책임지고 아내는 남편을 책임져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책임지고, 자녀는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능력이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책임의 자리를 ‘돈’이 대신하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에게는 ‘인간성’이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돈을 주면 자신의 책임을 다른 이에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제 방 청소는 자신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면 그 일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줍니다. 그러니 방을 최대한 아끼려는 마음 없이 마구 더럽히면서 돈을 준 사람에게서 본전을 뽑으려고 듭니다. 그러니 이런 구도 안에서는 도무지 인간성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사제로서 신자분들의 영적 성장

아파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내가 아프기 전까지는 병원이 어디 있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이고 어떤 괴로움이 있는지 전혀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가능하면 그런 곳은 피하고 싶었다. 고통당하는 것은 내가 원치 않았던 것이니까. 하지만 아픔을 겪고 난 뒤, 그 야심한 밤에 고통에 신음하며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래보고 난 뒤에는 비로소 그들의 아픔을 겪을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고 또 내가 홀로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또 그러한 상황에서 나를 도우러 오는 이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인간의 비참함을 직접 체험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아버지에게 간절히 비셨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온갖 증오와 비방과 조롱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아들이 겪은 비참함 속에서 그 아들의 간청과 애원을 들으시고 부족함이 가득한 우리를 너그러이 보살피시는 것이다. 또 한 번 기회를 주시고, 또 한 번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아직 자기 스스로 아파보지 않은 사람들, 자신이 지닌 것이 자신의 힘의 근거가 되는 사람들, 가지고 누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을 신보다 더 높은 존재로 간주한다. 물론 그들에게도 자신의 때가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면 된다. 그 신뢰라는 것이 세상적인 시선으로는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고 하찮아 보이고 미약해 보이지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한 살 더 먹기

사람들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추억하면서 그 자리에 고정된 누군가를 떠올리곤 하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 또다른 체험들을 많이 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사는 것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살아있는 것인데 우리가 과거를 추억하기만 하면 그 과거에 묶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야 하며 생동감있고 능동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비슷한 현상은 ‘고착화된 시각’에서도 많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을 때에 ‘나자렛에서 무슨 대단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과거의 예수님에게 집착해서 마치 잘 아는 동네 꼬맹이를 만난 듯이 무시하고는 결국 예수님의 현재를 끌어안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연, 학연, 종교, 나라, 인종 등등으로 엄청난 선입견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줄만 알던 자녀의 생각이 성숙해 있고, 철 없던 친구인줄만 알던 그가 속 깊은 사람이 되어 있으며, 또 반대로 어린 시절에 받은 강렬한 인상이 퇴색되어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나이들어가는 것이지요. 나이는 잘 살아도 먹고 못 살아도 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성장을 이룰 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숫자로만 계산되는 나이들어감은 사실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 갈수록 속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욱 친절해지고 온유해지며 여러가지 풍파를 겪고 그것을 이겨낸 사람답게 여유로움을 지닐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적지 않은 곳에서 그와 정반대되는 움직임을 더 많이 발견하곤 합니다.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이 새로운 한 해 동안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당에 대한 고찰

오늘도 한 본당의 50년사를 받았습니다. 그 안에서 만나는 주임 신부님들의 약력을 가만히 보면 보좌의 기간이 불과 2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주임’으로 한 본당을 책임지러 나갔지요. 오늘날 보좌의 기간은 길게는 10년 가까이나 됩니다. 그 수많은 기간동안 소위 ‘큰 본당’에서 주일학교와 청년회를 담당하면서 지내게 되지요. 다행히 저는 그 기간이 고작 3년 뿐이었고 바로 볼리비아에 나와서 선교지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본당에서 오랜 기간을 일하다 보면 당연히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본당들의 예상이 그렇게 넉넉한 줄 알게 되고, 모든 본당들에 그렇게 사람이 넘쳐나는 줄 알게 되며, 아이들과 청년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훗날 나와서 체험하게 되는 사목의 현장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큰 본당이 있는만큼 영세한 본당도 있으며 사무장 월급도 제대로 챙겨주기 힘들어서 주말만 잠깐 도와주는 아르바이트를 써야 하는 현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엇이 이러한 상황의 해결책일까요? 물론 외적인 여러가지 해결책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영세자의 숫자를 늘리고 냉담자 회두를 해서 본당의 숫적인 규모를 늘리고 교세를 확장해서 새로운 건물을 짓고 본당의 크기를 늘리면… 하지만 이러한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내면애 있습니다. 복음화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 무엇이 진정으로 신자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가에 대한 성찰, 그리고 본당이 ‘사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의 변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방향으로만 기울어져 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며 그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행복한 삶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신앙이

세상의 아이러니에 대처하는 법

선한 이의 고통과 악인의 부흥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들은 ‘아이러니’를 체험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단 한번도 당신의 빛의 노선에서 어긋나 본 적이 없으십니다. 모든 것은 저 나름의 결과가 있게 마련이고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좋은 결과를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나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완성이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 안에서 이루어질 뿐이지요. 우리는 때로 의롭게 자신을 희생한 이를 칭송합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시선만으로 본다면 의롭게 살다가 죽게 된 사람은 불행 덩어리일 뿐이지요. 죽고 나서 우리가 주는 찬사는 이미 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직감합니다. 그가 비록 세상에서는 사라졌지만 아직 어딘가에 남아 존재한다는 것을 막연하게 믿는 것이지요. 즉, 세상 사람들도 영원에 대한 감각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지닌 그 영원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주고 참된 정의에 대해서 가르쳐주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은 모두 제 나름의 합당한 결과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아이러니하게 보이는 일들이 결국에는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선을 위해서 노력한 이는 분명히 하느님의 축복이 머무를 것이고 악을 자행하는 이는 그에 상응하는 죄악의 결과물이 자신에게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요한1서 3장은 7절부터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첫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죄를 저질러도 된다고 종용하는 자들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런 짓을 했기에 우리가 충분히 증오해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의로운 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악’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의도에서 시작된 일을 굉장히 합리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에서 비롯되는 합리성이라는 것은 의로움을 잘 이루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반대로 악을 저지르는 데에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많이 속았습니다. 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이 하는 어둠의 일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느님 안에서 다른 이를 저주하고 증오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마저도 그런 이들을 저주할 것이라고 우겨대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이유에 대해서 무시하고 거부하고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들이 속이는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바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