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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함에 대한 정의

우리는 완전함을 ‘완전무결함’으로 생각합니다. 즉 이 말의 의미는 홀로 고고하게 머물러서 다른 그릇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하지요. 즉, 산에 올라가서 고상하게 묵상에 빠져 있는 고승이나 아니면 그 어떤 흠도 허용하지 않도록 다듬어진 보석 같은 것을 두고 ‘완전함’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완전함을 떠올리는 이들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의 방식을 유지합니다. 이들은 뭔가 그릇되거나 좋지 못한 것들이 있으면 떼어 놓으려고 하고 떨어지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들 곁에 다가서면 ‘오염’될 테니까요. 교회가 이런 식으로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혼인 장애가 있는 이들이나 교리를 제대로 배울 능력이 없는 이들은 교회에서 배척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복음 안에서 이 완전함에 대해서 서술하십니다. 하지만 ‘완전함’을 말하기 이전에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며, 그냥 사랑도 아니고 ‘원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느님께서 당신의 완전함을 드러내시는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완전함이란 한군데에 갇혀서 절대로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은 끊임없이 내뿜는 개념입니다. 당신이 가진 흘러 넘치는 사랑을 누구에게든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완전함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완전해지기 위해서 문을 닫는 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서 완전해지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의 문을 열고 우리가 지닌 사랑을 기꺼이 내뿜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완전함을 닮는 방법입니다.

타인에 대한 평가

사람들은 무관심하다는 평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 하지만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 다만 그 관심을 집중하는 대상이 서로 다를 뿐이지요 . 봉쇄 수도원의 수녀님은 세상의 소식을 듣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 수녀님은 ‘ 무관심한 사람 ’ 일까요 ? 아닙니다 . 정반대로 그 수녀님은 오히려 세상이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참되고 진정한 것에 관심을 두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 우리가 흔히 ‘ 무관심하다 ’ 라고 하면서 혹평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 나와 세상 사람 대부분이 갖는 관심 ’ 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입니다 .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갖는 관심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 단순히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그 일이 정당하고 올바른 일이 되는 것일까요 ? 또 거기에서 관심을 떼어 두고 자신이 진정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무관심한 것이 되는 것일까요 ?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 다른 이들의 윤리성에는 극도로 민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내면의 흐름에는 소홀한 이들이지요 .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잘못되어 가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남들이 행하는 것에는 엄청난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입니다 .  그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익명성이라는 도구 덕분입니다 . 우리가 주목받지 않은 채로 남에게 어떤 코멘트를 달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아주 자유롭다 못해 무절제한 이야기들을 쏟아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 하지만 예를 들어 청소를 잘 하자고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 , 먼저 나

선함

선함 , 즉 착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범주를 뛰어넘는 말입니다 . 즉 선함이라는 것이 그저 유순한 성격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 그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포함된 말입니다 . 선은 부족함을 감싸는 것이고 심지어는 악을 향해서도 손을 내밀어 개선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물론 부분에서 이 선은 올바른 분별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합니다 . 무언가를 개선시키러 나아갔다가 도리어 오염이 되어 망가져 버리면 소용없는 일이니까요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떠올려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 강도를 당한 이를 지나친 사제와 레위인들은 어쩌면 자기들 선에서는 나름의 ‘ 정의 ’ 와 ‘ 올바름 ’ 을 실천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 피를 흘리는 사람을 만지는 것은 부정한 일이며 또 혹시나 그 사람이 이방인이라면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을테니까요 . 하지만 ‘ 선한 ’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어 주고 여관에 데려다 주고 필요한 것을 내어주기까지 합니다 . 그것이 진정한 ‘ 선 ’ 이 하는 일이지요 . ‘ 사회 ’ 라는 시스템 안에서는 선을 기대하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 세상에 어떤 기업이 진정한 의미의 ‘ 선한 일 ’ 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정말 가난한 이를 위해서 기업 내에 책정된 돈을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그것은 법적으로 ‘ 횡령 ’ 에 해당하는 일이니까요 . 사회에 있어서 ‘ 선 ’ 이란 기껏해야 ‘ 정의 ’ 를 지키는 것 뿐입니다 . 즉 ‘ 불의 ’ 를 막는 것이지요 .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늘어나는 어두움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 어떤 시스템이나 체제는 진정한 의미의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