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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18의 게시물 표시

누군가의 편이 된다는 것

누군가가 자기 편이 되어 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편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며 서로를 신뢰해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 ‘편’이라는 것은 깨어지기도 합니다. 같은 편이 되기로 한 기초적인 이유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 편은 파괴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사실 이 지상의 어느 편이 되기 힘든 부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기 때문이고 지상에서의 일들은 하느님의 뜻에 기본적으로 부합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야욕을 추구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내 편이 아닌 사람’으로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지지해 주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마주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마태 24,9)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은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그 자연 안에는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균형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 자연은 그대로 보시니 좋았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완벽한 자연 속에 하느님은 ‘인간’이라는 특이점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자연과 다른 점은 그 인간 안에는 ‘자유의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의지는 하느님과 무척이나 닮아 있는 부분이고 거의 하느님스런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통해서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사랑’의 흐름 대로 흘러가지만 인간은 그 사랑을 전적으로 수용해서 스스로 사랑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통해서 사랑을 증폭시키고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파괴하고 나아가서 자연도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아름다웠던 자연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파괴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이런 인간에게 ‘한계’를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죽음’이었지요.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이 파괴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를 두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과 공간 속에 한계를 지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인간에게 ‘회복’의 가능성을 두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언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지금의 방향을 뉘우치고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두셨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들의 길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즉, 그런 회복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자신이 가는 어둠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과 반대로 그런 회복의 가능성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새로이 탄생하게 되는 사람들이지요. 인류의 역사는 아직 진행중이고 이 일의 마무리가 어떻게 지워질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애초에 자연이라는 것을 만드셨고 이 모든 일 안에는 일종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선한 것은 선한 결과를 낳고 모든 악한 것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선과 악 사이에 놓인 인간

사람들은 좋은 것을 보면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 좋은 것 그 자체로 기뻐하는 사람, 그 좋은 것이 자신의 범주에 들지 않아서 시기하는 사람, 그 좋은 것 그 자체를 파괴하려고 드는 사람 등등입니다. 좋은 것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이는 이미 자신 안에 ‘좋은 것’이 존재하는 사람이며 그것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신이 이미 즐기고 있는 좋은 것을 다른 이도 나누어 받을 수 있어서 더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이 좋아지고 개선되어 나아갈 때에 결국 그 이로움이 자신에게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좋은 것이 자신에게 없어서 ‘시기’를 드러내는 이는 당연히 자신 안에 좋은 것이 형성되지 못한 사람이고 그 좋은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비뚤어진 자아상이 거기에서 ‘시기’를 끄집어내게 됩니다. 좋은 것을 파괴하려고 드는 이는 악한 존재입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성이 ‘좋음’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좋은 것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안정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기름과 물이 다른 것처럼 이 사람의 내면은 심하게 오염되어 있어서 좋은 것을 파괴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안에서 올바른 분별로 사람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닌 선한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영역이라면 얼마든지 힘을 내서 돕고 바꾸어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지닌 사랑의 한계를 벗어난 경우도 존재할 수 있으니 이때는 무척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신뢰를 두어야 합니다. 비록 ‘나’는 할 수 없지만 그분에게는 가능한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한 사람을 바꾸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것은 무슨 기계 장치처럼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능한 그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두고 그의 스스로의 변화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

어떤 기도

영자 엄마는 오늘도 성당에 갑니다. 그리고 무수한 기도말을 준비해 놓습니다. 이때다 싶어 기도를 시작할 때가 되자 영자 엄마는 자신이 준비해 온 말을 쏟아놓기 시작합니다. “하느님, 우리 남편 직장 잘 되서 성공하게 해 주시고, 우리 아들 꼭 취직하게 도와주세요. 우리 딸내미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게 해 주시고 막내는 이번에는 대학 꼭 붙게….” 그녀의 기도는 지칠 줄을 모르고 이어집니다. 원하는 것을 쏟아놓는 것이 다 끝났나 싶더니 이제는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왜 그 아줌마랑 싸우게 되었는지 아시지요? 그 아줌마의 그 못된 성격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니까요. 그리고 우리 시어머니 성격 아시잖아요. 자기 아들에게 집착하는 그 성격 말예요. 그게 보통이 넘는다는 거 주님 아시지요? 그러니 내가 그 앞에서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거기다가 우리 남편….” 이 기도 역시 한참을 이어집니다. 이제 좀 잠잠해지나 싶은 순간 그녀는 묵주를 꺼내들고 자신이 레지오에서 보고해야 할 기도를 외우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바치는 기도문의 의미나 매번 바뀌는 신비의 내용은 그저 암기된 대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이 기도의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기도가 마쳐지고 그녀는 스스로 이루어 낸 기도의 업적에 뿌듯해 하면서 성당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성당 안에는 단 한 번도 당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 당황스런 모습으로 서 계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중요] 하느님을 알기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뭔가 위대하고 거대한 분이 우리를 만드신 것 같은데 그런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생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외쳐대는 종교가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알기 힘든 분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체 안에 그분에 대해서 알기 힘든 어떤 모종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의문은 어떨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을 알기 힘든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빛을 바라보면 그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지만 우리의 눈 앞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는 이를 ‘원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태초의 상태를

(6월 3일 강론)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예수님은 음식이 되어 오셨습니다 . 말 그대로 먹을 것이 되어 오셨지요 . 우리가 무언가를 먹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 그래서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소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육체로 재생산되게 됩니다 . 예수님의 몸과 피인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바로 그 음식의 형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 그 말은 우리가 섭취하는 그분의 몸과 피가 바로 우리 자신 안에서 소화되어 우리의 몸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의 부족한 이해가 드러납니다 . 즉 , 우리는 입으로 받아 모시는 그 음식에 대한 외적인 차원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에서 우리의 이해가 멈춰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 손님이 오셨을 때에 잔과 접시를 깨끗이 닦아서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 하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요 ? 그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준비의 전부일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 그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단순히 잔과 접시 , 혹은 의자나 식탁의 청결상태 만이 아닙니다 . 그 손님을 맞이하는 우리 집안의 분위기도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 신부님이 어떤 자매님의 집에 가정 방문을 갔는데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면 당연히 첫인상이 좋을 것입니다 . 하지만 집안에 들어가서 마주하게 되는 집안 분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미묘하게 흐르는 집안 식구들 사이의 긴장관계 ,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듯한 분위기와 불쑥 튀어나오는 말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로에 대한 비난이

그만그만한 죄들

오늘 오전에도 성모당 상설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집전했습니다. 고해소는 들락거리는 사람은 많지만 사실 고백하는 죄의 내용은 다 비슷비슷한 것이 보통입니다. 부족한 외적 신앙생활을 고백하는 이(주일미사 불참, 기도생활 미흡) 말로 짓는 죄를 고백하는 이(거짓, 험담 등등) 누군가에 대한 다툼과 증오를 고백하는 이 부족한 외적 신앙생활을 고백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미적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정말 충실한 신앙생활을 해서 다른 내적 어두움을 지니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내면을 진정으로 맞대면 하고 싶지 않은 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공이라는 의무 때문에 억지로 고해소에 끌려와서 뭐라도 뱉어 놓아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소홀함을 꺼내 놓는 이들입니다. 사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이들이고 또 그것을 별로 개선시키고 싶지도 않은 이들이기에 이런 이들은 얼른 보속을 주고 잠시나마 용서의 기쁨을 체험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그렇게 싸게 받은 용서로 나가서 또다시 똑같은 상태, 즉 미적지근한 상태로 머물러 살게 될 것입니다. 말로 짓는 죄를 고백하는 이들은 사실 자신 안에 그러한 것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하고 또 허영이 있어서 곧잘 아닌 것을 그렇다고 하면서 자신을 꾸며대고 또 타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평을 많이 하는 이들입니다. 이들 역시도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의 심각성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이상 같은 일들을 다시 반복하며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자매님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판공 때문에 억지로 고해소에 들어와서 자신이 늘 하는 취미활동인 ‘험담’에 대해서 고해하긴 하지만 사실은 그때 뿐인 이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다음 의무 고해 시기까지 절대로 고해소를 찾지 않다가 또 성탄 판공이 다가오면 어쩔 수

아름다워야 마땅한 것들

아름다워야 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고 결혼도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며 자녀를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그러한 것들이 엉망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원래는 아름다워야 하는 것인데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이 엉망이라고 해서 다른 이에게도 그것을 엉망인 것으로 알리는 것이지요. 이런 이들이 저지르는 오류는 사실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강화하고 나아가서 다른 이들, 특히나 그러한 것들에 대한 체험이 없는 이들에게도 그릇된 생각을 심어주기에 이릅니다. 결국 신앙생활도 성가시고 힘든 것이 되고,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되며, 육아는 단순히 엄마의 고난과 고통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여러가지 물리적인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금전적 손해를 끼칠 수도 있고 신체적 상해를 입힐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조성하는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이야말로 다른 이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 가운데 가장 힘있고 치명적인 것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심리적이고 영적인 악한 영향력은 가만히 두었더라면 서서히 적응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결국 그들의 삶을 저주받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남을 살리는 아름다운 말들, 다른 이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수많은 표현과 말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은 어찌나 ‘파괴’를 사랑하는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 부셔버려야 속이 시원한 이들이 있습니다. 엇나간 것을 고치려는 시도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혼인이 엇나갔다면 그것은 지극한 사랑으로 고쳐 나가고 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그 그릇된 체험을 바탕으로 모든 결혼생활에 대해서 비난하고 나서는 것은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정말 치유하고 고치고 다시 일으키려는

도구 뒤에 숨어 있는 의도

심리학의 수많은 도구들은 올바른 의도로 사용된다면 충분히 자신에 대해서 새롭게 발견하고 또 다른 발전을 준비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그릇된 의도로 사용되면 그 도구 뒤에 숨어서 자신의 악한 의지를 감추는 용도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케이크을 망쳐버릴 의도를 지닌 아이에게는 아무리 아름답게 꾸민 케이크를 주더라도 그것을 망쳐버리고 더럽혀 버리는 것처럼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도구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 의도에서 실패를 하면 결국 그 도구는 그가 지닌 어둠을 실행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의도하는 영역은 바로 이 내면의 자유의지에 연계된 영역이다. 그들의 자유의 씀씀이를 올바로 바라보게 도와주고 그것을 선한 방향으로 이끄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가 하려는 일의 본질적인 의도이다. 그리고 그 ‘선한 방향’은 단순히 이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위선적인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 사람은 입으로는 아무리 좋은 것을 가르쳐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역효과를 일으킬 뿐이다. 우리는 현명해야 하지만 그 현명함은 선하게 쓰여져야 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재료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선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도전이 존재하는 셈이다. 인간에게 도구를 줄 수는 있지만 그에게서 어떻게 선함을 이끌어 낼 것인가? 우리는 선을 가르치기 위해서 선해야 하고, 충실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충실해야 한다. 희생을 가르치기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수많은 소소한 오류들을 막을 수도 있어야 한다. 아무리 선한 이라도 어둠에의 유혹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기준으로 서로 다르다고 치부될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분명한 선과 악의 움직임이 존재한다. 선한 이는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끌고 악한 이는 그 어떤 아름다움이라도 추악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를 간과하고 지나치게 ‘도구’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결국 우리가 하려는 모든 시도는 망가

우리가 마시는 물은 시원한가?

신앙을 전하면 자녀들이 천국을 간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들이 착각하는 것은 과연 그들 스스로가 가진 것이 신앙인지를 먼저 올바로 분별해 보아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자기 스스로도 신앙을 지니고 있지 않은데 자신에게 없는 신앙이 자녀들에게 전해질 리가 없지 않은가? 여기 자녀에게 성당에 가라고 닥달하는 부모를 살펴보자. 그 부모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든 자녀가 ‘성당’이라는 물리적 장소에 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일이 처리되어 그 자녀들의 천국문이 활짝 열린다는 기본적인 신뢰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조건을 바꾼다면 누구든지 성당에 가 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이야기인가? 지금껏 수많은 ‘종교인’들이 성당이건 경당이건 그 문턱을 닳듯이 드나들었지만 그들이 모두 구원받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자비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을 얻기 위해서 그 신앙을 간직하고 전수하는 단체로 다가서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당연히 그 근처도 가지 않으면서 신앙을 홀로 얻겠다고 나서는 것은 더 엉뚱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어떤 신앙을 간직하고 어떤 신앙을 전수하려고 준비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주제이다. 실컷 다가선 성당에서 따뜻한 사랑이나 환대를 받기는 커녕,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외적 직무를 떠맡아 오면 그는 숨막혀할 것이고 도망가고 싶어할 것이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하려는 것이 정말 참된 형태의 신앙인지 아니면 그 신앙을 담고 있는 틀인지 올바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을 마시기 위해서 꼭 컵에 담아 마셔야만 하는 건 아니다. 밥그릇으로 받아 먹을 수도 있고 급하면 손으로 바로 받아 먹어도 된다. 중요한 건 물을 마시는 것이지 어떤 형태의 그릇을 고르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거기다가 단순히 시원한 물을 마시려는데 엄청나게 거추장스럽고 화려하기만 한 커다란 잔을 아이에게 쥐어주면 그 아이는 잔의 무게 때문에 물을 마시기는 커녕 잔을 들고 있기만도 버거울지도 모른다.

걱정없이 사는 이들

걱정은 계획을 모르고 그 계획이 어떻게 실행되어가는지를 모를 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걱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다할 생의 계획이 없고 또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계획의 구체적인 실행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걱정하지 말라’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에 더없는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나날이 그것을 실천해 나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공술’과 ‘처세술’에서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지요. 그들은 생을 면밀히 분석한 뒤에 그 안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나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일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처세술을 가르치곤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인 관점 안에서 걱정 없이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무책임해지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전능하신 분에게 신뢰를 두고 있으니 이 현세는 그냥 흘려 버리듯이 살아버리고 영원만 줄구장창 기다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영원에 대한 참된 희망을 바탕으로 현세를 더욱 충실히 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영원에 대한 관점을 바탕으로 현세를 충실히 사는 것은 현세를 조목조목 살펴서 100퍼센트의 효율성으로 살라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말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모습 안에서 신앙 안에서의 의탁을 바탕으로 걱정없이 사는 모습은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멍청해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들도 내어주는 형태의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또 때로는 심지어 손해보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듯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서 철두철미하게 살려는 이들에게는 이런 것들은 ‘어리석음’으로 치부되는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도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부활을 사는 이들, 진정한 하느님의 힘을 신뢰의 바탕으로 삼아 현세를 적극적으로 사는 이들, 즉 사랑과 선으로 일상을

길과 목적지

목적지가 없이 걷는 걸음은 없다. 비록 한 순간의 산책이라 할지라도 그 지향하는 목적이 존재하고 또 집으로 돌아온다는 목적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 목적 없이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의 정신병력을 의심하게 된다. 즉 그가 정상적인 범주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뚜렷이 드러나는 삶의 범주 안에서는 확고한 사실이 우리의 ‘인생길’에 있어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지를 설정해 두고 살아가긴 한다. 하지만 그 목적지가 자신을 진실로 충만히 채워줄 것인지 아닌지를 올바로 살피고 걷는 사람은 없다. 이는 마치 자신이 설정한 마지막 목적지가 벼랑 끝으로 가서 추락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목적지를 올바로 직시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걸어가는 동안의 길이 편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사람과도 같다.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고 이뻐지려고 한다. 그 길의 마지막에 무엇이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려는 것인가? 정말 그 지향점을 올바로 생각을 하고 그 길을 가는 것인가? 이뻐지려고 투자했던 모든 노력이 결국 무너지고 말 허망한 길에 투자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내가 그렇게나 피하고 싶었던 자괴감을 더욱 극명히 느끼게 된다면? 이런 아주 간단한 사고 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 사람들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누가 대신 자신을 위해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듣는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나의 몫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이 발을 씻도록 허락해야 했다. 그래야 베드로도 거저 주어지는 은총의 몫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나의 목적지는 하느님이며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나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길을 간다. 그리고 내가 마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길을 소개하고 초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올바로 깨닫고 응답하는 사람의 수는 예

악에 눈이 먼 이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지혜 2,21) 억울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정말 성심껏 나아지기를 바래서 온갖 심혈을 기울인 누군가에게서 감사는 커녕 도리어 의심이 불거져 나오고 의혹의 눈초리가 다가올 때에 누구나 억울한 마음이 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깊은 묵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고 나면 그 다음 작업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해라는 것은 세상의 지식을 얻는 방식과는 조금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는 영적인 차원이 가미되는 이해이고 하느님의 지혜가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선과 악’의 영역입니다. 악의 행동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악의 움직임에 여러분이 동참하기 시작할 때에 그만큼 이해하기 쉬운 것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의인의 행동이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더 아픈 데도 덜 아픈 다른 이를 위해서 일하는 힘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공정한 ‘정의’와는 상관이 없는 영역이니까요. 세상은 저마다의 아픔을 수치화해서 비교하고 분석해서 더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선에 익숙한 영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이 더 가 닿는 곳으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악은 결정적인 내면의 오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숨겨져 있지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사랑에 반대되는 움직임입니다. 악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가장 큰 어두움을 가장 깊은 내면에 간직한 채로 외적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외적인 모든 움직임을 철저히 관리해야 합니다. 악을 실행하는 이들은 모두 눈이 먼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눈이 멀었다는 것이 세상적으로 멍청하게 행동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이미 드러난 심판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3,19) 사람들은 심판이라는 것이 마치 ‘신과 함께’라는 환타지 영화의 장면처럼 모든 일들이 끝나고 신이 그 사람을 불러다 놓고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심판은 사실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선호하는 것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통해서 숨쉬기에 물에 살고 우리는 공기를 통해서 숨쉬기에 여기에 삽니다. 이와 비슷하게 빛의 자녀들과 세상의 자녀들이 나뉘게 됩니다. 빛을 숨쉬는 이는 빛으로 다가서고 더 많은 빛을 찾지만 세상 안의 요소를 만족의 근거로 살아가는 이들은 바로 그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는 월막 피정의 집에서 면담 성사를 주었습니다. 물론 성사 내용을 말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저는 그 안에서 뚜렷이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기를 원치 않는 이는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요. 외적인 형태로는 다 같은 성사로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길을 찾고 빛을 찾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자기들이 상정한 최고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그 자리에 머무르는 이들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이 다가올 때에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을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은 우리의 오류를 드러내고 그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기 때문이지요. 상처난 부위에 손가락을 가져가면 움츠러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두 종류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 상처를 오염시키고 더 지독한 병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둠의 손길과 그 상처를 닦아내고 치유하려는 손길입니다. 사람들은 상처 부위에 급히 말아놓은 붕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열어 보이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일시적인 평안 속에서 붕대 속의 상처는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쳐줄 수 있는 분에게 맡겨야 합니

무엇을 해야 하느냐구요?

정말 필요한 것은 ‘복음화’입니다. 우리가 복음화 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고 시급한 과제입니다. 물론 그 복음화는 가장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배우기 힘들거나 어려운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너무나도 쉬웠던 예수님의 가르침, 그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 그리고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기쁨이 나오고 그 기쁨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줍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에서 다른 이들에게 신앙을 전할 능력도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의 교회는 덩치가 꽤나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 커진 덩치를 일일이 수정하고 고치려고 들다가는 모든 시간과 노력을 엉뚱한 곳에 쏟아붓게 됩니다. 우리는 핵심에 집중해야 하고 당장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 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장 가까이 있는 것, 바로 내 곁에 있어서 내가 시작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본당에 봉사자 조직을 꾸려서 성지순례를 계획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아내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나 짜증이 가득한 남편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것은 지금 당장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종류의 일들입니다. 복음을 구체적으로 사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일들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상의 일들 안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것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 복음을 올바로 가르치는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학술적인 가르침’을 심각하게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배운다는 것은 일상의 일들로 정신이 없는 가운데에 잠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삶과 말씀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의 장벽을 낮추어야 합니다. 지금 주